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탄과 칼리프
김진미
나는 백묘, 쟤는 백구다.
즉 나는 흰 고양이, 쟤는 흰 개다. 나는 터키시앙고라 종이라고 하더라. 쟤는 흰 진돗개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보통 한 집에 고양이와 개가 같은 공간에서 살기 힘든데, 우리 집사는 무슨 일인지 흰 강아지를 새로 분양받았다. 즉 내가 이 집 주인이고, 집사는 내 집사고, 저 흰둥이 녀석은 말단 졸병이다. 나는 다섯 살이나 먹은 이 집 터줏대감이다. 집사는 아침에 일찍 나가서 해가 지면 들어온다.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하얀 녀석을 집사가 데려왔다. 그러고는 하는 소리가.
“술탄, 미안해, 너 혼자 집 지키는 것이 심심할 것 같아서 고양이를 새로 분양받을까 했는데, 이 녀석이 너무 귀엽지 뭐야? 그리고 나도 개도 키워보고 싶었거든. 부탁이야. 술탄, 구박하지 말고 귀여워 해줘. 네 동생이야. 잘 돌볼 수 있지?”
이게 무슨. 근데 그놈 여자야? 남자야? 하긴 나도 수술을 받아서 생식은 못하지만... 그리고 이름만 술탄이면 뭐해? 그리고 여기가 무슨 하렘이냐? 후궁 하나 없는 하렘에 무생식 술탄이라니. 이름 한번 요상 타. 상황을 봐가면서 짓든지. 그럼 그 녀석은 이름을 뭐라고 지을 건데?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아니? 늘 벙어리 같던 놈이 오늘은 왜 이리 말이 많지? 너, 동생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다행이야. 이 녀석은 칼리프야.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 술탄.”
아니? 정말? 칼리프라고 지었어? 난 터키 종이라 그렇다 치고 아니 진돗개에게 한국 이름을 지어야지? 나는 정말이지 내 이름이 아깝다.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하하하. 정말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그럼 앞으로 우리 셋 잘 지내보자. 물론 내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은 네가 칼리프를 돌봐야 해. 괴롭히면 안 된다. 알겠지? 술탄?”
나는 종일 집에서 뒹굴뒹굴, 캣 타워 위에서 낮잠도 자고, 베란다 창밖을 내다보고 사람들이 어찌 다니는지 구경을 하고, 스크래처에 발톱도 다듬고, 얼굴과 몸통 털 관리도 한다. 그런데, 저 칼리프라는 녀석은 젖도 아직 못 뗀 놈 아냐? 저놈의 집사는 어쩌자고 저리도 어린놈을 데려온 거지?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미안해. 술탄, 실은 고양이를 분양받으려고 했는데, 친구 집 개가 강아지를 많이 낳았는데, 거기 놀러 갔다가 그만 혹해서 한 마리를 달라고 했어. 아직 한 달밖에 안 된 강아지야. 젖을 더 먹으면 좋겠지만, 더 시간을 끌다가는 어미랑 떨어지기 힘들 것 같아서 데려왔어. 당분간 사료를 적셔서 먹여보고 틈틈이 분유도 먹여야겠어. 물론 내가 없는 동안은 칼리프를 네가 잘 돌봐주렴. 나도 퇴근하자마자 바로 들어올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적어도 3개월은 엄마 젖을 먹어야 면역력도 생기고 튼튼할 텐데, 저 칼리프라는 녀석. 제대로 클 수나 있을까? 진돗개라니까 머리는 좋겠지?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칼리프 녀석, 이곳에 오고는 엄마가 없어서 그런지 의기소침한데? 내가 텃세를 부리고 싶어도 너무 아기라서 부릴 수도 없어. 게다가 난 남자야. 모성본능 따위 없다고!!!
뭐야? 저 처량한 눈빛. 어쩌라는 거야? 설마, 날 엄마나 아빠? 아니 형님으로 생각하는 건가?
아냐. 못 본 척해야겠어. 캣타워로 올라가서 자야지.
집사 녀석은 제 방에 들어가서 문 닫고 자버리니 못 듣는 모양인데, 밤새도록 녀석이 낑낑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짜증.
“으악. 늦잠 잤다. 이런. 칼리프 밥, 술탄 밥, 자자. 물은 여기 있고, 너희들 밥은 챙겨도 내 밥 먹을 시간은 없구나. 나 출근한다. 저녁때 보자.”
어디 보자. 저 녀석. 젖은 사료 처음 먹을 텐데, 잘 먹나? 환경이 바뀌어서 밥맛도 없을 거야. 내가 먼저 먹는 모습을 보여줘야겠어. 냠냠냠. 이렇게 먹어. 알겠어?
어디 보자. 저 녀석. 아 밥 먹으러 오는 거야? 아니? 야! 그건 내 밥이고. 너는 저거 먹어. 네 밥은 저기 젖은 사료가 네 밥이라니까. 젠장. 내가 쟤 밥을 먹는 시늉을 해야 하나? 알았어. 자자. 칼리프. 이게 개밥이야. 이걸 먹는 거야. 냠냠냠냠. 음. 개밥은 맛이 없네. 이런 걸 먹는구나. 우리 고양이 밥이 훨씬 맛있어. 기본으로 생선 단백질을 주로 먹으니까. 에이 퉤퉤퉤. 맛없어. 하지만 저 녀석 앞에서 맛없는 표를 내면 저 녀석 안 먹겠지? 자. 술탄. 이렇게 먹어봐. 냠냠냠냠.
아? 개밥을 먹는구나. 다행이다. 그래. 칼리프. 그게 네 밥이야. 이것은 내 밥이고. 너는 개. 나는 고양이. 우리는 종이 달라. 색만 흰색이지. 색이 같다고 같은 종인 건 아냐. 그래그래. 너 배고팠구나. 생각보다 잘 먹네. 어제는 긴장해서 아무것도 안 먹더니만, 차라리 집사가 없는 것이 너는 더 편한 거야? 보통 개들은 집사를 더 좋아하지 않나? 우리는 귀찮아하는데. 녀석. 실컷 먹더니 바로 쓰러져서 잠들었네. 어디 보자. 녀석. 속눈썹이 길어. 쌍꺼풀도 있고. 귀엽게 생기긴 했어. 그래서 집사가 바로 데려왔구나. 흥. 나도 한 미모를 자랑하지만. 우리 집사는 외모를 얼마나 따지는지. 못생긴 동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걸 잘 알지. 그렇게 눈이 높으니 여태 여자친구도 없는 거 아냐. 제 친구들은 장가도 갔다고 매일 내 앞에서 한탄만 하지. 정말 듣기 싫어 죽겠어. 하소연하는 거. 이제는 네가 나 대신 하소연 들어라. 그동안 나는 잠을 잘 테니. 저 녀석이 잠드니 조용해서 나도 좀 자야겠다. 밤새 네가 낑낑대서 나도 못 잤거든.
(저녁 때)
“얘들아. 아빠 왔다. 그래. 오늘 둘이 집 잘 보고 있었어? 안 싸우고 잘 놀았어? 어디 보자. 음. 밥도 많이 먹었네. 다행이다. 입맛에 안 맞을까 걱정했는데. 한 달은 더 있다가 데려가라는 걸 내가 억지로 데려와서 좀 걱정되고 후회하고 있었는데, 밥을 잘 먹으니 됐어. 역시 내 판단이 옳았어.”
옳긴. 개뿔. 쟤가 면역력이 약해서 병이 들거나 골골하면 어떡할 거야? 이 망할 집사야.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아니? 술탄이 왜 이리 말이 많아졌지? 늘 묵언 수행만 하는 녀석인데. 너 칼리프가 와서 기분이 좋구나? 그렇지? 고양이가 아니라도 괜찮은 거지? 강아지도 귀엽지?”
아니. 네 말만 하지 말라고. 이 멍청한 집사야.
“야옹. 야옹. 야옹. 야옹.”
“그리고 술탄 너는 내가 안고 싶어도 늘 빼고 도망가잖아. 내가 억지로 안으면 물고 할퀴고, 내 손과 팔은 네가 물고 할퀸 자국이 선명하다. 다른 사람들이 놀래. 개 키우는 집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런다. 그래서 나도 개 한번 키워보련다. 네 놈이 하도 고고한 척을 해서. 나도 빈정이 많이 상했거든. 적어도 강아지는 오라 하면 오고 아니, 오라고 안 해도 제가 알아서 온다고 한다. 그리고 안아줘도 가만히 있다고 하니까. 나도 스킨십 좀 하자. 그리고 술탄 너는 내 말도 잘 안 듣잖아? 내가 이야기 좀 하려고 하면 고개를 돌리고 딴짓이나 하고. 너는 못됐어. 아빠한테 어쩜 그렇게 냉정하냐?”
뭐라는 거냐? 이 집사가 간이 부었네. 기분이 상한다. 츄르나 대령해라. 츄르가 먹고 싶다. 츄르를 다오. 집사야.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어. 칼리프. 눈을 떴구나. 오늘 밥 잘 먹었네. 이리와. 칼리프. 네 이름이야. 칼리프. 잘 알았지? 사실 나도 널 흰둥이나 백설이라고 부를까 했는데, 술탄 동생이니까, 칼리프가 더 나을 것 같아서. 투르크 계통으로 맞췄어. 술탄은 터키가 고향이거든. 터키시앙고라야. 너무 속상해하지 마. 흰둥이는 왠지 촌스러워서, 물론 정감은 있지만, 왠지 흰둥이는 머리가 나쁠 것 같은 이름이야. 칼리프는 권위가 있는 능력자니까. 신의 대리인. 얼마나 좋으니? 너도 정치, 종교의 수장으로 고고하게 살도록 해라.”
고고하게? 저 집사가 미쳤나? 단종은 나 하나로 족하지. 저 어린놈도 단종시킬 생각인 거야? 하긴 칼리프는 종교계통이니까, 그렇다 쳐. 그럼 나는? 하렘에 후궁들은커녕 이름만 술탄이지, 날 왜 환관으로 만들었니?
“자자. 얘들아. 오늘은 아빠가 회사에서 힘들게 일하느라 피곤하구나. 실은 야근도 해야 했는데, 칼리프가 걱정되어서 일거리를 집에 갖고 왔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일해야 하니 둘이 알아서 놀아라.”
칼리프. 이리 와. 집사가 너랑 놀 시간이 없다는구나. 하긴 아직 집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지? 그래그래. 이리 와. 자. 형님이라고 불러 봐.
이런. 내가 캣타워로 올라가니까 저 녀석이 계속 낑낑거려. 날 부르는 것 같아. 내려가야 하나? 칼리프. 잘 들어. 고양이는 높은 곳을 좋아해. 그래서 높은 곳에서 자기도 하고 쉬기도 하는 거야. 너는 바닥에 네 침대에서 자고. 개는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아. 땅바닥을 좋아하고, 땅 파기도 좋아하지. 그런데 여기는 땅을 팔 수가 없어. 네가 좀 크면 집사가 밖으로 산책을 시켜줄 거야. 그럼 밖에 나가서는 영역표시도 하고, 땅도 파고 그렇게 하려무나. 잠깐잠깐! 너 쉬야를 바닥에다 했니? 아니야. 나는 내 전용 화장실이 있지만, 너는 저기 기저귀를 깔아 놓은 곳에다가 쉬를 하고, 응가도 배변 패드에다 하는 거야. 알겠니? 저 집사가 이 녀석 배변훈련은 안 시키고 뭐 하는 거야. 대체? 우리 고양이들처럼 알아서 화장실을 가는 건 줄 착각하는 거 아냐? 정말이지. 이 녀석 훈련도 내가 시켜야 하는 거야? 저기 저 흰 배변 패드에 쉬야 하고 응가도 하는 거야. 내가 개 배변 패드에다 실례하는 시범까지 보여야 하는 건 아니겠지? 잠깐, 나도 화장실에 가야겠다. 끙차. 다 눴어. 꼬리에 응가가 묻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해. 나도 어릴 땐 이 아름다운 꼬리에 응가를 묻히곤 했지만, 이젠 알아서 조절해. 그리고 냄새가 나지 않도록 잘 덮어두지. 응? 야. 칼리프 너 내가 응가 하는 걸 보러 온 거야? 저리 가. 냄새나니까. 그리고 여긴 내 화장실이야. 네 화장실은 저기 하얀 배변 패드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니? 그래그래 저리 가.
(다음날 아침)
보아하니 집사가 거의 밤늦도록 일을 해서, 또 아침에 늦게 일어나 헐레벌떡 나갈 것이 틀림없어. 이러다 우리 밥도 못 챙기고 갈까 봐 걱정이야. 아니지. 아침에 내가 깨워야겠어. 일어나라. 집사야. 해가 떴다. 얼른 일어나서 회사 가. 그리고 우리 밥도 챙겨주고, 물도 새로 갈아다오. 어제 물은 냄새 난다. 나는 깨끗한 정수기 물로 매일매일 새로 갈아다오.
“어라? 술탄. 네가 웬일이냐? 날 다 깨우고. 방금 너 내 얼굴 핥았니? 이 고양이가 드디어 밥값을 하는구나. 평생 놀고먹는 놈이 웬일이래? 너. 동생이 들어오니 위기감이 생긴 거냐? 이제 좀 아빠한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야? 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세상에 술탄이 날 깨웠어. 지각하지 말라고 하하하. 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야. 하하하. 그래그래. 기분이다. 오늘은 늦지 않게 일어났으니, 츄르를 주마. 자 츄르. 먹어. 그래 알았어. 물도 새로 갈아줄게. 대신 너 칼리프 잘 돌보고 있어야 한다. 아직 아기야. 네가 텃세 부리고 하면 안 돼. 알겠지?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좀 깨워 주라. 지각 안 하고 너희 밥 제대로 챙겨 먹고 싶으면 그렇게 하도록 해.”
야. 집사야. 깨워 주길 바랐던 거냐? 스마트폰 알람이 시끄럽게 잘만 깨우더니만. 아니지 배터리가 방전된 날은 못 깨우기도 하더라. 알았어. 아침마다 깨워 줄 테니 우리 밥 잘 챙기고, 그리고 저 녀석 배변훈련은 언제 할 거니? 내가 해야 하는 거니? 저 녀석. 내 화장실을 기웃거린다고. 얼른 훈련시키라고!!! 만날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주제에. 나한테 아기를 떠맡기고 너는 뭐 하냐? 집사면 집사답게 제대로 일을 해라.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알았어. 오늘은 네 덕분에 나도 아침 먹고 간다. 셋이 같이 아침을 먹으니 기분이 좋구나. 사실 밤늦게 잠들어서 걱정했는데, 덕분에 기분 좋은 아침이야. 자자. 얘들아. 아빠 일하고 올 테니까 오늘도 사이좋게 잘 놀고 있어. 갔다 올게.”
결국, 집사 녀석, 배변훈련도 안 시키고 그냥 나갔어. 더 일찍 깨웠어야 했나? 야! 칼리프. 거기다 쉬하지 말라고. 하얀 패드에 하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냐? 정말로 내가 배변 패드에다 시범을 보여야 하는 거야? 이 몸이 하찮게 개처럼 저런 곳에다 볼일을 봐야 하냐고? 굴욕인데, 고양이의 수치야. 소문이라도 나면 나는 고양이 계에서 추방당하고 말 거야. 하지만 저 녀석. 아직 아기인 데다가 말귀도 잘 못 알아들어. 그리고 정말 날 엄마나 아빠처럼 여기는 것 같아. 골치 아파. 어쩌다 내가 강아지 육아까지 해야 하는 거지? 자자. 칼리프, 잘 봐. 여기서 쉬야를 하는 거야. 봐라. 창피하다. 정말. 아무도 이 사실은 알아선 안 돼. 집사도 마찬가지야. 집사가 알면 포복절도하면서 날 모욕하겠지? 자자. 너도 해 봐. 그래그래. 거기에다 하는 거야. 응가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혈통이 우수한 놈이라 그런지, 곧잘 따라는 하네. 됐어. 이제 나도 화장실에 가야지. 오늘도 상쾌한 모닝 응가를 한다. 그런데 열심히 힘을 주는 이 중요한 순간에 저 자식이 왜 또 쳐다보고 있는 거지? 지저분한 취미인데? 야, 비켜. 마무리까지 보고 있네. 저 녀석. 참 골치 아픈 녀석이야. 응? 아니 네가 거긴 왜 올라가? 네가 고양이니? 거긴 내 전용 화장실이라고.. 아니, 저 자식이 내 화장실에다 응가를 하다니, 미친 거 아냐? 아 정말 돌아버리겠네. 저 녀석은 지가 개라는 걸 몰라. 고양이로 착각하고 있어. 모든 걸 나 따라 할 모양이네. 어라. 뒷마무리까지 따라 하는 거야? 허 참. 나 원 참. 어째 이런 일이. 저 녀석, 지금은 아기지만 곧 중대형 개로 자랄 텐데, 그렇게 되면 응가의 양도 엄청나게 많아질 텐데, 내 화장실이 비좁게 되는 거 아냐? 아니야. 설마, 그때까지 내 화장실을 사용하진 않겠지? 조금 있으면 자신이 개라는 것을 자각하겠지?
(저녁)
“얘들아, 아빠 왔다. 오늘은 좀 일찍 왔지? 오늘 잘 있었어? 안 싸우고? 그래그래. 아빠 왔어. 칼리프, 네가 마중을 나오는구나. 역시 강아지가 애교가 있어. 저 술탄 놈과는 딴판이야. 그래. 칼리프. 에구, 에구 우리 이쁜이 칼리프. 아빠 보고 싶었어요? 어디 보자. 하이고, 착해라. 배변 패드에다 쉬야를 했네. 그런데 응가는 어디에 했는지 찾아볼까? 엥. 아무 데도 안 했어? 너 어제도 응가를 안 했는데, 변비 있는 거 아냐? 그래도 하루 만에 배변 패드에 쉬야를 하다니 천재가 틀림없어. 내가 별로 훈련시키지도 않았는데. 정말 혈통이 좋은 놈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역시. 순종 진돗개. 참, 그리고, 야! 술탄! 너는 아빠가 종일, 일하다 왔는데 인사도 안 하냐? 동생 좀 봐라. 얼마나 착하니? 대문 소리 나니까 바로 뛰어와서 인사하고, 꼬리도 흔들고, 게다가 하루 만에 배변 패드에 쉬야도 하고. 이런 동생 좀 보고 배워. 이 망할 고양아.”
아니? 저 집사가 미쳤나? 하루종일 저놈 돌보고 가르친 것이 누군데? 아무것도 안 하고선 생색이야, 생색이? 오늘, 이 몸이 얼마나 굴욕적인 시범까지 보였는데 그래? 배변 패드에 쉬야를 하도록 만든 이가 누군데? 나다. 이 바보 집사야. 내가 가르쳤다. 네 놈이 아니라 바로 내가 가르쳤다고. 그리고 저놈이 응가는 내 화장실에다 했어. 그건 네가 치워라.
(잠시 후)
“야. 술탄. 너 오늘 응가를 왜 이리 많이 했어? 너 과식하는 거 아냐? 동생 생겼다고 스트레스로 폭식하냐? 너 뚱뚱해지면 나 구박할 거야. 나 외모에 민감한 거 잘 알지? 너 돼지 되면 미워할 거라고. 알았냐? 가뜩이나 성질도 고약한데 살까지 찌면 정말 꼴 보기 싫을 거다. 네 몸매는 네가 알아서 관리해. 고양이는 운동시켜주는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칼리프랑 산책 다녀야지. 메롱. 부럽지?”
뭐라는 거야? 그래 제발 칼리프 데리고 밖에 가서 산책시키고 거기서 응가도 시키고 해라. 저놈이 내 화장실을 제 화장실로 여긴단 말이야. 부디 오늘만 그러길. 내일부터는 절대 안 돼. 안 되고말고.
(며칠 후)
이제 칼리프 녀석은 집사보다 날 더 아빠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아예 내 화장실을 사용한다. 배변 패드는 무용지물이다. 바보 집사는 나보고 많이 싼다고 타박을 한다. 화장실을 치울 때마다 하는 소리다. 바보 아니야? 칼리프가 어디 싸는지 모른단 말이야? 이제 데리고 온 지 일주일이 됐으니 집사도 알아차리겠지?
“얘들아, 오늘 주말이라 아빠 회사 안 가고 너희들이랑 같이 있을게. 그동안 칼리프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미안했어. 그런데 넌 변비냐? 왜 응가를 안 하니? 그러고 보니 쉬야는 어디서 하니? 그것도 잘 보이지 않던데? 바닥에 싼 흔적도 없고. 화장실 변기 사용하냐? 혹시? 하하하. 농담이야.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개는 화장실 관리가 고양이보다 훨씬 귀찮다고 하던데, 나는 아직 잘 모르겠는걸. 이제 일주일이라서 그런가? 오늘 하루종일 같이 있다 보면 어디다 실례를 하는지 알 수 있겠지?”
(칼리프의 배변 장면)
“아니? 칼리프 너. 지금 술탄 화장실에서 쉬야하는 거야? 이럴 수가. 이거 해외토픽 감인데. 술탄. 너 배변훈련을 네 화장실로 시킨 거야? 배변훈련을 시킨 것도 대단한데, 바닥도 아니고, 화장실을 이용하도록 훈련시키다니, 술탄 너 정말 대단하구나. 밥만 축내는 밉상 고양이가 아니었어. 술탄. 네가 5년 만에 가장 예뻐 보인다. 이리와 안아보자. 이런. 또 도망가는 거야?
넌 왜 그리 붙임성이 없냐? 사내자식이라 그런가? 역시 암컷을 키웠어야 했나? 아니지. 칼리프는 역시 수놈이라도 애교만 있는데, 저 자식이 까다로운 놈인 것이 틀림없어. 고양이라고 다 저렇진 않을 거야. TV나 유튜브에 나오는 고양이들은 다 살갑기만 하더라. 네 놈이 이상한 거 맞아. 그래도 칼리프 배변훈련 시킨 건 정말 잘했어. 기특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제일 중요한 걸 해줬으니 나머진 알아서 잘해주겠지?”
저 집사가 드디어 내 노고를 알아주는구나. 이제 나도 내 화장실을 공용으로 사용하기로 했어. 기분은 나쁘지만, 어떡하겠어? 저 어린 것이 제가 고양이인 줄로 아는데. 그래도 고양이도 화장실을 공용으로 사용하지는 않아. 바보야. 고양이도 다 자기 전용 화장실을 사용한다고. 우리는 깔끔한 성격이라 지저분한 걸 공유하지 않아. 특히, 나는 더 싫은데, 정말 어쩔 수 없이 봐주는 거야. 안 되겠다. 집사야. 내 화장실을 큰 것으로 바꿔줘. 그리고 배변 흙도 많이 담아주고. 저놈이 점점 크면서 응가를 엄청나게 많이 쌀 테니까. 보아하니 식욕도 엄청 좋아. 많이 먹고 많이 싼단 말이야. 심지어 내 밥까지 먹는다고. 적어도 밥은 개밥만 먹어야지. 감히 내 밥을 노리다니. 그건 용서 못 해. 아무리 아기라 해도. 그래서 오늘은 내 밥을 기웃거리기에 가차 없이 뺨을 6연타로 날려주었지. 그랬더니 놈이 깜짝 놀라면서 눈물을 글썽거렸어. 내가 너무 심했나 싶긴 했는데, 그래도 선을 지켜야지. 대선배님 밥은 욕심내는 거 아니야. 확실히 교육했는지, 이제 밥은 개밥만 먹는다. 그런데, 화장실을 내 화장실을 같이 사용한다. 집사는 너무 기뻐한다. 어차피 치우던 화장실인데 그것만 치우면 되니까. 개 키우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다면서 좋아라고 한다. 집사는 개를 얻어온 집에다 자랑한다. 야. 진돗개가 순종이라더니 정말 머리가 좋다면서. 배변훈련을 고양이가 시켜서 그런지 고양이 화장실을 같이 사용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자랑을 한다. 원래 개 주인 친구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양이다. 집사는 정말로 신이 나서 온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니는 눈치다. 심지어 옆집에서까지 우리를 구경하러 왔다. 옆집엔 노처녀 작가가 혼자 살고 있었는데, 우리 집사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인다. 하루종일 집에 박혀서 글을 쓴다고 하는데, 잘나가는 작가인지는 모르겠다. 옆집 작가도 고양이를 키운다. 고양이 주인은 나를 보더니 예쁘다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해서 내가 발톱을 세우고 펀치를 날렸더니 이런, 이런 까다로운 놈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집사는 그 늙은 여자에게 내 화장실을 보여주고는 개와 고양이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라고 사진을 찍어서 올리더니 ‘좋아요’를 많이 받을 거라고 신이 나 있다. 옆집 여자는 잠시 칼리프를 안고 쳐다보더니 귀여운 데다가 머리까지 좋은 개라면서 나도 개도 키울까? 하면서 자기 집으로 갔다.
어느덧 칼리프가 무럭무럭 자라서 나보다도 덩치가 훨씬 커졌다. 그런데도 이 녀석을 제가 개인 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도 개의 본성인 땅도 파고 밖에서 뛰놀고 싶은 마음은 있는 것 같은데, 저 집사가 그리 산책을 시켜주지 않아서, 애가 영 갑갑해 보인다. 나는 방에서 뒹굴 거릴 수 있지만, 저놈은 스크래처도 캣타워도 캣워커도 사용하지 못하니까, 내가 캣타워에 올라가서 쉬고 있으면 아래서 낑낑대며 날 부른다. 내가 놀아줄 순 없어. 이 좁은 집에서 뛰어다니기도 어렵고, 네가 집사보고 밖에 나가자고 해 봐. 입은 뒀다, 어디 쓰니?
이제 집사도 칼리프가 많이 자라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눈치다. 주중엔 넘어가지만, 주말엔 칼리프를 데리고 나가서 산책하고 온다. 물론 나는 집에서 휴식한다. 나는 밖에 나가지 않아. 내가 길고양이도 아니고. 거지가 아닌 이상. 내 구역을 지키고 있어야지. 그건 옆집 고양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집은 낮에는 나와 개만 집에 있지만, 옆집은 작가 여자가 고양이랑 하루종일 집에만 있으니까, 옆집 고양이는 자기 집사랑 살갑게 지내는 걸까? 옆집 고양이는 누님인데, 그 작가만큼이나 늙은 고양이이다. 역시 새하얀 고양이로, 페르시아 출신이다. 눈은 파랗고. 나는 터키 출신으로 역시 하얗고 내 눈도 파랗다. 비슷하게 보일 수 있는데, 고향이 다르다. 터키와 이란은 다른 나라이다. 종교의 종파가 다르다. 터키는 수니파 이슬람교이고 이란은 시아파 이슬람교이다. 예전에는 조로아스터교였다는데, 불을 숭배하는 종교지. 아마? 지금은 1%도 안 된다고 한다. 누님은 열 살은 된 것 같은데, 눈도 나쁘고 귀도 나쁘고 기운도 없어 보인다. 내가 직접 가서 본 것은 아니고, 낮에 베란다 쪽으로 가보면 서로 마주 볼 때가 있다. 우리는 베란다에서 얼굴만 내밀어서 서로 대화를 한다. 나는 누님이라고 깍듯하게 대한다. 누님 역시 출산을 할 수 없는 몸인데 우리 둘은 자조 섞인 대화를 한다.
“넌 젊고 건강해서 좋겠다. 세월이 참 빨리 지나간다. 이제 곧 늙어 죽게 되겠지? 너도 아까운 세월을 낭비하지 마.”
“누님도, 참. 길고양이들이나 10년 살고 죽는 거죠. 우리처럼 집에서 곱게 사는 고양이들은 15년에서 20년은 살 수 있어요. 누님도 큰 병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적어도 5년은 더 사실 수 있다고요.”
“그럴까? 내가 요즘 기운이 없어 캣타워는커녕, 소파 위에도 올라가지 못해. 물론 살도 많이 찌긴 했지만. 우리 집사는 늘 컴퓨터 앞에만 있어서 내가 소파 위에 올라가고 싶은지 캣타워에 올라가고 싶은지, 베란다 밖을 내다보고 싶은지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아. 휴우.”
“심심하시면 베란다로 오셔서 절 부르세요. 말동무는 해드릴 수 있어요. 참, 우리 집에 칼리프라는 개가 있는데요. 칼리프는 자기가 고양이인 줄 알아요. 누님도 한번 보세요. 칼리프. 이리 와. 그래 앞 베란다로 와. 자. 옆집 누님이셔. 10살이나 되셨어. 그래도 할머니라고 하면 안 되지. 실례야. 내가 언제 그렇게 가르치던? 자자. 누님께 인사드려야지.”
칼리프는 옆집 누님이 신기한 듯, 컹컹 짖어서 인사를 한다. 누님은 깜짝 놀라면서
“개는 목소리가 크구나. 집사들이 시끄럽다고 할 만해. 우리 고양이들은 참, 조용하고 품위가 있지. 정말이지 개보다 고양이로 태어나서 다행이야.”
나도 늘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내 면전에서 칼리프를 하등 동물 취급하는 것이 기분이 상해서, 나는 그만 누님께 한마디 했다.
“누님, 개 치고는 목소리가 큰 편도 아니에요. 또 이 녀석은 제가 고양이인 줄 알기에 거의 짖지도 않아요. 우리 아파트에서 우리 집에 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집은, 집사가 자랑한다고 떠든 집밖에는 없어요. 관리 아저씨도 한 번도 신고 들어온 적 없다고 말한다고요. 그리고 벙어리가 아닌 이상 그 정도도 소리를 안낼 수는 없잖아요?”
누님은 좀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뜬다.
“아! 기분 상했어? 너 기분 상하라고 한 말은 아니야. 나는 그저. 우리 고양이가 더 고귀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물론 고양이가 개보다 우수하죠. 하지만 칼리프는 그냥 개가 아니라고요. 내가 키우는 놈이라고요. 일반 개보다는 훨씬 낫다고요. 화장실도 우리처럼 제대로 사용한다고요.”
“그래그래. 알았어.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 너 정말 저 개를 네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있구나. 누님이 실언했어. 기분 풀어. 알았지? 그리고 나도 저 개를 앞으로는 보통 개처럼 취급하지 않을게. 됐지? 나 그만 들어간다. 내일 보자.”
나는 왠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캣타워 위로 올라가서 누워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칼리프 녀석 또 날 부른다. 밑에서. 나는 못 들은 척 계속 누워있었다. 칼리프는 낑낑거리더니 껑충 점프해서 올라오려고 한다. 물론 올라오지는 못한다. 녀석은 고양이가 아니니까. 그리고 캣타워는 꽤 높다. 개가 올라올 수 있는 높이가 아니다. 할 수 없어서 나는 그만 녀석에게로 내려왔다.
“칼리프. 넌 고양이가 아니야. 캣타워에 올라갈 수 없어. 그래. 운동을 못 하니까 몹시 답답하지? 집사는 대체 널 무슨 생각으로 데려온 걸까? 개는 매일 산책을 못 하면 화병에 걸리는데, 감당도 못 하면서 무책임하게 데려다 놓기만 하면 다야? 집사로서 실격이야. 아냐. 너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아빤데, 내가 이리 말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냥 집사거든. 무능한 집사. 무책임한 집사.”
그러자 이 녀석이 처음으로 의성어가 아닌 말을 한다. 이럴 수가? 정말 눈물이 난다. 내가 종일 떠들어 댄 보람이 있구나. 하지만 녀석이 고양이의 말을 하지는 못하는데, 개와 고양이가 같은 언어를 쓰지는 않으니까. 집사의 귀에는 “야옹야옹” “멍멍. 컹컹. 낑낑” 이렇게 들리는 것 아닌가? 그냥 동물들끼리 통하는 그런 거라고 해두자.
“형. 지금까지 나는 내가 형과 같은 고양이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야옹야옹’ 비슷한 소리를 낼 수가 없어. 나는 그냥 ‘멍멍. 컹컹. 낑낑’ 이런 소리밖에 내지 못해. 그리고 내가 형보다도 덩치가 훨씬 크고. 움직임도 매우 다르지. 형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지도 못해.”
“그래. 넌 개고, 나는 고양이지. 우리는 전혀 다른 종이야. 뭐 같은 포유류이긴 하다만. 넌 동물계 척추동물문 포유강 식육목 개과, 개속, 개종이고, 나는 동물계 척추동물문 포유강 식육목 고양이과, 고양이속, 고양이종이지. 저 사나운 호랑이, 사자, 표범, 치타들도 다 우리 고양이과란다. 호랑이과가 아니야. 고양이과 호랑이. 사자라고. 그만큼 우리 고양이가 대단한 동물이란다. 아. 물론 개도 그리 나쁜 동물은 아니야.”
그런데 갑자기 이 녀석이 존댓말을 한다. 그것은 또 언제 배운 거지? 내가 누님과 대화하는 걸 유심히 들었나 보다. 놀랍다. 역시 혈통이 우수해.
“네, 형님, 적어도 내가 형님과는 다른 동물인 것은 알겠어요. 저도 그리 멍청한 놈은 아니니까요. 저는 형님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없고, 점프력도 없고, 형님처럼 그렇게 빠른 연타를 날리지도 못해요. 이빨도 형님보다 덜 날카로운 것 같고. 하지만 기운은 더 세요. 쓸데가 없긴 하지만. 물론 밥도 많이 먹죠. 싸기도 많이 싸고. 요즘 기운은 넘치는데 쓸 곳이 없어 답답해요. 밖에 나가서 뛰고 싶어요. 형님이 집사라고 부르는 양반은 주말마다 산책을 시켜주긴 하지만 나는 매일 나가고 싶거든요. 형님은 답답하지 않으세요?”
“물론. 답답하지 않단다. 우리 고양이는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해. 공황상태가 된단다. 길을 잃고 집에 찾아오지도 못할걸. 나는 길고양이가 아니니까.”
“그렇군요. 확실히 우리는 서로 달라요. 그럼 형님의 공격 기술을 배우고 싶으니 절 훈련해 주세요. 화장실 훈련하듯이 잘 보고 배울게요.”
“그래? 하긴 내가 발이 빠르긴 하지. 그러면 내가 공격을 하면 넌 피하는 연습을 해라. 그리고 넌 나보다 키 크고 힘이 세니까, 날 제압해봐. 내가 널 밖에 산책시키는 건 해줄 수 없어도 격투 훈련은 시킬 수 있다.”
“그래요. 형님, 절 훈련해 주세요. 잘 부탁합니다.”
우리는 집에서 매일매일 격투 훈련을 한다. 물론 덩치, 즉 체급은 안 맞지만, 나는 동작이 빠르고, 타고난 지능이 있는지, 운동신경이 있는지 잘 피한다. 단 녀석에게 붙들리면 내가 깔려버리니까, 잽싸게 피해야 한다. 처음엔 굼뜨던 놈이 이제 제법 재빨라지고, 싸움에도 능숙해졌다. 우리는 종일 이러고 논다. 녀석도 넘치는 힘을 주체 못 해서 답답해하더니 나랑 매일 격투 훈련을 하고부터는 매우 즐거워한다. 나도 운동을 많이 하니까 더 체력도 좋아지고 컨디션도 상쾌하다. 종일 누워 뒹구는 것보다 훨씬 좋구나. 참 옆집 누님은 혼자서 그렇게 누워만 지내도 괜찮나? 정말 늙고 병들어 죽는 거 아냐? 걱정이 들어서 오랜만에 베란다로 가서 누님을 불렀다.
“누님, 계세요? 한 번 베란다로 나와 보세요.”
“아, 자네. 오랜만일세. 전에 개 때문에 삐쳐선 한 번도 안 찾았잖아? 오늘 웬일이야?”
“그랬나요? 누님. 저 요즘 칼리프랑 매일 운동하거든요. 무술훈련을 해요. 그랬더니 몸도 더 가벼워지고, 상쾌하고 컨디션도 기분도 매우 좋아요. 누님도 운동을 좀 하시죠.”
“운동? 나는 몸이 무거워서 거동하기 힘들어. 여기 나오는 데도 한참 걸렸잖아?”
“그럴수록 더 움직이셔야죠. 정말 성인병으로 저세상으로 가시고 싶으신 것은 아니겠죠? 힘들어도 소파 위에도 뛰어오르는 연습을 하세요. 바닥에 누워만 있지 마시고. 고양이가 바닥에 누워있는 건 수치에요. 조금이라도 위에 올라가 계세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질 않아. 우리 집사도 날 포기한 듯해. 내가 요즘 입맛도 없어서 밥도 잘 안 먹는데.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섭섭해.”
“아. 정말 곤란한데. 누님. 우울증이신 거예요?”
“우울증? 그런가? 음. 요즘 기운도 없고, 기분도 저조하고, 밥맛도 없고. 그렇긴 하지.”
“에. 정말 우울증이시네. 큰일인데. 누님이 낮에 우리 집에 놀러 오시면 좋을 텐데. 우리 집엔 낮에는 칼리프랑 저 둘만 있으니까요. 누님이 이리로 넘어오시기만 하면 되는데,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베란다 이 벽을 뚫을 순 없나?”
“하하. 우리 발톱이 아무리 날카롭다 해도 콘크리트 벽을 뚫을 순 없어. 안 그래?”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보죠. 뭐. 어차피 우리 발톱 조금만 자라면 집사들이 다 깎아버리잖아요? 발톱 닳으면 집사에게 깎이지 않아도 되니까, ‘일석이조’네요. 시도는 해 봐요. 자 누님. 저는 이쪽 벽을 파 볼 테니까 누님은 반대 방향에서 파세요. 누님, 발톱은 아직 있죠? 늙어도 발톱이 없는 건 아니죠?”
“늙었다고 발톱도 없는 줄 아는 거야? 날 뭐로 보고? 해볼게.”
우리 두 고양이는 베란다 벽을 서로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벽이 콘크리트가 아니었다. 얇은 나무판으로 막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요즘 아파트는 베란다 양 벽이 얇은 합판으로 되어 있어서 유사시 서로 피난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고 한다. 나는 바로 칼리프를 불렀다.
“칼리프. 너 그 넘치는 힘으로 이 벽을 힘껏 밀고 물어뜯어라. 구멍을 내 봐.”
칼리프는 신이 나는 듯, 누님과 내가 발톱으로 대충 긁어놓은 벽을 있는 힘껏 발로 밀고, 부딪히고, 파고, 이로 물고 뜯고 하더니 누님이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제는 베란다에서 서로 목을 빼고 대화하지 않아도 된다. 드디어 뚱뚱한 누님이 그 구멍을 통과해서 우리 집 베란다로 들어왔다.
“이보게. 칼리프군. 정말 반갑네. 전에 자넬 처음 봤을 때, 내가 실언을 해서 자네 형님이 한동안 삐져 있었지. 이렇게 구멍을 내주고. 정말 고맙네. 역시 개가 훨씬 힘이 세구먼. 이도 튼튼하고. 앞으로 잘 부탁하네. 매일 이리로 서로 다닐 수 있으니, 잘 됐어. 나도 덜 심심하고, 우리 집사는 내가 어디 있든지 별로 관심도 없으니 말이야.”
“그래요. 누님, 낮에는 여기서 놀다가 배고프시거나 화장실 가실 때 가세요. 집사가 찾지도 않잖아요?”
“그래, 말이야. 내가 여기 얼마나 있어야 집사가 찾는지 한번 볼까?”
우리 셋은 같이 운동도 하고, 무예도 겨루고 매일매일 즐겁게 놀았다. 우리 집 집사가 퇴근해서 들어올 때쯤 누님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 우리 집에서 셋이 훈련을 하는 사이에 누님은 살이 많이 빠지고 건강해졌다. 기분도 좋고 밥맛도 좋다면서 정말 평생에 가장 행복하다고 하신다. 나도 즐겁고 우리는 고양이와 개를 따로 구별하지 않게 되었다.
(며칠 후)
“칼리프, 이상한데, 왜 오늘은 누님이 안 오시지?”
“글쎄요. 어디 아프신가? 잠깐 보고 올까요?”
“야, 넌 덩치가 커서 그 구멍으로 통과 못 해. 거긴 개구멍이 아니고 고양이 구멍이야. 내가 동태를 살피고 올게.”
“네, 형님, 조심하세요. 옆집 집사는 성질이 사납다던데 들키기라도 하면....”
“걱정하지 마. 살짝 보고 올 테니까.”
나는 고양이 구멍으로 살짝 옆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누님을 불렀다.
“누님, 계세요? 왜 오늘은 안 오세요?”
아니, 누님이 옆집 여자에게 붙들려 있다. 웬일이지? 나는 들키기 전에 잽싸게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칼리프, 누님이 옆집 집사에게 잡혀있어. 이상한데, 그 여자답지 않은걸. 뭔가 수상해. 그 여자 무슨 꿍꿍이지?”
“글쎄요. 누님에게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옆집 작가네)
“얘, 카자르. 너 요즘 잘 안 보이던데 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거니? 자꾸 날 피하는 것이 수상해. 그리고 너 살도 좀 빠졌다. 무슨 일이야? 어라, 이제 소파 위에도 올라갈 수 있구나. 다이어트하냐? 페르시아 절세 미녀 카자르 공주의 이름을 따서 카자르라고 지었더니 정말 카자르처럼 뚱뚱해져선 움직이지도 못하더니 요즘 왜 이리 날렵해졌지? 이름대로 산다고, 정말 뚱뚱이 공주였는데 말이야.”
얘들아, 오늘 이 망할 집사가 날 꼭 붙들고 있어서 나가질 못해요. 잘못하다가 우리 통로를 들킬까 봐 못 나가겠어. 오늘 정말 왜 이래? 너답지 않게. 귀찮게 정말, 평소엔 관심도 없더니, 에이 불편해 죽겠네. 평소대로 하란 말이야. 컴퓨터 앞에서 글만 쓰라고. 나 좀 놔줘.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아니, 얘가 왜 이리 시끄럽지? 기운 없어 아무 소리도 못 내던 애가 정말 이상하네.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나.”
아니거든, 나만 놔주면 되거든.
“야옹, 야옹, 야옹”
“하긴, 나이도 꽤 들었고, 늙어서 갑자기 살이 빠지는 건 위험해. 사람도 늙어서 갑자기 살이 빠지면 암이랬어. 카자르, 오늘 병원에 가자. 진찰을 받아봐야겠어.”
(동물병원)
“네, 카자르 보호자님, 들어오세요.”
“네, 우리 카자르 별일 없는 거죠?”
“네, 진단결과 큰 이상은 없습니다. 약간 비만하긴 하네요. 그래도 이 나이에 이 정도는 준수한 편입니다. 이도 다 있고, 시력과 청력은 뭐 나이에 비해 좋은 편이고요.”
“그래요? 실은 엄청나게 뚱뚱했었는데, 요즘 갑자기 살이 빠져서 놀라서 데려왔어요. 혹시 암인가 해서.”
“암이요? 설마요? 그런 건 없고요. 비만으로 인한 성인병 증상은 좀 있긴 합니다. 노년기 일반적인 증상들이죠. 밥은 잘 먹나요? 잘 싸고? 잘 자고? 그 세 가지만 잘하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문제없어요.”
“네, 선생님, 별일 없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그럼, 온 김에 간식 좀 살까요? 요즘 살은 빠지는데, 밥은 더 잘 먹더라고요. 이상하죠?”
“좋은데요. 잘 먹고, 살도 빠지고 건강해지고 있네요. 다 늙어 회춘하는 건가?”
“회춘이요? 그럴 수도 있나요?”
“농담입니다. 어쨌든 건강해지는 것은 확실하군요. 식욕이 느는 건 좋은 거죠. 없는 것이 문제지. 게다가 원래보다 살이 빠지고 있다 하니, 운동을 많이 하나 보죠?”
“운동이라, 내가 거의 놀아주지 않았는데, 얘가 숨어서 운동하나? 한번 살펴봐야겠어요. 그동안 좀 무심했거든요.”
“네, 카자르 보호자님, 다음에 또 이상 있으면 들러주세요.”
(작가 집)
“야, 카자르. 너 혼자 운동하냐? 어디서 운동하냐? 말해. 하긴 네가 말을 해도 내가 못 알아듣지. 오늘 종일 네가 어떻게 사는지, 좀 봐야겠어.”
이런, 젠장, 이 늙은 집사가 미쳤나? 평소대로 하란 말이야. 평소대로. 큰일이네. 이래서는 옆집에 가기는커녕, 집안에서 감시만 받고 있어야 해. 이렇게 갑갑할 수가.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군. 정말 이렇게 살았단 말인가?
“카자르, 너 하루종일 그냥 소파 위에 엎어져 있을 거야? 내가 컴퓨터 앞에 있듯이? 그러고 어떻게 살이 빠졌냐? 신기하네. 알았어. 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래그래. 나도 이제 작업할게.”
‘저 고양이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 내가 지켜보니 딴청 피우는 것 좀 봐. 내가 아무리 컴퓨터 앞에서 글만 쓴다고 해도 네가 달라진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몰래 감시해야겠다.’
“알았어. 나는 글 쓸 테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놀아.”
저 여자가 드디어 컴퓨터 앞에 갔네. 휴, 살짝 자는 척하다가 옆집에 가서 알려줘야지. 애들이 기다릴 텐데, 걱정도 할 테고. 얘들아, 조금만 기다려. 저 여자 글 쓰느라 집중하면 그때 갈 테니까. 이제 나가봐야지. 얘들아. 많이 기다렸지? 이제야 풀려났어.
(우리 집)
“얘들아, 나 왔어. 많이 기다렸지?”
“누님, 이제야 오셨군요. 걱정했어요. 마녀에게 붙들려서 못 오시는 줄 알았어요.”
“말도 마. 오늘은 병원까지 가서 전신 촬영하고, 온갖 진단 검사를 다 받았어. 저 여자 보기보다 돈이 많은 모양이야. 그런 쓸데없는 데 돈을 펑펑 쓰는 걸 보니.”
“그랬어요? 별일은 없죠?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없어. 오히려 더 건강해졌다고, 의사가 그러던걸? 회춘하고 있다지?”
“그래요? 잘 되었네요. 우리와 같이 지내니까 젊어지신 거네요. 앞으로도 매일 오세요. 같이 놀게요.”
“그래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그렇게 지냈는지 신기할 정도야. 하루만 못 와도 좀이 쑤셔 죽을 것 같았다고. 이제 좀 살 것 같네. 자 오늘은 고양이 대 개로 싸워볼까? 2대1로 말이야. 그것이 공평할 것 같아. 칼리프 넌 덩치도 많이 크고, 힘도 세니까. 어디 잘 피해 보시지?”
“누님이 그러고 싶으시다면야. 들어드려야죠. 칼리프, 우리 둘이 공격할 테니 막아 봐.”
(저녁)
“누님, 곧 우리 집사가 올 거예요. 얼른 가세요.”
“알았어. 오늘은 늦게 와서 별로 못 놀았네. 아쉬워.”
“내일 또 오시면 되죠.”
“아냐. 이젠 늙은 여자 눈치를 봐야 해서. 예전처럼 쉽게 오지 못해. 혹시 못 오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있어. 알았지?”
“그렇군요. 누님, 조심하세요. 우리 고양이 구멍, 들키지 않게 단속 잘하시고요.”
“물론이지. 항상 잘 막아 두고 있어. 그렇게 큰 구멍 들키면 우린 끝장이야.”
(작가 집)
“카자르! 너 이 구멍으로 옆집에 드나들었니? 매일? 거기서 놀다 오는 거였어?”
으악! 깜짝이야. 이 여자가 왜 여기에 서 있지? 날 감시한 거야?
“야옹! 야옹. 야옹? 야옹?”
“기가 막혀서. 세상에 난 이런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 이 사실. 옆집 주인도 알고 있는 거야? 아니지. 지금 퇴근했을 테니 바로 물어봐야지.”
“띵똥, 띵똥”
“네, 누구세요? 아니? 작가님, 무슨 일이세요?”
“네, 옆집 총각. 잠깐 실례할게요.”
“저기, 청소를 못 해서 집안이 엉망인데, 요즘 특히 더 엉망이더라고요. 집안이....”
“괜찮아요. 그런데 옆집 총각. 요즘 저희 카자르가 매일 여기서 놀다 가는 것 알고 계세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문 열어줄 사람이 없는데, 설마. 우리 술탄이나 칼리프가 대문을 열어준다고 말씀하시는 거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리 와서 보세요. 베란다로 오세요.”
“베란다에 무슨?”
(베란다)
“보세요. 벽에 구멍이 뚫려있죠? 아마 술탄과 칼리프가 했겠죠. 우리 카자르는 기운이 없어서 이런 일 절대 못 해요. 덕분에 우리 카자르가 이 고양이 구멍을 통해서 매일같이 이 집에 들락거리면서 놀다가 댁이 퇴근하기 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요. 나도 이 사실을 이제야 알았고요. 당연히 옆집 총각은 몰랐던 것 같네요. 역시나. 그 표정을 보니.... 자자, 진정하시고. 역시 이 구멍을 다시 막아야겠죠?”
“잠깐만요. 작가님. 이 구멍, 사람이 들락거릴 크기는 아니고. 칼리프도 못 통과하겠고, 딱 고양이 구멍이네요. 카자르가 우리 집에서 노는 것이 싫으세요? 그게 아니면 굳이 막으실 것까진 없잖아요? 애들이 힘들게 뚫었는데.”
“아니, 뭐, 싫다기보다. 덕분에 이 집이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혀지고, 보아하니 여기 간식도 많이 먹은 것 같은데, 화장실도 그렇고. 아, 화장실은 아닌가? 여기 술탄, 칼리프 2인용이니 우리 카자르가 쓸 것 같진 않네요. 쟤도 워낙 깔끔하니까. 하지만, 카자르가 계속 폐를 끼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난 지금까지도 전혀 몰랐는걸요. 작가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앞으로도 절대 몰랐을 거예요. 정말이지. 고양이들이 이렇게까지 머리가 좋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아니, 구멍은 칼리프가 뚫었겠지? 하여튼. 얘들, 우리보다 더 낫네요. 이런 생각을 다 하다니.”
“덕분에 우리 카자르가 많이 건강해지고, 살도 빠지고 밥도 잘 먹고 오늘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매우 양호하다네요. 덕분에 카자르가 제일 신났어요. 사실 나는 거의 놀아주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한번 글을 쓰기 시작하면 밖에서 전쟁이 나고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매우 적적했을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주인 잘못 만난 거죠. 그래서 비만 우울증 고양이가 되었는데, 요즘 여기 들락거리면서 건강해지고 예뻐지고, 성격도 밝아지고, 이제 소파 위는 점프해서 올라가기도 해요.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제가 뭐 한 일이 있다고. 다 술탄과 칼리프가 한 일이죠. 이 녀석들에게 감사하세요. 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집사니까요.”
알긴 아는구나. 바보 집사야.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그러니 이제 간식, 3인분으로 준비하고 물도 3인분으로 차려 놔라.
“그러니 작가님,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마음껏 글 쓰세요. 카자르가 낮 동안 우리 집에서 마음대로 놀다 갈 수 있도록, 저도 아무것도 불편하지 않아요. 간식은 한 번씩 사다 주시던가요. 정 마음이 불편하시면.”
“그럴게요. 당장 갖다 드릴게요. 카자르도 여기서 더 잘 먹는 것 같아요. 아예 밥상을 여기다 차릴까요?”
“마음대로 하세요. 단 화장실은 자기 집을 이용하겠죠? 그건 저도 좀....”
“잘 들었지? 카자르? 화장실은 우리 집에 가서 사용하렴. 여기는 술탄과 칼리프 2인용이니까. 너까지 사용할 순 없어.”
알았어. 바보 집사야. 나도 여자야. 그 정도는 알아서 한다고. 남의 화장실을 사용하진 않아.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화장실은 자기 걸 사용한다고 하네요. 저도 이 정도는 알아들어요. 그래도 같이 산 세월이 10년이 넘었는데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네, 카자르 간식은 바로 갖다 드리죠.”
“들었죠? 누님? 이제 마음껏 놀러 오세요. 우리 집사도 괜찮다고 하잖아요? 마녀도 아니, 누님 집사도 수긍하고. 잘 됐어요. 이제 아무 걱정할 것 없어요.”
“그렇구나. 정말 잘 됐어.”
(며칠 후)
오늘은 우리 셋, 과거 이야기를 할까 한다. 내가 터키 출신으로 이름이 술탄인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 나는 전생에 터키의 술탄이었다. 당연히 하렘에 셀 수 없이 많은 아니 정확히는 셀 수는 있겠지. 내가 후궁이 몇 명인지 숫자를 모를 뿐. 그렇게 떵떵거리고 산 대가로 후생에 고양이로 태어난 것이다. 다 전생에 쌓은 업보대로 환생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나는 사람도 많이 죽였다. 알고 보니 살인을 한 사람은 후생에 동물계 이하로 태어난다고 한다. 물론 자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나는 술탄으로서 악인, 죄인들만 죽였다. 뭐 아닌 경우도 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고양이로 태어날 줄 누가 알았겠냐? 세월이 많이 흘러서 기억도 희미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나도 잘나가던 술탄이었다. 후궁이 몇 명인지도 몰랐는데, 자식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몇 명인지 모른다. 그때도 지금도. 그래서 벌 받아서 지금 환관으로 살고 있다. 그것도 환관 고양이로. 그래도 여전히 술탄으로 불리고 있다.
나는 카자르 공주다. 나의 아버지는 페르시아의 왕 ‘나시르 앗딘 샤’이다. 아버지는 11남 11녀를 낳으셨는데, 나는 8번째 공주이다. 당시 최고의 미모로 145명이 나에게 구혼을 했다. 전설의 시인이 나를 위한 시를 지었다. 구혼자 중 13명은 상사병으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죄 많은 여인이다. 그 벌로 지금 고양이로 태어났다. 내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13명을 죽도록 만들었기에 벌을 받아 고양이가 되었다. 그리고 불임수술을 받았다. 인간에 의해. 그것도 다 전생의 업보이다. 그 모습을 닮아서 확실히 나는 지금도 다른 고양이들에 비해서 많이, 뚱뚱하다. 페르시아나 터키나 아랍이나 무슬림 대부분 지역에서는 뚱뚱할수록 미인인데, 요즘은 달라진 것 같긴 하다만. 나는 지금으로 치면 거의 코끼리급 미인으로. 아! 내 사진은 인터넷에서도 많이 돌고 있으니 참고 바란다. 내가 무슬림 지역의 표준 미인형이다. 알겠나? 눈썹과 수염이 새카맣고 몸매는 코끼리급. 다리도 코끼리 다리. 어느 날 아버지는 러시아에 발레공연을 보고 오시더니 우리 모두에게 짧은 치마바지를 입게 하셨다. 덕분에 코끼리 다리가 그대로 드러난 사진들이 인터넷에서 돌고 있다. 다들 괴이한 복장과 외모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차라리 고양이의 모습이 낫다고. 그런가? 나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카자르 공주이다. 뚱뚱한 절세 미녀 공주.
멍멍멍. 나는 칼리프예요. 사실 나는 순종 한국산 진돗개인데, 형님이 터키 출신이라서 저도 무슬림지도자로 불리게 되었어요. 내 뜻은 아니에요. 나는 전생에 조계종 중이었어요. 확실히 종교인은 맞네요. 그런데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죠? 중, 즉 스님이 살인을 저질렀을 리가 없다고 알고 계시잖아요? 살인은커녕, 빈대, 벼룩, 이, 모기조차도 생명이라서 죽이지 못하는 계율을 지키고 있는데, 어째서 동물로 태어났냐고 의아해하시죠? 어쩔 수 없었어요. 조선시대 절에서 수도하던, 일개 승려였지만 임진왜란 때, 우리 백성들이 도륙당하는 걸 보고 칼과 활을 들지 않을 수 없었어요. 당연히 동포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생, 아니 살인을 저질렀죠. 얼마나 죽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나요. 최선을 다해 무찔렀죠. 왜군들을. 그리고 나 역시 왜군의 총칼에 죽었어요. 시체도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어요. 아마 짐승들 밥이 되어서 마지막으로 보시를 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현생에 당연히 짐승으로 환생했죠. 개로. 그리고 지금도 정치, 종교계 수장으로 불리고 있네요. 외국 종교인이긴 하지만 전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 법이죠.
“정말 우리 셋은 다 화려한 전생을 가졌네요. 그리고 그 전생이 현생과 전혀 연관이 없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죠. 인간들은 대부분 자기 전생을 기억 못 한다고 하던데, 오히려 우리보다 더 하등한 것 아닌가요?”
“그러게 말이야. 나는 지금도 여전히 카자르 공주로 불리고 있어. 그 미모 그대로. 단 결혼 못 하고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벌을 받고 있지.”
“전 그때도 지금도 종교인으로 결혼은 못 할 것 같네요.”
“나는 전생에 화려하게 술탄으로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아서 원도 한도 없지만, 칼리프 너는 정말 안 됐다. 안타깝다. 전생도 현생도 중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그러게요. 뭐 별로 아쉬움은 없어요. 개나 사람이나 생의 반복일 뿐. 벌써 도를 닦은 기분이네요.”
“그래. 칼리프. 인간들은 자기들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대지만, 자기 자신의 과거, 전생도 모르고 그때그때 반복 환생할 뿐이야. 아니 대부분 종교에서는 환생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현생의 결과로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고 가르치고 있지.”
“그렇군요. 내일이 주말이라 내일 병원 가서 수술할 것 같아요. 형님. 누님.”
“칼리프, 기운을 내. 개와 고양이의 삶은 인간보다 짧으니까, 곧 다시 환생할 수 있어. 이다음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겠지. 지금의 삶에서는 죄를 짓지 않으니까.”
“그럼요. 다음엔 다시 사람이 될 것 같아요. 설마 그때도 종교인으로 살진 않겠죠? 지긋지긋한데, 그래도 윤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려나?”
“글쎄다. 나는 다음에 인간이 된다 해도 이제 술탄으로 하렘을 이끄는 최고 권력자는 되기 힘들 거야.”
“나도 이제는 코끼리 미녀가 아닌 날씬한 못난이로 태어나서 남자들 상사병을 일으키지 않고 평범하게 남편과 자식을 키우는 주부로 살고 싶어. 공주 같은 건 싫어. 그리고 아버지 때문에 입었던 그 치마바지, 그때도 지금도 너무 싫어. 나는 긴 치마가 좋아. 지금 사진을 봐도 긴 드레스 입은 모습이 훨씬 예쁜데 말이야, 왜 아버지는 그런 괴이한 복장을 요구하신 건지, 알 수가 없어. 절대로 다음엔 공주로 태어나지 않을 거야.”
“아이고, 누님. 이제는 왕조가 있는 나라도 몇 안 남았어요. 세상이 변했다고요. 뭐, 아직 왕이 다스리는 나라들이 있긴 하지만, 또 그런 데 태어나시진 않을 거예요.”
“그래. 이젠 우리도 무슬림이 아닌 지역에서 태어나서 머리카락도 마음껏 드러낼 수 있고 치마건 바지건 입고 싶은 건 다 입을 수 있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어. 난 운전을 하면서 가고 싶은 곳도 마음껏 다니고 싶거든. 아직도 눈만 내놓고 사는 여자들이 많더라고. 마음이 안 좋아. 그 여자들도 그렇게 다 가리고 싶진 않을 텐데 말이야.”
“아, 최근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자들에게 운전면허를 허용했다고 해요. 그런데 그 이유가 좀 웃겨요. 여성의 인권 신장 뭐, 이런 이유가 아니에요. 외국인 여자 운전사를 고용하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 커져서 국가 차원에서 자본손실을 막고자 실시한 제도라고 하네요. 뭐, 외국인 노동자에게 돈이 나가는 것을 막는 방책이긴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직접 운전을 하면서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잘된 일이긴 하죠.”
“그래. 세상이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 하지만 아직도 무슬림은 일부다처제야. 정확히는 일부 4처제. 그리고 첩은 훨씬 많이 거느릴 수 있지. 첩조차도 안 되는 시비는 셀 수 없이 많이 둘 수 있고, 아직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다음엔 일부일처제인 나라에서 태어나서 남편과 자식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알콩달콩 살고 싶어.”
“그렇게 되실 거예요. 누님. 다 그러자고 우리가 지금, 이 고생을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넌 남자이고, 술탄 출신인데도 여전히 일부일처제를 하고 싶니?”
“네, 몇 명인지도 모르는 후궁과 자식들을 거느리고 사는 것이 남들은 부러울지 몰라도. 나는 그게 좋은지조차 의식도 못 하고 살았으니까요. 과연 그것이 행복한 삶일까요? 차라리 중으로 살다 죽은 칼리프가 더 행복한 걸지도 몰라요. 안 그래? 칼리프? 넌 중으로 살 때 불행했니?”
“글쎄요. 내 발로 절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서요. 어릴 때 절에다 버리고 간 아기였다는데. 절에서 절 거둬주셔서 중이 된 것이거든요. 저는 태어나서 본 사람들이 다 스님들뿐이어서 중의 삶 외에는 알지 못해요.”
“이런, 나와는 정말 딴판이구나. 넌 다음에 마음껏 누리며 살도록 해.”
“그게 마음대로 될 수 있다면요. 그른데 형님, 누님, 다음에도 우리 셋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다. 그때는 사람인 텐데, 사람이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겠지? 아마 서로 만난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 거야. 아쉽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런가요? 알아보지 못하다니 정말 서글프네요.”
“그리고 각자 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간대에 태어나겠지. 아마도.”
“그러니 지금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살다가 가면 되는 거예요. 다음번에 꼭 다시 만나길 기원하면서.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낯설지는 않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래. 누님, 오늘은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운동은 전혀 하지 못했네요. 내일 칼리프가 병원에서 중성화 수술을 받는 날이라서 얘가 오늘 운동할 기분이 아닐 것 같아서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누님, 오늘만 이해해 주세요.”
“물론이지. 나도 회상에 잠겨서 좋았어. 칼리프. 너무 슬퍼하지 마. 동물들의 삶은 짧아. 곧 끝나. 다음번의 환생을 기약하자. 너는 아마도 착하게만 살아서 다음 생은 훨씬 행복하게 살 거야. 틀림없어.”
“그럼요. 형님, 누님, 그래야죠.”
(며칠 후)
“누님, 칼리프 녀석이 이제 실밥까지 다 풀었어요. 걱정하지 마시고, 놀러 오세요.”
“그래? 한 일주일 걸렸나? 그동안 눈치 보여서 놀러 가질 못했어. 괜찮아? 가도 돼?”
“그럼요. 그 녀석이 누님을 부른걸요. 누님이 나 때문에 오랫동안 오지 못했다고 걱정해요. 어서 오세요. 누님.”
“일부러 마중까지 와주고 고마워. 그럼 놀러 갈까?”
“칼리프. 건강은 어때? 아직 컨디션이 별로야? 우리도 다 겪은 일이야. 곧 적응될 거야.”
“네, 그럼요. 누님. 저 신경 쓰시느라 오지도 못하시고, 죄송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미안해해?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집사들이 자기들 편하고 싶어서 하는 짓이잖아? 네가 의기소침해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우리는 지금의 인생을 마음 편하게 누리다가 가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다음 생을 기약하는 거지.”
“어쨌든 상처 부위도 털로 덮여서 어서 안 보이면 좋겠어요. 물론 내가 잘 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지만, 신경 쓰여요.”
“아직 네가 어려서 그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단다. 아무래도 격투나 운동은 삼가는 것이 좋겠지? 오늘도 우리 옛날이야기나 할까? 어때? 칼리프. 전생 기억나는 것 있어?”
“글쎄요. 전생에 중이었던 것 말고 그 전 전생은 어쨌더라? 누님이나 형님은 이전 전생도 기억하세요?”
“내공이 깊은 자들은 가능하다고 하던데, 우리 잠시 명상에 잠겨 보자. 그 이전 전생을 더듬어보자. 자,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눈을 감고 명상 집중. 시작!”
(칼리프 전생)
저기가 어디지? 아. 역시 절인 것인가? 나는 그 이전에도 중이었던 거야? 이럴 수가. 정말 너무하네. 대체 몇 세기 동안 중으로 살았던 거야? 대체? 어라. 중은 중인데, 여승이었네. 비구니구나. 그러고 보니, 절이 작아. 암자야. 하긴 비구니들은 큰 절에 있지 않았지. 주로 외딴곳이나 큰 절 부속 암자에 기거하는 경우가 많지. 그 이전엔 여승이었구나. 그런데 어디 보자. 나는 말단이고, 저 할망구는 대선배인 모양인데, 성질이 더러워 보여. 역시나. 저 추운 겨울에 맨손으로 빨래하고 있어. 손 시려. 손이 빨갛게 부어터졌네. 사람이면 뭐해? 지금 개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구나. 별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 볼까? 빨래를 다 하고 와서는 부엌에서 불을 때고 밥을 짓는구나. 공양이라고 하지. 곧 예불시간인데, 계속 부엌에 있어도 되는 거야? 아. 부랴부랴 본당으로 가는군. 저녁 예불을 마치고 밥은 먹나? 저런 종일 일하고 왔는데, 밥은 저것만 먹는 거야? 지금 내가 먹는 사료의 절반도 안 되겠어. 게다가 전부 풀 뿐이야. 하긴 완전히 채식해야 하는 거지? 정말이지. 개 팔자가 상팔자네. 물론 집 없는 떠돌이 개 말고. 아 더 떠올리기 싫다.
(술탄 전생)
어라? 누구지? 술탄 이전의 나는 하렘의 후궁이구나. 여자였어. 상상도 못 했네. 카자르 공주만큼은 아니라도 꽤 거구의 미인인데? 당시의 미인 기준에 매우 적합하군. 그런데 하렘에 후궁이 수십 명인데, 정작 술탄은 누구지? 나는 아직 젊은데, 보아하니 아직 자식도 없군. 신입인가? 이런. 고생이 훤하겠네. 서열 높은 후궁들이 날 얼마나 볶았을까? 후궁들끼리는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네. 다들 경쟁자라 이거지? 젊고 예쁜 것이 좋은 건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아들을 낳은 후궁이 제일 서열이 높구나. 그것도 큰아들. 아들 여럿인 후궁 그런 후궁이 세력이 있어. 나는 왜 자식이 없는 걸까? 술탄이 전혀 찾질 않았나? 어디 보자. 환관에게라도 잘 보여서 술탄이 오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눈치나 머리를 쓰지 못하는 바보 멍청이구나. 그러니 독수공방을 못 면하지. 화병으로 요절한 건가? 아니면 후궁 암투에 희생양이 된 건가? 아. 저기 술탄이 보이네. 생각보다 준수한데? 그런데 어느 후궁을 찾나 볼까? 어라? 환관이 어디로 이끄는데? 저런, 뇌물을 먹인 후궁의 처소로 데려가는구나. 나는 가난하고 세력도 없는 한미한 집안 출신인 것 같아. 타고난 미모 하나로 어떻게 하렘에 들어오긴 했지만, 중간에서 저렇게 방해를 받으면 술탄을 만나기 어렵지. 그러니 자식도 없지. 저런 상태가 오래 지속 되면 술탄은 젊은 신입 후궁이 있었는지조차도 잊게 되지. 그래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는 거구나. 요령도 없고, 배경도 돈도 없는 가련한 후궁이 하렘에서 독수공방하다가 죽었던 거구나. 그 한을 풀고자 다음 생에 술탄으로 마음껏 누리고 살았던 거로구나. 다음 생에서 한을 풀긴 풀었네.
(카자르 전생)
웬 장군이지? 칼이 멋져. 저 장군은 오늘도 전쟁에서 큰 승리를 이끈 주역이야. 설마 내가 대장군이었단 말이야? 남자? 그것도 장군? 어머나 세상에 무지하게 멋진 남자 이상형이네. 아차차. 저 남자 나였지? 정신 차려. 내가 저렇게 활보하고 살았구나.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러면 사람들도 많이 죽였을 텐데 어찌 다음 생에 공주가 되었을까? 어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라 어마어마한 상을 받겠지? 음. 대전 앞에 무릎을 꿇었어. 역시 페르시아구나. 왕이 승리를 치하하고 있네. 뭔가 갖고 싶은 것을 말해 보라고 하는군. 그런데 나는 뭘 요구하나? 어라? 공주를 달라고? 그렇군. 공주를 사모하고 있었군. 그런데 왕은 난감한 표정인데? 왜 그러지?
“다른 나라와 혼약이 되어 있어서 자네에게 줄 수 없네. 미안하지만 다른 상을 요구하게.”
저런. 실망이 큰 표정이야.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거절하는구나. 그리고는 쓸쓸히 돌아가는구나. 바보같이 공주 하나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대장군이나 되어서는. 그런데 공주는 약혼자를 사랑하나? 공주 역시 국가 간의 이해득실의 도구일 뿐이야. 공주도 저 장군을 사모하고 있는데, 국가 간의 혼약을 깰 순 없지. 역시나. 공주가 외국으로 시집을 갔어. 저런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어. 저러다 죽으면 자살 아냐? 그랬으면 다음에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는데. 아. 다른 전투에 나가게 되는구나. 거기서 장렬히 싸우네. 그 와중에 전사했구나. 그 소식을 들은 공주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구나. 안타까운 두 사람이야. 저렇게 내가 한을 품고 죽어서 그다음에 공주로 태어나 무한한 사랑을 받았구나. 전생 이전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네. 카자르 공주가 나았네. 근데 지금은 고양이? 지금이 제일 속 편한 것인가? 아무 걱정 없이. 뒹굴뒹굴하는 삶. 고양이도 그리 나쁘지 않아.
“형님, 누님. 저 그만 탐색할래요. 전생 이전의 삶은 더 나빠요.”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여자였어. 그것도 사랑받지 못한 후궁. 정말 싫다.”
“나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히 죽은 대장군이었어. 역시 떠올리기 싫어.”
“결론은 우리 모두 지금의 고양이, 개가 더 낫다는 거 아냐?”
“맞아요. 동물계 이하의 생물들은 다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그리 안달을 하는데, 도대체 몇 번의 윤회와 고통을 겪어야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냐고 다 묻잖아요? 그런데 막상 인간으로 살았어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네요. 인간 출신 동물이라서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건가? 한 번도 인간이었던 적이 없는 생물들은 우리보고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하겠죠?”
“글쎄 말이야. 이제 전생 탐색은 하기 싫어. 또 그 이전의 전생은 더 불행할 것만 같아. 겁이 나.”
“저는 몇 번이나 중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것에 더 놀랐어요. 차라리 지금의 개가 나아요. 다음엔 절대로 중이 되지 않을 거예요. 내 마음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칼리프. 너 다음 생엔 부디 세속을 마음껏 누리는 그런 인간이 되려무나. 나도 안타깝다. 어떻게 계속 중이었을 수가 있지?”
“나는 대장군도 해보고, 공주도 해봤는데,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지도, 잘 모르겠어. 다만 이제 나라를 바꿔보고 싶어. 아. 그래서 이번엔 한국에서 고양이로 살게 된 거구나. 다음엔 한국에서 태어날 것 같아.”
“누님, 저도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어요. 그래서 여기서 고양이로 사는 것 같기도 해요.”
“형님, 누님, 전 계속 한국에서 살았는데요. 저는 다음엔 외국에서 태어날까요?”
“그건 모르지. 너 외국에서 살고 싶니?”
“이 땅을 벗어난 적이 없어서 어디가 좋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어디 추천할 만한 곳이라도?”
“없어. 한국이 제일 좋아. 치안도 잘 되어 있고, 대중교통 시스템. 인터넷 시스템, 그리고 사람들이 외국에 비해 정직하고 순박해. 총기가 난무하는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싶진 않겠지? 그리고 사계절이 있고, 산, 바다, 강, 대도시 인프라 모두 다 잘되어 있는 이런 곳은 지구에 없어. 나는 다음엔 반드시 한국에서 사람으로 태어날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특히 여자들이 무슬림으로 사는 것은 제대로 사는 것이 못 된다고 말하고 싶어. 남자는 또 다르지. 남자라면 무슬림으로 살아도 괜찮아. 하지만 여자들은 역시 다른 종교, 아니, 아니, 아예 종교가 없는 곳이 낫겠어. 한국은 종교의 자유도 있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 그것도 좋아. 역시 다음엔 한국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야지.”
“그렇군요. 나는 다음에도 한국에서 태어나되 중이 아닌 평범한 직업을 갖고 싶어요. 부디 그리되길 바라마지 않아요.”
“그럼, 다음엔 평범하게 결혼하고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살아. 그게 사람의 도리야. 자손을 퍼뜨리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어. 지금 다들 아이를 많이 낳지 않잖아? 늙은이들은 많은데, 앞으로 부양할 후손이 자꾸 줄고 있어. 다들 왜 그리 이기적인지, 자식 낳으면 불편하고 돈도 많이 든다고 안 낳는 모양이야.”
“아니, 아예 결혼을 안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서 그래. 혼인 연령은 자꾸 높아지고 비혼 인구도 늘어나니까, 애를 못 낳는 거지. 그리고 불임 인구도 자꾸 늘고 있고. 이래저래 자손이 줄어드는 세상이야.”
“고양이와 개가 사람 후손을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된 거야? 정말 우습다.
(칼리프 이야기)
꿈을 꾸었다.
어제 누님과 형님과 전생 이야기를 한 탓인지는 몰라도 꿈속에서는 고구려인지, 발해인지 모르겠지만 만주지역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지도가 정확하게 나왔으니까, 거기서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이 있었는데, 중국 어느 나라인지는 몰라도 한족 나라인 것 같았다. 여동생을 한족 왕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여동생은 대의를 위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나와 여동생이 한족 왕에게 가서 여동생을 후궁으로 넣으려고 하자 한족 왕은 나와 형 중 누가 자기를 따르겠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그러겠다고 했는데, 한족 왕은 알겠다면서 가보라고 했다. 여동생과 나는 고향에 다시 갔는데, 우리 마을이 폐허가 되고 우리 부족은 전멸해 있었다. 형님까지. 여동생과 나는 원한을 품고 한족 왕에게 돌아갔다. 그로부터 여동생은 말단 후궁에서 내명부 최고 위치에 올랐다. 여동생은 서열이 최고 등급이었고, 나는 여동생의 호위무사가 되었다.
여기서 잠이 깼다. 여동생과 나는 동족의 복수를 했는지 어쨌는지 궁금한데 잠을 깨서 그 뒤를 알 수가 없다. 어제의 전생보다 더 이전의 전생인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니 머리가 아프다. 점점 더 과거로의 여행을 하는 것 같은데, 지금의 개 팔자가 가장 상팔자인 것 같다. 만약 나와 내 여동생이 한족 왕인지, 황제인지에게 복수를 하지 못하고 죽었다면 분명 한을 품었을 텐데, 복수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답답하다. 한을 품고 죽어서 다음에 비구니, 중이 되었던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고 입이 써서 밥맛도 없다.
“칼리프. 너 오늘 표정이 왜 그리 심각해? 어제 셋이서 전생 이야기를 한 것이 신경 쓰여?”
“아? 형님, 실은 간밤에 또 꿈을 꾸었는데, 어제의 전생보다 더 이전 전생의 꿈을 꾼 것 같아요. 그때는 비구니도 중도 아니었어요. 평범한 남자였어요. 부족을 이끄는 용감한 남자? 이었던 것 같은데, 결말이 어찌 되었는지 모른 채로 잠이 깼어요. 그래서 찝찝하고 기분이 언짢아요.”
“행복한 전생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네, 부족이 멸족당하고 온 마을이 폐허가 되었는데, 복수도 못 하고 잠이 깨는 바람에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저런. 너도 참 복잡한 삶을 살았구나. 아마도 말이야. 복수도 못 하고 한이 맺혀 죽어서 다음에 비구니로 다음에 또 중으로 환생한 것이 아닐까?”
“저도 그렇게 생각이 들긴 했는데, 내가 못해도 여동생이 복수를 해주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들어요. 나와 여동생이 같이 있었거든요. 형님은 원수에게 죽었지만.”
“여동생? 형님? 형제자매가 있었구나. 오히려 전생 중에서 제일 나은걸? 가족이 있었잖아?”
“그렇긴 한데, 형도 비참하게 죽고, 동족이 멸족당하고 마을이 폐허가 되었는데, 나와 여동생만 살아서 원수에게 붙어 지냈거든요. 한족 왕인지, 황제인지 하는 놈에게요.”
“그래? 여동생은 혹시 미인이었나?”
“네, 마을 최고의 미인으로 한족 왕에게도 소문이 나서 제가 후궁으로 넣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최고위 지위에 오르게 되지요. 왕후인지, 황후인지 하여튼 내명부 모든 후궁과 상궁, 나인들이 여동생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예를 올리는 장면을 봤어요. 나는 여동생 호위무사로 보였고.”
“그랬군. 아마 여동생이 복수를 해주지 않았을까? 자네가 한을 품고 그냥 죽었다면 더더욱 여동생이 복수했겠지. 오빠 둘, 마을 동족 전부 다 죽었다는데, 가만히 있었겠어? 아니지. 어쩌면 왕인지 황제인지가 눈치를 채고 여동생까지 없애 버렸다면? 허허. 자네와 여동생 누가 더 오래 살아남았을까?”
“그걸 모르겠어요. 제가 본 장면은 거기가 전부이고, 그 뒤의 장면은 보지 못하고 잠을 깨서요. 머리가 아프네요. 요즘 괜히 전생 탐색을 해서 많이 피곤하네요.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개로 살면 편할 텐데. 다른 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살까요?”
“하하하. 사람 출신 동물들은 전생을 탐색하고 살지만, 한 번도 사람인 적이 없는 동물들은 그런 생각 못 해. 그냥 동물계 이하의 생물들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숙원사업이니까. 우리와는 매우 다르지. 생각하는 범위가 엄청나게 좁아. 정말 그냥 동물일 뿐이야. 우리는 사람의 영혼에다 동물의 육신으로 있는 것이지. 아마도 애완동물들은 대부분 사람 출신인 것 같아. 본래 동물들은 들개나 길고양이 수준으로 태어나겠지. 그래서 굶주림과 추위, 더위, 질병, 사고 등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전혀 돌봄을 받을 수가 없지. 그런 고생 끝에 윤회를 반복하다가 최고로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나라에서 먼저 여자로 태어나고, 그런 삶이 반복되면서 점차 나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거지. 우리는 사람 중에서도 상급으로 살다가 벌을 받아서 동물계로 떨어진 거고. 그리고 이다음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고. 알겠어? 칼리프군? 자네는 다음엔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태어날 걸세.”
“형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요즘 전생 탐색을 하면서 너무 피곤하고 힘이 들어요. 머리도 아프고. 차라리 아무 생각 없는 개가 더 편할 것 같아요.”
“저런. 그러면 안 되지. 우리는 사람 출신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해. 하등한 동물들과는 다르다고. 그런 놈들과 비교하면 안 돼. 그리고 가능한 많은 전생을 다 기억해서 다음의 생을 예측하도록 해 봐. 나도 그 이전 전생을 탐색해보도록 노력해보지. 아마도 자네는 젊어서 전생을 더 잘 기억하는지도 몰라.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차 기억이 희미해지거든. 아마 누님은 더 희미하겠지. 자꾸 노력해야 해. 나도 명상을 해서라도 이전 전생을 찾아봐야겠어. 그럼 자네도 침잠 속에서 명상하도록 하게. 각자 다른 곳에서 수행하도록 하지.”
“그런가요? 계속 탐색해야 하는 걸까요?”
“그렇다니까. 나도 수련할 테니 자네도 어서 계속하게.”
“무엇이 그리 심각해?”
“아, 누님, 언제 오셨어요? 깜짝이야. 실은 칼리프가 전생의 꿈을 꾸었다고 하네요. 어제 비구니보다 훨씬 더 이전의 삶이래요. 거기선 여동생의 호위무사였다고 원수를 갚지 못하고 죽었는지, 갚았는지 몰라서 괴롭다고 합니다. 허허.”
“뭐야? 비구니보다 훨씬 나은데? 그 전생? 거기선 결혼했어?”
“글쎄요. 그런 장면은 못 봤는데, 그냥 여동생이 왕후인 듯하고, 나는 호위무사고 여동생의 남편인 한족의 왕은 우리 동족의 철천지원수이고, 나와 여동생은 그 원수 밑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그러는 와중에 깼거든요. 그 이상은 잘 모르겠어요. 호기심 많은 누님.”
“내가 호기심이 많긴 하지. 나는 이제 정신이 흐릿해져서 이전이 잘 기억나지 않아. 사람들처럼 글로 기록하지를 못하니까, 더 그래. 예전에 기억했던 것들도 거의 다 잊었거든. 그래서 잊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 해. 어제 우리 전생 탐색은 잘한 거야. 계속해야 한다고.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야. 참, 사람으로 태어나면 또 모두 다 잊게 되겠지? 그것도 슬프네.”
“그래도 비구니나 중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누님, 칼리프가 계속 중으로 살았다면 얼마나 더 슬펐겠어요?”
“아니, 결혼했었냐고, 역시 미혼으로 죽은 거야?”
“어? 그건 잘 모르겠지만, 역시 미혼으로 죽은 것 같아요. 동생 돌보면서 복수를 꿈꾸다가 들켜서 살해당했나?”
“만약 대역죄를 들켰다면 네 여동생도 살아남지 못했을 텐데, 둘 다, 어떻게 되었는지 나도 궁금하네.”
“나 때문에 여동생까지 죽었다면, 정말 천추의 한을 품고 죽었겠네요. 그래서 비구니가 되었나? 알 수 없어요. 여동생 때문에 복수 못 했을 수도 있었겠네요. 그 애가 불행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을 테니까요. 여동생만이라도 평범하게 행복한 여자로 살길 바랐을 수도 있죠. 그 애가 왕자나 태자를 낳았다면 더더욱 동생을 지켜야 하고. 여동생이 황태후가 되었다면 복수는 확실히 할 수 있으니까요. 동생이 황태후가 되어서 한을 풀게 되는 그림이 가장 좋긴 한데.”
“정말 흥미롭다. 무슬림 궁전보다 더 재미있는걸. 계속 탐색해보는 게 어때?”
“형님도 그러시던데, 계속 탐색하라고. 나는 왠지 머리가 아프고 괴로워서 그만두고 싶었거든요.”
“아냐. 계속 탐색해야 해. 그리고 우리에게 이야기 해줘. 정말 궁금하단 말이야. 사람들이 드라마를 왜 보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 이야기가 1회로 끝나고, 2회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야. 계속 보고 싶다고.”
“형님, 누님은 남의 일이니까, 흥미롭고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나는 괴롭다고요.”
“그래도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을 위해서라도.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예요?”
“그건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칼리프, 너는 어리니까, 기억도 또렷하고 전생 탐색도 쉬울 거야. 우리는 이제 점점 기억이 지워지고 있어. 그게 더 슬픈 거야. 점점 진짜 동물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슬프다고. 너라도 사람의 기억을 많이 찾아내도록 해야지. 정말 개로 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우리는 그냥 고양이, 개가 아니야. 그것만은 똑똑히 기억해. 우리는 사람 출신이야. 사람 출신. 다음에도 사람으로 태어날 거고.”
“형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알았어요. 다음 이야기가 떠오르면 바로 알려드리죠. 2회를 기대하세요. 어떤 내용일지는 알 수 없지만. 부디 나쁜 이야기가 아니길 빌어요.”
“그럼. 파이팅. 기운 내. 적어도 비구니나 중은 아니었잖아? 그게 어디야? 훨씬 사람답고 좋네. 안 그래? 자자. 힘내고. 나도 그만 가볼게. 너희들 전생 탐색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 나도 흐릿하지만 탐색해보도록 노력할게. 그리고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너희들에게 알려줄게. 각자 자신들의 전생을 탐색하러 가자고.”
깊은 명상 끝에 다시 전, 전, 전생으로 들어갔다.
여동생이 보이네. 과연, 화려하고 예쁘게 치장하고 있구나. 그게 다 한족 왕인지, 황제인지에게 잘 보이기 위함인가? 지금의 내가 말을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네가 아들을 낳아서 네 아들이 보위를 이어야 한다고 말을 해주고 싶다. 알아서 하면 좋으련만. 하긴 예쁘게 꾸며야 다른 후궁들에게 기회를 덜 주겠지. 처신을 잘하고 있어. 한족 왕이 여동생의 침소에 들었어. 나는 밖에서 망을 보고 있군. 상궁들이 가라고 하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동생 침소를 떠났어. 다른 후궁들은 여동생을 시기, 질투하나? 나는 그런 것을 관리해야 해. 여동생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중국 여자들은 시기, 질투가 워낙 심하고 성정이 잔인무도해서, 항상 조심해야 해. 여동생은 나 말고는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지켜야 하지. 여동생의 상궁과 나인, 환관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저러고 지내는데, 혼인은 무슨? 여동생 지키는 것만으로도 지친다. 형님, 누님이 궁금하신 것은 확인한 셈이군. 미혼인 것이 확실하네. 여동생 측근의 상궁, 나인, 환관들만 믿을 수 있어도 마음이 놓일 텐데, 어떤 놈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을까? 하긴 지금 내가 알아차린 들 전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저 지켜볼 수만 있을 뿐. 날이 밝고 다시 동생 처소로 찾아가는구나. 하긴 저렇게 자주 들락거리면 눈엣가시가 될 수도 있을 거야. 지금의 나로 보자면 그래. 저 때는 그것을 몰랐던 모양이지.
(황궁)
“오라버니, 이렇게 매일 아침, 저녁으로 찾으시면 곤란해요. 제가 다 알아서 처신한다고요. 오라버니가 친 오라버니라서 지금까지 무사한 줄 아세요. 제가 뭐, 어린앤가요? 저도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어요. 상궁들이 고해바치기라도 하면, 좋을 일 하나 없어요. 내궁이라는 곳은 환관 외에 어떤 남자도 들 수 없는 곳이에요. 이러다가 오라버니가 다칠까 봐 걱정돼요. 오라버니, 제 일은 그만 신경 쓰고, 오라버니 일이나 잘하세요. 참, 오라버니, 혼인은 안 하시나요? 황상께 아뢰어서 좋은 처녀를 구해드려요?”
“너는 네가 황후가 되었다고 우리 가문의 일은 다 잊은 모양이지? 나는 단 하루도 그날을 잊은 적이 없다. 우리는 복수를 해야 해.”
“쉿, 오라버니, 낮말은 새가 들어요. 조용히 하세요. 알아요. 나도.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매일 치장하고, 꾸며서 황상께 잘 보이려 들고 있잖아요? 네. 오라버니, 아들을 낳아야죠. 그래서 반드시 황태후가 되겠어요. 그러니 부디 몸조심하고 오래 살 궁리를 하세요. 황상 눈에 거슬리는 일은 절대 하지 마시고.”
“우리끼리는 고구려 말로 하니까. 이곳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 걱정하지 마. 그런데 너, 상궁, 나인, 환관들은 믿을 만한 게야? 혹시라도 황상이나 너의 적 쪽에서 심어둔 첩자일 수도 있잖아?”
“물론,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 수족이니, 믿어야죠. 의심하면 제가 더 피곤해요. 오라버니는 혹시 짚이는 데라도 있어요? 확실한 증거 없이는 의심할 수 없어요.”
“그야, 그렇지. 너 건강은 괜찮은 거야? 그리고 애는 왜 이리 안 생기지? 혹시 황상이나 다른 후궁들이 너의 음식이나 주변에 불임독이라도 썼을 수도 있잖아?”
“오라버니는 그런 것도 아세요? 후궁 암투가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황후에게 설마 그런 짓을 할 리가 있을까요?”
“너는 그래서 문제야. 너무 태평해. 우리는 한족도 아니고, 고구려 후손이야. 지금 네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천운이야. 의외로 황제가 너에게 후손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 다른 한족 후궁들이 손을 써서 널 불임으로 만들 수도 있고, 몸조심해. 내가 드나드는 것이 불편하면 앞으로 자중하마. 하지만 조금이라도 낌새가 있으면 바로 날 찾아야 한다. 나는 궁 가까이에 거주하고 있으니, 바로 달려오마. 다른 후궁이 선물하는 것은 절대 가까이 두지 말거라. 독이 있을 수도 있으니, 다 상궁, 나인들에게 인심 좋게 나눠주도록 해. 너는 황제가 하사한 것만 착용하도록 해. 하긴 황제도 믿을 수 없는 놈이긴 하지. 우리 일족을 몰살시킨 것만 봐도..... 그리고 환기를 자주 하고. 약도 내가 보낸 것 외에는 먹지 마. 궁의 태의들도 믿을 수 없어. 적 쪽에서 매수를 했을 수도 있어. 먹는 척만 하고 화단에다 버리도록 해라.”
“오라버니,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피곤해서 어떻게 그리 살아요?”
“네가 이러니 내가 매일 들락거리지. 정신 좀 차려. 지금까지 네가 무사한 건 내가 이리 아침, 저녁으로 들락거려서야. 너에게 해코지하려 해도 늘 내가 옆에 있어서 못하는 것일 수도 있어. 정말 걱정이다. 당장 내일부터 내가 안 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참, 이 약 먹어라. 매일 하루에 두 번. 꼭 챙겨 먹어야 한다. 회임에 좋단다. 걱정하지 마. 고구려 후손 출신 의원에게서 지어 온 약이니까. 믿을 수 있어. 그 양반도 네가 꼭 아들을 출산하기를 바라는 사람이야. 보름 분이니까. 잘 챙겨 먹어. 보름 후에 다시 약 가지고 들르마.”
“알았어요. 오라버니, 잘 챙겨 먹을게요. 그리고 보름 후에 오세요. 그 정도는 황상도 눈 감을 거예요. 그리고 오라버니, 제 걱정만 하지 마시고 제발 오라버니도 혼인하세요. 고구려 후손 처녀는 없던가요? 고구려 의원만 찾지 말고, 처녀도 찾아보세요. 나도 새언니가 있으면 든든할 것 같아요.”
“의원이 딸이 있긴 한데, 벌써 혼인했다지, 아마. 의원에게 다른 딸이 있는지 물어보마.”
(며칠 후)
처음으로 여동생 거처로 가지 않고 고구려 후손 의원에게 바로 갔다.
“아직 약도 다 안 떨어졌을 텐데 벌써 왔소? 호위무사님.”
“아, 약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 황후께서 신신당부를 해서 그런데요. 의원님. 혹시 괜찮은 고구려 후손 처녀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 해서요. 제가 아직 혼인을 못해서....”
“저런? 무사님, 미혼이셨나? 미처 몰랐네. 늘 자네가 황후 이야기만 해서, 자네 쪽은 신경도 못 썼네그려. 우리 딸은 이미 애 엄마고, 과년한 조카가 하나 있긴 한데, 조카가 이 근처에 있지 않아. 옛 고구려 지방에 있어. 한번 연락을 해봄세. 괜찮은 애야. 내 조카라서가 아닐세. 내 중신을 서 봄세.”
“감사합니다. 저도 같은 동족과 혼인하고 싶어서요. 저도 여동생도 사고무친 외로운 처지라, 믿을 만한 가족을 얻고 싶어요.”
“왜 아니 그렇겠는가? 그리고 궁은 더한 곳이지. 나도 고구려 일족 황후마마가 매우 걱정되는걸. 무사히 태자를 출산해야지. 그래야 자네나 황후나 우리 고구려 후손들도 발 뻗고 살 수 있어. 구중궁궐에서 혼자 계신 황후마마가 걱정이야. 보아하니 황후는 너무 순진하신 것 같아. 자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말이야. 자네가 걱정할 만도 해. 걱정 말게. 조카에게는 최대한 빨리 연락을 할 테니까. 연이 닿는 대로 자네를 부르겠네.”
“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정말 이곳에서 믿을 분은 어르신밖에 없어요. 그리고 독을 방지할 수 있는 약은 없을까요? 불임독이라도 당했다면, 해독제가 필요하잖아요?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이 신경 쓰여요.”
“그렇군. 한창 젊은 분이 아직 회임을 못 하다니 이상한 일이긴 해. 내가 내궁에 들어갈 수도 없고, 황후를 살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르신. 함께 궁으로 들어가 볼까요? 먼 친척이라고 하고, 한번은 직접 보시면 좋겠어요. 저도 의술엔 무지하여서.”
“그래. 한번은 뵈어야겠어. 다음번 자네 궁에 들어갈 때, 같이 가보도록 하지.”
(며칠 후)
“어르신, 오늘 입궁하려는데, 같이 가시죠. 약도 챙기시고, 침도 다 챙기셨죠? 혹시 모르니 해독제도.”
“알고 있어. 다 준비해 뒀네. 그리고 조카에게서 연락이 왔네. 곧 이곳에 도착할 거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조카가 장거리 여행을 떠났으니 자네가 중간 지점까지라도 마중을 가주면 좋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처녀가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이 좀 신경 쓰여.”
“아? 그렇군요. 오늘 입궁하고 나서 바로 마중 가죠. 어느 길로 온다고 하던가요?”
“동생이 함께 오는 길이긴 한데, 그래도 머나먼 타국으로 오는 길이니 미리 마중을 가주면 좋겠지?”
“네, 그럴게요. 우선 오늘은 입궁에 신경 써 주세요. 그 문제는 나와서 다시 의논해요.”
“알겠네. 앞장서게. 나도 궁전 출입을 다 해보네그려. 허허.”
(황궁)
“오라버니,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황후께서 보름 만에 오라고 하셔서 그런 것을요. 저야 자주 오고 싶지요.”
“보세요. 오라버니, 저, 잘 지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지?”
“고구려 출신 의원. 내가 전에 약 지어왔던 그분이셔. 오늘도 네 약을 지어 오시고 직접 진맥하러 오셨어. 집안 먼 친척이라고 하고 모셔왔어. 상궁, 나인들을 다 물리도록 해.”
“그러시구나. 네. 알았어요. 오라버니.”
“자, 너희들은 다 나가 있어라. 오랜만에 친척 할아버지와 담소를 나눠야겠구나(중국어).”
“네, 마마. 물러갑니다(중국어).”
“마마, 절 받으십시오.”
“아? 네. 반갑습니다. 같은 일족이라니 정말 친척 할아버지를 뵙는 것 같아 기쁩니다. 저의 일족은 전부 멸족을 당해서, 오라버니와 저는 아무 친척도 없거든요. 종종 오라버니와 놀러 오세요. 궁에는 친척 할아버지라고 말해 두겠어요.”
“네, 마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무런 걱정하지 마시고 진맥하세요. 궁중 태의는 함부로 진맥 못 하지만 동포분이시니까, 하세요.”
“.............”
“어떠신가? 마마는 건강하신가?”
“마마, 무사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중독이 되셨습니다. 미독이라 증세가 약하신 것뿐입니다. 하지만 오래 노출이 되면 위험합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설마?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신 그대로군요. 정말 이럴 수가.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중독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가?”
“우선 드시는 음식부터 봐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마시는 차. 옷, 장신구, 화장품, 향수, 부채. 신발, 초, 이불, 베개. 하여튼 다 살피겠습니다.”
“오라버니, 정말 무서워요.”
“내 이럴 줄 알았어. 네가 너무 태평한 거였어.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대체 어느 놈이 감히 이런 짓을 해. 용서치 않겠다.”
“오라버니.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 저지르지 마세요. 그래도 저 아직 무사하니까.”
“그러면 안 되지? 너 회임을 막을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반드시 밝혀서 처벌해야지.”
“저도 극히 조심하고 있었어요. 다른 곳에서 온 것은 먹지도 마시지도 입지도 신지도 않았어요. 황상의 하사품 외에는. 그것도 몇 개 안 되는데, 음, 설마? 저 의원님, 제 목걸이를 봐 주시겠어요?”
“마마. 목걸이요?”
“네, 이 목걸이에서 아주 특이한 향이 나요. 그래서 늘 착용하고 있었는데, 이건 태후께서 하사하신 거라 착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이럴 수가. 마마. 이것은 사향으로 만든 구슬입니다. 이토록 큰 사향 구슬은 불임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런... 범인이 태후마마일 줄이야.”
“역시나. 제가 다른 비빈이나 일족들에게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거든요. 받아도 다 선물로 나눠주고. 그래서 제 상궁, 나인들이 절 좋아해요. 환관들도. 제가 너그럽다고 늘 감사하다고 해요. 그래서 저도 제 수족들은 별로 의심하지 않아요. 역시 태후마마시군요. 적어도 황상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요. 오라버니. 원인도 알았고. 그 목걸이 비슷한 가짜를 착용해야겠네요. 그리고 이 사실을 황상께 고할 수는 없어요. 어쩌면 황상과 태후가 같이 공모한 일일 지도 모르니까요.”
“그게 좋겠다. 황상과 태후가 같은 편일 지도 모르니까.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
“오라버니, 어쨌든 다른 비빈들은 의심할 필요가 없네요. 의원님. 다른 물품이나 옷가지, 침구에서는 별문제 없죠? 음식도?”
“자세히 봐야 하니 황후께서는 좀 앉아서 쉬십시오. 방안 구석구석 다 살피겠습니다. 참, 마마. 지금은 대낮이지만, 초를 좀 보여주십시오.”
“이 초들이 제 침실에서 사용하는 향초인데, 보세요.”
“역시, 마마, 이 향초에도 독이 들어있습니다. 이 독은 오래 맡으면 중독이 되어 불임뿐 아니라 생명에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저런, 저 향초는 보름 전부터 새로 들어온 것인데, 이제 궁중 환관들도 믿을 수 없군요. 내 수족이 그러지는 않았겠죠? 물품을 받아 온 것뿐인데,”
“그렇죠. 누가 독 양초를 보낸 건지 알 수가 없죠. 마마의 수족은 단순히 받아 온 것일 뿐이고, 이 사실은 마마 수족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어요. 어쨌든 이 황실엔 마마의 적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군요. 윗전도 그렇고 아랫수족도 그렇고.”
“네, 이럴 줄 알았어. 봐라. 내가 출입을 끊자마자 놈들이 독 양초를 넣었어. 내가 있을 때는 적어도 이런 일은 없었지.”
“독 양초 건은 황상께 고해야겠어요. 단순한 불임독이 아니라 생명을 앗는 독이니까. 황상도 그 정도는 막아주겠죠? 그래도 남편인데.”
“지금 당장 대전에 가서 고하겠다. 목걸이 건은 일절 언급하지 않겠다. 그리고 목걸이 잠시 빌려다오. 가짜를 만들어 다음에 갖고 오마. 그동안 너는 태후 전에 문안을 잠시 중단하도록 해라. 당분간 해독을 해야 하니까. 아프다고 하면 이해하겠지. 태후도 네가 중독되었다고 하면 뜨끔할 것이다. 내가 목걸이를 만들어 오면 가짜를 착용하고 문안 다니도록 해.”
“네, 오라버니. 정말 오라버니가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요. 오라버니 아니었음 저 벌써 죽었겠네요.”
“자, 아랫것들 다 불러서 독 양초 이야기를 해라. 그리고 나는 황상께 이 사실을 고하러 가겠다.”
“마마, 혹시나 하고 가져온 해독제입니다. 이것을 매일 드십시오. 그리고 빨리 해독이 되어야 회임을 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회임하시더라도 궁의 태의들에게는 진맥을 하지 마시고, 태의들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제가 한 번씩 들러서, 진맥하고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회임하셔도 막달 될 때까지 황상에게도 비밀로 하시고 부디 보중하소서.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무사히 순산하시려면 그리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우선은 해독부터 하고요. 오라버니와 항상 함께 오세요. 의원님. 아니 할아버지, 이제 할아버지라 부르겠어요.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며칠 후)
“의원님, 오늘 목걸이를 다 만들었는데 같이 입궁하시죠?”
“이보게. 우리 조카 마중은 언제 갈 셈인가? 거의 다, 와갈 텐데, 자네, 황후마마만 신경 쓰느라 그새 우리 조카는 잊어버린 건가?”
“아참, 조카님 마중 가야 하는 거였죠? 이런 어쩐다지. 그럼 제가 금방 목걸이만 전해 드리고 나서 바로 마중 가겠어요. 의원님, 길을 알려주세요.”
“알았네. 자네와 함께 입궁하지. 마마를 봐야 하니까. 약도 새로 들이고. 같이 나와서 같이 마중 감세.”
“감사합니다. 어르신.”
(황궁)
“마마. 문안드립니다.”
“오라버니, 할아버지, 어서 들어오세요. 아랫것들은 다 물렸어요. 오라버니가 입궁했다고 전갈하러 오는 애들보고 오라버니 들어오시면 다 나가 있으라고 했어요.”
“마마, 진맥을 좀 하겠습니다.”
“마마는 어떠신가요?”
“네, 다행입니다. 마마. 해독이 되고 있습니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오늘부터는 이 약을 드시고, 역시 조심하소서.”
“내가 전에 독 양초 건을 황상께 고했을 때, 황상 표정을 너도 봤어야 했는데, 맹독이라고 하면서 독 양초를 내밀었지. 놀란 눈치였어. 적어도 황상은 널 죽일 생각까지는 없는 것 같아.”
“저도 중독되었다고 온 궁에 소문을 다 내고 방에서 칩거하고 있었어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다 검수를 하고 태후 전에 문안도 가지 않았어요. 태후께서 하사하신 약이 있는데 그것도 한번 봐주세요. 안 먹었어요.”
“마마, 태후 전에서 보낸 약도 보겠습니다...........음. 달여 봐야 확실하겠지만, 적어도 맹독은 아니고. 하긴 이런 상황에서 독을 보내면 살인자라는 걸 알리는 것밖에 안 되겠지만......특별한 해독제는 아니고 뭐 보약도 아니고 그냥 차입니다. 아랫것들에게 나눠주십시오. 마마는 다 먹었다고 나중에 태후 전에 고하시고요.”
“네, 할아버지.”
“참, 마마, 이제는 회임에 도움 되는 약들을 처방했으니 부디 꼭 회임에 성공하소서. 해독이 다 되었으니 황상을 침전에 들이십시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마. 의원님에게 조카가 있어서 마중 가야 해. 그 조카를 만나면 바로 혼인할 거야. 옛 고구려 땅에서 여기까지 오는 거야. 벌써 가야 했는데, 마마 때문에 좀 늦어졌어.”
“저런? 오라버니.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 때문에, 늦어져서 어떻게 해요? 이제 되었으니 얼른 모셔 오세요. 저도 새언니가 보고 싶어요. 혼례는 어떻게 치르실 건가요?”
“혼례도 황상께 고해야 하나? 허울뿐이긴 해도 황후 호위무사인데.”
“제가 고할게요. 빨리 데러 오기나 하세요. 지금 바로 대전에 들겠어요. 오라버니는 빨리 새언니를 모셔 오세요. 어서요.”
(한 달 후)
나는 고구려 후손 처녀와 조촐하게 고구려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내가 우겨서 궁 밖에서 치렀다. 덕분에 여동생인 황후는 입궁한 이래 처음으로 궁 밖에 나왔다. 황상은 오지 않았다. 우리 집 마당에서 옛 고구려 후손들이 몇몇 모여서 여동생과 함께 조용히 혼례를 치렀다. 여동생도 오늘은 황후가 아니라 고구려 여동생으로 혼례에 참석하고 내 아내와 담소를 나눴다.
“새언니, 믿을 수 있는 가족이 생겨서 너무 기뻐요. 부디 우리 오라버니를 잘 지켜주세요. 오라버니는 지금까지 내 걱정만 하느라 오라버니의 삶은 하나도 없었어요. 물론 오라버니 덕분에 내가 이리 살아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언니가 오라버니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마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우리 일족에서 황후가 된 것도 큰 영광이고 기쁨입니다. 하지만 역시 황궁은 위험한 곳입니다. 부디 보중하소서. 그리고 어서 회임하셔야 할 텐데요.”
“저도 노력하겠으니 새언니도 노력하세요. 저도 조카를 어서 보고 싶거든요. 우리 둘 다 노력해 봐요. 하긴 우리만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지만. 들었죠? 오라버니. 노력하시라고요.”
몇 달이 지나고 내 아내가 회임하였다. 정말 기쁘다. 이 소식을 얼른 마마께 알려야겠다. 그런데 마마는 아직 소식이 없으신 건가? 오늘 의원님과 함께 입궁해야겠어.
(황궁)
“마마, 오랜만입니다.”
“오라버니, 어서 오세요. 할아버지도 어서 오세요.”
“마마, 조카를 보시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회임했어요.”
“오라버니, 정말요? 정말 잘됐어요. 참, 아랫것들 다 물렸으니, 말 편하게 하세요.”
“그래? 너는 좀 어떠냐?”
“마마, 진맥을 좀 하겠습니다.”
“.........?!”
“어때요? 맥이 좀 다르지요?”
“마마, 언제부터 이러신 겁니까? 왜 아무 말씀 안 하셨습니까?”
“뭐, 오시면 다 아시게 될 텐데, 조용히 있으라면서요? 황상께는 몸이 좀 안 좋다고 다른 비빈 처소로 가시라고 했어요.”
“잘하셨습니다. 3개월이 지났습니다. 지금이 가장 조심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처와 비슷한 시기에 회임하셨네. 출산일도 비슷해.”
“그래요? 마마. 이렇게 기쁠 수가. 동시에 회임이라니. 마마, 아랫것들에게도 입단속을 하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애들이 먼저 먹어보고 다음에 제가 먹어요.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없나요? 아직 입덧이 심하지는 않은데.”
“다행입니다. 입덧하시면 소문이 날 겁니다. 제가 다른 약을 처방해오겠습니다. 태아를 보호하고 마마의 원기를 지켜주는 약으로 새로 만들어야겠군요.”
“적어도 우리 수족은 믿을 만하니까,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요. 마마. 그래도 가능한, 숨기십시오. 예전에 중독된 것을 핑계 대시고 몸이 좋지 않다고 소문을 흘리십시오. 가짜 목걸이는 잘 착용하시죠?”
“네, 항상 착용하고 있어요. 태후 문안도 꼬박꼬박 가고.”
“그러셔야죠. 적어도 태후가 안심하고 있을 터이니, 혹시라도 태후 전과 마마 아랫것들과 연이 닿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출산일까지 잘 지키십시오. 여차하면 출궁하셔서 출산하시던지. 우리 집에 요양 간다고 하고 오시면 되지 않을까요?”
“오라버니, 계속 존댓말을 하시네. 왜 그러셔요?”
“이제 태자를 보실 분인데 말씀을 삼가야죠. 안 그런가요? 의원님?”
“그럼요. 지금까지 마마께 하대하신 것도 큰 죄인걸요. 참, 마마, 좀 빨리 알았다면 확실히 태자를 보실 수 있는 약을 처방해드렸을 터인데, 조금 늦었습니다. 이제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네,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몇 달 후)
“오라버니, 이제 산달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황상께 숨겨야 하나요? 계속 다른 비빈에게 가라고 한 것도 신경이 쓰이고, 이러다 정말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요. 총애를 잃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마마, 제 처도 곧 해산이 다가오고 하니 친정에 요양 보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정 마음이 쓰이시면 황상께 슬쩍 떠보시던가요. 회임을 좋아할지 싫어할지 알 수 없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한번 떠보겠어요. 오라버니. 왜 진즉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지금 당장 대전에 가겠어요.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그리고 친정 휴양도 말씀드리고 오겠으니 뵙고 와서 같이 친정으로 가도록 하죠.”
(대전에서 돌아와서)
“오라버니, 황상은 황손을 기다린다고 하시는데, 왜 아직 소식이 없냐고 되물으시던데요? 그래서 살짝 말씀드렸어요. 친정에 가서 몸을 풀고 오겠으니 그동안 함구하시라고, 태후 전에도 고하시지 말라고 했어요. 부디 지켜주시면 좋겠는데.”
“다행이군요. 마마, 친정 휴양은 허락받으셨습니까?”
“네, 거기서 몸을 풀고 있을 터이니 낳고 연락드리면 보러 오시라고 말씀드렸어요. 황상께선 황궁에서 태의들의 보호 아래서 해산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지만, 제가 친정이 마음 편하다고 새언니와 함께 출산 예정이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겨우 승낙받았어요. 가요. 오라버니. 짐은 뭐 많이 필요 없으니까 상궁 한 명만 데려갈까요?”
“집에도 하녀와 하인들이 있으니까, 궁에서 데려갈 필요는 없습니다.”
“섭섭해할 텐데, 괜찮을까요? 뭐라 핑계를 대지?”
“전에 중독된 것이 덧나서 친정에 요양 간다고 하십시오. 한 달 정도 있다가 오겠다고 하시죠. 그동안 아랫것들 휴가를 주시지요. 여비도 챙겨주시고.”
“그렇군요. 좋은 생각이에요.
(이하 중국어) 여봐라. 나는 친정에 한 달 휴양을 갔다 오겠으니 그동안 너희들은 각자 고향에 가서 쉬다 오너라. 여기 여비도 준비했으니, 가족들과 잘 지내다 오너라.”
“감사합니다. 마마. 이 은혜를 어찌 갚을는지요. 각골난망이옵니다.”
(다시 고구려어)
“자, 됐으니 이제 친정으로 가요. 오라버니.”
(몇 달 후, 우리 집)
아내가 먼저 출산한다. 지금 아침부터 계속 진통 중이다. 나는 밖에서 계속 서성이고 있다. 속이 타는구나. 첫아이라서 진통도 오래 한다던데, 고생이 많구나. 산모와 아기 둘 다 무사해야 할 텐데....
“응애.”
산파가 밖으로 튀어 나왔다.
“아들입니다. 두 분 다 건강하십니다. 그럼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들이구나. 정말 좋구나. 둘 다 무사하다고 하니. 어서 보고 싶은데,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오라버니? 아들이래요? 잘되었어요. 우리 집안도 드디어 대를 이었군요. 돌아가신 부모님, 큰 오라버니께서도 기뻐하시겠죠? 너무 기뻐요. 오라버니? 어라. 얼이 빠지셨네. 정신 차리세요. 이제 아버지가 되었는데, 자자. 이제 아기를 보러 가죠.”
내 아들이라.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군.
“여보. 정말 고생했소. 이렇게 건강하고 잘생긴 아들을 낳아줘서 정말 고맙소. 어서 건강을 회복하시오.”
“네. 서방님. 저도 기뻐서 몸도 금세 회복될 것 같네요. 꼭 아들을 낳고 싶었는데 소원을 이뤘어요. 조상께 뵐 면목이 섭니다. 이제 대를 이었으니 며느리 노릇은 했군요.”
“새언니, 정말 축하해요. 저도 기뻐요. 이렇게 잘생긴 조카가 생기다니, 집안의 경사예요. 어서 일어나세요. 오라버니도 무뚝뚝하게 말씀하시지만, 무지하게 기뻐하고 계시다고요. 언니는 잘 모르시겠지만......호호호.”
“그래요? 마마. 마마께서도 곧 출산하실 터인데, 제가 이러니 봐 드리지도 못하겠네요. 오늘 산파는 능숙하게 잘 대처했어요. 마마께서도 그 산파가 도와 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같은 고구려 후손이고.”
“네. 저도 고구려 후손이라 마음이 놓여요. 꼭 그분께 부탁드리겠어요. 그분은 제가 황후인 것을 모르시죠?”
“네, 그냥 남편 여동생. 즉 저의 시누이로 알고 있을걸요. 그편이 나으실 거예요. 마마인 것을 알면 긴장해서 오히려 더 실수할 것 같아요. 그래도 마마. 마마께서 해산이 시작되면 황궁에 전갈은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황상께서도 준비하시고 만일을 대비하셔야 하니까. 아니 지금이라도 말씀 올리시죠. 곧 해산한다고. 그래서 당일 바로 연락드리자마자 오실 수 있도록.”
“그런가요? 하긴 저도 오늘내일하니까. 말씀드려야겠네요. 오라버니 저 대신 황궁에 가서 황상을 뵙고 오세요. 곧 해산한다고.”
“알겠습니다.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지금 바로 다녀오죠.”
(황궁)
(중국어)
“황상을 뵈러 왔다. 대전에 고해 다오.”
“잠시 기다리십시오.”
“자네. 오랜만이군. 그래. 황후는 잘 계시는가?”
“폐하. 잠시 주위를 물려주십시오.”
“여봐라. 모두 나가 있어라. 태감. 자네도 역시 나가 있게.”
“자자. 모두 나갔으니 말씀을 하시게. 황후는 좀 어떤가?”
“오늘 제 처가 먼저 출산했습니다. 이제 막 아들을 보고 오는 길입니다.”
“아. 그랬지? 자네도. 축하하네. 아버지가 되었군. 나보다 먼저. 이럴 수가. 내가 훨씬 먼저 혼인했는데 말이지. 아. 물론 황후가 중독되어서 그랬다는 건 알아. 그래서 친정에 요양 보낸 것이고. 그래 황후는....”
“폐하. 잠시 귀를 빌려주십시오... 이제 곧 해산하실 겁니다. 오늘, 내일이 될 듯합니다. 방금 의원이 진맥하고 말해준 겁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황상께서도 준비하셨다가 저의 집으로 오십시오. 그래도 황손인데 폐하께서 제일 먼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겠네. 네 그리 하지. 짐은 아직까지도 태후께 고하지 않았네. 황후와 자네의 의견을 수렴해서. 나도 불효하는 것 같아 찜찜했네만, 그래도 황궁은 무서운 곳이고 황후도 독에 당한 적도 있고, 믿을 구석이 없어서. 지금까지 수많은 비빈이 하나같이 출산 못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다들 중독이 된 게야. 태의들도 한통속이고. 역시 믿을 수 없지. 태후께 황후를 보러 간다고 말씀드리고 곧 가겠네. 자네 먼저 가 있게. 황후가 걱정되니까 빨리 가보게.”
“이만 물러갑니다.”
(우리 집)
(고구려어)
“여보. 어서 오세요.”
“아니, 당신 몸도 제대로 못 풀었는데 왜 밖에 나와 있소? 어서 방으로 들어가시오. 몸에 바람이라도 들면 큰일이오. 황상께 고하고 왔소. 아니 무슨 일이요? 어서 들어가시오.”
“여보. 마마께서 막 진통이 시작되었어요. 지금 저 대신 해산방에 계셔요. 산파도 다시 왔고. 그 산파 쉬지도 못하고 이틀 연속 출산일을 하게 되어 피곤하다고 난리예요. 그래도 기뻐하더군요. 고구려 후손이 생긴다고.”
“이런. 벌써 진통이 시작되었소?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만. 황궁에 들길 잘했군. 황상께서도 곧 오신다고 했소. 태후 전에 고하고 바로 오신다고. 내가 준비할 테니 당신은 이제 방으로 가서 쉬시오. 바람을 맞으면 산후풍에 걸리오. 어서 들어가시오. 황상 맞을 준비는 나와 하인들이 알아서 할 터이니. 자자. 어서.”
“여보. 제가 마마를 봐 드려야 하는데 제 몸이 이러니 방에 들어가겠어요. 당신이 마마를 잘 챙겨주세요.”
(황후 출산 중)
이런. 마마께서 고생하시는군. 산파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이봐요. 새댁. 정신 차려요. 새댁이 새언니보다 영 체력이 부실하네. 이래서는 순산은 힘들겠어. 도통 힘쓰는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약골이야. 새댁. 힘을 써요. 이래서 고구려 후손을 보겠어? 자자. 힘내고. 다시 한번 더 힘을 써 봐요. 이런, 이런. 이래서야. 내일이나 되어야 겨우 나오겠어. 의원을 불러야겠어.”
후다닥 산파가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시오?”
“아. 새댁 오라버니? 의원을 다시 불러주세요. 새댁이 기운이 없어서 난산이에요. 약과 침을 써야 할 것 같으니. 의원을 데려오세요. 얼른!”
이런. 큰일이네. 여기서 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바로 죽은 목숨이야.
“이랴. 이랴. 어서 달려라. 말아.”
“의원님. 계십니까?”
“아니? 자네. 방금 자네 집에서 왔는데 왜 무슨 일인가?”
“지금 마마께서 진통 중이십니다. 의원님 가시고 바로 시작되었답니다. 그런데 난산이라고 산파가 의원님을 모셔 오라고 하여 지금 급히 모시러 왔습니다.”
“이런. 큰일이군. 잠시 기다리게. 준비해 갈 것이 있으니. 역시 마마께선 체력이 약하신 게야. 그동안 약을 계속 썼지만, 기본 체력이 안 되면 어쩔 수가 없지. 게다가 중독되신 적도 있고. 아무래도 영향이 있겠지. 알았네. 바로 가지.”
“말을 타실 수 있으십니까?”
“날 무엇으로 보는 게야? 고구려 후손이 말도 못 타겠는가? 내가 먼저 타고 감세. 자넨 뒤따라 뛰어오게. 이랴.”
“네. 먼저 가십시오. 마마를 부탁드립니다.”
(의원 도착)
“이보게, 산파 할멈. 마마는 어떠신가?”
“마마라니요? 이 새댁이 궁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아.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먼. 알겠네. 어서 보여 주시게...... 마마. 정신 차리십시오. 힘드셔도 이 약을 드십시오. 그리고 대침을 놓겠습니다. 아프셔도 참으셔야 합니다. 하긴 진통 중에 그보다 더 아픈 것은 없지요.”
“아악”
“잘 참으셨습니다. 자 한 번 더 힘을 써보십시오.
“의원 양반. 이분이 뉘신지요?”
“자네는 가만있게. 해산이나 도와드리시게. 무사히 출산하시면 알려줌세. 그러니 지금은 해산에만 신경 쓰게나.”
“흥. 알겠소. 꼬장꼬장한 영감태기 같으니. 아. 새댁? 아니 마마? 정신 차리고 다시 한번 더 힘을 써 봐요. 자자. 한 번만 더.”
(황제 도착)
(중국어)
“폐하. 오셨습니까?”
“아. 지금의 분위기는 황후가 해산 중인가?”
“네, 폐하. 제가 집에 오니 이미 진통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찍 오셨군요. 내일이나 되어서 오실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오셔서 다행입니다. 폐하. 지금 황후께서 난산 중이십니다. 기본 체력이 약하신데 중독되신 적이 있어서 더욱 그렇답니다. 지금 고생하고 계십니다. 흑흑.”
“아니.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이런 일에 눈물을 보이다니. 상서롭지 못하게. 어서 그치시게. 이런 소리를 황후께서 들으시면 곤란하네.”
“네. 폐하. 이러면 안 되겠지요. 저는 마마를 중독되게 만든 년, 놈들을 죄다 잡아다 다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이리 고생하시지 않으셔도 되는 것인데.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자네, 기분을 모르는 바 아니네만, 나도 마음이 좋지 않네. 나도 용서할 수 없어. 하지만 태후까지 연루되어 있다면 이야기는 또 다르지. 자식이 부모를 처벌할 순 없네. 유감스럽지만. 오늘도 겨우 둘러대고 왔는데, 태후께서는 정말로 황손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셔. 그것은 확실하네. 왜 그러신지 이유를 모르겠어. 후손을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말이지.”
“태후께서도 잘못하셨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황실의 혈통을 끊는 일이 보통 일입니까?”
“이런 말을 지금에 하는 것은 옳지 않네만 실은 자네 부족을 멸족시킨 것도 실은 태후시네. 나도 한참 뒤에야 알았어. 자네와 황후는 내게 원한을 품었겠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의 부족을 멸족시킨 장본인이 태후란 말씀이십니까?”
“나도 차라리 내가 욕을 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네. 황후께 항상 죄스러웠어. 친정을 몰락시킨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래도 황후는 한 번도 내게 싫은 낯을 한 적이 없어. 그래서 더욱 미안했지. 남편으로서 황후께 해준 것이 없어. 중독까지 시키고. 정말 미안하네.”
“폐하. 지금이라도 내막을 알아서 다행입니다. 황후께서도 이 일을 아시면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남편을 사랑하는데 남편이 가족의 원수라는 것이 얼마나 황후께서 큰 짐이셨는지 모르실 겁니다. 지금 바로 알려드려야겠습니다. 황후께서 기뻐서 순산하실 수 있도록.”
“아, 지금? 그럴 수 있나?”
(해산실)
(고구려어)
“마마. 오라비입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아, 오라버니. 제가 지금 기운이 달려서......”
“정신 차리시고 잘 들으십시오. 마마. 우리 일족을 멸족시킨 분은 황상이 아니라 태후십니다. 황상께서는 한참 뒤에 아셨고요. 그래도 태후께서 하신 일이라 그냥 당신이 죄인으로 살고 계셨던 겁니다. 우리는 황상을 오해했습니다. 아시겠어요? 마마. 황상에 대한 한을 푸시고 어서 기운 차리셔서 순산하십시오.”
“정말요? 오라버니. 정말 기뻐요. 저는 황상도 사랑하고 우리 집안도 사랑해서 늘 고통스러웠어요. 이제 정말 한을 풀었네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아니, 그게 무슨 불경한 말씀이십니까? 어서 순산하시고 일어나십시오. 이제 행복하게 사실 일만 남았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 가문을 멸족시킨 분이 태후시란 말인가? 정말 무서운 분이로고.”
“의원님, 그동안 저와 마마가 계속 오해를 했습니다. 그래도 황상이 아니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저도 큰 응어리가 풀렸습니다. 폐하는 왜 그런 사실을 지금까지 함구하셨는지 알다가도 모를 분이십니다.”
“자자. 마마. 대침을 한 번 더 놓을 터이니 조금만 더 기운을 차리십시오.”
“응애”
“태자마마십니다.”
“아니? 그럼 이 새댁이 황후마마십니까? 아이구.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 노친네가 미처 알아 뵙지 못하고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마마.”
“자자. 자네는 태자를 잘 뫼시게. 나는 황후마마를 진찰해야 하니까.”
“네, 의원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자자. 마마. 정신 차리십시오. 그토록 기다리시던 태자십니다. 보이십니까? 두 분 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자 무사님. 황상께 어서 고하시지요.”
(중국어)
“폐하. 황후께서 태자를 출산하셨습니다.”
“그래? 이럴 수가. 황후. 나, 들어가오.”
“폐하. 오셨군요. 지금까지 밖에 계셨던 건가요? 날도 찬데,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다행히 태자를 봤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폐하. 죽여주십시오. 황후도 못 알아보고 불경을 저질렀던 미천한 할망구입니다.”
“아, 자네가 산파로군. 황후를 모셔줘서 고맙네. 난산이었다는데 의원도 수고했네. 모두에게 포상을 내리지. 황궁의 태의들 보다 더 낫구먼. 하하. 하하하.”
“폐하. 이곳에 오래 계실 수 없으십니다. 태자 얼굴을 잘 보셨으면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그렇군. 황후. 부디 몸조리 잘하시오. 여기서 몸을 풀 생각인 게지?”
“네. 폐하. 여기서 삼칠일이라도 있다가 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백일을 채우시오. 백일이라도 지나야 안심을 하겠소. 그리고 내가 자주 들르리다. 황후. 고생 많았소. 내가 당장 태자 이름을 지어 오겠소. 기다리시오.”
(황궁)
(중국어)
“황상. 요즘, 계속 출궁이 잦던데 왜 그리 자주 출궁하시오?”
“아, 태후마마. 황후가 친정에서 요양 중인데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아, 그리고 황후도 그래. 친정 나들이가 너무 긴 것 아니오? 명색이 황후가 궁을 그리 오래 비워도 되는 거요? 내 한마디 해야겠군.”
“태후마마. 황후가 예전에 중독이 된 것이 덧나서 그런 것이니 너무 다그치지 마십시오. 황후도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아니, 황상은 말투가 왜 그러시오? 꼭 내가 황후를 아프게 만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때도 중독자들을 밝혀내지 못해서 황후께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랫것들이나, 비빈들이 투기해서겠지요. 황상이 그런 내명부 일까지 신경 쓸 것 없어요. 내명부는 내명부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요. 황상은 국사에나 신경 쓰시오.”
“태후께서는 얼른 후사를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제가 장성해서 혼인한 지가 언젠데? 아직 아무에게도 후사를 보지 못한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태후께서는 후사 문제에 어찌 그리 무심하십니까?”
“그럴 리가요? 황상. 나도 황실의 어른으로서 후사를 왜 걱정하지 않겠소? 다만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황후도 고려 후손이고, 다른 비빈들도 만주족, 몽골족이 많고, 우리 한족 며느리가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합니다. 우리는 한족의 피를 이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황상은 왜 오랑캐 출신 비빈을 그리 많이 들이신 겁니까? 고려인 황후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일입니다. 잊으신 겝니까? 황상, 고려족은 우리 한족의 불구대천 원수라는 것을? 선대 황제 폐하들께서 모욕당하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아. 그러셨군요. 이제야 속마음을 실토하시는군요.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 후손입니다. 황후는. 고구려 출신 황후가 못마땅해서 후사를 보고 싶지 않으셨던 겁니까? 그래서 황후 일족을 깡그리 죽이신 겁니까? 황후와 황후 오라비가 내게 역심을 품고 복수라도 하게 만들려고? 그래서 후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려고?”
“황상. 진정하세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고려놈과 고려년이 황상께 복수하려 들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바로 없앨 수 있었는데, 그 고려년, 놈이 왠지 가만히 있었어요. 황후가 될 때까지. 그래서 지독한 년일세. 저것이 황태후가 될 속셈이야 싶었죠. 그래도 황상. 나는 불임독만 썼지. 죽을 독을 쓰진 않았어요. 후손만 끊을 생각이었어요. 고려족 출신 황제란 있을 수 없어요. 황후는 본래 체력도 약하고 다른 비빈들이 알아서 황후에게 독을 쓰는 걸 보고 곧 죽겠지 싶어서 놔두었어요. 다음 황후는 반드시 한족에서 뽑을 생각입니다.”
“태후마마. 어떻게 그런 지독한 생각과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사랑해서 황후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친정 일족을 전부 죽였어도 황후는 내게 한 치의 오점도 없이 제게 사랑과 충성을 바쳤어요. 오늘도요.”
“그게 무슨 소리죠? 황상. 설마. 이 어미에게 벌이라도 내릴 작정인 겁니까? 천하에 부모를 벌하는 자식은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황상이 태후인 내게? 허.”
“태후마마. 아니, 어머니.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되신 겁니까? 저는 황후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황후에게서 아들을 낳을 겁니다. 그리고 황후가 낳은 아들을 태자로 선포할 겁니다. 그리고 제 보위를 물려줄 것입니다. 다른 비빈은 싫습니다. 그리고 한족 비빈은 더더욱 싫습니다. 어머니께서 뽑은 한족 비빈들은 황후독살음모죄를 물어 모조리 처형하겠습니다. 저는 한족 비빈들과 어머니께서 공모하셔서 독을 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체면을 생각해서 모른 척 묻었습니다. 황후께 정말 미안했지만 함구했습니다. 그래서 친정 장기 요양도 보낸 것이고요. 황궁이 더 위험하니까. 정말 황후에게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실 것 같아서. 하지만 어머니께서 솔직히 시인하시니까, 저도 더 이상 함구할 수가 없군요. 그리고 앞으로도 한족 비빈은 얻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그리고 어머니도 황후 중독 모의 죄로 연금되셔야겠습니다. 아들로서 목숨은 보전해드릴 것이나,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상궁, 환관들도 출입을 제한하겠습니다.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모든 물품과 식료품은 밖에서 들여갈 것입니다. 밖과 의사소통도 하실 수 없습니다. 이곳의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말라고 명령하겠습니다. 오늘로 어머니께 문안은 마지막입니다. 저도 제 아내와 자식을 챙겨야 하니까요. 그게 지아비의 기본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안녕히 계십시오. 태후마마.”
“아니? 황상. 이 무슨 천하의 불효란 말입니까? 황상. 제정신입니까? 감히 어미인 태후에게 이리해도 되는 겁니까? 황상이 지금의 보위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 누구의 공인지 있으셨습니까? 내가 황상을 만들었어요. 이 내가. 이 어미가!!”
“어머니라면!!!.......정말 저를 사랑하신다면...... 제가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 이상은 봐 드릴 수 없군요. 여봐랏. 태후마마를 연금하고 아랫것들을 단속해라. 그리고 이곳의 그 누구와도 말을 하거나 기본 식료품과 의복 외에는 들일 수 없다. 알겠느냐? 어명을 어길 시 참수하겠다.”
(우리 집)
(중국어)
“황후. 어떠시오? 몸은 좀 회복되었소?”
“폐하, 폐하께서 살펴주셔서 금세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 태자도 건강합니다. 유모를 들이고 싶지 않아서 제가 계속 젖을 물리고 있습니다. 적어도 여기서 만이라도 제가 물리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답니다. 황궁에선 왜 유모 상궁을 들여야 하는지..... 이곳이 편하고 좋습니다. 오라버니도 새언니도 그리고 이곳 하인, 하녀들도 모두 다 친절하고요. 정말 친정이 있다는 것이 이리 좋을 줄이야. 그리고 태자와 조카가 하루 차이로 태어나서 정말 쌍둥이 같아요. 같이 크는 것도 정말 보기 좋아요.”
“황후께서 이곳에서 계속 몸을 풀고 싶다면 그리하시오. 하지만 이젠 황궁도 걱정할 것 없으니 언제라도 오실 수 있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황후께 독을 쓴 범인들을 다 색출해서 사사하였소. 한 사람만 빼고.”
“아? 그러셨군요. 범인들은 대체 누구랍니까?”
“비빈들의 절반이오. 꽤 많은 편이지. 황후는 몰랐을 테지. 그리 많았는지.”
“짐작은 했지만, 물증이 없어서 고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많을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휴우.
저.... 그런데 태후께서는?”
“태후께서는 연금되셨소. 태후 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실 수 없소. 아랫것들도 역시 연금 중이고. 기본 식료품과 옷가지만 들어가고 있소. 그러니 황후, 이젠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시오. 그리고 황후의 수족들도 이제 궁으로 다 돌아왔소.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 태자를 봤다고 했더니 다들 기절할 듯 놀라더구먼, 대단히 기뻐하고 있소. 어서 마마를 모시고 싶다고 안달이오. 오늘도 따라온다는 것을, 부산떨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왔소. 지금 황후궁을 대청소하고 있다오. 그리고 태자 방도 새로 꾸미고 난리도 아니라오. 그리고 다들 기세가 등등해져서 다른 상궁, 나인, 환관들에게 큰소리치고 다닌다지. 아마. 그동안 고생했는데, 유세 좀 떨라고 하였소. 그래도 구중궁궐에서 황후를 지킨 공신들인데 상을 내려야지. 다들 품계를 높여주었소.”
“감사합니다. 폐하. 제 수족들까지 그리 챙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결심을 하셨군요. 태후마마를 연금하시다니. 역시 괜찮지 않으시겠죠? 제가 다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고구려 출신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송구합니다. 폐하.”
번쩍!!! 잠인지, 명상인지에서 깨어났다. 아! 다행이다. 나도, 여동생도 내 아들도 조카도 다 무사하다. 여기서 깨서 다행이다. 나는 다시 개로 돌아와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있는데, 형님이 내게 와서 물었다.
“칼리프? 명상이 꽤 길던데, 방해될까 봐 건드리지도 못하고 깨기를 기다렸어. 그래. 전, 전, 전생은 좀 어땠어?”
“형님,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혼인도 했었고, 아들도 낳았어요. 그리고 여동생은 황후인데, 온갖 중상모략과 생명의 위험에서 제가 구했고, 무사히 태자를 낳았어요. 거기까지 보고 깼어요. 다행이다. 모두 무사해요. 지금까지는.”
“그랬나? 자네도 드디어 인간다운 삶을 살았던 것을 깨닫게 되었군. 정말 다행이야. 줄곧 중으로 살았다면 얼마나 속상하겠나? 내가 다 속상할 정도였어. 그리고 자네와 여동생이 다 무사했다니 그것도 다행이고. 그 뒤로는 어떻게 될 진 알 수 없지만....”
“형님, 불길한 말씀은 마세요. 저도 그 뒤가 궁금하긴 해도 더 탐색 안 할래요. 그냥 여기까지가 딱 좋아요. 그리고 너무 오래 명상했더니 피곤하고요.”
“그래? 누님께도 이 사실을 알려드려야지. 궁금하실 텐데.”
“그런가요? 누님을 모셔 오세요. 제가 고양이 구멍을 통과하지는 못하니까요.”
“알았어. 모셔 오지.”
.............
“칼리프? 오랜만이야. 전생 드라마 2편이 무척 궁금했다고.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야 깬 거야?”
“네, 누님, 몹시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행복한 순간에 깨서 다행이에요.”
칼리프가 전, 전, 전생의 이야기를 자세히 늘어놓았을 때, 누님과 나는 몹시 즐겁고 흥미진진했다. 정말 인간들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다음 이야기도 어서 해달라고 재촉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해서 아무 말 못 했다. 누님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좋거든.
“그런데, 형님, 누님은 전생 탐색을 못 하셨어요? 저도 궁금한데, 형님, 누님 이야기도.”
“그러게. 나이가 들면 전생도 다 잊어버리나 봐. 이러다 정말 동물이 되어버리겠어.”
“누님, 누님은 그렇다 쳐도 저는 벌써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 나 역시 별 내용이 떠오르지 않네요. 지금껏 너무 무사태평하게 정말 고양이로 살았나 봐요. 진즉에 명상수련을 했었어야 했는데, 좀 속상하네요.”
“술탄 군. 나도 마찬가지야. 정말 고양이처럼 살았지 뭐야. 그것도 고도비만 고양이로, 온갖 성인병은 다 걸려서 말이지. 하루빨리 죽을 날만 기다렸던 거지. 바보처럼. 이제 후회돼. 빨리 죽을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열심히 전생 탐색 수련을 해서 다음 생을 준비하고 기다렸어야 했는데 말이지. 자자. 각자 반성과 명상수련을 다시 하도록 하지. 동생들. 나 돌아가겠네.”
“네, 누님. 다음에 또 뵙죠.”
(술탄 이야기)
칼리프 녀석, 근사한 삶을 살았었네. 술탄의 삶 못지않아. 망국의 후손이 타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긴 했지만, 출세도 하고, 가정도 가졌고, 인간답게 살았어. 그런 기억이 있어야 다음 생에도 반영되지. 중, 비구니의 삶만 기억했다간 또다시 중으로 태어날지도 모를 일이니까. 나도 전생 명상에 집중해야겠어. 후궁 이전의 삶을 찾아야 해. 후궁 이전의 삶. 어디 보자......
아. 역시 그 이전에도 나는 투르크인이었어.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서는 이 시대의 우리나라를 돌궐이라고 불렀다지? 보아하니 칼리프가 여동생 황후의 무사였던 시대와 비슷해. 이 이전 조상님은 훈족이라고 불렸지. 그 시대에서 아틸라 님은 정말 영웅이셨는데, 훈족 시대엔 문자와 기록이 전혀 없어서, 적국의 역사에서밖에 남아 있지 않아. 그래서 더더욱 악마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일지도 몰라. 정말 무슨 극악무도한 짐승처럼 묘사했어. 유럽의 기록도 그렇고, 중국 한족들의 기록도 그렇고 훈족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 중국에서는 흉노족이라 불렀는데, 훈의 음은 ‘흉’자를 붙이고 노예 ‘노’자를 붙여서 굳이 흉노족이라 불렀어. 사실 흉노족이던 시대 때는 우리 훈족이 중국 한족보다 더 우세하고 우리가 조공을 받았었는데, 중국에서는 정반대로 우리를 노비를 뜻하는 노자를 붙여서 흉노족이라 불렀어. 그것도 국가로 취급하지도 않고 부족 수준으로 낮춰 부르고 기록했지. 이후 돌궐이라고 불리는 시기에는 드디어 문자 기록을 갖게 되었어. 하지만 돌궐시대는 중국 한족에 오히려 조공을 바쳐야 했어. 실크로드라고 불리는 지역을 중국에 다 빼앗긴 탓에 국력도 국가재정도 파탄 나고, 중국 한족의 분열정책에 의해 우리 돌궐은 분열되고 자중지란을 일으켰지. 우리는 야비한 중국 한족에게 이간책을 허용하고 말았어. 물론 우리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잘못이야. 하지만 역시 중국 한족은 정말 상종 못 할 족속이야. 보아하니 돌궐 후기인 것 같은데, 동서남북으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고 있군. 중국의 이간책에 넘어간 바보 같은 우리 족속들. 속상하군. 정말. 저기서 나는 뭘 하는 거지? 같은 돌궐족끼리 싸우다니, 이런 황망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도 조상 대대로 중국과 전투나 전쟁 중에서도 실크로드로 교역하는 상인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비겁한 중국 놈들은 그것마저 약탈하고 길을 막고 교역을 방해했어. 대대손손 우리가 사용했던 길을 중국에 다 빼앗겼어. 통탄할 일이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시대와 장면들이야. 우리 돌궐이 멸망하고 고구려가 망했는데, 그렇다면 칼리프는 그 이후의 자손이니까, 내가 좀 더 앞선 시대로군. 나는 서돌궐인이고 사산 페르시아를 치러갔군. 이래저래 우리는 중국과도 페르시아와도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군. 그 와중에 비잔틴제국과 손을 잡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어. 카자르 누님이 이 사실을 알면 서운하시겠지? 우리 서돌궐은 사산 페르시아와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어. 지금 카자르 누님과 옆집에 살게 된 것은 우연인가? 그리고 칼리프와 함께 지내는 것도 우연인가? 어쩌면 아주 옛날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일 지도 몰라. 내가 서돌궐의 전쟁 중에 카자르 누님이 상대편 적장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지. 정말 전생 탐색을 계속해도 되는 것일까? 서로 서로에게 불편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칼리프처럼 자세하게 전생이 나오지는 않았어. 이게 늙은 탓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 이전에도 투르크인이었다는 거야. 카자르 누님도 아마 계속 페르시아인일 것 같아. 어디 누님은 어떻게 명상이 진행되는지 물어보러 가볼까?
.............
“누님? 계세요? 저 놀러 왔어요.”
“깜짝이야. 술탄 군이구나. 웬일이야? 우리 집에 잘 안 오잖아? 주로 베란다에서 날 오라고 부르잖아?”
“누님, 전생 탐색은 잘 되어 가세요?”
“글쎄다. 흐릿한 것이 잘 안 되네.”
“저도 흐릿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윤곽은 잡혀요. 저는 그 이전에도 투르크인이었어요. 서돌궐족 족장이었죠.”
“그래? 나도 역시 페르시아인이었어. 남잔지 여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였나요?”
“그 즈음이었을걸? 아마도.”
“제가 그때 페르시아를 침공했는데요.”
“그랬어? 이런 우리 서로 원수였어? 하긴, 지금도 지구 한쪽에서는 늘 전쟁 중인데, 그 옛날은 더했겠지.”
“그래도 누님,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것은 투르크가 아니에요. 아랍이지. 우리 돌궐도 곧 멸망했어요. 제가 돌궐이 멸망하던 시기에 있었어요. 자중지란 끝에 위구르에게 멸망했지만.”
“그래, 너희 투르크도 우리 페르시아도 결국 아랍의 세력에 흡수당하고 굴복해서 다들 무슬림이 되었잖아? 하지만 투르크와 페르시아는 서로 다른 민족에다 다른 종파를 갖고 있잖아. 지금도 사이가 좋지 않아. 수니파 무슬림과 시아파 무슬림은. 고질병이야.”
“그래요. 누님, 그래도 나라와 종파는 달라도 이슬람교로 통일되었네요. 누님과 저는. 그리고 칼리프는 본의 아니게 무슬림의 종교지도자 이름으로 우리와 만나게 되고요.”
“호호호. 그래. 칼리프는 순수 한국인 출신인데 칼리프로 불리며 우리와 인연이 닿았지. 아마도 칼리프와의 인연으로 우리는 다음부터 한국에서 태어날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이곳 한국에서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닐걸? 한국인으로 태어나려면 동물계를 거쳐야 하는지도 모르지. 한국에서 태어나기 쉽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드디어 종교가 바뀌겠군.”
“그렇군요. 무슬림으로 오래 살았으니, 이제 다른 종교를 가질 수 있겠네요. 이곳에서는 종교가 없어도 상관없어요. 드디어 종교에서 해방되는 건가?”
“그렇구나. 남녀 평등한 나라의 여자로 당당히 살아보는 거야. 내생이 기대돼. 정말.”
“나는 그래도 남자가 좋아요. 전의 후궁은 끔찍했어요. 역시 여자는 싫어요.”
“하긴 나는 공주였어도 싫었는데, 후궁이면 더 하겠지. 그래도 평민도 아니었는데, 그리 싫었어?”
“여하튼 나는 다음에도 남자가 될 거예요.”
“그게 네 마음대로 되는 거니? 이번에 제대로 잘살아보든지? 선업 점수가 높아야 남자가 되는 거 알지?”
“저, 나름 칼리프에게 잘 해주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야 그렇지. 넌 칼리프에게 정말 잘했어. 그런데 너 집사에게는 쌀쌀맞지 않았니? 스킨십도 거의 못 하게 하잖아? 물고, 할퀴고, 성질부리고....나는 집사가 오히려 내게 무심해서 많이 외로웠다고. 그래서 나는 다음에 내가 원하는 대로 태어날 것 같아. 집사가 나한테 하는 것보다 내가 집사에게 더 잘했으니까.”
“아, 그럴 수가. 내가 집사에게 퉁명스럽게 대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게 또 그리되나요? 곤란한데.”
“나는 이번에 고양이 카자르로 살면서 열심히 점수를 축적했어. 그래서 빨리 내생을 맞이하려고 열심히 살을 찌우고 성인병을 키웠지. 곧 가려던 참인데 너를 만나고 칼리프를 만나고, 내 계획은 좀 틀어졌지만, 그래도 요즘이 가장 즐거워. 그래서 조금 더 고양이로 살려고.”
“저도 칼리프를 키우면서 고양이의 삶이 좀 즐거워진 것은 사실이에요. 누님도 뵙고 셋이서 인간의 삶을 탐구하고 내생도 준비하고, 이런 고양이의 삶이라면 골치 아픈 전쟁하는 인간의 삶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해요.”
“역시 그래. 칼리프는 지금 뭐하니?”
“한참 명상하더니, 그 다음은 무섭다고 명상 못 하겠다고 하던데요. 그 이후가 비극일까 봐 걱정되나 봐요. 칼리프는 지금 그 여동생 황후의 시대에 완전히 빠져서 헤어나오지를 못해요. 진심으로 걱정해요. 여동생 황후를. 자기 자신보다도.”
“이런. 아직 어려서 그래. 그 어떤 삶도 영원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인데. 계속 윤회하면서 다른 삶을 사는 것인데,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되겠지.”
“우리처럼 대충 보이면 그나마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칼리프는 전생이 너무 선명하게 장면 한 장면, 대화 내용 하나하나까지 다 보이고 들리니까, 바로 지금의 현실처럼 느껴지나 봐요. 지금 칼리프 녀석, 말도 아니에요. 지금도 1,300여 년 전에 살고 있다고요.”
“그러다 병이라도 나면 큰일인데.”
“말도 마세요. 누님. 애가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못 자고 있어요. 잠이 들면 혹시 그 전생으로 들어갈까 봐.”
“아휴, 안되지. 먹고 자고 싸고 해야지. 지금은 개일 뿐이야. 한 마리의 진돗개. 자기 자신이 뭔지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
“한번 보러 가 주세요. 정신 좀 차리라고.”
“이런. 이 누님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가련한 중생을 구제해주러 가야겠군.”
...............
“칼리프 군?”
“아? 누님. 오셨어요? 제 전생 드라마 3회는 아직 상영 안 했는데요. 제가 그 이후로 한숨도 안 자서.”
“드라마 3회 안 들어도 되니까, 거기에서 좀 벗어나는 게 어때?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해야지. 자네, 지금 개야. 개. 아니지 사람도 잠 안 자고 밥 안 먹고 하면 죽는다고. 이 철없는 강아지님아.”
“그렇군요. 나는 개지. 참. 제가 사람 남자 호위무산 줄 알았네요. 하하.”
“전생의 삶도 중요하겠지만 현생을 소중히 여기고 알차게 보내야 다음 생을 기약하지. 이렇게 굶어 죽을 작정이야? 자네 아직 일 년도 안 살았는데?”
“저런. 나 일 년도 채 안 살았군요. 나는 지금 내가 30대 사람 청년인 줄 알고 있어요. 하하하.”
“정신 차려. 그 삶은 자네의 셀 수 없는 윤회의 삶 중에서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야. 우주의 먼지 티끌과도 같다고. 거기서 벗어나서 자유롭지 못하면 내생도 기약할 수 없어. 그래서 인간들은 전생을 다 잊어버리나 보군. 그래야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전생을 기억하는 인간은 거의 없어. 아주 고도의 수련을 한 종교지도자 정도 되어야 가능할걸?”
“누님은 정말 노련하세요. 그렇군요. 나는 이제 일 년도 채 되지 못한 강아지로군요.”
“자네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야. 자네 다음 생에 제대로 사는 인간이 되라고 전생을 탐색하라고 한 것이지, 이리되라고 전생 탐색하라고 한 것이 아니야. 지나간 삶을 객관적으로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해. 알겠어? 칼리프 군?”
“네, 누님, 제가 정신이 잠시 나갔던 것 같아요. 당장 밥부터 먹을게요. 제가 개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배가 고파지네요.”
“그래. 강아지님, 어서 식사하시고 기운 차려요. 그리고 오늘 꿀잠 자고. 좋은 꿈 꾸고. 내일 봐.”
“네, 누님. 안녕히 가세요.”
“칼리프.”
“넷. 형님.”
“너 내 말은 잘 안 듣더니 누님 말씀은 잘 듣는데? 좀 섭섭해지려고 해.”
“아이. 형님, 또 왜 그러셔요? 제가 또 언제 형님 말씀 안 들었다고 그러세요? 제가 개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을 뿐이에요. 형님께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이제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오늘은 꿈도 안 꾸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밥을 먹었더니 바로 졸리네요. 저, 자요. 형님. 쿨쿨. 드르렁.”
“바로 쓰러지는군. 누님을 진즉 부를 걸 그랬어. 역시 누님은 내공이 나보다 깊어. 나이를 괜히 잡순 것이 아니야. 존경합니다. 누님.”
(칼리프 이야기)
(고구려어)
“오라버니, 백일잔치도 마쳤으니, 이제 궁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조카와 태자 둘 다 무사히 백일잔치를 했으니, 이제 가야죠. 그동안 고마웠어요. 황상께서 노심초사 기다리시는데, 아무리 이곳이 편하고 좋아도 가야죠.”
“마마, 저도 붙잡고 싶지만, 마마는 그냥 평범한 아낙이 아니니까, 제자리로 돌아가시는 것이 맞습니다. 황상께서 잘 지켜주시리라 믿고 보내드립니다.”
“마마, 부디 몸조심하시고, 태자마마도 건강하시길 빌겠어요.”
“새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덕분에 정말 마음 편하게 지내다 가요. 오라버니를 잘 부탁드려요.”
.............
(중국어)
“폐하,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태자도 건강합니다.”
“황후, 이제 오셨구려. 어서 드시오. 그리고 태자 한번 안아보자. 아비가 되어서 너 보기가 너무 힘들구나. 애고. 그새 많이 컸네. 쑥쑥 자라는구먼. 황후는 새로 꾸민 침궁이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태자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신경을 썼어. 황후가 따로 유모상궁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아서 말이야. 하지만 조금이라도 힘들면 언제든지 말 하시오. 유모상궁을 바로 불러다 줄 테니까.”
“아, 감사합니다. 저도 제가 계속 키워버릇해서 갑자기 유모에게 맡기면 너무 허전할 것 같아 속이 쓰렸는데, 그 때문에 더 빨리 올 수 없었어요. 하루라도 더 제가 키우고 싶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돌아올 걸 그랬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폐하, 저기 저, 그런데 태후마마께 문안 여쭈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첫 손자이신 태자도 보셔야 하고.”
“그럴까? 태후께서 태자를 보시고 싶으실지 의문인데, 황후가 그리하고 싶으신 게요?”
“그래도 며느리가 첫아들을 낳았는데, 인사는 여쭙고 태자 얼굴이라도 보여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아. 흠. 정 그러시다면, 상궁과 호위무사와 함께 가도록 하시오. 태후께선 아직 정정하시니까. 혹시라도 마음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무나 서운해하지 마시오.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리시오. 며느리 도리만 하고 오시면 되는 거요. 알았소?”
...........
“태후마마, 오랜만에 문안드립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잘나신 황후께서 이 누추한 곳엔 웬일이지? 그리고 저 앤 뭐야?”
“마마, 실은 제가 친정에서 태자를 낳았습니다. 거기서 백일을 지내고 돌아왔습니다.”
“아니, 뭐라고? 태자를 낳았다고? 네가? 어떻게 낳은 거냐? 넌 애를 낳을 수 없어.”
“태후마마, 제가 중독된 것을 알고부터 해독을 해서 회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낳았고요. 둘째는 힘들 듯합니다. 더 욕심도 부릴 생각도 없습니다. 태자를 낳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할마마마가 되셨는데, 태자 얼굴이라도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 태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황상을 닮았습니다. 한번 보소서.”
“누가 고려 후손 따위를 태자로 인정할까 보냐? 저리 치워라.”
“응애. 응애.”
“아악. 태후마마. 태자를 던지시다니......태자. 태자. 무사하신 겁니까? 아니, 이런 태자께서 기절하셨어. 여봐라. 어서 태의를 모셔 와라. 빨리 가봐야겠구나.”
..............
“태자는 무사한 거요?”
“폐하, 설마해도 이리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흑흑흑. 태자를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바로 땅으로 집어 던지셔서........흑흑.”
“태자는 좀 어떻소? 태의?”
“폐하. 머리를 땅에 부딪치셔서 좀 위험합니다. 경과를 더 봐야 알겠습니다. 죽여주소서.”
“정말이지. 어떻게 이리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정녕 어마마마라고 부르기도 싫구나. 아, 황후. 황후. 정신 차리시오. 이런 황후께서 쓰러지셨다. 태의는 어서 진맥하시오.”
.............
(고구려어)
“마마. 정신이 드십니까?”
“오라버니? 아, 태자는 어떠하십니까?”
“마마, 태자께서는 그만 떠나셨습니다. 마마께서도 사흘 만에 깨셨습니다. 지금 장례식 중입니다. 태자 책봉도 못하시고 가셨지만 태자의 예로 장례를 치른다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도 상심이 크십니다. 마마도 어서 일어나시어..........”
“아악”
“마마, 마마, 이런 또 기절하셨어.”
.................
(중국어)
“황후는 아직 인가?”
“본래 강녕하시지도 못하신 데다, 충격이 너무 크시어 정신을 차리시기 어려울 듯합니다.”
“여봐라. 황후의 친정은 좀 어떠하냐?”
“그곳도 초상집이라 합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해서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이러다 정말 무슨 사단이라도 날까 봐 걱정입니다. 폐하.”
“내가 부덕하여 태자와 황후까지 잃게 생겼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단 말인가?”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후께서 방금 숨을 거두셨습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냐? 황후. 황후. 정신을 차리시오. 황후. 이렇게 가시면 아니 되오. 나 혼자 남겨두고 다 떠난단 말이오? 가지 마시오. 털썩.”
“폐하,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이런, 우린 다 죽은 목숨이야.”
..............
(고구려어)
여동생이 죽었다. 갓 난 아들이 떠난 것을 견딜 수 없었나 보다. 남편이라는 황제는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태후는 내명부를 비워둘 수 없다고 기어이 한족 황후를 새로 들였다. 황제는 모든 의욕을 잃고 태후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황제가 기력이 쇠하여 태후가 섭정한다. 태후는 잔인하게 여동생의 모든 기록을 삭제하고 황제에게 고구려 후손 황후는 없는 사실로 만들었다. 황제는 한족 황후밖에 없다. 내 여동생은 그 어떤 역사 기록에도 남지 못했다. 물론 태자인 내 조카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태후에게 복수도 하지 못하고 황제에게 따져 물을 기운도 없어서 산속으로 들어갔다. 여동생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나도 내 자식이 없다면 출가를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처자식을 가진 가장으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삼년상에 해당하는 날짜만큼 불공을 드리기로 하였다. 내, 다음 생엔 정말 수도승이 되어서 여동생의 원한을 풀기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이다.
“누이야. 오라비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다음 생에는 너를 위해 인생을 바치마.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 이생에서는 처자식을 저버릴 수가 없단다. 네 소원이기도 했으니까, 아내와 아들을 잘 지켜주겠다. 먼저 가 있어라.”
번쩍. 악몽이구나. 역시 잠들지 말아야 했어. 왠지 잠드는 것이 무서웠어. 물론 나는 지금 개지만, 강아지지만....
“아흐흐흐흑.”
“칼리프?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형님.......여동생이 죽었어요. 조카도 죽었어요. 황제는 새로 한족 황후를 맞았고요. 태후는 권력을 휘두르고, 여동생의 모든 기록을 지웠어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나는 복수도 못 하고 나는 산속으로 들어가서 불공을 드려요. 흐흐흐흑.”
“이런. 설마 했는데,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걸 어째? 칼리프. 진정해. 하긴 내가 아무리 말한 들 네 귀에 들어가기나 하겠냐마는. 그래도 아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니? 그래 혼자 있고 싶을 테니 그러도록 해. 하지만 너무 오래 상심해선 안 된다. 기운 차려서 다시 일어나도록 해라.”
(옆집 베란다)
“누님, 계세요?”
“아, 술탄 군. 놀러 오라고?”
“그게 아니라 오늘은 오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러 왔어요.”
“아니? 칼리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역시, 누님, 눈치가 빠르셔. 네. 칼리프가 전, 전, 전생의 꿈을 다시 꾸었는데요. 결말이 너무 비극적이라,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아요. 빨리 정신을 차리면 좋을 텐데.....”
“얼마나 비극이기에 그래? 이런, 3회 만에 드라마 끝인가?”
“누님, 농담할 분위기가 아녜요. 심각해요. 저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옛날이 다 그렇고 그러니까요. 하지만 그 정도로 참혹한 비극은 상상도 못 했어요. 아무런 복수도 못 했으니 더 원한에 사무쳤겠죠. 그래서 칼리프가 계속 비구니나 중으로 환생을 한 것 같아요. 정말 안됐어요.”
“그래? 자세히 이야기 좀 해봐.”
“저도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여동생과 조카가 죽고, 황제는 새로 한족 황후를 맞고, 태후는 여동생의 모든 기록을 지워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칼리프는 복수도 못 하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불공을 드린다는 이야기까지만 들었어요.”
“이런. 정말 중국 한족은 정말 잔인해. 상상을 초월해. 그 어떤 세계사에서도 중국만큼 잔인하게 사람들을 다루는 나라는 없을 거야. 몸서리 처진다.”
“그래서 지금 혼자 울고 있는데요. 혼자 울라고 하고 나왔어요. 나도 여기 좀 있다가 가도 되나요? 지금 가기가 좀 그래서요.”
“글쎄다. 우리 집사가 지금 집에 있잖니? 여기 베란다에 있는 건 괜찮겠지만, 우리 집사가 좀 예민해서 말이지. 조금이라도 어질러지면 질색을 해요. 질색을. 저는 청소도 잘 안 하면서, 모든 건 내 탓으로 돌리거든.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집사야. 너희 집사가 훨씬 나아. 넌 반대로 네가 집사에게 못되게 굴잖니?”
“어라. 누님, 제가 또 언제 그렇게 못되게 굴었다고 그러세요? 그냥 같은 남자끼리 스킨십 하는 것이 싫을 뿐이라고요.”
“너도 네 자아가 강해서 큰일이구나. 너도 네가 고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아. 칼리프한테만 뭐라 그러지 말아. 너도 한 고집하니까. 너도 고양이라고. 고양이. 사람이 아니라고. 이 양반아.”
“그렇긴 하죠. 고양이죠. 고양이. 어휴. 빨리 사람이 되고 싶어요.”
“너 새로 태어나려면 적어도 십 년은 기다려야 할 텐데. 너 5살이랬지?”
“네, 5살.”
“네가 그랬잖아. 네 입으로 애완동물은 15년에서 20년 산다고 그러지 않았니?”
“그랬죠.”
“내가 먼저 갈 테니 너는 천천히 오도록 해. 우린 아마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서로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때도 누님이 훨씬 먼저 태어나실 테니 제가 어려서 알아보시기 힘드시겠네요. 비슷하게 가야 비슷하게 태어날 텐데.”
“그건 그렇지. 나이 차이가 좀 나겠지? 나는 10살이 넘었어. 고도비만이라 더 빨리 갈 것 같아. 물론 너희들 때문에 많이 건강해져서 수명이 더 늘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몇 년 후엔 가겠지?”
“누님, 그런 말씀 마세요. 누님이 가시면 우리 섭섭해서 어떻게 해요?”
“술탄 군. 순리대로 사는 거야. 지금까지 그것 배우자고 이렇게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거야.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나는 다 늙어서 너희들을 만나서 얼마나 행복한지, 너희들은 잘 모를 거야. 내일 가도 상관없을 정도야. 나는 아무 여한이 없어. 다음 생을 잔뜩 기대하고 있다고. 요즘 정말 즐거워. 칼리프도 어서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어. 순간순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야 하는데, 우리는 그래도 복이 많은 편이지. 고생하고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사람들보다 우리가 훨씬 행복하게 살고 있어. 너도 그건 알지?”
“네, 누님, 하지만 누님, 너무 달관한 말씀을 하시니, 오히려 불안해요. 곧 가실 것처럼 굴지 마세요. 무서워요.”
“하하하. 아니 호호호. 걱정하지마. 내일 당장 떠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집안에만 있는데, 무슨 사고가 나겠어? 얼마 전 병원에서도 종합 검진을 받았지만 건강하다고 하고. 병도 없고, 사고도 없는데, 장수 만세 할 일만 남았는데, 뭐가 걱정이야? 내 걱정은 말고 칼리프나 챙겨. 너무 혼자 둬도 안 돼. 옆에서 눈치껏 행동해. 가 봐. 어쩌면 네가 옆에 있어 주길 바랄지도 모르잖아. 아직 아기라고, 칼리프는.”
“아. 그렇군요. 그 녀석 아직 아기였지. 요즘 하도 어른 사람 남자처럼 굴어서 다 큰 어른인 줄 알았네요. 나도 참 바보 같아. 가볼게요. 누님.”
(작가 등장)
“아니, 이게 누구야? 옆집 고양이 아니냐? 네가 여긴 웬일이야? 아. 그렇지. 고양이 구멍으로 들어왔어? 우리 카자르가 너희 집으로 놀러 가는 것은 봐주겠지만, 너는 우리 집에 들어오지는 마. 베란다가 한계야. 알았지? 어서 너희 집으로 돌아가.”
“야옹, 야옹, 야옹, 후다닥.”
(우리 집)
누님 말씀대로야. 저 집사는 정말 재수 없어. 나는 좋은 집사를 만난 거야? 내가 정말 못되게 굴었나? 반성 좀 해야겠군.
“칼리프? 다 울었니? 뭐하니?”
“형님. 울다가 지쳐서 지금 잠시 쉬는 중인데요.”
“하하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을 보니 곧 괜찮아지겠어. 다행이야. 너 밥은 먹었니?”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형님이랑 같이 밥 먹자. 오늘은 특별히 봐줬다. 내 밥을 먹어도 좋아.”
“아? 형님이 그렇게 아끼시는 형님 특식을 먹어도 된다고요? 웬일이세요? 전에는 뺨을 6연타로 날리시더니. 그땐 정말,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충격받았다고요.”
“아, 그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네가 개인지, 고양이인지,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것 같아서 확실히 가르치려고 그랬지. 마음 상했었다면 미안해. 자자. 어서 먹자.”
“형님, 누님께 다녀오신 거예요?”
“응, 네가 울고 있으니 내가 여기 있기 곤란해서 다녀왔어.”
“누님께서 걱정하시겠네.”
“네 걱정이나 해라. 누님은 네가 빨리 현생으로 돌아와서 다음 생을 기약하길 바라셔. 과거에서 벗어나라고.”
“하긴, 과거를 바꿀 수도 없으니까요. 다음엔 정말 제대로 살아보겠어요.”
“그래. 그러라고 전생 탐색을 한 것이지. 그걸 깨달았으니 이젠 됐어. 참. 칼리프. 방금 누님네 베란다에서 옆집 집사를 만났는데 말이야. 정말 지독해. 자기 집에 오지 말라는 거야. 누님은 우리 집에 매일 놀러 오는데, 그건 괜찮고, 나는 안된다는 것 있지? 정말 이기적인 여자야. 그에 비하면 우리 집사는 천사야. 천사.”
“그럼요. 우리 아빠, 참, 집사는 좋은 분이에요. 형님이 왜 그리 질색을 하시는지 저도 이해가 잘 안 됐어요. 사실.”
“질색이라기보다 그냥 같은 남자끼리 스킨십 하는 것이 싫을 뿐인데, 누님도 그걸 지적하셨어. 내가 사람 남자로 착각하고 사는 것 같다고. 나는 고양이인데, 집사에게 잘 보여야 한다면서 말이야.”
“저는 집사에게 딱히 잘 보이려고 한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전생 탐색을 한 결과, 더 고맙게 느껴져요. 내가 사람일 때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안락한 환경에서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병원 데리고 다니고, 산책도 시켜주고, 가끔은 특별 간식도 주고 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정말 고마워요. 집사가 행복해지면 좋겠어요.”
“그런가? 나는 집사에 대해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하긴 가끔은 날 보고 신세타령을 하곤 하지. 여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구나. 나한테는 그런 말 하지 않는데, 내가 아기라서 그런가? 역시 형님을 더 신뢰하는 건가?”
“신뢰는 무슨? 내가 함께 산 세월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러고 보면 우리 집사도 30살이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친구들도 결혼하고 애가 있다는 말을 했거든. 어찌 보면 불쌍하기도 하다. 처자식 대신 우리랑 살고 있으니 말이야.”
“그럼요. 저도 처, 자식이 있어봐서 알아요. 이젠. 가족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에요. 든든하고, 나 자신이 더 훌륭하게 느껴지거든요. 혼자일 때보다는. 확실히 책임감도 더 생기고, 저도 처자식이 없었다면 바로 출가했을 거예요. 덕분에 다음 생부터 계속 출가지인으로 살았지만 말이죠. 그때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했어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그래. 칼리프. 너는 그보다 더 잘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살았어. 다음엔 정말 훌륭하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형님이 보증해.”
“그런 의미에서 형님, 오늘 집사가 퇴근하면 마중 가셔서 인사를 하세요. 집사 다리에 머리라도 문질러 보시던가요.”
“으악.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하란 말이야?”
“그게 뭐 어때서요? 다른 고양이들은 더한 애교도 부린다던데. 누님은 안 그러실까나?”
“스킨십까지는 내가 시도하지는 못해도 인사는 하러 나가보지.”
“그러면 집사가 정말 기뻐할 거예요. 형님. 저도 진즉 이런 말 해드리고 싶었는데. 형님이 너무 질색하셔서 지금까지 말 못 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마중 나가서 꼬리를 흔들고 집사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기쁜 표현을 하거든요. 저는 집사가 스킨십 해주면 좋던데, 내가 아기라서 그런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본래 개들은 집사가 스킨십 해주는 걸 좋아해. 너도 역시 개로구나.”
“아니, 지금 형님이 고양이라서 까칠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 어. 응. 뭐, 그런 셈이지.”
“고양이라고 다 그렇지 않아요. 형님. 불쌍하고 고마운 집사를 배려 좀 해줘요. 형님이 집사보다 정신 연령은 더 높잖아요.”
“그렇긴 하지. 내가 더 어른이지.”
(저녁 무렵)
“다녀왔어, 어라? 술탄 네가 웬일이냐? 아빠 마중을 다 오고. 칼리프 잘 있었어? 역시 우리 칼리프는 싹싹해. 그래그래. 아빠가 씻고 밥 차려 줄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라.”
“칼리프, 너는 정말 인사가 자연스럽구나. 봐라. 기껏 인사하러 나왔는데도 반응도 별로잖아. 괜히 인사했나?”
“아니에요. 형님, 집사도 속으로 기뻐하고 있잖아요? 그걸 모르시겠어요? 형님은 나이를 어디로 잡순 거예요? 보세요. 집사가 노래를 부르면서 씻고 있잖아요. 집사가 노래 부르는 걸 본 적이 있으세요?”
“그래? 그러고 보니, 집사가 노래를 부르고 있네. 별일이야. 기분이 좋은가 보지?”
“그럼요. 앞으로 아침 출근 때도 퇴근 때도 인사를 하세요. 집사가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우리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요. 무전취식 하는 주제에, 그 정도도 못 하면 염치가 없는 거예요.”
“그렇구나. 이제는 칼리프 네가 나를 가르치는구나.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허. 참.”
“띵똥, 띵똥”
“누구세요? 아, 옆집 작가님이시네. 무슨 일이시죠?”
“아, 뭐, 당신네 고양이가 오늘 우리 집 베란다에서 얼쩡거리길래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고양이가 내 말을 알아들을지 아닐지 몰라서 주인에게 말하려고요. 제가 낯선 것이 얼쩡거리면 신경이 쓰여서 글을 쓰기 어렵거든요. 이해해 주세요. 물론 우리 카자르가 여기서 매일 신세 지는 것은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만, 고양이 단속 부탁드리려고 왔어요.”
“하. 그러시구나. 우리 술탄이 옆집 베란다에서 얼쩡거렸구나. 집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왔구나. 그런 거죠? 작가님?”
“네, 그럼 저 알아서 해주실 거라 믿고 갈게요.”
“잠깐만요. 작가님. 좀 너무하시네. 카자르가 매일 우리 집에서 놀고, 먹고 하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 술탄이 작가님네 베란다에서 얼쩡거리는 것은 못 보시겠다는 거예요? 지금?”
“아?, 네, 뭐, 그런 거죠.”
“그런 거죠? 하. 이런. 작가님이 저보다 한참 연상이시고 작가 나름의 예술세계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시고 싶은 모양인데, 작가님, 아무리 예술가라도 해도 경우가 좀 없으시군요. 저라면 그렇게 말 못 합니다. 앞으로 카자르도 우리 집에 들이지 마세요. 그렇게 주의 주세요. 저도 고양이에게 직접, 주의 주고 싶지만, 댁내 고양이가 말을 못 알아들을 테니까요. 앞으로 서로 왕래 못 하게 제가 베란다 벽을 막죠.”
“그래서 제가 처음부터 베란다 벽을 막자고 했잖아요? 이런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그때 옆집 총각이 뭐랬어요? 그냥 두자고. 카자르가 매일 놀러와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죠? 정말로. 참나. 갈게요. 흥.”
“.............(부르르).”
“정말, 뭐 저런 여자가 있어?”
“형님, 우리 집사가 충격을 받았는지, 대문 앞에 아직도 서 있어요. 정말 옆집 여자가 남자였다면 한 대 때렸겠죠?”
“나라도 그랬을 거야. 정말 옆집 집사는 악마야. 마녀 할망구 같으니라고. 참, 이럴 때가 아니야. 이제 누님이 여기 못 오시잖아? 어쩌지?”
“어라. 정말 그러네. 누님이 놀라시겠네. 어쩌죠?”
“집사가 베란다 벽을 막기 전에 내가 알려드려야겠어. 놀라시지 않도록. 빨리 다녀올게.”
(옆집 베란다)
“누님, 누님, 와 보세요.”
“술탄 군? 왜? 칼리프는 이제 좀 괜찮아?”
“그게 문제가 아녜요. 지금 누님, 아, 네, 칼리프는 괜찮아요. 누님네 집사가 우리 왕래 못 하게 하라고 해서 우리 집사가 곧 베란다 벽을 막을 거예요. 앞으로 못 오실 것 같아요.”
“이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 술탄 군. 칼리프 군을 잘 부탁해. 내가 가지 못하더라도 둘이서는 잘 지내고 있어. 그동안 고마웠어.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말할게. 자네 집사에게 잘 해줘. 좋은 사람이야. 그동안 내가 자네 집사 덕분에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를 못해서 안타깝네, 내 이다음 생에 태어나면 자네 집사에게 꼭 고맙다고 할 거야. 잘 있게.”
“누님, 아, 우리 집사가 벽을 막으려고 해서 전 이제 갈게요. 잘 지내세요. 누님, 건강하셔야 해요. 아셨죠? 혼자 계셔도 운동도 하시고...”
(술탄 집사가 부름)
“술탄, 어서 들어와. 네가 그러니까 옆집 여자가 그딴 소리를 하는 거잖아. 정말 내 살다 살다 저런 재수 없는 여자는 처음이야. 어서 들어가. 술탄. 이제 벽은 절대 뚫으면 안 돼. 알았지?”
“야옹, 야옹, 야옹,”
“뭐라는 거냐? 벽 막지 말라고 하고 싶은 거냐? 안 돼. 술탄, 그리고 칼리프 너도 잘 들어. 다시는 이 벽을 뚫지 마라. 알았니? 또 뚫으면 너희 둘 다 케이지에 가둬둘 테니까. 알겠지?”
“이런. 정말 벽을 막았어. 급할 때는 예전처럼 베란다 난간 밖으로 목을 빼고 누님을 부르는 수밖에 없어. 그때 누님이 내 목소리를 들어야 겨우 대화하는 거고, 누님이 실내에 계시면 아무 소용도 없어. 이제 겨울이라 날이 추워지면 문 닫고 들어가 버리니 내년 봄이 한참 지나야 겨우 대화할 수 있겠네. 겨울 동안 누님께서 건강하셔야 할 텐데. 그지? 칼리프? 너도 누님이 걱정되지? 우리 집에 오지 못하면 다시 예전처럼 뚱뚱해져서 초고도비만 고양이가 되고 말 거야. 연세도 있으신데, 정말 곤란해. 정말 저 옆집 마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누님이 어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거 아냐?”
“형님, 심정은 알겠지만, 흥분 좀 가라앉히세요. 우리 집사도 자존심이란 게 있잖아요? 집사의 심정도 좀 배려해주세요. 저도 벽을 뚫고 싶지 않아요. 우리 집사가 너무 속상해하잖아요?”
“정말, 너는 집사가 최우선이구나? 나는 같은 고양이가 더 우선인데, 넌 정말 이럴 때 보면 정말, 개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자자, 형님, 누님도 이번 기회에 전생 탐색 명상에 몰입하시게 될 거예요. 내년 봄에 베란다에서 만나면 한번 여쭤보죠. 그동안 형님도 전생 탐색하셔서 새로운 이야기 누님께 들려 드리고요. 저도 형님, 누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제 이야기만 들으셨잖아요?”
“하이고, 동생님, 그것이 서운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저도 다른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요. 저도 무슬림들의 이야기는 잘 모르거든요. 새롭고 신기해요. 다른 이야기도 알고 싶어요. 형님.”
“하긴, 고구려, 조선, 한국에서만 산 너로서는 매우 신기하고 새롭긴 하겠다. 그래서 내가 누님께 더 각별한 것 같아. 누님은 그래도 가까운 나라에 종파는 달라도 종교도 같고. 외모도 비슷하고.”
“네네. 저는 개니까, 외모도 엄청 다르고, 민족, 인종, 종교도 완전 딴판이죠. 식습관도 그렇고. 언어는 물론이고. 지금 인종차별, 아니 동물종 차별하시는 거예요?”
“꼬아 듣지 마. 내가 널 언제 차별했다고 그러니? 그럼 너는 누님이 조금도 걱정이 안 되니? 고도비만에 연세도 많으시고, 우리 만나기 전에는 우울증까지 있으셨어. 이제 다시 우울증이 도질 거야. 마녀 집사는 누님께 관심도 없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누님께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번 같은 만행은 절대 저지르지 못해.”
“옆집 마녀가 누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인정해요. 정말 우리는 다행이에요. 좋은 집사 만나서. 내가 옆집에 있었다면 돌잔치도 못 해보고 우울증으로 죽었을 거예요. 10년 넘게 누님이 살아계신 것이 신기해요. 내공이 깊으셔서 달관한 마음으로 버티셨던 것 같아요. 명상을 잘하시나 봐요.”
“이번 겨울은 꽤 길겠구나. 나도 우울해지려고 한다. 칼리프. 너 혼자 명상해라. 나도 그럴 테니까. 저쪽으로 가.”
“형님. 형님은 우울증에 걸리시면 안 돼요. 우리는 누님과 입장이 전혀 다르다고요.”
“조용히 해. 나는 캣타워 위에서 쉴 테니, 넌 저쪽 가서 명상하든지, 놀든지 알아서 해라.”
“이런. 이러다가 정말 형님까지 우울증에 걸리시겠어. 큰일인데.... 형...님.... 정신줄 꽉 잡으세요.”
(술탄 이야기)
캣타워 위에서 꿈을 꾸었다.
저번엔 돌궐족장이더니, 그보다는 뒤이다. 아? 셀주크투르크의 후궁 시절보다도 더 뒤야. 결국, 바로 전생 술탄 시대인 거야?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이다. 나는 술탄으로 오래 살았네. 이곳으로 다시 온 이유가 있겠지? 나는 정말 대대로 투르크족이었구나. 지금 한국에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누님도 아마 전생 대대로 페르시아인이었을 거야.
“예니체리 부대의 만행이 도가 지나칩니다. 술탄. 이대로 두실 겁니까?”
“선대 대대로 술탄 직속 부대가 아니오? 그만큼 대우를 해주는 거지. 물론 지나친 점도 있긴 하지. 하지만 예니체리 부대는 우리 군사력의 핵심이오. 아니 그렇소? 술탄, 직속 친위대, 보병군단.”
“술탄, 살인 병기 부대는 우리가 꼭두각시로 쓰려고 만든 것이지, 그 꼭두각시에게 우리가 조종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부대가 아닙니다. 예전처럼 결혼을 금지하고 세습을 막아야 합니다.”
“이미 결혼하고 자식을 낳았는데, 지금에 와서 금혼령을 내리란 말이오?”
“예니체리 부대는 원래의 의도를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그 세력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없애야 합니다.”
“이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런, 잠이 깼어. 깜짝이야.
보아하니 술탄이긴 한데, 예니체리 부대가 변질된 시기인 모양이야. 처음엔 기독교 포로의 자녀들을 모집해다가 무슬림으로 개종시키고 술탄 직속 친위대로 만들어서 결혼금지, 자녀금지, 술탄을 아버지로 세뇌시켜서 꼭두각시 본연의 모습을 잘 지켰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결혼이 허가되고 무슬림도 지원이 가능하게 바뀌며 예니체리 지위가 세습된 결과, 예니체리들은 강력한 군사집단에서 기득권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된 이익집단으로 변모해 버렸어. 심지어 상공업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거의 마피아나 다름없었지. 사실 예니체리들이 이권을 지키기 위해 단체행동을 하거나 반발하는 것은 그전부터 있었던 일이었으나, ‘세습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어. 특히 1637년에 비(非)무슬림 백성 중에서 소년들을 차출하여 엘리트 병사로 훈련시키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자 예니체리는 세습과 지원으로 충원되기 시작해 세습화가 더욱 심해졌어. 나중에는 그 결과 전투력은 갈수록 떨어졌고, 1621년 호틴에서 폴란드와 맞설 때 12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패전하는 결과로 이어졌지. 하필 상대가 키르홀롬의 영웅 얀 카를 코드키에비츠였다는 것과 총사령관 오스만 2세가 너무 어려서 성급했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예니체리가 쓸 만했던 것도 아니야. 설마 내가 최초로 예니체리 부대에게 살해당한 오스만 2세는 아니겠지? 다시 잠드는 것이 두려운데? 사실 이러한 예니체리들의 추태를 보고 분노한 오스만 2세는 예니체리 제도를 개혁하려 했으나 예니체리들은 선수를 쳐서 오스만 2세를 살해해 버렸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오스만 2세의 삼촌인 무스타파 1세를 복위시켰어. 이후 예니체리들은 술탄도 무시하는 강력한 집단이 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술탄의 적들에게 공포를 안겨주던 예니체리들이 이제 술탄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정도였어. 골치 아픈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지. 1622년, 1631년에는 아예 낮은 임금에 불만을 품은 예니체리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이들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고, 이런 예니체리들은 때때로 이스탄불을 약탈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타락해 군인으로서의 신념도 완벽하게 잊어버렸어. 이후 몇백 년간 아무도 손을 쓸 수 없었어. 무능한 술탄들이었지. 부끄러운 과거야. 휴우. 세월이 흘러서 겨우 19세기 초에 보다 못한 셀림 3세가 이들을 없애려 했지만 실패해서 오히려 폐위, 암살당했으며, 1826년에 셀림 3세의 사촌 동생인 마흐무트 2세가 신식 군대를 동원해 해체시켰지. 반란을 일으켜온 예니체리들을 교전에서 압도해 이스탄불 내의 그들의 진영으로 후퇴시켰고, 그 진영에 신식 대포 15문을 위시한 막강한 화력을 퍼부어 예니체리 상당수를 학살했어. 이 사건을 '상서로운 사건'이라 부르지. 그 후 2년여에 거친 잔존 토벌 끝에 살아남은 예니체리들도 수천 명이 처형당했고, 일부는 유배형에 처하거나 신식 군대에 영입됐어. 예니체리랑 라이벌 같던 시파히는 자연스럽게 해산하고 예니체리와 달리 피투성이 내전도 없이 순순히 흩어져 신식군대로 편입되던 거랑 대조적이야. 시파히는 기병대인데, ‘보병대는 반란군이 되었지만, 기병대는 술탄에게 충성했다는 말을 낳게 되었어. 골치 아픈 꿈을 꾸었네. 피곤하다. 더 우울해지려고 한다. 칼리프는 뭘 하고 있나? 어라? 바닥에서 자고 있군. 내 캣타워 바로 밑에서. 내가 내려오길 기다리다 잠들었나 보네. 나도 이 위에서 잠들었다가 괜한 꿈을 꾸었지 뭐야. 예니체리에게 당한 몇백 년 동안의 무능한 술탄이었을 지도 모를 꿈을 또 꾸고 싶지 않아. 누님도 혼자서 아무것도 안 하면 잠 밖에 안 잘 텐데, 과거의 괜한 꿈을 꾸시겠구먼. 누님. 보고 싶습니다. 벌써.
“형님? 깨셨어요? 이제, 그만 내려오시죠. 저 심심한데.”
“너, 계속 캣타워 밑에서 감시하고 있을 셈이냐? 저쪽 가서 놀라고 했잖아?”
“형님? 뭐 나쁜 꿈이라도 꾸셨어요? 기분이 영 언짢으신 것 같네요.”
“잠깐 꾸었는데도 좋지 못한 꿈이야. 네 심정이 어떤지 알 것도 같다. 너 다시 잠들기 싫어했잖아.”
“그랬죠. 며칠 동안 안 자고 버텼잖아요. 결국, 잠들다가 심신이 망가졌지만, 지금 회복해서 말짱해요. 형님도 그러실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다시 잠드는 것이 두렵구나. 그래도 너는 암살당할 두려움 같은 건 모르겠지?”
“엥? 형님, 암살당하는 캐릭터이신 거예요?”
“그럴 것 같아서 놀라서 깼다. 아직 당하진 않았다.”
“허어 참. 제 여동생은 화병으로 죽었는데, 조카는 친할머니에게 살해당하고, 나는 도 닦고. 그래도 내가 직접 당한 적은 없는데 말이에요. 다들 아픈 상처가 있는 거로군요. 술탄이라고 좋은 팔자도 아니에요. 그렇죠?”
“그래. 말만 술탄이지. 꼭두각시들에게 오히려 조종당하고 눈치 봐야 하는 비참한 술탄이 과연 멋진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니? 지금도 식은땀이 나는데, 정말 끔찍하구나.”
“어휴, 형님도 그런 일이 있으실지는 상상도 못 했는데, 걱정되시긴 하겠어요. 형님. 거기 계속 계시지 마시고 내려오셔서 저랑 같이 밥 먹어요. 제 밥도 좀 드세요. 전에 형님 밥 제가 먹었잖아요?”
“야? 네 밥은 맛이 없어서 내가 못 먹어. 나는 육식동물이야. 너는 잡식동물이고. 우리 밥이 훨씬 고퀄리티야. 너 그걸 모르는 거니?”
“그런가요? 저는 다 맛있는데요.”
“그러니까, 너는 잡식동물이라고. 나는 육식동물이고.”
“하여튼, 내려오시라고요. 저 목 아파요.”
“할 수 없군. 내려가마. 네 밥은 안 먹는다. 나는 내 밥만 먹을 거야.”
“알았다고요. 형님.”
(옆집)
“카자르, 너 밥을 통 먹지 않는구나. 왜? 옆집에 못 가서 단식투쟁, 뭐 그런 시위 하냐?”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밥맛이 없다. 이 마녀 같은 집사야. 너는 옆집 착한 총각에게 모욕과 상처를 주었어. 인간이 그러면 쓰나? 천벌 받을 거야. 네가 얼마나 잘난 작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두고 보자.
“그러거나 말거나, 넌 고도비만이라서 단식 좀 하긴 해야 해. 이번 기회에 살 좀 빼라.”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너나 관리 잘해. 너는 뭐 날씬한 줄 아니?
에잉. 소파 위에서 낮잠이나 자련다. 할 일도 없고, 심심한데 뭘 하겠어?
(카자르 이야기)
기원전 499년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가 주도하여 이오니아 반란을 일으켰다.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가 임명한 폭군을 축출하고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의 지원을 받았는데 아테네는 배 20척을, 에레트리아는 5척을 지원했다. 이 반란은 소아시아의 해변과 퀴프로스에까지 번졌지만, 그리스인들에게는 통일된 지도력이 없었고 비-그리스인들은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았다. 페르시아는 3개의 부대를 보내어 이 반란을 진압했다. 해군은 이오니아의 그리스 해군에 의해 패배했지만 육군은 퀴프로스를 점령하고 카리아와 다른 여러 도시들의 항복을 받았다. 결국, 이오니아는 고립되었고 페르시아의 대군에 밀려서 기원전 494년 함락되었다.
...............
“이오니아 반란군을 겨우 진압했어. 아테네를 비롯한 본토 놈들이 이오니아를 원조하는 바람에 우리가 입은 타격이 얼마나 큰지 되갚아줘야 하겠어. 그리스 본토에 전쟁을 선포한다.”
“아버지, 아니, 다리우스 대왕이시어. 이번에 본때를 보여주소서.”
“아들아, 너도 잘 보고 배워서 콧대 높은 그리스 놈들을 완전히 격파하도록 해라. 우선 아버지가 먼저 출전하마.”
“잘 다녀오십시오.”
기원전 493년까지 마지막까지 남은 반란군도 페르시아의 함대에 의해 괴멸되었고 페르시아는 이 기회로 에게해 동쪽의 섬들까지 제국의 판도를 넓혀갔다. 다리우스는 반란이 진압된 후 밀레토스에서는 신전을 약탈하고 주민은 모두 노예로 만들거나 강제로 이주시켰지만, 나머지 반란 도시들은 놀랍게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사위인 마르도니오스를 이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해 뒤처리를 맡겼는데 지역별로 공평한 세금을 부과하고 민주주의도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부활시켰고 죄인들을 각자 자기 고향 도시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다리우스 1세의 이러한 유화책은 그리스 본토에 대한 일종의 선전으로 보인다.
...............
“마르도니오스. 이번엔 자네가 출전해 보게.”
“다리우스 대왕이시어. 맡겨만 주십시오.”
기원전 492년 봄 엄청난 대군이 마르도니오스의 지휘 아래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해군은 에게해 해안의 해안 국가들을 휩쓸었고 육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트라케와 마케도니아로 진군해 들어가서 복속시켰다. 그러나 아토스산에서 페르시아 해군 선단은 폭풍을 만나 몰살했는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300척의 배가 침몰하고 20,000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마르도니오스는 남은 군대를 소아시아로 퇴각시켰다. 트라케의 부족인 브리간스는 퇴각하는 페르시아군을 맞아 격렬하게 저항하여 마드로니우스에게 부상까지 입혔는데 결국 항복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는 다시 원정군을 조직하여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정벌하기 위해 떠났다. 정확한 원정군의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헤로도토스는 600척의 겔리선이라고만 밝혔을 뿐이고 후대의 사가들의 기록은 200,000에서 500,000만까지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페르시아 원정군은 낙소스로 상륙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에레트리아까지 진군하여 6일 만에 에레트리아를 함락시켰다.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신전들은 파괴당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대부분의 에레트리아 주민이 소개되어 끌려갔다고 하는데 10년 후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에 에레트리아에서 7척의 전함은 지원한 것을 보면 상당수 주민이 살아남아 도시를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공략에 나섰다. 아티카 지방 동쪽의 마라톤 평야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향해 진군했다. 페르시아군의 침략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전령을 보내어 지원군을 파견해 달라고 했으나 스파르타는 종교적인 이유로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아테네는 자력으로 방위에 나섰다.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군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아테네를 공략했는데 당시 아테네의 병력은 약 1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육지에서 두 세력은 마라톤 평야에서 싸웠는데 아테네군은 길게 보병을 배치하고 좌우 양 날개에 최정예군을 배치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아테네군의 중앙이 밀렸으나 좌우의 부대가 페르시아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했다. 아테네군의 전사자는 200명 남짓, 페르시아군은 6,400이 전사했다고 한다. 아테네군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바다 쪽에서 아테네 해군도 페르시아의 함대를 막는 데 성공하여 페르시아는 후퇴했다. 이 전투의 승전보를 가지고 아테네로 달려온 한 병사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이것이 현대 올림픽 마라톤의 유래가 된다.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이제 그리스 놈들은 서로 힘을 합해서 싸우면 대페르시아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과 신념을 가지게 되었어. 우리에게 굴복했던 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편으로 돌아섰다. 해전은 그렇다 치고 정규군 육군이 패한 적은 처음 있는 일이야. 마라톤 전투는 우리의 유일한 패전이며,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자존심이 바닥이야. 이제 다시 이오니아계 그리스 놈들이 다시 일어설지도 모를 일이야. 대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에게 이런 수치를 안기다니.”
..............
“마라톤에서 패전한지 10년, 그 새 휴전하는 동안 아버지도 돌아가셨어, 이 크세르크세스가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10년 휴전했으면 됐지.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 그리스를 친다. 2차 그리스 원정이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가 친히 이끄는 페르시아의 대군은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원정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보병만 170만 명, 기병 8만 명, 그리스의 페르시아 동맹군 32만 명 등 총 260만 명 이상의 규모라고 적고 있으나, 후대의 사가들은 80만 명이라고 적었고, 현대의 연구자들은 9만에서 30만 명으로 본다.
페르시아의 해군은 폭풍을 만나 손실 입었고 아르테미시온에서 그리스 해군에게 저지당했고 페르시아 육군은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 300명의 병사와 그리스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페르시아 대군은 협곡에서 2일 동안 저지당하면서 큰 손실을 보았는데 3일째 되는 날, 그리스의 한 배신자가 협곡을 우회하는 샛길을 페르시아군에게 알려주어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 정면 돌파를 피하고 우회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의 300명과 700명의 테스피아인, 포로로 잡혀있던 400명의 테베인, 900명의 헬롯을 제외한 다른 그리스인들을 철수시키고 그곳에서 전원이 전사하였다.
“이 지독한 레오니다스 놈. 일주일이나 우리 발을 묶다니. 용서할 수 없다. 격투에서는 우리 군사도 피해가 컸어. 역시 스파르타 놈들은 육박전에 강해. 결국, 화살로 고슴도치를 만들어서 전투를 끝냈구나. 에잉. 예우고 뭐고 없다. 목을 자르고 십자가형에 처해라.”
“옛, 크세르크세스 전하.”
기원전 480년 9월경 아테네에 입성하였는데 아테네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것은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의 작전으로 수도를 방어하기보다는 비워두고 시민과 병력을 살라미스섬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그새 우리는 보이오티아와 아티케를 정복할 수 있었다.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섬으로 물러났다. 살라미스에서 결판을 내자.”
그러나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의 속임수로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협에 진입하여 두 입구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해협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군함들이 이동하려 하면서 흩어져버려 오히려 이들의 수적 우세는 장애가 되어버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 함대는 전열을 이루어 페르시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최소한 200여 척이 넘는 페르시아 함선이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대패입니다. 살라미스 해전이 결정적입니다. 퇴각해야 합니다. 전하.”
“분하지만 할 수 없다. 마르도니오스에게 육군을 맡기고 우리는 페르시아 함대와 함께 철수한다.”
그러나 이듬해 그리스에 남은 페르시아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격퇴당하고, 미칼레 전투에서 페르시아 해군이 무너졌다. 그 뒤 페르시아는 더는 그리스 본토를 정복할 시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전환점이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의 폴리스 연합은 반격에 나섰다. 역사가들은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가 고대 그리스를 발전케 하였으며, 그 자체로 '서구 문명'을 확대하여 살리미스 해전은 인류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투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당시의 아테네는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이 전투의 승리에 크게 공헌한 테미스토클레스는 평정이 시작된 안드로스섬을 포위하여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페르시아 측에 선 다른 도서 지역의 폴리스에서도 금품을 뜯어냈다고 전한다.
또한,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그리스 함대가 월동을 위해 파가사이에 정박해 있었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이것을 불태우고 아테네 함대만을 남겨두었다고 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함대의 건조 창시자였으며, 또한 이 전투 후 외항이 되는 페이라이에우스(현재의 피레아스)를 정비하고, 이것과 아테네 시가지를 성벽으로 연결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독선적인 태도를 참주에 대한 욕망으로 간주하고, 경계한 아테네 시민에 의해 도편추방이 되었고, 게다가 반역죄로 기소당했기 때문에 적국인 페르시아로 피신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추방으로 고결한 인물로 알려진 아리스테이데스가 아테네의 지도자가 되었고, 페르시아 침략에 대한 대비책으로 폴리스의 연합체인 델로스 동맹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그는 군함을 제공할 수 없는 폴리스에 대해서는 대신 군비를 납부하도록 하였으며, 이후 그렇게 지급된 상납금은 아테네 독점하는 결과가 되어, 아테네가 부상할 수 있는 자금원이 되었다.
이후 30년간 크고 작은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에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아테네의 주도로 새로 결성된 델로스 동맹은 아나톨리아 해안에 있는 이오니아계 도시국가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계속 공세를 펼쳤는데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다.
기원전 465년, 크세르크세스가 측근 아르타바노스에게 암살되었다.
아악. 이게 무슨 꿈이야?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 아냐? 2,500년이나 된 전쟁이 왜 나온 것이지? 설마 내가 크세르크세스? 게다가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는커녕 이후 전쟁에서 대패하고 암살까지 당했단 말인가? 원통하도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카아악. 퉤. 세상에 정말 피를 토했어. 얼마나 원통했으면 지금까지도 피를 토하는 걸까? 이 전쟁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집필해서 지금까지도 애독되는 역사서 중 하나야. 하지만 그리스인이 집필했고,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대패의 역사이니까,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어서 에우리메돈 전투,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팜프레미스 전투, 멤피스 포위전이 이어졌지만, 양측 모두 결정적인 전과를 거두지 못했어. 결국, 기원전 448년경에는 마침내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동맹국과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사이에 ‘칼리아스 평화조약’이 맺어지면서 전쟁은 끝이 나게 되지. 내가 겪은 결과는 아니지만. 하지만 어째서 이런 과거를 떠올리게 되었을까? 피까지 다 토하게 만들고 말이야. 정말 내가 곧 떠나려나 보구나. 밖에 눈이 내리고 있군. 춥고 긴 겨울인데, 따뜻한 봄이 오는 걸 보고 싶구나. 저 마녀 집사는 내가 피를 토하건 말건 아무 관심도 없지? 술탄군과 칼리프군은 잘 지내고 있을까? 자네들 보고 싶구먼. 눈이 많이 쌓이네. 춥다........
(우리 집)
“형님, 이리 와 보세요. 밖에 눈이 내리고 있어요.”
“그래? 정말이네. 함박눈이야. 많이 쌓이겠어.”
“우리 집사, 퇴근길이 미끄러워 고생하겠어요.”
“정말이지, 넌 정말로 집사를 사랑하는구나. 대단하다. 나는 경치가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말이지.”
“하하. 형님도 참, 우리를 이렇게 호강시키느라 밖에서 고생해서 돈 벌어오잖아요? 진짜 아빠 같아요. 은혜를 갚아야 할 텐데.”
“나는 우리 집 집사보다도 옆집에 계신 누님이 더 걱정이야. 그 마녀 집사가 챙겨주지도 않는데, 이렇게 추운 겨울엔 누님이 더 우울할 거야. 괜찮으시려나?”
“누님은 지금까지 10년 동안 거의 혼자 외롭게 사셨으니까, 그 생활이 익숙하시겠죠. 봄이 되어서 베란다 문이 열리게 되면 인사드리러 갈 수 있으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야, 봄이 오려면 게다가 창문을 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려면 적어도 4-5개월은 지나야 해.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냐?”
“그래도 별수 없잖아요. 우리가 베란다 창문을 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추운 겨울에 설사 문을 연다고 해도 집사에게 혼날 텐데, 난방비 폭탄 맞는다고. 우리가 난방비를 보태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 폐를 끼칠 순 없어요.”
“그래.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래도 베란다 벽을 뚫었을 땐 정말 신나고 즐거웠었는데, 우리 셋 정말 재미있게 지내지 않았니? 너의 전생 드라마도 참 재미있었고.”
“형님, 누님은 재미있으셨는지는 몰라도 나는 괴로웠다고요. 뭐, 지금은 정말 꿈결처럼 느껴지지만, 당시엔 심각했었죠.”
“나도 얼마 전 암살당할까 봐 무서워서 잠도 못 자곤 했었지만, 이제는 뭐 그러려니 한다. 당했으면 지금 뭐 어쩌겠어? 악몽이려니 하는 거지.”
“그래요. 다들 힘들게 살았다는 거죠. 인간사가 동물사보다 훨씬 길고 고통스러우니까요. 동물의 삶은 그냥 본능만 충족시키면 되는 단순한 삶인 것 같아요. 다른 동물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그래도 사람의 삶과는 비교가 안 되죠.”
“그러게 말이다. 그새 해가 졌어. 곧 집사가 들어 올 거야.”
“자자, 발소리가 들리면 바로 마중 나가죠. 오늘은 좀 살갑게 인사해 봐요. 형님.”
“또 그 소리냐? 스킨십은 안 한다니까 그러네.”
(덜컥)
“얘들아, 아빠 왔다.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려서 길이 미끄러워 혼났어. 오다가 두 번이나 미끄러졌다고, 에잉. 너희들은 따뜻한 집 안에서 놀고 있었지? 좋겠다. 나도 너희들처럼 집에서 뒹굴면서 공짜로 먹고 자고 하면 좋겠다. 어, 추워. 밖은 정말 춥고 미끄럽고 난리도 아니야. 차는 또 얼마나 막히던지. 내일 출근도 걱정이다.”
“멍멍, 컹컹, 왈왈.”
“어서 오세요. 집사 아빠, 자자, 형님도 어서 인사드려요. 저처럼 꼬리라도 흔드시라고요.”
“야옹, 야옹.”
“시끄러워. 내가 알아서 해.”
“이놈들이 오늘은 마중 인사가 긴데?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나. 눈 내리는 것 집안에서 구경만 하는 것은 괜찮긴 하지. 나도 집에서 눈 구경하면서 뒹굴뒹굴하고 싶구나. 그래, 어서 밥 먹자. 금방 씻고 나올게.”
(옆집)
“카자르? 이게 웬일이야? 너 피 토했니? 이럴 수가. 당장 병원에 가자.”
(동물병원)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카자르가 피를 토했어요. 좀 봐주세요.”
“아? 전에 왔던 그 고양이군요. 그새 살이 더 쪘네요. 웬일이지? 게다가 피를 토했다고요?”
“네, 밥 먹으러 나왔다가 얘 밥이 있나 없나 보러 갔는데, 그 옆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었어요.”
“자세히 진찰을 해 봐야겠어요. 사진도 찍어보고, 좀 기다리세요.”
(잠시 후)
“카자르의 위가 헐었어요. 그래서 피를 토한 것 같아요. 뭔가 못 먹을 걸 먹었나요?”
“그런 건 없어요. 사료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아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요즘 거의 안 먹어요. 사료가 그대로 쌓여 있어요.”
“저번보다 기력이 많이 약해지고, 제대로 먹지도 않았네요. 그런데 살은 찌다니. 위가 비어서 위산이 위를 녹였나 보군요. 혹시 이 고양이 단식하나요?”
“그러고 보니, 요즘 통 안 먹어서, 다이어트하는 줄 알고 그냥 내버려 뒀어요. 살이 너무 찌길래 좀 빼야 할 것 같아서.”
“고양이가 단식을 다 하다니, 놀라운 일인데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요? 정신적인 문제 같은데, 우울증이라든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글 쓰는 데 집중해서 잘 돌보지는 못해요. 주로 저 혼자 있다가 먹다가 자곤 하죠. 하지만 그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10년 넘게 하던 생활인데, 굳이 지금 우울증인 건가요?”
“그래도 저번에 왔을 때는 컨디션도 좋고 기분도 좋아 보였는데요. 지금과는 딴판이었죠.”
“그러고 보니 그때는 옆집 고양이와 개와 매일 같이 놀았던 시기이긴 한데, 그 시기가 그리 긴 것도 아니었어요. 몇 달 그렇게 지냈었죠. 그 이후로는 제가 못 가게 해서 다시 예전처럼 혼자 지냈고요.”
“그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요? 다시 같이 놀 수는 없나요? 이러다간 이 고양이, 단식 끝에 굶어 죽거나 우울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겠는데요. 잘 생각해보세요. 그럼, 오늘은 위장약만 처방해 드리죠. 하지만 이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에요. 근본 대책은 그쪽에서 해결하셔야 할 것 같군요.”
(병원 밖)
“카자르. 너 옆집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지금 나한테 단식투쟁, 시위하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하지만, 카자르, 내가 옆집 총각한테 그러고 나와서 다시 말하러 가기가 힘들어. 나도 자존심이 있다고. 지금 와서 우리 카자르가 아파서 그러니, 다시 베란다 벽을 뚫고 서로 왕래하게 하면 어떨까요? 라고 부탁할 순 없어. 그 정도는 너도 이해해라. 지금까지 너 혼자서도 잘 놀았잖아? 그러니 이제 다시 밥도 제대로 먹고, 예전처럼 지내보도록 노력해 봐.”
이 마녀. 정말 내가 죽길 바라는 것 같군. 평생 저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자. 그러니 지금까지 독거 노처녀로 늙었지. 네가 쓴 책은 제대로 팔리기는 하냐? 너 같은 작가가 쓴 글, 누가 읽어주냐? 자기 고양이 한 마리도 제대로 배려 못 하는데 무슨 공감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겠어? 취직이 안 되니까, 작가 나부랭이나 하는 거지. 누가 너 같은 걸 데려다가 쓰겠냐? 커억, 컥.
“어라? 카자르. 또 피를 토했어?”
“컥, 커억. 컥.”
“선생님, 얘가 다시 피를 토했어요. 이번엔 많이요.”
“어라. 그새 또 토했어요? 정말 심각한데, 나가자마자 다시 들어오다니. 이런. 상태가 심각한데요. 여기 며칠 입원시키시죠. 링거라도 꽂아야겠어요. 진정제도 필요한 것 같고. 영양제도 좀 맞아야겠군요. 오늘은 두고 가시죠. 며칠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선생님.”
(늦은 저녁)
“띵똥, 띵똥”
“누구세요? 어라. 작가님이 우리 집엔 또 웬일이시죠? 또 우리 집, 술탄이나 칼리프가 거슬리는 행동을 했나요? 대낮에 시끄럽게 짖었다던가 뭐 그런 거 항의하러 오셨나요?”
“그게 아니라, 우리 카자르가......”
“댁 고양이가 뭐요? 우리 술탄과 칼리프가 보고 싶대요?”
“방금.... 죽었어요. 지금 장례 치르러 가야 하는데, 혹시 함께 가주실 수 있나요?”
“뭐라고요? 댁 고양이가 죽었어요?”
“야옹? 야옹. 야옹?”
“뭐라고? 누님이. 어찌 되었다고?
“멍멍, 멍, 컹?”
“누님이, 정말로, 가셨어요?”
“전에는 제가 실례가 많았어요. 옆집 총각. 카자르가 옆집에 못 가서 우울증에 단식투쟁을 하더니 피를 토하고 그만 가버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같이 놀도록 둬야 했는데, 제 잘못이에요.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어요.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지금 데리러 가는 길이에요. 제가 지금 팔, 다리가 떨려서 운전을 못 하겠어요. 옆집 총각이 대신 운전을 해주면 좋겠는데.”
“작가님, 미안한데, 저도 운전을 못 해서요. 대중교통 이용해요. 택시를 타시죠. 제가 잡아드릴게요.”
“야옹, 야옹, 야옹”
나도 데려가 줘. 누님을 뵈어야겠어. 집사야.
“멍멍, 멍”
저도요. 집사님.
“안돼. 너희들은 집에 있어. 너희들까지 데려가면 정신 사나워서 안 돼. 알았지? 마음이 아파도 집에서 애도하고 있어. 그리고 그런 장면 보지 않는 것이 나아. 아빠 혼자 다녀올게. 집 잘 보고 있어. 난방 온도도 올려둘 테니까, 따뜻하게 있어.”
(술탄과 칼리프만 남음)
“엉엉엉, 누님, 그리 가시면 어떻게 해요? 그때 그 말이 유언이었어요? 엉엉엉.”
“형님, 저도 마음이 아파요. 누님이 정말 그리 가실 줄 몰랐어요. 생각보다 우울증이 심각하셨나 보네요. 저도 봄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연말도 되지 않아서 이런 일이. 흑흑.”
“칼리프, 나도 왠지 불안했어. 누님이 걱정되고 신경 쓰였어. 그리고 예전에 누님이 하시던 말씀이 왠지 마지막을 예견하시는 듯했거든. 너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계속 불안했던 거야.”
“형님, 그랬군요. 나는 형님이 지나치게 걱정하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형님, 뭔가 예감이 있으셨군요.”
“그래. 나는 집사보다 누님이 항상 신경 쓰였어. 너보다는 내가 영감이 뛰어난 건 확실해. 이제 우리 둘밖에 안 남았으니까,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자. 칼리프. 흑흑.”
“형님, 형님은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해요. 저는 아직 한 살도 못 되었는데, 나중에 형님까지 가시면 저는 어떻게 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서워요. 엉엉엉.”
“이런, 칼리프. 너 지금 내가 하늘나라에 갈까 봐 걱정하는 거니? 나는 아직 5살이야. 아직 10년은 끄떡없어.”
“누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이렇게 갑자기 가셨잖아요? 누님도 10살밖에 안 되었는데, 애완동물은 15년 20년 산다고 형님이 그러셨잖아요? 그런데 누님은 겨우 10년 사시다 가셨네요. 엉엉엉.”
“이런, 네가 혼자 남을 것까지 생각할 줄이야. 알았어. 그래그래. 내가 정말 오래오래 살아서 너를 지켜줄 테니까, 너야말로 아프거나 하지 말아라. 나도 너 두고 가는 것이 마음이 편치가 않구나. 그리고 나는 아직 쌩쌩한 중년이야. 할아버지가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어. 미리 걱정할 필요 없어요. 자자. 진정하고. 토닥토닥.”
“형님, 다음 생에 누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서로 어떻게 만나게 되어도 못 알아보겠죠?”
“우리가 전생을 기억하듯이 다시 사람이 되어서도 지금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인간들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해. 거의 다 잊어버린다고. 하지만 전생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는 것은 확실한데, 누구였는지는 모를 뿐이지.”
“다음에 누님을 만나면 정말 잘해 드려야지. 누님 전생 이야기도 더 듣고 싶었는데, 다음에 사람으로 만나도 전생 이야기는 못 들을 거잖아요?”
“그야 그렇지. 나도 고대 전생까지는 억지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 고대사는 말이야. 더더욱 잔인하고 고생스러워. 그리고 그렇게 고대 전생은 거의 죽기 전에 본다고 하더라. 너는 아직 몇천 년 전은 떠올리지 않았지?”
“네, 1,300년 전쯤이 다예요. 그리고 저는 아직 한 살도 안 되었는데, 그런 고대가 보이겠어요? 저야말로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서 다 죽어가는 와중에 떠오르겠죠? 참, 혹시 누님은 가시기 전에 몇천 년 전 고대 전생을 보고 가신 걸까요?”
“아마도, 내 추측이 맞으면 말이지. 보고 가셨을 거야.”
“그렇군요. 그럼 그런 상황이 오면 스스로 알 수 있겠네요. 곧 떠나야 한다는 걸?”
“사람들보다 우리 동물들이 죽음의 예감은 더 빠르고 정확하고 확실하게 오는 거니까. 그것은 사람보다 낫지. 동물들이 더 영감이 뛰어나고 갈 준비도 하게 되는 거지. 위험을 감지하고 피난 가고 하는 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배워야 해.”
“정말, 형님은 모르시는 게 없어요. 형님과 함께 지내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그걸 알면 됐다. 우리 누님을 위해 묵념하자. 칼리프.”
“네, 형님.”
(다음 날)
“얘들아, 아빠 왔다. 카자르를 화장하고 무지개 나라로 보내주고 왔어. 너희들은 안 가길 잘했어. 그런 곳은 당사자가 죽었을 때나 가는 곳이야. 나도 기분이 매우 언짢아. 나도 언젠가는 그런 곳에 가야 한다는 것 아냐? 정말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데 말이지.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잘 보고 배웠으니까, 내가 닥치면 조용히 알아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옆집 작가는 평소에 좀 잘해주지. 죽고 나서 대성통곡을 하더라. 그러게 벽을 막는 건 아니었어. 그 여자 아니었으면 너희들 서로 왕래하고 잘 지낼 수 있었는데, 내가 좀 참고 양보할 걸 그랬나? 아냐. 그건 아니야. 옆집 여자가 너무 경우가 없었어. 그 상황에서 내가 양보했다면 나는 사람도 아니었어. 남자였다면 한 대 날렸을 거야. 손톱이 아플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겨우 참았다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벽을 뚫고 놀러 오라고 할 수 있었겠니?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피가 솟구치지만, 그래도 오늘 울고불고하는 걸 보니 기분이 썩 좋진 않더라.”
“야옹, 야옹, 야옹.”
집사야. 잘했어. 그 여자 때문에 간 것이 아니고 카자르 누님, 조문하고 왔다고 생각해.
“멍멍, 멍, 컹.”
집사님. 나중에 우리 때문에 다시 그곳에 가시겠네요? 흑흑.
“그래. 얘들아. 너희들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나랑 같이 살자. 내가 여자친구가 없는 것은 좀 아쉽지만, 그래도 옆집 마녀 같은 여자랑 사느니 너희들이랑 같이 사는 것이 훨씬 낫다. 설마 너희들 내가 옆집 여자랑 사이가 좋아졌을 거라는 착각을 한 건 아니지? 걱정하지 마. 절대 그런 일 없으니까. 인류애의 차원에서 같이 갔다 온 것뿐이야. 그러고 보니 옆집 여자는 가족도 없는지 아무 데도 전화나 연락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어. 진짜 외톨이 같아 보였어. 아니지. 내가 왜 옆집 여자를 걱정하는 거지? 미쳤나 보군.”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미쳤냐? 옆집 여자랑 사이가 좋아지게? 그 여자는 철천지원수야. 원수. 누님을 죽인 원수라고. 그런 여자와 사이가 좋아지게 되면 내가 혀를 깨물 거야. 아니지. 네 얼굴을 깨물 거야.
“피곤하다. 쉬지도 못하고 곧 날이 새겠네. 씻고 바로 출근 준비해야겠어. 지금 잠들면 못 일어날 테니. 후아. 그냥 일찍 차 안 막힐 때 출근하련다. 길도 얼어서 미끄럽고, 밥은 차려놨으니까, 알아서 먹고, 집 잘 보고 있어.”
(술탄과 칼리프만 남음)
“형님, 우리 집사는 잠도 못 자고 새벽같이 출근했네요. 너무 안됐어요.”
“역시나 너는 집사가 우선이구나. 나는 아직도 누님 생각 중인데.”
“형님, 누님은 가신 분이고, 집사는 우리 가족이고 우리를 지켜주는 보호자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어요?”
“그래. 칼리프. 나도 너처럼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여튼 옆집 여자가 한 번만 더 우리 집에 오면 내가 발톱과 이를 전부 사용해서라도 그 여자 면상을 갈겨 주겠어. 절대 용서 못 해.”
“후덜덜. 형님은 한다면 하는 분인데, 옆집 여자, 그 뚱한 얼굴에 흠집까지 나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하지만 형님, 그런 일을 하면 책임은 우리 집사가 져야 해요. 그 마녀 성격에 엄청난 배상비를 요구할걸요? 그리고 가장 끔찍한 형벌은 그 여자가 얼굴을 망쳐서 시집도 못 가게 되었다고 우리 집사보고 평생 책임지라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 마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에요. 어휴, 소름 끼쳐. 후덜덜.”
“그렇구나. 그 생각까지는 못했어. 네가 나보다 생각이 깊구나.”
“그야. 저는 항상 집사 우선으로 생각하니까, 형님과는 다르죠.”
“그래. 내가 아무리 집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되게 할 순 없어. 하지만 이 원한은 어떻게 풀지?”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요? 우리 집사가 다치거나 손해를 보지 않고, 우리가 그 마녀를 처절하게 응징할 수 있는?”
“머리를 쥐어 짜보자. 칼리프. 이럴 때 쓰라고 머리를 달고 있는 거야.”
“허. 나쁜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형님.”
“야. 나는 뭐 나쁜 짓 하고 싶어서 하냐? 누님의 복수를 해야 할 것 아냐?”
“아. 글쎄. 벽도 막혀 있고, 우리가 대문을 열고, 닫고 하지도 못하고, 그리고 대문 비밀번호도 모르잖아요? 당장 우리가 여기를 벗어나서 옆집에 갈 방법이 있어요? 그리고 옆집에 간들 무슨 일을 하겠어요? 형님? 우리가 그 어떤 공격을 하건, 집안을 뒤집어 놓든, 그 집 사료를 먹든, 다 우리 집사가 물어내야 할 텐데요.”
“아악. 돌아버리겠네. 자자. 이럴 땐 개의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전생의 사람이었을 때를 생각해. 자자. 우리는 지금 사람이다. 사람이다.”
“언제는 사람 아니고 개라고, 정신 차리라고 하셨으면서.”
“시끄럿. 지금은 사람이야. 머리를 쓸 때는 IQ가 좋은 개체인 상태로 해야 할 것 아냐?”
“네네. 형님. 고민해볼게요. 좋은 생각이 날지는 의문이지만.”
“나는 캣타워로 올라갈 테니 너는 너 좋은 자리에서 궁리해 봐라. 명상해도 좋고. 하여튼 지금은 사람의 상태로 돌입해. 알았지?”
“네, 형님. 시도는 해볼게요.”
(잠시 후)
“형님, 좋은 생각이 났어요. 제가 다시 베란다 벽을 뚫고 형님이 들어가셔서 옆집 여자가 잘 때 들어가서 어질러 놓는 것은 어때요? 물론 구멍은 작게 내야겠죠. 형님만 통과하실 수 있도록. 형님은 누님보다 날씬하시니까, 저번보다 확실히 작게 뚫어도 되는데, 거의 표시도 안날 걸요?”
“어휴, 그걸 생각한 거라고 하고 있냐? 어질러져 있으면 그 여자가 뒤져볼 테고 벽의 구멍을 발견하면 바로 우리 집사에게 퍼붓고 손해배상 청구를 할 텐데 말이야.”
“그런가? 그럼 저는 이 이상 모르겠어요. 형님이 알아서 구상하시든지, 저는 복수고 뭐고 귀찮아요. 저는 그냥 단순한 개로 살래요. 머리 아파서요.”
“됐다. 너한테 뭘 부탁하겠니? 하긴 우리가 아무리 누님 복수를 해주고 싶어도 우리 능력 밖의 일인걸. 명복이나 빌면서 내생에 다시 만나길 기원해야지.”
“그런데 형님, 우리, 집사가 어서 좋은 아가씨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어때요?”
“그거야말로 내가 전혀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인데, 너는 그래도 주말마다 집사랑 밖에 산책이라도 하잖아? 그때 다른 산책녀 중에서 괜찮은 여자가 있는지 잘 보고 어떻게 하든 접근을 해서 집사가 그 여자랑 말 붙일 기회를 만들어주려무나.”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나는 정말 머리가 나쁜 건가. 왜 그런 생각 못 했지? 형님은 역시 천재예요.”
“나는 밖에 나가질 않으니까, 집사를 도와줄 방법이 없어. 그건 네 몫이야. 그리고 나보다는 네가 더 집사를 사랑하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서 진정으로 도울 수 있을 거야. 괜찮은 여자를 물색해 봐.”
“알았어요. 이제는 땅만 보고 다니지 않고, 사람들을 잘 살펴볼게요.”
(며칠 후)
“칼리프, 산책가자. 그러고 보니 저번 주는 길도 얼고 춥고 옆집에 우환도 있었고, 내가 피곤해서 널 산책도 못 시켜줘서 미안했다. 오늘은 신나게 뛰어 보자. 나도 운동 부족이라서 좀 뛰어야 할 것 같아.”
“멍. 멍. 멍. 멍. 멍.”
좋아요. 어서 나가요. 나도 오늘부터는 눈에 불을 켜고 살피겠어요. 좋은 아가씨를 찾아줄게요. 집사님.
어디 보자. 괜찮은 여자란 어디 없나? 그런데 괜찮은 여잔 어떤 여자지? 다들 두꺼운 옷에다 모자에 장갑까지 중무장하고 있어 얼굴 보기도 쉽지 않군. 우리 집사는 날씬한 여자를 좋아할까? 통통한 여자를 좋아할까? 다들 옷이 두꺼워서 몸매는 잘 모르겠고, 어떤 스타일을 선호하는지 좀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형님은 아시려나? 우선 젊은 여자에게 접근해야겠다. 앗! 저 여자 괜찮아 보이네.
“멍멍. 멍.”
“어머나. 너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니?”
“이런. 죄송합니다. 얘가 절대 남에게 폐 끼치는 놈이 아닌데, 너 왜 그래? 왜 낯선 분에게 짖고 그러니? 놀라셨잖아?”
“아녜요. 놀라진 않았어요. 이 강아지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너 이 여자분 아는 분이야? 아니지. 너는 친구 집에서 출생한 후 우리 집에 온 것 말고는 아무 곳도 안 가고 아무도 만난 사람이 없잖아? 옆집 작가만 빼고.”
“아? 옆집에 작가님이 사시나 보죠? 어느 아파트 사시는데요?”
“보람 아파트요. 거기 아세요?”
“보람 아파트?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혹시 보람 아파트에 사시는 유명한 여류소설가 변해신 씨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아 그러고 보니 그분 변 씨였던 것은 같은데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분이 유명한 분인가요?”
“아니? 요즘 그분 책 안 읽는 사람이 없는데, 모르시나 봐요? 바로 옆집에 사신다면서요? 나 같으면 매일 찾아가서 사인도 받고 책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난리를 치겠구먼. 세상에나 저랑 같이 변 작가님 만날 수는 없나요?”
“아, 이런. 저는 작가님을 방해하고 싶지 않고요. 그분 종일 방해받지 않고 작업하시는 걸 좋아해서요. 주위가 신경 쓰이면 불편해하세요.”
“어머나? 그래도 만나시긴 하잖아요? 다음에 변 작가님 사인이나 받아서 저 좀 주시면 안 돼요? 제 연락처를 드릴게요. 사인을 받거나 뭐 이왕이면 작가님 책에 직접 사인받으면 더 좋은데, 지금 갖고 오질 않아서. 다음에 만나면 책을 드릴 테니 사인 좀 받아다 주세요.”
“음. 뭐, 그러시든가요. 저는 주말 이 시간에 이 녀석과 산책을 나오거든요. 다음 주에 이 시간 이 장소에 오시면 받아다 드리죠. 그런데 작가님께 찾아 가본 적은 없는데, 주로 작가님이 우리 집에 오시지.”
“어마? 정말요? 그분 낯을 가리셔서 다른 사람과 거의 왕래를 안 한다던데, 베일에 싸인 작가라서 더 인기가 많거든요. 팬들이 찾아가고 싶어도 못 오게 하셔서요. 도와주세요.”
“그럼 다음 주에 이곳에서 뵙죠. 책 몇 권 갖고 오실 건데요?”
“변 작가님 책은 10권이나 출판되었는데, 다 갖고 오면 무거우시려나? 가방에 담아 드릴게요. 부탁해요. 초면에 이런 부탁드려서 미안합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 제가 점심 살게요. 이 근처 가고 싶은 데라도 있으세요?”
“제가 지금 개를 데리고 있어서 아무 곳에 가기 힘든데....”
“멍. 멍. 멍.”
“보세요. 이 강아지도 같이 밥 먹으러 가라고 하는데요. 그렇지? 멍멍아?”
“멍멍멍.”
“보세요. 꼬리까지 흔들고, 기뻐하네요. 가세요. 맛있는 거 사드릴 테니 다음 주에 제 책들 받아다 전부 사인받아다 주세요. 개는 문밖 기둥이나 나무에 잠시 메어 두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잘 그러거든요. 제 단골집으로 갈게요. 거기가 편하고 좋아요.”
“네, 그러세요.”
(근처 식당)
“어때요? 분위기 괜찮죠?”
“네. 처음 와봤네요. 이 동네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저도 개 키워요. 그래서 여기 가끔 와요. 오늘은 안 데리고 왔는데, 다음 주엔 저도 개 데리고 나올게요. 참 그 개 이름은 뭐예요?”
“칼리프요.”
“칼리프? 설마 이슬람 정치와 종교 대 지도자 그 칼리프?”
“네, 맞아요. 집에 고양이도 있는데 그 녀석은 술탄이에요.”
“아하? 그러시구나. 혹시 종교가 이슬람교이신 거예요?”
“아니요. 제가 서양사를 전공했는데, 이슬람 쪽 나라를 주로 했어요. 칼리프와 술탄에 관련한 석사 논문을 썼었죠.”
“아하. 그러시구나. 그럼 지금 하시는 일이?”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회사에서 역사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어요. 돈을 좀 벌면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싶어요.”
“사학과는 석, 박사를 이수해도 취업이 잘 안된다던데. 그리고 교수임용은 더 힘들고, 나이도 어느 정도 되어 보이시는데, 직장 그만두고 공부만 하셔도 될까요? 아, 이런 초면에 실례가 많네요. 저도 소개를 드려야죠. 저는 공무원이고요. 여기 구청에서 근무해요. 얼마 전에 8급 되었어요. 저도 사범대 출신인데 임용고시를 준비하다가 저도 전공과목이 생물이라서 자리가 별로 없어서 그만두고 9급 공무원 시험으로 바꿔서 공부해서 겨우 붙었죠. 몇 년 되었네요. 시간이 지나니까 진급도 되고 호봉도 저절로 오르고 장기근무를 해야 본전을 뽑을 거라서 정년까지 다니려고요.”
“아? 공무원이시구나. 선생님을 하셔도 잘하실 것 같은데요. 사교성도 좋으시고, 애들도 잘 다루실 것 같은데.”
“애들? 아, 요즘 애들 너무 힘들어서 임용고시 끝까지 했던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다 혈압이 올라요. 친구도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힘들게 임용에 붙었는데, 학교에서 애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교사를 왜 했을까 하고 후회한다고 해요. 말도 안 들을 뿐 아니라 친구 말로는 교사 알기를 개똥이래요. 학생들도 가관인데, 학부모는 한술 더 뜬다고 하네요. 자괴감이 들어서 사표를 품고 다닌다고. 그나마 유일한 희망은 방학이라고. 방학이 없었으면 벌써 사표 냈다고 해요. 그 말을 듣고는 저는 임용고시에서 공무원 시험으로 바꾸길 잘한 것 같아요. 이 일도 그리 보람 있는 일은 아니지만요.”
“다들 힘들게 사시는군요. 저는 평범한 회사에서 평범한 사무직 일을 하고 있어요. 이왕이면 학교에서 행정직이라고 하고 싶었는데, 학교에서는 절 뽑질 않아서요. 지금 직장도 만족해요. 뽑아준 것이 고맙죠. 퇴근 시간도 제대로 지켜주고. 야근할 일은 그리 많지 않거든요. 혹시 있어도 재택근무로 할 수 있고. 저도 술탄, 칼리프 때문에 집을 비우지는 못해서요. 출퇴근 시간이 정확한 곳이 좋아요.”
“아. 밥이 나왔네요. 점심 특선, 이 메뉴가 제일 괜찮아요. 오늘은 같이 이것 먹고 다음 주는 다른 걸 먹든지.”
“네. 맛있어 보이네요.”
(우리 집)
“칼리프? 오늘 집사랑 산책이 길던데, 뭐 좋은 일 있었어?”
“형님. 제가 오늘 한 건 했어요. 아가씨한테 접근해서 같이 식사하도록 만들었어요. 저는 문밖에 매여 있었지만, 안을 보니 분위기가 좋았어요. 진지하게 대화하던데요? 옆집 여자에게 가장 큰 복수는 우리 집사가 정말 좋은 여자를 만나서 행복해지는 것이에요. 안 그래요? 형님?”
“그렇구나. 옆집 마녀가 우리 집사를 모욕하고 수치심을 안겼는데 우리 집사가 자기보다 더 근사한 여자 만나서 행복해지면 그보다 더 좋은 복수는 없지. 잘했어. 그래. 잘 되어갈 것 같으냐?”
“그럼요. 다음에도 다시 만나기로 했는 걸요. 그런데 그 이유가 옆집 여자이기 때문이긴 한데, 그것이 좀 찝찝하긴 해요.”
“뭐라고? 거기서 옆집 여자가 왜 나오냐?”
“오늘 만난 아가씨가 옆집 마녀의 팬이래요. 그래서 그 마녀의 책을 전부 갖고 와서 사인을 받아달라고 오늘 부탁하면서 밥을 산 거였어요.”
“그럴 수가? 하긴 마녀도 뭔가 우리 집사에게 도움이 되어야지. 그렇게라도 해야 그 죄가 좀 가벼워지겠지?”
“하여튼 다음 주 같이 만나서 밥 먹기로 했으니까요. 잘 될 것 같아요.”
(다음 주 공원)
“안녕하세요? 칼리프 아빠?”
“네. 공무원님. 성함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저는 밍키 엄마예요. 자, 밍키. 칼리프 아빠에게 인사드리렴.”
“왈왈.”
“소형 견이군요. 우리 칼리프는 진돗개라서 덩치가 좀 크죠?”
“우리 서로 애들 이름으로 부르죠. 그게 더 편하지 않아요?”
“그러시고 싶으시다면 뭐, 그러죠. 밍키 엄마.”
“네, 칼리프 아빠. 자 여기 종이가방에 책 들었고요. 좀 무겁죠? 다 장편 소설이라 10권이 다 두꺼워요. 칼리프 아빠. 잘 부탁해요. 표지 안쪽에다 사인받아다 주세요. 사진도 찍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저 지금 같이 가면 실례일까요?”
“저는 낮에 작가님을 뵌 적이 없어요. 주로 퇴근 후에 작가님이 일이 있으면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시죠. 낮에는 집중해서 글을 쓰시는 것 같던데.”
“본 적도 없다면서 낮에 집중해서 글 쓰는 것은 어떻게 아세요? 칼리프 아빠?”
“그게, 저, 작가님이 고양이를 키우셨는데, 그 고양이 때문에 몇 번 뵌 적이 있고 또 얼마 전에 작가님 고양이가 죽어서 저랑 같이 화장터에 갔다 왔거든요. 고양이를 거의 방임했다고 우시던데, 글 쓸 때는 밖에 전쟁이 나도 모른다고 고양이는 거의 혼자 지내다가 혼자 죽었다고 미안해하셨어요.”
“어머나, 세상에. 작가님 고양이를 키우셨구나. 팬들도 모르는 사실인데, 대박. 부러워요. 같이 대화도 하고 장례식에도 가고.”
“그게 그렇게 부러울 일인가요? 저는 장례를 치르고 오니 기분이 너무 우울해서 한동안 기분이 안 좋았는데, 그리고 작가님도 다시는 안 키우겠다고, 책임도 제대로 못 지면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은 죄짓는 일이라면서 이제는 아무 동물도 키우지 않겠다고 했어요. 지금 시간은 ‘절대 집필’ 시간일 텐데. 초인종도 못 누르게 대문에 <Do Not Disturb>라고 붙어있어요. 그래서 아무도 그 집에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요. 택배기사도 물건만 문 앞에 두고 그냥 가요. 문자만 보내고.”
“역시. 그래서 팬들도 아무도 못 찾아가거든요. 그러면 사인은 어떻게 받으실 건데요?”
“저녁때 퇴근하고 작가님이 저녁 식사를 할 즈음에, 한번 두드려 볼까 생각 중인데요. 자신은 없지만, 방해하는 걸 되게 싫어하셔서. 저도 두려워요. 초인종 누르는 것이.”
“이런. 큰 부담을 드렸네요. 미안해요. 이번만 부탁해요. 다음엔 더 맛있는 거 살게요.”
“뭐, 들고 가보긴 하겠지만 10권 다 해주실지도 의문이고. 가능한, 많이 받아볼게요.”
“부탁해요. 칼리프 아빠. 참 전화번호 드릴게요. 자자. 내 폰에도 그쪽 번호 찍으시고요.”
(우리 집)
“어휴, 이렇게 무거운 것을 그 여자는 어떻게 들고 왔지? 나도 무거운데. 정말 골수팬인 모양이야.”
“멍멍.”
“야옹.”
집사님.
집사야.
“형님, 저 많은 책에 다 사인을 받아 오라고 그 여자가 부탁했는데, 집사님이 고민하세요. 언제 어떻게 옆집 초인종을 눌러야 하나.”
“그러게 말이다. 마녀가 화 안 내고 잘 열어줄지도 의문인데, 저 많은 책에 일일이 사인을 친절하게 해 줄까?”
“띵똥. 띵똥.”
“누구세요?”
“저. 작가님. 옆집인데요. 잠시 문 좀 열어 보시겠어요?”
(현관문 덜컥)
“어. 옆집 총각? 웬일이야? 이 시간에? 하긴 이 시간 아니면 집에 없지?”
“작가님께 부탁이 있어서 그런데, 이 책들 다 작가님 책이죠?”
“그러네. 다 내 책이네. 총각 내 팬이야?(눈을 반짝).”
“저기 그렇다기 보다... 이 책들 전부 사인을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사인? 10권 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귀찮아서 안 해주겠지만, 총각은 내가 신세 진 것도 있고 하니까 해줄게. 어디 표지 안쪽?”
“네. 감사합니다. 이렇게 쉽게 해주실 줄 몰랐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옆집 총각 본 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덕분에 카자르 장례도 무사히 마쳤는데, 내가 보답도 못 했지. 이 정도로 퉁 쳐.”
“작가님. 그런 말도 하세요? 불량청소년들이나 할 말을.... 아. 이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기뻐서 그만 정신 줄을 놓았어요.”
“자자. 10권 다 했어. 더 부탁할 건 없지?”
“저. 이왕 도와주신 김에 사진 한 장, 부탁해도 될까요?”
“엥? 나랑?”
“아. 같이 찍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독사진도 괜찮은데요.”
“나는 본래 남자랑 사진을 찍지 않아. 미안해. 그건 못 도와주겠다. 그리고 내 사진이 돌아다니는 것도 싫어해. 그래서 인터뷰를 해도 사진은 거의 싣지 않아. 이해해.”
“아. 몰랐어요. 사진 찍는 걸 싫어하시는구나. 죄송해요. 됐어요. 사진은. 그만 갈게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편한 저녁 되세요.”
“그래. 총각 잘 가.”
(다음 주)
“칼리프 아빠? 여기에요.”
“밍키 엄마. 정말이지. 무슨 007 작전하다 온 것처럼 힘들었다고요. 휴우.”
“10권 다 받아 오셨어요?”
“네, 다. 그리고 사진도 부탁해봤는데, 거절하시더라고요.”
“역시나. 변 작가님. 사진 찍는 것 싫어하세요. 그래서 팬들도 사진 가진 사람이 없어요. 혹시나 부탁드린 거였어요.”
“아니, 그걸 알면서 부탁하신 거예요? 작가님이 질색하시던데. 전 정말 몰라서 실수했네요. 이런. 앞으로는 절대 못 찾아뵐 것 같아요.”
“미안해요. 칼리프 아빠. 혹시 칼리프 아빠라면 이웃 주민이라서 해주실 줄 알았죠. 역시나 허탕이네요. 가요. 맛있는 거 사줄게요. 10권 다 받아 오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거예요. 그 어떤 팬들도 이렇게 많은 사인 없을걸요? 우하하. 신난다.”
“변 작가님이 그렇게 유명하신 분인 줄 전혀 몰랐는데, 난 그냥 고양이 엄마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골수팬들이 많은 사람이었다니.”
“정말이에요. 변 작가님. 대단하신 분이에요. 책만 나왔다고 하면 바로 베스트셀러가 되거든요. 은둔 작가로 다들 궁금해서 난리인데, 그런 변 작가님과 장례식도 같이 치르고 사적인 대화도 하고, 정말 부러워요.”
“저는 그리 소설을 잘 읽지도 않고요. 읽는 책들은 주로 역사책이죠. 전공이니까. 그리고 박사 논문 주제도 잡아야 하고, 주로 전공 관련 서적을 읽다 보니 소설은 별로 읽지 않아요.”
“네, 저는 평범한 공무원이고 시간이 많으니까 잡다한 소설 잘 읽어요. 변 작가님 책뿐 아니라. 다른 작가님들 책도 좋아해요.”
“작가님은 집에서 거의 외출하지 않으세요. 한 번이라도 산책이라도 하시면 그 틈을 봐서 인사라고 하게 해드리고 싶지만, 정말 칩거형 작가라서.”
“알고 있어요. 팬들은 다 아는 사실이에요. 힘든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앞으로는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을게요. 마음 편히 가지세요. 내가 꼭 칼리프 아빠를 이용하는 사람 같군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이왕이면 좋아하시는 분을 가까이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요.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밍키엄마 전화번호 갖고 있으니까요.”
“고마워요. 칼리프 아빠. 지금 팬들 사이에서 난리예요. 제가 변 작가님 책 전 권에 다 사인받았다고 부러워 죽겠다고, 하하하.”
“그리 기뻐하시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이렇게 남을 행복하게 해준 일이 일생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그럼요. 저를 정말 행복하게 해주셨는데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칼리프 아빠도 저에게 부탁할 것 있으면 서슴지 말고 하세요. 저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 드릴게요.”
“정말이죠? 아싸. 잘 생각해뒀다가 써먹어야지. 뭐가 좋을까나?”
“저는 그렇게 부자는 아니니까, 너무 비싼 것은 곤란해요. 일반 대중이 적정하다고 인정되는 수준에서 하세요. 그 정도는 아시죠?”
“물론이죠. 저야말로 밍키 엄마에게 본전을 뽑겠다는 심사로 만나는 것은 아니거든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좀 기분이 상하려고 하네요.”
“아. 농담이에요. 기분 푸세요. 자자. 점심이나 먹으러 가죠.”
“오늘은 제가 사죠. 밍키 엄마.”
“아네요. 오늘까지는 제가 사고. 다음에 사세요. 칼리프 아빠.”
“그러시든가요.”
(우리 집)
“칼리프. 너 주말마다 산책가서 늦게 오는구나. 어때? 집사는 연애사업 잘되어가니?”
“음. 매주 만나고는 있는데, 아직 서로 통성명도 안 하고 칼리프 아빠. 밍키 엄마로 부르고 있어요. 그리고 만나도 옆집 마녀 이야기밖에 안 해서 짜증이 나려고 해요. 할 말이 그것밖에 없나 봐요. 그 여자는. 내가 사람을 잘 못 짚은 것 같아요. 다른 여자를 물색해 봐야겠어요.”
“그러냐? 정말 옆집 마녀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 여자도 정상은 아닐 것 같아. 그래. 다른 여자를 알아봐. 나도 옆집 마녀를 좋아하는 여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저도 이왕이면 옆집 마녀와 엮이게 하고 싶지 않네요. 혹시 형님. 집사의 이상형이라도 아시면 좀 참고가 될 텐데, 뭐 들은 말 없어요? 나한테는 전혀 여자 이야기는 안 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가끔 TV를 볼 때 예쁘다고 한 여자가 있었는데, 누구더라. 이름을 모르겠네, 나중에 집사가 TV 보면서 또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내가 바로 말해줄게.”
“그래요? 이상형이 있긴 있었구나. 왜 난 그걸 전혀 몰랐지?”
“그래. 네 말대로 우리가 은혜도 모르는 식충이가 되지 않으려면 집사에게 좋은 여자를 구해줘야 해. 집사에겐 그것이 가장 큰 선물이야. 우리 둘 다 노력해보자.”
“네, 형님, 산책 때 열심히 찾아보겠어요. 최대한 옆집 마녀를 닮지 않은 여자로.”
“부디 착하고 예쁘고 집사를 아껴줄 수 있는 여자를 찾아라. 나도 도와주고 싶지만 나는 밖에 나가지 않으니까. 이런 일은 너밖에 할 수 없어. 칼리프.”
(공원)
“알았어. 칼리프. 좀 천천히 가자. 내가 너 따라잡기가 힘들어. 너 요즘 주말마다 왜 그리 열심히 뛰어다니니? 밍키 엄마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좀 쉬자.”
“멍멍. 멍멍.”
안돼요. 오늘 다른 여자 찾을 거예요.
(달려가는 칼리프)
“멍멍. 멍.”
“깜짝이야. 갑자기 왜 개가 달려들지?”
“아이고. 이런 죄송합니다. 얘가 순한 놈인데, 이런 일이. 걱정하지 마세요. 물지 않으니까요.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아, 저는 개가 싫어요. 조심 좀 하세요.”
“예. 죄송합니다. 칼리프. 왜 그래? 낯선 분에게 함부로 짖지 마.”
“컹컹. 컹. 멍멍. 멍”
미안해요. 사람을 잘 못 짚었네. 그렇다면 다른 여자를... 어디 보자.
“칼리프. 또 어딜 뛰어가니? 정말 따라잡기 힘드네.”
(다시 달려가는 칼리프)
“왈왈. 왈.”
“아니? 멍멍이? 나한테 무슨 일이지?”
“아. 이런.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요즘 젊은 여자분만 보면 가서 막 짖어요. 그냥 예쁜 분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놈도 수놈이라.”
“어머. 너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니? 영광인데, 개한테까지 통하는 미모라. 고맙구나. 너 이름이 뭐니?”
“칼리프예요.”
“칼리프? 신기한 이름이네요. 개는 진돗개 같아 보이는데. 이름은 완전 외국 이름이네요. 그것도 종교 관련?”
“아시는군요. 이슬람 쪽 용어는 모르시는 분이 많은데.”
“저도 중학교 때 세계사에서 들어본 기억이 나네요. 그 정도가 다예요. 그래. 칼리프 군? 나는 줄 간식도 없는데 어쩌지? 나는 개를 키우지 않아서. 혼자 조깅하러 나왔는데, 혹시 너 여자친구를 찾는 거면 번지수 잘 못 짚었어. 다른 암캐를 키울 만한 사람을 찾아보렴.”
“아, 저, 이 녀석 중성화 수술을 해서 여자친구를 찾는 건 아닐 거예요. 그냥 예쁜 여자 사람을 좋아해요. 저는 그냥 평범한 남자거든요. 하하하.”
“그래요? 수캐들은 여자주인을 더 좋아하는 건가요? 전 잘 몰라서요.”
“저기. 제 개 때문에 운동 방해되는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계속 조깅하실 거면 가시고 아니면 제 개의 실례를 갚는 셈 치고 차라도 한 잔 살게요.”
“멍멍. 멍. 멍? 멍. 멍. 멍”
그래. 그거예요. 집사. 너 이렇게 실력이 좋은데 왜 여태껏 혼자였던 거예요? 이 정도면 곧 여자친구가 생기겠어. 하하. 정말 신난다.
(우리 집)
“형님, 오늘도 저 한 건 했어요. 새로운 여자랑 같이 차를 마시게 했다고요.”
“그래? 잘했어. 오늘 여자는 좀 어떠냐?”
“오늘 여자는 개를 키우는 사람은 아니고 그냥 주말마다 조깅하러 나온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주말마다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집사는 숙맥이 아니었어요. 먼저 데이트 신청도 잘하던데요. 지금까지 왜 여자친구가 없었는지 이해가 안 될 만큼 능숙하더라고요.”
“별일이네. 저번 옆집 여자 광 팬에게 혼이 나서 여자 보는 눈이 생겼나?”
“그 여자. 형님 말대로 오로지 관심은 옆집 마녀밖에 없어요. 우리 집사가 혼자 애쓰고 있다고요. 대화를 바꾸려고. 하지만 그 여자는 계속 옆집 마녀 이야기밖에 안 해요. 집사도 좀 지겨운 모양이더라고요.”
“그것 봐. 옆집 마녀를 좋아하는 것 자체가 벌써 이상한 여자인 거야. 오늘 잘했어. 이번엔 제발 좀 괜찮은 여자이길 바란다.”
“그러게요. 그래야 저도 고생한 보람이 있을 텐데.”
“우리 집사가 행복해져야 누님의 한을 풀어드리는 거야. 누님은 항상 우리 집사를 걱정하고, 또 고맙다고 말하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하셨어.”
“그랬어요? 그걸 왜 이제 말하세요? 전 몰랐어요. 누님이 우리 집사를 그리 아끼셨는지.”
“그랬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는데, 그러고 바로 가실 줄 몰랐지. 지금에야 누님의 유언을 집행하고 있는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가 하고 있어. 우리 꼭 누님의 소원을 이뤄 드리자.”
“그래요. 형님. 열심히 할게요.”
(며칠 후)
“여보세요? 네. 밍키 엄마. 무슨 일이세요? 아직 옆집 작가님 뵌 적이 없는데요.”
“칼리프 아빠. 내가 꼭 작가님 때문에 전화해야 해요? 그냥 할 수도 있죠.”
“그러신가요? 늘 작가님 말씀밖에 안 하셔서. 저는 이제 뭐 별로 드릴 말씀도 없고. 작가님 사인받은 이후로는 뵌 적 없어요. 근황도 모르고.”
“칼리프 아빠. 저번 주는 왜 그냥 저보고 지나치셨어요? 다른 여자분이 있어서 말을 못 걸었네요.”
“아? 우리 칼리프가 그 여자분에게 또 실례하고 있어서 말을 걸고 있었는데, 그리고 저는 밍키 엄마를 못 봤거든요. 그냥 지나친 것 아니거든요.”
“난 또 예쁜 여자분과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시길래 방해될까 싶어서 재빨리 자리를 피했죠. 못 보셨나 보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나요?”
“그냥요. 하면 안 돼요? 이번 주말엔 칼리프랑 산책하는 것 말고 다른 계획 있으세요?”
“별로 없는데요. 칼리프랑 산책하러 갈 거예요.”
“아, 됐어요. 저도 밍키랑 나갈 테니까 그럼 그때 뵈어요. 끊을게요. 뚜뚜뚜뚜.”
“뭐야? 이 여자? 뜬금없이. 작가 이야기가 지겨워져서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데. 또 봐야 하는 거야? 처음 두 번 밥 사더니 그 이후로는 계속 내가 사고, 계속 밍키 엄마 수다 들어주는 것도 피곤한데,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아? 칼리프? 주말에 너랑 산책갈 건데, 밍키 엄마를 별로 보고 싶지 않아. 뭔가 좋은 방법이 있으면 알려줘. 참. 말도 못 하는 개한테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람. 미안하다. 칼리프. 아직 돌도 안된 놈한테 별소리를 다 하네.”
“형님. 집사가 밍키 엄마를 불편해하고 있어요. 뭔가 도울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게. 옆집 마녀를 좋아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여자라니까. 역시나 우리 집사, 피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리고 이번 주말도 그 예쁜 여자가 조깅하러 나오면 내가 접근하려고 했는데, 밍키 엄마가 달라붙으면 그것도 못 할 것 아녜요? 정말 민폐녀야. 끼리끼리 논다고 옆집 마녀와 동급인가 봐요.”
“조깅녀를 먼저 만나면 좋을 텐데.”
“그러면 민폐녀를 어찌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과연 조깅녀인가 민폐녀인가 누가 먼저 나타날 것인가?”
“하늘에 맡겨야죠.”
(주말)
“날씨 좋다. 칼리프. 오늘도 즐거운 산책 시간. 나갈까? 그리고 술탄. 넌 집 잘 보고 있어. 너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넌 혼자 집만 보는 게 지겹지도 않니? 참, 아니지. 고양이는 본래 집돌이지. 그럼 우리 나갔다 올게.”
“형님, 다녀올게요. 건투를 빌어주세요.”
“그래. 행운을 빈다. 파이팅!”
(공원)
아. 부디 조깅녀가 먼저 나타나야 할 텐데, 어디 보자. 조깅녀. 조깅녀. 하다못해 다른 예쁜 여자라도 있으면 그 여자라도 접근해서 말을 붙이게 해야겠어. 민폐녀가 들이닥치기 전에.
아? 저기 조깅녀가 뛰어온다. 어서 가자.
“왈왈왈.”
“어머나? 저번의 그 강아지, 뭐랬지? 칼리프였나? 그래. 칼리프 군. 반가워. 넌 정말 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헉헉헉. 왜 이리 빨리 뛰어? 칼리프. 이런. 우리 칼리프가 또 실례를...”
“아니에요. 저도 이 개가 저한테 살갑게 굴어서 예쁜걸요. 지금까지 동물은 별로 좋아한 적이 없는데, 얘는 친근하게 느껴져요.”
“아. 감사합니다. 우리 칼리프가 좀 귀엽긴 하죠. 하하하.”
“어머. 정말 개를 많이 사랑하시는군요.”
“이 녀석은 살갑고 다정해요. 수놈이지만. 그리고 집에 있는 술탄이라는 고양이는 생긴 것은 황제감인데, 성질이 더러워서.... 세상에서 제일 까칠한 수고양이죠. 그 녀석 때문에 제가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이놈 키우면서 치유 받고 있어요. 그래서 꼬박꼬박 주말마다 산책을 시켜주러 나와요. 평일엔 못 해주지만요.”
“어머. 그러셨구나. 그리고 고양이는 까칠한 동물이구나.”
“본래 고양이가 개보다는 까칠하지만, 우리 술탄은 특별히 까칠해요. 원래 성질이 더러운 놈이에요. 생긴 것이 예뻐서 입양했는데, 성격이 그럴 줄 상상도 못 했어요. 하지만 미모는 정말 수려해요. 본래 예쁘면 성질 더러운 것도 조금은 용서가 되니까. 예쁜 모습으로 위안 삼죠. 하아. 내가 너무 외모를 밝히는 건가?”
“호호호. 정말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네요.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하면서 댁 고양이 이야기 더 들어볼까요?”
“네? 우리 술탄 이야기가 듣고 싶으세요? 의외인데. 그러고 싶으시다면야.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죠.”
좋아. 잘됐어. 형님. 오늘도 저 한 건 했습니다. 조깅녀를 먼저 만났다고요. 민폐녀가 오기 전에 어서 찻집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어라? 저기 민폐녀가 밍키와 같이 오고 있군. 이런. 빨리 피해야 하는데.
“칼리프 아빠!”
“깜짝이야. 아. 밍키 엄마. 웬일이세요?”
“오늘 같이 만나기로 했으면서,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 선약이 있으셨어요? 전 그것도 모르고 실례했군요. 그럼. 전 이만 갈게요.”
“아니요. 선약 없어요. 그냥 저분이 혼자 지레짐작하신 거예요.”
“아니? 뭐라고요? 내가 엊저녁에 전화하면서 오늘 산책하러 온다고 해서 그러기로 했잖아요?”
“나는 분명히 오늘 산책하러 나갈 계획이 있다고만 말했고, 밍키 엄마를 만나기로 한 건 아니었고요. 그리고 그 말 하자마자 밍키 엄마가 전화를 바로 끊었고요. 저는 오늘 이분과 술탄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요. 자 그만 가시죠. 참. 성함이?”
“어. 곤란한 상황이네요.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하세요? 본래 계획대로 찻집에서 우리 술탄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죠.”
“그래도 왠지 신경이 쓰이는데.”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
“칼리프 아빠. 우리 밍키와 산책하셔야죠? 안 들려요? 칼리프 아빠?”
“자자. 뒤돌아보지 마시고, 신경 쓰지 마세요. 저 밍키 엄마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에요. 저는 그 세계에 이용만 당한 느낌이고요. 이번 기회에 제발 좀 떨어져 나가면 좋겠는데. 매우 불편한 사람이에요. 특정 마니아는 정말 피곤해요. 정말.”
“무슨 마니아신데요?”
“변해신 작가의 광 팬인데, 만나면 하루종일 변 작가 이야기밖에 안 하고 나보고 변 작가 사인을 받아 오라는 둥, 사진을 찍어오라는 둥. 하여튼 어떻게 해서든 변 작가랑 날 엮어서 이용하려는 사람이에요. 정말 무서워요. 전화번호도 수신 거부 처리하고 삭제하든지 해야지. 또 전화 오면 안 되니까.”
“변 작가님이라는 분과 잘 아시는 사이신가요?”
“옆집 사세요. 그분. 그런데 워낙 은둔형 외톨이시라. 초인종도 함부로 누를 수 없어요. 그런 분에게 그런 부탁을 드리러 갔었다고요.”
“그런 일이 있군요. 참 세상엔 별별 사람이 다 있어요. 그럼 저 찻집 어때요? 전통 찻집 괜찮아요?”
(찻집)
“여기 차, 다 맛있어요. 골라보세요.”
“네, 좋아요. 전 유자 자몽차로 할래요.”
“오늘은 제가 사죠. 저는 석류차 주세요.”
“아유, 감사합니다. 여성분이 먼저 계산을 하시고. 다음엔 제가 밥을 사죠.”
“그러시든지요. 자자. 어서 술탄 이야기를 해보세요. 혹 사진이 있나요? 얼마나 예쁜 고양이이길래 그리 칭찬을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예, 사진이 있죠. 물론. 휴대폰 바탕화면에도 깔아놨는데. 자 보세요. 예쁘죠? 새하얀 터키시앙고라예요. 눈은 사파이어 빛깔이고, 털도 멋있죠? 장모라 털이 많이 빠지긴 하지만 그래도 단모종보다 위엄있고 멋있잖아요? 또 다른 사진도 있으니까, 자자. 순서대로 보세요.”
“어머나. 나는 고양이가 이렇게 멋지고 예쁜 줄 오늘 처음 알았네. 이런 고양이라면 나도 키워보고 싶어요. 개보다는 고양이가 더 예쁜 동물이네요. 수놈이 이 정도면 암놈은 더 예쁜 건가요?”
“저기요. 동물은 암놈이 더 예쁘거나 하지 않고요. 오히려 수놈이 더 예쁘고 멋진 경우가 많아서. 외모로는 성별을 가릴 필요가 없고, 그냥 마음에 드시는 놈을 고르시면 되는데, 암놈이 중성화 수술비용이 더 비싸고 회복시간이 더 길긴 하죠. 그 외에는 뭐 성격은 복불복이라서. 저도 외모만 보고 고른 놈이라. 성격은 운에 맡겨야죠. 정말 고양이에 관심이 있으시면 잘 아는 팻숍을 소개해 드릴 수 있는데.”
“어머나. 정말 예뻐. 이런 고양이라면 성질이 쌀쌀맞아도 용서가 될 것 같아요. 이해가 되는군요. 댁 상황이.”
“그렇죠? 한번 안아보는 게 소원인데, 절대 안기지 않거든요. 얼마나 까칠한지. 5년 동안 스킨십 한번 제대로 못 해봤다고요. 뭐 저런 놈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칼리프 입양하고 얼마 후에 처음으로 내 뺨을 핥아서 깨워줬어요. 그때 정말 놀랐어요. 내가 늦잠을 자면 깨워 주기는 해요. 귀에다 야옹야옹하고 울어요. 일어나라고. 그것도 칼리프 들어오고 하는 일이라 역시 칼리프를 입양하길 잘했다 싶고요.”
“어머나, 강아지가 들어오니 보살피고 싶은 모양이네요. 사이가 좋은가 봐요.”
“네, 저도 처음엔 고양이를 입양하려고 했는데, 친구 집에 갔다가 이놈에게 꽂혀서 바로 데려왔어요. 그래서 걱정했죠. 개와 고양이가 사이가 좋을까 하고. 술탄이 텃세를 부리면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했는데, 의외로 술탄이 칼리프를 친동생처럼 보살펴줘서 정말 놀랐어요. 배변훈련도 시키고 밥도 먹이고 하여튼 제가 두손 두발 다 들었어요. 그래서 그 모든 미운 정이 싹 사라졌어요. 제가 할 일을 술탄이 다 해줬어요. 전 뭐 그냥 밥만 주고 주말에 산책만 시키죠. 그 외는 술탄이 칼리프를 키웠어요. 아마도 칼리프도 술탄을 제 형님이나 아빠처럼 생각할걸요? 나는 그냥 집사고.”
“정말 흥미롭네요. 저는 기자예요. 사회부 기자. 댁의 술탄과 칼리프 이야기를 진지하게 인터뷰해서 싣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예? 기자님. 이런 이야기도 신문에 싣나요?”
“요즘은 인터넷 신문에 별별 이야기를 다 실으니까요. 요즘은 애완동물 팬들이 많아서 관련 글이 인기도 있고, 개와 고양이가 사이좋게 한 집에서 친형제처럼 지낸다. 뭐 이런 이야기 좋아하실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여기 제 명함이고요. 이 세상 신문의 사회부 기자 김혜선이에요.”
“아? 전 해성물산의 정태식입니다. 저도 명함 드릴게요.”
“그럼 수락하시는 것으로 알고 실을게요. 죄송한데 대화는 이미 다 녹음했고요. 미리 공지드리지 못한 건 사과드릴게요.”
“언제 녹음했다고요?”
“실은 아까 길에서 마주쳤을 때부터요. 전 항상 녹음기를 들고 다니면서 바로바로 녹음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만.”
“저기요. 기자님. 이건 좀. 제가 만약 인터뷰 싣는 것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할 수 없죠.”
“그러면 녹음한 것 다 삭제하나요?”
“왜 그러시죠? 뭔가 불편하신 거라도?”
“아까 밍키 엄마와 관련된 대화도 다 녹음되었을 텐데.”
“그렇긴 하네요. 그때도 계속 녹음 중이었으니까요.”
“김 기자님. 대단히 죄송하지만 전부 삭제해 주세요. 지금 내가 보는 앞에서 바로요.”
“아, 기분이 상하셨나 보군요.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사람을 보자마자 바로 양해도 허락도 구하지 않고 녹음을 하는 것은 범죄 아닌가요?”
“미리 언급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지만 범죄자 취급까지 하실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김 기자님은 그것이 평범한 일상일지 몰라도 저는 그렇지가 못해서요. 자. 기자님. 지금 제 앞에서 바로 다 삭제하세요. 빨리요.”
“하. 알겠어요. 자. 오늘 아까 만난 것부터 지금까지 다 삭제 완료했어요.”
“그러면 차는 오늘 실례하신 김 기자님이 사신 것으로 하고 이만 전 가볼게요. 밖에 묶여 있는 칼리프가 걱정되어서 오래 못 있겠네요.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우리 집)
“형님. 저 돌아왔어요.”
“칼리프. 그래. 오늘도 좀 늦었네. 오늘 잘됐어?”
“민폐녀 대신 조깅녀를 먼저 만나긴 했는데, 조깅녀가 집사 허락도 안 구하고 녹음을 해서 집사가 기분이 상해서 그만 깨진 것 같아요.”
“그래? 밍키 엄마는 못 만났어?”
“밍키 엄마는 조깅녀랑 같이 있는 와중에 집사를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고, 하여튼 오늘은 엉망진창인 하루였어요. 지금 집사 기분이 말이 아닐걸요. 괜히 나 때문에, 기분이 많이 상했어요. 지금까지 제가 저지른 일이 하나 같이 다 결과가 엉망이에요. 집사가 좋은 여자랑 잘 되게 하고 싶었는데.”
“저런. 칼리프. 좋은 인연 찾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면 이 세상에 노처녀 노총각들이 왜 그리 많겠니? 다 어려운 일이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 그리고 집사는 어른이야. 생각보다 금방 회복할 거야. 네 탓이 아니야. 그 여자들이 이상한 것뿐이야. 집사도 너에게 화나 있지 않아. 너에게 고마워할 거야. 자자. 얼굴 펴고.”
“좋은 여자 찾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네요. 우리 집사가 지금까지 혼자인 것이 이해가 돼요. 어쩌면 하나같이 다 우리 집사를 이용하려는 여자뿐인지, 속상해요. 이러다가 집사가 여자 기피증이라도 걸리면 어떡하죠?”
“하하. 글쎄다. 내공에 따라 다르겠지?”
“띵똥. 띵똥.”
“누구세요? 어라? 작가님이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옆집 총각. 주말인데 집에 있었네? 참, 이번에 새 책이 나왔어. 11번째 책이야. 미리 사인해 뒀어. 선물이야. 내 책 좋아하지?”
“어? 아. 네네. 감사합니다. 직접 선물하실 줄이야. 잘 읽어볼게요. 작가님.”
“그래. 난 이만 가볼게.”
“네, 들어가세요. 작가님.”
“하아. 이런, 얘들아, 옆집 작가님이 나한테 신간을 줬어. 그것도 사인까지 해서, 이걸 기뻐해야 하나? 사실 지금까지 나온 책도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는데 말이지. 작가님은 내가 광 팬인 줄 오해하시는데. 차마 책 읽어본 적 없다고 말할 수 없었어. 실망할까 봐. 그리고 예전보다 표정이 부드러워 보였어. 기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더더욱 팬 아니라고, 책 읽은 적 없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 바보같이 내가 얘들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엥? 이게 무슨 소리야? 집사. 정신 차려. 작가가 갑자기 덜 쌀쌀맞게 군다고 마음이 풀어지는 건 아니지? 그 책 읽을 거야?”
“형님. 책 선물 정도야 할 수 있지 않나요? 우리 집사에게 약간은 호감이 생긴 것 같기도 하지만.”
“자자. 얘들아, 이번 주말은 독서를 해야겠구나. 사실 나는 변 작가님이 그리 유명한 사람인지도 몰랐고 대체 어떤 책을 쓰는지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어. 이번 기회에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한번 알아볼까?”
(며칠 후)
“주말 내내 책을 읽고 있네. 재미있나?”
“글쎄요. 마녀는 어떤 글을 쓰는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나도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너 글은 읽을 수 있니?”
“개로 태어나는 바람에 홀랑 다 까먹었지만요. 그림책이면 좋을 텐데.”
“이런, 설마 그림책을 쓰겠니? 마녀는 동화작가가 아니야. 그건 확실해. 동화책 골수 마니아는 없거든, 그 민폐녀를 봐.”
“우와. 다 읽었어. 변 작가님은 흡입력이 뛰어난 문장을 쓰는 사람이구나. 광 팬들이 이해가 돼. 한번 읽으면 끝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책이야. 지난 책들도 궁금해지는구나.”
“집사. 너 제정신이야? 마녀 책이 지금 재미있고 훌륭하다는 거야? 지금. 그리고 다른 책도 읽을 거라고?”
“형님, 흥분하지 마세요. 마녀가 성질은 더러워도 글은 잘 쓸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순수하게 책이 재미있는 것이고, 마녀가 재미있거나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에요. 진정하세요. 형님.”
“다른 책을 바로 사서 보기는 구매하는 시간과 돈이 소모되니까, 그렇지. 밍키 엄마에게 빌려볼까? 아냐 아냐. 저번에 그렇게 하고 왔는데 전화를 할 순 없지. 그냥 도서관에서 빌려봐야겠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이 어디더라? 검색. 검색. 찾았다. 이럴 수가? 걸어가도 될 거리야. 여태 도서관도 이용하지 않고 내가 뭐 했지? 얘들아, 아빠, 잠시 도서관에 다녀올게. 집 잘 보고 있어.”
“이럴 수가. 집사가 마녀의 책에 완전히 빠져들었어. 이 일을 어쩌지?”
“형님, 저도 저 정도로 마녀의 책을 좋아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어요. 이게 좋은 일일까요?”
“미쳤냐? 이게 좋은 일로 보이냐? 억울하게 가신 누님이 알면 대성통곡할 일이야.”
“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으로 봐서는 주말마다 책 읽느라 저랑 산책도 안 할 것 같네요.”
(다음 주)
“일주일 내내 지금 변 마녀의 책을 읽고 있는 거지? 집사.”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씻고 밥 먹고 그 외에는 책만 읽고 있네요. 잠은 제대로 자는 걸까요?”
“너 이번 주말엔 산책 못가겠다. 어쩌냐?”
“뭐 좀 답답하긴 하겠지만, 어쩌겠어요? 혼자 다녀올 수도 없는데, 형님이랑 집에서 놀아야죠. 오랜만에 격투 놀이 어때요? 형님도 요즘 운동 부족 아닌가요?”
“칼리프. 미안해. 이번 주말은 산책 못 하겠어. 평일엔 책 읽느라 시간이 부족해서 주말에 몰아봐야 할 것 같아. 이번 주만 봐줘. 다음 주부터는 다시 산책하러 나갈게. 약속해. 이해해 줄 거지?”
“멍.”
“너도 참 너그럽구나. 나 같으면 마구 짖고 화를 낼 텐데.”
“형님. 우리 집사가 저렇게 흥미진진하게 즐거워하는 걸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기뻐요. 제가 산책 못 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책이 정말 재미있나 봐요.”
“뭐 무협지나 추리물인가? 아니면 스릴러물? 남자들은 어떤 책에 흥미가 있지?”
“글쎄요. 무슨 장르인지 말을 해주지 않으니까 전혀 알 수가 없네요. 어떤 내용일까요?”
“정말이지. 변 작가님은 대단하신 분이야. 책 11권이 전부 다 다른 장르야. 내공이 깊은 사람이구나. 노력도 많이 했겠고, 학식도 교양, 일반 상식 전부 뛰어나. 그런데 은둔형 외톨이라니. 참. 알 수가 없는 분이군. 성격도 외골수에 까칠하고 주변에 무심하고, 그런 책을 쓴 사람이라고도 상상할 수도 없어. 사람은 정말 알기 힘든 생물이야. 특히 여자들을 점점 더 모르겠어. 이제는 여자가 무섭다.”
“가관이군. 이제 마녀를 찬미하고 있네. 가서 할퀴고 싶구나.”
“형님, 집사에게 폭력은 안 돼요. 옆집 마녀가 성질은 이상해도 글은 정말 잘 쓰는 모양이네요. 평생 책만 쓰고 살라고 해요. 그런 재능이라도 있으니 다행 아니겠어요? 요즘 취업도 힘들고, 취업해도 박봉에 격무에 시달리는 게 보통의 인생인데, 재능이 있는 사람은 성질이 더러워도 먹고 살기 유리하군요.”
“따르릉.”
“여보세요. 밍키 엄마, 저 칼리프 아빠예요. 통화 가능하세요?”
“칼리프 아빠. 전에 나한테 그렇게 망신 주고 쌩하고 가버리더니, 전화는 왜 했대요?”
“미안해요. 사과하려고 전화했어요.”
“사과할 사람이 주말엔 나오지도 않았더군요. 이제 날 완전히 피하는구나 싶었는데요.”
“그것은 책 읽느라 주말에 나가지 못했어요. 실은 이번 주 내내 변해신 작가님의 책을 완독했거든요.”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칼리프 아빠. 이제 대화가 좀 통하겠네요. 늘 혼자 일방적인 대화라 좀 힘들었는데.”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요. 나는 전혀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주야장천 해대니 내가 얼마나 피곤했겠어요? 정말 기본 예의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그랬을 거라 짐작했어요. 언젠가부터 칼리프 아빠가 대화에 시큰둥하고 날 피하는 걸 보고 그리 생각했어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어쨌든, 그래도 변 작가님 책 대단하지 않아요?”
“네 이제는 밍키 엄마가 왜 그리 거품을 물고 이야기를 했는지 절실히 이해가 돼요. 지금까지 그런 대화를 하고 싶어도 할 대상이 없다면 정말 답답할 거예요. 지금 내가 그렇거든요. 그래서 안면몰수하고 밍키 엄마에게 전화하고 있잖아요. 저도 이 심정을 시원하게 토로할 대상이 필요해요.”
“드디어 내 심정을 이해해 주는군요. 제가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줘서 정말 다행이에요. 자 그럼 이번 주말엔 산책 나오실 거죠?”
“물론이죠. 우리 칼리프도 운동을 못 해서 답답할 테고, 공원에서 만나요. 같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눠보기로 해요. 밍키 엄마.”
“그래요. 칼리프 아빠. 주말에 봐요.”
“집사가 드디어 돌았군. 쯔쯔.”
“이런 상황을 기뻐해야 하나? 민폐녀가 정상녀로 둔갑하는 순간이군요. 그래도 형님. 민폐녀, 아니 정상녀가 옆집 마녀보다는 낫지 않아요? 적어도 젊고 예쁘잖아요?”
“그래? 나는 보질 못해서 예쁜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네. 민폐녀 예쁘냐?”
“음, 그 녹음녀보다는 미인이에요. 녹음녀는 지적으로 생겼고.”
“너의 여자 보는 눈을 내가 알 수가 없으니 뭐라 말 못 하겠지만, 적어도 젊고 예쁘다고 하니 다행이군. 우리 집사는 미모에 민감해. 못생기면 안 돼. 옆집 마녀는 늙고 뚱뚱해서 그나마 다행이야.”
“형님, 적어도 옆집 마녀보다는 민폐녀였던 정상녀가 낫잖아요? 어떻게 진행되나 추이를 살펴보죠.”
(주말)
“칼리프, 나가자. 오늘 날씨 참 좋다. 하하하.”
“멍.”
“칼리프, 잘 다녀와. 오늘 잘 보고 와야 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상황을 잘 보고 알려줘.”
“물론이죠. 형님. 다녀올게요.”
(공원)
“밍키 엄마. 여기요.”
“칼리프 아빠. 정말 반가워요.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었는데, 그렇죠?”
“그럼요. 나도 오늘을 얼마나 학수고대했는데, 이번 11번째 신간 읽어보셨죠?”
“물론이죠. 서점에 미리 주문해뒀다고요. 아마 내가 1번 구매자 아니었나 모르겠네.”
“그래요? 언제 구매하셨는데요?”
“선주문 넣어서 책이 발매된 첫날 출고되고 바로 왔으니까, 책 받은 지 사흘 되었나?”
“그래요? 나는 저번 주에 이미 다 읽었는데, 그리고 그 주말부터는 이전 10권 다 독파하고.”
“아니? 어떻게 그리 빨리 책을 입수했죠? 출판되고 출고되기 전에 받았다고요? 잠깐만요. 설마. 출고 전에 입수했다는 건.”
“하하하. 그렇죠. 예비 출판본, 최초본. 게다가 작가님의 친필 사인까지 들어있는 세상에 하나뿐인 원본이죠.”
“으악. 이럴 수가. 어머머. 부러워라. 설마 작가님이 직접 주신 건 아니겠죠?”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내가 그 희귀본을 갖고 있을 수 있겠어요? 그동안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려 혼났네. 어디 자랑하고 싶어도 할 데가 없으니 그 답답한 심정을 밍키 엄마는 이해하겠죠?”
“어, 물론이죠. 그리고 부러워 죽겠어. 정말. 나도 작가님 옆집으로 이사할까 보다.”
“하하하. 이미 늦었어요. 그리고 분위기가 앞으로도 작가님, 신간 나올 때마다 나한테 선물하실 것 같은데, 에헴.”
“오늘 갖고 왔어요?”
“물론이죠. 하지만 만지면 안 돼요. 그냥 쳐다보기만 해요.”
“깍쟁이. 흥. 내 손에 부정이라도 탈 것 같아요?”
“뭐, 그래도 때 타면 안 되니까요. 나중에 엄청나게 가격도 오를 거고. 아니지. 절대 안 팔 테야. 가보로 후손에게 물려줘야지.”
“이런. 그런 걸 노리고 당신에게 접근하는 여자가 있을지도 몰라요. 소문내지 말아요.”
“밍키 엄마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데, 밍키 엄마만 이 책 노리지 않으면 되잖아요? 설마 훔칠 거 아니죠? 이 책 없어지면 범인은 밍키 엄마뿐인데, 도난 보험이라도 들어야 하나?”
“이봐요. 칼리프 아빠. 이제 보니까 나보다 훨씬 중증 골수 마니아네. 나보고 이상한 여자 취급하더니, 지금 그쪽이 훨씬 이상하거든요.”
“아하하. 그런가요? 자자. 추운 데서 떨지 말고 따뜻한 데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로 하죠.”
“그래요. 흥. 정말 이제 누가 더 골수 마니안지 모르겠네요.”
(해가 진 후)
“칼리프. 오래 기다렸지? 추웠겠구나. 미안. 이야기가 길어져서. 이런. 벌써 캄캄하네. 어서 가자. 저녁 먹으러 가야지.”
“칼리프 아빠. 저도 저녁 먹으러 갈게요. 우리 밍키도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네. 미안해. 밍키. 어서 집에 가자. 우리 수다가 길어져서 애들이 밖에서 묶여서 오도 가도 못 하고 꽁꽁 얼었네요. 그럼 다음 주에 봐요. 칼리프 아빠.”
(우리 집)
“야옹!”
“아. 술탄. 미안해. 많이 늦었지? 설마 너 나 기다렸어? 아닌가. 칼리프를 기다린 건가? 밥은 그릇에 있으니 밥 때문은 아니고, 설마 정말로 나 기다린 거야? 이런 기특할 때가. 앞으로는 제시간에 꼬박꼬박 들어올 게 아니라 좀 늦게 오고 그래야겠다. 술탄이 이리 마중 나와서 말을 걸어주고 하는 걸 보려면.”
“형님. 저 왔어요. 아. 추워서 혼났네. 오늘 밍키 엄마랑 집사가 너무너무 즐거운 대화를 길게 하는 바람에 나랑 밍키가 밖에서 동태가 되었어요. 아직 추워. 덜덜덜.”
“즐거운 대화를 길게 했다고, 네가 밖에서 얼든 말든 상관도 안 하고?”
“그랬다니까요. 저는 우리 집사가 그리 즐겁게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비록 추워서 떨었지만 기뻤다고요. 형님도 집사가 얼마나 즐거워하는지를 봤어야 했는데.”
“이런, 결국 옆집 마녀의 공인가? 아니지. 이건 분명히 하늘에 계신 누님이 우리 집사를 위해서 행운을 빌어줬기 때문일 거야. 틀림없어. 누님은 우리 집사를 좋아했고 감사했으니까.”
“누님의 염원이건 아니건 간에 어쨌든 옆집 마녀가 우리 집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니까. 우리 마녀를 조금은 용서해 주기로 하죠.”
“아냐. 아직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잖아. 지금은 그냥 민폐녀가 아니라 대화녀의 수준에 오른 것뿐이야. 그래도 즐거운 대화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여자 사람 친구까지는 만날 수 있었네. 앞으로 진도가 어찌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요. 형님. 첫술에 배부르겠어요? 이 정도라도 된 것이 어디예요? 적어도 집사가 황금 같은 주말에 개하고 산책하는 일 외에는 할 일 없는 불쌍한 청년의 신세는 벗어났잖아요?”
“그렇구나. 그럼 넌 앞으로는 다른 여자는 알아보지 않을 예정이야?”
“글쎄요. 다른 여자들을 더 찾아야 하나요?”
“그래도 모르니까, 대화녀보다 더 예쁜 여자가 있는지 눈뜨고 살펴봐. 첫눈에 여자 사람 친구가 아니라 여자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그런가요? 우리 집사가 그렇게 문어 다리는 아닐 것 같은데.”
“야. 남자는 열 예쁜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 법이야. 단순한 대화녀보다 더 상위의 관계를 지향하는 여자가 필요할 수도 있지.”
“왠지 내키지 않는데요. 지금 대화녀랑 안 만나면 모를까? 형님은 저랑 여자를 생각하는 범주가 좀 다른 것 같네요. 형님이 술탄 출신이라서 그런가? 저는 일부일처제 출신이라 좀 보수적인데요.”
“그런가? 나는 후궁이 몇 명인지도 모를 만큼 여자가 많았으니까. 여자는 그냥 재산. 물건. 소모품. 자식을 낳아주는 존재. 그 정도지.”
“역시. 형님은 현대 대한민국의 남녀관계와는 무관한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 여기서 그런 생각 하면 아주아주 나쁜 놈이라고요. 그리고 저는 그렇게 못해요. 하기 싫어요. 다른 여자를 찾고 싶으면 형님이 직접 하시든가요.”
“너 이제 나한테 대들고 반항까지 하는구나. 많이 컸다 이거지? 이놈이 키워준 은공도 모르고. 기가 차네.”
“형님이 절 키워주신 건 당연히 알죠. 깊이 감사하고 있고요.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다른 문제예요. 은혜를 모르는 게 아니라고요. 형님. 언제까지 술탄의 사고방식에서 머무르시면 안 돼요. 여기는 현대 대한민국이고요. 일부일처제가 당연한 곳이에요. 나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잘났다. 정말. 존경받는 4대 칼리프 ‘알리’조차도 부인이 몇 명이었는지 알아?”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요. 흥!”
“이놈 보게. 이제 다 컸다 이거지?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정말 섭섭해서 눈물이 다 나오려 한다.”
“형님. 너무 그러시지 마세요. 제가 언제 대들었다고 그러세요? 자자. 진정하시고 형님이 아주 오랫동안 투르크 술탄이었던 점을 인정해요. 이해도 조금은 되고요. 하지만 형님. 여기는 옛날 투르크도 아니고 형님도 술탄이 아니에요. 형님도 대한민국의 주민으로 살 준비를 하셔야죠. 앞으로 여기서 사람으로 사시고 싶으시면.”
“하긴. 다음엔 대한민국 국민이 될 것 같으니까. 좀 적응이 필요하긴 해. 이제 네가 나를 가르치고 깨우치는구나. 칼리프.”
“삼척동자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야죠.”
(며칠 후, 회사)
“여보세욧. 칼리프 아빠. 아 지금 근무 중이라는 걸 알지만, 급한 일이라 전화했어요. 변 작가님이 12번째 작품은 로맨스라고 오늘 발표했어요. 대박 사건이죠. 지금까지, 스릴러, 미스테리, 추리물, 무협물, 판타지, 미래공상과학, 역사물 계통의 작품을 쓰셨던 분이 로맨스는 처음이거든요. 이봐요. 듣고 있어요?”
“네. 듣고 있습니다. 밍키 어머님. 지금 근무 중이고요. 제가 나중에 다시 걸죠. 뚝.”
“자네 지금 사적인 통화 하는 건가?”
“아닙니다. 끊었습니다. 네. 계속 말씀하세요. 부장님.”
“그래. 자네 이번 프로젝트는 잘되고 있는 거지?”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야. 자네 같은 말단사원의 의견을 수렴해서 진행한 거니까, 잘못되면 나도 책임을 면치 못해. 믿고 맡겼으면 제대로 된 결과가 나와야지.”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겠네만 이번 프로젝트는 자네가 주장한 것을 온전히 믿고 맡긴 것이니까, 그 결과에 따른 책임도 자네가 져야 하네. 잘 새겨듣게.”
“네, 부장님.”
“그럼, 계속 일하게. 난 가겠네.”
“넷.”
“휴우. 책임감이 막중하구나. 이 일이 잘되면 승진은 따논 당상이지만, 만약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사직해야겠지. 그러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 본래의 계획대로 박사과정에 들어가야지. 열심히 저축도 했고, 하지만 그다음은? 나도 몰라. 거기까지 준비는 못 했어. 지금 전세아파트도 부모님께서 해주신 것인데, 더 이상 손을 벌릴 순 없어. 부모님은 장가 밑천이라고 얻어주신 집인데, 결혼할 생각도 안 하고 공부할 생각을 한다고 타박하시겠지? 하아.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될까? ‘띵똥’. 뭐야? 아, 밍키 엄마가 문자를 쳤네. 뭐라는 거야? 지금 나는 심각한 상황인데, 물론 변 작가님 근황이 놀랍긴 하지만, 공무원들은 참 마음 편한 직종인 것 같군. 근무 중에도 이런 전화, 문자를 할 수 있다니. 조금 부러운데. 퇴근 전에는 답장 안 할 테야. 왠지 심통이 난다.”
(우리 집)
“얘들아, 아빠 왔다. 오늘 좀 피곤하구나. 씻고 일찍 자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구나. 내가 어쩌자고 그런 프로젝트를 기획 지원해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건지.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시키는 일만 하면 중간은 갈 텐데 말이야. 얘들아, 남들 앞에서 나서서 행동하는 건 그만한 각오가 필요해. 끝까지 완수할 능력과 책임이 따르지. 이번 일이 내 인생에 큰 변수가 될 것 같아. 자금이 엄청 많이 들어갔거든. 회사에서도 이렇게 대규모 프로젝트, 그것도 말단사원의 의견을 반영한 기획은 지금껏 없었다지. 그때 내가 정신이 좀 나갔었나 봐. 아냐. 시도할만한 일이었어. 후회하지 말자. 나는 분명히 회사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서 주장한 것이니까. 그리고 회사도 그걸 인정했으니까, 진행한 것이지. 마음에 안 들거나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했으면 진행하지 않았겠지? 온전히 나에게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형님, 집사가 큰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요. 심각해 보여요. 안색도 나쁘고.”
“그러게. 요즘 붕붕 떠서 난리 치더니, 갑자기 저기압이네.”
“집사가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나 봐요. 이런 일은 우리도 도와줄 수 없는데.”
“그렇지. 뭐.”
“만약 회사에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집사는 실업자가 되는 거예요?”
“백수가 되거나 다른 일을 찾아야 할걸.”
“그럼 우리 생활비는 어떻게 하죠? 아니, 당장 집사, 먹고 살 형편은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걱정까지는 안 해도 돼. 하지만 정말 생활이 어려우면 키우던 애완동물들을 파양하는 집이 있다고는 해. 우리 집사는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너와 나도 다른 집으로 각각 파양될 수도 있겠네.”
“아니,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그리 쉽게 하세요? 전혀 걱정이 안 되세요?”
“미리 걱정하지 마. 최악의 경우를 말한 것뿐이야.”
“따르릉.”
“여보세요. 네. 밍키 엄마. 네. 퇴근했어요. 말씀하세요. 아. 변 작가님 후속작이요? 네.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로맨스라고. 안 놀라긴요. 놀랬죠. 물론. 아. 내가 지금 좀 일이 바빠서, 그런 것뿐이에요. 저기 저, 밍키 엄마는 공무원 일 어때요?”
“우리 일이야 늘 똑같죠. 뭐. 하루도 다를 바 없는 단순반복노동?”
“마음 편해서 좋으시겠어요?”
“하지만 절대 재미있거나 보람되진 않아요. 안정된 직장, 정확한 출퇴근 시간이 장점이긴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매우 지루하고, 내가 기계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래서 더욱 즐거운 자극이 필요하죠. 변 작가님의 소설 같은 뭐 그런 것? 칼리프 아빠는 안 그래요?”
“우리 회사는 회사 일이 워낙 정신없고 바쁘고 매 순간 줄타기를 하는 것 같아서 지루할 틈이 없네요. 잘 되면 승진, 못하면 퇴사. 모 아니면 도? 나도 마음 편한 일을 찾는다고 했는데 그런 직종이 아니었더라고요. 아닌가? 내가 나서서 그런 건가? 가만있었으면 평타는 쳤을텐데.”
“아. 일이 힘든 모양이네요? 그런 상황이라면 변 작가님의 신간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겠네요. 그러면 이번 주말엔 나오실 순 있나요?”
“이번 주말에도 출근해야 할 것 같아서. 못 나가겠어요. 칼리프에겐 미안하지만, 이 프로젝트 성공 못 하면 회사에도 큰 타격이고, 내가 책임을 져야 해요.”
“그렇군요. 그럼, 일 잘 마치고 나서 만나요. 나는 항상 주말에 산책하러 나갈 테니까. 칼리프 아빠는 나올 수 있을 때 나와요. 그럼 끊을게요. 일 잘하고요. 파이팅. 힘내요.”
“네. 밍키 엄마도 잘 지내요.”
“칼리프. 너 이번 주말 못 나가겠네. 집사. 회사 간대.”
“저도 들었어요. 제가 산책 못 하는 건 상관없어요. 집사가 일 무사히 잘 마쳤으면 좋겠어요.”
“효자 났다. 정말.”
“우리 가족이 이산가족이 될지도 모르는데, 어찌 걱정이 안 되겠어요? 형님은 참 마음이 편하신 분이네요.”
“케세라세라. 네가 걱정한다고 일이 잘되고, 네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이 잘못되는 건 아니란다. 괜한 걱정은 네 건강만 상할 뿐이야. 집사는 잘 극복할 거야. 뭐 못해도 할 수 없고. 그건 그때 걱정하면 돼. 알겠니? 미리 사서 걱정하지 마라.”
(회사)
“제 책임입니다. 여기 사직서 제출합니다. 일이 잘 마무리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후임이 올 때까지 정리하고 후임이 오는 대로 나가겠습니다.”
“알겠네. 사직서 받아두지. 곧 후임이 올 테니 인수인계 잘하게.”
(우리 집)
“얘들아, 아빠 왔다. 오늘은 너희들 특별 간식을 사 왔어. 매일 똑같은 것만 먹으니 지겹지?”
“오늘은 또 왜 저리 호들갑이지? 일이 잘됐나?”
“아니요. 형님. 오히려 더 불안해 보이는데요. 일이 잘못된 것 같아요.”
“얘들아. 다음 달부터는 아빠랑 같이 지내게 될 거야. 후임이 곧 오면 이달 말까지 인수인계해주고 나는 나오는 거지. 그러면 너희들이랑 24시간 같이 있을 수 있어. 칼리프 넌 매일 산책할 수 있어. 잘 됐지?”
“이런. 잘렸나 보네.”
“형님. 이럴 수가. 내 예감이 맞았어. 우리 이제 어떡해요?”
“어떡하긴. 우리는 똑같이 지내면 되는 거야. 만약 파양된다면 헤어지겠네. 두 마리를 한 집에서 데려가는 일은 거의 없어. 게다가 나는 고양이고 넌 개니까. 더더욱. 보통은 고양이 키우는 집은 고양이만 키워. 개 키우는 집은 개만 키우고. 원래 둘은 사이가 좋지 않거든. 넌 내가 특별히 애지중지한 거고.”
“네. 형님 잘 알고 있어요. 형님이 절 많이 아끼신다는 걸요. 하지만 우리 집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러다 상심해서 병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죠?”
“회사에서 잘리는 백수가 집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잠시 쉬다가 다른 직장을 구하겠지. 아니면 나도 모르겠다.”
(옆집 앞)
“띵똥. 띵똥.”
“누구세요? 밖에 걸린 것 못 보셨어요? 방해하지 말라고 붙여놨는데. 대체 누구야?
(현관문 덜컥)
어라? 옆집 총각. 무슨 일이야?”
“작가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많이 바쁘신가요?”
“나야 뭐. 항상 바쁘지. 요즘 새 작품 진도가 빠르거든. 곧 출간될 것 같아. 그래. 무슨 일이야?”
“내가 오늘 술이 마시고 싶은데, 한 잔 사주실 수 있나요?”
“뭐라고? 나는 술을 안 마시는데, 그리고 옆집 총각 술 좋아했어?”
“아뇨. 저도 술 안 마셔요.”
“그런데 왜 오늘 술이 마시고 싶어?”
“작가님은 잘 드실 줄 알고 배우려고 왔는데. 잘못짚었네.”
“음. 보통 작가들이 대부분 술고래에 줄담배이긴 하지만, 난 안 그래. 그래서 작가모임에도 거의 나가지 않아. 다들 모이면 담배 연기 자욱한 곳에서 술을 밤새 퍼마시거든. 정말 이상한 집단이야. 뭐. 하긴 나도 이상한 여자 취급을 받긴 해. 은둔 외톨이라고. 이런. 추운데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잠시 들어오든가. 아니면 내가 자기 집으로 갈까? 우리 집은 청소가 안 되어 엉망진창이라서 좀 그러네.”
“그럼 우리 집에 오실래요? 칼리프랑 술탄이 있는 건 괜찮으시죠?”
“그야. 당연하지. 근데 뭐 먹을 거나 마실 것은 있나?”
“애들 사료밖에 없는데, 나가서 사 올까요?”
“아냐.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건 항상 쟁여두고 있으니까, 내가 갖고 갈게. 먼저 가 있어. 챙겨 갈 테니.”
“네, 대문 안 잠그고 있을 테니 빨리 오세요.”
(우리 집)
“실례합니다.”
“으악. 이게 누구야? 옆집 마녀 아니야?”
“그러게요. 우리 집엔 웬일이지?”
“작가님, 들어오세요. 대문은 자동잠금 돼요.”
“야식으로 먹기 좋은 어묵탕. 방금 끓여 왔어. 혹시 몰라서, 단 것 좋아해? 케이크하고 초콜릿도 갖고 왔는데, 두고 먹으라고. 기분이 우울할 때는 단 것이 필요한 법이야.”
“제가 우울한지 어찌 아시고?”
“뭐, 척 하면 삼천리지. 딱 보면 모르나? 별일 없으면 우리 집에 감히 초인종을 누르겠어? 안 그래?”
“역시. 작가님. 맞아요. 오죽하면 제가 술을 다 사달라고 했겠어요?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그래. 여기 식혜도 있어. 술 대신 이것 마셔. 우리 동네에선 단술이라고 하는데.”
“작가님. 지방분이세요? 몰랐네.”
“난 경남 출신이야. 대학 때부터 서울로 와서 여태 지내는 거야. 자 마셔. 시원하지? 얼음 동동 식혜.”
“맛있네요. 요즘 입이 써서 단맛도 모르고 지냈는데.”
“저런. 대체 무슨 일이야? 말해 봐. 그러려고 나 찾은 거잖아?”
“실은 몇 달 전, 제가 호기롭게 큰 프로젝트를 제안해서 그게 채택되었어요. 말단인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런데 지금 결과가 무척 나빠서 제가 책임을 지고 퇴사했어요. 어제 사직서 내고 모래 후임이 오면 월말까지 인수인계하고 그만두기로 했어요. 지금 출근하는 것도, 정말 죽을 맛이고. 후임 인수인계만 아니면 차라기 안 나가고 싶어요. 눈총이 따갑거든요. 회사에서 큰 손해를 봤기 때문에.”
“음. 그렇군. 그래서 혼자 책임지고 퇴사했다고?”
“네. 그런 거죠.”
“그래서 총각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데?”
“회사 들어가기 전에는 박사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돈을 벌어야 해서 입사했어요. 벌어서 공부하려고, 그런데 막상 퇴사하려니 공부를 해야 하나 싶기도 해요. 공부하는 건 시간과 노력과 돈을 쓰기만 하는 거고, 공부 마친다고 장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전공도 사학과고. 학비는 그동안 모았지만, 그 이후는 전혀 준비가 안 되었어요. 박사 마치면 학교에서 일을 찾아야 하는데, 교수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그게 안 되면 그야말로 나이만 들고 학력만 높아서 취업이 거의 불가능해요. 그래서 다시 취업해야 하나, 공부해야 하나 고민이라서, 이런 일 의논할 상대가 없어요. 친구나 동료들은 다 열심히 직장에 다니고 있고, 결혼한 친구들은 더더욱 저랑 다른 환경이라 의논 상대가 안 되죠.”
“그래서. 자넨 뭘 하고 싶냐고?”
“미래 걱정을 안 해도 되면 공부를 하고 싶죠. 하지만 공부만 하다 평생 백수 노총각으로 늙을지도 모르는데 그 생각하면 끔찍해서요, 더 나이 들기 전에 취업해야 결혼도 하고 자식도 키울 수 있겠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그 덕분에 다른 것들을 포기했지. 하나를 얻으면 나머지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해. 그래서 가장 원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뭘 선택하든지 후회하는 부분이 있거든. 평범한 직장, 가정을 갖고 싶으면 공부를 포기해야지. 공부를 선택했으면 안정된 직장과 가정은 못 가질 수도 있고. 총각 집은 부유한가?”
“아뇨. 지금 아파트 전세 해주신 것이 마지막이라고 하셨어요. 저도 더 손을 벌릴 형편은 안 돼요. 그리고 집에서는 빨리 결혼해서 안정하길 바라세요. 제가 잘린 줄은 모르고 계시고.”
“혹시 장남, 장손인가?”
“장남이긴 한데, 장손은 아니고, 아버지가 둘째시고 큰아버지도 아들이 둘이고, 우리 집도 아들이 둘인데, 저는 이렇고, 동생은 직장에 다니고 있어요. 여자친구도 있고요. 나 때문에 결혼 못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서 부모님은 빨리 선보라고 하시고, 정말 사면초가예요.”
“자자. 어묵탕 다 식겠네. 좀 먹어. 먹으면서 생각해.”
“아. 맛있어요. 작가님. 요리 솜씨가 좋으시네요.”
“이게 무슨 요리야? 포장지에 적힌 대로 조리만 하면 되는 반조리식품이잖아. 초등학생들도 다 만들 수 있어. 나는 귀찮아서 손이 많이 가고 시간 걸리는 요리는 안 해. 그래도 외부인이 들락거리는 것이 싫어서 배달음식도 잘 안 시켜 먹으니까, 요리 비슷하게 해서 먹지. 장은 인터넷으로 보고 배달시간까지 내가 정할 수 있으니까, 나갈 일 없어. 외부인 올 일도 없고.”
“그러시군요. 나는 거의 도시락집과 편의점을 이용하고, 얘들은 사료만 주고. 요리 잘 못 해요. 귀찮기도 하고. 혼자 있으니까, 해 먹는 것과 사 먹는 게 별 차이도 없어요. 둘만 되어도 해 먹는 것이 싸게 치인다고 하는데, 전 혼자니까요.”
“그래서 주로 도시락을 사 먹는다고?”
“그렇죠. 뭐. 한동안은 편의점을 돌면서 도시락을 섭렵했는데, 요즘은 도시락 전문점을 이용해요. 편의점 도시락은 간이 짜고 달고 강해서 금방 질리거든요. 하하.”
“나는 반조리 식품을 주로 이용해. 간단하면서도 집에서 해먹을 수 있으니까. 조리과정과 설거지는 해야 하지만. 그 정도도 안 하면 나는 정말 운동 부족이거든. 운동은 거의 안 하지. 그래서 지금 몸매가 이 모양이야. 원래부터 뚱뚱했던 건 아니야. 집밖에 나가질 않으니까, 절대적으로 운동량이 부족해서 그래.”
“정말이지. 작가님. 글 쓰는 일도 중요하지만, 운동도 좀 하셔야 하지 않나요? 몸매를 떠나서 건강이 걱정 안 되세요? 건강검진은 꼬박꼬박 받으세요?”
“하긴, 국가에서 2년마다 검진하라고 통지 오잖아? 그건 하고 있어. 의사는 운동 부족이라고, 대사증후군 증상이 있다고 하더라고.”
“역시. 운동하셔야겠네. 저는 주말마다 칼리프랑 산책하니까요. 그때 둘이 같이 뛰어요. 제법 운동이 되거든요. 이제 백수 되면 매일 하려고요. 집안에만 있으면 더 우울해질 것이고, 땀이라도 흘리면 좀 기분 전환이 되거든요.”
“집 밖엔 거의 나가지 않아서, 원고도 다 이메일로 보내고, 출판사도 거의 나간 적이 없어. 인터뷰도 전화나 메일로 보내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극히 없지. 그러고 보면 옆집 총각이 제일 친한 사람이야. 이렇게 얼굴 많이 본 사람은 내 가족 외에는 없어. 그리고 가족도 멀리 있으니까, 거의 못 보지. 명절에도 안 내려가니까.”
“명절엔 가셔야죠. 작가님.”
“가봤자, 왜 시집 안 가냐고 닦달만 하고, 서로 얼굴 붉힐 일뿐인데, 각자 사는 거지. 이 나이쯤 되면 거의 포기하셔. 40살까지는 매주 선보라고 난리 시더니, 이제 50이니까, 포기하셨지.”
“생각보다 많이 잡수셨네요. 그 정도까지는 몰랐어요. 40은 넘었을 거라 짐작했지만, 저는 32살이거든요.”
“아유. 정말 가장 예쁘고 건강할 때구먼. 난 그땐 날아다녔어요. 지금보다 20킬로그램은 적게 나갔다고. 아닌가? 15킬로그램인가?”
“살이 좀 빠지시면 훨씬 더 젊어 보이실 텐데, 안타까워요. 작가님. 저랑 칼리프 산책할 때 같이 나가보시는 건 어때요? 사람 많은 시간이 싫으시면 새벽이나 밤중은 어때요? 전 앞으로 시간 많은데.”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겠지만 총각이 혼자 있다가 더 우울해할까 봐 걱정돼서 같이 운동해야겠네. 자네는 언제가 좋아? 난 역시 사람들이 없는 시간이 좋아. 새벽도 괜찮고, 한밤중도 괜찮아.”
“그럼 새벽이 좋겠어요. 밤엔 연인들이 데이트를 많이 해서 서로 불편할 것 같아요. 나도 샘나고. 작가님도 외부인들에게 눈에 띌 거고.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편이 좋으시죠?”
“물론.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싫어해. 그럼 새벽 몇 시쯤 정할까?”
“아직은 추운 겨울이니까, 6시? 여름엔 5시. 그렇게 하죠. 새벽 운동을 하면 혹시 나중에 출근하더라도 계속 운동할 수 있으니까요. 규칙적인 생활이 중요하거든요. 나도 가능한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네요.”
“알았어. 그럼 대문 앞에서 매일 아침 6시에 보자고.”
“네, 작가님, 오늘 일부러 바쁜 시간 내어주시고 정말 감사해요. 요즘 많이 기가 죽어서.... 실은 여자친구 비슷한 사람도 만났는데, 직장에서 잘리는 바람에 만나지도 못하고 있어요. 퇴사했다는 말도 하기 싫고 자존심도 상하고,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거든요. 휴우. 속상해요. 이제 겨우 여자친구가 생기려던 참이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저런, 그랬어? 속상하겠네. 지금 보니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네. 음. 어쨌든 갈게. 내일 아침 6시, 대문 앞에서 보자고.”
“네. 작가님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 뵈어요.”
(현관문 잠금)
“칼리프. 들었지? 집사가 직장에서 잘려서 고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밍키 엄마를 못 만나는 거였던 거지?”
“음. 생각보다 밍키 엄마를 좋아했나 보네요. 하긴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자신은 직장에서 잘리면 공무원 여자친구에게 떳떳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아직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도 아니고, 능력이 없으면 아무래도 여자친구 만나고 사귀기는 좀 부담스럽겠죠. 이런. 우리 집사 불쌍해서 어떡해요?”
“큰일이네. 그래서 지금 밍키 엄마 대신 옆집 마녀에게 신세 한탄하고 같이 매일 운동하러 다니겠다는 거 아냐?”
“지금으로 봐선 주말 오후에 산책하러 가는 일상 대신 매일 새벽 운동으로 바뀌겠네요. 그리고 운동 파트너도 밍키 엄마 대신 옆집 마녀 작가로. 이것은 우리가 원하던 그림이 아닌데. 앞으로 밍키 엄마를 볼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집사가 스스로 당당하다고 생각되는 직장에 새로 취업하기 전까지는.”
“안돼. 어서 취업하게 만들어야 해. 그래야 옆집 마녀와 같이 운동 못 하지. 그리고 다시 밍키 엄마랑 운동하고 대화하고 데이트하게 만들어야 해.”
“저도 그러고 싶긴 하지만 형님, 우리가 무슨 재주로 집사를 좋은 직장에 취업시키죠? 이 일은 부모 형제, 은사님도 도와주기 힘든 일인데요?”
“정말 죽겠네. 누님, 하늘에서 보고 계신 거죠? 일이 어떻게 이렇게 진행될 수 있죠? 누님. 우리 집사가 정말 걱정된다면 좋은 곳에 취업시켜 주세요. 이러다가 마녀에게 홀라당 넘어가면 어떻게 해요?”
“저, 형님. 아무리 그래도 집사가 옆집 마녀에게 홀라당 넘어갈 만큼 마녀가 예쁜 것도 아니고 나이도 엄청나게 연상인데, 설마 집사가 그렇기야 하겠어요? 집사도 눈이 있는데, 아무리 백수라지만. 형님이 직접 그러셨잖아요? 우리 집사는 외모에 민감하다고. 아무리 봐도 옆집 마녀는 절세미녀는 아니잖아요. 뚱뚱하고 늙고 성격도 이상하고 여자로서 매력은 제로라고 생각합니다만.”
“지금 집사는 정상이 아니니까. 자신감도 없고, 그래서 예쁜 공무원인 밍키 엄마가 부담스러운 거야. 반면에 마녀는 전혀 부담이 없으니까, 하고 싶은 말도 다 하고, 당당하게 데이트 신청도 하는 거잖아?”
“아침 운동이 데이트 신청인가요?”
“그럼. 넌 그게 무엇으로 보이는데? 다 그렇게 작업하는 거지. 그것도 단발성 데이트도 아니고 계속할 수 있는 거 아냐? 새벽 운동은 나중에 취업해도 할 수 있는 거야. 이러다가 정이라도 들면 어떡하라고? 마녀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지. 원래 노처녀고. 결혼은 생각지도 않았을 거야. 보아하니 남자친구도 없었을 것 같아. 그 성격에. 그 외모에 누가 마녀랑 사귀었겠어?”
“음. 상황이 심각하군요.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들이 다 무의미해지는데요. 그래도 형님, 너무 앞서가지는 말자고요. 정말 편안한 옆집 누님이라서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겐 말 그리 쉽게 못 해요. 떨려서. 내가 보기에도 밍키 엄마를 좋아했던 것 같네요. 서로 말이 잘 통하고 대화하면서 같이 웃고 떠들고, 참 보기 좋았는데. 앞으로 밍키 엄마를 볼 수 없다니 좀 아쉬운데요. 밍키도 못 보고.”
“밍키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너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전혀 모르는 거냐?”
“음. 전 잘 모르겠어요. 형님. 그래도 이렇게 속상하고 힘든 시기에 의논할 상대가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전 집사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다음 날 아침. 아파트 복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작가님. 상쾌한 아침이죠?”
“응, 잘 잤어? 옆집 총각. 자 어디로 가면 되지?”
“칼리프가 새벽에 깨웠더니 정신이 없네요. 항상 산책하는 공원으로 가요. 지금 시간엔 거의 사람이 없을 거예요. 나도 이 시간은 처음이긴 한데. 한번 가보죠. 뭐. 자 칼리프. 정신 차리고 가자.”
(공원)
“아직은 겨울이라 그런지 이 시간에 사람이 많지는 않네요. 작가님도 마스크를 쓰시고 모자를 쓰시니까, 아무도 못 알아볼 거예요. 그리고 작가님은 얼굴 노출하신 적이 거의 없어서 아마 마스크를 벗어도 아무도 못 알아볼 거예요. 안 그래요? 작가님?”
“하긴 내 얼굴을 노출 시킨 일은 없어. 사진도 한 번도 나간 적이 없고 그냥 내가 얼굴을 보이기 싫은 것뿐이야.”
“지금은 그래도 여름엔 더워서 마스크 쓰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때는 그때 생각해보지. 아냐. 여름에도 자외선 차단 마스크를 얼굴에 쓰고 다닌다고. 그러면 되겠네.”
“뭐, 그러시던지요. 어쨌든 밖에 나와서 운동하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니까요. 저도 이 이상은 요구하지 않을게요.”
“정말 얼마 만의 바깥 외출인지 모르겠네. 바깥 공기는 이런 거구나.”
“새벽 공기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시간, 시간 공기의 맛이 다르다더니 정말 그러네요. 나도 새벽 공기는 거의 마신 적이 없어서. 정말 상쾌해요.”
“한 시간 정도 운동하고 들어가도록 하지. 나도 평생 움직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와서 몸이 놀랄 것 같아.”
“그렇게 많이요? 난 30분 생각했는데, 작가님이 원하시면 1시간 하죠. 뭐.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적어도 40분 이상 땀이 날 때까지 해야 운동 효과가 있대. 그래서 1시간은 하려고. 이번 기회에 살도 좀 빼고 대사증후군도 고쳐야지.”
“하하하. 그런 야무진 목표가 있으셨구나. 암요. 그러셔야죠. 이왕 어렵게 시작한 거. 확실히 하자고요. 작가님. 원래 체중 15킬로그램 빼는 거였죠? 목표 체중에 도달하시면 제가 한턱, 크게 쏠게요. 비록 백수지만.”
“내가 15킬로그램을 빼면 내가 크게 쏠게. 정말 기대된다. 예전 몸매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야. 어머. 생각만 해도 기쁘다. 열심히 해야겠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총각. 아무리 그래도 나 혼자서는 새벽 운동 못 하겠어. 내가 15킬로그램 뺄 때까지라도 도와줘. 부탁해. 대신 내가 아침 먹을 때 와서 같이 먹어도 좋아. 매일 도시락만 먹는 것도 안 좋아. 그리고 생활비도 없을 거고. 세끼는 안되더라도 아침밥은 같이 먹자.”
“정말이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생각도 못 한 횡재인데요. 집밥을 먹은 게 대체 얼마 만이지? 정말 신난다. 야호.”
“반조리 식품이라니까.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아.”
“아뇨. 기대할 거예요. 와하하.”
(운동 후)
“정말, 겨울이라도 땀이 나는구나. 각자 씻고, 아침 차릴 테니까, 8시에 우리 집으로 와. 매일 8시에 아침 먹자고. 규칙적으로. 나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살을 빼겠어.”
“네. 씻고 8시에 갈게요. 잠시 후에 뵈어요. 작가님. 맛있는 거 많이 차려주세요.”
“부담 주지 마. 그러면 나 밥 같이 못 먹어. 평소에 내가 먹던 대로 차릴 거야. 안 그러면 나도 부담스러워서 못 차려줘. 알겠지?”
“농담이에요. 작가님. 공짜로 얻어먹는 주제에 제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예요? 라면이라도 감사히 먹을 거예요.”
“아. 적어도 아침밥으로 라면은 먹지 않아. 그건 간식이지. 식사가 아니지. 적어도 밥하고 국은 있으니까, 이따 봐.”
“넷.”
(우리 집)
“칼리프. 새벽 운동 어땠냐? 주말 오후에 하는 것보다 괜찮지 않아? 이제 매일 새벽에 하니까, 너도 좋지? 일주일에 한두 번 하는 것보다 매일매일 하는 것이 훨씬 좋을 거 아냐?”
“멍.”
“칼리프. 이제 오냐?”
“네, 형님. 다녀 왔어요. 새벽이라 좀 춥긴 해도 상쾌해요. 본래 개들은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니까. 전 새벽 운동 좋아요. 또 매일 하게 되어서 더 좋네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마녀랑 어땠어?”
“저기요. 형님. 마녀가 천사처럼 굴고 있어요.”
“그게 또 무슨 소리야?”
“매일 6시에 같이 운동하고 그 대가로 매일 아침 8시에 밥 먹으러 오라는데요? 집사도 무척 기뻐하는데요. 집밥 먹는 것이 얼마 만이냐면서 호들갑을 떨던데요.”
“아침밥을 같이 먹는다고? 아침 운동만 같이 하는 게 아니라?”
“네. 매일 아침에 같이 운동하고 같이 아침 먹자고 했어요.”
“이럴 수가. 저 마녀 보통이 아니네. 완전히 불여우네 불여우.”
“그래도 하루 세끼 다 같이 먹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시끄러워. 넌 아직 아기라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아무리 그러셔도 전 집사가 제대로 집밥 먹는 것이 좋은데요.”
“몰라. 난 캣타워에 올라갈 테니까 넌 먹든지 쉬든지 마음대로 해.”
“왜 심통이실까? 난 좋기만 한데.”
(옆집 앞)
“작가님, 똑똑똑.”
“들어와. 문 열려 있지? 자 아침 먹자.”
“우와. 진수성찬인데요. 오늘 누구 생일이에요”
“아니, 평소에도 난, 이 정도는 해 먹어. 돈 벌어서 쓸 데가 먹는 데밖에 없다고. 사치도 안 하고, 나갈 일도 없으니까.”
“이 정도인 줄 알았으면 세 끼 다 해달라고 부탁드리고 싶군요. 전 제 생일에도 이렇게 못 먹어요. 아니에요. 감격했어요. 눈물 나려고 해요.”
“저런.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건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해. 아무리 혼자 살아도 말이야. 난 하루에 5끼를 먹어. 그래서 옆집 총각보고 끼니를 다 챙겨 먹자 못 하는 거야. 다 챙겨 먹으면 총각도 나처럼 돼지가 될 거라고.”
“5끼를 드신다고요? 하루종일 글만 쓰시는 양반이?”
“그래. 글 쓰는 것도 에너지 소모가 커.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간식도 많이 먹어. 단것도 많이 먹지. 참, 전에 줬던 초콜릿과 케이크 다 먹었어?”
“네. 아직 좀 남았는데요. 아껴 먹느라고. 되게 비싼 것 같던데요.”
“난 맛 없는 건 안 먹어. 맛있는 거만 먹지. 뭐 더 먹고 싶으면 더 싸줄게. 살찔 것 걱정되지 않는다면 말이야.”
“저기요. 작가님. 부탁인데, 5끼 드시는 거. 3끼로 줄이시면 안 돼요?”
“3끼만 먹으라고?”
“네. 3끼만 드시고 간식도 절반으로 줄이시는 것은 어떨까요?”
“갑자기 그렇게 확 줄이면 내가 배고파서 어떡해? 오늘도 안 하던 운동해서 배가 몹시 고파서 평소보다 더 먹을 것 같은데.”
“많이 드시더라도, 끼니 수는 3번으로 줄이시면 좋겠어요. 작가님.”
“뭐 그리 단호하고 무섭게 말하고 그래? 긴장되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제 말대로 따라 주세요. 작가님.”
“알았어. 노력해보지.”
“제가 확인할 방법이 없을까요?”
“됐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한다면 하는 거니까. 속이진 않아. 하루에 3끼만 먹고, 간식도 절반으로 줄일게. 됐지? 하지만 말이야. 밤새 글 쓰면 배가 고파서 야식을 안 할 수가 없는데.”
“일찍 주무세요. 이제 매일 새벽 운동하셔야 하니까.”
“그런가? 일찍 자면 야식 한 끼는 줄일 수 있겠네. 그리고 중간에 한 번 더 빼고. 알았어. 3끼만 먹지. 그리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됐지?”
“네, 오늘 아침 정말 잘 먹었어요. 내일 아침에 대문 앞에서 뵈어요. 약속 꼭 지키세요. 파이팅!”
“알았다고. 그만 말하라고.”
“헤헷. 파이팅.”
(우리 집)
“얘들아. 아침 먹고 왔다. 정말 내 평생 이렇게 화려한 아침 식사는 처음이야. 우리 엄마도 저렇게 못 차릴 텐데. 작가님. 정말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나라도 저 정도면 외식 안 하지. 시켜 먹지도 못하겠어. 맛이 없어서. 게다가 사 먹는 음식은 아무래도 비위생적이고, 조미료도 많고, 뭐 재료도 싼 것 쓰고. 하여튼. 정말 맛있었다. 기운이 나는 것 같아. 몸보신한 느낌이야. 매일 이렇게 훌륭한 아침 식사라니. 정말 기대가 커. 나 건강해질 것 같아. 얘들아.”
“야옹.”
“형님. 왜 그리 심통이세요? 집사가 맛있는 아침 먹은 것이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럴 리가? 마녀가 요리 솜씨가 좋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되니까 사실인가 싶다.”
“우리 집에 어묵탕 끓여 왔을 때도 집사가 맛있다고 했었잖아요? 괜히 한 칭찬이 아니었나 보네요.”
“그러게. 요리실력이 있었을 줄이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뚱보 노처녀주제에 요리는 잘하나 보네.”
“그러게요. 음식이 맛있으면 아무래도 살이 찌겠죠? 그래서 뚱보인가 봐요. 그건 그렇고 집사,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일은 어찌 됐는지, 통 알아보는 것 같지가 않네요. 아침 운동은 잘하고 왔지만, 앞으로의 일은 아무 생각이 없군요.”
“그러게 말이야. 오히려 취업을 우리가 더 걱정하고 있는 거야? 주객이 전도되었어. 정말이지.”
“하여튼 새로 취업을 하든 안 하든 우리가 이산가족이 되지 않고 평생 같이 살기만 하면 좋겠어요. 사료가 싸구려로 바뀌더라도. 간식을 못 먹게 되더라도.”
“칼리프. 넌 밥을 많이 먹으니까, 사료값이 나보다 훨씬 많이 들긴 하지. 운동도 시켜줘야 하고. 즉 손도 많이 가고 밥도 많이 먹으니까, 나보다는 널 먼저 파양하게 될 거야.”
“형님. 어떻게 그런 말을? 정말 너무하세요. 어헝헝. 엉엉엉.”
“아유. 전에는 일부일처제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날 면박할 때는 그리 당당하더니 왜 지금은 아기가 된 거야?”
“형님. 너무해요. 저 이제부터 절식해요? 사료 많이 먹는다고 집사가 날 쫓아낼까요?”
“농담이야. 평소대로 해. 평소대로. 괜히 밥 적게 먹다가 병이라도 나면 그게 훨씬 더, 큰일이야. 너 우리 같은 동물은 의료보험이 안 되어서 병원비 장난 아니게 비싼 거 몰라? 알겠니? 애완동물이 돈 아끼는 가장 최고의 방법은 절대 병원 갈 일을 만들지 않는 거야. 그게 효도야. 효도.”
“그런가? 하긴 전 배가 고프면 크게 병이 날 것 같긴 해요.”
“당연하지. 나도 집사에게 살갑게 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건강관리는 신경 써서 하고 있어. 병원 갈 일은 만들지 않으려고. 그게 내가 집사에게 베푸는 가장 큰 은혜야. 은혜.”
“그렇군요. 형님. 전 몰랐어요.”
(몇 주 후, 공원)
“옆집 총각? 나 살 좀 빠진 것 같지 않아?”
“겨울옷으로 무장하고 계셔서 잘 모르겠는데요. 얼굴도 마스크로 다 가리시고.”
“좀 빠졌어. 벌써 5킬로그램 뺐는데, 표가 안 나나?”
“농담이에요. 확 표가 나죠. 안 나긴 왜 안 나겠어요? 아침 먹을 때 보면 잘 보이는데요.”
“그래. 자기 말대로 식사횟수도 줄이고 간식도 줄이고 운동까지 하니까 확실히 줄긴 주네. 이제 끼니 줄인 것도 덜 괴롭고. 조금씩 적응이 되나 봐.”
“잘하고 계세요. 작가님. 조금만 더 힘내요. 다시 예전의 날씬한 몸매 찾으시라고요.”
“그래. 정말 15킬로그램 빼면 내가 크게 한 턱 낼게. 기대해도 좋아.”
“작가님. 작가님은 글 쓰는 것 외에 주로 뭘 하세요?”
“나? 글 쓰는 것 외에는 주로 글을 읽어. 당연한 거 아냐? 다른 작가 작품들도 많이 보지. 그리고 역사 서적이나 철학 서적도 틈틈이 보고 있고, 그 외는 영화를 보지. 시나리오는 어떻게 쓰나 뭐 그런 것 궁리하느라.”
“역시 작가님은 정말 작가님이시네요. 몇십 년을 그리 사신 거예요?”
“몇십 년이라? 세월이 정말 빠르거든. 나는 내가 왜 벌써 50인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자네도 내 나이 정도 되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시간은 점점 더 빨리 지나가거든. 내가 책을 안 썼다면 정말 더 허무한 인생이었을 거야. 그래도 책 11권은 남겼네. 12번째는 지금 집필 중이고, 내 새끼들이지. 적어도 자식들은 남기는 인생이니까, 그리 허무하지는 않네. 24권은 남기고 죽어야 할 텐데, 거의 절반은 이뤘네. 80이면 정신이 흐려져서 글쓰기가 쉽지 않을 거야. 최대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많이 쓰려고. 목표가 24권이야. 더 쓰면 좋겠지만 24권은 남기려고.”
“벌써 세상 떠나실 일까지 생각하시는 거예요?”
“사람들은 말이야. 꼭 영생할 것처럼 구는데,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인간은 잘 죽기 위해서 사는 거야. 죽을 때,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후회할 일은 남기지 않고 얼마나 보람되게 살았는지를 반추하면서 다음 생을 기약하는 거야. 총각, 윤회를 믿나?”
“아. 네. 저는 종교가 없어서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나는 말이야. 카자르가 죽었을 때 크게 깨달았어. 그때까지는 나도 이런 생각 못 했어. 카자르가 죽고 나서 내가 얼마나 잘못 살았는지 깨닫게 됐어. 그리고 한동안 반성하면서 카자르의 명복을 빌었어. 그러면서 나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고 반성하고 그러다가 마음이 차분해졌어. 이제는 카자르에게 고맙게 생각해. 나를 성장시키고 새 삶에 눈을 뜨게 해줘서.”
“작가님, 그러고 보니 장례식 때 몹시 서럽게 우시던데, 저도 한동안 마음이 언짢았어요. 나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겠구나 하면서요.”
“그럼,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서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어. 그리고 삶을 돌아보게 되고, 뭐 어쨌든 카자르는 내 스승이야.”
“그러고 보니 작가님, 카자르의 장례식 이후부터 저에게 말을 놓으셨는데요. 알고 계셨어요?”
“자기. 이제야 그 사실을 눈치챈 거야?”
“아뇨. 실은 진즉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작가님이 절 조금은 편하게 대하시는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백수 되고 감히 작가님 대문 초인종을 누르고 술 사달라고 그랬죠.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은 믿음이 있었거든요.”
“하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자르 장례식에 함께 있어 준 은인인데, 박대할 순 없지. 정말 고마웠어. 총각.”
“작가님, 다음에 우리 술탄과 칼리프의 장례식 때 같이 계셔 줄 수 있나요?”
“뭐? 술탄이 몇 살인데?”
“5살이요. 칼리프는 아직 1살도 안 됐고요.”
“자기, 너무 앞서가지 마. 사람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고 좀 전에 말했지? 10년 20년 후의 일은 함부로 약속하는 것이 아니야. 지키지도 못할 일은 애당초 하지 않는 법이야. 그때 내가 어찌 될지. 자기가 어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 약속, 맹세 이런 건 말이야. 신성한 거야. 목숨을 걸고 지킬 각오가 없는 것은 처음부터 하는 것이 아니야. 이승에서 지키지 못한 약속은 저승, 다음 생에서라도 지키고 갚아야 하는 거라고.”
“아, 작가님은 정말 순도 100퍼센트로 진지하시네요.”
“나는 항상 진검승부야. 대충, 장난? 이런 건 없어. 그런 사람들과는 말 섞는 것도 싫어해.”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하지만 진심으로 약속을 지킬 분이라는 건 알겠어요. 신뢰 100퍼센트입니다. 이제는 작가님이 왜 은둔 외톨이이신지 좀 알 것 같아요.”
“나는 진심도 없이 단순하게 사람들을 만나서 시간 축내고 잘 보이려고 인사하러 다니고 의미 없는 지인들 만들고 하는 건 체질에 안 맞아. 대학교 다닐 때 이미 깨달았어.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처럼 굴다가 다른 사람 앞에서 바로 흉보고 욕하고 심지어는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면서 이간질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어. 이런 애라면 나 없을 때는 내 이야기도 이런 식으로 하겠구나 싶었지. 그리고 특별히 잘 난 애들은 더더욱 왕따가 되고 누명을 쓰더라고, 그런 것을 보면서 나는 점점 더 외톨이가 되었어. 집에 박혀서 책만 읽게 되었어. 나중에 읽다가 지쳐서 내가 쓸 생각을 하게 되었지. 글을 쓰면서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어. 아. 이게 천직이구나 싶었지. 학교는 거의 외톨이로 수업만 받고 졸업했어. 나는 중도에 포기하거나 그만두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입학한 거는 내가 책임지고 졸업한다. 시작한 건 반드시 끝낸다. 단 함부로 시작하지 않는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는다. 단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킨다. 뭐 이런 거라 할 수 있지.”
“작가님, 전 작가님이 이렇게 내공이 깊으신 분일지 상상도 못 했어요. 처음에 봤던 인상과는 천양지차예요. 그냥 히스테리 노처녀 작가라고 생각했어요.”
“하하. 맞는 말이야. 히스테리 노처녀 은둔 외톨이. 게다가 뚱보고?”
“저도 요즘 제 앞일이 걱정이라서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해서요. 답답해요. 그래도 제가 결정해야 하는 거죠?”
“당연하지. 자기 삶은 자기가 선택, 결정하는 거야. 남이 나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단 책임도 자기 자신이 지는 거지. 알겠어? 선택엔 말이야.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는 포기하는 거야. 다 가질 순 없어. 그러니 단 1퍼센트라도 더 원하는 일을 해야 해.”
“네, 작가님, 진지하게 생각해볼게요.”
(우리 집)
“칼리프, 집사가 드디어 컴퓨터로 구직난을 검색하고 있어.”
“형님은 글을 읽으실 수 있나 보죠?”
“그럼. 어떻게 한글을 배웠지? 신기하긴 하네. 너도 어서 배우는 것이 좋을 거야. 넌 본래 한국 출신인데 더 빨리 배워야 하지 않나?”
“대단해요. 형님, 투르크 출신인데 한글을 깨우치셨다니, 천재세요. 감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봐봐. 드디어 취업하기로 했나 봐. 다행이군. 이대로 백수로 늙을까 봐 걱정했는데, 적어도 우리가 이산가족은 되지 않겠어. 칼리프.”
“지금 보는 난이 구직난 맞는 거죠?”
“그래. 그런데 학교에서 일하는 걸 찾나 보네. 학교만 잔뜩 나와 있어. 학교에서 행정직이나 사무직 같은 걸 구하는 건가? 하긴 일반 직장에서 잘린 후로 다시 그런 곳에 가고 싶진 않겠지?”
“아. 나도 글을 읽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전생에 그렇게 말하고 쓰던 글을 어찌 이렇게 홀라당 다 까먹을 수가 있지?”
“한글은 배우기 쉽더라고, 너도 곧 깨우치게 될 거야. 지금 이력서를 넣는 것 같아. 우리가 잠든 사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미리 다 써둔 모양이야.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놈은 아니었네. 내가 착각했네.”
“그렇죠? 아무 생각도 없는 그런 사람은 아닐 거예요. 다행이에요. 어디든 원하는 곳에 가면 좋겠는데, 합격이 돼야 하는 거죠. 지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고.”
“그렇지. 지원자가 얼마나 많은데, 특히 학교는 더해. 집사가 부디 잘 붙었으면 좋겠다.”
(옆집 식탁)
“작가님, 저 박사과정 밟기로 했어요. 그리고 박사 공부하면서 조교 일도 병행하려고요. 재학 중 학비는 충당되니까, 입학등록금과 생활비만 있으면 돼요. 학위 받고 난 뒤는 그때 생각할래요. 취업이 안 되어도 할 수 없고, 설사 그때 백수로... 에이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요? 참, 걱정하지 마세요. 학기 개강하더라도 아침 운동은 계속할 테니까, 운동하고 아침 먹고 바로 학교 갈 거예요.”
“그래. 결정했구나. 잘했어. 입학시험은 언제 본 거야? 시험, 가을에 보는 거 아냐?”
“그때 혹시나 하고 봤었는데, 퇴사하기도 전에. 이리될 줄 모르고요. 입학등록금은 이제 내는 거니까요. 지금까지 고민한 거죠. 갈까 말까. 공부야 평소 실력이죠. 뭐. 그리고 석사와 같은 학교라서 교수님들도 안면이 있고 다니던 데라 편하고요. 이제 아침에 학교 가서 저녁 늦게까지 공부하고 올 거라서, 집에서는 잠만 잘 것 같네요. 그래도 원래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잘해야죠. 후회 없이.”
“알았어. 열심히 해. 나도 열심히 글 쓸 테니까. 그리고 총각도, 의외인데? 그런 일까지 미리 준비를 다 했다니,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신중하네. 다시 봤어.”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신다고요? 병나요. 작가님. 나이도 좀 생각하세요. 중년이시거든요. 벌써 노안이 와서 안경도 썼다 벗었다 하시면서.”
“그래. 원래 근시였는데 원시까지 와서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지. 좀 더 지나면 돋보기를 써야 할 거야. 아니 누진 다초점 렌즈 안경으로 바꿔야 하나?”
“뭐 그런 건 알아서 하시고요. 이제 곧 3월 개강이니까, 저도 다시 학생이 되어서 왠지 젊어진 기분인데요. 직장인과는 또 다른 맛이죠.”
“아. 나는 학교 졸업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꿈 같군. 자네 젊음이 부러워. 순간순간을 소중히 하도록 해. 젊음은 한순간이거든. 정말 꿈결같이 지나간다고.”
“네. 그래야죠. 박사 논문 논제도 벌써 정해뒀어요. 석사 때 하려다가 지도교수님이 이런 건 박사 논문 주제라고 하셔서 못했던 거 있어요. 이번엔 반드시 통과시켜야지.”
“자기, 지금까지보다 훨씬 생기있고 즐거워 보여. 역시 잘 선택한 것 같아. 자기가 직장 다니면서 선봐서 결혼하고 자식 키우고 하는 삶과 바꾼 것이니까, 후회 없도록 해.”
“작가님. 왜 박사 공부하면 결혼 못 할 거라 장담하시는 거예요? 난 다 할 건데.”
“아, 물론, 다 할 수도 있지. 최악의 경우의 수까지 생각해서 한 말이야. 그렇게 되어도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라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럼요.”
(우리 집)
“형님, 집사가 구직난 보는 중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응.”
“그런데, 지금 학교 다닌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네.”
“형님. 글 읽으실 수 있는 것 맞아요?”
“아. 착각했나 봐. 이력서가 아니고 박사지원서였나 보네. 음. 아냐. 조교지원서였어. 이력서 맞아. 너 내가 글도 못 읽는 문맹자인 줄 아는 거냐?”
“공부하면서 조교 일하고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 온다는데. 그래도 새벽 운동에 절 데려가 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어쨌든 집사가 일을 정한 건 잘된 일이에요. 돈은 못 벌지만. 우리가 먹고살 수는 있는 걸까요?”
“걱정하지마. 그리 금방 망하진 않아. 집사도 그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돈 벌었잖아. 그 돈으로 살면 돼.”
(아침 운동 중)
“작가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깨어서 운동하고 수업받고 공부하고 과제 하고 발표하고 음, 죽겠어요. 체력이 정말 바닥나겠어요. 정말 아침 운동도 안 하면 정말 병들겠어요. 작가님은 좀 어때요?”
“어떻긴. 난 늘 똑같은 일상에서 아침 운동 하나 추가한 건데,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제 적응되고 또 몸도 가벼워지고 새봄이 되니까, 점점 옷도 얇아지고 몸매도 가늘어지고 무척 보람돼. 이제 10킬로 빠졌어.”
“와우. 대단해요. 작가님. 근데, 실은 저, 음. 지금까지 전화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3월도 다 되어 가는데 한 번도 연락이 없네요. 내가 먼저 하기는 좀 그렇고 해서 못하고 있는데.”
“전에 말하던 여자친구 될 뻔했다던 그 여자?”
“네, 아무리 그래도 한동안 친하게 지냈었는데, 어쩜 이리 소식을 딱 끊을 수 있죠?”
“글쎄요. 정 궁금하면 자기가 먼저 연락해보지 그래?”
“나 자신이 초라해져서 먼저 연락하기가 좀 그렇다고 했잖아요. 남자는 능력이 생명인데, 백수라니, 그것도 그 백수보다도 못한 학생이잖아요. 백수는 돈을 못 벌지만, 돈도 많이 안 쓰는 거고, 학생은 돈도 못 벌면서 돈 많이 쓰는 사람이잖아요. 장래가 불확실한 것은, 백수나 학생이나 똑같은 거고. 작가님. 그래도 내심 기다렸다고요. 어떻게 지내냐? 회사 일은 잘 안된 것 같지만, 그래도 다른 곳을 찾아보자 라던가. 같이 의논해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연락을 뚝 끊은 것을 보면 정말로 나한테 관심이 전혀 없나 봐요. 그런 거죠? 작가님도 여자분이니까, 여자 심정은 나보다 더 잘 아실 거 아녜요?”
“나는 여자이긴 한데, 연애사에 관해서는 무지하여서.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거든.”
“아? 그러셨구나. 하긴 은둔 외톨이시니까.”
“지금 비꼬는 거야?”
“그런데, 작가님 12번째 작품 로맨스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연애도 안 해보신 분이 로맨스는 어떻게 쓸 수 있죠?”
“안 해봐도 쓸 수 있다는 걸 실험 하는 중이야.”
“이런. 실험소설이라. 지금까지 작품과는 장르도 내용 수준도 많이 차이 나겠는데요. 기대해도 되는 거예요? 이건 옆집 운동 파트너가 아닌 독자로서 하는 말인데요.”
“자기, 오늘 되게 공격적인데, 정말로 여자친구에게 연락이 안 와서 심통을 부리는 것 같은데, 내가 뭐 자기 화풀이 대상이야? 혹 공부가 잘 안 돼? 아니면 교수님께 꾸중 들었어?”
“죄송해요. 전부 다예요. 박사 공부가 꽤 어렵고, 조교 일도 생각보다 일이 번거롭고, 교수님께서 원하는 수준의 과제발표도 못 하고 여자친구 후보자에게서도 연락도 없고, 이래저래 속상하네요. 화풀이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내가 원하는 일 하는 데도 이렇게 일이 안 풀리니까, 정말 멘탈이 붕괴되려고 하네요. 후우.”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나? 돈 버는 일이 어렵듯이 공부도 어려운 거지. 박사는 아무나 하니? 그렇게 쉽게 박사학위를 딸 수 있겠어? 내가 아는 사람들도 박사수료는 많지만,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하지만 시작했으면 반드시 졸업해야지. 수료만 하고 말 거면 애당초 시작을 말았어야지.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럼요.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어요.”
“그래. 총각 날 실망시키지 말아줘. 나는 중간에 포기하는 건 용납 못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항상 신중하게 시작하고, 시작했으면 끝장을 보고. 알겠어?”
“넷, 작가님.”
“알았어. 오늘 운동은 그만하기로 하고, 가서 씻고 아침 먹으러 와.”
“넷. 작가님.”
“뭐야? 내가 꼭 군대 상관 같잖아. 그 경례는 또 뭐야?”
“작가님이 꼭 장군님 같습니다. 제 군대 시절의 여단장님 같습니다.”
“그건 칭찬이야? 욕이야? 여자한테 장군이라니?”
“칭찬입니다. 여자 장군도 계십니다.”
“난 군인 체질은 아닌데, 다음엔 군대 소설을 쓸까?”
“하. 그러시든지요. 지금 로맨스는 잘 되어 가세요?”
“그냥. 상상 로맨스지. 뭐. 그래서 요즘은 다른 사람들 로맨스물도 읽고, 로맨스 드라마도 보고 있어. 참고하려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연애를 하나 싶어서.”
“음. 제 개인적인 의견인데, 작가님은 그냥 다른 로맨스를 참고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건 또 왜?”
“이미 지금까지의 로맨스들이 다 거기서 거기, 그 나물에 그 국밥이거든요. 그래도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비슷한 아류작들이 쏟아지긴 하는데, 작가님은 전혀 새로운 로맨스를 쓰시면 되잖아요? 진짜 잘 모르면 잘 모르는 그대로요. 작가님 생각대로 하시는 것이 오히려 더 신선할 것 같아요. 그게 설사 유치원, 초등학생들 연애사 같은 이야기라도 말이에요.”
“음.”
“그러니 다른 작가들 신경 쓰지 말고 소신대로 하세요. 그것이 어떤 작품이건 작가님 팬들은 다 좋아할 거예요.”
“하긴 나는 한 번도 잘 팔리는 글을 써야지 하고 글을 쓴 적은 없어.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고 다행히 결과까지 좋았던 거지. 이번엔 현실적인 결과가 나쁘더라도 역시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써야겠어. 고마워. 총각. 그렇게 말해줘서. 내 능력 안에서 쓸게.”
“그래요. 작가님. 빨리 아침 차려줘요. 금방 씻고 올게요.”
“응.”
(우리 집)
“집사가 정말 바쁜 모양이야. 우리한테 눈길 한번 준 게 언제였나 싶다.”
“형님은 집사에게 별로 관심도 없으시더니, 이제야 그걸 눈치채셨군요. 나도 요즘 집사랑 아침 운동 때 말고는 정말 별로 눈을 마주친 일이 없네요. 그나마 난 함께 운동이라도 하지만 형님은 정말이지. 집사한테 인사라도 해보세요. 등, 하교 때라도 해보세요. 아니면 정말 얼굴 보기 힘드실 거예요.”
“자기가 선택해놓고 공부가 힘드니 뭐니 그런 핑계를 대는 건 아닌지. 요즘 얼굴이 별로 안 좋아 보여.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공부가 어렵겠죠. 박사 공부라는데. 이제 첫 학기인데, 벌써 저러면, 쯔쯔. 앞날이 걱정되긴 하네요. 코스웍 기간에 저러면 논문 기간엔 또 어떻게 될까요? 보통 코스웍 마친 박사 연구생들은 거의 좀비처럼 지낸다던데, 그 좀비 기간이 길면 길수록 상태는 더 심각해지고, 그 와중에 학위논문이 통과하면 다행인데, 통과 못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옥스퍼드, 켐브리지, 하버드 같은 외국 유명대학에선 정신병에 걸려서 퇴학하는 학생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
“너 글도 못 읽는 주제에 그런 건 또 어떻게 아니? 혹 전생에 박사 공부 해봤어?”
“설마요. 전 학문과는 거리가 멀어서. 수도지인이긴 하지만, 예전 절에서 수행할 때, 절에 공부하러 들어온 학생들이 있었어요. 물론 대한민국은 아니고 조선 시대이긴 했지만, 어느 시대나 공부하러 절에 들어가는 사람은 있거든요. 그게 고시생이건, 박사논문 쓰는 연구생이건 간에 다 비슷한 거죠. 뭐. 고시합격자나 박사학위 취득자나 다 어려운 거니까요.”
“설마, 우리 집사가 그 정도까지 어려운 공부를 하는 건 아니겠지. 집사가 다니는 학교는 네가 말한 그런 대학이 아니잖아?”
“그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인데, 명문대죠. 꼭 스카이만 명문대는 아니니까요.”
“너 그건 또 어떻게 알았니? 스카이대학이 뭔지 알고 말하는 거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약자로 S.K.Y. 스카이. 그 정도쯤이야.”
“잘났어. 어서 한글이나 빨리 배워. 세계에서 가장 쉽고 과학적인 글인 한글도 못 배우면 넌 개도 아니야. 게다가 넌 이 나라 출신이잖아.”
“알고 있어요. 형님. 형님이 좀 가르쳐 줘요. 빨리 배우게.”
(며칠 후)
“여보세요. 밍키 엄마? 잘 지냈어요?”
“아? 칼리프 아빠?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주말에도 한 번도 안 나오셔서 난 어디 멀리 이사라도 가신 줄 알았네요.”
“그 정도까지 생각하셨으면 먼저 전화 한 통 주실 수 없었나요?”
“회사 일이 잘 안 되었다고 하고는 연락 두절 되었는데, 내가 먼저 연락하기가 좀 그랬어요. 자. 그래 지금은 잘 되었나요? 전화하신 걸 보니. 어디 좋은 데 가신 모양이네. 그런 거죠?”
“잘 된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난 이제 주말 낮에 산책, 운동하러 가지 않아요. 아침 일찍 운동해요. 매일. 그래서 밍키 엄마를 못 만났어요.”
“그러셨구나. 진즉 말씀해주시지. 난 또. 정말 어디 멀리 가신 줄 알았네.”
“밍키 엄마. 난 그때 회사 나와서 지금 학교 다녀요. 박사 공부해요.”
“아? 사학 전공하셨다고 하셨죠?, 박사 공부하시는구나. 잘 되었네요. 원래 그러고 싶었던 거죠?”
“그렇긴 해서 시험도 보고 있었는데, 막상 회사에서 잘리니까, 회사를 계속 다녀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등록금 마감일까지 고민하다가 그냥 입학했어요. 백수보다 못한 학생 신분이라 이제 데이트도 못 하고 말이죠.”
“어머? 그러셨어요? 친구 사이에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아무리 공부가 바빠도 가끔은 만나서 수다도 떨고 해요. 곧 변 작가님 12번째 책도 나온대요.”
“뭐라고요? 12번째 책이 나온다고요? 언제요?”
“옆집 사신다면서 이번엔 책을 미리 못 받으셨나 보네. 작가님한테 잘 못 보이셨나? 전엔 먼저 받았다고 자랑하고 난리더니.”
“전혀 몰랐어요. 지금 한창 집필 중이신 줄 알았어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아요?”
“그건 내가 매일. 아참. 아니에요. 하여튼 몰랐어요.”
“그럼 12번째 책이 출간되면 읽고 나서 한번 만나죠. 토론해야죠. 칼리프 아빠. 그쪽이 편하신 날짜, 시간 잡아서 연락 줘요. 나는 늘 퇴근 후나 주말엔 시간 있어요. 그럼. 연락해요. 끊어요.”
“아 저기. 잠깐. 끊어졌네. 친구 사이에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라. 정말 난 아무것도 아니었네. 그냥 수다 파트너였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전화해보길 잘했어.”
“칼리프, 들었지? 밍키 엄마 이야기.”
“네, 똑똑히.”
“확실히 집사가 차인 것 같지?”
“눈치가 그러네요. 역시 밍키 엄마는 집사를 대화 파트너로밖에 여기지 않았네요. 집사가 실망이 크겠어요.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찾았네요. 미안해서 어쩌죠?”
“그게 뭐 네 잘못이냐? 밍키 엄마는 그런 사람인 거고, 집사가 여자 복이 없는 거지.”
“요즘 집사 기분도 안 좋은데 이런 일까지 겹치니 우리도 눈치껏 행동해야겠어요.”
“정말이지. 집사 이러다가 평생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 하고 백수로 우리와 함께 늙는 건 아니겠지? 아니지, 우리도 이산가족이 되는 걸까?”
“끔찍한 말씀 마세요. 형님. 내가 아침 운동 때 열심히 다른 여자를 구해보겠어요. 그런데 옆집 마녀가 옆에 있으니 다른 여자에게 접근하기가 좀 어려워요. 내가 가서 짖는다 한들 다른 여자랑 말 섞기 쉽지 않아요. 마녀 때문에.”
“그건 그래. 여자랑 같이 운동하는 남자에게 또 다른 여자가 올 수 있겠니?”
“어쩌죠? 이러다가 정말 노총각으로 늙겠는데요. 보아하니 학교에서는 또래 여학생은 없는 것 같던데, 한참 어린 후배들뿐인 것 같더라고요. 귀찮아하는 것 같던데. ‘조교 샘’. ‘조교 샘’ 하면서 부탁이나 하고 밥 사달라 하고, 우리 집사가 지금 후배들 밥 사줄 형편은 아니잖아요?”
“당연하지. 그럴 돈이 있으면 저 사 먹든가, 우리 사료를 사든가 해야지. 이런, 경우라고는 없는 놈들을 보았나.”
(며칠 후)
“작가님, 12번째 책 출간한다면서요?”
“응. 그래.”
“응, 그래? 라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매일 보고 같이 밥 먹는 식구인 내가 그 사실을 제삼자에게 들어서 알아야겠어요?”
“식구? 아침 운동 파트너가 아니라?”
“저 식구 아니었어요? 작가님? 좀 섭섭해지려고 해요.”
“그렇구나. 알았어. 하지만 책은 자기가 사서 봐. 줄 책이 없어.”
“네. 알았어요.”
“그런데 그 표정은 뭐야? 따로 챙겨주지 않아서 기분 나쁘다는 거야? 입은 왜 그리 튀어나왔어?”
“내가 언제요? 본래 입이 튀어나왔거든요. 입술이 두껍잖아요?”
“하여튼 이번엔 사서 봐.”
“알았다고요.”
“그런데, 그 사실을 알려준 제삼자가 누구야? 혹시 여자친구 후보?”
“네. 확실히 마음을 정했어요. 그 여자는 내가 단순한 대화 파트너였을 뿐이에요. 그걸 내가 이제 안 거고. 오래 망설이다가 전화했는데, 진즉 할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마음도 더 빨리 알고 정리도 더 빨리빨리 할 수 있었는데, 괜히 시간만 끌다가 마음만 더 졸이고 상처만 더 깊어졌네요. 후.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에요. 정말 여자 마음은 모르겠어요. 진짜 어려워요. 참 작가님도 여자분이지. 혹시 작가님도 그렇게 마음을 숨기거나 연기를 하시나요?”
“딱히 숨기거나 연기를 하는 것 자체도 잘 모르겠는데, 나는 그냥 항상 똑같아. 남자들은 뭐 다른가?”
“됐어요. 작가님. 작가님과 무슨 말을 하겠어요? 모태솔로에다가 인간관계 방면에서는 한참 뒤떨어지는 양반인데.”
“왠지 나 무시당하는 것 같아. 착각 아니지?”
“무시한다고요? 음. 어느 정도는 역시 그럴지도.”
“역시? 나 무시당하고 있었네. 좀 기분이 나빠지려고 해. 오늘은 같이 먹고 있지만, 내일 아침부터 밥 먹으러 오지 마. 당분간 혼자 먹어야겠어.”
“뭐라고요? 작가님. 아니. 왜 그러세요? 작가님까지 지금 상황에서 절 이렇게 힘들게 하셔야겠어요? 저 여자친구 후보에게 차였다니까요.”
“누가 뭐래? 그건 자기 개인적인 일이고. 나에게까지 그걸 책임지라고 해선 안 되지. 운동은 해야 하니까, 운동만 하고 아침은 각자 먹는 것으로 해.”
“쫌팽이!”
“뭐야? 확실히 확인사살을 하는군. 무시의 끝판왕. 당장 나가주세요. 옆집 총각님.”
“흥!”
“대문은 저쪽입니다.”
(대문 쾅 닫고, 우리 집)
“얘들아. 아침 먹고 왔다. 이제 옆집서 아침 안 먹는다. 흥. 누가 뭐. 갑자기 왜 저래? 저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아니지. 나랑 같은 거 먹었는데. 책도 안 주고 사서 보라고 하고. 밥도 안 준다고 하고. 왜 심통이지? 뭐. 좀 무시하는 말투이긴 했는데,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나? 음. 하긴... 한참 어린놈에게 무시를 당했으니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어. 내가 너희들에게 그런 말 들으면 역시 기분이 나쁠 것 같긴 해.”
“집사가 지금 뭐라는 거냐?”
“마녀랑 싸운 모양이네요. 아침 운동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아침 먹으면서 뭔가 잘못된 모양이에요.”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왜 또 싸웠대? 다 큰 양반들이 어린애도 아니고, 아니 집사가 어린앤가? 마녀는 적어도 어리지 않으니까.”
“아침 먹을 땐 볼 수 없으니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왜 싸운 걸까요? 집사 요즘 상태도 별로 안 좋은데. 내일 아침 운동 괜찮을까요?”
“알 게 뭐야. 집사가 알아서 하겠지. 내일 아침 운동할 때 자세히 보고 말해줘.”
“그럴게요.”
(다음 날)
“형님, 다녀왔어요. 오늘 집사랑 마녀랑 한 마디도 말 안 하고 진짜 운동만 하고 바로 헤어져서 들어왔어요. 이런 운동 계속할 수 있을까요?”
“분위기 싸했겠네. 아냐. 오히려 잘 됐다. 그럼 너 다른 여자에게 접근할 수 있겠네. 집사도 새로운 여자에게 다가갈 수도 있을 거고. 마녀가 적어도 방해하지는 않을 거 아냐?”
“그런 건가요? 그렇구나. 음. 그럼 내일부터 열심히 찾아보죠. 뭐. 이제는 정말 제대로 된 여자를 찾아야 할 텐데.”
“그런데 말이야. 학생이라고 하면 여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긴 해. 여자들은 남자 능력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밍키 엄마도 그런 여자 중, 한 명이고. 또 집사 상처받을까 그것도 걱정이긴 하다.”
“무조건 부딪혀보고 아니면 말죠. 뭐. 나도 뭐 이젠 이판사판이에요. 집사도 어느 정도 여자에게 면역도 생겼을 거고. 이제는 그리 크게 상처받지도 않을 거예요. 노력은 해야죠.”
“자자. 기운 내. 내일부터 잘해야 해.”
“물론이죠. 이번엔 반드시.”
(서점)
“아무리 바빠도, 싸웠어도 12번째 책은 읽어봐야 하니까. 결국, 샀네. 어휴. 비싸기도 하다. 유명한 작가 책은 가격도 비싸구나. 어디 얼마나 엉망진창 로맨스인지 확실히 읽어보고 만나서 코멘트를 해야지. 확인사살 코멘트.”
(다음 날)
“집사 또 책 읽는 거냐? 마녀 책?”
“그러네요. 전공 서적은 아니네요. 저도 이제 글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형님 가르쳐줘서 감사했어요. 글을 읽을 수 있으니까, 정말 세상이 달리 보여요. 진즉 배울 걸 그랬어요.”
“그래.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하니? 마녀랑 싸웠어도 마녀 책을 돈 주고 사서 읽고 있잖아?”
“신간은 도서관에서 대출하기 힘드니까요. 줄 서서 대기해야 하고. 급하니까 샀겠죠. 빨리 읽고 싶은 모양이네요. 다시는 말 안 할 것처럼 둘이 지금 냉랭한데. 나도 불편하다고요. 분위기가 싸늘해서.”
“괜찮아. 마녀랑 싸워도. 너는 다른 여자는 좀 찾아보고 있냐?”
“있긴 한데, 아직은 아침 일찍 운동하는 젊은 여자가 별로 없어서요. 날이 더 따뜻해져야 하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좀 있지만.”
“그렇구나. 젊은 여자들은 늦게 일어나지. 미인은 잠꾸러기잖아. 어휴. 그건 또 생각 못 했네. 새벽잠 없는 사람들은 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지. 너도 참 힘들겠구나.”
“이제 날이 더 따뜻해지고 해가 더 길어지면 젊은 사람들도 많아지겠죠. 그때 찾으면 돼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그래. 잘 부탁하마.”
(다음 날)
“여보세요. 칼리프 아빠? 변 작가님 신간 읽어봤죠? 네. 물론이죠. 나도 읽었어요. 그 일로 좀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언제가 좋아요?”
“네. 밍키 엄마. 저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네요.”
“지금이요? 이 밤에? 하긴 아침에 둘 다 일찍 나가니까. 그래야겠군요.”
“그런데 밍키 엄마, 나한테 전화 정말 오랜만에 한 거 알아요? 이런 일이 있어야 전화를 하는군요. 네. 네. 전에 우리가 수다 떨던 그 카페에서 보죠. 전 지금 바로 나가죠. 곧 봐요.”
(찻집)
“칼리프 아빠. 이번 책 좀 이상하지 않아요?”
“역시, 좀 그렇죠.”
“난 지금 칼리프 아빠에게 묻고 싶은데요. 다른 팬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칼리프 아빠를 아니까. 뭔가 하실 말씀 없으세요?”
“음. 작가님과 매일 만나고 있죠.”
“그러게요. 매일 함께 운동하죠? 같이 밥 먹고?”
“네.”
“지금 작가님 책. 이야기 칼리프 아빠와 작가님 이야기 맞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속일 생각하지 말아요.”
“나도 지금 너무 의외라서 놀라고 있거든요. 그래서 밍키 엄마에게 좀 물어보려고요. 작가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죠? 밍키 엄마는 여자니까 같은 여자의 마음을 좀 이해하겠죠? 난 전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같은 여자로서의 직감은 말하자면. 작가님 사랑에 빠지신 것 같은데요.”
“설마요? 매일 운동하지만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게다가 요즘은 밥도 같이 안 먹어요. 각자 먹고 있죠. 그러고 보니 신간 출판되고부터 같이 밥 안 먹어요. 이번엔 책도 나보고 사서 보라고 했고.”
“어머. 역시. 정말 사랑에 빠지셨네. 웬일이야?”
“뭐라고요? 그게 왜 그렇게 해석이 되죠?”
“칼리프 아빠 얼굴 보기가 부끄러우니까 같이 밥 못 먹는 거죠. 말도 못 하고. 책에 자세히 적혀 있던데 고양이 이야기도 전부다. 장례식까지. 심지어 칼리프 아빠 운전 못 해서 작가님의 그 비싼 메르세데스가 먼지가 가득 덮인 채로 차고에 박혀있는 채로 택시 잡아타고 간 이야기까지 아주 상세히 적혀 있더군요. 칼리프 아빠와 작가님 고양이, 개. 이야기까지 전부다. 작가님과 칼리프 아빠네 베란다 벽까지 뚫린 채, 고양이가 드나든 이야기까지. 개. 고양이들이 매일 즐겁게 놀고 헤어진 이야기까지. 어느 날 작가님이 왕래를 막아서 벽을 막고 작가님 고양이 우울증으로 단식투쟁 끝에 사망한 이야기까지. 죄다 적혀 있던데요. 그리고 개와 고양이들의 전생 이야기까지 전부 아름답게 그렸더군요. 전부 옛날 왕족, 귀족으로 살았던 이야기들까지. 전부요.”
“나도 지금 너무 놀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 작가님이 우리 개와 고양이를 그렇게 위대한 과거의 인물로 묘사하신 것도 놀랍고, 물론 작가님의 카자르도 그렇지만, 모든 걸 다 떠나서 저를 남자로 생각하고 계신다는 거죠? 지금. 전 그걸 확인하고 싶거든요. 밍키 엄마?”
“음. 제가 보기엔 확실히 작가님이 그쪽을 보통 이상으로 생각하시는 건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그쪽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작가님과 매일 만나는 당사자 양반아.”
“어, 정말로. 그런 거면 난 어쩌죠? 당장 내일 운동하러 갈 수 있을까?”
“작가님이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는 건 어쩌면 지금 칼리프 아빠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두렵고 걱정도 되고 부담도 되고 뭐 몹시 복잡하시지 않을까요? 지금처럼 부담스러워서 피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있을 거고. 게다가 작가님 좀 뚱뚱하고 못생겼다면서요?”
“아뇨. 요즘 날씬해지셨어요. 밍키 엄마와도 비슷할걸요. 15킬로그램 뺐다고 얼마 전에 자랑하셨어요. 이제 예전 몸매로 돌아와서 기쁘다고, 그리고 못생기지 않았어요. 오히려 귀여운 얼굴이에요. 동안이세요. 살이 빠지니까 확실히 더 어려 보이세요.”
“뭐야. 지금 편드는 거예요? 지금 보니까 칼리프 아빠도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지 않은데. 내 말이 틀렸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작가님은 작가님이죠. 근데 여자분이셨네요. 작가님도. 왜 난 그 생각을 못 했지? 아. 그러고 보니 그날 싸운 날. ‘참. 작가님도 여자분이지’라는 말을 했구나. 이런 큰 실수 했네. 그때 화내면서 밥 먹으러 오지 말라고 하더니 난 그것도 모르고 막 화내면서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있네요. 허참.”
“나보다도 더 어리둥절한 모습이라서 더 따지지도 못하겠네요. 이 사실을 팬 카페에 올려도 되겠어요? 팬들이 알면 난리 나겠네요. 아유, 재미있겠다.”
“밍키 엄마. 부탁인데 제발 함구해줘요. 작가님을 위해서요. 작가님은 보기보다 마음이 섬세하고 여려서 상처받으실 거예요. 소문이 나면 안 돼요. 그리고 작가님의 팬이라면 그 정도는 지켜드려야 하지 않나요?”
“농담이에요. 내가 그런 짓을 할 것 같아요? 나도 작가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에요. 그런 차원에서 자자. 칼리프 아빠.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지금 상황에서는 나보다 그쪽이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인데.”
“나요?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일이 생기다니. 당장 내일 아침 운동 어떻게 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이 딱한 양반아. 본인이 알아서 해야지. 자기야말로 작가님에게 상처 주지 말아요. 알겠어요? 작가님의 팬인 내가 용서 못 해요.”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가요? 나도 지금 충격받아서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친구라면서요? 내 입장에서도 좀 생각해 봐요.”
“아아. 몰라. 몰라요. 난 무조건 작가님 편이니까. 작가님이 칼리프 아빠를 좋아한다면 난 무조건 작가님이 잘되도록 당신을 작가님께 밀어 넣겠어요. 아시겠어요? 이 무심하고 눈치코치도 없는 양반아.”
“이런. 정말 죽겠네. 당장 내일 아침에 어떡하지?”
“아니, 똑같은 말을 대체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거예요? 녹음기 틀었어요? 자자. 이제 됐으니까, 집에 가서 내일 아침 운동할 때 작가님께 잘 해 드려요. 작가님께 상처 주면 내가 저주할 거예요. 알았어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정말 무섭다고요.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 알죠?”
“그렇게 눈 치켜뜨지 말아요. 정말 무서워요.”
“자자, 어서 가세요. 그리고 내일 아침. 파이팅!”
“죽겠네, 정말.”
(우리 집)
“얘들아. 나 어떡하면 좋지? 작가님이 날 좋아하시나 봐. 어. 정말 어떻게 해. 몰라. 죽겠어.”
(방문 쾅)
“엥?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집사가 지금 뭐라는 거냐? 내가 헛소리를 들었나?”
“아뇨. 저도 똑똑히 들었어요. 마녀가 집사를 좋아한다고.”
“이게 다 무슨 날벼락이야? 집사 너 어떡할 셈이야? 집사, 너 정말 저 못났고 뚱뚱하고 늙은 마녀랑 사귈 건 아니지?”
“형님, 잘 모르시나 본데, 마녀 뚱뚱하지 않아요. 못생기지도 않았고요. 나이가 많은 건 맞지만.”
“넌 또 왜 그러냐? 지금 마녀 편들고 싶어?”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 매일 본 개로서 하는 말이죠. 객관적인 사실을.”
“보아하니 집사가 몹시 혼란스러운 모양인데, 내일 운동은 하러 갈 수 있나?”
“글쎄요. 그게 좀 걱정이네요. 내일 아침 어떻게 될까요?”
(다음 날)
“운동, 어떻게 됐어?”
“글쎄요. 평소처럼 둘 다 한 마디도 없던데요.”
“뭔가 분위기는 어땠어?”
“그게 좀 둘 다 불편해 보였는데요.”
“이런. 젠장.”
“내일도 자세히 보고 알려드릴게요.”
(다음 날)
“옆집 총각. 불편해 보이네. 정 그러면 내일부터 운동하러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 해도 빨리 뜨고, 날도 따뜻해졌고, 사람들도 많으니까, 혼자서도 운동할 수 있어.”
“...............”
“그렇게 불편하면 같이 운동 못 하지. 걱정..마.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그동안 고마웠어. 덕분에 15킬로그램 뺐고, 또 계속 유지하고 있고, 공부하기도 바쁜데 매일 아침 운동해줘서 고마웠어. 정말. 오늘은 여기까지 해. 그럼 잘 가. 안녕.”
“................”
“멍.”
“그래. 칼리프, 너도 그동안 고마웠어. 잘 가.”
“멍.”
(우리 집)
“쾅.”
“형님. 엉엉. 형님. 저 왔어요.”
“칼리프. 왜 울어? 그리고 집사는 또 왜 저래?”
“오늘 집사랑 작가님이랑 헤어졌어요.”
“뭐? 잘 됐다.”
“뭐라고요? 뭐가 잘 됐어요? 난 작가님이 좋단 말이에요.”
“마녀를 좋아한다고? 너 뭐 잘못 먹었냐? 그동안 네가 아침 얻어먹은 것도 아닌데. 네가 왜?”
“마녀 아니라고요. 천사라고요. 형님이 잘못 보신 거예요. 오늘 나한테도 작별 인사를 했어요. 엉엉엉.”
“얜 또 왜 이래? 그리고 집사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왜 안 나오는 거야? 아참. 운동했으니 씻으러 간 거지?”
“형님, 전 작가님이 내일 아침부터 운동하실 수 있을지도 걱정돼요. 다시 예전처럼 칩거하면서 살찌고 퉁명스러워지면 어떡하죠?”
“뭘 어떡해?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 네가 그걸 왜 신경 쓰냐?”
“형님은 작가님이 카자르 누님을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렇다. 틀렸냐?”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님은 우울증으로 자살하신 거죠. 물론 작가님은 누님을 배려하기보다는 당신 일에 빠져있긴 했지만. 우울증은 옆에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소용없대요. 가족들이 있는 집에서도 자살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넌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나는 작가님도 카자르 누님처럼 될까 봐 그걸 걱정하는 거예요. 정말로 카자르 누님이 작가님도 똑같이 되길 바란다고 생각하세요?”
“글쎄다. 누님은 마녀를 사랑했나? 그게 관건인데.”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가셨겠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혼자 못 죽을 거예요. 아닌가? 우울증이 심각하면 아무 상관도 없나? 중증질환이 되면,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는 건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하여튼 나는 작가님이 걱정돼요.”
“너 몇 달 동안 같이 운동하더니 마녀에게 정이 들었나 보네. 이제는 누님보다 마녀가 더 중요한 모양인데, 내 생각이 틀렸니?”
“누님도 중요하고 작가님도 중요해요. 그리고 전 죽은 존재보다 산 사람이 현재 더 중요하거든요.”
“그래. 그 말이 옳다. 산 사람이 더 중요하지. 언제까지나 죽은 혼령을 붙들고 살 순 없어. 그래서 넌 어떻게 하면 좋겠니? 마녀. 아니지. 참 그 말도 자중해야지. 그동안 듣기 싫었겠구나.”
“네. 계속 마녀, 마녀. 듣기 싫었지만, 형님이 워낙 강경하셔서 아무 말 못 했어요. 그냥 작가님이라고 칭하시면 좋겠어요.”
“그래, 알았다고.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요? 음, 작가님을 혼자 두는 것이 걱정인데, 어떡하지? 아하. 다시 벽 뚫고 들어가서 작가님 동태를 살피는 건 어때요?”
“그랬다가, 아냐. 정말 큰일이 닥치기 전에 우리가 동태를 살펴야겠어. 네 말이 맞아. 칼리프, 다시 벽을 뚫어. 단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해. 적어도 집사가 없을 때 하자. 집사가 내일 학교 가거든 그때부터 뚫는 거야.”
“넷. 형님.”
(다음 날)
“칼리프. 잘 안돼?”
“형님, 무엇으로 막았는지 하여튼 저번보다 힘드네요. 그사이에 내가 더 크고 힘도 더 세어졌건만. 대체 뭐야? 이 벽은?”
“잘 좀 해봐.”
“아. 됐어요. 형님 뚫었어요. 이제 구멍을 넓히기만 하면 돼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형님이 통과하실만한 구멍을 만들 테니까.”
“나는 누님보다 날씬하니까 전보다 작게 만들어도 상관없어. 어서 해.”
“네. 됐어요. 자 형님 들어가서 동태를 살피고 오세요.”
“응.”
(옆집)
‘어디 보자. 작가가 어디 있나? 저번에 여기 베란다까지 왔다가 바로 쫓겨나는 바람에 집안을 들여다보지도 못했네. 하지만 우리 집과 구조가 같으니까, 거실 옆이 안방이지? 거실엔 아무도 없고, 창문으로 올라가야지. 어라. 안방에도 없어. 그러면 할 수 없군. 실내로 들어가야겠어. 작가를 찾아야 하니까. 조심조심. 살금살금. 어디 보자. 뒷방이 작업실인가? 이런 문이 닫혀 있어서 들여다보지를 못하겠네. 할 수 없군. 오늘의 탐험은 여기까지인가?’
(방문 덜컥)
“어맛, 깜짝이야? 이게 뭐야? 옆집 고양이? 술탄? 너 우리 집에 웬일이야?”
“야옹!”
“너 전에 내가 분명히 말했지?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그새 까먹었니?”
이런. 젠장. 역시 인간은 변하지 않아. 마녀가 천사로 바뀔 수가 있겠어?
“아냐. 술탄. 장난이야. 반가워. 정말 오랜만이야. 칼리프는 매일 봤지만 아. 이제는 칼리프도 볼 수 없겠지? 술탄. 칼리프는 잘 있니? 이제 같이 운동하지 않으니까. 참. 술탄. 네가 칼리프랑 여기 와서 나와 놀아주면 안 될까? 나 지금 몹시 쓸쓸한데. 옛날엔 카자르가 있었어도 제대로 놀아준 적이 없었어. 하지만 이제는 매일 칼리프랑 운동하면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이상하네. 그래. 베란다 벽을 내가 더 크게 뚫어줄게. 칼리프도 같이 와. 가자. 벽 뚫으러. 참. 물론 옆집 총각에겐 비밀이야. 알겠지? 너도 그 정도 눈치는 있지? 나 차였어. 술탄. 넌 그걸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너. 나 싫어하잖아?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야. 아니라고 할 셈이야? 네가 날 싫어하니까 나도 너보고 오지 말라고 했던 거야.”
“야옹? 야옹”
아니? 내가 싫어했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미안해할 것, 없어. 칼리프는 내게 우호적인데 넌 좀 적대적이더라고. 아마도 넌 카자르를 많이 따랐던 것 같은데, 내가 카자르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어때 내 말이 틀렸니?”
귀신이네. 정말 이 여자 동물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나?
“네 말이 맞아. 내가 제대로 신경을 못 썼어. 내 탓이야. 그래서 지금도 매일 카자르를 위해 기도하지. 볼래? 이 작업실에 카자르 제단과 향을 피우고 매일 기도해. 여기 방문 열어둘 테니까, 너도 와서 같이 하든가. 아니지. 참 벽부터 뚫자.”
“어휴. 어설프게도 뚫어 놨네. 그래도 너 설마 내가 걱정되어서 일부러 뚫고 들어온 거지? 아. 참. 칼리프가 내 걱정된다고 가서 보고 오라고 했구나. 그런 거지?”
귀신이다. 정말.
“역시, 칼리프가 내 걱정을 해주는구나. 정말 기쁘다. 사실 나 오늘 아침 운동하러 안 갔는데, 가기 싫어서. 혼자 나가 운동할 자신이 없었어. 물론 그러면 안 되는 것쯤은 나도 알아. 다시 살도 찔까 봐 걱정도 돼. 그런데 말이지. 혼자 집에 그냥 있으니 정말 우울해져서 나쁜 생각이 자꾸 들지 뭐야? 그래서 무서워져서 카자르 제단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나 나쁜 생각하지 않게 해달라고. 그 와중에 네가 와주었구나. 고마워. 술탄. 참 예전에 카자르가 먹던 간식 아직 있는데, 좀 줄까?”
“야옹.”
“먹는 건 너도 좋아하는구나. 카자르가 마지막엔 거의 단식투쟁 하느라 아무것도 안 먹어서 사료와 간식이 그대로 남았어. 왠지 버리기가 싫더니만, 너 주라고 카자르가 못 버리게 한 거였구나. 자. 먹어. 술탄.”
“야옹.”
“자, 다 먹었으니까, 이제 칼리프를 데려와.”
“야옹.”
(우리 집)
“칼리프. 이리 와봐. 어서.”
“형님. 걱정했어요. 왜 이리 늦었어요?”
“봐라. 벽. 크게 뚫렸지?”
“그러네. 그리고 이건 사람의 솜씨인데요? 설마. 작가님이 뚫었어요?”
“그래. 너 오라고 크게 뚫었어. 근데 말이야. 우리 집사에겐 비밀이야. 오고 간 후에 확실히 뒷마무리를 잘해야 해.”
“물론이죠. 우리 집사가 이제 미워요. 작가님에게 그런 상처를 주다니. 흥.”
(옆집)
“멍멍.”
“야옹.”
“칼리프? 오랜만이야. 아니 이틀만인가? 그런데 꼭 두 달은 된 것 같지? 보고 싶었어.”
“멍.”
“칼리프. 나 혼자서는 도저히 운동하러 못 가겠어. 그러니 말이야. 너 옆집 총각 학교 간 사이에 여기 와서 나랑 같이 운동하러 나가자. 그러면 되겠다. 그치? 너도 운동하고 싶지? 안 그래?”
“멍.”
“그래. 역시 너도 나가고 싶었구나. 잘 됐다. 우리 지금 운동하러 나갈까?”
“멍.”
“참. 술탄. 너는 어떡할래? 너도 같이 나가면 좋을 텐데. 우리 집에서 혼자 기다리기 심심하지? 그러면 집에 가서 기다릴래?”
“야옹.”
“너 좋을 대로 해. 우리는 운동하고 올 테니까.”
(며칠 후)
“형님. 저의 생활은 달라진 게 없네요. 매일매일 운동하는 건 똑같아요. 시간만 바뀌었어요. 그리고 작가님이 생각보다 정신력이 강하셔서 다행이에요. 정말 혼자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실까 걱정했는데, 의외군요.”
“아냐. 내가 처음 보러 갔을 때, 상태가 안 좋아 보였어. 정말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카자르 누님 제단에 기도했다고 했어. 나쁜 생각하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때 마침 우리가 간 거야. 생사람 하나 살린 거야. 너와 나. 정말 큰일을 했어. 베란다의 벽을 다시 뚫은 건 정말 신의 한 수였어. 잘했어. 너와 나. 우리는 정말 훌륭한 일을 했어.”
“그런데 말이죠. 정말 우리 집사에게 실망했어요. 그 후로 한 번도 나랑 운동하러 나가지도 않고, 적어도 주말엔 갔었는데 말이죠. 혹시라도 작가님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건가? 흥. 밍키 엄마랑도 만나기 싫은 건가? 아침 일찍, 새벽부터 학교 가서 밤늦게 들어오네요. 무슨 생각인 걸까요? 우리 집사는?”
“그러게 말이다. 나도 의외로 우리 집사가 냉정한 사람이라 놀랐어. 사람이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군.”
“이제는 사료도 간식도 대부분 옆집에서 먹는데, 우리 집 사료가 줄지 않는 것도 눈치 못 채고, 아예 우리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게. 학교 일이 많이 바쁜가 보지. 그런데 말이야, 너도 그렇게나 우리 집사에게 충성하더니, 참. 너도 이렇게 변할 수가 있구나.”
“내가 변한 게 아니라 우리 집사가 잘못한 거예요. 형님.”
“이제 나는 누구 편도 아니야. 우리 집사도 옆집 작가도. 그냥 다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
“형님. 작가님도 이제 얼굴이 많이 좋아졌고요. 다시 글도 쓰기 시작했어요.”
“알아. 나도 봤어. 13번째 글 집필하는 중이잖아.”
“이번 책은 어떤 내용일까요? 궁금하지 않아요? 우리도 글을 읽을 수 있으니까, 책장을 넘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누가 좀 읽어줄 순 없나?”
“칼리프, 우리가 똑똑한 동물인 건 사실이지만 우리에겐 손이 없어. 발뿐이야. 사람이 아니라고. 적어도 지금은.”
“알아요.”
(몇 달 후, 한여름)
“더워요. 형님.”
“그러게. 한여름이니까. 그리고 집사는 방학도 없구나. 매일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네.”
“학교는 시원하겠죠. 우리야. 덥든가 말든가 신경도 안 쓰네요. 흥.”
“그러니까, 빨리 작가 집으로 가자고. 거기는 작가가 에어컨디셔너 틀어놓고 일하잖아. 어서 가자고.”
(옆집)
“얘들아. 날이 몹시 덥지? 하긴, 빈집에 냉방을 틀어놓고 나가진 않았을 테니까, 옆집 총각은 이 더위에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구나. 자. 여기 시원한 데서 놀아.”
“멍? 멍? 멍. 멍. 멍.”
“아니? 아직도 우리 집사를 걱정하는 거예요? 작가님. 이제 정신 차리세요. 우리 집사는 보기보다 냉정하고 맺고 끊음이 확실한 사람이에요. 작가님이 그렇게 걱정해봤자 다 시간 낭비일 뿐이에요.”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이런, 칼리프, 너 대놓고 우리 집사를 욕하는구나. 난 이제 모르겠다. 난 누구 편도 아니야. 중립이야. 중립.”
“얘들이 더위를 먹었나? 오늘따라 왜 이리 말이 많지? 알았어. 물도 시원한 것으로 바꿔줄게. 자자. 마셔. 그런데, 칼리프, 오늘 폭염주의보 떴는데, 우리 운동하다가 더위 먹는 거 아냐? 너 이 시간에 운동할 수 있겠니? 네 생각은 어때?”
“멍. 멍.”
“저도 자신이 없어요. 우리 개들은 땀구멍도 없는데.”
“그래도 운동을 빼먹을 순 없으니까, 나갔다가 너무 힘들면 들어오자. 자. 술탄. 여기서 놀고 있어. 냉방장치 안 끄고 나갈 테니까, 금방 올게.”
“야옹. 야옹.”
“고마워. 변 작가.”
(저녁 무렵)
“형님, 어차피 우리 집사 밤에 들어오는데, 대문 소리 나면 그때 집으로 돌아가죠. 우리 집은 지금 찜통이잖아요.”
“네 말이 맞아. 우리 집은 지금 한증막이야.”
“얘들아. 밤이 늦었는데,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니? 이러다가 너희들 여기서 지내는 거, 들키기라도 하면 내가 입장이 매우 난처해진단다. 벌써 9시야.”
“야옹.”
“멍.”
“그래. 잘 가. 내일 아침에 보자.”
(우리 집)
“집 안이 캄캄하네. 자동 점등장치도 안 해놓고 다니는 우리 집사. 우리가 캄캄한 데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집사.”
“칼리프.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예전엔 우리 집사를 그렇게 총애하더니, 이리 변할 수가 있구나.”
“형님. 형님은 밤눈이 좋으니까, 상관없으시죠?”
“그럼, 넌 뭐 많이 불편하냐? 아직 어리고 생기 넘치는 놈아.”
“그냥. 집사에게 섭섭해서요. 우리에게도 관심이 없잖아요. 형님, 예전에는 변 작가가 카자르 누님 신경 안 쓴다고 우리가 욕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하지만 지금 보세요. 지금은 작가님이 우릴 돌보고 있고, 정작 우리 집사는 우릴 방임하고 있거든요. 내 말이 틀렸어요?”
“맞아. 이제는 나도 변 작가가 우리 집사인 것 같아.”
“우리 집사는 변 작가님을 찬 이후로 사람이 변한 것 같아요. 나랑도 눈 마주친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박사 공부가 많이 힘든가 보지. 조교 일도 그렇고, 아니면 교수들에게 밟히고 있나?”
“아무리 그래도 자기 집에 개와 고양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관심이 없는데, 이게 정상 집사인가요?”
“나도 얼굴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얼굴도 다 잊어버리겠어.”
(대문 쾅)
“드디어 납시셨네요. 우리 집사.”
“그러게.”
(바닥에 쿵)
“어라? 왜 바닥에 쓰러지지?”
“칼리프. 집사가 기절했어.”
“네?”
“그래도 집에 와서 쓰러져서 다행이야. 길에 쓰러지면 누가 이 밤중에 알아보겠어?”
“아니. 그래도 여기서도 쓰러져도 되는 건가요? 병원에 데려가야 하잖아요?”
“우리가 무슨 재주로? 잠깐, 대문 잠겼니?”
“자동잠금이잖아요. 바로 잠겼네요.”
“이런, 아니다. 칼리프, 옆집 가서 작가님을 모셔 와.”
“엥? 지금요. 하지만 내가 들어갈 순 있어도 작가님이 구멍을 통과할 순 없어요. 개구멍이잖아요. 그 구멍은.”
“하여튼. 어서. 이런. 집사가 의식이 없어. 열도 펄펄 끓어. 더위를 먹었나? 아니면 이 더위에 열감기?”
(옆집)
“멍. 컹. 멍.”
“깜짝이야. 칼리프. 너 왜 다시 왔어? 뭔가 할 말이 있나 보네. 무슨 일이야. 응? 따라오라고?”
“멍.”
“베란다에 뭐가 있니?”
“멍.”
“설마, 나보고 이리로 들어가라는 거야?”
“멍.”
“장난도 아니고 설마?”
“멍.”
(베란다 벽 콰당. 우지끈. 우리 집에 들어온 작가)
“옆집 총각!”
“야옹.”
“멍멍.”
“아. 이런. 불부터 켜야겠어. 어디 보자. 옆집 총각은 어디 있니?”
“멍.”
“아. 저기 현관에 쓰러져 있구나. 어디 보자. 어머. 열이 펄펄 끓어. 잠깐. 119. 119. 급하게 와서 휴대폰도 못 가져 왔네. 아. 잠깐 기다려. 집에 가서 가져올게.”
(자기 집에서 휴대폰을 들고 온 옆집 작가)
“여보세요. 119죠. 지금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네 주소는 보람 아파트 13동 111호, 아니 112호예요. 빨리 오세요.”
(잠시 후 119 요원 들어와서)
“네, 보호자님. 신고하셨죠?”
“보호자라니? 전 옆집 사는 이웃인데요.”
“하여튼 지금 다른 분은 아무도 없잖아요? 저 개나 고양이가 신고할 순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네.”
“같이 타고 가실 거죠?”
“아? 네. 얘들아, 우리 집에 가 있어. 거기 시원해. 다녀올게. 혹시 내가 금방 못 오더라도 알아서 챙겨 먹어. 알겠지?”
“야옹.”
“멍.”
(병원)
“대상포진입니다. 상태가 매우 나쁜데, 젊은 양반이 이 정도가 되도록 병원도 안 가고 뭘 한 건지. 쯧쯧.”
“네? 이제 30대 초반인데, 대상포진에 걸릴 수도 있나요?”
“그럼요. 과로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면역력이 떨어져서 걸릴 수 있죠. 지금 이 청년 임파선도 퉁퉁 부어서 말도 잘 못 하고 밥도 잘 못 먹었겠는데요. 요즘 같은 폭염에 영양실조, 과로. 스트레스, 임파선염. 대상포진까지. 심각하네요. 한동안 입원 치료받아야겠어요.”
“아? 학교 조교로 일하고 있는데, 아무리 방학이지만 매일 출근해야 해요.”
“이보세요. 사람 상태를 보고 이야기하세요. 지금까지 이 꼴로 일하러 다닌 건가요? 이 청년도 제정신이 아니네. 학교에 당장 전화해서 당분간 못 나간다고 말하세요.”
“그게. 전. 보호자도 아니고, 제가 마음대로 정할 입장이 못되어서.”
“이봐요. 그럼 어떻게 알고 신고하신 건가요? 적어도 왕래는 하니까 신고하신 거 아녜요?”
“저, 그게.”
“하여튼 이 환자 지금 병원에서 나가면 안 되니까, 알아서 하세요. 자. 다음 환자분.”
(병원 복도)
“아. 이런 내 정신 좀 봐. 지금 벌써 아침 10시야. 어젯밤 병원에 와서 지금까지 꼬박 밤새고, 의사 기다리다 겨우 만나고, 아. 애들. 보러 가야 하는데, 괜찮을까? 사료와 물은 항상 챙겨두지만. 아니야. 지금 학교에 전화해야지. 검색. 검색. (뚜뚜뚜). 아. 여보세요. 문화대학교 사학과죠? 네. 정태식 조교님 오늘부터 당분간 출근 못 하실 것 같아요. 대상포진과 임파선염으로 입원했어요. 아직 의식도 없어서 제가 대신 전화 드렸어요. 네네. 교수님께 전해주시고요. 어젯밤 급하게 입원해서 지금 진단받았거든요. 그래서 더 빨리 전화 못 드린 거예요. 네. 의식이 돌아오면 본인이 직접 연락하실 거예요. 네. 이만.”
“아무래도 의식이 돌아오는 걸 보고 가야 하나? 아니면 그냥 가야 하나? 하긴 서로 얼굴 보기 편한 사이도 아니고, 그냥 편지 남기고 가야겠다. 저기. 간호사님. 종이랑 펜 좀 빌려주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메모)
‘옆집 총각. 학교에는 당분간 출근 못 한다고 연락해뒀어. 나머지는 알아서 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내가 보호자로 입원 수속 했어. 달리 방법이 없었어. 쾌차하고. 건강하길 바래.’
“저기. 간호사님. 이 쪽지를 1312호 정태식 환자에게 전해주시겠어요? 내가 지금 좀 급히 가봐야 해서.”
“아? 환자분 깨어나는 것 안 보고 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곧 깨어날 텐데. 보고 가시지.”
“아뇨. 제가 좀 바빠서 애들 아침도 못 챙겨주고, 급히 가야 해서요.”
“그럼. 집에 가셔서 정태식 환자 갈아입을 속옷. 세면도구, 기타 물품들도 챙겨오실 거죠?”
“네? 그런 게 있어요?”
“입원 처음 시켜보신 거예요? 당연히 개별로 챙겨 와야죠. 병원에서 개인 물품, 속옷을 지급하지는 않으니까요.”
“아. 그렇구나. 어쩌지? 나는 그냥 옆집 이웃인데요. 이웃의 옷장을 뒤져서 속옷을 챙겨오기가 좀. 곤란한데. 어떡해.”
“그러면 보호자로 서명도 하셨는데, 책임을 지셔야죠. 아니면 진짜 보호자 분께 연락하시던가요?”
“아, 가족들은 지방에 계시는데요, 음. 네. 할 수 없군요. 알겠어요. 챙겨오죠.”
“그럼 다녀오시는 동안, 이 쪽지 전해 드리면 되는 거죠?”
“아. 네. 그러세요. 다녀오죠.”
(우리 집)
“칼리프? 술탄? 다녀 왔어. 아침은 먹었니? 응? 그래. 나 근데, 바로 다시 나가봐야 해. 잠깐. 집사 집에 다녀올게. 참. 술탄과 칼리프 화장실 청소도 해야 하는구나. 바쁘다. 바빠.”
(병원)
“저기. 간호사님. 여기 속옷, 세면도구. 물컵. 그리고 이것들은 간식인데요. 환자 방에 냉장고에 두세요. 전해주세요. 정태식 환자 것이에요.”
“아니. 환자 의식 회복했는데, 직접 전해주시지 않고요?”
“그게 저기 좀. 얼굴 보기가 껄끄러운 사이라서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위급한 상황에서 구해준 생명의 은인인데 뭐 냉대할까 봐요?”
“그거야 잘 모르죠. 다른 사람이 구해줬으면 할 수도 있는 거고. 마음대로 속옷 챙겨온 것도 신경 쓰이고.”
“이것 보세요. 보호자님. 어린애도 아니시면서, 왜 그러세요? 본인이 직접 전해주세요. 우리가 그 정도로 한가하진 않아요.”
“하아.”
(병실)
“작가님? 오랜만이네요.”
“응. 오랜만이야. 이렇게 보네.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됐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덕분에 살았는데요. 저 대상포진이라면서요? 임파선염도 있고. 그리고 학교에 전화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제가 교수님과 통화했어요. 교수님도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학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참. 그리고 그것은 제 속옷인가요? 다행이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응. 애들 밥도 화장실도 다 해주고 왔으니까, 애들은 걱정 안 해도 돼.”
“참. 애들도 있었지? 내가 요즘 정신이 빠져서 걔들 밥도 화장실도 제대로 못 챙겨줬어요. 그런데 작가님. 어떻게 절 병원에 데리고 오신 거죠? 우리 집 비밀번호도 모르시는데, 또 내가 쓰러진 건 또 어떻게 아신 건지? 신기하네요. 혹시, 우리 집에 감시카메라 설치하셨나요?”
“설마? 내가 그럼 범죄를 저질렀다는 거야? 아냐. 그런 거. 오해하지 말아줘. 실은 베란다 벽을 뚫어서 애들이 우리 집에 놀러 다녔는데, 애들이 자기 쓰러졌다고 날 불러서 벽을 완전히 부수고 들어갔어. 벽은 다시 원상복구 해놓을게. 걱정하지 마. 애들만 들락날락할 거야. 날도 덥고, 자기도 집에 거의 없어서 내가 좀 놀아주고 하거든. 이런 일만 아니었으면 들키지 않았을 텐데. 뭐. 애들이 우리 집에서 노는 것도 싫으면 할 수 없지만. 하지만 애들은 그냥 다니게 두면 좋겠어. 전에 벽을 막아서 우리 카자르가 우울증으로 떠난 걸 생각하니 차마 다시 막지는 못하겠어. 아참. 오해하지마. 처음에 뚫은 건. 칼리프야. 내가 먼저 뚫지 않았어. 나는 술탄만 통과하는 구멍을 조금 더 크게 뚫어서 칼리프도 다닐 수 있도록 한 것뿐이야.”
“아. 그렇군요. 칼리프가 먼저 구멍을 뚫어서 오고 가고 한 거였네요. 그리고 칼리프가 작가님께 나 쓰러졌다고 알리러 갔고요?”
“그렇다니까. 믿어줘.”
“물론이죠. 걔들이 전에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카자르도 없는데 구멍을 뚫어서 작가님을 보러 다녔다는 게 신기하네요. 칼리프가 작가님과 정이 많이 들었나 보네요.”
“응. 나도 술탄이랑 칼리프가 날 보러 와줘서 무척 기뻤어. 고맙고. 그리고 요즘 매일 우리 집에서 놀다 밤에 돌아가.”
“그랬구나. 사료가 줄지 않아서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응. 거의 우리 집에서 먹고 마시고 놀다가 자기 집에서는 잠만 자.”
“그것도 감사해요. 애들을 돌봐주셔서.”
“감사받으려고 한 건 아니고, 이 일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하여튼. 얼마나 입원할지 몰라서 속옷 있는 거, 다 챙겨 왔고. 면도기. 수건. 칫솔, 치약. 비누. 샴푸. 물컵. 그리고 요구르트하고 간식도 되는 대로 챙겨 왔으니까 냉장고에 두고 먹어. 더 필요하면 말하고. 그리고 정신 난 것 봤으니까, 이만 난 가볼게. 가서 벽 막을게. 개구멍만 빼고.”
“작가님. 저기...”
“응?”
“아니에요. 안녕히 가세요.”
“잘 지내.”
(우리 집)
“얘들아. 나 왔어. 너희들 아빠, 깨어난 것 보고 왔어. 걱정하지 마. 열도 내렸고, 정신도 말짱해. 갖다 줄 것은 다 갖다 줬고. 이제는 너희들만 챙기면 되니까. 참. 술탄 화장실도 우리 집으로 옮겨야겠다. 이제 벽을 다시 막을 거라서. 내가 들락날락할 수 없거든. 너희들 밥이랑 식기랑 배변 패드. 그리고 술탄 화장실과 이동용 케이지 등등도 다 우리 집으로 갖다 놓고. 총각 퇴원하면 돌려주지 뭐. 자자. 얘들아. 이사 가자. 그래. 짐 다 옮기고 나서 벽을 막을 거야. 자자. 어서 움직여.”
(옆집)
“칼리프. 작가 집이 우리 집보다 훨씬 안락하지 않냐? 캣타워도 우리 집보다 훨씬 고급이야. 여기 고양이용품들은 다 최고급이군. 누님은 정말 공주로 사셨네. 사실 공주였지만. 난 이름만 술탄이지. 우리 집 고양이용품은 다 평범한 거야. 심지어 화장실도 내 것보다 누님 것이 훨씬 좋아. 바꿀까보다.”
“네. 물론이죠. 여기가 파라다이스예요. 형님. 작가님도 24시간 우리와 함께 있고, 또 냉방도 시원하고. 간식도 더 고급이고. 작가님은 미식가시니까요.”
“그래. 우리 살찌겠어. 여긴 천국이야. 나는 지금까지 이런 사료와 간식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작가님은 먹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거든요. 늘 맛있는 걸 드시고, 우리도 맛있는 걸 주고. 그런데 우리 때문에 글 쓰는 시간이 많이 준 것 같죠?”
“그래. 예전에 카자르 누님의 시절에는 정말 먹고 자고 씻고 화장실 가는 시간 외에는 글만 쓴 양반인데, 요즘은... 흠. 저렇게 써도 책을 낼 수 있나?”
“전에 얼핏 듣기론 24권 쓰는 것이 목표라고 했는데, 12권 출판하고 13권째 쓰는 중이죠. 진도가 안 나가는 건 확실하네요.”
“참, 이제는 우리가 작가 걱정을 하는구나. 정말 집사가 바뀐 것 같아.”
“확실히 그렇죠. 그리고 집 구조도 똑같으니까, 환경도 별로 낯설지도 않고, 정말 좋군요.”
“그런데 우리, 우리 집사는 전혀 걱정도 안 하는 것 맞지?”
“하긴, 병원에 잘 있겠죠. 편안하게.”
“우리 집사는 아파서 병원 갔는데 정작 우리는 작가가 글 많이 못 쓰는 걸 걱정하고 있구나.”
“하긴, 그러고 보니.”
(병원)
“일주일 꼬박 입원했고, 이제 흉터도 많이 옅어졌고 슬슬 퇴원해도 되지 않을까요? 학교도 너무 오래 비우기가 좀 그런데요.”
“정태식 환자, 그러고 싶었으면 초기에 왔어야죠. 그랬으면 이리 입원할 필요도 없는데, 사람이 다 죽어가면서 119에 실려 왔으면서 말이야. 아직은 좀 더 경과를 봐야겠어요. 한 사흘 있다가 다시 한번 상태를 보죠.”
“네, 선생님. 그러세요.”
“교수님, 네, 저 태식인데요. 아. 아직 퇴원 못 했고요. 사흘 있다가 의사 선생님이 한 번 더 보자고 하셔서요. 학교는 어떻게 되었나요?”
“자네, 아직 목소리도 돌아오지 않았군. 이런. 학교는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나 잘하게. 덧나면 큰일이니까, 대상포진은 컨디션이 나쁘면 다시 나빠진다고 하더군. 자네 어찌 그 지경이 되도록 근무를 할 수가 있었나? 사람이 요령도 좀 있어야 해. 그리고 박사 공부는 장거리 경주야.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공부할 수 없어. 이번 기회에 그걸 좀 깨닫길 바라네.”
“네, 교수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방학 동안 아예 푹 쉬다가 개학하면 다시 나오게. 방학 중엔 다른 녀석이 대신 봐줄 테니까. 학교는 걱정하지 말게나. 개강하면 나오게. 이만 끊겠네.”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개강 후에 뵙겠습니다. 딸칵.”
“학교 일은 해결되었는데, 이제 집안일이 걱정인가? 작가님께 애들 맡긴 것도 있고, 퇴원하면 얼른 데려와야지. 아무래도 그놈들이 있으면 글 쓰는 데 방해가 되겠지? 그리고 큰 은혜를 입었는데, 어떻게 사례해야 하나? 그리고 입원비는 얼마나 나올까? 방학 동안 일 못 하고 병원비는 추가로 들어가니 적자가 크구먼, 예상 못 한 지출이야. 이래서 다 예비비라는 항목을 두는 거구나.”
(옆집)
“얘들아, 너희들, 아빠 보고 싶지 않니?”
“야옹?”
“멍?”
“일주일도 넘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구나. 많이 아픈 모양이야. 언제쯤 퇴원하려나? 아니지. 퇴원하면 너희들 다시 너희 집으로 이사 가는 거구나?”
“야옹.”
“멍.”
“그래도 개구멍은 있으니까, 언제든지 놀러 와. 어차피 낮엔 집에 아무도 없잖아? 날도 더운데 여기서 놀아.”
“야옹.”
“멍.”
“형님. 다시 우리 집으로 가야 하는 거군요.”
“그래. 그렇지. 가기 싫다.”
“저도요. 하지만 집사가 출근하면 여기 와서 놀다가 밤에 가면 되죠. 뭐.”
“그래야지. 밤새 덥게 자야겠구나.”
“여기가 시원하고 좋은데, 밥도 맛있고.”
“그러게.”
(병원)
“정태식 환자. 소원대로 퇴원하세요. 그래도 당분간 조심해요. 무리하지 말고, 잘 먹고 쉬도록 해요. 폭염주의보인데, 다시 실려 오지 말도록.”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파트 복도)
“띵똥.”
“누구세요?”
(덜컥. 옆집)
“작가님. 저 퇴원했어요.”
“아? 드디어 퇴원했군요. 잘 되었어요. 이제 목은 좀 괜찮아졌어요?”
“목소리도 거의 돌아왔고, 흉터도 안 보이고, 이제 괜찮아요. 참 애들은?”
“잘 있어요. 참 베란다 벽 막으면서 술탄 화장실이랑 살림살이들도 다 챙겨 왔는데, 도로 갖고 가세요. 자자. 얘들아. 아빠 왔어. 이제 돌아가야지.”
“야옹.”
“멍.”
“얘들아. 아빠 왔다. 그동안 잘 있었니?”
“야옹.”
“멍.”
“아니, 오랜만에 왔는데,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어? 아빠 왔다고.”
“저기. 애들이. 아뇨. 네. 데려가세요. 참 기운이 없으실 테니 짐은 제가 좀 옮겨 드리죠.”
“네. 감사합니다.”
“자자. 얘들아. 너희도 이제 돌아가야지.”
(대문. 덜컥. 우리 집)
“어라? 우리 집이 깨끗하네요. 생각보다 더 지저분할 줄 알았는데.”
“그때 벽 막고 짐 챙겨 올 때 대충 청소해뒀어요. 환기되라고 창문도 열어두고, 비 새지 않는 범위 내에서, 참 오해는 마세요. 벽 막고는 한 번도 안 왔어요. 대문 비밀번호도 모르고요. 자. 이제 다 옮겨 왔으니까, 잘 쉬세요. 그리고 얘들아. 잘 지내. 그리고 오고 싶으면 개구멍으로 놀러 와도 좋아. 안녕.”
“저기 작가님?”
“네?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왜 다시 존댓말을 쓰시죠?”
“그게 뭐 어때서요? 당연한 것을. 옆집 총각도 어린애도 아닌데, 함부로 말을 놓을 순 없죠. 이제 가볼게요. 잘 지내요. 그럼.”
“.............???”
(대문 덜컥. 쾅)
“저기, 얘들아. 작가님이 좀 변한 것 같지 않니?”
“야옹?”
“멍?”
“전에 병원에 왔을 때도 편하게 말을 했는데, 오늘 갑자기 존댓말로 바뀌었어.”
“멍.”
“야옹.”
“이제 예전처럼 그냥 낯선 이웃인 거야? 응? 그런 거야?”
“야옹.”
“멍.”
“칼리프. 집사가 왜 저러냐?”
“그러게요. 작가님이 변하길 바랐으면서 왜 저런 거죠? 자기가 작가님을 불편해했으면서, 소원대로 해주는데 또 뭘 더 바라는 걸까요?”
(옆집)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이제는 자연스럽게 얼굴 보고도 말할 수 있어. 전에 병원에서도 몹시 불편했는데, 역시 말을 높이니까, 좀 더 자연스러울 수 있구나. 다행이야. 앞으로도 잘할 수 있어. 자자. 힘내자. 변. 해. 신. 그러고 보니 어릴 때, 늘 ‘변신해’라고 놀림 받았는데, 정말 변신해야지. 옆집 총각이 여자들은 연기도 잘한다고 하던데, 난 연기하는 게 왜 이리 힘들지? 아니야. 이건 연기가 아니고, 다시 처음의 이웃으로 돌아간 것뿐이야. 잘하고 있어. 잘했어. 변해신.”
(다음 날, 우리 집)
“칼리프? 집사가 왜 등교하지 않지?”
“그러게요. 해가 중천에 떴는데, 왜 아직 집에 있죠?”
“날도 더운데 이제 옆집으로 가고 싶은데, 왜 아직 버티고 있지?”
“그냥 있든 말든 옆집으로 갈까요? 곧 나가겠죠? 방학이라 늦게 출근하나?”
“아니? 지금 점심때가 다 되었어. 이 시간에 출근하는 곳도 있냐?”
“그럼. 설마 학교에서도 잘린 걸까요?”
“하긴 10일이나 쉬었는데, 어느 직장에서 그걸 좋다고 하겠어?”
“하. 학교에서도 잘리면 그럼 우리는 방학 내내 같이 지내야 하는 거예요? 옆집에 놀러 가지도 못하고?”
“얘들아. 간만에 집에서 푸욱, 늦잠도 자 보고 좋구나.”
“이런. 정말 잘렸네. 잘렸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정말 집사는 미덥지가 못해요. 저러고도 계속 우리 집사를 할 수 있으려나. 걱정이네요. 우리의 앞일이.”
“뭐야? 그 눈빛은? 설마 이 아빠가 또 잘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야옹.”
“멍.”
“역시, 그렇군. 하하. 진짜 방학을 맞은 것뿐이야. 방학 동안만 쉬기로 했어. 걱정마. 2학기부터 다시 일도 하고 공부도 하니까.”
“야옹.”
“멍.”
“휴우. 그나마 잘린 건 아니네. 다행이다.”
“그러게요. 십년감수 했네. 그건 그렇고 방학 내내 집에서 뒹굴뒹굴할 거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옆집에 갈 수 있나요?”
“아니. 못 가지. 이런 낭패가 있나.”
“어라? 작가님이 걱정하시겠는데요. 우리가 갑자기 발길을 뚝 끊으면 우리 집사가 작가님 집에 못 가게 막은 줄로 아실 텐데.”
“그렇겠군. 아마도.”
“그러면 작가님 몹시 슬퍼하실 텐데. 우울증이라도 걸리면 어떡해요?”
“정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참으로 곤란하게 되었네.”
(옆집)
“아니. 얘들이 왜 우리 집에 놀러 오질 않지? 벌써 며칠째야? 설마 베란다 벽이 막혔나? 확인해봐야겠군.
.............
어라? 뚫려있는데 웬일이지? 둘이 동시에 어디 아프기라도 하나? 아니면 옆집 총각이 애들을 우리 집에 못 가게 막는 거야?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아냐. 그럴 수도 있어. 괜히 애들 일로 또 엮이게 될까 봐 경계하는구나. 그런 거구나. 이제 애들도 볼 수 없구나........
슬퍼........
흑.”
(우리 집)
“칼리프, 도저히 못 참겠다. 그냥 옆집에 가자. 우리 집사 눈치 볼 것 없이. 전에 카자르 누님이 그냥 우리 집에 드나들었듯이 말이야. 작가님이 우리 기다리다가 쓰러지겠어.”
“그래요. 형님. 작가님이 걱정하실 거예요. 아니, 내가 걱정되어서 안 되겠어요. 빨리 가요. 형님.”
(옆집)
“야옹!”
“멍!”
“야옹! 야옹! 야옹!”
“멍! 멍. 왈왈왈.”
“이런. 이번엔 작가님이 쓰러져 있어. 칼리프 빨리 가서 집사를 데려와.”
“넷. 형님. 그런데 벽이 또 막혀 있는데요.”
“그건 집사가 알아서 하겠지. 어서 데려와. 이런. 작가님이 기절했어.”
“넷.”
(우리 집)
“칼리프? 왜 그래? 뭔가 할 말이 있구나?”
“왈왈왈.”
“따라오라고? 어디? 그런데 술탄은 어디 있니?”
“왈왈왈.”
“베란다? 뭐? 이리로 들어가라고? 왜? 술탄이 거기서 뭐 일 저질렀어? 이런.
(베란다 벽을 쾅. 우지직)
(옆집 안)
“술탄!”
“멍.”
“아? 저기 있네. 그런데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아니? 작가님. 정신 차리세요.
(뺨을 철썩. 철썩.)
“멍멍멍.”
“야옹.”
“어라? 꿈인가? 왜 옆집 총각이 내 눈앞에 있지?”
“허어 참. 이봐요. 작가님. 정신 차리세요. 저 맞거든요. 그리고 꿈도 아니고.”
“어맛. 깜짝이야(후다닥. 벌떡). 아니? 여긴 웬일이세요?”
“그건 제가 할 말이거든요. 작가님. 기절해있었는데요.”
“아. 얘들아. 드디어 우리 집에 놀러 왔구나.”
“저기요. 작가님. 애들이 작가님 쓰러져 있다고 저에게 알려줘서 벽 부수고 들어왔는데요.”
“아? 그래요? 애들이 데려왔다고요. 저기 그동안 애들이 한 번도 우리 집에 오질 않아서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신 건가요?”
“그럴 리가요? 퇴원하고 열심히 회복 중인데. 어딜 가겠어요? 이 더위에 다시 병나라고요?”
“그럼. 너희들, 왜 안 왔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걱정하고 속상했단 말이야. 안 와서.”
“야옹.”
“멍.”
“역시 작가가 우릴 기다리다 지쳐서 상심해서 기절했나 보군. 오늘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정말이지. 큰일 날 뻔했어요. 그래도 큰 병이 난 것 같진 않네요. 병원까지 갈 필요는 없겠어요.”
“그냥 굶고 안 자고 그런 정도인 것 같아.”
“.................”
“................”
“음. 저기, 옆집 총각.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가도 괜찮아요. 저기 애들은 좀 두고 가실래요? 요 며칠 못 봐서. 같이 있고 싶은데, 해지기 전에 보내 드릴게요.”
“저기요. 작가님. 나도 오랜만에 봤는데, 나는 그냥 가고 애들만 두라고요?”
“네?”
“보아하니 통 안 먹고 안 자고 그런 것 같은데, 밥 먹었어요? 나 배고픈데.”
“저기요. 밥은.”
“나도 회복 중이라 잘 먹어야 하는데, 계속 도시락으로 때우고 있어서 영양실조인 것 같아서요. 밥 다운 밥 좀 먹고 싶어요.”
“저기. 우리 집이 식당도 아니고, 원하시는 메뉴를 찾아 식당에 가서 드시죠? 내가 요즘 요리를 안 해서 별로 차릴 것이 없어요. 애들 사료는 많지만. 장도 못 봤고.”
“그럴 수가? 작가님 집에 먹을 게 없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대체 그동안 며칠이나 굶은 거예요? 이 양반아.”
“그러게요. 오늘이 며칠이죠? 한 사흘? 애들 안 오는 날부터 지금까지.”
“큰일 낼 사람이네. 이러다 굶어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어. 애들 아니었으면 옆집에서 시체로 썩어도 아무도 모르고 지나갔을 거 아녜요?”
“그런가요? 나도 내가 언제 기절했는지 잘 몰라서....”
“술탄. 칼리프. 너희들 정말 잘했어. 너희가 작가님을 살렸어. 정말 초상칠 뻔했잖아? 왜 진즉 여기 와 보지 않았니? 사흘 동안 안 가보고 뭐 했니?”
“야옹?”
“멍?”
“칼리프. 지금 우리 집사가 우리보고 왜 진즉 작가님께 가지 않았냐고 하는 거지?”
“그러네요. 가도 되는 거였나요? 자기 눈치 보느라 못 가고 있었는데, 작가님은 우리 기다리다 상심해서 굶어 죽을 뻔했고.”
“그냥 눈치 보지 말고 오자. 괜히 쓸데없는 걱정 했네.”
“그래도 정말 큰일 나기 전에 작가님을 발견해서 다행이네요. 휴우.”
“작가님. 지금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다고 하니까, 나가서 외식이라도 하죠. 제가 살게요. 제가 신세 진 것도 있고.”
“저기. 신세랄 것도 없고요. 애들은 내가 좋아서 돌본 것뿐이고. 애들이 옆집 총각을 살린 거고, 나는 119에 신고한 것뿐이고, 물론. 속옷과 물품 가져다준 것도 있지만, 그건 간호사가 하라고 해서 한 거고. 그러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신세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야말로 오늘 깨워줘서 감사해요. 그대로 있었으면 정말 어찌 될 수도 있었는데. 소름 끼치네요.”
“그거야말로 애들이 구한 거고, 나는 그냥 작가님 깨운 것밖에 안 했는데요. 애들이 작가님을 살렸죠. 정말 장하다. 얘들아. 너희들을 키운 보람이 있다.”
“고마워. 날 구해줘서. 그리고 너희들이 옆집 총각도 나도 살렸구나. 이런 기특할 데가.”
“그래. 너희들이 우리 둘 다 살렸어. 정말 고맙다. 그렇지만 나도 작가님도 지금 너무 허기져서 다시 쓰러질지도 모르겠어. 우선 나가서 밥 먹고 올 테니까, 너희들은 집 보고 있어. 여기 있든지, 우리 집에 있든지.”
“저기. 나가자고요? 나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이 꼴로?”
“저기요. 아무도 작가님인 줄 모르거든요. 작가님 얼굴 아는 사람 누가 있나요? 가족 외에는 출판사 사장, 편집장 정도?”
“하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잠깐만, 5분만요. 옷이라도 갈아입고 세수는 해야죠. 머리도 좀 빗고.”
“그럼 제대로 씻고 30분 후에 대문 앞에서 봐요. 나도 지갑 챙기고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우리 집)
“칼리프? 지금 우리 집사랑 작가님 데이트하는 것 같지 않니?”
“우하하. 첫 데이트네요.”
“우리 집사가 저렇게 저돌적인 사람이었나? 갑자기 데이트 신청이라니 깜짝 놀랐어. 숙맥인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요. 그런데, 형님. 작가님이 기운이 없어서 가다가 쓰러지면 어쩌죠?”
“걱정마. 혼자 있는 게 아니잖아? 쓰러지면 집사가 업고 가든 안고 가든 알아서 하겠지.”
“그렇군요. 역시 형님은 모르는 게 없으셔. 존경합니다. 형님. 꾸벅.”
“흠. 내가 좀 훌륭하긴 하지. 에헴.”
“형님, 오늘 첫 데이트 잘 돼야 할 텐데요.”
“그러게. 집사가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저 녀석도 데이트해 본 적 없지. 아마?”
“그런가요?”
“저 녀석도 여자친구 사귄 적 없어. 적어도 내가 산 5년 동안은 한 번도 없었어.”
“둘 다 숙맥이네요. 앞일이 걱정이에요.”
(아파트 밖)
“작가님, 날도 더운데 택시 타고 갈까요?”
“어디 먼 데 가게요? 우리 동네도 식당 많은데, 물론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데서 먹자고요. 남산 레스토랑은 어때요?”
“이런. 내가 오늘은 너무 기운이 없어서 도저히 운전 못 하겠어요. 하긴 거의 운전한 지도 가물가물하긴 하네. 이런 날 운전하면 사고 나겠죠?”
“택시 타요. 남산, 멀지도 않아요. ...........택시.”
(남산 레스토랑)
“여기 와 본 적 있어요? 작가님.”
“나는 가본 곳이 거의 없어요. 학교 식당 외에는 집에서만 먹었어요. 특별히 나갈 일이 있으면 도시락 싸서 다니고. 학교 다닐 때도 거의 도시락 싸서 다녔는데.”
“정말 대단해요. 요즘 누가 도시락 싸서 다니나요? 그것도 학생이. 요리를 좋아하시나?”
“딱히 취미도 없고, 달리 잘하는 게 없으니까, 게다가 먹는 것을 제일 좋아하니까, 집에서 음식 만드는 게 일상이죠. 뭐.”
“그런 양반이 사흘을 굶었다고요? 왜요? 애들이 보고 싶어서?”
“그렇죠. 뭐.”
“나도 그랬는데, 몇 달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랬더니 대상포진에 걸리더군요. 임파선염까지 쌍으로.”
“옆집 총각은 왜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는데요?”
“누가 보고 싶어서요.”
“누구요?”
“그런 사람 있어요.”
“아? 그러셨구나.”
‘전에 말한 여자친구 될 뻔했다던 여자인가 보네. 아직도 잘 안 됐나.’
“.................”
“.................”
“주문하시겠습니까?”
“네, 오늘의 추천 메뉴가 뭔가요?”
“네. 요즘은 이 요리를 추천해드립니다.”
“그럼 그걸로 2인분 주세요.”
“넷.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후식은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작가님?”
“아이스크림이요.”
“아이스크림 둘 주세요.”
(말 한 마디도 없이 식사 마치고)
“저기요. 오늘 잘 먹었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내가 요리 안 해도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군요. 참 편리한 세상이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을. 작가님. 돈만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걸 매일 먹을 수 있어요. 작가님은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나요?”
“그런가요? 하긴, 차가 있어도 주차장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데, 사실 나 같은 사람에겐 차도 필요 없는데 말이죠. 그 외제차 딜러가 죽자고 달려드는 바람에 얼떨결에 샀지 뭐예요? 정말 필요 없는데, 부모님 드릴까 싶어요. 부모님은 아직 운전하시니까.”
“아뇨. 작가님. 필요할 데가 있을 거예요. 나도 운전은 못 하지만. 아, 이참에 방학 동안 운전이나 배울까요?”
“요즘 세상에 운전 못 하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요. 나 같은 칩거형 인간도 운전은 하는데, 예전, 장 볼 때만 탔었는데, 요즘은 인터넷으로 주문하니까, 장 보러 나갈 일도 없어서 그냥 차가 주차장에 처박혀 있어요. 그래요. 운전은 필수로 해야 할 것 같아요. 급한 일이 있으면 탈 일이 있을 거예요. 학교 개강하기 전에 따요.”
“그럴게요. 작가님. 면허 따면 같이 소풍이라도 가시죠. 애들 데리고.”
“정말요? 어머, 재미있겠다. 나도 어릴 적 학창 시절에 소풍 간 이후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아참.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저 사람, 좋아하는 여자 있어. 정신 차려. 변해신.’
“왜 그러시죠?”
“아뇨. 아무것도. 네. 소풍. 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우리 집)
“제법 오래 걸리네. 둘이 잘 되어가나 보지?”
“그러게요. 밥을 이리 오래 먹진 않을 텐데.”
“어디 시원한 데서 수다 떨고 있나?”
“보통 밥 먹은 후는 어디 갈까요?”
“내가 현대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요즘은 어디서 데이트하니?”
“형님이 모르시는 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나는 데이트란 걸 해본 적도 없는데.”
“난 뭐 해봤냐? 그냥 마음에 드는 여자 찍기만 하면 알아서 다 수발들어 줬는데.”
“하아. 네. 어련하시겠어요? 전 소개받은 고구려 출신 아내 외에는 여자가 있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도 참으로 오랜만에 같이 있는 거 아냐?”
“서로 어색하지 않아야 할 텐데.”
(레스토랑 안)
“작가님. 요즘 글은 잘 쓰고 계세요?”
“음. 저기 진도가 막 나가는 편은 아니에요. 요 며칠은 특히 한 줄도 쓰지 못했고.”
“하긴 굶어서 쓰러졌는데, 쓸 수가 없었겠네요. 장르는 뭐죠?”
“다음에 책 나오면 그때 보세요. 다른 독자들처럼.”
“이번엔 장르 공개를 안 하셨나 보죠?”
“네. 함구하고 있어요.”
“몹시 궁금하네.”
“후식도 다 먹었는데, 이제, 그만 나가죠.”
“아 벌써요? 날도 더운데, 좀 더 있다가 해라도 좀 기울면 나가죠?”
“너무 오래 있으면 눈치 보이지 않나요?”
“그럼 뭐라도 하나 더 주문하면 되죠. 뭘 그런 걱정을 하고 그래요?”
“이런 곳에 이렇게 오래 있어 본 적이 없는데.”
“혹시 애들 걱정이라면 안 해도 돼요. 그 녀석들은 혼자도 아니고 본래 내가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와도 알아서 잘 먹고 잘 놀고 집 잘 보고 있으니까.”
“저기요. 걔들은 옆집 총각이 학교 가자마자 우리 집에 와서 종일 놀다가 밤에 돌아갔거든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최근 총각이 퇴원하고는 한 번도 우리 집에 안 온 거고. 아니 못 온 건가? 그래서 내가 상심한 거고.”
“하하. 그랬군요. 이 녀석들이 내가 집에 있으니까, 눈치 보여서 작가님 집에 가질 못했던 거군요. 혹시 설마, 내가 애들은 못 가게 막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음. 실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래서 속상했고.”
“하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런 쪼잔한 놈이라고 생각했다니 좀 섭섭한데요. 작가님. 나 그런 놈은 아니에요.”
“그런 거라면 다행이고요. 난 또 벽을 막아야 하나 생각했네.”
“벽이 뚫려있어서 작가님도 나도 살아난 것 아닌가요? 절대 막으면 안 되죠. 애들은 생명의 은인이고.”
“그랬죠. 고마운 애들이죠.”
“작가님, 애들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도 좀 해 봐요.”
“뭘요? 별로 할 말 없는데. 글도 잘 못 쓰고 있고, 그다지.”
“그럼 내 이야기를 하죠. 후. 뭐부터 해야 하지?”
“혹시 여자 이야기라면 사절할래요. 난 적당한 상담자가 못 되는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여자애들 성향도 잘 모르고. 세대 차이 나서 별 도움도 안 될 것 같네요.”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철벽을 치시는 거죠?”
“보고 싶은 분과 잘 안 되어서 의논하려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잘 안 되네요. 생각보다 까다롭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전혀 모르겠어요. 말 붙이기도 어렵고.”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먼저 연락을 하세요.”
“네?”
“그래도 전에 전화 먼저 했다면서요?”
“아? 네?”
“연락하길 잘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단순한 대화 상대자였다고 실망하지만 말고 마음이 확실하면 다시 시도해봐야죠.”
“저기요. 작가님?”
‘아. 그렇군. 밍키 엄마를 말하는 것이구나.’
“작가님은 다시 연락하라고 하시는 거죠? 지금?”
“보고 싶어서 사람이 다 죽어가도록 병이 났는데, 그럼 그냥 있어요?”
“하긴 죽다가 살았죠. 덕분에.”
“애들이 살린 거고요.”
“아뇨. 정말로 덕분에, 죽다가 살았다니까요. 작가님.”
“난 그냥 119에 전화만 했어요.”
“하여튼. 나는 작가님 덕분에 다 죽었다가 또 겨우 살아났다고요.”
‘이 양반. 대체 몇 번을 이야기해야 알아들을까?’
“나도 이런 일에는 별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해요. 옆집 총각.”
“휴우. 작가님, 그나저나 내 이름 알아요?”
“네? 알긴 알죠. 입원 수속도 했는데.”
“그럼 그 옆집 총각이라는 호칭, 좀 어떻게 해봐요? 만약 내가 옆집 아닌 곳에서 살면 어떻게 부르실 거죠?”
“아? 이사하시게요? 그렇구나. 학교 근처로 이사 가시나요? 하긴 학교가 좀 멀긴 하네. 등하교 시간도 오래 걸리고, 차비도 들고.”
“아니. 이 양반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아니,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어떻게 국문과 출신 작가이지? 학교 성적은 좋았나요?”
“전액 장학생에 수석 졸업생인데. 교수님이 대학원 진학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거절했어요. 그때부터 이미 작가로 알려져서. 글쓰기에 전념하고 싶어서요.”
“아? 수석 졸업생이셨구나. 그래서 더 따돌림당하신 거죠?”
“네. 맞아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죠?”
“전에 잘난 사람은 더 따돌림당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네. 그랬구나. 하여튼 졸업하고는 집에서 글만 썼어요. 두문불출하고.”
“하아. 네, 네. 정말 대단하신 분이셔. 그나저나 앞으로는 옆집 총각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럼. 뭐라 부르죠? 정군? 이렇게 부를까요? 아니면 정태식 군?”
“정태식 군이라. 그렇게밖에 안 되는군요. 너무 길면 불편할 테니 정군이라 하시든가요. 나는 해신 씨라고 불러야지.”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내가 한참 손윗사람인데, 태식 군.”
“그게 낫네요. 그냥 태식 군이라고 하세요. 나는 해신 씨라고 할 테니까.”
“그냥 작가님이 나은데, 나는.”
“내가 싫어요. 서로 이름 부르죠.”
“왠지 내가 손해 보는 느낌인데.”
“몰라요. 하여튼 나는 그냥 그렇게 부를 거예요.”
“아, 알겠어요. 이제 나가죠. 해도 많이 기울었네요. 애들도 기다리겠어요.”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가요.”
(우리 집)
“얘들아. 다녀 왔어.”
“야옹.”
“멍.”
“칼리프. 집사가 왜 저리 기운이 없어 보이지?”
“글쎄요. 데이트가 잘 안 되었나?”
“꽤 오래 걸렸는데, 뭔가 잘 되어 가는 줄 알았는데.”
“아악. 얘들아. 변신해. 저 여자. 왜 저리 꽉 막힌 거야? 말귀도 못 알아듣고. 답답해 미치겠네. 으악.
(방문 쾅. 방으로 들어감)
“뭐라는 거야? 변신해는 또 누구야?”
“글쎄요. 변 작가님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게 아닐까요?”
(방문 덜컥, 다시 나옴)
아니. 얘들아. 변신해. 아니, 변해신. 저 여자 정말 어떻게 저렇게 앞뒤가 꽉 막힐 수 있지?”
“야옹?”
“멍?”
“아냐. 너희들이 뭘 알겠냐? 아악. 미치겠네. (누워서 사지를 버둥버둥). 내가 누구 때문에 죽다 살았는데.”(사지를 버둥버둥)
“드디어 집사가 돌았군.”
“걱정이네요. 왜 저러죠? 밥 잘 먹고 온 줄 알았는데.”
“내 버려둬. 저러다 말겠지.”
“그런가요?”
(옆집)
“아, 정말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밥 먹은 게 언제였더라? 출판사 사장님이 같이 밥 먹자는 것도 거절했었는데 말이지. 내가 안 만들고 맛있는 밥 먹은 지도 정말 가물가물한데. 어쨌든 잘 먹고 왔어. 그나저나 옆집 총각은 이름을 불러주길 원하는 건가? 앞으로 태식 군이라고 불러야 하겠지? 근데 나보고 해신 씨라 부르는 좀 지나친 것 같은데, 친구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고. 아무래도 내가 손해 보는 느낌이야. 어쨌든 청소도 좀 하고, 정신 차려서 글도 다시 써야지. 그동안 작업에 너무 소홀했어.”
(우리 집)
“칼리프, 집사가 왜 저럴까?”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형님. 한참 만에 와서 은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전 밍키 엄마랑 데이트할 때와 비교해 보면 어때?”
“밍키 엄마랑은 저도 봐서 알지만, 형님. 그런 것이 데이트라는 건가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고 했잖아?”
“그랬죠. 나랑 밍키가 얼어서 동태가 되어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수다 떨었죠.”
“오늘도 네가 보고 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겨울이고, 지금은 한여름인데, 집사가 여름을 타는 걸까요?”
“그런가? 여름이라 불쾌지수가 높아서 짜증이 나는 건가?”
“그래도 봄 내내 저도 같이 운동했던 걸 생각해보면 대화도 간간이 하곤 했었는데. 밍키 엄마와 하던 폭풍 수다는 아니지만, 서로 묻고 대답하고 했어요. 자연스럽게. 오히려 집사가 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작가님은 주로 질문하고는 대답을 듣는 쪽이었죠. 가끔 조언해주고.”
“그랬는데 갑자기 둘이 어색하게 헤어지고 집사가 병원에 실려 가고 그 이후로 지금에 이른 거지.”
“그렇죠. 뭐. 저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형님.”
“아, 점심은 해결했는데, 당장 오늘 저녁은 또 어떻게 하지? 얘들아, 너희들은 좋겠다. 사료만 먹으면 되니까, 밥도 안 해도 먹을 수 있으니까. 나는 또 도시락을 먹어야 하나?”
“그건 네 사정이고, 우리도 고급 사료가 먹고 싶다. 집사야. 옆집 작가는 더 고급 사료를 주더라. 간식도 최상급이고.”
“형님. 우리 집사가 돈 버는 사람도 아니고, 가난한 학생인데, 그런 요구를 하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당장 집사도 제대로 된 밥을 못 먹고 있잖아요.”
“쯧, 그렇긴 하지. 이러다 점점 더 우리는 가난해지겠구나. 살이 저절로 빠지겠어. 안 그러냐?”
“하긴, 그래요. 그건 그렇고 우리 집사는 출근 안 하면 다시 운동하러 나갈까요? 나랑 같이?”
“그렇게 되면 너야 좋잖니?”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러면 작가님은 어떻게 되는 거죠? 지금까지는 집사 몰래 작가님과 운동했었는데, 이제 다시 집사가 나를 데리고 나가면 작가님은 혼자 운동하실 수 있나? 혼자 하신 적이 없는데. 이러다가 다시 살찌시는 거 아냐?”
“나는 모르겠다. 네가 눈치껏 작가랑 같이 운동하자고 해봐.”
“내가 사람의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떻게 해야 그걸 집사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현관 밖에 나가면 작가 집 현관 앞에서 계속 버텨. 짖든지. 그래서 집사가 눈치채서 작가 집에 초인종을 누르고 같이 가자고 말하도록 해봐.”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역시 형님은 대단하셔.”
“뭘 그 정도쯤이야. 에헴.”
(며칠 후)
“칼리프, 이젠 나도 어느 정도 몸도 회복했고, 날도 더운데 아침 일찍 다시 운동하러 갈까? 너도 그동안 산책 못 해서 괴로웠지?”
“멍.”
“그래. 그래. 예전처럼 새벽 운동을 하자고. 이젠 날도 덥고 해도 빨리 떠서 빨리 가야 해. 나가자. 칼리프.”
“멍.”
(덜컥. 쾅. 복도)
“칼리프, 왜 꼼짝도 안 하고 거기 섰어? 거긴 옆집이잖아?”
“.........”
“너 설마, 해신 씨랑 같이 가고 싶다는 거야? 지금?”
“멍.”
“역시 그렇군.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말을 못 꺼내겠어. 어찌나 철벽을 치고 있든지. 사람이 달라졌지 뭐야. 그래도 너 핑계 대고 한번 초인종을 눌러볼까? 하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에 자고 있으면 어떡하지? 가뜩이나 초인종 누르기 힘든 집인데, 이 새벽에 누르면 화내지는 않을까? 아니면 짜증 내면서 안 열어줄지도 모르고.”
“멍멍멍.”
“아아. 알았어. 빨리 누르라는 거지? 허. 참. 어쩐다.”
“띵똥.”
“누구세요?”
“저기.”
“어라? 태식 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죠?”
“아. 안 자고 있었네요. 다행이다. 문 안 열어주면 어쩌나 걱정했네.”
“어라? 칼리프도 왔구나. 아하. 아침 운동 가시나 봐요?”
“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해신 씨도 같이 가실 수 있나 물어보려고요. 실은 나가려는데, 이놈이 자꾸 해신 씨 현관 앞에서 꼼짝도 안 하고 버티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초인종을 눌렀네요.”
“아? 태식 군은 생각도 안 했는데, 칼리프가 나랑 가고 싶다고 해서 부득이하게 물어보는 거군요.”
“아니. 또 뭘 그렇게 말씀하세요?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차마 초인종 누르기가....”
“하긴. 그랬더라면 미리 전화를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랬으면 준비를 했다든가, 못 간다든가 말을 해줬을 텐데.”
“해신 씨는 내 전화번호 아세요?”
“아? 그러고 보니 모르네요.”
“나도 모르거든요.”
“우리는 지금까지 그냥 옆집을 왔다 갔다 했지. 서로 전화를 한 적이 없군요. 한 번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전화번호 교환부터 하는 게 좋겠군요.”
“아. 그런가? 나는 전화번호가...”
“이리 주세요. 직접 찍어드리죠. 자. 됐어요. 이제 전화 거세요.”
“딩동뎅동. 네네. 확인했어요. 이제 전화번호 받았네. 참 오래 걸렸구나. 전화번호 얻기가 이렇게 힘든 사람은 처음이에요.”
“내 전화번호 아는 사람도 가족과 편집장 외에는 처음인 것 같은데요.”
“이런, 영광입니다. 해신 씨 개인 전화번호를 직접 주시다니.”
“비꼬지 마세요. 은둔 외톨이인 것 다 아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정말 영광이에요. 팬들이 알면 날 죽이려 들겠군요.”
“아. 내 팬들이 있었구나. 부디 부탁인데, 노출하지 말아 주세요.”
“당연하죠. 해신 씨 골수팬인 밍키 엄마에게도 말 하지 않을게요.”
“아? 그분?”
‘저 사람이 좋아하는 여자야. 밍키 엄마라고 부르는구나.’
“그러니 걱정 마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정 걱정되면 이름을 바꿔놓을까요? 누가 봐도 모르게.”
“나는 그냥 정태식 군이라고 입력했는데.”
“나는 보안상, 다르게 할까 봐요. 뭐가 좋겠어요?”
“글쎄요. 난 별명도 그다지 좋지 않은데.”
“설마 별명이 ‘변신해’였어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하하하. 아니에요. 찍었어요.”
‘이런 나도 그렇게 불렀는데, 설마 그게 진짜로 별명이었을 줄이야.’
“변신해는 누가 봐도 눈치챌 것 같으니까, 다른 걸 하죠.”
“음. 옆집?”
“옆집은 안돼요. 밍키 엄마가 바로 눈치챌 거예요.”
“그럼. 누님?”
“나는 누나가 없긴 한데, 그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그러면 작가?”
“작가가 해신 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다른 작가를 만날지도 모르는데.”
“다른 작가를 아세요?”
“아니. 지금은 아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멍.”
“이런. 칼리프 오래 기다렸구나. 미안해. 됐어요. 이름은 내가 알아서 지어 붙일 테니까, 우선 지금 운동하러 갈 수 있나요?”
“아. 잠깐만요. 선크림만 바르고 나올게요. 모자 챙기고.”
“..............”
“멍.”
“됐어요. 가요.”
(공원)
“멍멍멍.”
“칼리프 오랜만에 셋이서 운동하니까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나.”
“멍멍멍.”
“정말로 그래 보이네. 하긴 이게 얼마 만이지? 봄부터 쭈욱 못했으니까, 한 4개월 되었나?”
“그러네요. 지금 7월이고. 한여름이죠.”
“그때는 정말 컴컴하고 추웠는데. 지금은 쨍쨍한 태양 아래 더위를 뚫고 지나가는군요.”
“그늘에서 좀 쉴까요?”
“아뇨. 조금 더 하고 그냥 돌아가죠.”
“그래요. 그럼.”
(운동 후)
“저기요. 해신 씨. 아침은 혼자 먹을 거예요?”
“아. 저기. 그쪽 생각은 전혀 못 해서 준비가 안 되었어요. 내일 아침부터 오세요. 예전처럼.”
“그래요? 그렇단 말이죠. 확실한 거죠? 나, 내일 아침부터 먹으러 가요?”
“네. 매일 아침 운동하고 같이 아침 먹어요. 그때처럼.”
“아싸. 신난다. 그럼 내일 아침에 현관 앞에서 봐요. 시간은 6시?”
“그래요. 6시.”
(옆집)
“아. 오늘도 자연스러웠어. 이제는 그렇게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아. 정말 좋은 이웃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잘했어. 변해신.”
(우리 집)
“술탄. 아. 정말 기분 좋은 아침이야. 그렇지? 아하하. 와하하하.”
“칼리프? 집사가 또 왜 저러냐? 조증인가?”
“형님. 작가님과 예전처럼 다시 매일 운동하고 같이 아침 먹게 됐어요. 그래서 그래요.”
“그래? 내가 말한 작전이 성공했구나?”
“네. 형님 말대로 작가님 현관 앞에서 버티고 있었더니, 자연스럽게 초인종을 누르고, 또 다행스럽게도 작가님이 깨어 있었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더니 전화번호도 교환하고 같이 운동했어요. 내일부터 아침밥 먹으러 오래요.”
“잘됐네.”
“역시 그렇죠? 작가님도 이젠 편해 보여요. 표정이 부드러워졌어요. 불편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 나누더군요.”
(며칠 후)
“여보세요. 칼리프 아빠?”
“아? 밍키 엄마, 오랜만이네요. 어쩐 일로 내게 전화를 다 주셨죠?”
“뭐, 그냥 했다고 해도 안 믿을 거고,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죠. 작가님은 어떻게 됐어요? 나도 많이 참다 참다 전화하는 거예요.”
“아. 그러셨구나. 하긴 지난봄에 보고서는 처음이네요. 전화도 그때 이후로 처음이고, 그동안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똑같아요. 중간엔 달랐지만.”
“그래요?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어요?”
“진도라. 하긴. 그때보다 전혀 더 나아지지는 않았어요. 똑같아요. 아니. 똑같은 건가?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그때 밍키 엄마를 만난 바로 다음 날부터 며칠 전까지 서로 안 보고 지냈거든요. 그리고 나는 아파서 입원했다가 얼마 전 퇴원하고, 지금 회복해서 다시 운동하게 됐는데, 같이 하게 됐어요. 그게 다예요.”
“뭐라고요? 그때 나 만난 후로 안 보고 지내시다가 이제 다시 본다고요? 왜요?”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어요. 확실히 그때는 부담스러웠고, 또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몰랐고, 작가님도 그걸 눈치챘기에 서로 안 보기로 하고 자연스럽게 안 만났죠. 그렇게 한여름이 되도록 서로 안 보고 지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작가님은 뭐라고 하세요?”
“별말 없어요. 그냥 같이 아침에 운동하고, 밥 먹고, 그게 다예요. 그리고 그때와는 반대로 내가 초조하고, 작가님은 편안해지셨죠. 그게 더 좋은 건지도 잘 모르겠고, 같이 운동하고 밥 먹는 건 좋은데, 나보다도 작가님이 날 더 편하게 대하니까, 이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더 모르겠어요. 하아. 나만 신경 쓰고 있나?”
“이런 일, 전화로 할 내용은 아니군요.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하죠.”
“더 자세히 할 것도 없어요. 이게 다예요. 밍키 엄마. 그럼 잘 지내요.”
“잠깐, 여보세요. 하. 끊었어. 먼저. 이런 일은 처음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작가님과는 친구로 지내기로 한 건가?”
(다음 날)
“칼리프, 나가자. 운동하러.”
“멍.”
“띵똥.”
“금방 나가요. 잠깐만.”
“오늘은 웬일로 안 나와계셨네요.”
“잠깐, 뭐 확인 좀 하느라고요.”
“확인이라뇨?”
“음.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어디 좀 다녀오려고 비행기 표랑 유레일패스, 호텔 예약을 했는데, 그것 좀 보느라고요.”
“뭐라고요? 해신 씨, 어디 가세요?”
“나도 평생 칩거 생활을 좀 청산하고 싶어서요. 가슴도 좀 답답하고, 세상을 좀 돌아봐야 새로운 작품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고 해서, 바람 좀 쐬고 오려고요.”
“어디를, 얼마나 갔다 오실 건데요?”
“글쎄요. 날짜 오픈된 티켓인데, 3개월은 유효한 거라고 하던데요?”
“3개월? 그렇게 오래? 혼자 가시는 거예요?”
“티켓은 3개월 유효하지만 다녀보다가 힘들면 중간에 빨리 돌아올 수도 있어요. 내 마음이에요. 그리고 나도 처음 하는 여행이라 좀 두렵기도 하고, 어쩌면 일주일 만에 돌아올 수도 있어요. 그냥 기간 넉넉한 티켓을 끊은 것뿐이에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해신 씨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양반이 외국에 혼자서 다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아니, 칩거 은둔 외톨이 양반이 어떻게 그런 간 큰 생각을 할 수가 있죠?”
“나도 심사숙고해서 한 결정이에요. 언제까지나 방구석에 처박힌 채로만 살 순 없어요. 글 쓰는 데도 좋지 않고, 새로운 글을 쓰려면 나도 좀 변화해야죠. 내 별명처럼.”
“그래서 언제 출발하는데요?”
“이달 말?”
“어디로 출발하는데요?”
“런던 인 파리 아웃인데요. 티켓만 그렇게 끊은 거니까, 중간에 변수가 있을 수도 있어요. 나도 잘 몰라요. 계획은 세우긴 했는데, 계획대로 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아니, 어떻게 그렇게 큰일을 아무 상의도 없이 결정할 수가 있죠?”
“부모님과 상의했는데, 여행 다녀올 거라고, 허락도 받았고요. 그런데, 그걸 왜 태식 씨가 확인하려는 건지.”
“하긴. 나는 그냥 이웃사촌인 거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나도 조심할 테니까. 그리고 지역마다 한국인들이 많은 곳만 갈 거고, 교통편과 주위 환경이 양호한 장소만 다닐 테니까. 그리고 해지면 밖에 안 나갈 거예요. 그리고 여차하면 돌아오죠. 뭐.”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에요. 요즘 한국인 대상, 아니, 아니, 이런 말 입에 담기도 싫다. 하여튼, 이달 말에 가서 가을에나 올 예정이라는 거 아니에요?”
“계획은 그렇죠. 7월 말 출발, 10월 말 도착.”
“아니, 어떻게 첫 여행을 그렇게 장기간, 장거리로 시작할 수 있죠? 같이 갈 사람도 없이.”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사는 거니까요. 혼자 할 수 있어야죠. 혼자 못 하는 건 같이도 못 하는 거예요. 나도 좀 성장하고 싶어서요. 너무 어린애처럼 살아서. 생각할 것도 좀 있고, 정리도 좀 해야 하고. 매일 집구석에 처박혀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도 할 수가 없어요. 나도 좀 변하고 싶어요.”
“뭘, 생각하고, 뭘 정리해요?”
“저, 그게, 좀.”
“뭘 정리하냐니까요?”
“왜 그래요? 심각하게? 칼리프가 기다려요. 빨리 나가죠.”
“..........”
“멍?”
(우리 집)
“형님.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야? 왜? 오늘 운동하다가 무슨 일 생겼어?”
“저기 그게. 작가님 유럽 여행 가신대요. 그것도 3개월 예정으로.”
“뭐라고? 누구랑?”
“혼자 가신다는데요. 비행기랑 호텔 예약했다고, 그리고 이달 말 출발이래요.”
“아니. 변 작가가 웬일이지? 혼자서. 여자가 간도 크네. 예나 지금이나 여자 혼자서 다녀도 되는 세상이 아니잖아?”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서 집사가 무척 화가 났어요. 상의도 없이 그런 일 혼자서 결정하냐고?”
“그랬는데?”
“부모님과 상의했고, 같이 결정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집사가 더 화가 났구나.”
“네. 집사가 자기는 그냥 이웃사촌이구나 라면서. 그러고는 둘이 한 마디도 말 안 했어요. 그냥 운동만 하다가 왔어요. 그리고 지금 샤워 중인데, 이 상태로 아침 먹으러 갈까요?”
“그러게. 밥은 먹겠지. 집에 먹을 게 없잖아. 우리 사료를 같이 먹는 것도 아니고.”
(옆집 식탁)
“해신 씨. 비행기 티켓 좀 보여줘요.”
“왜요? 관심 있어요?”
“그냥 좀 보여줘요.”
“알았어요. 여기요.”
“호텔 숙박 예약증도 보여줘요.”
“그건 또 왜요?”
“어휴, 비즈니스 클래스야..........찰칵. 찰칵.”
“아니, 사진은 왜 찍어요?”
“호텔 숙박증도요.”
“여기.”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아니? 사진은 왜 찍냐고요? 위조 티켓이기라도 할까 봐서요?”
“그냥 확인 좀 하려고요.”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하여튼 유명한 여행사에서 한 거고, 여행자보험도 확실히 들었고, 대사관, 영사관, 경찰서 등등의 연락망도 다 깔아놨고, 유레일패스도 끊었고, 번역기 앱도 깔았고, 그런데 나이가 많아서 학생증은 못 끊었네요. 숙소도 호텔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태식 군이라면 유스호스텔을 이용할 수 있을 텐데. 난 좀, 다른 애들과 지내기 부담스러워서.”
“나도 그리 어리지 않아요.”
“그래도 태식 군은 유스호스텔을 이용하겠죠. 만약에 간다면.”
“그렇죠. 돈도 없는데. 참 곤란하네. 이 호텔들은 다 일급 이상이군요. 이름만 봐도 알겠어.”
“아무래도 혼자 다니는 데다가, 안전문제도 있고 해서 호텔은 좀 좋은 곳으로 골랐어요. 그리고 내가 평생 돈 벌어서 쓴 데라고는 먹는 데뿐인데, 이럴 때 쓰려고 그렇게 열심히 번 거잖아요? 안 그래요? 아무래도 허술한 숙소는 안심이 안 돼서.”
“맞아요. 잘했어요. 안전이 최우선이죠. 그리고 현금은 안돼요. 카드도 한 장만 갖고 가요.”
“당연하죠. 국제용 체크카드 한 장만 가져갈 거예요. 그리고 나는 신용카드도 없어요. 원래. 체크카드만 써요.”
“대단한 양반이야. 정말. 대한민국 최고로 유명한 작가가 신용카드 한 장 없이 산다면 누가 믿을까? 나도 신용카드가 있는데, 장롱용이지만. 이참에 없애 버릴까 보다.”
“안 쓰는 카드는 없애는 것이 맞아요. 특히 신용카드는 점점 혜택도 없어지고 그다지 쓸 필요성을 못 느끼겠던데.”
“그래요. 이번에 신용카드 다 정리하고 교통수단 되는 체크카드 하나만 남겨야지.”
“이제 좀 화가 풀렸어요? 아까부터 계속 저기압이던데, 눈치 보여서 말도 못 걸겠던데요.”
“화난 거 아니라면 거짓말이고, 사실 좀 섭섭했어요. 적어도 이런 일은 나랑 의논할 줄 알았는데.”
“왜요?(눈을 크게 뜨면서)”
“아니. 됐어요. 그걸 되려 묻는 게 난 더 속상하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죠.”
“밥 먹어요. 그리고 이달 말 출국하면 당분간 혼자서 아니, 칼리프랑 둘이서 운동하고 밥 먹어요. 간식들은 좀 주고 갈게요. 안 상하는 것 위주로. 그동안 아침밥 못 먹게 돼서 속상한 것 같은데, 그렇지만 우리 집이 식당도 아니고, 무료급식소도 아니고, 어머? 왜 그런 표정이에요? 역시 의논했어야 했나?”
“내가 무슨 식충이예요? 아침밥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요.”
“깜짝이야. 그럼 뭐 때문에요? 운동은 칼리프랑 하면 되고. 또 뭐 다른 불편한 게 있나요? 아침밥 말고?”
“됐어요. 무슨 말을 하겠어?”
(대문 쾅. 우리 집)
“깜짝이야. 집사가 저기압이네. 아침밥 먹고 와서 저런 모습 처음이야.”
“그러게요. 형님. 아무래도 아침 먹으면서 싸웠나 봐요.”
“공짜로 아침 얻어먹는 주제에, 싸움하고 와? 간이 부었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형님. 심각해 보여요.”
“하긴. 변 작가가 혼자 여행 간다니까, 몇 달 동안 아침은 물 건너갔네.”
“어라? 집사가 나갈 모양인데요? 어디 가죠?”
“알 게 뭐야.”
(몇 시간 후)
“돌아왔어.”
“야옹.”
“멍.”
“얘들아. 난 9월부터 출근해야 해. 방학은 8월 말까지고. 그러니까, 한 달만 너희들 나 없이 좀 지내면 안 될까?”
“야옹?”
“멍?”
“미안해. 너희들을 데리고 비행기를 탈 순 없어. 그리고 내가 너희 둘을 데리고 어떻게 여행을 다니냐? 그동안 개, 고양이 호텔에 한 달만 좀 있어라. 나는 해신 씨 혼자 보낼 수가 없다. 불안해서. 그렇게 세상 물정이라고는 초등학생보다도 더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혼자 보낼 수가 있겠니? 부모님이 허락하신 것이 난 더 놀랍다. 아니 딸자식이 걱정도 안 되나? 난 그렇게 못해. 해신 씨가 10월 말까지 여행한다고 하니, 나는 8월 말까지라도 같이, 아니 몰래라도 뒤 따라다니고. 8월 말에 돌아와야지. 9월엔 개강하니까, 수업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하니까. 출발 비행기는 가까스로 같은 편을 구했어. 물론 나는 이코노미 클래스야. 그것도 겨우 구했다. 그 뒤가 걱정인데, 결국 해신 씨 혼자서 두 달은 더 다녀야 하는구나. 걱정이야. 정말.”
“야옹?”
“멍?”
“미안해. 얘들아. 한 달만 좀 참아라. 그리고 해신 씨가 예약한 호텔들은 너무 비싸서, 같은 곳을 예약할 수 없어서 근처 저렴한 곳으로 이용해야 해, 날짜와 지역을 맞췄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뒤 따라다니려고. 안 들키게. 무슨 007작전도 아니고, 몰래 따라다니려니 참 그것도 문제이긴 하다. 내가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하지만 들키진 않을 거야. 그 양반 눈치가 발바닥이니까.”
“집사가 큰 결심을 했구나.”
“정말, 놀랐어요. 작가님을 몰래 따라갈 생각을 하다니. 돈도 없는 주제에.”
“그러게. 한 달은 따라다닌다고 해도, 그다음은 뭘 어떻게 하려고?”
“학교 때문에 혼자 먼저 돌아온다고 하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죠.”
“이럴 때는 작가 같은 자유직이 참 좋은 거구나.”
“학생도 좋은 직업이에요. 방학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적어도 한 달은 따라 다닐 수 있잖아요? 일반 직장인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죠.”
“그건 그렇고 우리 둘이 한 달 동안 개 호텔에서 지내야 한다는데, 넌 괜찮냐?”
“작가님을 보호하러 가는 일인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형님. 우리 둘이 같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때, 같이 있다는 건 참 좋은 것 같아요. 나 혼자라면 우울증에 걸리겠지만, 카자르 누님처럼.”
“그건 그래. 나도 너랑 같이 있을 거라서 별로 걱정되지 않아. 우리 방학을 잘 지내보자. 그곳도 그리 나쁜 곳은 아닐 거야. 오히려 여기보다 더 쾌적할 수 있어. 냉방도 되어 있고.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나눌 수 있고.”
“그러네요. 그곳 관리인들이 나쁜 사람들만 아니면 좋을 텐데. 요즘 돈벌이에 혈안이 된 나쁜 사람들이 운영하는 개 호텔들이 많다던데, 집사가 부디 잘 골라야 할 텐데요.”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우리가 고르지도 못하는데.”
(며칠 후)
“저기요. 태식 군. 내일 낮 비행기로 출발해요. 건강하게 무사히 잘 다녀올 테니까, 잘 있어요. 밥 잘 챙겨 먹고. 그리고 칼리프. 잘 지내. 이 사람 잘 지키고, 밥 잘 먹는지, 그리고 술탄에게도 안부 전해줘.”
“저기. 해신 씨. 술탄을 보고 인사하고 가시죠. 그냥 가면 술탄이 섭섭할 텐데.”
“그럴까요? 그럼 잠깐 실례하죠.”
(현관문 덜컥)
“야옹?”
“아. 술탄.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네가 우리 집에 통 오지 않으니까, 볼 수가 없구나. 아침에 같이 운동도 안 하니까, 더 못 봤어. 나 내일 아침에 떠나. 그리고 한동안 못 올 거야. 그러니까, 우리 집에 와도 빈집이야. 네가 빈집에 와서 놀랄까 봐 말해주려고 왔어. 잘 있어. 술탄. 잘 다녀올게.”
“야옹.”
“멍.”
“칼리프. 너도 한동안 못 보겠네. 너무 걱정하지마. 그리고 술탄이랑 둘이서 태식 군을 잘 지켜줘. 태식 군은 아직 돌봄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이야. 혼자서는 밥도 잘 못 챙겨 먹잖아? 나도 그게 걱정이야. 굶으면 안 된다고, 다시 대상포진이 재발할라.”
“야옹.”
“컹.”
“그래. 알았어. 너희들만 믿고 간다. 잘 있어. 안녕.”
“인사 다 했어요?”
“네. 태식 군도 방학 마무리 잘하고, 다음 학기 준비도 잘하고, 개강하면 공부도 일도 다 열심히 해요. 그럼 잘 다녀올게요.”
“네. 해신 씨.”
(덜컥)
“자자. 얘들아. 해신 씨는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갔어. 인사는 나도 이하동문. 너희 둘 다 지금 개 호텔로 가야 하니까, 자자. 짐 챙기고, 우리도 출발하자. 얘들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나도 이럴 때는 정말 괴롭다. 걱정마. 제대로 된 호텔을 찾았으니까. 잘 돌봐 줄 거야. 그리고 잘 지내. 나도 잘 다녀올게. 자자. 출발.”
(다음 날 아침)
“아침 운동 대신 아침에 공항으로 출발. 어디 보자. 해신 씨가 출발했군. 참, 차를 타고 가는 게 아니구나. 택시를 타는구나. 이런. 나는 어쩌지? 아니지. 비행기는 같으니까. 그냥 공항버스를 이용하고 공항 가서 탑승만 하면 되지.”
(인천공항)
“인천공항은 세계 최고의 공항이야. 정말 시설도 확실하네. 그런데 너무 넓어. 나도 헤매겠어. 어디 보자. 몇 번 게이트더라? 이런. 해신 씨야. 마주칠 뻔했네. 들키면 끝장이야. 뭐라 할 말도 없고, 영락없는 스토커 취급을 받을 거야. 보아하니 면세점엔 안 간 것 같네. 쇼핑은 별로 안 하는구나.”
(탑승 대기 중)
“해신 씨 뒤쪽에 줄 서서 있다가 탑승해야지. 잠깐, 해신씨가 비즈니스 클래스이면 내가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어쩌지? 내가 먼저 탑승해야 하나? 좌석이 몇 번이었더라? 바로 뒤에 붙어서 들어가서 짐 실을 때 재빨리 지나가야겠다.”
“휴우, 지나왔어. 비즈니스 좌석 사람들은 뒷자리를 볼 일이 없고, 내릴 때도 먼저 내리니까, 이젠 걱정 없음. 여차해서 모자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긴 했지만, 이제 푹 잠이나 자자.”
(몇 시간 후)
“어라. 식사시간이구나. 기내식 타임. 당연히 먹어야죠. 비빔밥 주세요.”
“맛있네. 역시 한식이 최고야. 그런데 나한텐 양이 부족해. 뭐 후식도 있긴 하지만, 싸갈 수 있는 간식은 챙겨야지. 거기서는 제대로 간식을 사 먹을 시간도 돈도 부족하니까. 미행이라는 게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일이지. 참 화장실이 급할 때는 어떡하지? 그 생각을 못 했다. 해신 씨가 화장실 갈 때 같이 가는 수밖에.”
(몇 시간 후)
“어, 다시 식사시간이에요? 이번엔 양식이요.”
‘역시 간식들은 따로 챙기고.’
(몇 시간 후)
“음. 자다 보니 내릴 시간이 다 되었네. 런던시간으로 오후 5시 15분 도착이라 하니 내려서 바로 숙소로 가겠지? 저녁은 어디서 먹을까? 호텔? 아니면 근처 식당? 하여튼 따라가다 보면 알겠지.”
“히드로 익스프레스. 해신 씨 티켓 뭉치를 전부 촬영하길 잘했어. 아니면 놓쳤을 거야. 시내까지 금방이니까, 편리하군. 미리 예매를 해서 싸고. 현지는 더 비싸니까. 같은 여행사에 찾아가서 해신 씨를 담당했던 직원을 꼬여서 여행 전체 스케줄 중 한 달 분을 예매를 같이 했어. 여행 동선도 파악했고. 단 숙소만 다르지. 바로 근처 저렴한 곳으로. 한 달 동안은 밀착 감시를 하겠어. 확실하게.”
(런던 시내)
“음. 호텔에 들어가는구나. 역시. 저녁은 거기서 먹을 예정인가? 돈이 넉넉하면 참 편리하네. 거리를 헤매지 않아도 되고. 아직도 나오지 않는 걸 보면 호텔에서 저녁을 먹을 모양이야. 그럼 나는 근처에서 대충 때우고 숙소에서 자야겠어. 시차 적응이 힘들어. 내일 아침 호텔 조식시간을 파악해서 가장 이른 시간에 대기해야지.”
“옥스퍼드, 코츠월드, 비스터빌리지 투어. 같은 투어상품을 이용하면 들킬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다른 투어로 가야 해.”
(옥스포드 투어 중)
“옥스퍼드는 문명의 감동.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나니아연대기, 이상한나라의 앨리스... 판타지는 모두 옥스포드 출신. 이건 마법이지. 호그와트 학교로 유명한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포터의 주문을 외워본다.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 이런, 이럴 때가 아니야. 해신 씨를 놓치겠어. 다음 작품은 판타지일 수도 있겠군.”
(코츠월드 투어 중)
“자연의 감동. 그리고 찾아간 곳은 영국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마을, 코츠월드. 그곳에서 귀족처럼 오후의 홍차를 마시고 있는 해신 씨. 반대편에서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지켜보는 나. 무슨 형사도 아니고. 잠복근무 중.”
(비스터 빌리지 투어 중)
“브랜드의 감동인가? 마지막 행선지, 비스터 빌리지, 유럽에서 제일 싸다지! 헉, 구찌 가방 20만원? 이게 싼 건가? 여자들이 환장하고 구매하는군. 해신 씨는 가방을 좋아했던가? 어라? 세 개나 샀어. 전부 다른 메이커인가? 처음 보는 광경이야. 식비 외에는 지출을 안 한다고 하더니. 역시 여자들은 가방을 좋아하나? 몇십만 원짜리를 예사로 생각하네.”
“이런 하루가 다 갔어. 해신 씨를 쳐다보느라 제대로 관광은 못 했지만, 그래도 보람 있는 하루였어. 투어 상품이 잘 나온 것 같아. 얼른 가서 쉬고 내일은 해리포터 스튜디오 투어.”
(다음 날)
“역시 같은 투어 상품을 이용할 수 없어서 다른 곳을 이용. 같은 차를 탈 수가 없으니. 그래도 조심조심.”
(해리포터 스튜디오)
“입장 시, 패스포트를 요구해야 줌. 꼭 받아야 함. 이게 진짜 기념품. 와우. 예전에 책으로 다 읽고, 영화로 복습했던 장면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 같아. 어제 옥스퍼드와는 또 다른 세트장의 매력. 하지만 내가 여기서 해신 씨를 도둑 촬영하는 건 아마 모를 거야. 이런 귀여울 데가. 정말 좋아하네. 이런 취향일 줄 몰랐어. 정말로 다음 작품은 아동용 판타지일 것 같아. 내 사진은 찍을 시간이 없어. 해신 씨 촬영하느라 바빠. 이렇게 사람 많고 정신없는 곳에서는 누가 찍어도 모르니까, 마음 놓고 대놓고 촬영 중.”
.............
“여기는 밥이 맛이 없다고 소문이 나서 도시락을 싸 왔어. 그편이 또 따라다니기도 편하고. 앞으로도 미리 도시락을 사서 들고 다니면서 먹어야 할 듯. 식당가서 먹기는 다 글렀음.”
.....................
“열심히 촬영하고 오늘도 보람 있는 하루. 다행히 해신 씨는 하루에 한 코스만 도는 것 같아. 일정을 무리하게 소화하지는 않는군. 바로 호텔로 직행. 설마 저녁에 다시 나오지는 않겠지? 분명히 밤에는 안 나간다고 했는데, 이곳은 해가 길어서. 밤 10시나 되어야 어둑어둑하니 말이지. 혹시 모르니까, 호텔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까? 만약 밤에 나오기라도 하면 예를 들어 야경을 보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피시앤칩스나 사서 먹으면서 일대를 둘러보면서 지켜보자.”
(런던 시내)
“확실히 밥은 호텔에서 먹는 것 같아. 아침, 저녁을 다 호텔식으로 먹고, 하루에 한 투어만 다니는구나. 한국인들은 하루종일 진을 다 빼면서 관광한다던데, 해신 씨는 전혀 그렇지 않네. 그러면 나 혼자 시내 관광을 해야지. 이제야 제대로 관광을 하네. 고고.”
“역시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보는 것이 좋아. 이층버스 투어도 있지만, 내일은 템즈강 유람이니까. 뒤쪽에서 줄을 잘 서서 배를 타야지. 이건 같은 배임. 조심조심.”
(다음 날)
“호텔 조식시간도 최대한 마지막까지 먹고 나오는 걸 보니, 정말 여유롭게 여행하는구나. 나는 시간이 아까워서 무조건 최고로 빨리 먹고 다닐 텐데 말이야. 덕분에 이제 패턴을 확실히 알겠어. 정말 쉬엄쉬엄 다니는구나. 대체 호텔에서 종일 뭘 하는 걸까? 하여튼 알겠어. 그러면 지금부터는 내 개인 여행을 알차게 따로 보내야겠어. 하긴 3개월이나 다니려면 저렇게 하는 것이 맞아. 중간에 지쳐서 병이라도 나거나 하면 중도에 포기해야 하니까. 나는 한 달이지만. 그래서 나는 최대한 무리한 일정으로 하나라도 더 보는 걸 목표로 해야지. 해신 씨 감시 외에 여행도 추가로 해야겠어. 원래는 감시만 하다 끝날 것 같았지만, 여행도 할 수 있겠어.”
(템즈 강 유람선)
“정말 해신 씨는 대단해. 내가 같은 배를 타고 있어도 전혀 눈치를 못 채. 마음 놓고 촬영할 수가 있군. 하긴 강에서 바라보는 시내는 또 다른 맛이 있네. 엊저녁 걸어 다니면서 보던 거리와는 또 다른 풍경이야. 엊저녁 같이 다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런던 시내)
“아직 많이 이른 시간인데 설마 호텔에 돌아가진 않겠지? 음. 역시나 시내 관광을 하는구나. 나는 어제 다 봤던 거리이므로 마음 놓고 해신 씨만 감상 촬영 중. 아니? 대영박물관에 가는구나. 맞아. 그랬지. 박물관이 있었어. 전 세계 유물의 집산지. 자기 나라 유물을 타국에서 바라보는 심정이 어떨까?”
(다음 날)
“오늘은 새벽부터 킹스크로스역에 가야한다. 왜냐하면 에든버러행 기차를 타고 에든버러를 보다가 저녁 기차로 런던에 다시 돌아와야 하니까. 티켓은 한국서 다 예매를 하고 와서. 새벽에 가서 기차에 탑승하면 된다.”
“포터의 플랫폼 9, 3/4 사진을 찍으려 해도 옆에 해리포터 샵이 문을 안 열어서 카트도 없고 벽만 보고 사진을 찍는군. 나도 해신 씨를 촬영. 찰칵. 그리고 나도 셀프카메라로 찰칵.”
“기차에 탑승. 이제 한 4시간 자다가 도착하면 열심히 에든버러를 보는 해신 씨를 찍어야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스코틀랜드는 확실히 런던과 달라. 에든버러에 오길 잘했어. 찍을 곳이 많네. 틈틈이 셀프 촬영도 하고, 몰래 해신 씨도 촬영하고. 같이 찍을 수 없어서 안타까워.”
(에든버러 관광 마치고 다시 런던행 기차)
“종일 걸어 다녔지만 눈이 호강하느라 다리 아픈 것도 몰랐지 뭐야. 기차에서 푹 쉬어야겠어. 사진도 많이 찍었고. 흠. 보람찬 하루.”
“오늘은 피곤할 거야. 많이 걸어 다녔으니까. 게다가 내일 암스테르담에 도착하려면, 빠듯하네. 비행기로 이동할 줄 알았는데, 유로라인 버스라니. 놀라워. 덕분에 나는 약간 비용이 줄었어. 도버해협을 건너는데, 밤새 가야 해. 버스에서 제대로 잘 수 있을까? 배로 갈아타야 하고, 다시 버스 타야 하고. 왜 이런 코스를 골랐을까? 비행기로 편하게 금방 갈 수 있었을 텐데.”
(다음 날)
“밤새 버스에서 배로 다시 버스로 아침에 암스테르담 도착. 그런데 오늘 바로 잔세스칸스로 이동해. 풍차마을. 티켓은 역에 가서 바로 왕복표를 끊으면 되고.”
(네덜란드 잔세스칸스)
“잔세스칸스는 참 아름다운 마을이구나. 사진 찍기 좋아. 해신 씨도 즐거워 보여. 혼자서도 저렇게 잘 다니다니. 정말 놀라워. 혼자 독사진만 그것도 상반신만 찍는데도 좋은 모양이야.”
...............
“치즈와 과자도 많이 파네. 무거우니까, 내가 여기서 먹을 만큼만 사야지. 도시락 싸는 데 필요해. 해신 씨는 치즈를 많이 사는구나. 과자도. 역시 먹을 것은 놓치는 법이 없어. 그 모습도 귀엽습니다. 시식하는 해신 씨. 찰칵.”
“물가의 풍차들, 꽃과 예쁜 집들. 틈틈이 내 사진도 찰칵.”
..............
“어제부터 무리한 일정이었으므로 오늘은 숙소에서 기절할 듯. 해신 씨도 나도. 해신 씨, 꿀잠 자고 내일 봐요.”
(벨기에)
“오늘은 브뤼헤. 벨기에의 경주. 유네스코 지정 지역. 그런데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광고를 자제한다고 한다. 그리고 브뤼셀은 그냥 평범한 수도라 걷다가 패스.”
(독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구도시와 신도시가 적절하게 조화되었다. 괴테하우스 정도. 작가니까 가는 것 같다. 대도시. 사람 많고, 시끄럽지만 독일은 정말 깨끗하고 질서정연하다. 해신 씨는 쌍둥이 칼을 샀다. 조리도구에 관심이 많다.”
“하이델베르크. 고즈넉하니 철학자의 산책길이 아름답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점심식사. 역시 독일식당은 양이 많다. 먹고 남은 것은 도시락용으로 챙겼다. 아름다운 도시.”
“쾰른은 대성당이 유명할 뿐. 그냥 대도시.”
“본은 그냥 서독의 수도.”
“베를린은 정통 독일 수도. 무너진 분단 담벼락도 있고. 브란덴부르크 문. 홀로코스트 기념관. 묵념하는 해신 씨. 바라보다 촬영 타임을 놓침. 젠장. 조용해서 찍다가 들킬 것 같았음.”
“로텐부르크. 정말 중세도시 아기자기한 마을. 예뻤다. 그야말로 성 안쪽 사람, 부르조아에 들기 어렵겠다. 성 안이 너무 작아서. 성 밖을 내려다보니 거지 움막 같은 곳이 보였다. 성 안 사람과 성 밖 사람의 수준차가 느껴졌다.”
“뮌헨. 남부 대도시. 남부 독일인들은 북독일에 비해 여유로운 편이라는데, 나도 해신 씨도 술을 안 마시니까 그 좋다는 독일 호프, 그냥 지나치기만 한다. 마리엔 광장. 신시청사 11시에 보는 인형들도 보고, 전망대서 바라본 뮌헨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대도시. 순간순간 해신 씨를 깜빡한다. 이런 놓치겠어.”
“퓌센. 이 작은 도시에 그 아름다운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보러 왔다. 백조의 성. 루드비히 2세. 그리고 바그너. 성 밖 산책길도 아름답다. 성은 사계절이 다 아름다울 듯. 그 아래 호엔슈반가우 성도 보았다. 이런 넋을 놓고 보다가 해신 씨 촬영을 다시 재개. 배경이 아름다우니 사진도 잘 나왔다. 흠흠.”
(동유럽)
“프라하까지 거리가 좀 멀어서 기차에서 숙박. 해신 씨는 침대칸인가? 나는 1등석 좌석에서 밤샘. 나도 나이가 많아서 유레일패스 2등석을 못 샀다. 1등석이다. 도시는 아름답다. 대도시이다. 까를 다리. 대성당. 구시가 광장. 그리고 인형극. 인형보다 더 인형 같은 해신 씨 찰칵.”
“부다페스트. 야경이 아름답고. 무슬림식 온천에서 휴식. 들킬까 전전긍긍.”
“비엔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 음악회 관람.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궁 쇤브룬 궁전, 벨베데레. 음악가의 묘지.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이 좋아할 곳.”
(스위스)
“드디어 스위스인가. 가는 모든 길이 다 아름답네. 기차에서만 봐도 좋군. 루체른에서 카펠 다리, 빈사의 사자상. 그리고 알프스 최고봉이라고 하는 융프라우 요흐서 ‘신라면’ 점심. 실제 최고봉은 몽블랑이라는데? 알프스는 춥구나. 덜덜덜. 겨울 파카를 챙겨오지 않았어. 해신 씨는 알아서 챙겼군. 가족들에게 엽서를 써서 부쳤음. 해신 씨도 엽서를 부쳤음. 찰칵. 스위스는 찍었다 하면 다 엽서니까. 많이 찍자.”
(이탈리아)
“이탈리아. 밀라노부터 시작. 부유한 도시. 라 스칼라좌에서 오페라 감상. 피렌체. 르네상스의 중심도시. 꽃의 도시. 박물관 기행. 영화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임. 피사 사탑. 사진만 찍음. 로마는 정말로 볼 것 많음. 유적지도 많고. 콜로세움. 팡테옹. 바티칸 박물관. 바티칸 대성당. 미술 시간과 역사 시간에 배웠던 거, 다 보고 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감동적임.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정 벽화, 목이 빠지게 쳐다봄. 트레비 분수에 동전 2개 던짐. 로마식 아이스크림인 젤라또 먹음. 그런데 상인들이 다 바가지임. 관광객 대상이라 그런가? 소매치기 주의. 남유럽에 오니 도둑과 소매치기. 그리고 집시들이 우글우글함. 해신 씨 지키랴. 내 지갑, 여권, 휴대폰 지키랴. 피곤함. 남쪽의 베수비오 화산의 유적지. 폼페이. 끔찍해. 하지만 고대 로마는 정말로 선진국이야. 지금 이탈리아와는 딴판이야. 같은 조상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그리고 남쪽에 온 김에 카프리 섬에 들어왔음. 동굴 속 배 탐험, 기대했건만 그다지, 그냥 푸른 바다색이 좀 예쁠 뿐. 게다가 뱃사공은 돼지 멱따는 노래를 잠깐 부르고는 팁을 요구해. 옆의 일본인 관광객은 주던데, 나보다도 더 못 불러서 팁을 안 줬더니, 끝까지 욕을 한다. 이탈리아 욕, 이 나라에 오고는 거의 잠도 제대로 못 잠. 피부가 다 뒤집혀서 속상함. 병원도 못 가고. 어휴. 빨리 벗어나고 싶은 나라임. 조상들만 훌륭함. 조상 덕으로, 먹고 사는 나라. 남쪽은 확실히 치안이 불안정한데, 동유럽도 좀 신경 쓰였지만, 여기는 좀도둑이 많아서 정말 피곤하다. 그나저나 계획대로 스페인에 갈 생각인 건가? 이탈리아에서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스페인은 더 걱정이야. 그래도 가니까 따라가야지.”
(스페인)
“바르셀로나. 가우디의 도시. 정말 예술적인 건축물들이야. 하늘을 찌르는 옥수수, 성가족성당, 구엘공원. 그리고 기타 여러 가우디의 건축물. 확실히 고온 건조한데 물 부족 국가라 수도세가 비싸지. 이곳 숙소에서는 하루에 한 번만 샤워하라고 잔소리를 한다. 가우디가 훌륭해서 봐 준다.”
“그라나다. 무슬림의 최후의 보루. 그리고 알함브라 궁전. 정말 내가 이 그라나다의 최후의 술탄 보압딜이었다면 이런 기분일까? 쓸쓸하고 고즈넉한 궁전에서 침잠해본다. 참, 술탄, 칼리프 잘 지내는 거지? 아빠가 혼자 와서 미안하구나. 얘들아. 이 궁전은 낯설지가 않아. 정말로.”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가서 나는 곧 떠나야 하는데, 해신 씨는 계속 여행을 하겠지? 걱정이야. 적어도 남유럽이라도 벗어나는 걸 보고 싶어.”
“다행히 마드리드를 비롯한 중부 스페인은 가지 않았다. 바로 파리로 가는데? 웬일이지? 여행을 마감하려는 건가?”
(프랑스)
“밤새 파리로 왔는데, 해신 씨, 어디 아픈가? 왜 여행을 마무리 지으려 하지? 계획을 수정한 모양이네. 좀 지친 건가? 하긴 나이도 있고, 여자 혼자 지금까지 다닌 것도 대단한 거지. 나도 지치려 하는데.”
“파리 숙소는 새로 예약한 건가? 언제 했지? 휴대폰으로 했나 보군. 나는 한인민박을 이용하니까, 거리는 그리 멀지 않네. 다행이야. 내일 아침부터 다시 새벽에 일어나서 호텔 앞에서 대기했다가 다시 따라다니는 거지.”
“유럽을 거의 한 달을 돌아다녔더니 거기가 거기 같아서, 별로 감흥이 없어. 해신 씨도 영국에서 가방 사고, 독일에서 칼 사고, 네덜란드에서 치즈와 과자를 산 뒤로는 쇼핑도 안 해. 여기서는 뭘 할 거지? 샹젤리제 거리 산책?”
“아,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하루종일 관람객 모드.”
“오늘은 베르사이유 궁전 탐방. 파리를 벗어나서 교외로 나와 상쾌함. 대도시는 다 거기서 거기임. 이제 슬슬 나는 돌아가야 하는데. 사람들에게는 베르사이유 궁이 더 알려졌지만 난 쇤브룬 궁이 더 마음에 들어. 더 깨끗하고. 국민성의 차이인가?”
“이제는 샤를 드골 공항에 가야 해. 나는 오늘로 마지막이야. 엥? 그런데 왜 해신 씨가 공항 방면 차를 타지? 나는 여기서 조용히 마지막 사진을 찍고 갈 생각이었는데, 분명히 내가 탈 차를 타고 있잖아? 어라. 나도 빨리 타야 해. 무슨 일이지? 오늘 귀국하는 거야? 왜?”
(샤를 드골 공항)
“이상해. 수속하는 것까지도. 나야 가는 게 맞지만, 왜 여행을 중간에 그만두는 거지?”
“내가 먼저 탑승할까? 아니면 전처럼 뒤에 붙어서 들어가서 재빨리 지나칠까?”
“태식 씨.”
“우왓, 깜짝이야!”
“이제, 그만 숨고 나오죠.”
“아? 나 있는 거 알았어요?”
“당연하죠. 설마 몰랐을까 봐요?”
“아니. 대체 언제부터 알았나요?”(어리둥절)
“지금 와서 말하기 좀 미안하지만, 먼저 아는 척할까 봐 기다렸는데, 내가 아는 척하다가 그쪽에서 놀랄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한 달 동안 재미있었어요. 덕분에 좋은 글도 쓰고. 여행 중에 13권 다 썼네요. 좀 전에 편집장에게 원고도 보냈어요. 호텔에서 한 달 동안 글 썼거든요. 13권은 유럽 여행기에요.”
“아니, 대체 언제부터 알았냐고요?”
“실은 인천공항에서부터요. 전화기를 이제 꺼야지 하면서 휴대폰을 들었더니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여행사에서요. 내 담당 직원인데, 고민하다가 지금 전화한다면서, 실은 어떤 남자가 내 여행 일정과 예약상황을 꼬치꼬치 캐묻더니 일정을 똑같이 잡았다면서, 아무래도 스토커인 것 같다고, 혹시 모르니까 알려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출발 직전 알았어요. 무척 놀랐는데, 탑승하면서 보니까, 태식 군이 모자에 선글라스에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으로 탑승하더군요.”
“세상에 그럴 수가. 어떻게 지금까지 모른 척할 수가 있었죠?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마음 졸이면서 애를 태웠는데, 관광도 제대로 못 하고.”
“못 하긴요. 잘만 하던데, 나는 뭐 제대로 한 줄 알아요? 그쪽 신경 쓰이고, 걱정도 되고, 그리고 태식 씨 사진도 많이 찍었어요.”
“아니 무슨 사진요? 셀프카메라가 아니었어요?”
“아니, 난 태식 군 사진만 찍었는데.”
“나는 거의 해신 씨 사진만 찍었어요.”
“이런, 우린 둘 다 서로의 사진만 찍었네요. 잘됐네요. 서로 누가 더 잘 찍었는지 보면 되겠네. 그죠? 귀국 비행기에서는 심심하지 않겠네. 좌석은 내 옆자리로 승급시켜 줄게요. 한 달 동안 보디가드 해준 보답이에요. 가요. 승급하러.”
“Please, confirm that my return has been changed to today's date. and Raise this ticket from economy class to business class.”
“Madam, I checked your ticket change. and Jung Tae Sik's. Economy seat has been promoted to business class. confirmation completed.”
“자, 다 됐어요. 비즈니스석은 항상 그래도 좌석이 여유가 있으니까, 물론 방학 끝이라 좀 빠듯하긴 했지만, 한 자리는 있어요.”
(비행기 안)
“비즈니스석이라 좋군요. 넓고, 다리도 펴지고.”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여행도 처음부터 아는 척해서 같이 다닐 걸 그랬나?”
“정말, 그랬으면 둘이 같이 사진도 찍었을 텐데. 원통해라. 같이 다니고 싶은 곳도 많았는데.”
“늘 함께 다녔잖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같이 여행했다고, 그리고 든든했어요. 안심도 되고. 얼마나 즐거웠는데, 한 달이 눈 깜빡할 새 지나갔어요.”
“치이. 처음부터 아는 척해서 같이 다녔으면 더 좋았잖아요?”
“이런, 또 입을 내밀고 있네. 겨울방학엔 그럼 같이 다녀요. 됐어요?”
“정말요? 아. 하지만 난 또 여행가기가 좀 빠듯한데, 어쩌지?”
“겨울방학 여행비는 내가 줄게요. 보디가드로 충분히 자격 있어요. 숙소는 옆방으로 줄게요. 이번처럼 다른 곳에서 숙박하고 새벽같이 나와서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하아. 정말 기대되는데요. 신난다. 여행 끝에서 다음 여행을 기다리게 될 줄이야.”
“그런데, 태식 씨. 술탄과 칼리프는 어쩌고 왔나요?”
“개 호텔에 맡겼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양심적인 주인이니까, 내가 잘 아는 친구예요. 잘 돌봐줬을 테니까. 이제 돌아가서 애들 찾아서 집에 가죠. 참, 겨울방학 때 또 여행 가면 14권도 여행기가 되는 건가요?”
“네? 14권은 가을에 쓰고, 겨울방학 여행은 15권이 되겠네요. 이번엔 책이 빨리 나올 것 같네요.”
(개 호텔)
“술탄, 칼리프? 아빠 왔다. 해신 씨도 함께 왔다.”
“야옹?”
“멍?”
“그래그래. 어서 집에 가자.”
“그동안 잘 있었니? 고생했어.”
“야옹.”
“멍.”
“집사가 어떻게 작가랑 같이 왔지? 미행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게요. 들켰나 보네요.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했단 말인가? 정말 미덥지가 못해. 쯧쯧.”
“아냐. 잘 된 것 같아. 둘 다 표정이 좋잖아? 잘 된 것 같지?”
“그럼요. 잘되어야 우리가 한 달이나 여기서 격리 생활을 한 보람이 있죠.”
(며칠 후)
“해신 씨? 13권은 어떻게 결말났어요?”
“사서 보세요. 전처럼.”
“아이. 깍쟁이. 먼저 알려주면 안 되나?”
“............(미소).”
(며칠 후)
“여보세요? 칼리프 아빠? 여보세요?”
“네, 듣고 있어요. 밍키 엄마.”
“13권 봤어요?”
“네, 봤어요.”
“이런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작가님과 같이 여행 갔었어요?”
“네, 보셨다시피.”
“13권이 유럽 여행기로 12권의 속편이더군요. 12권에서 모호하게 난 결말이 아쉬웠는데, 13권에서 확실히 결판났네요.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럼요. 나도 그동안 묵은 체증이 확 뚫려서 살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반지도 준비했고, 프로포즈 해야죠. 부모님께도 허락받았어요.”
“대단하셔. 그래도 부모님께서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약간은. 하지만 내가 워낙 완고했고, 그 여자 아니면 죽겠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시더군요. 동생 녀석도 좋아해요. 그 녀석도 결혼할 수 있으니까요. 그동안 나 때문에 기다렸거든요.”
“해신 씨도 알아요?”
“아니, 아직 아무 말 안 했어요. 내가 먼저 완벽하게 준비가 된 후에 하려고요. 이제 해야죠. 그런데 내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 기가 죽어요. 자신감이 좀 떨어진다고나 할까? 무능하다고 거절하면 어떡하지?”
“칼리프 아빠. 내 이름 모르죠?”
“갑자기 그건 또 왜요? 밍키 엄마가 통성명하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랬죠. 혹시라도 예전에 나한테 마음이 있었나요?”
“계속 철벽을 쳐서 있으려다가도 사라지더군요.”
“미안해요. 실은 나. 남자친구 있어요. 미국에요. 장거리 연애해요.”
“.............?”
“놀랐죠? 실은 칼리프 아빠, 남자친구가 멀리 있어서, 잘 못 봐요. 내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칼리프 아빠가 무능하거나 매력이 없어서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려는 거예요. 그러니 자신감 가지고 얼른 프로포즈 해요. 작가님도 어쩌면 기다리실지도 몰라요. 그리고, 결혼식에 꼭 초대해요. 그리고 내 이름은 도 밍키에요.”
“예? 도 밍키?”
“혼혈이에요. 몰랐나요? 하긴 머리카락을 검게 염색하고 검은색 렌즈를 끼고 다니니까. 아빠는 한국인, 엄마는 미국인.”
“이런. 전혀 몰랐어요.”
“내 이름이 싫어서. 밝히기 싫더군요.”
“밍키 엄마가 아니라 밍키 씨였네요. 밍키 씨. 이런 반전이?”
“변 작가님의 14권은 신혼일기가 되겠네요. 그리고 15권은 신혼여행기인가요? 13권에 겨울방학 여행도 갈 예정이라고 썼더군요.”
“그럴 것 같아요. 14권 쓰고나서, 15권은 다시 여행기라고 했어요.”
“축하해요. 결혼식 때 봐요.”
“고마워요.”
(며칠 후)
“해신 씨. 오늘 할 말이 있어요. 전에 갔던 남산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어요.”
“굳이 거기까지 가서 먹어야 해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내가 맛있게 차려줄게요.”
“그냥 오늘은 거기서 먹어요. 거기서 할 말이 있어요.”
“지금 여기서는 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몇 시에 가요?”
“7시 예약했으니까. 넉넉하게 6시에 출발하죠. 오늘은 차 갖고 가요. 내가 운전할게요. 내 차는 아니지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비싼 차, 고장 나도록 운전하지 않을게요.”
“누가 뭐래요? 그런데 운전할 줄 알아요? 면허 딴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냥 내가 운전할게요. 오랜만이긴 해도 그래도 몰던 차니까.”
“하. 정말 폼이 안 난다니까. 정말 해신 씨 앞에서는 왜 이리 주눅이 들지?”
“내가 언제 기죽였다고 그래요? 알았어요. 운전해요. 직접. 6시에 아파트 주차장으로 오세요.”
(남산 레스토랑 주차장)
“자자. 주차장이에요. 주차 잘 해봐요. 오는 것은 잘했어요.”
“음. 차가 커서 그런지, 주차하기가 좀.”
“내가 해요?”
“아뇨. 내가 할 거예요. 끝까지 마무리를 잘해야죠.”
“알았어요. 해요. 그럼. 천천히.”
“낑낑. 어휴. 힘들어.”
“네네. 됐어요. 그대로 주욱. 스톱. 됐어요. 휠 바로 고정하고. 백미러 집어넣고.”
“알아서 한다니까요.”
“네네. 어련하겠어요? 잘했어요. 운전면허 따고는 처음 운전하는 거죠?”
“그래요. 나는 차가 없으니까.”
“첫 운전치고는 꽤 잘했어요. 침착하게.”
“휴우.”
“첫 운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소감은?”
“온몸이 뻣뻣해져서 삭신이 쑤셔요.”
“저런. 자자. 이제 됐으니까, 아직 시간이 좀 남았네. 잠시 산책하다가 들어갈까요? 긴장도 좀 풀게. 첫 운전이라 그런지 몹시 긴장했네. 진정하고. 자자. 조금 걷죠.”
“이런. 정말 폼이 안 난다니까.”
“어머, 땀 좀 봐. 날도 선선해졌는데, 긴장을 많이 해서 진땀이 나는 건가?”
“긴장을 많이 하긴 했죠. 어휴 어지러워.”
“괜찮아요? 밥 안 먹어도 되니까, 집에 갈까요? 그냥 오늘은 운전 연수한 셈 치고.”
“아뇨! 오늘 예약했다니까요. 꼭 여기서 먹어야 해요!!”
“아? 단호하네. 무슨 일이야. 대체? 양식을 이토록 좋아했나? 다음엔 양식으로 해줘요? 그러고 보니 난 주로 한식으로 했구나. 내가 한식을 좋아하다 보니.”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나도 한식 좋아요. 그냥 오늘만 여기서 먹어요. 해신 씨.”
“뭘 그리 진지하게. 알았어요. 들어가요. 이제.”
(레스토랑)
“정태식 씨. 예약석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 창가, 전망 좋은 자리네요. 그런데. 저녁인데 왜 손님이 아무도 없지?”
“...............”
“에피타이저입니다.”
“미리 주문해뒀어요?”
“네.”
“준비 많이 했네. 그런데 손님이 하나도 없다니 좀 이상하지 않아요?”
“..............”
“다음 코스입니다.”
“풀코스로 주문했어요?”
“네.”
“아니, 학생이 이런 비싼 요리를?”
“아니, 좀 가만있어 봐요. 오늘만 좀 잔소리 좀 안 하면 안 돼요?”
“............?(어리둥절)”
“메인디시입니다.”
“...............”
“태식 씨. 너무 조용한데. 비싼 요리라서 먹는 데만 집중하는 거예요?”
“..........”
“이런, 분위기가 왜 이리 무겁지? 손님도 하나도 없고. 말 좀 해봐요. 태식 씨?”
“..............”
“디저트입니다. (찡긋)”
“어머, 예쁘고 맛있어요. 내가 아이스크림 좋아하는 걸 알고 그리 주문했군요. 맛있어요. 악. 이게 뭐야?”
“........”
“어라? 이 부러질 뻔했네. 설마? 정말로 반지?”
“.........”
“이런 구태의연한 상황이 나에게 일어날 줄이야? 레스토랑을 통째 전세 낸 거였어요?”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럴 리가요? (글썽글썽) 그냥.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믿어 지지가 않아서. 훌쩍. 역시 이런 건 기쁜 거네요. 정말로. 그냥 진부한 드라마의 한 장면인 줄 알았는데. 내가 겪으니 전혀 다른 느낌이야. 훌쩍.”
“이리 줘 봐요. 내가 직접 끼워 줄게요. 우선 물에 좀 씻고.”
“근데 내 손가락 사이즈 알아요?”
“자, 손 줘 봐요. 봐요. 잘 맞네. 역시.”
“어라? 정말이네. 딱 맞네. 그리고 정말 예뻐요. 그런데 이렇게 비싼 반지를 어떻게 샀.”
“잠깐, 거기까지.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
“잘 맞아서 다행이야. 자. 해신 씨. 잘 들어요. 딱 한 번만 할 테니까.........”
“.........?”
“음음, 휴우, (눈 부릅뜨고) 나랑 결혼해줄래? 나랑 평생을 같이 살래? 우리 둘이 알콩달콩 서로 사랑하며...(해신의 손을 잡는다.)”
“저기. 그 노래는?”
“나 닮은 아이 하나, 너 닮은 아이 하나 낳고.”
“저기. 나 나이가 있어서 하나밖에 못 낳을 것 같은데.”
“천년만년 아프지 말고 살아갈래?”
“........(훌쩍.)”
“솔직히 말해서 내가 널 더 좋아해. 남자와 여자 사이엔 그게 더 좋다고 하던데. 내가 더 사랑할게. 내가 더 아껴줄게. 눈물이 나고 힘들 때면 아플 때면 함께 아파할게. 평생을 사랑할게. 평생을 지켜줄게. 너만큼 좋은 사람 만난 것 감사해. 매일 너만 사랑하고 싶어. 나랑 결혼해줄래? 자. 대답해요. 어서.”
“물론이죠.”
“휴, 살았다. 거절할까 봐 완전히 긴장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계속 튕겼으니까요. 선을 긋고, 여행 후에 좀 달라진 것 같아서 용기를 냈어요.”
“나도 여행 내내 생각 많이 했어요. 원래는 정리할 작정으로 떠난 것이었는데, 한 달 동안 태식 씨 마음도 확인하고 확신이 들면서 정반대로 정리가 아니라 확신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도 이런 것까지는 생각 못 했어요. 아무래도 내가 나이가 너무 많고, 또 태식 씨 부모님의 의견도 고려해야 하고....”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요. 부모님과는 담판이 끝났어요. 그것까지 다 해결하고 프로포즈하는 거니까.”
“그랬군요. 정말 고마워요. 거기까지 배려해주다니. 그런데 우리 부모님께는 언제 말씀드릴 건가요? 아무것도 모르시는데.”
“날짜와 시간을 잡아요. 맞춰서 가야죠. 먼 곳이니까, 한 이틀 잡아야 하나.”
“아뇨.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게 좋겠어요. 피곤할 거예요. 우리 집에 들렀다가 태식 씨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죠.”
“그래요. 그럼.”
(작가 부모님 집)
“자네가 우리 딸을?”
“네, 아버님. 평생 눈에 눈물 흐르지 않게 하겠습니다.”
“여보. 좀 있어 봐요. 그래. 젊은 총각이 정말 우리 딸이랑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가?”
“네, 어머님. 저 매우 진지합니다.”
“자네, 아직 많이 어린데 젊은 혈기에 잠깐 그랬다가 곧 늙은 딸 외면하고 딴 데 한눈파는 것은 아니겠지? 미덥지가 못한데.”
“아버님, 저 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한눈파는 성격도 아닙니다. 그리고 해신 씨, 단순히 외모나 능력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우리 애는 나이만 들었지, 그냥 초등학생이라 생각해도 될 정도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특히 남자는 더 모르고, 사람들에게 상처받아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잘 못 해. 시댁 어르신들은 잘 모실 수나 있을지....에휴.”
“어머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해신 씨는 심성이 깊고 맑아서 우리 부모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아직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직접 보시면 저보다 더 좋아하실 거예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가 나이만 먹었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주변머리도 없고, 눈치도 없어. 그리고 낯선 곳에 가면 더 정신을 못 차리지. 그런 애가 여행 간다기에 보내긴 했는데, 거기서 만난 거야?”
“옆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행 갔다 와서 서로 마음을 확인했고요. 그전까지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죠. 그냥 이웃사촌이었습니다. 워낙 철벽을 쳐서.”
“하긴 우리 애가 마음을 쉽게 열 아이가 아닌데, 이렇게 데려온 걸 보면 이 청년이 진심인 것 같아요. 애가 아무리 모자라도 진심도 구별 못 하는 애는 아니에요. 여보.”
“그렇긴 하지. 아무리 바보라도 그 정도는 알겠지.”
“왜 바보라고 생각하시죠? 세상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인데.”
“현명한 사람이 독거 노처녀로 늙었겠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환경에 따라 다 달라지는 겁니다. 지금까지 해신 씨는 좋은 사람들을 못 만난 겁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좋은 일, 좋은 사람들만 만나게 해주고 싶습니다.”
“고맙네. 어휴. 천년 묵은 체증이 가시는군. 드디어 보호자에서 벗어나는군.”
“아버지, 20살 대학 입학 이후로 계속 혼자 살았는데, 제가 무슨 캥거루족으로 산 것도 아니고. 자수성가해서 살고 있잖아요. 제가 무슨 짐이 되었다고 그러세요?”
“넌 좀 조용히 해. 그게 또 그런 게 아니야. 보호자란 원래 그런 거야. 이제 보호자 노릇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살 것 같다.”
“동생도 나보다 훨씬 먼저 시집도 갔는데, 그것도 25살에. 뭐가 그리 급한지, 언니 때문에 앞일 망칠 수 없다고 큰소리치고 결혼했잖아요. 나보고 예식장에서 부조금 받으라고 하고. 손님 접대하는데, 할머니께서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꾸중하셨죠. 여동생 결혼식에 시집도 안 간 언니가 왜 왔냐면서.”
“그래. 20년도 더 된 일을 아직 마음에 담고 있는 게야?”
“실은 그때 몹시 섭섭했었어요. 나도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무리 지나가는 말이라도 동생 결혼식에 언니가 참석하면 평생 결혼 못 한다는 말도 있었고, 기분이 썩 좋진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혼자였고. 그 전설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었죠.”
“쯧쯧. 그래. 너 속에 맺힌 것 다 풀려무나.”
“(태식을 보면서) 알겠네. 자네. 이제 이 애를 맡길 테니까, 평생, 아니 죽어서도 책임을 지게. 알겠나? 아까 자네가 말한 것처럼 이 애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용서 못 하니까, 각오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그럼 이제 해신 씨를 데리고 부모님께 가겠습니다. 부모님께서도 기다리셔서요.”
“그런가. 하긴 갈 길도 멀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그럼 어서 가게.”
“아버지. 엄마, 나... 갈게요.”
“그래. 상견례 때 보자꾸나. 그리고 자네. 날 잡히면 연락하게.”
“네, 아버님. 어머님. 안녕히 계십시오.”
(태식 부모님 집)
“처자가 해신 양인가?”
“네. 아버님. 처음 뵙겠습니다(완전 긴장, 90도로 꾸벅).”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데, 정말 50인가?”
“네, 아버님, 사실입니다(뻣뻣).”
“여보, 이 정도면 30대라고 해도 믿겠어요. 이 처녀가 나쁜 마음을 먹었으면 속였을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나오는데, 나쁜 사람이 아닌 건 분명해요.”
“하긴, 저놈이 죽고 못 산다길래 정신이 나갔거니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또 마음이 달라지는군. 저놈이 이해가 되긴 해.”
“그래요. 해신 양. 우리 아들을 정말로 사랑하나요?”
“어머님. (글썽글썽). 저보다도 더...(울컥). ....후우.”
“엄마. 그만 해요. 그런 말을 직접 하라고 하다니. 너무 하세요. 그럼 안 사랑하는데 여기까지 왔겠어요? 그리고 내가 더 사랑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네, 어머님, 태식 씨를 사 랑 합 니 다(덜덜덜).”
“아니? 해신 씨, 나한테도 아직 그 말 한 적이 없는데, 왜 우리 엄마, 아버지 앞에서 먼저 하는 거예요? 아. 속상해. 정말.”
“아니, 너 고백도 못 받고 프로포즈 한 거니?”
“그래요. 내가 고백했죠. 먼저. 그게 당연한 거고.”
“저, 저기요. 태식 씨. 나도 태식 씨한테 사랑한다는 말 못 들었는데요?”
“프로포즈할 때, 노래로 했잖아요. 내가 더 사랑할게. 내가 더 아껴줄게. 눈물이 나고 힘들 때면 아플 때면 함께 아파할게. 평생을 사랑할게. 평생을 지켜줄게. 이렇게.”
“그건 그냥 노래죠. 청혼가.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은 없잖아요?”
“이런. 얘들아. 너희들 서로 그 상태로 어떻게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니? 둘 다 완전 숙맥이구나. 어쩜 이렇게 어설플 수가. 둘이 똑같은 수준이구나. 한 쌍의 바퀴벌레다.”
“아버지. 바퀴벌레가 뭐예요? 원앙이라든가, 기러기라든가, 뭐 좋은 것 많잖아요. 말을 좀 가려가면서 하세요.”
“시끄러워. 너 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며늘아기 앞에서. 체면 깎이게.”
“여보. 며늘아기라고 하셨어요? 지금.”
“그럼. 며늘아기지. 아가. 이놈이 이런 놈이다. 철이라곤 하나도 없지. 네가 고생이 많을 것이다. 잘 보살펴주려무나.”
“그래. 아가. 나도 잘 부탁하마. 저놈이 철이 없어요. 아직 능력도 부족하고. 네가 많이 챙겨야 할 거야. 아. 나도 이제 저놈 반찬이니 뭐니 갖다 주지 않아도 되고. 한 시름 놨네.”
“엄마는? 언제 반찬 갖다 줬다고, 내가 그동안 해신 씨 집에서 얼마나 많이 얻어먹었는데. 내가 도시락만 사 먹는다고 걱정돼서 매일 밥해줬다고요. 진수성찬으로.”
“어머? 세상에. 요즘 처자답지 않게 요리를 잘하나 봐.”
“그럼요. 엄마보다 훨씬 잘하거든요. 매일매일 수라상으로 차려줘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세상에. 글 쓴다면서 요리는 또 언제 그렇게 배웠을까?”
“집에서 할 일이 없어서 늘 해 먹어요. 어머님.”
“그래요. 잘됐네. 요리까지 잘한다니 더 말할 게 없네.”
“엄마, 해신 씨는 나보다도 운전도 잘해.”
“그건 네가 못 하는 거고, 요즘 세상에 운전 못 하는 사람이 너 말고 또 있겠니?”
“그건 아니지. 엄마. 내가 알뜰해서 자동차를 안 탄 거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느라. 또 학비도 모아야 했고.”
“그건 그렇다. 너 이제 2학기인데, 졸업은 대체 언제 하냐? 생활비도 못 벌어다 주는 무능한 남편이 되는 거냐?”
“아버지. 이 사람 앞에서 저 체면 좀 깎지 마세요. 저도 속상해요. 그래도 공부는 마쳐야죠. 그동안 아버지가 생활비를 좀 대 주시든가요.”
“안돼. 너 그 비싼 아파트 전세금 대어 주는 것으로 끝이라고 했잖아. 굳이 한강 변에 아파트여야 한다고 박박 우기는 바람에. 그 아파트 전세면 다른 곳에 아파트 살 수 있어. 그리고 너 식 올리자마자 네 동생도 바로 결혼해야 하고. 그놈도 전세아파트는 해줘야 하잖아? 이제 너는 네가 알아서 살아라. 너도 이제 가장이야. 정신 차려. 철 좀 들어라. 동생 보기 부끄럽지도 않니?”
“네. 아버지. 우리 아파트가 비싼 것은 맞아요. 그래도 그 덕분에 해신 씨도 만났잖아요? 안 그랬으면 나도 태훈이도 아직 결혼 생각도 못 했을걸요?”
“여보. 이제, 그만 이 아가씨. 보내주죠. 많이 긴장하고 불편할 텐데.”
“아? 그렇군. 그래. 아가야. 다음에 상견례 때 보자꾸나. 그래 오늘은 그만 돌아가거라.”
“아버지. 엄마. 날짜 잡아서 연락 줘요. 장인어른께도 연락드려야 하니까.”
“알았다. 그래. 어서 가.”
(부모님 집 밖)
“해신 씨. 잘했어요. 이제 긴장 풀어요.”
“아? 정신이 나가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아서 엄마가 빨리 보내준 것 같아요. 우리 엄마는 눈치가 백 단이거든요.”
“감사하죠. 배려해주시고. 나도 아직 손이 떨려요. 지금까지 이렇게 긴장해보긴 처음이에요.”
“나도 해신 씨 부모님 뵐 때 엄청나게 긴장했었어요.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실까 봐.”
“설마요? 아버지는 그 누구라도 나 데려간다고 하면 좋다고 하실 분이에요. 엄마는 또 다르지만.”
“저런. 장모님이 더 까다로우신 분이셨구나. 잘 보여야겠어.”
“상견례 날짜와 장소를 잡아서 연락드리죠.”
(며칠 후, 우리 집)
“우리 결혼하면 어디서 살까요? 해신 씨?”
“지금 집은 소형이라서 함께 살기는 좀 좁죠? 술탄과 칼리프도 있고, 앞으로 아기도 태어날 거고.”
“아무래도 지금 집을 정리해서 큰 집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어요. 평생 살 집으로 가야죠.”
“그러면 우선 집을 내어놓고. 전셋집도 내어놓고. 집을 구해야겠네요. 평생 살 집으로. 지금까지는 혼자 지내다 보니 별로 큰 집의 필요성을 못 느꼈는데. 집순이라 전망이 중요해서 한강이 잘 보이는 이 집이 좋았어요. 역시 한강이 보이는 큰 집을 구해야겠어요. 가능한 이 동네에서 찾아보죠. 낯선 곳은 싫으니까. 이 동네에서 30년을 살았는데, 이곳은 내 고향과도 같아요. 고향보다 더 오래 살았거든요.”
“마음대로 해요. 나는 도와줄 형편이 못 되니까, 별로 할 말이 없어요. 내 전세금은 다 보태줄게요. 해신 씨 원하는 집을 골라요.”
“그래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데 전세금은 얼마나 되죠? 나는 이 집을 산 지가 오래되어서 시세도 잘 모르는데. 집 산 지가 26년쯤 되나? 그때는 별로 비싸지 않았어요. 내 능력으로 살 수 있었는데. 대학 졸업하고 바로 샀지? 아마?”
“하. 그때부터 이미 능력자였군요. 정말 부럽다.”
“운이 좋았죠. 책이 잘 팔렸으니까. 집도 살 수 있었죠.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어요.”
“칼리프, 지금 우리 이사한다는 소리지?”
“그러네요. 형님. 한동안 둘이 바쁘게 다니더니 결혼하려는 모양이에요. 진도가 참 빠르네요. 진도가 너무 안 나가서 속이 터지더니, 여행 다녀오고는 일사천리로 진행되는군요.”
“더 큰 집으로 간다는데 좋지 뭐. 이곳도 나쁘지 않지만 말이야.”
“하긴, 형님은 늘 캣타워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인데, 역시 우리도 전망이 중요해요. 그렇죠?”
“그렇지. 나도 전망이 중요해. 앞뒤로 아파트만 보이는 곳은 싫어. 적어도 앞쪽은 뻥 뚫려서 탁 트인 경치가 보여야지. 지금처럼 강이 보이는 전망이 좋아. 시원하고. 강바람도 불고. 강변공원에 산책하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작가님이 그런 집을 구한다고 하니 기대해 보죠.”
(며칠 후)
“해신 씨, 상견례 때, 우리 아버지가 너무 오버하신 건 아닌지 걱정이에요. 장인, 장모님이 놀라시지는 않았을까?”
“아녜요.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세요. 두 분이 흥분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게요. 덕분에 양쪽 어머니들은 아무런 말씀도 못 하시고 차만 드셨죠.”
“해신 씨, 우리 아버지가 너무 좋으신가 봐요. 원래 그렇게 말씀 많이 하시는 분이 아닌데.”
“우리 아버지도 평소엔 과묵하신데 오늘은 많이 하시더라고요.”
“결국, 내가 중재해서 결혼식 날짜 알려드리고, 장모님께 날짜 미리 받았었어요. 길일이라고 하셔서. 그리고 신혼집도 구했다고 말씀드렸고, 예단은 안 받을 거라고 아버지가 아까 말씀하셨죠. 생활비도 못 내고, 집도 못 해가는데, 예단은 무슨? 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러긴 하셨는데,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건지. 엄마가 알아서 하시겠다고 내게 따로 말씀하셨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엄마 말씀으로는 장남이고 첫 결혼인데, 물론 우리 집에서는 동생이 먼저 했지만, 기본 혼수예단은 해야 한다고, 남들이 하는 억대 혼수가 아니라, 기본 이부자리, 은수저 세트, 반상기, 이런 것, 그리고 이바지 음식은 보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엄마도 시집올 때 그렇게 하셨다고..”
“그런 게 있나요? 나는 요즘 사람이라 잘 모르는데, 우리 엄마도 그런 걸 해 오셨던가?”
“할머니께 여쭤보면 되겠네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다 돌아가셔서 안 계시지만.”
“결혼하는 게 이렇게 복잡할 줄이야. 외국처럼 둘이서 그냥 혼인신고하고 같이 살면 안 되나?”
“안 되죠. 우리가 고아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는 외국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우리야말로 패물은 필요 없어요. 프로포즈때 받은 반지도 무척 비싼 거던데, 결혼반지는 그거면 되고, 시계는 엄마가 아버지에게 받으신 것을 물려주셨어요. 이것도 비싼 거예요. 그래서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어머님께 혼수예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려주세요. 아까 엄마가 하셨어야 했는데, 양가 아버지들께서 너무 흥분하셔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태식 씨 결혼반지와 예물시계는 해줄게요.”
“네네, 알겠습니다.”
(예식장)
“신랑 입장.”
“와하하. 짝짝짝짝.”
“신부 입장.”
“신부가 생각보다 미인인데, 직접 보니 태식이가 이해가 돼.”
“쉿, 조용히 해요. 새신부가 듣겠어요.”
“뭐, 나쁜 말도 아닌데, 어때?”
“그래도 조용히 해요. 자자. 예식이나 보시라고요.”
“주례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신랑 신부 지금의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고 한결같이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마칩니다.”
“와. 훌륭하신 주례였습니다. 이만, 축가는 사회자인 제가 부르겠습니다.”
“와하하하하하. 저게 뭐야?”
“저 자식, 제발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해신 씨, 노래 듣지 말아요. 가사 개작했어요.”
“저기, 그렇다고 내 귀를 막으면 어떡해요? 다들 보잖아요?”
“괜찮아요. 안 듣는 게 나아요. 자식, 아직도 부르고 있네. 빨리 좀 마쳐라.”
“하나도 못 들었어요. 힝.”
“정, 그리 듣고 싶으면 나중에 동영상 촬영분 보면 되죠. 오늘은 안 듣는 게 나아요. 저 자식, 내가 해신 씨랑 결혼한 것이 부러워서 심통 부리는 거예요. 어디 두고 보자. 다음엔 네 차례다. 나는 뭐 가만히 있을 것 같냐?”
(폐백실)
“아가, 양보다 질이다. 훌륭한 자손 하나 낳아다오. 이왕이면, 장손으로 부탁한다.”
“여보, 그런 말을. 부담 주지 말아요. 아니다. 아가. 요즘 세상에 아들, 딸 구별 말고 건강한 아기 하나만 낳아다오.”
“아버지, 엄마. 그건 내 능력이니, 내가 알아서 해요. 부담 주지 마세요.”
“시끄러워, 이 녀석아, 아비가 이런 말도 못 하냐? 다른 집처럼 둘, 셋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버지. 결과에는 승복하세요.”
“알았다. 노력이나 하고 말해라.”
(우리 신혼집)
“신혼여행은 겨울방학 때 가기로 했으니까요. 이제 공부에 전념하세요. 조교 일은 후배에게 양보하고, 돈 안 벌어도 되니까, 한 학기라도 빨리 졸업할 생각을 해요. 그게 더 나를 돕는 거예요. 알겠죠? 여보?”
“네, 부인. 여부가 있겠습니까? 내가 하루라도 빨리 졸업해서 안정하는 것이 부인께서 기뻐하실 일이라는 것을. 열심히 공부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겨울방학 때 마음 편히 신혼여행 다녀옵시다.”
“네, 서방님, 저도 그동안 열심히 글을 써서 책을 내겠어요. 둘 다 힘내요.”
“칼리프, 새집이 정말 좋아. 너는 어떠냐?”
“당연하죠. 전생에서 보던 대궐 같군요. 이렇게 큰 집을 살 줄이야. 작가님은 재력가셨던 모양이에요. 이런 능력이 있는데, 왜 그렇게 좁은 집에서 사신 거지?”
“별로 재테크에는 무관심했던 모양이야. 빨리빨리 큰 집을 사두었으면 훨씬 돈을 많이 벌었을 텐데, 정말 저 양반도 돈에는 관심이 없어. 26년이나 그 작은 집에서 궁상을 떨다니, 진작 샀으면 지금쯤 이런 집, 세 채는 샀겠다.”
“평생 살 집이라고 큰 집을 산 모양이에요. 형님, 우리 방도 있어요. 놀이터까지 설비가 완벽하군요. 정말 우리 팔자가 웬만한 사람들보다 나아요.”
“그래. 우리가 운이 좋다. 이렇게 좋은 날, 카자르 누님이 있었으면 정말 기뻐했을 텐데, 누님은 우리 집사를 많이 좋아했거든.”
“그래요. 우리 집사가 아기를 낳으면 잘 보살펴주자고요. 형님은 아기 예뻐하세요?”
“집사는 몰라도 집사가 애를 낳으면 그 아기는 많이 예뻐해 줄 생각이야. 아들이건 딸이건.”
“하하하. 형님도 이제 나이를 드셨네요. 할아버지 같은 말씀을 하시고.”
終.
(에필로그).
“참, 여보, 당신 휴대폰에 내 이름, 뭐라고 저장했었나요? 그때? 처음 저장했을 때.”
“그때? 저장한 걸 보면 놀랄 텐데, 나는 아직도 그대로라오. 당신은 그때 정태식 군이라고 저장했다고 했지?”
“그랬죠. 하지만 여름 여행 다녀온 뒤로 바꿨어요.”
“그래? 서로 보여 주기로 할까?”
“투란도트!”
“칼라프!!”
“당신도 오페라를 보는군요.”
“당신이 하도 냉정하게 철벽을 치길래, 정말 투란도트처럼 보였었소. 그리고 나는 반드시 당신을 얻을 생각이었지. 나 자신을 칼라프라고 생각했는데. 당신 역시 스스로 투란도트라고 생각해서 내 이름을 칼라프라고 저장한 것 아니오?”
“나 역시, 당신이 칼라프처럼 내 얼음 장막을 깨고 들어와 주길 바랐어요. 간절히. 내가 먼저 나설 용기는 없었거든요.”
“정말 천생연분이야.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런 의미에서 자. 부인?”
“네, 서방님.”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소. 정말 이룬 셈이지. 나는 필사적이었다고. 정말로 칼라프처럼 목숨을 걸었소.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도 꿈이 이루어진 셈이죠. 감사해요. 정말.”
眞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