투란도트 그 이후의 이야기
김진미
투란도트(Turandot) 줄거리 :
옛 중국을 배경으로 얼음처럼 냉혹하고 아름다운 공주 투란도트가 자신에게 구혼하러 온 왕자들이 세 개의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면 목을 베어 죽여버린다는 포고문을 내건다. 이에 희생당한 왕자가 계속 늘어났다.
한편 타타르왕국에서 축출되어 유랑생활을 하던 달탄의 늙은 왕 티무르의 아들인 왕자 칼라프가 투란도트 공주에게 반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시녀 류와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구혼하러 와서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투란도트의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투란도트가 내는 세 가지 문제를 푼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다 죽음을 맞이했다. 투란도트가 칼라프에게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수수께끼: 그것은 어두운 밤을 가르며 무지개의 빛으로 날아다니는 환상. 모두가 갈망하는 환상. 그것은 밤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아침이 되면 죽는다.
칼라프가 대답한다. 희망! (La Sprenza)
두 번째 수수께끼: 불꽃을 닮았으나 불꽃은 아니며, 생명을 잃으면 차가워지고, 정복을 꿈꾸면 타오르고, 그 색은 석양처럼 빨갛다.
칼라프가 대답한다. 그것은 피!! (Il Sangue)
세 번째 수수께끼: 그대에게 불을 주며 그 불을 얼게 하는 얼음. 이것이 그대에게 자유를 허락하면 이것은 그대를 노예로 만들고, 이것이 그대를 노예로 인정하면 그대는 왕이 된다.
칼라프가 외친다. 투란도트!!! (Turandot)
칼라프는 세 문제의 정답을 다 맞췄다. 그러나 투란도트 공주는 결혼에 응하지 않는다. 그러자 칼라프는 이번엔 투란도트가 자기의 이름을 알아맞히면 생명을 내놓겠다고 제의한다. 투란도트는 군대를 풀어서 이름을 알려고 하는데 그때 류가 잡혀 온다. 류는 심한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고 사랑을 위해 단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칼라프는 투란도트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호소하고 이에 공주의 차가운 마음이 녹아 눈물을 흘린다.
날이 밝고 왕자는 공주에게 자신이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라고 밝힌다. 황제가 나타나자 공주는 '그의 이름은 나의 사랑(Amor)'이라고 선언하고 결혼에 기꺼이 응한다.
이 이야기는 두 사람의 결혼 이후의 이야기이다.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궁전)
“내 사랑 칼라프, 당신은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한테 구혼할 생각을 했죠?”
“나는 반드시 맞추리라 생각했거든. 투란도트.”
“하지만 그전에 죽어갔던 왕자들도 다 맞추리라 생각했었죠. 하지만 다 틀렸어요. 그리고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죠. 덕분에 나만 악녀가 되고. 나는 더 이상은 구혼자가 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는데, 점점 더 구혼자가 늘어나고 나는 점점 더 악녀로 소문이 퍼져갔어요.”
“그 사람들은 당신과 인연이 아니기 때문이지. 인연이 아니니까, 맞출 수도 없었고 당신을 얻을 수도 없었지. 그건 당연한 일이오.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이왕 이리될 줄 알았으면, 당신이 좀 더 빨리 왔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희생자가 줄었을 텐데.”
“당신이 이렇게 마음씨가 곱고 섬세한 사람인 줄, 다른 사람들도 알면 좋으련만, 이 역시 나만 아는 건가? 하하하.”
“웃을 일이 아니에요. 당신이 좀 빨리 왔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왜 이리 심각하시오? 뭔가 걸리는 일이라도 있소?”
“실은 얼마 전부터 계속 꿈에 죽어갔던 왕자들이 보여요. 나를 원망하더군요.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원망은 하지 않았었는데, 보이기는 했어도.”
“뭐라고? 죽은 왕자들이 당신을 괴롭힌단 말이오? 당신 그래서 안색이 파리한 거였군. 신경이 쓰였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것이군.”
“네, 당신이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나와서 나를 노려봐요. 그리고 원망하고. 당신까지 저주해요. 걱정이에요. 당신에게까지 피해가 갈까 봐.”
“이럴 수가. 내가 당신 꿈속에 들어가서 그놈들을 다 물리쳐줄 수도 없고. 곤란한데. 이를 어쩌지?”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요. 제 잘못이죠. 나는 다만 결혼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런 공고를 낸 것뿐인데, 하도 구혼자가 많아서, 일일이 거절하기도 괴롭고, 그래서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쓴 거였어요. 하지만 오히려 소문이 나면 날수록 구혼자는 더 늘어났죠. 당신도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소문이 천리만리로 퍼진 것은 확실하죠.”
“그렇소. 투란도트. 나도 당신 소문을 멀리서 들었소. 그래서 오게 되었지. 그러니까, 내가 그 소문을 들으려고 그 앞의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던 거요.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그놈들은 내 꿈에 나와서 날 원망할 것이지. 왜 당신한테 화풀이하는 거요?”
“원혼을 달래는 ‘굿’이라도 해야 할까요?”
“우리 타타르에서는 그런 풍습이 없소. 우리는 무슬림이니까. 이곳에서는 ‘굿’이란 것을 하는 건가?”
“원래 중국 한족에는 그런 풍습이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칭기스칸의 후예이고, 몽골족과 동북쪽 고려와 그 영매들이 ‘굿’을 해요. 용하고.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유명한 영매를 부를까 싶어요.”
“당신이 원하면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이 편하게 잘 수 있다면 된 것 아니요? 내 신경은 쓸 필요 없소. 우리 종족도 물의 신, 숲의 신, 가택의 신과 같은 민간신앙에 의존하는 자들이 있으니까.”
“그럼, 타타르에서도 유능한 영매를 찾아보죠. 북방 몽골, 동북방 고려, 하여튼 다 찾아와서 굿을 하든, 기도하든, 효험이 있는 방법이 있겠죠. 이렇게 잠을 못 자다가는 정말로 큰일 날 것 같아요.”
(투란도트의 방)
“공주마마. 고려에서 영매가 왔습니다.”
“그래? 제일 먼 곳에서 제일 빨리 왔구나. 잘 모시게. 다른 영매들이 도착하거든 시작하도록 하지.”
“마마, 아직도 제대로 못 주무셔서 걱정인데, 그냥 먼저 고려 영매가 굿을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런가? 하긴, 고려 영매의 굿이 효험이 있으면 다른 영매를 굳이 부를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러면 고려 영매에게 준비할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준비가 되는 대로 굿을 하라고 하겠나이다.”
“그리하도록 하여라.”
(궁의 내관들과 영매의 대화)
“진혼굿에는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먼저 다 수습을 해야 합니다. 원혼이 다 몇 명이죠?”
“그게, 몇 명이더라. 하도 많아서. 잠시 기다려보시게. 알아보고 알려 주겠네.”
“그 원혼이 다 이곳 처형장에서 죽은 건가요?”
“그렇소. 다 여기서 목이 잘렸지.”
“그렇다면 찾아다닐 필요는 없겠군요. 다 여기 모여 있을 테니. 그리고 밤마다 공주마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공주님을 협박한다고요?”
“그러게나 말이야. 공주님은 그냥 문제 풀지 말고 돌아가라고 하셨지. 아니 폐하께서 그리하셨지. 그런데 부득부득 자기들이 문제를 풀겠다고 해놓고, 죽었으면서, 왜 그것을 공주마마께 화풀이하는 건지.”
“이 종이에 적힌 그대로 상을 차리십시오. 제물의 종류와 차리는 법을 그려왔습니다. 원혼이 많은 듯하니, 제상에 제물도 이왕이면 많이 차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데려온 악사들도 연주해야 하니까, 준비를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지. 또 뭔가 준비할 것이 있는가?”
“공주께서 굿에 참석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마마께서 참석하시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공주께 이미 원귀가 붙었을지도 모릅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많이 죽었다면서요?”
“그렇긴 하지. 알겠네. 공주마마께 전해 드리겠네.”
(투란도트의 방)
“공주마마, 고려 무당이 아, 글쎄, 공주마마께 원귀가 붙었을지도 모른다고 굿에 참석하라십니다.”
“그래? 하긴, 정말 그런 것 같아. 알았어. 참석하도록 하지. 날짜와 시간은?”
“내일 모래가 길일이라고 모래, 정오에 한답니다. 그 전에 공주께서 목욕재계하시고 오시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하지.”
“투란도트, 당신 몸에 원귀가 붙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그렇다면 우리 침실에 그 왕자들이 같이 지내고 있다는 것 아니오?”
“그러게요. 끔찍해요. 침실에 같이 있다니. 소름 끼쳐요.”
“용서 못 해. 감히 어디 원귀 따위가 붙어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단 말인가?”
“이번 고구려 영매가 능력이 있어서 부디 원귀들을 다 쫓아내서 다시는 이곳에 얼씬하지 못하게 해주면 좋겠어요.”
“반드시 그리해야지. 그리고 곧 몽골에서도 타타르에서도 영매들이 올 것이오. 그중에서 누구라도 이 잡귀들을 다 쫓아내겠지. 이번에 바로 성공하면 더 좋고. 각국에서 온 영매들이 원귀들을 쫓지 못하면 무슬림식으로 알라께 기도를 하도록 하겠소. 그때는 투란도트 당신이 무슬림으로 개종을 해야 하오.”
“그럴 수가? 난 당신이 독실한 무슬림인 것은 상관없지만, 나까지 무슬림이 되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하루에 몇 번씩, 기도해야 하고, 그리고 술도 못 마시고, 나는 가끔 술을 마시거든요. 아버지 폐하와 함께.”
“그렇지. 무슬림은 술을 마시지 못해. 그리고 음식, 고기도 할랄 처리가 되어야 하지. 여기서는 그 방식을 따를 수가 없어서 내심 괴롭다오.”
“그런 게 있어요? 하긴, 당신 돼지고기도 안 먹더군요. 이곳 중국에선 돼지고기가 주식인데, 물론 우리는 몽골의 후예라서 양고기를 더 많이 먹긴 하지만, 우리도 점차 한족화 되어서 돼지고기를 많이 먹어요.”
“그것도 괴롭다오. 문화가 다르고 종교가 다른 것은 큰 희생이 따르는 법이오.”
“하지만 당신네 타타르에서 당신은 망한 왕의 왕자인데, 돌아갈 곳도 없지 않나요? 당신이 이번 기회에 개종하는 건 어때요? 언제까지나 할랄도 안 된 고기를 먹으면서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개종해서 마음껏 고기를 먹고 술도 마셔보고 하는 것이 사는 데 편할 것 같은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오.”
“나도 당신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에요. 당신이 편할 대로 하세요. 하지만 나는 무슬림이 되고 싶진 않아요. 무슬림은 부인도 여럿 두던데.”
“그건 중국도 마찬가지 아니오. 바로 당신 아버지인 황제도 대체 부인이 몇이오?”
“그래도 황후는 단 한 명이죠. 무슬림 왕족들처럼 왕비가 여러 명이지는 않아요. 후궁들은 많지만. 칼라프, 당신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시면 후궁을 몇이나 두실 건가요?”
“난 당신 외에는 여자가 필요하지 않소.”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종교적인 이유도 있소.”
“그건 또 무슨?”
“우리 무슬림은 무슬림 아닌 여자와 관계를 하지 못하오.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지.”
“잠깐, 칼라프. 그렇다면 나도 정식적인 부인이 아니라는 건가요? 지금?”
“당신이 무슬림이 아니라서, 무슬림 율법으로는 정식 부인은 아닌 건 확실하지.”
“아니, 그게 또 무슨 소리예요? 그럼 나는 뭔가요? 나는 단지 시첩인 것인가요?”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단지 당신이 무슬림이 아니라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이오.”
“더더욱 무슬림이 되고 싶지 않네요.”
“투란도트. 왜 그러시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사실은 변하지 않소.”
“그래도 이런 모욕은 처음이에요. 어떻게 나를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죠?”
“결심했소. 나는 당신 외에는 어떤 여자도 맞아들이지 않을 생각이오.”
“만약에 내가 무슬림이 되고 또 다른 무슬림 여자들이 있다면 얼마든지 왕자비가 늘어날 수 있겠네요.”
“그건 또 그럴 수도 있지. 왕자비를 더 많이 둘 수 있지만, 당신을 봐서 안 그러겠소.”
“정말이지. 나는 유일한 왕자비여야 해요. 그리고 다른 후궁도 용서 못 해요.”
“중국에서 왕자들도 왕자비는 하나라도 첩은 많이 거느리던데.”
“나는 그것도 용서 못 해요. 왕자비도 나뿐이고, 첩도 용서 안 할 거예요. 혹시 다른 무슬림 나라에서 예쁜 여자들이 오더라도 내가 다 쫓아낼 거예요.”
“투란도트, 역시 당신은 대단해.”
“나를 유일한 여자로 삼을 사람이 아니었다면, 당신과 결혼 안 했어요. 당신도 처형했을 거예요.”
“어련하겠소. 역시 당신은 투란도트요. 목숨을 걸만한 여자. 질투심도 대단하군. 참, 투란도트, 굿에는 나도 참석하겠소. 당신이 걱정되어서. 그 잡놈들이 당신에게서 제대로 떨어지도록 내가 옆에서 두 눈 부릅뜨고 말하겠소. 당신은 내 것이라고, 너희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하지.”
(궁의 뜰)
“공주마마. 오셨습니까?”
“아, 자네가 고려에서 온 영매인가? 반갑네. 잘 부탁하네.”
“그리고, 이분은?”
“칼라프 왕자요. 투란도트의 유일한 남편.”
“아? 왕자님? 죄송합니다만 왕자님도 굿에 참석하셔야겠습니다.”
“그건 왜? 물론. 참석하러 왔지. 투란도트에게 붙은 잡귀들이 다 쫓겨나가는 걸 봐야 하니까.”
“그것이, 사실은 왕자님께도 원귀가 붙어있습니다. 쫓아야 합니다.”
“아니, 그게 사실인가? 대체 어떤 잡귀가 내게 붙었단 말인가? 역시 죽은 여러 왕자 중 하나인가?”
“그게 아니라 여자의 혼령이 붙었습니다. 젊은 여자인데, 시녀로 보입니다. 이름이?”
“설마, 류?”
“아, 물어보겠습니다. 네네. 그렇습니다. 류라고 하는 시녀입니다.”
“맙소사. 그 애는 왜 내게 붙었지?”
“이 시녀가 한이 맺혀서 죽었나요?”
“나를 구하느라 자살했소.”
“역시. 자살자도 한 맺힌 영혼이거든요. 그리고 강렬하게 사랑했거나, 강렬하게 증오했다면 원귀로 남아서 붙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인가요?”
“그 애는 날 사랑했소. 나를 위해서 대신 죽은 거요. 가엾은 아이지.”
“그렇군요. 역시 떼어내야 합니다.”
“당연하지. 고려 영매. 부탁이니 내게 붙은 왕자 혼령과 함께 그 류라는 아이도 쫓아줘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주님. 그러려고 제가 그 먼 고려에서 이곳까지 왔는걸요. 저는 원귀, 잡귀 쫓는 전문 무당이고, 그리고 진혼굿의 능력자입니다. 반드시 쫓아내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고려 영매. 일만 잘되면 후하게 사례하리다.”
(굿이 한창 진행 중)
“먼저 공주님께 붙은 수많은 귀신아, 당장 여기서 떠나거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 구천에서 영원히 헤매게 될 것이다. 다시는 인간으로, 아니 짐승으로도 환생할 수 없다. 부디 원한을 풀고 마음 편히 승천하시게.”
“..................”
“.................”
“...................”
“..................”
“.................”
“..................”
“.................”
“...................”
“..................”
“.................”
“..................”
“.................”
“...................”
“..................”
“.................”
“..................”
“.................”
“...................”
“..................”
“.................”
“대체 뭐라는 건가?”
“네, 왕자님. 이 왕자들의 원혼들이 말하길, 투란도트는 우리를 이렇게 죽여놓고 어떻게 너는 다른 남자랑 결혼할 수가 있냐고, 원통하다고, 너도 역시 처녀 귀신으로 죽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런, 악독한 잡귀들을 보았나? 용서할 수 없다. 이놈들을 위대하신 알라께서 천벌을 내리실 것이야. 그래, 고려 영매. 이놈들을 쫓아낼 방도가 있나?”
“원혼들을 달래서 승천시켜야 합니다. 우선 진혼굿을 해보겠습니다. 자자. 악사들, 연주를 시작하시게.”
(굿의 마무리 단계)
“공주님. 죽은 왕자들에게 한을 풀 수 있도록 한마디 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런가? 음. 왕자님들. 나를 그리 좋게 봐주고 아껴주려 했던 마음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당신들이 원해서 일어난 일인 만큼. 부디 원한을 풀고 승천하길 바랍니다. 제가 바라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를 조금이라도 아꼈다면 제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저는 칼라프 왕자를 사랑하고 또 그의 유일한 여자입니다. 왕자님들도 다음 생엔 꼭 원하는 아름답고 착한 부인을 얻기 바랍니다. 이대로 원귀로 떠돌다가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부디 한을 풀고 다시 환생하시길 바랍니다.”
“굿이 참 오래 걸리는군. 투란도트. 이런 것은 처음 보오.”
“칼라프. 나도 굿은 처음 해요. 할 일이 없었거든요. 전쟁은 할 뻔했지만, 왕자들이 죽어서. 여러 나라에서 선전포고했어요.”
“그랬을 테지. 나도 망국의 왕자가 아니었고, 아버지가 통치하셨다면, 그리고 내가 죽었다면, 선전포고하셨을 테지.”
“자자. 이제 내게 붙은 원귀들은 다 쫓았다고 하니. 이제 당신 차례예요. 어서 그 류라는 아이를 보내세요. 달래든 어르든, 협박하든. 하여튼 찝찝해요.”
“알겠소. 자, 류,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충성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네가 승천 못 하고 내게 붙어있다면 나는 몹시 괴로울 것이다.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란다. 어서 승천하고 환생해서 다음엔 행복하게 살 거라. 부탁이다. 류.”
“왕자님, 류가 울면서 절을 하고 있습니다. 곧 승천할 것입니다.”
“그래. 다행이군.”
“떠났습니다. 죽은 왕자들보다는 확실히 순한 영혼이군요. 바로 환생할 것 같습니다.”
(침궁)
“그래, 투란도트, 고려 영매의 굿이 효험이 좀 있소?”
“지금까지는 꿈에 다른 왕자들이 나타나진 않고 있어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신은 어때요?”
“나? 설마 류가 아직도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혹시 모르니까요. 그 애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상이 다 아는데, 쉽게 떠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시오. 내 꿈에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으니까, 나는 그 애가 옆에 붙어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소.”
“얼마 만에 꿀잠인지. 정말 숙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어요.”
“정말 다행이오. 이제 혈색도 회복되었고, 건강해 보이오. 그럼 다른 영매를 부를 필요는 없겠군. 안 그렇소? 헛수고하지 않도록 미리 보내도록 하시오.”
“그렇게 말했는데, 이미 출발해서 거의 도착했다고 하니 그냥 얼굴만 보여주고 상황을 점검받기로 했어요.”
“이번엔 또 누구요?”
“북방 시베리아 쪽에서 온 영매인데, 용하다고 소문이 나서, 어렵게 모셔왔다고 해요. 내일이면 도착한다고 하네요.”
“나도 그냥 같이 보기로 하지.”
“그게 좋겠어요. 확실하게 마무리 짓죠.”
(궁의 뜰)
“이번 영매는 할머니로군.”
“쉿, 조용히 하세요.”
“공주? 왕자? 아....두 분 다 다 죽음의 그늘에서 겨우 벗어나신 것 같습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두 분 다 황천으로 가실 뻔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악령들이 오랫동안 붙어있었습니다. 그 영향이 아직도 느껴집니다. 특히 공주님은 위험하셨습니다. 오랫동안 괴로우셨을 텐데.”
“그래요. 왕자의 첫 처형이 있을 때부터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악몽을 꾸기 시작했죠. 그게 오랫동안 지속했는데, 최근 결혼하고 부쩍 심해졌어요. 악몽도 더 심해지고.”
“다행히 고려 영매가 악귀들은 다 쫓은 듯합니다. 아직 다시 붙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왕자님은 슬픔이 가득한 영이 있다가 떠났군요.”
“결국, 지금은 괜찮은 거지? 시베리아 영매?”
“네, 왕자님. 다행입니다. 하지만 악령은 다시 올 수 있으니 주변을 정화하고 다시는 얼씬하지 못하도록 방침을 하겠습니다. 궁궐 전체를 정화하지요. 그리고 두 분 침실과 옥체에도 결계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뜻대로 하시오. 영매. 투란도트를 특히 신경 써 주시오. 이 사람은 오랫동안 고통받았으니까.”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주님은 거의 산 사람이 아니셨습니다. 겨우 숨만 붙어있으셨던 겁니다. 왕자님이 공주님을 살리셨습니다. 은인이십니다.”
“그럴 수가? 칼라프. 나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정말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군요. 이렇게 기쁠 수가.”
“내가 당신을 살렸다니. 더없이 기쁜 일인데. 영매가 참 듣기 좋은 말을 하는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왕자님은 공주님을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살리셨습니다. 천생연분입니다. 단 공주님의 기가 그동안 많이 약해지셨으니까 앞으로도 더 각별하게 신경 쓰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잘 때 더 위험하니까요. 항상 같이 주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거야말로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군. 알겠네. 밤새 잘 지키도록 하지.”
(침궁)
“시베리아 영매도 꽤 하는데. 침실과 궁전 전체에 결계를 치고 당신과 나에게도 보호 결계를 쳐주지 않았소? 이것도 효과가 있는 것 같소. 적어도 내 기분이 그래.”
“저도 꽤, 안심돼요. 둘 다 잘 부른 것 같아요. 명성이 헛소문은 아닌 것 같아요.”
“이제 악령도 다 쫓았고, 건강도 회복되어가니 슬슬 2세를 봐야 하지 않소?”
“네. 가장 중요한 일이죠. 결계를 쳤으니 안심이 돼요.”
(저승)
“자자. 왕자님들, 모두 집합하셨죠? 이곳은 다음 환생자를 거르는 곳입니다. 여기 계신 왕자님들은 지금까지 악령으로 사람에게 붙어있다가 막 들어오신 분들이라, 정화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정화가 끝나면 선업(善業) 점수에 따라 환생의 신분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래도 악령으로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고 한이 있었던 점도 참작할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인간으로 환생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참, 이번의 유일한 여자 혼령은 시녀출신인가? 생전에 착하게 살다가 희생하였는데, 그래도 자살도 큰 죄이기 때문에, 반드시 정화과정이 필요하다네. 남을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었다면, 자살자는 바로 축생계로 떨어지지. 개나 고양이로 강등된다는 말이야. 하지만 자네는 정화과정이 끝나면 바로 인간으로 환생시켜 주도록 하지. 다음엔 자살하지 말게나.”
“모두, 염라대왕께 인사드리십시오.”
“염라대왕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여자 혼령, 이름이 류였던가? 말해 보게.”
“저 다음에 인간으로 태어나면 어떤 신분으로 환생하게 되나요?”
“정화과정이 끝나면, 아마 자네는 남을 위해 큰 희생을 했기에 높은 신분이 가능할 걸세. 적어도 시녀는 아니야. 중산층 이상은 될 거야. 딱히 되고 싶은 사람이나 장소가 있나?”
“네, 저는 다시 태어나도 왕자님을 지켜드리고 싶어요.”
“그건 곤란해. 왕자는 투란도트 공주와 결혼해서 잘살고 있는데, 자네가 다시 끼어들면 둘 다 불편할 거야. 특히 투란도트가 싫어할 텐데.”
“시녀나 신하가 아니라도 좋아요. 가까이서 모시고 싶어요.”
“가까이서 모시는 것이 불편한 것이라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꼭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개나 고양이라도. 곁에 있게만 해주세요.”
“자네는 지금보다 더 높은 신분으로 환생할 수 있는데, 굳이 동물로 태어나고 싶은 건가?”
“네, 신분 높은 사람보다 그분 곁에서 개나 고양이가 더 나아요.”
“그 정도도 투란도트가 용서할까? 투란도트도 꽤 불쌍한 여인이거든.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가 않아.”
“저도 공주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공주님께도 충성할 거예요. 믿어주세요. 두 분께 다 충성하겠어요.”
(염라대왕의 고민)
“염라대왕님. 류도 딱한 여인입니다. 투란도트도 딱한 여인이지만, 사람도 아니고 개나 고양이를 원하는데 그 정도는 들어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넌 좀 가만히 있어라. 그래. 지금 투란도트와 칼라프는 어떤가?”
“이 악령이었던 왕자들이 다 여기에 와서 둘이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곧 아기도 태어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투란도트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건강이 나빠서 수태를 못 했거든요.”
“다행이군. 아들을 생산하겠지?”
“아마도요. 훌륭한 왕손을 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투란도트의 아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말을 탈 것인데. 좋은 생각이 났다. 류. 너는 몇 년 동안 정화를 하다가 칼라프와 투란도트가 아들을 낳아 자라면 그 아들의 말이 되어 주는 것은 어떠냐? 그는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평생 전장을 누비고 다닐 명마가 필요하지.”
“칼라프 왕자의 말이 아니라 칼라프 왕자의 아드님의 말이 되라고요?”
“그편이 너에게 더 좋을 것이다. 너도 보람도 되고. 그리고 네가 말로 태어나면 지금까지의 과거는 다 잊게 되느니라. 칼라프 아들의 말이 되어서 그의 아들을 지켜주는 것이 어떠냐?”
“그분을 지키다 죽었으니 그분의 아드님도 제가 지켜드려야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냐. 그렇게 해주마. 자자. 다음. 왕자들 보아라. 너희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여인 하나에 목숨을 건 불쌍한 영혼들이지. 그래. 어떠냐? 또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으냐?”
“물론입니다. 우리가 왜 하찮은 동물로 태어나길 바라겠습니까? 사람으로도 제대로 못 살고 죽은 것이 원통해 죽겠습니다.”
“너희들은 단지 투란도트의 외모를 사랑한 것이냐? 아니면 아무도 건들지 못한 희귀품을 독점하겠다는 우월감, 독점욕 때문인 것이냐? 그런 것들은 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문제를 풀지 못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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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칼라프는 말이지. 진정으로 투란도트를 사랑했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있었어. 그리고 자신과 그녀의 목숨을 구했지. 너희들과는 비교가 안 돼.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악령이 되어서 그녀를 괴롭히지도 않아. 이 나쁜 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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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의 행동을 봐서는 인간으로 환생시켜 줄 명분이 부족한데. 여기서 오랫동안 정화과정을 거칠 것이냐? 아니면 류처럼 동물로 태어나고 싶으냐?”
“우리는 동물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아주 오래 정화과정이 필요한데, 악령의 정화 기간은 원래 긴 데다가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특히 더 오래 걸리지. 아마 투란도트가 천수를 누리다가 승천한 뒤에나 태어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너희들은 그녀를 다시 못살게 굴 수 있어서, 아주 멀리, 아니면 그녀가 세상에 없을 때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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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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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 보게. 묵묵부답이군. 내 뜻을 거역하고 싶으냐?”
“투란도트를 괴롭히고 싶습니다.”
“속 좁은 놈들. 그래서 너희들은 안되는 거야. 절대 문제를 풀 수 없었을 것이다. 너희들에게 있어 투란도트는 이런 거야. 단순히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희귀보물을 소유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리고 진짜 임자가 나타나자 배가 아픈 것이고, 자신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뉘우치기보다는 남 잘되는 것을 시기, 질투하는 놈들이지. 그리고 칼라프를 저주한 게 아니라 투란도트를 저주했어. 그것도 죄질이 나빠. 안 되겠다. 너희들은 인간이 될 자격이 없어. 축생계로 태어나서 고생 좀 하다가 자신을 뉘우치게 되면 그때 다시 환생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지.”
(궁의 해산실)
“왕손이십니다.”
“투란도트, 수고했소. 정말 잘생긴 아들이군. 날 닮았어.”
“다행입니다. 왕손을 낳아서. 공주일까 걱정했습니다.”
“별걱정을. 공주면 다음에 또 왕손을 낳으면 되지. 하나만 낳을 작정이었소?”
“그게. 제가 그리 튼튼한 것 같지가 않아서요. 물론 많이 낳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앞일은 장담할 수 없지요.”
“피곤할 테니 이만 쉬시오. 얼른 회복하시오. 공주.”
“네.”
(투란도트의 방)
“투란도트야.”
“아버지. 오셨군요.”
“그럼.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가만있을 수 있겠느냐?”
“그래도 단지 제 아들만 보러오신 건 아니시겠죠? 아바마마가 어떤 분이신데?”
“그래. 너 혼인하고 따로 궁전을 지어 살림을 내줬지. 그건 당연한 거야. 내 궁에서 같이 살 생각이었니?”
“아뇨. 오라버니도 계신 데다, 혼인했으니 독립해야죠.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실은, 투란도트, 너 때문에 죽은 왕자들의 나라들이 서로 작당을 하고 우리나라로 쳐들어올 것 같구나. 나라가 위태롭다.”
“이럴 수가. 제가 걱정하던 일이 터지겠네요. 하필 이럴 때.”
“그래. 늘 선전포고를 했어도 잠잠했었는데, 네가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더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자기 자식들을 다 죽여놓고 너는 결혼에 아들까지 낳았다고 분통이 터진 모양이다.”
“제가 죄 많은 여인이군요. 그래. 오라버니는 뭐라고 하세요?”
“뭐라고 하긴? 전쟁 나면 같이 전쟁한다고 하지.”
“피할 수는 없는 건가요? 전쟁이 나면 칼라프도 출전하겠죠?”
“그게, 칼라프가 제일 걱정이야. 칼라프를 제일 먼저 죽이고 싶을 거야. 칼라프가 부강한 나라의 왕자도 아니고, 쫓겨난 왕의 왕자니까 걸릴 것이 하나도 없지.”
“말도 안 돼. 아버지. 절 생과부로, 그리고 아버지 손자를 아비도 없는 불쌍한 아이로 자라게 하실 것은 아니죠? 이 전쟁 막을 방법은 없나요?”
“그래. 생각을 좀 해보자. 나도 나이가 들었고, 기력도 쇠잔해서 출전하기 어렵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이겨도 좋을 게 없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황폐해지지. 네 오라비는 피가 끓어서 한바탕 날뛰고 싶은 모양이다만. 나는 전쟁을 바라지 않아.”
“물론이죠. 전쟁해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요? 이길 확률은 있나요? 연합국을 감당할 수는 있고?”
(저승)
“이런, 결국 전쟁이 나겠구나.”
“염라대왕님. 투란도트는 어떻게 될까요? 이제 막 아들을 낳았는데, 아직 몸도 제대로 못 풀었어요.”
“칼라프도 출전하겠군.”
“제일 먼저 나가겠죠. 저 때문에 벌어질 전쟁인데.”
“그러게. 이러다가 칼라프까지 여기 오지는 않겠지?”
(달려온 류)
“잠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류! 넌 여기 웬일이냐? 정화 중인 영혼이 함부로 들락날락하면 아니 된다.”
“전쟁이 난다고요? 그리고 칼라프 왕자가 위험하고?”
“아직 안 났어. 여기 온 왕자들의 아비들이 작당을 하고 연합으로 투란도트의 나라를 치려고 하는 거야. 연합국이니 전력이 막강하지. 아무래도 불리한 전쟁이야. 칼라프가 제일 위험하다. 다들 칼라프를 죽이려고 들 테니 말이야.”
“염라대왕님, 칼라프의 아드님이 자라는 걸 기다릴 수 없어요. 지금 당장 칼라프 왕자의 말로 태어나야겠어요. 제가 왕자님을 지켜드려야 해요.”
“네가 칼라프의 말이 되는 것은 그렇다 쳐도, 말이 된다고 칼라프의 목숨을 지키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그래도 다른 말보다는 나을 거예요.”
“정말 못 말리겠구나. 안 되겠다. 투란도트 때문에 죽은 왕자들을 다 소집해라.”
“네. 대왕마마.”
(죽은 왕자들의 혼령과 염라대왕)
“너희들은 들어라. 너희들이 죽어서 아직 죄도 뉘우치지도 않았는데, 너희 아비들이 너희들의 죄를 더 무겁게 하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희들의 아비들이 작당을 해서 연합국으로 투란도트의 나라를 침략하려고 한다. 그리고 칼라프를 죽이려고 하지. 투란도트까지 쌍으로.”
“감사합니다. 아버지.”
“역시나, 그 아비들에 그 아들들이군. 절대 뉘우치는 법이 없구나. 괘씸한 놈들 같으니라고. 보기 싫다. 저놈들을 당장 지옥으로 보내라. 정화 수련도 소용이 없구나.”
“예? 정화 수련 중인 놈들을 지옥으로 보내라고요?”
“불지옥에서 정화해도 정신을 차릴까 말까 한 놈들이야. 그리고 그 지옥 불 수련 과정을 전부 저놈들 아비들에게 꿈으로 전송하도록 해라.”
“아? 알겠습니다. 옳으신 판단이십니다.
(지옥 불에서 수련 중인 왕자들의 고통스러운 장면).
“아아악.”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악몽을 꾸었소.”
“무슨?”
“우리 아들이 억울하게 죽은 것도 서러운데, 지금 지옥 불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소. 너무 생생해. 내가 타 죽는 것보다 더 괴롭군.”
“곧 전쟁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 꿈을 꾸신 것 같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이런 불길한 꿈을 꾸다니. 기분이 언짢아.”
“저도요. 마음이 심란합니다. 꼭 이 전쟁을 해야 합니까?”
“아니, 당신은 아들이 그리 죽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그년은 결혼해서 아들까지 낳고 산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소?”
“투란도트 공주가 우리 아들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아들이 무모한 도전을 한 것도 사실이지요. 다른 나라 왕자들도 그렇고. 왜 그리 무모했는지 저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였을까요?”
“절세미인이긴 하다던데, 그래도 성질이 그렇게 지독해서야, 평생 노처녀로 살다 죽어야 했는데, 어찌 그 문제를 푼 놈이 나타날 줄이야. 그런 폐위된 왕의 아들 따위에게 시집을 가다니, 그것도 괘씸하오.”
“그 왕자가 인연이었겠지요. 문제를 풀었다잖아요. 그리고 그 왕자는 문제를 풀었음에도 투란도트 공주가 결혼을 거부하자, 자기 목숨을 걸고 이름을 맞추라고 했답디다. 이름을 맞추면 자기 목을 치라고 했다죠.”
“미친놈 같으니.”
“그런데 공주가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심지어 그 왕자의 시녀를 죽이고도 이름을 못 맞췄다고 해요. 그런데도 그 왕자는 공주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이름을 밝혔대요. 죽이라고. 투란도트의 사랑을 못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거죠. 대단한 젊은이예요.”
“그랬는데, 어떻게 살아서 결혼했지?”
“여보, 당신은 모르는군요. 투란도트가 감동해서 마음의 문을 연 거죠. 그래서 결혼하게 됐고요. 그런데 최근까지 우리 아들과 다른 왕자들의 영혼이 투란도트에게 저주를 하고 괴롭혔대요. 그래서 영매들이 굿을 해서 왕자들의 원혼을 쫓고 진혼제까지 치렀다고 해요.”
“아니, 왕비, 당신은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있소?”
“나도 내 아들과 관련된 여자의 일에 관심이 있으니까요. 나도 어미이지만 투란도트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아들과 다른 왕자들이 속이 좁은 거죠. 그리고 그 왕자들의 아버지들도 마찬가지고. 이런 일로 연합해서 전쟁까지 하다니, 누가 봐도 비겁한 처사에요.”
“왕비, 말이 지나치시오.”
“아니. 그렇지 않아요. 연합국이 한 나라를 일방적으로 치는 것은 비겁한 일이에요. 그리고 전쟁의 명분도 옳지 않고. 그래서 하늘에서 벌을 주는 거예요. 우리 아들과 다른 왕자들도 그 벌을 받는 거라고요. 당신은 우리 아들이 지옥 불에서 고통을 받는데도 이 전쟁을 하고 싶으세요?”
“으음, 그건 말이지. 그 꿈이 너무 생생해서 거부하기가 힘들군. 연합국의 왕들과 상의를 해 봐야겠소.”
“그렇게 하세요. 우리는 이 전쟁에서 빠져요. 적어도 우리 아들이 지옥 불에서 고통받는 것은 막아야 해요.”
“그리하리다. 우리는 빠지겠다고 하고 오겠소.”
(각국 왕들의 모임)
“아, 우리나라는 이번 전쟁에서 빠질까 하오.”
“그게 무슨 말이오? 모두 합의된 전쟁이 아니오?”
“사실은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말이지. 우리 아들이 지옥 불에서 고통을 받는데, 전쟁을 앞두고 찜찜해서 그러니 아무쪼록 이해해 주시오.”
“큰 전쟁을 앞두고 꿈자리 타령을 하다니, 나는 뭐 꿈 안 꾼 줄 아시오?”
“아니, 그쪽도 악몽을 꾸었소?”
“실은 나도 우리 아들이 지옥 불에서 고통받는 꿈을 꾸었소.”
“실은 나도 그렇소.”
“아니? 다들? 모두 아들이 지옥 불에서 고통받는 꿈을 꾼 왕들은 손을 들어 보시오.”
(모든 왕이 거수함.)
“이런. 낭패가 있나.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소. 다들 기분이 어땠소?”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전쟁을 앞두고 길몽을 꿔도 긴장되는 판에. 그런 꿈을 꾸고 나니, 영, 찝찝하지. 아들 복수를 위한 전쟁인데, 정작 아들이 그런 상황이면 전쟁할 마음이 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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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명분이 아들의 복수 아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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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들들이 모두 지옥 불에서 벌을 받고 있다. 하. 참. 이런 일이. 신께서는 이 전쟁을 바라시지 않는 것 같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전쟁의 명분이 옳지 않다고 계시를 내리시는 것이오.”
“나도 찜찜하오. 우리 아들이 그러고 있다니.”
“그럼 어떡해야 하는 거요? 이 전쟁? 그만둬야 하오?”
“의기양양하게 연합국이 단체로 선전포고를 했는데, 지금에 와서 전쟁 안 한다고 하면 얼마나 우습겠소?”
“뭔가 체면 깎이지 않게 그만둘 방법이 없을까?”
“그렇다는 것은 역시 전쟁은 안 하겠다는 말씀이시오?”
“내 아들이 그러고 있는데, 하고 싶겠소? 아들 원한을 풀고자 시작한 일인데, 정작 우리 아들들이 그 꼴을 당하고 있는데도 말이오?”
“이왕 이렇게 된 거 멋있게 용서해 주는 것처럼 하고 끝냅시다. 투란도트의 아비도 이번에 꽤 긴장했을 거요. 우리만큼은 아니라도 죽음의 문턱까지 맛보게 했으니 이 정도로 끝냅시다. 우리도 할 만큼 했소. 우리가 단체로 용서하는 모양으로 끝내면 그쪽에서도 크게 감사하고 수그러들 것이오.”
“그럽시다. 참. 일이 이리될 줄이야. 허허.”
“자자. 각자 돌아가십시다.”
(투란도트의 궁)
“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전쟁이 났나요? 오라버니는 출전했고요?”
“투란도트. 그게 아니라 연합국 측에서 전쟁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방금 전령을 보냈다. 기쁜 소식을 알려주러 이 아비가 직접 달려왔구나.”
“어머? 그래요? 아버지? 너무 다행이에요. 그럼 전쟁 안 하는 거예요?”
“그래. 칼라프도 출전할 일이 없다. 너도 이제 아무런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말 다행이에요. 전에 시베리아 영매가 보호 결계를 치면서 나와 칼라프의 안전을 빌어주고 떠났어요. 효험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영매를 데려다가 전속으로 궁에 두고 싶어요.”
“네가 그러고 싶다면야. 그렇게 하려무나. 나도 그 영매를 보고 싶구나.”
“아버지? 당장 데려오라고 전하죠. 그리고 아버지께 보내 드릴 테니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투란도트 아버지의 궁전)
“자네가 그 시베리아 영매인가? 용하다고 소문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아냐. 우리 투란도트를 구해주고 또 이 나라를 구했소. 정말 고맙소. 그래. 그 원혼들을 쫓아내고 보호 결계를 쳤다지?”
“쫓아낸 것은 고려 영매이고 저는 보호 결계를 쳤을 뿐입니다. 공은 고려 영매에게 있습니다. 원혼을 쫓아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은 잡귀가 다시 붙는 경우가 많은데, 그 고려 영매는 한 번에 완벽하게 내쫓아서 지옥에 보내버린 것입니다. 확인사살을 한 것이지요.”
“그런가? 그 고려 영매는 다시 부를 수 없나? 여봐라. 그 고려 영매를 다시 데려오게.”
(투란도트의 아버지와 고려 영매)
“고려 영매?”
“네, 폐하. 부르셨는지요?”
“자네가 원귀들을 내쫓고 지옥 불에 보내버린 덕에 우리나라가 살았소. 수고했소. 공주가 사례는 제대로 했는지 몰라서 자네를 다시 불렀지.”
“공주께서 사례를 후하게 해주신 것뿐 아니라 우리를 고려까지 안전하게 호위해서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승으로 보낸 것은 사실이나 지옥까지 갔는지는 몰랐습니다. 염라대왕께서 폐하를 지키고자 하신 일입니다. 다행입니다. 전란을 막을 수 있어서.”
“자네를 우리 궁전 신녀로 삼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폐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고려에서도 할 일이 많사옵니다. 오라는 데도 많고 갈 곳도 많지요. 이번에 인연이 닿아서 여기 왔다 갑니다만 고려에서도 제가 필요합니다.”
“하긴, 자네 정도의 신력이면 오라는 곳이 많겠지? 보수를 후하게 쳐주겠네. 자네를 위한 궁도 따로 지어주지. 신하, 시녀를 딸려서. 어떤가?”
“폐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부귀영화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서, 그런 삶은 필요치가 않습니다. 그렇게 살면 오히려 신이 노하셔서 제 신력을 거두실 겁니다. 저는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저는 고려인입니다.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하시면 그때 다시 오겠습니다. 여기 매여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허어. 참. 신력을 거두신다니, 억지로 붙들 수가 없구먼, 낭패일세.”
“지금 급한 일이 있어 급히 돌아가야 합니다. 폐하. 보내주소서. 말을 타고 달려야 합니다.”
“알겠네.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도록 호위무사를 딸려 보내주지. 다음에 내가 부르면 꼭 다시 오게나.”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폐하와 공주님, 왕자님도, 강녕하시길 빌겠습니다.”
(저승)
“드디어 전쟁을 막았군.”
“대왕마마. 우리 작전이 주효했습니다.”
“그럼. 제 아들들이 천벌을 받는 것을 보고도 전쟁을 할 바보들이 아니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럼, 그놈들이 제대로 반성을 하고 있는지 볼까?”
(지옥 불)
“여봐라. 너희들. 어떠냐? 지옥 불 맛이?”
“으으으. 아아악.”
“괴로우냐? 대답도 못 할 정도인 게야?”
“아악. 헉.”
“여봐라. 잠시 불을 멈추게.”
“불을 멈추랍신다.”
“자. 다시 묻겠다. 너희들 때문에 네놈들의 아비들이 전쟁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직도 투란도트가 죽어야 마땅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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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뉘우치지 못했구나. 여봐라. 다시 불을 때라.”
“으으으. 아아악.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아니다. 너희들은 뉘우치지 못했어. 단지 지옥 불이 뜨거울 뿐이지.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인 게야.”
“아악.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이 모습을 보고도 아버지가 전쟁하신다고 합디까?”
“실은 너희들의 그 꼴을 그대로 네 아비들에게 전송했다. 그랬더니 전쟁을 그만두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를 용서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쟁도 막았는데.”
“너희가 막았냐? 내가 막았지. 정말이지 네놈들은 반성이라는 걸 모르는구나. 아직 멀었다. 여봐라. 100일 동안 통구이를 더 만들어라. 그때 다시 와서 묻겠다.”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아아악.”
“으으으. 아아악.”
(저승)
“염라대왕님.”
“류. 너 또 왜 왔느냐? 정화 수련 중인데 자꾸 나다니면 아니 된다.”
“전쟁을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왕자님의 아드님이 자라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몽골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걸음마를 떼면 바로 말을 타려나? 아니지. 그래도 너무 일찍 태어나는 건 너에게도 곤란할 것이다. 말의 수명은 사람보다 많이 짧으니 말이야. 네가 그 아들을 조금이라도 오래 지켜주고 싶다면 적어도 청소년은 넘어서 태어나는 게 낫지 않겠니? 한창 말 타고 전쟁에 나갈 시점에 네가 도움이 되어야지.”
“그건 그래요. 아기 때부터 말이 되면 성년이 되어 곧 죽을 테니까요.”
“내가 알아서 네가 태어날 시기를 알려주마. 너는 그동안 정화 수련이나 제대로 하려무나. 그래야 더 훌륭한 명마로 태어날 수 있다. 아무리 말이라도 천하의 적토마 수준은 되어야지.”
“관운장이 타던 적토마라고요? 멋진데요. 그 정도의 말이라면 왕자님도 아드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틀림없이 도움도 되고.”
“당연하지. 바람보다 더 빠르고 다른 주인은 모시지도 않으니 안전하게 주인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저도 좋아요. 대왕님. 열심히 정화 수련을 하겠어요.”
(투란도트의 궁)
“칼라프! 우리 아들이 걸음마를 했어요. 대단하죠? 곧 뛰어다니겠어요.”
“투란도트, 나도 봤소. 아주 씩씩하더군. 당신네 나라에서는 걸음마 하기도 전에 말을 태운다던데, 그게 사실이오?”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에 그랬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점차 한족화가 되어서 그 정도는 아니고요. 적어도 제 발로 뛰어다닌 후에 태울까 싶은데요.”
“하하하. 같이 말 타고 사냥도 다니고 무술 수련도 해야지. 어서 자라렴.”
“나도 말을 탄다고요. 피는 못 속이죠. 아들이 크기 전에 저랑 먼저 말 타고 산책해요. 그럼.”
“아니? 당신도 말을 탔었소? 전혀 몰랐는데,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소?”
“말 타고 달리다가 다른 사람들 눈에 띌까 봐 안 탔어요. 어릴 땐 자주 탔었는데, 얼굴이 알려지고 소문이 나서 궁 안에 칩거하고 있었어요. 이제는 뭐 얼굴이 알려지건 말건 상관없으니까. 타고 되겠죠? 오랜만에 말 타고 시원한 바람도 좀 쐬고 싶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같이 타고 놀다 옵시다. 그리고 아들도 조금 더 자라면 승마를 가르쳐야지.”
“당연하죠. 말을 타고 활도 쏴야죠. 나 활도 잘 쏘는데.”
“저런 여전사 납셨군. 같이 무예 수련을 합시다. 누가 더 잘 쏘나 내기할까?”
“어릴 적 말 타고 활 쏘고 했었지만, 오랫동안 못 했어요.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야겠어요.”
“그럽시다. 진작 말을 하지. 나도 그동안 많이 답답했었는데 잘 되었소.”
“좋아요.”
(들판 승마 중인 투란도트와 칼라프)
“정말 상쾌해요. 이 바람. 얼마 만이냐?”
“나도 당신 궁에 들어오고는 밖에 처음 나온 것 같소. 실은 전쟁 준비하면서 궁 안에서 말을 잠깐 타보긴 했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 전쟁이 안 나서 정말 다행이오.”
“고려 영매가 다시 돌아와서 말하길 그 왕자들이 지옥 불에서 수련 중이라서 그 아버지들이 전쟁을 멈췄대요. 아들 복수하려다가 아들이 지옥 불에서 고통받는다면서.”
“감사한 일이지. 영매에게 큰 도움을 받았어. 지옥으로 보내줄 줄이야. 대단한 능력이야.”
“영매 말로는 저승으로 보냈지. 지옥까지 간 줄은 몰랐대요. 하여튼 대단한 신력인 것은 맞아요. 다음에도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야겠어요.”
“나도 놀랍소. 그런 능력이 있다니. 세상은 참 넓고 나는 참 우물 안 개구리였소.”
“그래요? 알았다니 다행이군요. 세상에 신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에요.”
“알라께 불경스러운 말인데, 반박하려니 참으로 애매하군. 나도 이제 모르겠소. 여기서 살려면 여기 법도를 따라야겠지?”
“고마워요. 칼라프. 이해해줘서.”
(저승)
“염라대왕 마마. 이제 그 왕자들의 지옥 불 수련 기간이 끝나갑니다. 100일이 지나고 1,000일이 넘었습니다. 이제, 그만 용서해 주시지요?”
“그래? 벌써 1,000일이 지났어? 그새 잊고 있었네그려. 가보세.”
(불지옥)
“여봐라. 너희들에게 다시 묻겠다. 이제 너희들의 죄를 좀 뉘우치느냐? 아직 투란도트와 칼라프를 죽이고 싶으냐?”
“이제 아무 생각도 못 하겠습니다. 머릿속까지 다 타버려서.”
“그래? 솔직한 대답이군. 여봐라. 이제 불을 꺼라.”
“살려주시는 겁니까?”
“불 수련을 마친 것을 환영한다. 이제 저승에서 정화 수련을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저기, 저. 투란도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왜? 잘 살면 또 괴롭히려고?”
“아닙니다. 그녀가 괴로우면 저희도 다시 괴롭히실 것이 아닙니까?”
“알긴 아는구나. 이제야 그것을 깨닫다니. 참 오래도 걸렸구나.”
“처음엔 고통밖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는데, 점점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라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불지옥에서 못 깨달았으면 다음은 물 지옥도 있고, 가시 지옥도 있고, 지옥의 종류는 참 여러 가지이니까.”
“불지옥만 겪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겠군요.”
“그렇지. 지옥의 시간은 영원하니 말이야.”
“참, 같이 온 류라는 시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개나 고양이로 환생했습니까?”
“아니. 명마로 환생하려고 준비 중이네. 한 십여 년은 지나야 환생하게 될 거야.”
“환생 시간도 정해주시는 겁니까?”
“가능한 원하는 시간을 맞춰주긴 하지만 가장 좋은 시간을 위해서는 정해주기도 하지.”
“그렇군요. 우리는 언제 누구로 태어나나요?”
“너희들이 정화 수련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리고 가능한 원하는 곳에, 원하는 모습으로 맞춰주려면 시간이 달라지기도 하지. 하여튼 너희들은 모두 사람이 되고 싶은 거지?”
“네, 그렇습니다.”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하마.”
(저승)
“여봐라. 정화 수련 중인 왕자들을 불러라.”
“네. 왕자들 납시오.”
“너희들도 이제 정화 수련이 끝났구나. 그래. 이제 환생할 준비가 되었니?”
“네. 염라대왕님. 분부만 내리소서.”
“그렇단 말이지? 이번엔 여자로 태어나거라.”
“네?”
“뭘 그리 놀라느냐? 죄인이 사람으로 환생하려면 우선 여자부터 하는 거다. 그다음에 남자가 될 수 있는 거야. 그래도 평민으로 보내진 않을 테니 걱정은 하지 마라. 귀족 가문의 여식으로 보내줄 테니. 거기서 원하는 신랑 만나서 행복하게 살도록 해라. 단 지금까지의 기억은 다 지워주마. 그편이 새 삶을 살기에 편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너희가 했지. 그동안 수고했다. 이제 다시는 서로 보는 일 없도록 하자꾸나.”
(15년 후)
“아버지, 어머니. 오늘 새로 들어온 말이 명마라면서요? 그 말 저 주실 거죠?”
“소식도 빠르구나. 그래. 보고 결정하지. 워낙 사나워서 그 누구도 태우지 못했다는구나. 그래서 이곳에 팔러 왔는데, 우리 중에 아무도 타지 못하면 역시 소용없는 일이지.”
“아뇨. 저는 탈 수 있어요. 분명히 그 말은 제 것이 되려고 여태 아무도 태워주지 않은 거예요.”
“네가 탈 수 있다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사주마.”
“약속하신 거예요. 아버지.”
(궁 마당)
“공주마마, 왕자마마, 이 말이 그 유명한 말이긴 한데, 과연 사람을 태운 적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많은 사람이 탐을 내었지만 여태 주인을 못 만난 말입니다.”
“그래요? 그럼 우리 아들이 한번 타보겠다고 하니 그렇게 해주시오.”
“아? 아직 어리신데 승마 경험은 많이 있으시겠죠? 낙마라도 해서 부상이라도 당하시면, 저희는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까. 너도 들었지? 네 앞가림은 네가 하는 거다.”
“네, 아버지, 어머니. 제가 저 말을 굴복시키겠어요. 저놈은 제 것이에요. 이리 온.”
“칼라프. 수려하고 기운차 보이는 말이네요. 정말 나도 탐이 나는군요. 아직 말도 어리다면서요? 우리 아들 말이 되면 평생 좋은 친구가 되어줄 거예요.”
“그렇군. 어디 우리 아들 승마 솜씨 좀 볼까?”
(말에 올라탄 아들 쿠린, 순한 양처럼 있는 류)
“세상에 이럴 수가! 저 말이 사람을 태웠어. 그리고 저렇게 순하게 있다니. 정말 주인을 기다렸던 것이 맞네. 드디어 주인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저 말을 사지. 얼마면 되겠소?”
“말이 훌륭해서 많이 요구하고 싶지만, 어차피 아드님 아니면 아무도 타지도 못할 말인데, 금 100냥만 주십시오.”
“그런가? 금 100냥이면 꽤 비싼데? 알겠네. 그렇게 하지.”
“아버지. 이 말의 이름은 정했어요. 실은 어젯밤 꿈에 어떤 여자가 나와서 말을 보내겠다면서 이름을 류라고 지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네. 이 말은 수말인데, 여자 이름 같지 않아요?”
“뭐라고 류?”
“칼라프. 그 류가 이 말로 환생한 모양이네요. 그렇죠? 역시 당신이 보고 싶었나 보네.”
“투란도트. 내 말도 아니고 우리 아들이 탈 말인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알았어요. 그래. 류. 네 충성심은 내가 잘 알지. 우리 쿠린도 목숨 바쳐 지켜주겠니?”
“히히힝!”
“그래? 고맙구나.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
(류를 타고 들판을 달리는 쿠린)
“이랴. 류.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앞으로 나랑 평생 좋은 친구로 지내자.”
“히히힝.”
“그래. 너도 지금까지 날 기다렸던 거지? 알았어. 나도 너 외에는 아무 말도 타지 않을게.”
“히히힝.”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궁)
“여보. 칼라프. 이제 우리 아들도 혼례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처녀를 구해봐야겠어요. 간택령에 금혼령까지는 내리지 못하더라도 좋은 왕족, 귀족 가문에서 골라야죠.”
“하긴. 그 녀석이 나처럼 구혼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한 열 가문에서 후보자가 있는데, 당신도 한번 볼래요?”
“여자는 여자가 볼 줄 아는 법이지. 내가 뭐 본다고 알겠소?”
“칼라프. 나는 꼭 몽골 왕족 중에서 고를 생각은 아니에요. 우리 쿠린도 타타르와 몽골의 피가 섞였잖아요?”
“그런가? 그래도 출세를 위해서는 몽골 왕족이 낫지 않겠소?”
“역시 그런가? 하긴 딱히 쿠린이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는 것도 아니긴 한데, 내가 골라주면 군말 않고 혼인할 거예요.”
“투란도트. 나는 환경이 그래서 간택을 할 순 없었지만, 당신을 얻었지 않소? 우리 쿠린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요. 혹시 알아요? 나처럼 외국의 절세 미녀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겠다고 할지도 모르지. 아직 어리니까 조금 더 기다려봐요. 아직 어린아이요. 나도 쿠린보다는 훨씬 더 장성해서 당신을 얻었으니까.”
“그런가요? 나는 빨리 손자를 보고 싶은 모양이에요. 호호호.”
“당신 할머니가 되기는 너무 젊은데. 조금 더 기다려 보시오.”
(쿠린 방)
“쿠린. 이제 들어오니?”
“어머니? 웬일이세요? 이 시간에?”
“이 시간 아니면 네가 없잖니? 너 요즘 공부는 게을리하고 늘 류를 타고 들판에 돌아다닌다면서?”
“하아,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은 잘못했어요. 앞으로 주의하겠어요. 그런데 류를 한번 타기만 하면 멈출 수가 없어요. 한걸음에 천 리를 달리거든요. 내리기가 쉽지 않아요. 어머니.”
“나도 류가 명마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공부도 무예 수련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돼. 알겠니? 쿠린?”
“네, 어머니. 내일부터는 오전에 공부하고 오후에 수련하고 그다음에 류를 타겠어요.”
“그래. 우리 착한 아들. 그래야지. 참. 쿠린. 너 혹시 마음에 둔 아가씨가 있니?”
“네? 아직 저는 많이 어린데요. 그리고 궁에 시녀들도 많지만 별로 마음에 둔 여자는 없어요. 그리고 왕족, 귀족 아가씨는 우리 궁에 아직 아무도 온 사람도 없지 않아요?”
“하긴. 내가 여자가 드나드는 건 질색을 하니 아무도 들이지 않았지. 하지만 너도 이제 슬슬 혼인해야 하지 않을까?”
“어머니, 여자라고는 수발드는 상궁, 나인, 무수리들밖에 못 보고 자란 내가 무슨 여자를 볼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아직도 저는 류를 타고 달리는 것이 제일 즐거워요. 물론 활 쏘는 것도 좋아하고.”
“그렇구나. 네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긴 우리 궁에는 상궁, 나인들도 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뿐이지. 젊은 여자들은 내가 들이지 않으니까.”
“어머니께서 워낙 별나셔서 우리 궁에 젊고 예쁜 여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어찌 보면 아버지가 좀 불쌍하기도 해요. 40이 넘도록 어머니 외에 그 어떤 여자도 못 보고 사시는 게.”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넌 그럼 아버지가 다른 첩이라도 들였으면 하는 거냐?”
“아니요. 설마?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그리고 아버지도 어머니 외에는 아무 여자도 못 만나시잖아요?”
“그건 그래. 내가 절대 용서 못 하니까.”
“어머니, 저도 부인 외에 한눈파는 걸 용서 못 하실 건가요?”
“뭐? 아. 저기. 으음.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 못 했어.”
“역시. 어머니도 결국 시어머니가 되는 건가?”
“그건 또 무슨 말이니? 아가.”
“어머니. 나도 아버지처럼 제가 사랑하는 한 여자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여자를 찾을 수 있을까요? 정말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얻고 싶은 여자 말이에요. 나도 그런 여자 아니면 싫어요. 그런 여자가 아니라면 정말 할아버지나 외삼촌처럼 수십, 수백 명의 여자를 데리고 살지도 모르겠어요. 어차피 다 마음에 안 들 테니까.”
“폐하나 태자마마, 즉 할아버지와 외삼촌은 황제이고 황태자이니까 후궁을 많이 두는 것이지. 네 아버지는 그냥 부마란다. 물론 왕자 출신이긴 하지만 부마는 첩을 들이지 못해. 황제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니까.”
“그래도 다른 부마들은 다 첩을 둔대요. 어머니가 별나신 거죠.”
“얘가, 얘가 어미에게 왜 이러지?”
“나도 어머니가 좋으니까, 아버지가 다른 여인 두는 건 싫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어머니 편이니까. 그리고 나도 어머니 같은 여인 한 명만 만날 테니까, 그런 여자 좀 찾아주세요. 아니면 내가 찾아요?”
“그래. 넌 어떤 여자가 좋으냐?”
“글쎄요. 어머니처럼 아름답고 심지가 굳고 대가 찬 여자?”
“나 같은 여자는 세상에 다신 없을 텐데. 노력해보마.”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방)
“여보, 투란도트. 투르크, 페르시아, 티벳 등지를 시찰하고 오라는 황제의 명령이시오. 이번엔 우리 쿠린도 함께 데려가려고 하오.”
“칼라프. 당신은 그렇지만, 쿠린도 가야 하는 거예요?”
“쿠린도 벌써 18살이오. 벌써 전장에 출전하고도 남을 나이지. 아직 큰 전쟁이 없어서 여태 있는 거요. 당신은 혼인도 시키고 싶다면서 전쟁엔 보내지 않을 생각이오? 물론 지금 전쟁하러 가는 건 아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벌써 출전할 나이가 됐군요.”
“혼인은 더 천천히 해도 되지만 전장엔 더 일찍 보내야 했소.”
“당신은 하나뿐인 아들을 벌써 전장에 보내고 싶어요?”
“투란도트. 쿠린은 어린아이가 아니오.”
“어린아이라면서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혼인하기 어리다고 했지. 출전은 15살만 되어도 해야 하는 거요.”
“태평성세라고 들었는데, 뭐 별일은 없겠죠?”
“당신 아버지네 나라가 워낙 대제국에다 동유럽까지 정벌한 마당에 감히 누가 덤비겠냐마는. 그래도 워낙 땅이 넓으니까 한 번씩 시찰은 해야 하오. 세금이 잘 걷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불순 세력이 있을 수도 있고, 반란세력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쿠린도 잘 알아야 하오. 쿠린도 조금만 더 지나면 한 지역에 지도자로 파견될 수 있소.”
“어머나? 그건 싫어요. 쿠린은 나랑 가까이 있어야 해요.”
“투란도트. 당신이 나를 독점하고 지키는 건 내가 이해하오. 하지만 쿠린에게까지 그렇게는 하지 마시오. 품 안의 자식이지. 이제 다 컸소.”
“아니요. 아직 다 안 컸어요. 네네. 아직 어린아이예요. 그러니 혼인도 천천히 준비하겠어요. 혼인하면 바로 지방으로 발령 날 것 같아요. 왜 내가 그 생각은 못 했지?”
“당연하지. 폐하께서 쿠린을 여태 가만히 두신 것도 다 당신을 배려해서요. 쿠린이 혼인하면 바로 한 지역으로 보내실 것이오. 이 제국은 영토는 넓은데 다스릴 왕족, 귀족이 많이 부족하니까.”
“안 돼요!”
“투란도트. 이번에 쿠린을 데리고 장기출장 다녀올 테니까 당신도 혼자 남아서 잘 생각해 봐요. 쿠린 없이 살 당신의 미래에 대해서.”
“여보. 칼라프.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죠? 빨리 돌아와요. 그리고 당신. 다른 여자 만나면 그 여자 내가 다 죽여버릴 테니까, 각오해요.”
“여부가 있겠소?”
“그리고 쿠린에게도 여자는 안 돼요. 아무 여자나 만나지도 않겠지만, 정말 좋은 아내를 골라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알겠소. 그 부분은 당신 영역이오. 내가 침범할 수 없는 부분이지. 걱정하지 마시오.”
(외국 출장 중인 칼라프와 쿠린)
“쿠린. 이렇게 오래 말을 타본 적이 없지?”
“물론이죠. 아버지. 류가 명마인 줄 실감이 나네요. 진즉 저 좀 데리고 다니시지 그러셨어요? 나는 류를 이렇게 오래 타고 다니는 것이 참 좋네요.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봐요. 어머니도 궁에만 계셔서 답답하실 텐데, 같이 왔으면 좋았을 것을. 아버지. 어머니는 왜 안 데리고 오셨어요? 늘 함께 출장 다니셨잖아요?”
“이번엔 네 어머니를 일부러 떼어 놓고 왔다.”
“그것도 신기한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 만날까 봐 늘 함께 다니셨는데. 웬일이지? 아버지만 보내시고. 아. 내가 같이 있어서 안심하셨나?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를 잘 지킬게요.”
“넌 누구 편이냐? 너도 남자면 아버지 편을 들어야지.”
“아버지? 설마 다른 여자 만나시게요? 안 돼요. 어머니가 가만두지 않으실 거예요. 그 여자는 물론이고 아버지도 장담 못 해요.”
“아들도 마누라의 첩자인 건가?”
“아버지. 제 눈을 속일 생각은 하지 마세요.”
“농담이고, 나도 다른 여자 만날 생각 없다. 그랬다가 그 여자 분명히 살해당할 텐데, 나도 그런 죄를 짓고 싶진 않구나. 다만 이번엔 너 때문에 혼자 생각 좀 하라고 두고 왔어.”
“저 때문에요? 왜요? 저도 어머니랑 같이 다니는 것이 좋은데.”
“쿠린. 너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좀 더 의젓해져야지. 너도 이제 혼인하고 독자적으로 가족도 지키고 영토도 다스려야 한단다.”
“아? 삼촌들, 이모들처럼이요? 다 멀리멀리 떠나셨죠.”
“그래. 우리도 그랬어야 했는데, 네 어머니 때문에 황제이신 네 할아버지께서 여태 곁에 두신 것이지. 네가 혼인하면 아마 지방으로 발령이 날 것이다.”
“그렇겠군요. 어머니 몹시 서운해하시겠네.”
“효자 났구나. 지금도 어머니 걱정을 먼저 하는구나.”
“그럼요. 어머니는 저 말고는 다른 자식도 없으신데, 많이 적적하실 거예요. 아버지.”
“네 어머니는 내가 잘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는 앞으로 네 처, 자식을 지킬 생각을 해야지.”
“그런가요? 하긴 나도 색시가 생기면 그래야겠죠. 아버지? 아버지는 어머니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셔서 목숨을 걸고 구혼하신 건가요? 나도 가끔은 어머니가 무서운데.”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단다. 네 어머니가 질투심이 강한 것도 귀엽게 보인단다.”
“정말 못 말리는 잉꼬부부.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를 어떻게 알고, 그리고 문제는 또 어떻게 푸셨대요? 한 번이라도 못 맞힐까 걱정도 안 하셨어요?”
“나도 너처럼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문제를 풀고 투란도트를 얻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어. 너도 꼭 그런 여자를 찾길 바란다. 평생에 하나뿐인 반려자.”
“네, 아버지. 저도 꼭 그러기를 바래요. 할아버지 폐하나 삼촌들처럼 아무 여자나 닥치는 대로 만나기는 싫어요. 저도 아버지처럼 일부일처를 하겠어요.”
“그래도 너는 마음껏 누리길 바랐는데,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당연하죠. 나는 칼라프와 투란도트의 아들인걸요.”
“그래. 쿠린.”
(귀빈 숙소)
“어서 오십시오. 귀인을 두 분이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랜만이군.”
“어라? 이번엔 공주마마께서는 오지 않으신 겁니까?”
“그렇게 되었네.”
“아, 아드님이 대신 오셨군요. 혹시 공주께서 편찮으시기라도 하신 건가요?”
“그건 아닐세. 걱정하지 마시게.”
“전처럼 부부실을 준비했는데, 따로 드리겠나이다. 모실 시녀들도 따로 부르지요.”
“아버지. 설마 우리 방을 따로 주는 건 아니겠지요?”
“아니, 전 객실이면 충분해. 아들과 함께 지내겠네.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아이, 그래도 아드님과 오셨으면 다른 접대를 해드려야죠. 지금까지는 공주마마 때문에 제대로 접대도 못 해드렸는데.”
“시끄럽네. 그러려고 공주를 안모신 게 아니네. 오해 말게. 게다가 우리 아들은 제 어미의 첩자야. 조심하게.”
“저런? 큰 실수를 할 뻔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여태 따라다니신 이유가 다 있었군요. 바로 태도가 돌변하네요. 어머니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불쌍해져요.”
“그러게나 말이다. 다들 접대부를 못 붙여서 야단이지. 나도 그게 참 싫구나.”
“어머니가 좀 드세다고 생각했지만 당연한 거였구나. 그리고 그런 접대를 받아서 우리도 좋은 일 하나도 없어요. 분명히 부정한 청탁이 들어올 거예요.”
“당연하지. 부정한 향응접대를 받게 되면 곤란한 청을 들어줘야 하거든. 너도 이번에 잘 보고 배우도록 해라. 세금이 새는 곳이 있는지, 관리들이 일은 제대로 하는지 다 확인해야 한다. 이런 일은 꼼꼼해야 해. 그러려면 더욱 우리가 정정당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알겠니?”
“당연하죠. 저런 수법에 놀아날 만큼 어리석지 않아요. 제가 어머니보다 더 잘 보조하겠어요. 아버지. 저도 다음에 혼자서도 잘하려면 잘 배워야죠.”
“그렇지. 그러라고 데려온 건데, 처신을 잘해야 한단다.”
“넷, 아버지.”
(투란도트의 궁)
“칼라프는 잘하겠지만 쿠린은 처음이라 모든 것이 낯설 텐데, 잘하려는지. 잘 배워야 다음에 혼자서도 잘하지. 그리고 외국의 문물도 잘 보고 배워야지. 세상 넓은 줄도 알아야 해.”
“마마. 그래도... 이번엔 왜 따라가지 않으셨어요? 저는 걱정돼요. 아무래도 남자들은 부인이 없으면 다른 생각을 한다는데, 우리 남편도 그랬어요. 외국 출장만 가면 제 세상이라고요.”
“설마 칼라프가 그러려고? 어린 아들도 있는데, 그럴 수가 있겠어?”
“마마는 참 태평하시네. 부마께서는 공주 외에 어떤 여자도 못 보고 계시다가 다른 여자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감당하실 수 있으실까요?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을 텐데, 기회다 하고 들이대겠죠.”
“그만. 그만해.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왕자 출신인데, 체면이 있지. 아들 보기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아. 믿으니까 그냥 보내줬지.”
“하긴 쿠린님이 계시는데 부끄러운 짓은 하지 못하시겠네요. 쿠린님이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니면 불가능하죠.”
“나는 우리 아들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그럼요. 공주님이 어떤 분이신데.”
(이 지방 수장이 칼라프에게 인사를 하러 옴.)
“갑자기 오셔서 놀랐습니다. 급히 달려왔습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내일 아침 자네 집무실로 갈 참이었는데 말이지. 이 밤에 웬일인가?”
“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제가 서류를 다 갖고 왔으니 여기서 편하게 검토하시면 됩니다.”
“아닐세. 내일 아침에 관사로 직접 가겠네. 그 서류들은 두고 가게나.”
“아? 그리고 이분은?”
“우리 아들일세. 공주와 나의.”
“아? 그러시군요. 그럼 이번엔 공주께서 오지 않으신 겁니까?”
“그렇네.”
“아드님께서 오셨으면 제 딸이라도 데려왔어야 했는데, 큰 실수를 했군요.”
“그게 무슨 소린가? 엉뚱한 상상 말게. 우리 아들은 그런 놈이 아니야.”
“공주께서 안 계실 때 아니면 언제 또 그런 기회가 있겠습니까? 이래저래 실수했네요.”
“듣기 싫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야. 공주께서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그 무슨 말씀?”
“우리 아들은 공주의 첩자야. 조심하게.”
“저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행정관님. 이 사실을 어머니께 그대로 고하겠어요.”
“부디 선처를.... 용서하십시오. 사죄의 의미로 내일 저녁 집으로 저녁 초대를 하겠사오니 부디 참석해 주십시오.”
“그 정도야.. 알겠네, 내일 낮에 시찰을 마치고 저녁에 자네 집에 들름세. 이상한 준비는 하지 마시게. 알겠나?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네. 분명하게 말했어. 조심하라고.”
“여부가 있겠나이까?”
(집무실 시찰 중)
“어제 자네가 가져온 서류와 이 서류는 숫자가 다른데, 내가 밤새 서류를 확인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나? 돈이 새고 있어.”
“그럴 리가요?”
“아버지. 이곳은 아무래도 제대로 관리가 되는 것 같지가 않네요. 감사를 제대로 해야겠어요. 감사관들을 부르겠어요. 다음 지역으로 가죠.”
“그러게. 오늘 저녁은 취소야. 곧 감사관들이 들이닥칠걸세. 유감이네. 다음엔 이런 일이 없길 바라네. 우리는 항상 불시에 들어올 것이니 딴 마음, 먹지 말게. 돌아가자. 쿠린.”
“네, 아버지. 다른 지역도 불시에 가야겠어요. 오늘 밤낮으로 달려가죠. 우리 류는 밤새 달려도 문제없어요.”
“그래. 그러자꾸나.”
(지역 순방 중)
“쿠린, 벌써 불시 시찰도 여러 곳을 다녔는데, 제대로 관리되는 곳이 많지 않구나. 다들 횡령은 기본이고..... 황제께 이 사실들을 다 고하자니 참으로 괴롭구나.”
“할아버지 폐하께서 가족들을 지방에 보내시려고 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정말 믿을 사람이 부족하군요.”
“그렇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샌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정복지역이니까 말이야. 그래도 너무 심하게 횡령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처벌해야지. 아무리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건 안될 일이지.”
“폐하께서 그리고 삼촌들께서 왜 그리 자손을 많이 낳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럴 수밖에 없군요. 아버지, 전 왜 동생들을 낳아주지 않으셨어요? 그랬으면 어머니도 덜 적적하실 테고 저한테 목매지 않으셔도 되는데, 저도 좀 홀가분하고. 어머니 혼자 두는 게 신경 쓰여요.”
“네 어머니가 오랫동안 혼인을 거부해서 보통 여자들보다는 혼인이 많이 늦었고, 그리고 악령들에게 시달려서 건강도 나빠져서 수태하기가 쉽지 않았다. 너도 겨우 낳은 거야. 그래서 더 너에게 집착하는 것이지. 귀한 자식이니까. 하나뿐인 자식이니까. 나도 그것이 안타깝구나. 동생들을 많이 낳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게 뭐 아버지 탓인가요? 제가 더 죄송해요.”
“어서 시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네 어머니 목 빠지겠다.”
“그래요. 아버지, 어서 마치고 돌아가요.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마지막 순방 지역)
“드디어 마지막이다. 빨리 시찰하고 돌아가자꾸나.”
“네, 아버지. 이번 숙소는 지방관 사저인가요?”
“그래. 여기서는 항상 지방관 사저에서 묵었다. 따로 귀빈 숙소가 없어요.”
“더욱 조심해야겠군요.”
“그렇지. 공주도 안 계시는데 하면서 또 이상한 짓거리를 할 수 있단다.”
(지방관 사저)
“어서 오십시오. 아? 공주께서는 안 오시고 웬 공자분이?”
“우리 아들일세.”
“저런. 미처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여봐라. 어서 준비해라.”
“따로 준비할 일 없네. 부산떨지 마시게.”
“아닙니다. 제 처와 딸을 부른 것뿐입니다. 공자께 첫인사를 드려야죠.”
“그럴 필요 없대도.”
(달려오는 지방관 처와 딸)
“처음 뵙겠습니다. 공자님. 공주와 부마께서 오시는 줄 알았는데, 방을 다시 꾸미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아들과 같이 쓰면 되니까, 예전 객실이면 충분하고 다른 시중은 사절이네.”
“아? 그러십니까?”
“정말, 앵무새도 아니고 똑같은 말을 대체 몇 번이나 해야 하는 거지? 정말 피곤하네.”
“저, 이 애는 제 외동딸, 엘리시아입니다. 인사드려.”
“엘리시아입니다.”
“그래? 자네 딸이라고? 몇 살인가?”
“17살입니다.”
“외동딸이라고? 과년한데, 시집보낼 때가 되지 않았나?”
“그게 가장 문제인데, 들어오는 혼담을 다 거절하고 있어서 골치가 아픕니다.”
“그래? 자네도 자식이 문제군.”
“천천히 저녁을 드시면서 계속 말씀하시지요, 여보. 어서 모시게.”
(만찬 중)
“우리 아들도 나이가 차서 슬슬 혼처를 구하는 참일세.”
“그러신가요? 그래도 몽골계 황족에서 처녀를 구하지 않으시나요?”
“아마 그럴걸세. 공주께서 백방으로 수소문 중이시지.”
“그래서 못 오신 겁니까? 며느리 후보 수소문하시느라?”
“그럴 걸세. 혼자서 뭘 하겠나? 아마 돌아가면 바로 며느리 명단이 펼쳐질 것 같아.”
“아버지. 그만 좀 하세요. 우리가 그런 말 하려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라고요.”
“쿠린. 이분은 아버지 어려서부터 지인이야. 우리 타타르와 가까운 민족이야. 음식도 종교도 가깝지. 고향에 온 것 같아서 내가 좀 풀어졌구나.”
“그래요. 아버지. 우리는 공적인 일을 하러 온 거예요.”
“이런, 아드님께서 확실하시네요. 공주께서 당신 대신 보내실 만하네요.”
“그렇지. 하하. 그래. 자네 딸은 좀 어때?”
“저도 공주께서 어떻게 혼인하셨는지 잘 알고 있지만, 우리 딸이 감히 투란도트 공주님의 흉내를 내고 있어서 골치가 아픕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들어오는 혼처를 다 거부하고 독신으로 늙겠다고 합니다. 저게 정말 이 아비를 말려 죽이려는 게지요.”
“엘리시아라고 했나? 너는 왜 혼인을 거부하는 거냐?”
“..........”
“어서 대답해. 뭐 하는 게야? 엘리시아.”
“아니, 역정 내지 말게. 애가 얼어서 더 말을 못 하잖나?”
“저기, 저. 저도 투란도트 공주님처럼 유일한 부인이 안 되는 곳이면 혼인하고 싶지 않다고 한 것뿐이에요.”
“이런. 우리 투란도트 공주께서 참 영향을 멀리도 끼치시는군.”
“이런 경거망동은 보았나? 어서 사죄하지 못해?”
“아니야. 이 애 잘못이 아니네. 공주께서 시작하신 일이 맞긴 하지.”
“그런 곳은 없다니까, 다 후처나 첩을 두는 거야. 너는 본처가 되는데 뭐가 문제야?”
“아버지? 저는 다른 여자들과 남편을 나누는 일은 못 하겠어요. 차라리 혼자 늙어 죽겠어요.”
“정말 이게 아비, 어미를 말려 죽이려고, 자식이라고는 너 하나뿐인데, 어찌 이리도 속을 썩이는지 모르겠구나.”
“진정하게. 다들 자식 앞에서는 꼼짝 못 하는군. 나는 뭐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도 나처럼 부인 하나만 두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긴 한데, 그러다가 너 정말 처녀 귀신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도 투란도트 공주님과 칼라프 왕자님의 이야기를 잘 알아요. 우리 친구들끼리도 늘 이야기해요. 공주님이 정말 멋있고, 부럽다고, 다들 칼라프 왕자님 같은 분을 만나길 고대하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네 친구들도 못 만나게 하는 거다. 여자애들이 모여서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말이야. 주변 딸들이 모두 외출 금지 중입니다.”
“쿠린?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아? 아버지?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유명한 분일 줄 생각도 못 했어요. 정말 소녀들의 영웅이시네요. 그리고 아버지도 훌륭하신 분이시고. 자랑스러워요.”
“쿠린. 고맙구나. 나도 내가 이렇게 유명할 줄 미처 몰랐구나.”
“그 유명한 칼라프 왕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주께서 오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공주님도 꼭 뵙고 싶어요.”
“엘리시아? 정말 공주를 뵙고 싶으냐? 우리 궁에 놀러 오겠느냐?”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황도까지 거리가 얼만데? 아무리 그래도 과년한 딸을 그리 멀리 보낼 순 없습니다. 동네 친구들도 못 만나게 감금 중인 아이를.”
“아? 그게 또 그렇구나. 아들이 아니라서 외출이 어렵구나.”
“아버지? 저도 황도에 가보고 싶어요. 매일 집에서만 지내는 것도 싫고, 그리고 혼인하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황도에 투란도트 공주님의 시중을 들겠어요.”
“이런. 저 애가 저렇습니다. 이 아비 속을 시커멓게 썩게 해서 죽일 작정이지요.”
“엘리시아, 네 말을 들으면 공주께서 무척 기뻐하실 게다. 하지만 우리 궁에는 너처럼 젊고 예쁜 아이는 없단다. 다들 늙고 건장한 상궁, 나인들뿐이야. 그게 공주님의 방침이라서 말이야. 안 그러냐? 쿠린?”
“아? 그렇긴 하죠. 다들 늙은 상궁, 나인들이죠.”
“그럴 수가? 그럼 궁에 저처럼 젊은 궁인은 하나도 없나요?”
“그렇다니까, 투란도트 공주님은 젊은 궁인은 두지 않으신단다.”
“그러면 인사만 드리고 돌아오지요, 뭐. 안 그래요? 아버지?”
“엘리시아. 집안 망신 그만 좀 떨고, 가만히 밥이나 먹어라.”
“자네. 딸에게 역정만 내지 말고 혼자 보내기 어려우면 자네가 같이 오면 되겠네. 아? 자네 행정 일이 밀려서 그건 또 아니 되나?”
“당연한 말씀을? 제가 노는 사람도 아니고 이 지역 지방관인데,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지경인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자네 처와 딸, 그리고 호위무사들을 딸려서 황도에 보내게. 며칠 바람 쐬고 돌아가면 되지. 갈 때는 우리가 호위해 주지. 아니다. 이곳이 마지막 시찰지역이니까 우리가 돌아갈 때 같이 가면 되겠구나.”
“정말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조용히 해. 네 어미가 그리 먼 길을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아?”
“저. 저기. 여보. 나도 황도에 가보고 싶어요. 우리 여자들은 평생 집 밖에 나갈 일이 없는데, 나도 딸 덕분에 황도에 가서 바람도 쐬어 보고 싶네요. 엘리시아 덕분에 호강 좀 해보자.”
“하하하. 잘 됐군. 그럼 자네 처와 딸을 데리고 함께 돌아가겠네. 돌아갈 때도 호위를 딸려 보내주지.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이곳이 마지막 시찰 지역이니까 마침 잘 되었네.”
“이런. 그럼 나 혼자 여기 남아야 하는 게야?”
“아버지야말로 첩들이 잔뜩 시중드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어머니와 함께 잘 다녀오겠어요. 잘 됐어요. 어머니. 드디어 우리도 우리 지역에서 최초로 장거리 여행을 한 여자로 기록되겠네요. 정말 공주님 덕분이야.”
“하하하. 내일 아침에 집무실에서 공무를 마치는 대로 함께 돌아갈 테니 배웅은 필요 없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부디 제 처와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공무를 마치고 귀향하는 칼라프와 쿠린)
“아버지. 어머니께서 많이 기다리시겠지요?”
“당연하지. 나도 네 어머니가 보고 싶구나.”
(뒤따르는 엘리시아 모녀)
“어머니, 칼라프 왕자님은 아직도 저렇게 공주님만을 사랑하시는데 정말이지. 부럽지 않아요? 저도 저런 신랑을 만나고 싶다니까요.”
“그렇구나. 세상에 정말 저런 남편이 있다니, 나도 정말 놀랍다. 너와 네 친구들이 그렇게 떠들만하다. 공주님이 정말 부럽다. 칼라프님은 마음도 넓고 잘생기고 일편단심이고, 또 나와 너까지 이렇게 여행을 하도록 네 아버지께 말씀도 해주시고 직접 호위해서 데려가 주시고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아니, 공주님께 감사드려야겠구나.”
“왜요? 우리를 데려가시는 분은 칼라프 왕자님이신데?”
“네가 투란도트 공주님의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큰일을 저지른 것이니까, 나도 공주님께 감사하지. 정말이지. 엘리시아. 너 평생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살 자신이 있니? 나는 그런 용기는 없단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투란도트 공주님도 평생 혼자 사실 생각하고 하신 일이었어요. 그런데 칼라프 왕자님이 나타나신 거고. 나도 그런 인연이 있다면 만나게 되겠죠. 칼라프 왕자 같은 분이 아니면 나도 혼자 늙을 거예요.”
“나도 모르겠구나. 나도 너처럼 이런 용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물론 네 아버지가 싫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여자로서 너는 나보다 나은 것 같아.”
(투란도트 왕궁에 도착)
“여보. 투란도트. 나 왔소.”
“어머니, 저도 돌아왔어요.”
“여보. 쿠린. 어서 오세요. 기다렸어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투란도트, 칼라프, 쿠린. 셋이 얼싸안는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엘리시아 모녀)
“어머니, 투란도트 공주님이세요. 제 생각과 같은 분이세요. 아름답고 당차시고. 남편과 자식에게 헌신적인 분이시군요.”
“그렇구나. 우리도 인사를 드려야지.”
“저기, 공주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아? 투란도트. 여기는 마지막 시찰지 행정관의 처와 딸인데, 당신을 보고 싶다고 해서 오는 길에 데려왔소. 당신을 보러 온 사람이니 여자라고 박대하지 마시오. 부탁이오.”
“아? 그래요? 지방관 처와 딸이라고요. 여기까지 나를 보러 오다니. 대단한 용기인데. 여자들이 하기 쉬운 일이 아니죠.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군요. 어서 와요.”
“네. 공주님. 말씀 듣던 대로 굉장한 미인이십니다. 이 애는 제 딸 엘리시아입니다. 철이 없어서 그렇지만 덕분에 저도 황도까지 여행을 오게 되었지 뭡니까? 딸 덕에 호강합니다.”
“그렇구나. 엘리시아라고? 참으로 용감한 아이구나. 그래. 몇 살이지?”
“17살입니다.”
“나를 보고 싶어 왔다고? 이 먼 곳까지?”
“네, 공주님. 공주님은 우리 지역, 아니 공주님을 아는 세상 모든 여자의 우상이세요.”
“내가 그렇게 유명하단 말이지?”
“그렇다고 하더군. 투란도트. 나도 놀랐어. 당신이 세상 전체 소녀들의 우상이라고 하더군.”
“그러려고 한 일은 아닌데, 그렇게 되었구나.”
“어머니. 저도 어머니가 자랑스러웠어요.”
“쿠린. 고맙다. 나는 독한 요부라고 알려진 줄 알았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머니의 문제를 못 풀고 죽은 왕자들의 부모, 형제들뿐일걸요. 그 나라 백성도 다 어머니를 숭배할 거예요.”
“어쨌든 나를 보러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고맙고 기쁘기는 한데, 여기서 뭘 해줘야 하나?”
“공주님. 저희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공주님을 뵈었으니 이제 황도 구경만 좀 하다가 돌아가겠습니다.”
“어머니? 이곳 황도에 왔는데 구경만 하다가 돌아가다니요? 전 이곳에 남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네 아버지도 보내주시긴 했지만, 그렇게 오래 떠나 있을 순 없어. 넌 아버지가 걱정도 안 되니?”
“아버지는 첩들이 시중들고 있는데,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어머니. 여기서 신문물을 접하고 배울 것이 있다면 다 배우고, 살 수 있다면 여기서 살겠어요.”
“아, 공주님. 죄송합니다. 딸이 철이 없어서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금방 돌아갈 터이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엘리시아라고 했지? 참 총명한 아이구나. 강단이 있어. 그 지역 아가씨답지 않구나. 우리 몽골계 아가씨처럼 강단이 있구나.”
“공주님. 저를 공주님의 시녀로 삼아주세요. 저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여기서 공주님 시중들다가 늙어 죽는 게 낫겠어요.”
“이런. 혼인하지 않고 내 시녀로 늙겠다고? 네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일이니?”
“그건 아니지만,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남자에게 시집가서 또 첩들을 줄줄이 거느리고 살고 싶지 않아요. 제 어머니를 봐도 행복해 보이지 않거든요.”
“엘리시아.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난 행복해. 네 아버지를 사랑하고.”
“물론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시죠. 하지만 아버지도 그러신 거예요? 어떻게 10명도 넘는 여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나요?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되는데.”
“아. 그렇구나. 하긴 일부일처는 우리 집밖에 없긴 하지. 여보. 칼라프. 당신도 다른 남자들이 부러운 건가요?”
“아니. 전. 혀. 그렇지 않소. 투란도트.”
“그리고 쿠린. 너도 첩을 줄줄이 얻고 싶으니?”
“아. 뇨. 어머니. 저도 어머니와 같은 부인 하나만 있으면 돼요. 빈말이 아니에요. 이번에 아버지랑 공무 수행 다녀오면서 더 확실해졌어요. 저도 아버지처럼 살 테니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엘리시아.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내가 널 받아줄 수는 있다. 하지만 네 아버지의 허락이 있어야 해. 네 아버지가 너의 보호자시거든. 네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오면 널 받아주마. 우리 궁에 젊은 궁인은 없지만, 너는 특별히 예외로 해주겠다.”
“정말요? 어머니. 당장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허락을 구해야겠어요.”
“너 황도 구경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허락받고 와서 구경하면 되니까.”
“아니. 엘리시아. 난 다시 오기 힘드니까 온 김에 구경 좀 하고 가야겠다.”
“호호호. 모녀께서 내일부터 황도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으니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가서 쉬도록 해요. 여봐라. 엘리시아 모녀를 객실로 모셔라. 그리고 쿠린. 너도 가서 쉬도록 해라.”
“네, 공주님. 부인과 따님은 절 따라오시죠.”
(객실로 나가는 엘리시아 모녀를 보고 칼라프가 투란도트에게)
“휴우. 투란도트. 정말 보기 드문 아가씨야. 몽골계였으면 바로 며느리 삼고 싶었지?”
“정말이지. 당신은 내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군요.”
“그럼. 내가 당신과 산 세월이 몇 년인데, 척 하면 삼천리지.”
“안타깝네요. 이민족인 것이 마음에 걸려요. 아버지도 허락하지 않으실 테고.”
“황제께서는 당연히 첩으로 들이라고 하시겠지. 하나뿐인 적통 외손자가 이민족 부인을 얻는 걸 허락하시지 않으실 테니까. 하긴 나도 이민족인데, 목숨을 걸어서 당신을 얻었지. 쿠린에게까지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아.”
“그러게요. 쿠린은 아직 어리고. 또 당신과 쿠린이 출장 간 사이에 열심히 며느리 후보 명단을 만들었어요. 한번 보시겠어요?”
“내 그럴 줄 알았어. 분명히 오자마자 며느리 명단을 내밀 것이라고 쿠린에게도 말했었지.”
“그래요? 혼자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쿠린 없을 때 만들어야지.”
“전부 몽골계 황족이겠지?”
“으음. 그렇죠. 뭐. 어쩔 수 없어요. 다른 사촌들과도 너무 차이가 나도 곤란해요. 쿠린이 사촌들보다 출세에 뒤떨어지게 할 순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리고 혼인하면 지방관으로 발령이 날 것이니. 권력을 지키는 데도 필요한 일이지.”
“그래요. 단순히 사랑만 가지고 하는 혼인이 어디 있나요? 당신과 나 빼면 그런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죠? 여보?”
“그렇지. 투란도트. 나도 지방관 또는 다른 명예를 얻고 지키는 것보다 당신과 쿠린을 지키는 것이 더 좋소. 팔불출이지. 허허.”
(쿠린 방)
“아버지와 어머니는 참 행복해 보여. 이번 출장 다녀오고 확실히 깨달았어. 지금까지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외에는 할아버지. 삼촌, 이모들만 봤어. 다른 집을 보고 다니다 보니 더 확실해. 우리 부모님처럼 사는 집은 아무 데도 없었어. 나도 혼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해. 할아버지 황제께서는 분명히 몽골 황족 아가씨와 혼인하라고 하실 테지. 그리고 원하는 여자가 있으면, 닥치는 대로 첩으로 삼으라고 할 거야. 사실 나는 엘리시아가 마음에 들어. 그런 여자애는 처음이야. 아니지. 젊은 여자는 처음 본 거잖아?. 출장 중에서도 자기 딸을 소개해 준 지방관은 없었어. 엘리시아 아버지 외에는. 다들 침소 시첩들만 들이밀었지. 역겨웠어. 내가 처음 보는 아가씨라서 이런 건가? 다른 규수들도 많이 봐야 여자 보는 눈이 생길까? 어머니께서 정말 며느리 명단을 작성하신 건가? 만나보라고 하시면 다 만나야겠지만. 음. 역시. 나는 아직 여자를 본 적이 없어서 많이 놀란 것 같아. 이런 기분은 처음이거든. 이런 일을 아버지와 의논해야 하나? 어머니와 의논해야 하나? 아니면 유모상궁?”
(황도를 구경하는 엘리시아 모녀)
“정말이지? 세상은 넓고 또 놀랍구나. 우리 동네와는 천지 차이야.”
“그렇죠? 어머니? 저는 정말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아버지께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할 수 없이 돌아가야겠죠?”
“넌, 정말 아버지가 허락하실 거라고 믿는 거니?”
“단식투쟁을 해서라도 반드시 허락받을 거예요.”
“글쎄다.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말이지. 그리고 이번에 네 아버지를 다시 봤다. 이렇게 여행도 보내주고. 나는 이제 여한이 없어. 네가 시집 잘 가는 것 빼고는.”
“어머니. 저는 투란도트 공주님의 시녀로 살다가 죽겠다니까요. 결심했어요. 공주님은 제 상상보다 훨씬 더 멋진 분이세요. 그리고 쿠린님도 그렇고. 투란도트 공주와 칼라프 왕자의 아드님. 역시 멋져요. 나 같은 건 거들떠보시지도 않겠지만.”
“엘리시아. 너 혹시 쿠린님을 마음에 두고 여기까지 따라나선 거니?”
“처음엔 단지 혼인하고 싶지 않아서였지만 쿠린님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 건 사실이에요. 가까이서 볼 수만 있다면 시녀 아니라 무수리라도 상관없어요.”
“이럴 수가. 더더욱 큰일이구나. 우리는 이민족이라 황족에게 시집갈 순 없단다. 황족끼리 혼사가 다 정해지는 거야. 너는 첩은 싫다고 노래를 하면서. 첩이라도 될 수 있을 줄 아니?”
“첩을 혐오하고 산 내가 첩이 될 순 없죠. 그래서 가까이서 그냥 시중이라도 들고 싶은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너는 우리 지역 수장의 외동딸이야. 귀족이다. 황족은 아니라도 고관대작에게 정부인으로 시집가야 하는 거야.”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갈 순 없어요.”
“쿠린님은 이미 정해진 혼처가 있을 것이다.”
“알고 있다니까요. 혼인하시면 지방관으로 발령받아 나가시겠죠?”
“당연하지. 그렇게 되면 네가 공주님의 시녀로 있어도 무슨 소용이겠니? 볼 수도 없는데.”
“그렇다 해도 혼인하기 전까지는 궁에 계실 테니까. 볼 수 있어요. 혼인 후에는 공주님 시중들면서 늙어야죠.”
“아이고. 내 팔자야. 너는 어쩌자고... 아니지. 쿠린님은 어쩌자고 우리 집에 오셔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시는 건지.”
“어머니. 쿠린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반한 거죠. 저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겠어요.”
“조용히 해라. 궁인들이 다 듣겠다.”
“걱정마세요. 이곳 사람들은 우리 말을 못 알아들어요.”
“그래도 조심하래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않니?”
(투란도트의 방)
“그래. 오늘 엘리시아 모녀를 잘 수발들었겠지? 즐거워하던가?”
“네. 공주님. 매우 즐거워하더이다.”
“별일은 없었고?”
“네. 그게 단지.”
“그게 단지. 뭐? 무슨 일이냐?”
“저기. 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당장 고하거라. 내가 일부러 너를 보낸 이유가 다 있다. 넌 그 지역 말을 잘 알아들으니까.”
“네. 저기 엘리시아 아가씨께서 쿠린님을 사모하고 있답니다.”
“뭐라고? 쿠린을?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구나.”
“처음엔 혼인하기 싫어서 공주님 시중들겠다고 했는데, 쿠린님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 합니다.”
“이런. 엘리시아도 첩은 절대로 되지 않을 아이인데, 정부인이 되기는 쉽지 않아. 아버지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테고. 당연히 첩으로 들이라고 하시겠지. 그걸 그 아이가 받아 주겠니? 아니 정말 사랑하면 그렇게라도 할 수 있는 건가?”
“공주님. 저는 잘 모르겠지만, 엘리시아 아가씨는 평생 공주님 수발을 들면서 처녀로 늙겠다고 했습니다.”
“저런. 이 일은 나 외에는 함구하도록 해라. 칼라프에게도. 알겠느냐? 그리고 그 모녀를 수발들면서 나에게 세세하게 다 고하도록 해라.”
“네, 공주님.”
(쿠린 방)
“쿠린?”
“네, 어머니, 제 방에 직접 찾아오시고. 저를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그냥, 아들이 방에서 뭐 하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별일 없어요. 오전에 수업 듣고 지금 잠시 쉬다가 점심 먹으려고요. 오후엔 수련시간이고. 마치면 류를 타고 산책할 거예요. 늘 그렇듯이.”
“그래. 그럼 어미랑 같이 밥 먹자.”
“네. 그래요.”
(투란도트 모자 식사 중)
“쿠린. 이번 시찰 여행은 어땠니?”
“음. 진즉 다닐 걸 싶었어요. 이왕이면 어머니와 같이 다니고 싶었는데, 이번에 같이 가시지 그러셨어요? 셋이 장거리 여행해본 적 없잖아요? 물론 아버지랑 다닌 것도 좋긴 했지만.”
“그래. 류도 실컷 타보고 좋았다고 그랬지?”
“네. 명마를 제대로 달려보게 해주지 못해서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확실히 명마임을 증명했죠. 궁 안에서 썩긴 아까운 말이에요.”
“외곽지역, 특히 서쪽으로 다녔는데, 아마도 네 아버지가 타타르 출신이니까, 그쪽으로 시찰하는 거지. 넌 그 지역이 어떻더냐? 낯설지는 않든?”
“어머니. 아버지도 그러시고 저도 피가 섞여서인지 전혀 낯설지 않았어요. 아버지도 지인분을 만나서 반가워하셨고요.”
“그 사람이 엘리시아 아버지냐?”
“네. 그래요. 마지막 순찰지로 정하신 이유가 있었어요. 그곳에서는 좀 마음이 편하고 여유로워 보였거든요. 거기서는 숙소에 가지 않고 지방관 자택에서 묵었어요. 덕분에 엘리시아 모녀도 만나고 이야기도 나누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실은 어미 혼자서 네 혼처를 열심히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었는데, 물론 몽골계 황족, 귀족 처녀들이지. 한번 볼 테냐? 여기 초상화가 있다.”
“어머니께서 열심히 찾으셨다는데 안 볼 수야 없죠. 어디 보여주세요. 집안은 다 명문인 테고.”
“그렇지. 황제께서 추천하신 아가씨들이란다. 마음에 드는 초상화가 있니?”
“전형적인 몽골계 아가씨들이네요. 어머니는 다 마음에 드세요?”
“나야 네가 좋다면 어느 아가씨도 상관없다만. 썩 내키는 아가씨가 없는 모양이구나.”
“그림만 봐서는 잘 모르겠어요. 얼굴도 정확하게 그려진 것인지도 불확실하고. 목소리나 성격. 자태. 취미. 전혀 모르니까요.”
“하긴, 이 아가씨들을 단체로 초대해서 연회라도 열까? 그러는 동안 너는 저편에서 살짝 보는 건 어떠냐?”
“어머니 좋으실 대로 하세요.”
(투란도트 궁에서 다과회)
“자자. 아가씨들 좌석 앞 탁자에 이름이 적혀 있으니 이름표를 보시고 착석하시면 됩니다. 열 분 다 오셨죠? 네. 모두 앉으세요.”
“자. 여러분. 우리 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편하게 다과를 즐기면 됩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다과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한 편에서 보고 있는 엘리시아 모녀)
“어머니. 몽골 귀족 아가씨들인가 봐요. 다 비슷하게 생겼어요. 확실히 우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네요. 다 눈이 날카롭고 머리카락은 흑색이고 대부분 통통하게 생겼어요. 그리고 체력이 좋아 보여요. 이곳 여자들은 다 말을 잘 탄다면서요? 아. 바지를 입었네. 하긴 말을 타려면 바지를 입어야겠지? 나도 승마를 좀 배울 걸 그랬어요.”
“턱도 없는 소리. 아버지께서 잘도 허락하시겠다. 집 밖에도 못 나가는 애가 무슨 승마?”
“그래요. 우리는 참 답답하게 사는데, 여자들은 사람도 아니에요. 적어도 몽골 아가씨들은 자유롭고 활기차 보여요. 부럽네요.”
“아. 공주님이 오셨어. 착석하신다.”
“그러게요. 어머니. 우리도 이러고 있지 말고 그냥 나가요.”
“그러자. 그편이 공주님도 마음 편하실 것이다.”
(다과회 장소)
“여봐라. 엘리시아를 불러라.”
“네? 엘리시아 아가씨를요? 하지만 방금 모녀께서는 출궁하셨는데요.”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자자. 여러분. 마음껏 다과를 들고, 이야기하세요. 자자. 이쪽 아가씨부터 인사, 소개하는 게 어때요?”
“네, 공주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무칼리 집안의 장녀, 체첵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저는 보고르주 집안의 바야르입니다. 공주님.”
“저는 치라군 집안의 치멕입니다. 공주님.”
“저는 보로굴 집안의 에르덴입니다. 공주님.”
“저는 수베타이 집안의 자르갈입니다. 공주님.”
“저는 야율초재 집안의 어욘입니다. 공주님.”
“저는 지르고가타이 집안의 키릴입니다. 공주님.”
“저는 차가타이 집안의 인케입니다. 공주님.”
“저는 오고타이 집안의 사라입니다. 공주님.”
“저는 수부타이 집안의 암카입니다. 공주님.”
“아. 열 명이 아가씨들이 다 명문가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인데. 특별히 잘하거나 좋아하는 취미가 있나요?”
(저편에서 훔쳐보고 있는 쿠린)
“아. 정말이지. 다 비슷비슷하게 생기고 비슷비슷하게 드세어 보이는 여자들이군. 우리 어머니는 드세도 멋지신데, 저 여자들은 너무 뻔뻔해 보여. 목소리도 엄청나게 크군. 어머니는 누가 마음에 드실까? 아니지. 나 보라고 일부러 만든 자리인데, 자세히 봐야겠지? 다들 전쟁에 나가도 잘 싸울 것 같아. 여전사들의 모임이야.”
(황도 구경 중인 엘리시아 모녀)
“저기, 나인님. 일부러 따라오시게 해서 송구합니다. 잠시 찻집에서 쉴까요?”
“부인,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부인과 엘리시아 아가씨 전담 궁인입니다. 신경 쓰시지 마시고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시면 됩니다. 뭐 물을 것이라든가 부탁하실 것이 있으면 하십시오.”
“우리 모녀가 이곳 말을 잘하지 못하니까 어디 들어가기도, 물건을 사기도, 길을 묻기도 어렵군요. 도와주세요.”
“하. 저도 궁 밖은 잘 모르지만, 저기 찻집이 유명하다고 들었어요. 거기서 잠시 쉬시죠.”
“네. 나인님.”
(황도 찻집)
“어머니. 지금쯤 궁 안에서 다과회가 진행되고 있겠죠?”
“그렇겠지. 몽골 아가씨가 열 분이나 오셨더구나. 다들 쿠린님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쿠린님은 멋지고 자상하시고 섬세하신 분인데. 그 아가씨들은 다들 좀 드세 보였어요.”
“몽골계 아가씨들은 씩씩하고 다부지고 남녀가 평등하다고 하더라.”
“부러워요. 남자처럼 말을 타고 어디든지 다닐 수도 있고. 같이 활도 쏘고 정치나 행정 일에도 참여한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그래서 너는 이곳에 남아서 말도 타고 정치, 행정 일을 배우고 싶니? 그래서 여자 관리라도 하게?”
“여자 관리, 즉 여관도 괜찮지 않나요? 어차피 혼인하지 않을 거면 궁에서 시녀로 지내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멋진 여자의 삶인 것 같아요. 공주님께 부탁드려 볼래요. 여관이 되고 싶다고.”
“너는 공주님의 시녀로 늙겠다고 해놓고 지금은 또 여관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거냐?”
“여러 가지 방안이 있다는 거죠. 적어도 이 황도에서는. 우리 지역과는 하늘과 땅 차이예요. 어머니. 정말이지 전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혼인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정말 여기서 제 능력껏 살고 싶어요. 이곳 여자들은 다 활기차고 능력 있고 제대로 대우받는 것 같아요.”
“나도 이곳 여자들의 삶은 우리와 많이 다른 것을 인정한다. 하긴 우리처럼 사는 여자들만 있는 줄 알았지. 세상은 참으로 넓고 다양하구나. 이래서 우리 지역에서는 여자들을 다 가두고 있나?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 죽으라고?”
“어머니. 집에 가서 아버지께 허락을 받고 싶어도 아버지는 절 가두실 거예요. 차라리 돌아가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칼라프님께 아버지께 제 사정을 이해해달라는 편지를 부탁하려고 해요. 어머니 혼자 돌아가세요.”
“너, 공주님이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오라고 하신 걸 잊었어?”
“그러고 싶지만, 집에 들어가는 동시에 바로 갇히게 될 텐데. 어떡하라고요?”
“너, 이곳에 있더니 이곳 여자애처럼 할 말 바로 하고 어미에게도 대들고 그러는구나? 정말 참으로 빨리 적응한다.”
“어머니. 대드는 게 아니라.... 아. 뭐라고 해야 하지?”
“됐다. 이제 돌아가자. 지금쯤 돌아가면 다과회도 마쳤을 테고. 아가씨들도 다 돌아갔겠지. 그리고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저 나인도 불편할 거야. 우리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혼자서 저쪽에 계속 기다리고 있잖아.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겠니?”
“하긴. 우리 말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럼. 이제 돌아가요. 어머니.”
“나인님. 이제 궁으로 돌아가시죠. 오래 기다리셨죠?”
“네. 부인. 일어나시죠. 계산은 미리 해뒀습니다.”
(투란도트와 쿠린의 대화)
“쿠린? 오늘 다과회는 잘 관람했느냐?”
“관람이라뇨? 무슨 연극공연도 아니고.”
“연극이나 마찬가지지. 그래 배우들은 어땠니?”
“제 눈엔 열 명이 다 비슷비슷했어요. 초상화보다 별반 다르지 않네요. 그 아가씨들은 어떻게 알고 왔나요?”
“그냥 내가 아가씨들을 후원하는 모임의 주최자로 부른 것이지. 물론 그 아가씨들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챘겠지만. 다들 신경 써서 예쁘게 차려입고 왔지 않더냐?”
“그래요? 저는 치장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다음 모임엔 단체로 말을 타고 야외로 나갈 참인데, 너도 같이 참여할 테냐?”
“여자들 모임에 저 혼자 끼어서 뭐 어쩌라고요? 불편해요.”
“그럼 우리가 나가서 있는 동안 아버지랑 산책하러 나온 것처럼 해서 잠시 인사하고 가든지. 그때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는지 슬쩍 보는 게 어떠냐?”
“하긴, 오늘은 대화하는 모습만 봤으니까. 말 타는 모습을 보면 좀 구분이 될까요?”
“활도 쏘고 사냥도 할까? 너도 아버지랑 사냥하면서 지켜보도록 해라.”
“그래요. 어머니.”
(궁에 돌아온 엘리시아 모녀)
“공주님. 다녀왔습니다.”
“아, 부인? 엘리시아. 늦게 왔네요. 황도 구경은 재미있었나요?”
“네. 공주님. 이제 거의 다 돌아봐서. 슬슬 돌아갈까 생각 중입니다. 그동안 폐가 많았습니다.”
“폐는 무슨? 즐거웠다니 다행이고. 그래. 엘리시아. 넌 어땠니?”
“공주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곳 여자들은 다 솔직하게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것 같으니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서 저는 이곳에 남아서 여관이 되고 싶습니다. 여관이 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여관? 너 내 시녀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네. 저기. 저는 여자도 일할 수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더라고요.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고. 또 자유롭고. 평등하고. 멋있어요. 정말. 공주님이 왜 멋진지 이제야 알겠어요.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거. 그게 제가 바라는 바예요. 집안에 갇혀서 첩들과 시기, 질투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엘리시아.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이 어미를 모욕하는 말이다.”
“어머니. 어머니라도 제 편이 되어 주세요. 아버지는 반대하실 게 뻔하시잖아요?”
“자자. 알았다. 그래. 아버지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
“물론, 그래야 하지만, 제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감금되어서 어디론가 시집가게 되고 그 집에서 죽을 때까지 문밖에 나가지도 못할 텐데.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공주님.”
“그래서. 집에 가지 않고 이대로 남겠다고? 네 아버지께서 역정 내실 텐데. 나를 몹시 원망할 테고.”
“공주님과 칼라프님께서 아버지께 서한을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전 집에 갈 수 없어요. 분명히 감금당할 거예요.”
“이런. 칼라프와 상의해 보겠다. 자. 부인. 엘리시아와 가서 쉬세요.”
(투란도트와 칼라프)
“여보. 칼라프. 오늘 후보 아가씨들 열 명을 데리고 다과회를 열었어요.”
“그랬군. 잘했소? 마음에 드는 아가씨는 있고?”
“저야 뭐. 쿠린 보라고 만든 자리인데. 뒤편에서 쿠린이 보고 있었어요.”
“그렇게까지 해야 하오? 쿠린이 그렇게 하겠대?”
“쿠린이야. 내 말을 잘 들으니까요. 그런데 초상화를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네요. 다음 모임은 말을 타고 들판을 달리면서 사냥이라도 해볼까 하는데. 당신 같이 참여할래요? 쿠린도 부르고. 다 같이 사냥하면서 아가씨들을 살피죠? 당신도 며느리 후보들을 봐야 할 것 아녜요?”
“하긴, 나도 궁금하긴 해. 몽골계 아가씨들은 다 당신 같은가?”
“직접 보고 판단하시죠.”
“그렇게 하지. 사냥이라면 나도 자신 있으니까. 쿠린도 함께 데려가도록 하지.”
“저. 그런데 여보. 엘리시아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엘리시아? 당신 후보명단에 없잖소?”
“그야 그렇지만. 그 애가 집에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서 여관이 되고 싶다고 해요.”
“하? 그 지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여자가 관리라니? 정말 혼인을 안 할 생각이군.”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오라고 했더니, 집에 돌아가면 바로 감금되어 원치 않은 혼인하게 될 거고, 그 후엔 그 집에서 죽을 때까지 밖에 나가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야 당연하지. 무슬림들은 여자가 집 밖에 나가지 않아. 평생 두 번 나간다고. 결혼할 때 친정에서 시댁으로. 그다음엔 죽어서 관으로 나가게 되는 거지.”
“세상에. 끔찍해요. 엘리시아가 이해가 되네요. 칼라프, 당신. 그런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이었어요?”
“그래요. 투란도트. 그곳 여자들은 다 그렇게 살다 죽어요. 내가 봐도 엘리시아의 부모 입장이라면 골치 아픈 딸인 것이 분명하지. 내 친구가 속상하겠군.”
“나는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당신도 내가 무척 불편했겠군요.”
“아니야. 나는 당신이 천생연분이라는 계시를 오랫동안 받았기 때문에 다 예상하고 각오하고 있었소. 우리 지역 아가씨가 인연이 아닌 것도 알고 있었고.”
“참. 당신 계시를 받고 왔다고 했는데, 난 그 이야기 잘 몰라요. 쿠린한테 했다면서요?”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나? 나 쿠린 나이쯤 되어서 꿈을 꾸었소.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눈매를 한 차갑고 도도하며 총명하고 영특한 여자. 그 여자를 계속 보았지. 나는 몇 년 동안 그 꿈을 꾸면서 당신 소문을 들었소. 아버지랑 쫓겨와서 이곳에 와서 당신 얼굴을 먼발치에서 보고 꿈속의 여자임을 확인했소. 그래서 바로 도전했소. 수수께끼를 맞출 수 있다고 확신했지.”
“당신, 그럼. 내가 첫 희생자를 낼 때부터 꿈을 꾼 것이었군요. 몇 년 동안이나.”
“그랬지. 몇 년 동안이나 계속 같은 여자가 꿈에 나온다면 이상하다고, 그냥 평범한 꿈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지. 그때 결심했소.”
“쿠린은 어떨까요? 그 애도 계시를 받을까요?”
“모르지. 아직은 별일 없는 것 같던데. 그래. 그런데 투란도트. 엘리시아를 정말 여관으로 만들 작정이오?”
“엘리시아가 나와 당신이 엘리시아 아버지에게 여관이 되게 해주라는 부탁의 편지를 써주길 바라고 있어요. 이곳에 남아서 여관이 되겠대요. 엘리시아는 그냥 같은 여자로서 도와주고 싶어요. 여보.”
“나는 친구의 심정이 이해가 가고, 또 친구의 편에 서야 하는데. 나는 당신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단 말이지.”
“엘리시아는 총명해요. 배움이 빠른 애고요. 황도에 며칠 다니더니 이곳 풍습과 성향을 바로 파악했어요. 이곳 글과 말도 곧 능통할 거예요. 잘 가르치면 반드시 훌륭한 관리가 될 거예요. 인재가 틀림없어요. 여보. 내가 책임지고 교육할게요.”
“그럼 내가 내 친구에게 편지를 쓰지. 절대 거절하지 못할 편지를.”
“고마워요. 칼라프.”
(엘리시아 모친의 귀향)
“여보. 돌아왔어요. 여행 보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당신, 이제야 돌아왔구려. 오래도 걸렸소. 그런데, 엘리시아는 어디 있소?”
“저기. 여보. 으음. 그게. 엘리시아는 그곳에 남았어요.”
“뭐라고? 정말 공주님의 시녀가 되겠다는 거요?”
“그게 아니라. 저기 여보. 칼라프님의 편지를 갖고 왔는데, 읽어보세요.”
(내 오랜 벗이자 엘리시아의 부친에게)
자네, 오랜만이군. 칼라프일세.
지금까지 자네에게 사적인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는 걸 알았어.
전에 자네 부인과 딸을 데리고 와서 지금 황도에 같이 지내고 있네.
물론 자네 부인과 딸은 아주 잘 있어. 걱정할 것 없네.
아니, 너무 잘 있어서 문제가 생겼네.
솔직하게 말하지. 그편이 오히려 나아.
돌려 말하는 것이 오히려 자네를 모욕하는 것이니 말일세.
자네 딸 엘리시아가 황도 구경을 하더니, 이곳 문물과 풍속이 마음에 드는지 이곳에 남아서 여관이 되는 교육을 받고 싶다고 하네. 물론 자네가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아. 하지만 자네만 좋다면 나와 투란도트는 도와주고 싶다네. 엘리시아는 집에서 살림만 하기는 너무 아까운 아이야. 영특하고 재치가 있으며 눈치도 빠르지. 벌써 이곳 황도의 풍속을 습득했어. 그리고 그 재능과 기개를 높이 사고 싶네. 투란도트는 시녀로 있을 그릇이 아니라고 하네. 아주 훌륭한 여관이 될 거라고 기대하지. 어쩌면 나중에 자네 뒤를 이어서 자네 나라를 관리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처음엔 자네 허락을 받아오라고 했는데, 엘리시아가 집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감금당한 채로 시집가게 될 거라고 절대로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네. 물론 나와 투란도트는 곤란한 상황이지. 자네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나는 자네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거든. 과년한 딸이 시집갈 생각은 안 하고 관리가 될 거라고 하다니 청천벽력이겠지? 하지만 나도 이곳에 온 지 20년이 되고 보니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다른 삶이 많다는 걸 깨달았어. 세상엔 무슬림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 물론 우리나라의 풍습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엘리시아는 아직 어리고 재능이 있어. 자신이 삶을 선택할 기회는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네. 자네 부인 편으로 편지를 보내네. 잘 있게. 엘리시아에게는 자네에게 편지를 꼬박꼬박 보내라고 하겠네. 그것은 약속하네. 그리고 나와 투란도트가 엘리시아의 후원자 역할을 잘할 것을 약속하지. 걱정하지 마시게. 그럼 잘 있게.
자네의 오랜 벗. 칼라프.
“아니, 이럴 수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칼라프가 내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여보. 칼라프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려는 거예요. 그리고 엘리시아 고집을 잘 아시잖아요? 당신 닮아서 절대로 굽히지 않을 애예요. 그 애 말이 맞아요. 여기 들어오는 순간 바로 감금되어서 시집가게 되겠죠. 나는 그렇게 사는 것이 익숙하지만, 그 애는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요. 나도 황도에 가보니 세상은 정말이지 넓고, 다양하고, 온 세상 사람이 다 있었어요. 다들 다른 풍속을 갖고도 같이 살 수 있더라고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다 같이 살고 있었어요. 나도 세상을 보고 오니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깨닫게 되었는데, 엘리시아는 오죽하겠어요? 나라도 엘리시아 나이라면 그런 마음이 들었을 거예요.”
“이래서 여자는 집 밖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거야. 조상 대대로 여자가 집 안에서만 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역시나 여행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칼라프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지?”
“여보. 나는 칼라프님과 공주님께 감사하는데요. 우리 딸을 잘 부탁드린다고 했어요. 그리고 공주님은 엘리시아가 적당한 혼처가 생기면 시집도 보내주시겠다고 했어요. 물론 원하지 않는 혼인은 시키지 않겠다셨어요. 그것도 잘된 일이죠. 엘리시아 성격에 강제 혼인은 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당신은 엘리시아를 두고 혼자 돌아왔단 말이오?”
“네. 그랬어요. 당신이 나를 원망해서 이혼이라도 하실 작정이라면 그렇게 하세요. 나는 엘리시아에게 돌아가서 둘이 같이 살 테니까.”
“이런, 이런. 감히 남편을 협박하다니? 이것도 그곳에서 배워온 풍속이오?”
“배워왔다기보다는 남녀가 평등한 모습을 보고 감탄한 것은 사실이에요.”
“시끄럽소. 당신도 당분간 방에서 반성하고 있으시오. 얼굴 보고 싶지 않소.”
“그렇게 하시죠.”
(엘리시아가 아버지께)
아버지.
칼라프님과 투란도트 공주님께서 아버지께 꼬박꼬박 편지하라고 하셔서 편지 써요.
아버지께 처음 쓰는 편지예요. 저는 잘 있어요. 이 편지가 언제 도착할진 모르지만 아마 어머니가 도착하는 것과 비슷할 거예요. 황실편지는 빨리 간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공주님의 궁에서 아주 좋은 방을 얻어서 살고 있어요. 그리고 오전, 오후에 종일 관리가 되는 수업을 받고 있어요. 몽골 언어와 글. 즉 황실 언어. 그리고 한자와 북방계 중국어. 남방계 중국어. 그리고 아랍어. 페르시아어. 라틴어와 회계. 행정법. 외교. 각종 나라의 풍속과 예의범절. 기타 등등. 너무 할 것이 많아서 편지 쓸 틈도 없을 만큼 바빠요. 하지만 편지는 꼬박꼬박 보내겠어요. 종일 수업을 마치면 저녁엔 기절하듯이 잠을 자요. 수업은 개인 교사가 매일 와서 일대일로 받아요. 수업료도 굉장할 텐데. 다 해주시다니. 저는 정말 복이 많아요. 아버지가 칼라프님의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아버지께 감사드려요. 졸려서 이만. 다음에 쓸게요.
엘리시아 올림.
“여보. 엘리시아가 편지를 보내왔소. 당신 얼굴은 보기 싫지만, 편지는 읽어 보시오.”
“엘리시아가 내게는 편지를 안 보냈나요?”
“그렇지. 나한테만 보냈는데. 왜 속상하시오?”
“아뇨. 어서 보여주세요.”
(엘리시아에게)
엘리시아. 엄마야.
너 혼자 황도에 두고 오려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나 역시 네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두고 올 수 있었지. 아버지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엄마가 네 편이 되어줄 테니까. 그리고 여차해서 내가 쫓겨나면 너한테 돌아간다고 했더니, 그냥 방에서 반성하고 있으라더구나. 기가 막혀서. 흥. 하지만...내 걱정을 할 것 없다. 어미는 잘 있으니까.
그래. 공부가 많이 힘들겠지. 여자가 공부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너는 머리가 좋아서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버지에게만 편지 쓰면 된다. 네 아버지는 당신 혼자 편지 받는 것이 내심 기쁘신 모양이야. 그러니 아버지께만 쓰면 된단다. 답장은 내가 하마. 아버지는 아마 자존심이 있어서 답장은 못 하실 거야.
지금도 그곳 풍경이 떠오르는구나. 같이 갔던 찻집, 분위기가 좋았지. 여자들도 그런 곳에서 차를 마실 수 있다니. 참.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구나. 그래. 엘리시아. 너는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훌륭한 관리가 되어다오.
엄마가.
(투란도트 궁)
“여보. 칼라프. 내일이면 아가씨들과 함께 사냥대회를 하려는데, 괜찮아요?”
“그래? 알겠소. 쿠린과 함께 가도록 하지. 이번에 몽골 귀족 아가씨들을 어떻게 생겼나 좀 봐야지.”
“저만한 아가씨는 없어요. 칼라프.”
“저런. 쿠린이 실망하겠군.”
“그러게요.”
(사냥대회)
“여러분. 아가씨들. 공주님께서 사냥대회에 초대하셨어요. 다 모이셨지요?”
“네.”
“오늘은 칼라프님과 쿠린님도 함께 참석하실 거예요. 어때요? 괜찮으시죠?”
“네!!!”
“네. 부상당하지 않으실 만큼만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나팔소리) “뿌우우.”
“공주님, 칼라프님. 쿠린님께서 오십니다.”
“어머나? 쿠린님이야. 세상에. 너무 잘생기셨어.”
“쉿, 조용히 해. 들으시겠다.”
“쿠린님은 내 거야. 넘보지 마. 너희들.”
“누가 할 소리. 이번에 큰 놈을 잡아서 쿠린님께 바쳐야지.”
“이럴 줄 알고 나는 고려에서 진상한 매를 갖고 왔어. 고려매는 사냥 기술이 아주 뛰어나다고.”
“흥? 나는 사냥개를 데리고 왔어. 우리 개도 만만치 않아.”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누가 할 소리?”
(몽골 귀족 아가씨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칼라프와 쿠린)
“쿠린. 아가씨들이 참으로 씩씩하구나.”
“그러게요. 아버지. 저번에 본 모습, 그대로군요.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래. 네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니?”
“글쎄요. 제 눈에는 다 똑같아 보여요.”
“나는 아가씨들이 다 투란도트 같은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구나. 그다지 총명해 보이지도 않고.”
“그러게요. 어머니 같은 분은 세상에 없어요. 아버지가 운이 좋으신 거예요.”
“하하하. 나도 인정한다. 내가 복이 많아.”
“부럽네요. 아버지. 나.... 이러다가 혼인할 수는 있을까요?”
“서두를 필요 없다. 지금 모임은 어디까지나 사교모임이니까. 부담가질 필요 없어. 물론 저 아가씨들은 내심 속셈이 있겠지만.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란다. 네가 원하는 아가씨가 나타날 때까지 이 아비와 네 어머니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단다.”
“하긴, 제가 혼인하면 바로 지방관으로 발령이 날 테니까요. 어머니도 서두르시지는 않으실 거예요.”
“물론이지. 나도 네가 빨리 떠나는 것이 싫구나.”
“네. 아버지.”
(엘리시아가 아버지께)
아버지.
선생님께서 저를 칭찬하셨어요. 저에게 하신 것뿐 아니라 공주님께도 했나 봐요.
공주님께서 아주 기뻐하시면서 곧 관리시험에 응시할 수 있겠다고 하셨어요. 물론 공주님의 입김이면 어디라도 바로 들어갈 수 있겠지만 차근차근 순서대로 하라고 하셨어요. 그것이 장래를 위해 더 나은 길이라면서요. 저도 그러려고 해요.
(엘리시아에게)
장하다. 내 딸. 이제 곧 관리가 되겠구나. 열심히 하되 건강 상하지 않게 해라. 네 아버지는 고래고래 화를 내지만 내심 기쁘신 모양이다. “역시 날 닮아서 똑똑해.”라고 하면서 콧노래를 부르시더구나. 나는 아무 말 안 했다.
엄마.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침궁)
“여보. 칼라프. 오늘 사냥대회는 어땠어요?”
“어땠긴? 쿠린과 신나게 달렸지. 물론 사냥도 하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쿠린 눈치는 좀 어때요?”
“하긴. 당신은 아가씨들과 같이 있느라 쿠린을 못 봤겠군.”
“그래요. 물어볼 틈도 없었어요. 아가씨들 접대하고 보내주느라.”
“나도 그렇고, 쿠린도 그렇고 썩 내키는 아가씨가 없었소.”
“이런. 역시나. 나도 다과회에서 보던 모습보다 더 실망스러웠는데. 쿠린을 보더니 본색이 드러나더군요. 밑바닥까지 다 보였어요. 품위가 없더라고요. 귀족이 그 모양이라니. 관리 수업받는 엘리시아가 오히려 더 품위 있으니. 말 다 했죠.”
“그래. 엘리시아는 수업 잘 받고 있소?”
“네. 교사들이 모두 칭찬해요.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그 애는 훌륭한 관리가 될 거예요. 지금도 말단 관리로는 일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고급관리를 만들어야죠. 황궁 전담으로, 앞으로 아버지 폐하를 모실 수도 있을 거예요. 언어능력도 뛰어나고. 5개 국어에 능통하더군요. 그렇게 빨리 배우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해요. 여보. 내가 사람 보는 눈은 뛰어나잖아요?”
“그러게나 말이요. 쿠린은 어떤 여자를 좋아할지?”
“엘리시아가 몽골계 귀족이기만 하면 바로 며느리 삼을 텐데. 안타까워요.”
“그렇소?”
(칼라프와 쿠린의 대화)
“쿠린. 요즘 어떠냐?”
“뭐. 별다른 것은 없어요. 늘 똑같은 일상?”
“너도 앞으로 지방관이 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잘 되고 있니?”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버지. 시찰 다녀온 뒤로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필요한 과정이니까요. 파견되면 궁금하거나 묻고 싶은 것이 있어도 물을 곳도 없으니. 지금 열심히 배워야죠. 선생님 계실 때.”
“그래. 그런데 혼자 공부하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니?”
“불편할 것이 뭐가 있어요? 일대일 수업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아니. 지금 엘리시아가 역시 관리 수업을 받고 있으니까. 함께 수업하는 건 어떨까 해서. 물어본 거야.”
“그래요? 그 애도 관리 수업을 받는다고 했죠? 하지만 나는 수령의 수업이고, 그 애는 관리의 수업인데. 서로 과목이 다르지 않나요? 아버지?”
“그렇지. 하지만 같은 과목도 있을 거야.”
“그래도 진도가 많이 틀릴 텐데. 제가 훨씬 앞설 텐데요? 나는 공부 시작한 지 오래되었잖아요?”
“그 애가 어찌나 배움이 빠른지 교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한다. 너도 보면 아마 놀랄 거야. 5개 국어에 능통하고 법률이면 법률, 행정 일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관리 일을 바로 하라면 할 수 있는데, 네 어머니께서 고급관리로 만들어야 한다며 특별 훈련을 시키고 있다. 황궁에서 폐하의 일을 하게 될 거야.”
“저런? 그 정도예요? 놀라운데요. 하긴 그 정도 인재라면 할아버지께서 탐내시겠는데요?”
“그러니, 같이 수업받아보라는 거야. 서로 경쟁이 되면 진도가 더 빠르지 않겠니?”
“그렇단 말이죠? 이런. 나도 의욕이 솟는데요. 여자애에게 질 수야 없죠. 그것도 한참 후배인 아이에게.”
“하하하. 내 이럴 줄 알았다. 어디 같이 수업을 해보렴.”
(엘리시아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열심히 잘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부터 수업시간에 쿠린님이 들어오셨어요.
과목이 다른 줄 알았는데, 겹치는 것이 많다고 하시면서요.
쿠린님은 굉장해요. 열심히 하세요. 집중력도 뛰어나시고 물론 총명하시고 잘생기시고 자상하세요. 우리는 서로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경쟁하고 있어요. 쿠린님은 나보다 먼저 시작하셨으니 지고 싶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저도 마찬가지예요. 어린 여자라고 얕보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제 밤에 자는 시간까지 줄여서 공부하고 있어요. 쿠린님께 모자란 아이로 보이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
(엘리시아에게)
엘리시아.
쿠린님이랑 같이 공부를 하다니 정말 놀랍구나.
네가 열심히 잘한다는 건 알았지만 쿠린님과 같이 수업을 받다니. 그 정도인 줄은 몰랐구나.
너는 정말 못 말리는 애야. 쿠린님은 남자이고 선배인데 너한테 지고 싶으시겠니?
적당히 해라. 네가 쿠린님보다 앞서지 말라는 거다. 나서지 말고. 알겠니?
너는 쿠린님께 잘 보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니? 남자는 여자가 자기보다 잘난 것을 좋아하지 않아. 너는 그렇게 보이고 싶은 거냐? 하긴, 그것도 쿠린님이 너를 여자로 볼 때의 이야기이지만.
엄마가.
(투란도트와 쿠린의 대화)
“쿠린. 엘리시아와 함께 수업해 보니 어떻든? 해볼 만하니?”
“어머니. 엘리시아는 정말 대단해요. 그렇게 영특한 애는 처음 봐요. 이제 제가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공부하고 있다고요.”
“그래? 그 애는 고급관리가 될 거야. 이 어미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 곧 할아버지께 보낼 거다.”
“그래요? 같이 하니까 서로 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혼자 할 때 보다 진도가 몇 배는 빨라요. 어머니. 진즉 같이할 걸 그랬어요.”
“그 애가 황궁에 들어가면 섭섭할 것 같으니?”
“혼자 할 땐 몰랐는데, 같이 하다가 가면 섭섭할 것 같긴 해요. 어머니. 우리는 서로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하고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하여튼 지금까지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요즘 너무 공부가 재미있고, 즐거워요. 어머니.”
“그래? 그러면 더 데리고 있을까?”
“그래요. 어머니. 황궁에는 좀 천천히 보내고 되지 않나요? 할아버지는 인재라는 인재는 다 데리고 계시는데. 엘리시아 한 명 좀 늦게 간다고 뭐 달라질 게 있어요?”
“하긴. 아버지 황제보다도 네가 나중에 지방관이 되면 널 보좌해줄 뛰어난 관리가 필요하지.”
“어머니? 혹시 저를 보좌할 관리를 만드시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생각은 못 했다만. 너를 위해서 준비해야겠구나. 네가 혼자 객지에서 고생하지 않도록 제대로 일을 봐줄 보좌관이 있어야 해. 그게 남자든, 여자든 할 것 없이.”
“그러시구나. 어머니. 엘리시아를 할아버지께 보내지 마세요. 저는 그 애가 무척 마음에 들어요. 우리는 서로 마음이 잘 맞아요. 대화도 잘 통하고. 그 애는 훌륭한 보좌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 저녁에 류를 타고 산책하는데 엘리시아를 데려가도 돼요?”
“왜? 엘리시아가 말을 탈 줄 아니?”
“아니요. 하지만 말을 타보고 싶다고 했어요. 몽골 여자들이 부럽다고. 말 타는 것이 그렇게 멋져 보인다면서요. 그리고 어머니. 제 보좌관이 되려면 말도 타야 하잖아요. 그래야 저를 보좌하죠. 저를 따라다니려면 함께 말을 타야죠.”
“그렇구나. 황궁에서 아버지 폐하를 보좌하려면 말 탈 일은 없겠지만, 네가 데리고 있으려면 말도 타야겠구나. 알았다. 저녁에 승마 수업을 하도록 해주마. 엘리시아를 위한 말이 있어야겠구나.”
“고마워요. 어머니. 약속했어요. 절대 할아버지께 보내지 마세요. 엘리시아는 제 보좌관이 되어야 해요.”
“오냐. 약속하마.”
(엘리시아가 아버지께)
아버지.
놀라지 마세요.
저 오늘부터 저녁에 승마수업도 해요.
공부 복습 시간이 줄었지만 그래도 너무 좋아요. 저는 말을 타고 싶었거든요.
선생님께서 말도 잘 탄다고. 몽골 아가씨들만큼은 아니지만 잘 타는 편이라고 하셨어요.
감사하게도 공주님께서 제 전용 말까지 사주셨어요. 제 말은 암말인데, 순한 말이에요. 이름은 쿠린님 말이 류라서 제가 링이라고 지었어요. 류와 링은 사이가 좋아요. 호호.
몇 번 낙마할 뻔했는데, 무사히 버텼어요. 링이 절 도와줘요.
아버지. 아버지 혼자 말 타시는 게 좋았나요?
어머니랑 같이 타보시는 건 어때요? 좋아하실 거예요.
엘리시아가.
(엘리시아 부모의 대화)
“여보. 엘리시아가 말을 탄다는구려.”
“네? 정말이에요? 얘가 정말 팔자가 늘어졌네요. 소원성취했네. 몽골 아가씨들 말 타는 것 부럽다고 난리 치더니만.”
“아니, 그 동네는 여자애들이 말을 타고 다닌단 말이오?”
“물론이죠. 말 타고 활 쏘고 사냥도 해요. 여보.”
“정말.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군. 엘리시아가 그렇게 살겠단 말이지.”
“나는 좋아요. 우리 딸이 집 안에만 갇혀 있을 애가 아니니까.”
“하여튼, 공주께서 엘리시아에게 링이라는 순한 암말을 사주셨다는구려. 감사하게도. 쿠린님이랑 같이 승마를 하는 모양이야. 수업도 같이 받고.”
“정말이에요? 엘리시아가 정말 소원을 다 풀었네요. 좋겠다. 부럽다.”
“당신도 말이 그렇게 타고 싶었소?”
“아? 그게 아니라. 그 애가. 저기. 으음. 아니다. 네네. 저도 타보고 싶네요. 당신이 가르쳐 주겠어요?”
“내가 어떻게? 난 못 가르쳐. 답답해서. 하지만 정 당신이 타고 싶다면 승마 선생을 붙여주지. 그런데 승마 선생은 남자인데, 수업이 가능하나? 역시 내가 가르쳐야 하는 거야?”
“당연하죠. 외간 남자를 만날 수가 없는데. 남자라고는 당신밖에 없잖아요?”
“할 수 없지. 따라 나와요.”
“정말이에요? 여보. 고마워요.”
“엘리시아가 당신과 함께 말을 타보라고 했소.”
“여보. 이런. 딸 덕에 호강하는데요?”
(몽골 귀족 아가씨들과 다과회)
“여러분. 오늘도 다과모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곧 공주님께서 나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 사냥대회 때, 쿠린님. 칼라프님이랑 잠깐 나오시고는 바로 사냥하러 가시는 바람에 제대로 얼굴도 못 봤어. 속상했어.”
“나도 마찬가지야. 실컷 예쁜 사냥복을 새로 맞춰 입고 왔었거든.”
“말도 마. 나는 아버지의 고려 매까지 빌려왔었다고. 혹시라도 쿠린님과 대화거리가 될 것 같아서.”
“내 사냥개들도 사냥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쿠린님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지.”
“공주님이십니다.”
“쉿. 조용.”
“아. 아가씨들. 반가워요. 전에 사냥모임 이후로 처음이군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공주님.”
“그때 사냥대회 일등은 아쉽게도 우리 쿠린이 잡은 사슴이 제일 큰 동물이었어요. 여러분은 그만 순위에 들지 못했지요.”
“네. 공주님. 쿠린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물론 쿠린 혼자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칼라프가 도와줬을 테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다음엔 더 좋은 기회가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은 여러분. 이렇게 모인 김에 시를 써보는 건 어때요? 오늘의 주제는 저번 사냥대회에 관련해서 시(詩)를 쓰는 것입니다. 자. 여봐라. 아가씨들에게 지필묵(紙筆墨)을 대령해라.”
“네. 공주님.”
“이런. 시라니? 시를 써본 적이 없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공주님은 시를 좋아하시나?”
“생각지도 못했어. 시를 쓰라니.”
“자. 부담 갖지 말고 쓰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쓰세요. 시가 아니라 사(詞)를 쓰고 싶으면 사를 써도 좋아요. 어떤 종류의 글이라도 좋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쓰도록 해요.”
(투란도트와 쿠린과 엘리시아)
“얘들아. 오늘 수업은 잘 마쳤니?”
“네. 어머니.”
“네. 공주님.”
“오늘 낮에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시간에 아가씨들과 문예 모임을 가졌었단다.”
“그랬군요.”
“여기 그 아가씨들이 쓴 시와 사들이 있는데, 한번 보겠니?”
“.......?”
“.......?”
“여기서 장원을 뽑아보도록 해라.”
(골똘히 읽고 있는 쿠린과 엘리시아)
“어머니. 딱히 마음에 드는 글이 없는데요. 이 아가씨들은 글을 써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아니 읽어 본 적도 없는 게 아닐까요?”
“나도 놀랐단다. 아가씨들. 사냥대회 때는 매우 씩씩하더니. 글재주는 썩 좋지 못하더구나. 그래도 장원을 뽑아서 다음 모임에 상을 내려야 해. 우리 친선모임의 주최자로서 할 일은 해야 하니까.”
“공주님. 저는 그래도 이 글이 가장 나은 것 같아요. 서툴긴 해도 마음이 잘 담겨 있어요.”
“어디 보자. 음. 넌 이 글이 가장 마음에 드니?”
“네. 사냥하러 왔다가 사냥감도 못 잡고. 임도 제대로 못 뵈었다는 심정이 솔직하게 표현되었네요. 물론 형식은 하나도 맞지 않지만, 자유로운 문장이네요.”
“그래. 그럼 이 글을 장원으로 하고. 다음 모임은 사생대회로 할까?”
“아가씨들 그림 솜씨를 보시게요?”
“그래. 엘리시아. 너는 너희 집에 있을 때, 무슨 수업을 했니?”
“전 음악수업, 무용수업, 그리고 시와 글쓰기 수업. 그림도 그리고 자수도 놓고. 요리도 배웠죠.”
“그래?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전혀 하지 않았구나.”
“여기서는 5개 국어, 역사, 철학, 법률, 행정 일을 배우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시간이 부족한데요. 쿠린님에게 따라가려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쿠린은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한 것이니까, 그리고 너 집에서 배웠던 것도 다 중요한 과목인데, 그만두는 것은 좀 아깝지 않니? 한 번씩 노래도 부르고 그림도 그리고 시도 써보렴.”
“요즘은 승마까지 시작해서 제 몸이 열이라도 부족할 판인데, 짬짬이 해보겠어요.”
“쿠린. 너는 시를 써본 적이 있니?”
“어머니. 시를 읽기만 했지 직접 쓰진 않았어요.”
“그림은 그려봤니?”
“아니요.”
“노래나 악기 연주는?”
“듣기만 했지. 제가 해본 적이 없네요.”
“이런. 내가 아들을 잘못 가르쳤구나. 내일부터 문학, 음악, 미술 수업도 해야겠다. 엘리시아, 너도 같이하렴. 문학, 음악, 미술은 엘리시아 네가 더 잘할 테니까, 쿠린을 잘 도와주렴.”
“이런. 어머니. 엘리시아에게 배워야 해요?”
“선생님이 가르치시지. 엘리시아는 선배이고.”
“쿠린님. 그 대신 법, 행정, 역사, 철학, 언어는 쿠린님이 훨씬 잘하시잖아요? 제가 늘 배우고 있고. 도와주셨으니까. 예술 과목은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 쿠린.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넌 엘리시아를 도와줄 때, 엘리시아가 부끄러워하든?”
“아니요!”
(엘리시아가 아버지께)
아버지.
어제 공주님께서 아가씨들과의 모임에서 글쓰기를 하셨었는데, 그 글의 심사를 제게 맡기셨어요. 물론 쿠린님도 같이 했지요. 장원을 뽑으라고 해서 하나 골랐어요. 공주님께서는 저보고 시를 써본 적이 있냐고 물으시기에 집에 있을 때, 시도 쓰고 노래도 악기도, 그림도, 자수도 요리도 했다고 했더니. 오늘부터 문학, 음악, 미술 수업도 쿠린님과 같이 시작하라고 하셨어요. 배운 것이 아깝다고 하시면서요. 덕분에 저는 잠잘 시간이 더 줄어들게 되었어요. 하지만 매일, 매일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어요. 역사, 철학, 법, 행정, 언어와 승마는 쿠린님이 절 도와주시고, 음악, 미술, 시, 문학은 제가 도와드려요. 쿠린님과 저는 정말 대화가 잘 통하고 우리는 모든 수업에서 서로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엘리시아가.
(엘리시아 부모의 대화)
“여보. 엘리시아가 드디어 실력을 뽐내게 되었소. 지금까지 우리가 가르친 것이 드디어 빛을 보는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음악, 미술, 문학 수업을 쿠린님과 시작하게 되었다는군. 우리가 열심히 가르친 것들 말이야.”
“아. 그렇군요. 그곳에서는 그런 것들은 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아들, 딸 똑같이 키운다고 생각해서. 같이 말 타고 사냥하고 바깥일하고 그런 줄 알았죠. 역시 기본적인 것도 다 하는 모양이네요.”
“그렇지. 그리고 쿠린님도 똑같이 하신다고 하니. 남녀가 다 같이 같은 것을 배우는 모양이야.”
“그래요. 여보. 나도 이제 제법 말 타는 것이 능숙해졌어요.”
“그래. 누가 가르쳤는데? 그리고 당신 말 탈 때, 두건이 벗겨지지 않도록 잘 동여매도록 하시오. 전에 두건이 풀어졌지 않소?”
“조심할게요. 거의 눈만 내놓고 머리와 얼굴, 목을 다 감싸고 타니까, 앞이 잘 보이지 않아요. 승마용 두건을 새로 만들어야겠어요. 벗겨지지도 않으면서 앞도 잘 보이는 것으로.”
“그렇게 하든지. 그런데 말이야. 주변에서 다들 숙덕거리오. 여편네를 집 밖으로 내돌리다 못해 말까지 태우고 다닌다고. 팔불출이라고 손가락질한다지?”
“여보.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여자들 다 부러워서 자기 남편들에게 바가지 긁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남편들이 불편하니까 괜히 당신 트집 잡는 거라고요. 나는 요즘 너무 행복하고. 다른 여자들이 날 얼마나 부러워하는지도 다 아니까. 좀 우쭐하고 그러네요.”
“하긴. 나도 당신과 같이 말 타는 것이 즐겁소. 당신이 그렇게 운동신경이 좋은지도 처음 알았지. 엘리시아가 당신을 닮았나?”
“집안에만 있을 때는 뚱뚱하고 거동하기 힘들었는데, 요즘 매일 당신과 말을 타니까 몸도 가벼워지고 건강해졌어요. 내가 살이 빠져서 당신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가요?”
“하긴, 여자가 살이 빠지면 매력이 좀 줄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즐거워하고 체력이 더 좋아졌다고 하니 나도 기쁘오. 살이 빠져도 괜찮으니 매일 나랑 말을 탑시다.”
“엘리시아 덕에 내가 이렇게 행복해지다니. 딸 덕을 보네요. 단, 같이 있지 못해서 아쉽지만. 그 애가 너무 행복해하니까 나도 좋아요.”
(저승)
“전에 내려보냈던 왕자들 말이야. 다들 잘들 있나?”
“염라대왕님. 전부 여자로 환생시키셨잖습니까?”
“그랬지. 그래. 시집갈 때가 되지 않았나?”
“그렇습죠. 몇몇은 벌써 시집을 갔는데, 열 명이 남았습니다.”
“열 명이라. 다들 귀족 아가씨들일 텐데, 왜 여태 시집을 가지 않았지?”
“그것이 전부 쿠린을 사모하고 있어서 다른 데 시집가지 않고 버티고 있다 합니다.”
“쿠린?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아들 말이냐?”
“그렇습니다. 쿠린이 장성해서 곧 혼처를 구할 모양입니다. 투란도트가 열심히 며느리 후보들을 모으고 있죠.”
“그 며느리 후보명단에 그 열 명이 있다는 거냐?”
“예. 대왕마마. 어쩌면 전생과 그리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남녀만 바뀌었을 뿐. 그때는 투란도트에게 청혼했다가 죽었는데, 이제는 여자로 태어나서 청혼은 못 하고 투란도트의 아들에게 간택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쿠린은 그중 누구를 마음에 들어 하느냐?”
“아무도요. 대왕님. 아무도 없습니다. 쿠린은 제 아버지 칼라프의 친구의 딸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칼라프의 친구의 딸?”
“그리고 그 딸도 쿠린을 사모하고 있고요. 엘리시아라고 합니다.”
“엘리시아라. 그 애는 몽골계 귀족이 아니군.”
“그렇죠. 그래서 투란도트도 칼라프도 선뜻 며느리로 뽑지 못하고 있습니다. 쿠린의 보좌관으로 키우고 있죠. 애가 영특하고 재능이 남다르고 또 쿠린을 좋아하는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무서운 투란도트죠. 자기 아들을 사모하는 것까지 다 알고 보좌관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전생의 업을 끊으라고 기억도 지우고 여자로 보냈건만,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 같으니라고. 에잉. 쯧쯧.”
“그러게나 말입니다. 게다가 쿠린은 제 부모를 닮아서 일부일처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 열 명의 아가씨들은 희망이 없는 게 아니냐?”
“그렇습니다. 쿠린이 첩을 들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아가씨들도 다들 신분이 높아서 첩이 되려고 들지도 않을뿐더러. 서로 자기가 부인이 되겠다고 싸우는 중이죠. 투란도트는 매번 며느리 후보들을 심사하고 있고요.”
“투란도트가 며느리 후보자들을 심사하고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대화, 사냥, 저번엔 글쓰기까지. 다음엔 그림을 그리라고 한답니다.”
“그다음엔 노래를 부르라고, 악기를 연주하라고 하겠지? 다음엔 요리나 자수? 아니면 무용?”
“아마도요. 순서대로 다 볼 모양입니다. 눈이 높긴 합니다. 며느리 하나 뽑는데 무슨 심사과정이 이리 복잡한지.”
“여자가 어미가 되면 다 똑같아지는 법이야. 시어머니가 된다고. 그건 세상이 두 쪽 나도 바뀌지 않아.”
“그렇군요. 대왕님. 저는 이곳에서 혹독하게 지옥 불 수련까지 받고 태어난 영혼들이 또 사랑을 얻지 못하고 슬퍼하게 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기억을 지워도 소용이 없네요. 같은 일의 반복이라니.”
“내가 할 말이다.”
(몽골 귀족 아가씨들의 사생대회)
“여러분, 각자 자리 앞에 종이에 마음껏 그림을 그리도록 하세요. 수묵담채화도 좋고 채색화도 좋습니다. 지필묵과 물감들을 다 분배하였으니 각자 시작하세요.”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이야? 저번엔 시를 쓰라고 하시더니 오늘은 그림이야?”
“우리가 화원(畫員)도 아니고 그림은 무슨 그림이야? 공주님도 너무 하시네.”
“쉿. 조용히 해. 궁인들이 듣겠다.”
“몰라. 몰라. 공주님. 정말 너무하셔. 이러다가 다음엔 노래나 춤. 악기를 연주하라고 하실 것 같아.”
“응? 노래나 춤? 악기?”
“너는 그중에 하나라도 할 수 있는 게 있어?”
“그래도 춤은 좀 배웠다.”
“그래? 나는 비파를 좀 타.”
“얘들아. 나는 그래도 그림을 그려봤어. 아버지가 그림을 좋아하셔서 많이 모으시거든. 그래서 종이에 좀 끄적대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그려본 적은 없어.”
“흥. 잘났다. 너 자랑하냐?”
“안 되겠어. 이 모임. 단순한 사교모임이 아니야. 공주님은 매번 우리를 심사하시는 것 같아.”
“그러게. 단순히 공주님께 예쁘게만 보이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야. 매번 채점하시는 거야.”
“웬일이니? 당장 집에 가서 수업을 받아야겠어. 다음엔 또 무엇을 요구하실지 모르니까.”
“그런데, 얘들아. 무엇을 하든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열심히 배워두는 건데.”
“누가 아니라니?”
(사생대회를 마치고 그림을 심사하는 투란도트와 엘리시아)
“엘리시아. 오늘 그림 중에서 그림 같은 그림이 있느냐?”
“저기. 공주님. 그림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있는 것을 장원으로 뽑을까 합니다.”
“그래. 네가 알아서 뽑도록 해라. 그리고 다음엔 무슨 심사를 할까? 엘리시아?”
“다음엔 노래나 악기 연주를 보시죠.”
“그래? 엘리시아 네가 노래를 정말 잘 부르는데. 우리나라 노래와는 좀 다르긴 하지만. 넌 우리 몽골 노래도 금방 배우겠더구나.”
“이곳 노래는 매우 특이해서 배우기 어려워요. 우리 지방 노래는 섬세하고 슬픈 느낌이죠.”
“그래. 매우 처연하더구나. 여자들의 삶이 슬퍼서 그런가?”
“아뇨. 남자들이 더 많이 부르는데요. 남자들도 다 그렇게 슬픈 노래를 해요.”
“특이하군. 나라마다 고유의 색이 다 있어. 독특해.”
“다음엔 음악 심사를 하시고, 그다음엔 자수 심사를 하시는 건 어때요?”
“그렇게 하겠다.”
“그다음엔 춤?”
“아마도 춤은 다 잘 출 것이다. 몽골계 아가씨들은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니까.”
“저도 보고 싶어요. 아가씨들은 어떤 춤을 출까요?”
“뒤편에서 살짝 보든지?”
“그래요?”
“아니다. 다음 음악 심사 때, 나와 같이 심사를 보도록 하자. 음악과 무용은 따로 채점할 수가 없잖니?”
“하긴, 노래나 연주, 무용은 그 순간밖에 볼 수가 없으니까요. 따로 채점은 불가능하죠.”
“그래. 엘리시아. 다음 음악대회부터는 나랑 같이 들어가자.”
“네, 공주님.”
“어머니? 저는?”
“쿠린? 너도 있었니?”
“어머니 왜 저를 쏙 빼놓고 엘리시아만 부르셨나요?”
“너는 대회나 심사 때 들어가면 안 되니까 그렇지.”
“하긴, 쿠린님이 들어오시면 대회가 제대로 진행이 안 될 텐데. 아가씨들이 긴장하거나 동요하셔서.”
“그래. 그리고 네가 들어가면 며느리 심사라는 게 너무 분명해져서 안 된다. 물론 그 정도는 그 아가씨들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그래. 사냥대회는 잠깐 아버지랑 나올 수 있었지만. 그 외는 네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채점할 실력은 더더욱 아니지 않니?”
“어머니. 엘리시아가 문학, 예술에 뛰어나다고 지금 편애하시는 거예요?”
“편애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잘하니까, 채점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거다. 너는 전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알겠니? 정 보고 싶으면 뒤편에서 살짝, 몰래 보도록 해라. 절대로 아가씨들에게 들키면 안 돼. 알았니?”
“네. 어머니. 저도 궁금하긴 해요. 음악. 무용 같은 것들은 그 순간이 아니면 볼 수 없으니까요. 혹시 알아요? 제대로 잘하는 아가씨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응? 혹시라도 마음에 들만한 아가씨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냐?”
“그야 모르죠. 심사는 사실 제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머니? 제 부인 후보자라면서요?”
“그래. 알았다. 앞으로는 뒤편에서 심사하도록 해라. 들키지 않게.”
(엘리시아가 아버지께)
아버지.
공주님께서 음악대회 심사를 저보고 같이 하자고 하셨어요. 아. 무슨 말씀인가 하면요. 공주님께서 주최하신 아가씨들 친선모임인데요. 단순한 다과모임, 사교모임이 아니라 사실은 며느리 후보들 심사하시는 거예요. 글이나 그림, 사냥은 모아서 채점했었는데요. 음악, 무용은 그 순간밖에 볼 수 없어서 따로 채점하지 못하니까 직관으로 심사하는 거죠. 그런데 쿠린님도 부득불 심사하시겠대요. 공주님께서 뒤편에서 살짝 보라고 하셨어요. 아가씨들 동요하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쿠린님은 지금까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시더니 갑자기 아가씨들 심사에 관심을 가지셨어요. 좀 놀랐어요.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좀 충격이에요.
엘리시아가.
(엘리시아 부모의 대화)
“으음. 여보. 혹시 엘리시아가 쿠린님을 좋아하는 건 아니오?”
“사실은.... 올 것이 왔네. 네네. 그래요. 쿠린님이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사모했어요.”
“맙소사. 그래서 그 애가 집을 나간 거요?”
“원래도 나가고 싶었는데, 쿠린님을 보고 마음을 확실히 굳힌 거죠.”
“이런. 아무리 노력해도 혼인하지 못할 텐데. 이 일을 어쩌지?”
“투란도트 공주님이 그렇게 며느리 후보들을 심사하고 계시는데, 저도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마음을 접겠죠. 아마 공주님이 엘리시아의 마음을 눈치채고 일부러 며느리 심사에 참여시키시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뭐라고? 공주님이 엘리시아의 마음을 아실지도 모른다고?”
“그런 것 같아요. 아니면 왜 엘리시아 보고 며느리 심사위원을 시키겠어요? 알아서 접으라는 거지. 이런. 엘리시아. 불쌍해서 어쩌지?”
“이런. 첩이면 가능하려나?”
“여보! 엘리시아의 성격을 모르세요? 그 애. 첩, 그딴 것이 싫어서 혼인 거부하고 공주님 시녀로 들어가겠다고 나간 아이예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하긴. 엘리시아 성정에 첩은 죽어도 못하겠지. 제가 본부인이 되어도 첩을 두는 것까지도 죽도록 싫어하는데.”
“당연하죠. 투란도트 공주님처럼 일부일처 아니면 죽어도 혼인하지 않을 거예요.”
“낭패군. 어떻게 이런 일이.”
“여보. 나는 이미 예상하던 일이에요. 그동안이라도 엘리시아가 행복하게 지내는 것으로도 만족해요.”
“그건 또 아니지. 아비가 되어서 딸이 이런 지경인데, 얼마나 속상하겠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까요.”
“칼라프에게 편지라도 써 볼까?”
“여보. 칼라프님도 쿠린님의 혼인 문제에 대해서는 권한이 없어요.”
“무슨 소리야?”
“칼라프님도 몽골인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지방관으로 파견도 못 하신 거고. 제 말이 틀려요?”
“이런. 그렇군. 칼라프도 이방인이었지. 하아.”
(내 소중한 벗 칼라프에게)
칼라프.
자네 이름을 이리 불러보는 게 얼마만 인지. 세월이 참 유수와 같군.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줄곧 친구였잖나?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자네를 친구로 대할 수가 없게 되었네그려. 나는 지방관이고 자네는 몇 년마다 들르는 사찰관이 되었지.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옛정을 생각해서 친구로서 자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네. 이해해 주시게.
칼라프.
내 딸이 자네 궁에 들어가서 공주님과 자네가 이만저만 고생하는 게 아니겠지? 그 애는 욕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이 많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나는 애비가 되어서 엘리시아에게 제대로 해준 것이 없네. 집안에 가두기만 했지. 친구들도 못 만나게 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조금만 엘리시아의 마음을 알아줬더라면 그 애가 집을 나갈 생각까지 했을까? 싶기도 하다네. 이런. 서두가 길어졌군.
칼라프.
정말이지 이 편지를 쓰는 심정이 어떤지 자네는 모를 거야. 자네도 자식을 둔 애비라면 내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거야. 참으로 쓰기 괴롭다네. 사실은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엘리시아가 자네 아들 쿠린을 사모하는 것 같아. 놀랐겠지? 나도 그렇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엘리시아는 처첩을 거느리는 삶을 싫어해서 자네 궁으로 도망친 아이야. 그런데 그런 딸이 자네 아들을 사모하고 있다네. 그 애는 아마도 평생 처녀 귀신으로 늙어 죽을 모양이야. 본래도 그랬는데 쿠린을 사모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그러하겠지? 자네도 이방인으로서 힘든 삶을 산다는 것을 잘 알아. 우리 딸도 그런 것 같아 마음이 미어진다네. 쿠린은 아마도 몽골 황족 아가씨와 혼인하게 되겠지?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엘리시아를 생각하니 애간장이 찢어질 것 같군. 자네나 나나 자식이 하나뿐인데. 자네나 나나 다 소중한 자식이겠지? 딸자식 걱정에 잠 못 드는 애비의 심정을 십 분이나마 헤아려주시게. 잘 지내게.
추신:
투란도트 공주님께는 비밀로 해주시게. 공주님이 아시면 우리 엘리시아가 더 불편할 걸세. 자네도 부디 우리 엘리시아에게 티 내지 말아 주시게. 엘리시아를 잘 부탁하네. 날 진정한 벗으로 생각한다면 부디 그리해주게나. 잘 있게. 우리 엘리시아 잘 부탁하네.
자네의 오랜 벗 압둘라.
(칼라프와 쿠린의 대화)
“쿠린?”
“네? 아버지. 제 방엔 웬일이세요?”
“음. 공부하느라 바쁘냐?”
“아니, 오늘 수업은 다 마치고 저녁 먹고 잠시 쉬려는 참이죠.”
“그래. 아버지가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아버지.”
“요즘 엘리시아랑 수업 같이 받는 건 좀 어떠냐?”
“아? 그 말씀이세요?”
“그래. 같이 수업하고 있잖니?”
“아버지. 정말이지. 왜 지금까지 혼자 공부했나 싶어요. 엘리시아는 정말이지. 저를 분발하게 만들어요. 그래도 내가 나이도 많고 공부도 일찍 시작했는데 그 애에게 뒤처질 순 없잖아요. 저도 기를 쓰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 내가 가르칠 수 있어야죠.”
“음. 경쟁자로 괜찮다는 뜻이냐?”
“아니? 뭘 또 그렇게 말씀하세요?”
“아니. 그 애가 영특하다고는 들었다. 진도가 매우 빠르다더구나. 네 어머니가 황궁 전담 관리를 시키려다가 너의 보좌관으로 키우겠다고 했어. 너도 바라는 일이니?”
“물론이죠. 아버지. 제가 어머니께 부탁했어요. 할아버지께 보내지 말아 달라고. 제 전담 보좌관으로 달라고 했어요. 엘리시아는 총명하고요. 그 애는 저의 눈빛만 봐도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아요. 우리는 따로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아요. 서로 알아차릴 수 있거든요.”
“그래? 보좌관으로 달라고 했단 말이지?”
“그럼요. 어머니도 허락하신 일인데. 왜? 아버지는 그 애가 마음에 안 드세요? 역시 아버지는 남자 보좌관이 더 낫다고 생각하세요?”
“아? 그런 뜻이 아니야. 역시 엘리시아는 총명하고 능력이 있구나. 네 마음에도 꼭 들고. 너의 뜻도 잘 알아채고. 그렇단 말이구나.”
“아버지. 왜 자꾸 엘리시아 이야기를 하세요? 엘리시아가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설마? 내 절친한 벗의 유일한 딸인데. 나도 그 아이가 행복하길 바란단다. 나는 단지 엘리시아가 예쁜 여자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런데 넌 그 아이를 정말 훌륭한 보좌관이라고 여기는 것 같구나.”
“아버지?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면 다른 생각이라도 드는 게야?”
“실은... 아버지. 그동안 오랫동안 생각했었는데 의논할 상대가 마땅찮아서 지금까지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응? 그게 무슨 말이니?”
“사실 아버지. 저는 엘리시아가 정말 좋아요. 보좌관으로서도. 여자로서도. 처음엔 당황했어요. 이런 기분 처음이고. 사실 젊은 여자를 보는 것도 처음이니까. 그래서 그런 줄 알았어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열심히 심사 중인 여자들을 계속 보고 있자니.....점점 더 엘리시아만 예쁘게 보여요. 다른 여자들은 정말 싫어요. 그 드세고 시끄럽고 교양도 없고 못 생긴데다..... 아니지.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지.....”
“쿠린. 너 엘리시아를 좋아하고 있니? 여자로서?”
“사실이에요.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지만. 처음 보는 여자라서 그런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했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좋아지는걸요. 하지만 어머니는 엘리시아를 정말로 제 보좌관으로 여기시는 것 같아서 내색하지 못했어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도 않지만 제 마음은 계속 커지고 있거든요.
아버지. 어머니께는 말씀하지 마세요. 저도 생각 중이에요. 그리고 엘리시아는 내 마음 아직 몰라요....”
“알겠다. 함구하고 있으마. 네 어머니는 생각도 하지 않을 테니까.”
“네. 아버지. 감사합니다.”
(음악대회 심사 중인 투란도트, 엘리시아. 쿠린)
“자, 여러분, 오늘은 노래나 악기 연주 중에서 자신 있는 것을 해보는 거예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니까. 자자. 진정하고. 순서대로 나와서 해보세요.”
“공주님. 저는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그래요? 네. 시작하세요.”
(열심히 노래 부르는 후보자 1)
“엘리시아. 저 아가씨 노래를 어떻게 생각하니?”
“공주님. 저는 이 지방 노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많이 긴장하신 것 같네요.”
“역시, 그렇지?”
(뒤편에서 보고 있는 쿠린)
“저걸 노래라고 부르는 건가? 기가 막히는군. 어머니도 엘리시아도 중간에 끊지 못해서 참고 있는 거잖아?”
(후보자 2)
“아가씨는 무엇을 하려고?”
“네, 공주님. 저는 비파를 연주하겠습니다.”
“오? 그래요? 4현 비파인가요?”
“네, 공주님. 4현입니다. 5현은 고려인들이 연주하는 악기니까요.”
“네. 시작하세요.”
(낑낑대며 연주하는 후보자 2)
“엘리시아. 이 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하니?”
“글쎄요. 저는 고려의 5현 비파가 더 좋아서요. 당비파는 좀.”
“돌려 말하지 말거라. 내가 들어도 영 아니구나.”
(뒤편에서 보고 있던 쿠린)
“저건 악기의 잘못이 아니야. 4현이건 5현이건 연주자가 엉망인 거지. 참으로 가관이로다.”
(후보자 3)
“공주님. 저는 해금을 연주하겠습니다.”
“오? 그래요? 네, 시작하세요.”
(해금을 연주하는 후보자 3)
“공주님, 이 아가씨는 잘하시는 것 같아요. 적어도 몇 년 이상 연습을 하신 것 같군요.”
“그렇구나. 현재까지 저 아가씨가 장원이다.”
(쿠린)
“좀 낫네.”
(후보자 4)
“공주님. 태평소를 불겠습니다.”
“아. 네. 시작하세요.”
(태평소를 불고 있는 후보자 4)
“씩씩하게 잘 부네요.”
“그러게, 저 아가씨 전에 사냥대회 때도 날렵했어. 건강상태도 좋고 폐활량도 좋아 보이는구나. 이 아가씨도 장원 후보다.”
(쿠린)
“사냥대회 때 승마 기술이 좋던 여자군. 내가 슬쩍 봤지만, 난 눈썰미가 있거든. 그렇지만 악기도 남자처럼 태평소를 불다니. 너무 드세 보여.”
(후보자 5)
“공주님. 저는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원곡(원나라 연극) 중에 한 장면을 부르겠습니다.”
“오? 원곡을 좋아하는 모양이군요?”
“네. 공주님. 저는 원곡을 좋아해요. 잡극이라는 평도 있지만, 이야기가 있으니까 재미도 있고 음악, 무용, 대사가 다 있어서요.”
“나도 좋아하는데, 자 시작해보죠.”
(원곡 중 한 장면을 노래하는 후보자 6)
“공주님. 점점 아가씨들의 실력이 좋은데요. 숨은 실력자들이 많군요.”
“그래. 그래도 최상 귀족 집안의 딸들인데 기본 교양이 전혀 없진 않겠지. 이 아가씨의 노래도 좋구나.”
“그러면 이 아가씨도 장원 후보자?”
“그래. 지금까지 세 명인가?”
(쿠린)
“전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관람했던 원곡의 노래구나. 저 아가씨도 원곡을 좋아하는 모양이네.”
(후보자 7)
“공주님. 저는 노래도 악기 연주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춤을 출까 합니다.”
(투란도트와 엘리시아)
“공주님. 춤은 다음 대회가 아니었나요?”
“내가 미리 공지하지 않았으니까. 저 아가씨 잘못이 아니야.”
(쿠린)
“춤?”
(춤을 추는 후보자 7을 보는 투란도트와 엘리시아)
“공주님. 저 아가씨. 춤을 잘 추네요. 씩씩한 기상이 보여요. 저도 신이 나네요.”
“그렇구나. 저 아가씨 단련된 춤사위야. 이런. 잘하는 아가씨들이 많구나. 누굴 장원으로 뽑지?”
“저도 고민이네요.”
(후보자 8)
“공주님. 저도 춤을 추겠어요.”
(투란도트와 엘리시아)
“이 아가씨는 노래도 연주도 못 하니까 할 수 없이 춤을 추는 것 같구나.”
“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쿠린)
“푸하하. 와하하하. 아. 실컷 잘 웃었다.”
(후보자 9와 10)
“공주님. 저희 둘은 함께 노래를 부르겠어요.”
“그래요.”
(후보자 9와 10의 중창을 감상하는 투란도트와 엘리시아)
“이 두 아가씨는 만나서 함께 연습한 것 같구나.”
“그러네요. 두 분이 친하신 모양이네요.”
“그래. 함께 부르는 것도 참 아름답구나.”
“공주님. 채점하기 힘드시죠?”
“그러게. 10명을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쿠린과 함께 의논하자꾸나.”
(쿠린)
“친한 친구인 모양이군. 함께 연습을 해오다니... 나도 엘리시아랑 같이 노래나 연주를 하면 어떨까? 엘리시아는 노래도 연주도 다 잘하니까, 내가 노래를 부르고 엘리시아가 반주를 하면 좋을 것 같아. 나중에 음악 시간에 우리도 한 번 해봐야겠어.”
(투란도트, 엘리시아. 쿠린이 방에서 심사를 하고 있음)
“오늘 10명의 아가씨들이 노래, 연주, 춤을 보였는데, 쿠린. 넌 잘 봤니?”
“네, 어머니. 지금까지 본 심사 중, 제일 재미있었어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네요.”
“그래. 엘리시아. 넌 누가 제일 잘한 것 같으니?”
“저는 해금 연주하던 아가씨. 원곡 중 한 장면을 노래하던 아가씨. 그리고 처음 춤을 췄던 아가씨 그 세 분으로 압축되네요.”
“쿠린, 너는?”
“나는 뭐 다들 고만고만했는데, 마지막에 둘이서 노래하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어머니. 저랑 엘리시아도 함께 연주하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노래하고 엘리시아가 반주를 하면 어떨까요?”
“응? 채점하라고 했는데, 너는 엘리시아랑 노래 부를 생각하고 있었니?”
“아. 제일 잘했던 사람은 엘리시아가 말했던 그 세 사람 중에서 한 명 뽑으면 될 것 같아요. 어머니가 마음에 들었던 사람은 누구예요?”
“음. 우열을 가리기 어렵구나.”
“공주님. 그 아가씨. 노래, 연주, 춤. 다 다르니까 각자 장원을 주는 게 어떨까요? 분야가 다르니까. 모두가 수긍하실 거예요.”
“그럴까? 그러면 노래 한 명. 악기 한 명, 춤에서 한 명 그렇게 뽑고 상을 주면 되겠구나. 좋은 생각이구나. 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수수께끼 제의를 하는 엘리시아)
“네. 공주님. 혹 다음 시험은 무엇을 하실 생각이세요?”
“원래 춤을 볼까 했는데 오늘 춤춘 아가씨들이 나오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구나.”
“공주님. 외람된 말씀인데요. 오래전 공주님께서 왕자님들께 내셨듯이 아가씨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보시는 건 어떨까요?”
“수수께끼? 오호라. 좋은 생각이구나. 엘리시아. 그렇지. 이 투란도트에게 수수께끼는 필요충분조건이지.”
“문제는 공주님께서 준비하시죠?”
“그렇구나. 뭘 내야 할까?”
“어머니. 저도 궁금하네요. 어머니의 수수께끼. 저도 꼭 풀어보고 싶어요.”
“그래? 알았다. 쿠린. 다음 수수께끼 시험엔 너도 참석하거라.”
“정말요?”
“그래. 나도 너의 대답이 궁금하구나.”
“저기. 공주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라도 처벌은 하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오호호호.. 당연하지. 죄 없는 아가씨들을 설마 처벌하겠니? 이번 수수께끼로 확실히 결판이 나겠구나. 그래. 엘리시아. 너도 수수께끼를 같이 풀어보련?”
“저도요? 알겠습니다. 공주님. 네. 그리고 이제는 아가씨들도 고생 끝내야죠.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어휴. 엘리시아. 그 아가씨들을 걱정하고 있니?”
“네? 쿠린님. 아.... 전 단지. 아가씨들이 안타까웠거든요. 그 절절한 마음이 시험 내내 전해지더라고요.”
“그랬니?”
“뭐야? 쿠린. 그 퉁명스러운 말투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머니. 그렇게 들렸나요?”
(칼라프와 투란도트의 대화)
“여보, 투란도트?”
“네. 여보. 무슨 일이죠?”
“오늘도 심사 잘 봤소?”
“아? 그 말이군요. 물론이죠. 나날이 치열하더군요.”
“그래. 오늘은 무얼 봤소?”
“노래, 악기 연주, 춤까지 다 봤네요. 쿠린은 뒤에서 몰래 지켜봤고요.”
“쿠린이 심사에 열심인 모양이지?”
“지금까지는 별로 반응이 미적지근하더니 오늘은 적극적으로 심사를 보겠다고 하더군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래?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었소?”
“노래, 연주, 춤 각각 장원을 뽑기로 했어요. 내가 누굴 장원으로 해야 하나 고민하니까 엘리시아가 각각 주자고 하더군요. 총명한 아이예요.”
“그래. 내가 봐도 엘리시아는 정말 훌륭한 규수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총명하고 예쁜 아이죠. 사태 파악도 빠르고. 쿠린이 보좌관으로 잘 키워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려고 해요.”
“보좌관이라. 음. 그 애가 쿠린을 잘 보좌할 인재라는 것은 확실하지. 엘리시아는 매번 심사에 참여하고 있소?”
“그럼요. 첫 글쓰기부터 그림, 음악, 무용 지금까지 모든 심사과정에 참여했죠. 그럴 만한 능력이 있어요. 그 아이는.”
“그렇지? 그건 그렇고. 그래. 투란도트. 다음은 무슨 시험을 볼 참이오?”
“칼라프. 사실 이것도 엘리시아의 의견인데요. 오래전 당신과 왕자들에게 했듯이 수수께끼를 내볼까 해요. 어때요?”
“굉장하군. 그래. 당신다운 일이야. 그런데 그것을 엘리시아가 제안했다고?”
“네. 그래요. 이 투란도트에게 수수께끼는 한 몸인데 말이죠.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나도 늙었나?”
“그렇군. 엘리시아가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모양이야. 당신이 그 아이에게 의지하는 것 같군.”
“네. 그래요. 이번 심사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상황판단력도 뛰어나고 정말 마음에 들어요. 여보.”
“알겠소. 당신이 마음에 들 정도면야.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그런데 엘리시아는 왜요?”
“아니요. 당신이 엘리시아에게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아서 물어봤소.”
“그러고 보니. 제가 늘 그 아이의 의견을 구하고 있네요. 정말이네.”
(수수께끼 시험)
“자자. 아가씨들. 어서 오세요. 그동안 다과회라고 불러놓고 매번 힘든 시험 치르게 해서 미안합니다. 오늘은 간단한 수수께끼니까 긴장 풀고 생각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하면 돼요.”
“이런. 공주님께서 납시셨네. 오늘은 또 수수께끼야?”
“그러게. 긴장되다 못해 오금이 다 저려.”
“나는 이제 정말 힘들어서 포기할까 싶기도 해.”
“무슨 소리야? 끝까지 가기로 했잖아? 사실 다 고만고만한 실력이던데 뭐.”
“너 공주님의 수수께끼 이야기 못 들었어? 예전에 혼인 신청하러 온 왕자들을 수없이 처형시켰다던 악명높은 수수께끼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들은 것 같아. 많은 왕자들이 죽었다지?”
“그래. 그래서 전쟁이 날 뻔도 했었대. 죽은 왕자들의 아버지들이 연합으로 선전포고를 했었다지.”
“맙소사. 이젠 우리가 그 희생양이 되는 거야?”
“그때처럼 목숨을 내놓아야 하진 않겠지만....하긴, 지금까지의 시험으로는 제대로 선발할 수 없으셨나 봐. 하긴 우리가 봐도 다 그 나물에 그 밥이긴 해.”
“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아? 고려에서 온 공녀가 하는 말을 들었어. 재미있는 말이라서 써 봤어.”
“자. 수수께끼를 내겠어요. 한 문제니까 잘 듣고 정답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지고 오면 돼요.”
“꿀꺽?”
“야?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좀 조용히 해.”
“너나 조용히 해.”
“자자. 잘 들으세요. 지금 이 연회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 하나만 가져오세요.”
“?”
“??”
“???”
“????”
“?????”
“...........!”
“..........!”
“...?”
“...?”
“...!!”
“잠깐만요. 공주님. 이 넓은 연회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 한 가지요?”
“네. 한 가지. 하나만 가져오세요. 시간은 한 시진 주겠어요. 한 시진 안에 갖고 오세요. 자자. 모두 다 가지러 출발하세요.”
“엘리시아. 너는 뭘 갖고 올 거니?”
“깜짝이야. 쿠린님. 이건 시험이에요. 저는 제가 알아서 갖고 올 테니 쿠린님도 어서 가지러 가시죠?”
“알았다고. 한 시진 뒤에 보자.”
(한 시진 후)
“자. 다 모이셨죠? 네. 아가씨들 열 분 다 오셨나요? 그리고 여러분. 이번 시험엔 엘리시아와 쿠린도 참여했어요.”
“뭐지? 쿠린님도 참석하셨어? 이런. 낭패가 있나...”
“그리고 저 여자는 예전 음악, 무용 시험에 공주님와 함께 채점했던 그 여자 아냐?”
“조용히 해.”
“넌 뭘 가져왔니?”
“글쎄. 급히 하인에게 시키긴 했는데 장 안에 있는 물건 되는대로 큰 거 사 오라고 했지.”
“딱 하나만 갖고 오라고 하셨으니까.”
“나도 하인과 하녀에게 시켰는데....”
“자. 각자가 준비한 물건을 가져오세요.”
(죽 늘어놓은 물품들을 보고 있는 투란도트)
“첫 번째는 큰 석상이군요. 이 크고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왔을까요?”
“하인들 다 불러서 갖고 왔습니다. 이 정도면 이 연회장을 많이 채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네. 그렇군요. 자 다음 아가씨?”
“저는 황도에서 제일 큰 솥을 가져왔어요.”
“그렇군요. 꽤 크네요. 역시 무거웠을 텐데.”
“공주님. 저는....”
“아가씨는 큰 수레를 가져왔군요.”
“공주님. 이랴이랴. 어서 들어와.”
“이쪽은 엄청 훌륭한 수소군요. 이런... 살아있는 생물을 가져올 줄이야.”
“공주님. 저는 대형 천막, 게르입니다. 이 방 거의 다 채울 수 있습니다.”
“오호? 그러네요. 제일 넓고 크네요.”
“아? 이럴 수가? 천막이 있었네. 하긴 몽골 후예가 게르 없이 살 수 있나?”
“그 다음은?”
“저는 초대형 탁자입니다.”
“저는 침대입니다. 공주님.”
“그래요.”
“공주님. 저는 초대형 양탄자를 가져왔습니다. 이 연회장 바닥을 거의 다 채울 수 있습니다.”
“아. 이 연회장에 잘 어울리겠네요.”
“공주님. 저는 가져오지 못했어요. 우리 집 정자나무를 뽑아 오려다가 그만 한 시진이 지나는 바람에. 으흑흑.”
“그래요? 괜찮으니까...울지 말아요.”
“공주님. 저는 우리 하인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놈을 데려왔어요. 아마도 이 황도뿐 아니라 나라 전체에도 이놈보다 큰 덩치는 없을 거예요. 씨름꾼입니다.”
“네. 마지막 아가씨는 하인을 데려왔네요. 정말 건장해 보이네요.”
“자자. 이제 엘리시아와 쿠린만 남았구나. 너희는 뭘 가져왔느냐?”
“공주님. 저는 이것입니다.”
“아? 향을 가져왔구나.”
“네. 공주님. 이 향에 불을 붙이면....”
“오호라. 이 넓은 연회장에 향내가 가득하구나. 정말 좋은 향기구나.”
“네. 저를 가르치시던 스님께서 선물로 주신 향인데요. 많은 분이 맡으시면 좋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어머니. 저는 초를 가져왔어요.”
“불을 켜 보아라. 이런. 쿠린 너는 촛불이 이 연회장을 환하게 비추리라고 생각했겠구나. 그렇지?”
“네. 어머니. 그런데 대낮이라 별로 밝게 느껴지지 않네요.”
“그렇지? 쿠린? 빛이 잘 보이지 않는구나. 자자. 이것으로 끝. 오늘의 장원을 발표하겠어요. 엘리시아의 향입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도 다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풀었어요. 모두 수고했어요. 지금까지 힘든 시험들 치르느라 고생 많았어요. 여러분. 안녕히 돌아가세요.”
“으흑흑. 이게 뭐야?”
“그러게나 말이야. 저 여자. 심사위원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참가하다니...”
“게다가 쿠린님도 굉장히 다정하게 대하시는 것 같아. 무슨 이런 일이 있지?”
“저 여자는 대체 어디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우리 시합에 끼고 난리야?”
“조용히 해. 공주님이 들으시겠다. 하지만 저 여자가 이긴 건 인정해.”
“그러게. 향을 갖고 올 줄이야. 우리가 졌어.”
“분하지만 사실이야.”
“이 무거운 걸 다시 들고 가야 하다니.....”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우리가 그 짝이네.”
“휴우. 쿠린님이 우릴 보고 무슨 생각을 하시겠어?”
“내 말이....정말 부끄럽다.”
“..........”
“..........”
“.........”
“집에 가자.”
“그래.”
“이런. 엘리시아. 내가 졌어. 만약에 밤이었다면 내가 이겼을 텐데.”
“쿠린님. 저도 초를 생각했지만, 대낮이라 밤낮으로 쓸 수 있는 향으로 가져왔어요.”
“그래. 네가 이겼어.”
“속상하세요?”
“음. 약간. 그래도 네가 장원이라 기뻐. 엘리시아.”
“감사합니다.”
(쿠린와 엘리시아의 음악수업)
“엘리시아. 어제 시험을 치러본 기분이 어때?”
“쿠린님. 글쎄요. 그래도 아가씨들이 기본 교양은 다 갖추신 것 같았어요.”
“솔직히 말해서 수수께끼뿐 아니라 네가 노래도 연주도. 그리고 춤도 잘 추지 않니?”
“어머나? 제 노래와 연주는 보셨지만 제 춤은 언제 보셨나요? 쿠린님 앞에서 춘 적도 없는데.”
“너 집에 있을 때 다 배웠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여기서 한 번 춰보는 건 어때? 선생님. 선생님도 엘리시아의 춤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선생님이 반주를 좀 하시죠. 엘리시아가 춤을 출 수 있도록.”
“쿠린님. 엘리시아가 어떤 춤을 출지, 모르는데, 반주는 어떻게 합니까? 엘리시아? 무슨 춤을 출 거니?”
“선생님. 저희 지방 음악과 춤은 잘 모르실 것 같은데요. 그냥 혼자 출게요.”
“그러면 네가 추는 춤에 맞춰서 내가 대충 반주해주마. 괜찮겠니?”
“네. 선생님. 시작할게요.”
(엘리시아의 춤을 바라보는 음악 선생과 쿠린)
“..............!!”
“..............!!”
(춤을 마친 엘리시아)
“저기, 저. 쿠린님. 선생님. 저 다 췄는데요.”
“.........! ”
“앗. 그렇군. 엘리시아양.”
“선생님도 괜찮으세요?”
“아. 엘리시아양. 이렇게 춤을 잘 추다니. 그 지역 춤은 처음 보지만 참으로 춤사위가 아름답군요. 이걸 우리만 보기는 너무 아까운데. 공주님은 아시나요?”
“선생님. 어머니는 모르세요. 저도 처음 보고요. 엘리시아 너 이렇게 춤을 잘 추면서 왜 한 번도 춤출 생각을 하지 않았니?”
“글쎄요. 저는 춤추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기에. 공부하기 바빴고. 그리고 음악 수업은 한 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선생님, 엘리시아의 춤이 어때요? 너무 환상적이지 않았어요?”
“그렇습니다. 쿠린님. 이 솜씨는 공주님과 칼라프님도 보셔야 합니다.”
“그래요. 당장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셔오겠어요. 여봐라. 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셔오너라.”
“네. 쿠린님.”
(엘리시아의 춤을 보는 투란도트와 칼라프)
“엘리시아. 정말 아름답구나. 이것도 네가 장원이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엘리시아의 노래와 연주도 한번 보세요. 정말 잘해요. 어머니가 지금까지 보셨던 아가씨들과는 비교가 안 돼요.”
“그래? 어디 한번 해 보거라.”
(엘리시아의 노래와 연주를 듣고 보는 투란도트와 칼라프)
“투란도트. 나 저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은 적이 없소. 당신도 저 정도는 아니지 않소?”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나보다 잘하네요. 비록 노래 양식은 우리와 다르지만. 그리고 악기 연주도 훌륭하네요. 황족 아가씨들과는 비교가 안 돼요.”
“황족 아가씨들은 어땠기에?”
“엘리시아에 비교하면 어른과 어린아이 수준이에요. 엘리시아와 함께 채점을 했었는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요. 수수께끼도 가장 잘 풀었고... 우리 쿠린이 엘리시아에게 졌어요.”
“저렇게 영특하고 아름답고 재주도 뛰어난 아가씨를 두고 대체 당신은 어디서 며느리 후보를 찾는 거요? 바로 앞에 두고도.”
“정말 할 말이 없네요. 심사를 하면 할수록 엘리시아가 그 아가씨들보다 더 뛰어난데, 앞으로 심사를 더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네요.”
“여보, 투란도트. 나도 이방인 출신이라서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지만, 엘리시아는 정말 훌륭한 규수요. 쿠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여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쿠린도 엘리시아를 좋아한다고요? 엘리시아가 쿠린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당신은 그 애를 나보다 더 가까이서 보고도 그걸 아직 눈치 못 챘소?”
“남자는 남자가 잘 안다고, 당신이 쿠린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모양이죠?”
“이런. 화났소? 그냥 내가 눈치가 그래 보여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쿠린에게 물어봤소.”
“그랬군요. 쿠린이 엘리시아를 좋아하나요?”
“그렇소. 둘이 서로 좋아하지. 하지만 둘 다 서로 말은 안 하고 있지. 엘리시아는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고, 쿠린은 당신이 몽골 아가씨 중에서 며느리를 뽑을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표현하지 못한 거요.”
“여보, 나도 엘리시아가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그 애는 쿠린을 모든 면에서 훌륭하게 보좌할 거예요. 보좌관으로 키우고 있잖아요? 하지만 며느리는..”
“알고 있소. 몽골 귀족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쿠린이 황태자도 아니고 황태손도 아니고, 그냥 공주의 아들일 뿐인데, 꼭 그렇게 몽골 귀족 며느리를 얻어야 하는 거요?”
“여보, 칼라프. 오해하지는 말아요.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지만, 당신이 몽골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아무런 직책도 없이 단순히 나 하나만 보고 사는 무능한 남자 취급받는 것이 너무 속상했어요. 우리 쿠린도 그렇게 되는 것이 끔찍하고요. 난 당신이 이렇게 나 때문에 아무런 능력도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정말 미안했어요. 흑흑.”
“여보. 투란도트.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소. 나는 사실 이방인이지. 그래서 더 욕심도 부리지 않았소. 어차피 나는 당신 하나 보고 이곳에 왔고, 또 당신을 얻었고, 쿠린을 얻었지. 이 이상 내가 무엇을 바란단 말이오? 나는 명예나 직위를 보고 당신을 얻은 게 아니오. 당신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오?”
“당연하죠. 당신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데, 그 어떤 자리를 줘도 다 해낼 사람인데, 오빠나 사촌들이나, 친척들 그 누구보다도 더 능력이 있는데, 아무런 일도 못 하고 나 하나만 보고 살게 하다니. 아버지도 너무 하세요.”
“투란도트. 나는 당신과 쿠린만 있으면 되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시오. 그리고 쿠린도 당신과 나를 닮아서 아마 엘리시아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을 거요.”
“네. 하지만 엘리시아를 며느리로 삼으면 아버지는 쿠린도 그냥 당신처럼 내팽개치실까 봐 걱정돼요.”
“쿠린은 아마 그것도 다 감수할 거요. 내 아들이니까. 내가 잘 알지.”
“그렇다면 쿠린에게 물어보겠어요. 진지하게.”
“진즉에 그럴 것이지. 지금까지 괜한 아가씨들 고생만 시키지 않았소? 그 아가씨들은 다 무슨 죄요? 쿠린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그 아가씨들에게 괜한 희망만 품게 하고, 또 얼마나 실망하겠소?”
“그러게요. 제 죄가 커요. 예전에 왕자들에게도, 지금 아가씨들에게도,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네요.”
“하여간 깨달았으니 되었소. 그러면 이 기쁜 소식을 쿠린에게 알려줘도 되는 거요?”
“여보. 내가 먼저 물어보고 결정한다니까요. 당신은 미리 앞서지 좀 마세요.”
“알겠소. 당신에게 맡기지. 그러면 내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괜찮겠지?”
“엘리시아 아버지에게요?”
“그렇지. 실은 그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거든. 엘리시아가 쿠린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엘리시아는 죽어도 첩이 될 아이가 아니라서 쿠린이 다른 여자랑 혼인하면 처녀 귀신으로 죽을 거라고 썼더군. 아비로서 마음이 아프다고 내게 절절히 편지를 썼었소.”
“당신, 엘리시아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인 모양이네요. 서로 그런 편지도 보내고.”
“뭐, 그렇지. 뭐. 쫓겨난 신분인 나에게도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준 친구는 그 녀석뿐이었거든.”
“그렇군요. 어려울 때 변함없이 잘해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인 거죠. 지금 바로 쿠린에게 물어볼게요.”
(투란도트와 쿠린의 대화)
“쿠린. 물어볼 말이 있다.”
“네, 어머니. 말씀하세요.”
“지금까지 그 아가씨들을 잘 보았겠지?”
“네. 어머니. 저도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봤어요.”
“그래.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더냐?”
“솔직히 말씀드려서, 어머니. 하나도 없어요. 이제, 그만 하세요. 심사.”
“그런가? 괜한 심사를 한 게야?”
“그 아가씨들도 괴로울 거예요. 다과모임인 줄 알고 왔다가 매번 시험을 치르고 돌아가는 기분이 어떻겠어요? 대부분 엉망진창으로 못 하는데.”
“역시 내 욕심인 건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어머니께서 상심하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는데요. 저는 그 아가씨들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엘리시아 때문에?”
“어머니? 알고 계셨었어요?”
“아니, 몰랐다. 방금 네 아버지께서 말씀해줘서 알았다.”
“이런, 아버지. 함구하시겠다고 하셨으면서...... 하지만 아버지는 바로 알아보시던데요. 제가 먼저 말씀드린 것도 아니었어요.”
“부자간에 서로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지.”
“어머니. 섭섭해하시지는 마시고요. 단지 저는 엘리시아가 훨씬 더 마음에 들 뿐이에요. 그 애는 외모, 성격, 지능, 재능,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능력까지 있어요. 저는 엘리시아가 아니면 그 어떤 여자도 싫어요.”
“그래? 그렇다면 엘리시아 외에는 그 어떤 여자도 맞아들이지 않겠다는 거지? 네 아버지처럼?”
“네. 그리고 엘리시아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일부일처가 아니면 죽어도 혼인하지 않을 여자라서. 저도 그렇게 하려고 해요.”
“나는 네 아버지에게 그 어떤 여자도 못 만나게 하고 있으면서도, 네가 또 그렇게 한다는 것은 또 왜 이리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나도 참 못된 시어미로구나.”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그렇게 하시듯이 엘리시아도 똑같이 하겠죠. 그 애는 어머니를 동경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니까요.”
“얘야. 쿠린. 엘리시아는 처음부터 네게 반해서 이곳에 온 것이란다. 이 어미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모른 척했다.”
“세상에? 어머니? 어떻게 그럴 수가?”
“그래. 시어머니는 원래 그런 거야. 못된 여자인 거지. 엘리시아의 마음을 다 알면서 며느리 후보들 채점을 시키고. 엘리시아도 몹시 괴로웠겠지.”
“어머니. 어머니께서 절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지만, 이번에 엘리시아에게 하신 일은 잘못이에요. 엘리시아의 마음을 다 아시면서 그러셨다니, 전 좀 충격이에요.”
“그래. 쿠린. 이 어미가 그런 사람이구나. 네게 실망을 끼쳐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 네 마음도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쿠린. 각오는 해야 한다. 네 아버지가 지금까지 능력, 실력이 없어서 이 궁에 처박혀 있던 게 아니란 건 너도 잘 알겠지?”
“네. 어머니. 아버지가 이방인이라서 그런 것이지요. 할아버지께서는 완고하신 분이시니까.”
“그래서 너에게만큼은 그런 수모를 당하게 하지 않고 싶어서 내가 부득불 몽골계 며느리를 얻으려고 했었다는 것도 잘 알겠지?”
“네, 어머니 당연히 잘 알고 있죠. 그래서 거부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심사에 참여하고 있었죠.”
“그걸 다 감수하고도 엘리시아와 혼인하고 싶은 거지?”
“네. 어머니. 저도 아버지처럼 평생 한 여자만 보고 살 거예요.”
“아!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 너는 나와 칼라프의 아들이 틀림없구나. 이 어미가 졌다. 네 좋을 대로 하렴. 이 기쁜 소식을 네가 엘리시아에게 직접 전해주는 것이 좋겠구나. 나도 혼인 준비를 하마. 그리고 할아버지께도 고해야 하고. 폐하께서도 내가 어떤 며느리를 고를지 몹시 궁금해하고 계셨단다.”
“할아버지께서 실망하시더라도 그리고 저에게 그 어떤 직책도 주지 않으시더라도 전 상관없어요. 어머니. 각오가 되어 있어요.”
“알았다. 황제께 고하겠다. 그리고 칼라프. 숨어있지 말고 나와요. 다 들었죠? 당신도 당신 친구인 엘리시아 아버지께 편지를 쓰세요. 소원대로.”
“투란도트? 아. 고맙소. 내 당장 그 녀석에게 편지를 쓰겠소. 아주 기뻐할 거요. 정말 고맙소. 하하하.”
(칼라프가 벗에게)
자네. 그동안 잘 있었나?
음. 다름이 아니라 거두절미하고 바로 말하지.
자네 당장 엘리시아 모친이랑 함께 우리 궁으로 오게. 당장. 시간이 없네.
무슨 일이냐고? 와서 보게.
급한 일이니까 정무도 부관에게 맡기고, 부인과 함께 빨리 오도록 하게.
기다리고 있겠네.
자네의 진정한 벗, 칼라프.
(엘리시아 부모의 대화)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여보. 칼라프에게 편지가 왔소. 급한 일이 있으니 당신과 함께 황도로 오라고 하는군.”
“뭐라고요? 설마 엘리시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죠? 무슨 일인지는 안 적혀있나요?”
“아무것도 적힌 것이 없소. 그래서 더 걱정되는데.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당장 정무도 팽개치고 오라고 할 리가 없잖소?”
“당연하죠. 당신 뭐 중요한 실책이라도 저질렀나요? 설마 횡령?”
“아니, 당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하늘 같은 남편에게 그게 할 소리요?”
“죄송해요. 여보. 엘리시아가 너무 걱정되어서 차라리 당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부르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서 그만...용서하세요.”
“나도 그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너무 심한 말이었소. 나를 뭘로 보고.... 역시 엘리시아 일인가? 아? 혹시 내가 전에 보냈던 편지 때문인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 칼라프님께 결국 편지를 보냈어요?”
“으음. 그랬소.”
“아니? 왜 보내셨어요? 칼라프님께서 얼마나 부담스러우셨을까요. 당신도 괜한 일을 하고 그러세요. 공주님께서 역정나신 건 아니실까요?”
“아냐. 칼라프가 공주님께 말하지는 않았을 거야. 내가 부탁했다고.”
“대체 뭐라고 쓰셨어요? 엘리시아가 쿠린님을 사모하니까 첩으로라도 삼아달라고 하신 건 아니시겠죠? 만약 그러셨다면 엘리시아가 혀를 깨물고 자진할 만한 일이에요. ”
“아냐! 전혀! 엘리시아만 자존심이 있는 것이 아니오. 나도 그 정도의 자존심은 있소.”
“여보. 당신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에요. 사태 파악이 그렇게 안 되세요? 정말이지. 엘리시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건 다 당신 잘못이에요. 엘리시아가 잘못되면 나도 엘리시아 따라갈 테니까 당신도 각오하고 있으세요.”
“여보. 나도 걱정되어 죽겠으니 그런 지독한 말은 하지 마시오. 부탁이오.”
“흠흠. 그런데 여보. 나는 왜 부르시는 거죠?”
“글쎄. 그것도 모르겠소. 아무 말도 적혀있지 않소. 어쨌든 당장 오라고 하니까 짐을 싸시오. 갈 길이 머오.”
“여봐라. 여행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네. 마님.”
(황도로 출발하는 엘리시아 부모)
“여보, 정무는 잘 맡겼겠죠?”
“두말하면 잔소리. 걱정 마시오. 당신은 제대로 준비한 거요? 그런데 여자들은 웬 짐이 그리 많소? 짐이 많아서 말이 빨리 달릴 수가 없겠는데?”
“여보. 본래 여자들은 짐이 많아요. 그래도 줄이고 줄인 거예요. 내 하녀도 일부러 한 명만 데려가는데요.”
“알았소. 어서 타시오.”
“여보. 짐이 무거워서 속도가 나지 않는 거라면 하인들과 짐은 마차로 천천히 오라고 하고 당신과 나는 그냥 말 타고 먼저 달릴까요?”
“아니? 그래도 되겠소?”
“그래도 엘리시아 덕분에 승마도 배웠는데, 이럴 때 쓰라고 배운 모양이네요. 나도 웬만한 남자 만큼은 말 탈 수 있잖아요?”
“그래. 그렇긴 하지. 누가 가르쳤는데?”
“그래요. 나도 그동안 갈고 닦은 승마 솜씨를 발휘해 보겠어요.”
“여봐라. 마님과 나는 먼저 달려갈 터이니 너는 마차의 짐과 호위무사와 함께 천천히 오도록 해라.”
“네, 주인마님. 그렇게 하겠습니... 어라? 저기 잠깐만요. 전령이 오고 있습니다.”
“전령?”
“무슨 일이죠? 여보?”
“어디 보자. 엘리시아에게서 편지가 왔소.”
“그래요? 무슨 일인지 적혀있나 보네요. 빨리 읽어봐요. 여보.”
(엘리시아가 아버지께)
아버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놀라지 마세요. 심호흡하고 읽으세요.
쿠린님께서 제게 청혼하셨어요. 나는 너무 놀라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어요.
쿠린님께서 저를 일으키시더니 안아주셨어요.
오랫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했다고, 네 마음을 진즉 알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하셨어요.
나는 쿠린님 품속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울고 있었어요.
공주님께서 혼인 준비를 하고 계세요.
이달 말일이니까,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이 궁으로 오셔요.
제가 혼인하는 걸 보셔야 하니까요.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쿠린님은 저 말고는 그 어떤 여자도 얻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어요.
투란도트 공주님과 칼라프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자고 맹세했어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엘리시아가.
(엘리시아 부모의 대화)
“여보! 으흑흑.”
“여보!”
“세상에 어째 이런 일이....”
“자자. 여보. 일어나시오. 당신까지 주저앉으면 어떡하오?”
“아. 네. 정말 다리가 풀린다는 게 어떤 건지 이제 알겠네요. 엘리시아가 다리가 풀릴 만도 하네요. 나도 이러니....”
“칼라프. 이 자식. 이런 일에 그따위로 편지를 쓰다니. 하마터면 황도에 가기도 전에 심장마비로 죽을 뻔했잖아. 가서 한 방 날려줘야겠어.”
“여보. 그게 무슨 불경스러운 말이에요? 칼라프님은 은인이신데. 아마 당신이 보낸 편지를 보고 큰 도움을 주신 게 분명해요. 투란도트 공주님께서 자청으로 하신 일은 아닐 거예요. 당신. 편지를 어떻게 쓴 거예요?”
“음. 별로. 그냥 아비로서 마음이 아프니까 칼라프 자네도 자식이 있다면 내 심정을 좀 헤아려 달라고 했지.”
“정말이지. 칼라프님은 참으로 자상하시네요. 정말 좋은 친구 두셨어요. 내 평생 당신이 최고로 멋있어 보여요.”
“내가 멋진지 이제야 알았다고?”
“네네. 여보. 당신이 최고로 멋져요. 이럴 때가 아니지. 짐을 다시 꾸려야겠네.”
“아니. 저렇게 짐이 많은데 무슨 짐을 또 꾸린단 말이오?”
“딸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데 최고로 멋진 모습을 보여야죠. 당신도 마찬가지고. 여봐라. 짐을 다시 꾸려야겠다.”
“네. 마님. 정말 축하드려요. 저희도 정말 기쁩니다.”
“으이구. 더 늦어지겠는데.”
“여보. 이달 말일이면 아직 시간 있어요. 짐도 다시 꾸리고 당신도 다시 준비하세요.”
“알았소.”
(양가 상견례)
“칼라프!”
“앗, 깜짝이야. 압둘라. 오랜만일세.”
“공주님.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퍽).”
“으악.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주먹질이라니. 내 평생 얼굴을 맞아본 적은 처음이야. 여보. 투란도트. 이놈을 처벌하시오.”
“네. 네. 압둘라님. 남자분들 회포를 푸세요. 자. 부인. 우리 여자들끼리 대화하죠.”
“네. 공주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네. 부인. 엘리시아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혼인 준비도 다 마쳤고요. 엘리시아가 보고 싶으실 텐데 어서 만나보시죠.”
“앗. 잠깐. 나도 엘리시아를 만나 봐야지.”
“당신은 칼라프님과 볼일 다 끝나셨어요?”
“저 자식과 볼일 끝났어.”
“압둘라. 자네 너무 하는데. 볼일이 끝났어? 나는 아직 안 끝났어. 자네도 한 대 맞아야지. 어서 오시게.”
“칼라프. 정말 고맙네. (털썩).”
“압둘라. 천만의 말씀. 뭘 무릎까지 꿇고 그러나. 친구 사이에. 우리 어려운 사돈으로 지내지 않도록 하지. 자자. 어서 엘리시아에게 가보시게.”
“내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알았대도. 어서 일어나시게. 아랫것들이 다 보고 있네. 자네도 지방관인데 체통을 차리시게.”
“정말. 감사합니다. 칼라프님. 투란도트 공주님. 자. 여보. 이제 일어나세요. 우리 엘리시아에게 가 봐요.”
“자식 나눈 사이에 서로 부담스럽지 않도록 합시다. 부인. 어서 이 녀석을 데리고 가시죠.”
“네. 정말 감사합니다. 엘리시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씀을. 엘리시아 같은 며느리를 얻게 되어 더 기쁩니다. 쿠린이 복이 많아요. 그렇지 않소? 투란도트?”
“물론이죠. 칼라프. 우리가 참으로 훌륭한 며느리를 얻었어요.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공주님.”
(저승에서 내려다보고 있음)
쿠린과 엘리시아의 성대한 결혼식에 황제도 참석. 엘리시아의 부모도 참석. 투란도트와 칼라프. 혼인 잔치에 참석한 모두가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있음. 류와 링도 화관을 쓰고 당근을 먹으면서 행복해하고 있음. 그러나 초대받은 열 명의 몽골 귀족 아가씨들은 구석에서 슬피 울고 있음.
“여봐라. 쿠린과 엘리시아가 참으로 행복해 보이는구나.”
“네. 염라대왕님. 투란도트와 칼라프도 그렇고 저 2세들도 딱 제 부모처럼 살겠지요?”
“그럼. 당연하지. 쿠린도 엘리시아도 참으로 아름다운 한 쌍이야. 투란도트과 칼라프 젊은 시절을 다시 보는 것 같다. 정말 보기가 좋구나. 세월이 정말 빨라. 참. 보아하니 류도 링이라는 색시를 얻어서 아주 행복해 보이는데. 류도 이제야 한을 풀고 행복해졌구나.”
“네. 류가 수말로 태어나 예쁜 암말을 얻어서 행복해하네요. 전생의 기억은 싹 잊고 새 출발 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대왕님.”
“당연하지. 류가 비록 말이긴 하나. 웬만한 인간들보다 나은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주인에게도 대를 이어 충성할 테고. 보아하니 링이라는 암말. 곧 새끼를 가지겠구나.”
“네. 보시다시피 류와 링 둘 다 화관을 쓰고 같이 혼인에 참석하고 있잖습니까? 저 말들도 오늘 함께 혼례를 올리는 모양인데요.”
“그러게. 말에게도 화관을 씌우니까 혼인 잔치 실감이 난다. 그런데 말이다. 저기 구석에 저 불쌍한 열 명의 아가씨들. 즉 열 명의 왕자의 영혼들은 어떻게 하지?”
“그러게요. 울고 있는데요. 뭐하러 저곳에 가서 굳이 저렇게 울고 있는 걸까요?”
“첩이라도 되고 싶다는 게지. 너는 그것도 모르냐?”
“저런. 쿠린은 첩을 들이지 않을 텐데. 바보처럼. 에휴. 쯧쯧.”
“하여튼 투란도트도 대단해. 수수께끼를 또 풀게 했어. 하여튼 저 바보들은 수수께끼를 여전히 형편없이 풀었더구나.”
“그러게요. 왕자 시절이나 지금이나 제대로 풀지를 못했어요. 어쩜 그리도 똑같을까요? 쯧쯧.”
“저 애들 상사병으로 곧 이곳에 오겠구나. 다음엔 남자로 보내야겠다.”
“네. 염라대왕님. 그러셔야겠어요. 저 애들이 안타까워서 못 보겠어요. 다시 오면 다음번엔 정화 수련할 때 너무 고생시키지 마세요. 대왕님.”
“당연하지. 나도 저 아이들이 가엾구나. 다음엔 꼭 행복하게 살게 해줘야겠다.”
“네. 대왕님. 그러셔야죠. 그런데 대왕님. 실은 이번에도 행복하게 살라고 황족 아가씨들로 보내신 거 아니었어요?”
“그랬지. 행복하게 살라고 보냈지.”
“그런데 결과는 이전의 반복이네요.”
“다음엔 무엇으로 보내야 저 녀석들이 행복해질까나?”
“고민해 보세요. 대왕님.”
“그러게.....”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