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김진미
김진미
I. 여자친구
나는 정성원, 대학교 졸업반, 구직 중이다.
여자 친구는 부잣집 출신인데 씀씀이가 몹시 헤펐다.
“아직 대학생인데 용돈을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냐?”
“내가 뭘 많이 썼다고 그래? 이 정도도 안 쓰는 네가 이상한 거야. 너 그러니까 짠돌이 소리를 듣는 거지.”
“뭐라고? 짠돌이? 그러는 너는 짠돌이인 나랑 왜 사귀냐?”
“그야, 자기가 공부도 잘하고 잘생겼으니까 사귀지.”
“나 아직 졸업도, 취업도 못했고 너랑 다니면서 쓰는 시간과 돈이 아까워지려고 한다.”
“뭐? 말 다 했어? 그 말 진심이야?”
“아니, 다 못했다. 그동안 너 수준 맞춰주려고 내가 몸과 마음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네가 알기나 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씩씩대면서 여자 친구가 쌩하고 가버린다.
잡지 않는다....... 나는 저 애를 잡지 않는다....... 더 이상 내가 저애에게 끌려 다니며 맞춰줄 순 없어. 학부졸업반인데 졸업 전 취업을 해야 할 텐데, 저 계집애 때문에 시간과 돈을 너무 낭비했어.
집에 들어오니 엄마가 부르신다.
“너 혜진이랑 싸웠니?”
“......”
“혜진이한테 전화가 왔어. 막 울면서”
“엄마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걔 이제 안 만날 거예요.”
“아니 4년이나 사귀었는데 안 만난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
“나는 혜진이가 귀엽고 싹싹하고 애교도 많고 나한테 전화도 자주 하고 며느리 삼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뭐 어때? 사과하고 다시 만날 거지?”
“......”
“얘 좀 봐라. 정말 헤어지려고? 너 엄마가 아버지랑 싸울 때마다 헤어졌으면 너희들이 지금껏 같이 살 수 있었겠니? 다 싸울 수도 있고 또 화해하고 그러는 거지.”
“엄마. 우리 집 그리 풍족하지 않아요. 그래도 나는 불편함 없이 만족해요. 하지만 혜진이는 우리 집과는 차이가 많이 나요. 내가 걔를 맞춰주지 못할 것 같아요.”
엄마가 갑자기 말문이 막히신 듯 멍하니 쳐다 보신다.
“나 오늘부터 취업준비에 전념할 거예요. 더 이상 혜진이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II. 취업
최종면접에 통과했다.
공사에 합격했다.
바로 전화를 해야지 하다가 아냐, 이건 얼굴 보고 말씀드려야 해.
“아버지, 엄마, 나 합격했어요. ○○공사야. 그런데 지방근무를 해야 한대. 그래서 나 이사해야 해.”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고 있는데
“정말이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더니만 그래 네가 안 뽑히면 누가 뽑히겠어?
아이고, 잘난 내 새끼.”
“엄마, 이젠 직장 관두셔도 돼요. 동생 녀석도 이제 제가 알아서 장학금 받아서 공부하라고 하세요. 엄마도 이제 연세가 있으신데 몇 푼 되지도 않은 월급 받느라 고생하지 마세요.”
“얘는? 엄마가 그 일도 안 하면 오히려 늙어. 그리고 나도 내가 벌어서 나 쓰고 싶은데 쓰고 좋더라. 예전엔 왜 일을 안 했나 싶다. 근데 어디로 발령받았니?”
“부산이요. 연고지도 아닌데 왜 거기로 났는지 모르겠어요. 서울 우리 집에서 다니면 좋을 텐데......”
“그러게 우리는 대대로 서울출신인데 왜 부산에 났을까?”
III. 재회
직장이 연제구인데 이왕이면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서 광안리해수욕장 근처에 월세방을 구했다. 아침마다 바닷가에서 조깅 한다. 갈매기가 운다. 파도소리가 좋다.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일은 할만하다.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월세가 너무 많아, 줄일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겠어. 차라리 전세대출을 낼까? 하고 궁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장님 호출이 왔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 지금 혼자 살지? 퇴근 후에 나랑 잠깐 술 한잔할까? 내가 자네 동네로 가도 좋고.”
“예? 무슨 말씀이신지?” 평소에 잘 마주치지도 않은 부장님이 왜 나한테 술을 마시자고 하는 거지?
광안리 해변 횟집에서 회를 시키시더니 나보고 한잔하라신다.
“자네, 아직 여자친구 없지? 내가 잘 못 안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자네도 이제 슬슬 혼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괜찮은 규수를 소개해 줄까 해서. 아니, 부담 가질 것은 아니고, 그냥 자네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말이지.”
“어떤 분이신데요?”
“그냥 부담 갖지 말고 이번 주 토요일 2시 여기 광안리 커피숍에 가면 자넬 찾아갈 여성이 있을 걸세.”
부장님은 내게 커피숍 약도가 그려진 명함을 내밀었다.
부장님 명령을 거역할 순 없었다. 나는 이제 말단사원이 아닌가.
토요일 오후 2시 커피숍 창가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도 말해주지 않다니.. 어떻게 알고 만나라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익숙한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
“자기랑 헤어지고 3년 만인가?”
“네가 여긴 어떻게?”
“어떻게? 내가 자기 발령 부산으로 내라 했잖아. 자기 부모님과 떨어뜨리려고. 효자는 너무 힘들어서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 ○○공사 사장님이 우리 숙부님이셔. 내가 자기 서울에서 먼 곳으로 발령내달라고 부탁했어.”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는다.
“뭐야? 그럼 자기도 왜 부산에 왔는지 몰랐단 말이야? 자기 수석합격 했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지.”
“그래서?”
“자기가 부모님 모시고 그 궁상맞은 집에서 평생 살 것 같아서 내가 손을 썼어.”
“그래서?”
“어때? 혼자 살아보니 좀 후련하지 않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있는데
“이제 우리 여기서 같이 살자. 내가 해운대에 멋진 맨션도 구해놨어. 결혼식은 서울에서 해도 돼. 여기서 우리끼리 사는 거지. 자기 서울에 있으면 부모님과 함께 살 거잖아?”
“너 스토커냐?”
“아니, 나는 자기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왜 나와 사는 게 싫어?”
“그리고 자기 성적이 우수해서 승진도 빠를 텐데, 물론 지방 근무하면서 빨리 승진해서 서울 본사로 다시 가면 되지.”
“그러게 너 스토커냐고?”
갑자기 차가운 얼굴을 하더니 “자기는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다른 어디를 가더라도 내가 따라갈 테니까.”
갑자기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그래, 쟤는 항상 제 맘대로 행동했어. 이럴 수가! 정말 덫에 걸린 것 같군.
“결혼식은 서울 □□ 호텔에서 할 거야. 날짜는 다음 달 넷째 주 토요일 정오. 그렇게 알고 있어.”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너 혜진이랑 결혼한다면서? 언제 다시 만난 거니?”
“그런 거 아녜요.”
“아니긴, 혜진이한테 예단이 산더미처럼 왔는데? 상견례도 안 하고 이게 무슨 일이람. 아, 상견례는 다음 주 토요일 점심때 한댔지. 근데 예단이 먼저 올 수도 있나? 예식장까지 잡혔다는데? 너 엄마, 아버지한테 일언반구도 없다가 이게 웬 청천벽력이냐?”
“......”
“아이고, 엄마랑 아버지 한복도 맞춰야 하고, 혼수예물도 준비해야 하나? 혜진이는 어떤 패물을 좋아할까? 걔는 수준이 있어서 비싼 것으로 해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
“그래 알았으니까 어서 끊자. 엄마 아버지도 준비할 게 많아. 다음 주 토요일 상견례에 늦으면 안 된다. 기차표 빨리 예매하고 알았지? 너도 양복 한 벌 해 입어라. 좋은 것으로. 아니다. 예단에 아버지랑 네 양복도 있더라. 여기 와서 그걸 입으면 되겠다. 그냥 시간 맞춰서 와라.”
죽겠다. 스토커가 따로 없다. 도망갈 곳도 없다.
IV. <상견례>
“처음 뵙습니다. 사돈.”
“저희야..말로.. 사돈어른”
우리 부모님께서 깍듯이 절을 하신다.
“자네는 부산서 오느라 바빴겠군.”
“......”
“어서 대답하지 않고?” 하고 엄마가 날 툭 친다.
혜진이와 혜진 어머니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위 호화명품으로 치장을 했다.
이런, 우리 엄마 기죽으시는 거 아냐? 아니지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냐.
“아버님,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저는 아, 직, 은 혜진이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 말씀 드리려고 올라온 겁니다. 직접 뵙고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모두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본다.
아버지 엄마도 기가 막히신다는 듯, 바로 엄마가 쏟아낸다.
“너, 그게 무슨 말이냐? 아니 할 생각도 없는 결혼을 왜 한다고 해서 이 사단을 만들어?”
혜진이 아버지가 엄마를 제지하며 “자네, 아직은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나중엔 하겠다는 거 아닌가. 늦출 이유가 뭐 있나? 이왕이면 하루라도 빨리 가정이 안정되어야 일에 전념하기도 쉬울 걸세.”
“그게 아니라 지금은 일에 전념해서 빨리 승진하고 싶습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자넨 빨리 승진할 거야. 안 그렇습니까? 사돈어른?”
죽겠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까?
V. <결혼식>
내 의사와는 별개로 결혼이 임박했다. 토요일이 결혼식이라 금요일부터 결혼휴가를 냈다. 가고 싶지 않다. 전화가 왔다. “형, 내일 결혼식인데 오늘은 올라와야 하지 않아? 형수가 집에다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집안이 비좁아. 우리 집 살림살이는 버려야 할 것 같아. 가전제품도 다 바꿔주겠대. 형은 좋겠다. 능력 있는 형수 만나서. 나도 형수 친구 동생들 소개해 주라.”
“너 혜진이랑 많이 친한가 보구나. 벌써 형수라고 말하고.”
“당연하지, 형수가 나한테 얼마나 잘 해 주는데, 용돈도 팍팍 줘, 형보다 훨씬 많이 줘.”
“너 돈도 받아 썼냐? 얼마나 받은 거야? 네가 걔 돈은 왜 받아? 거지냐?”
“뭐? 거지? 무슨 말이 그래? 형, 돈 없는 게 자랑이야? 형, 형수한테 자격지심 있어? 내 친구들도 다 형 부러워해.”
“그렇게 좋으면 네가 결혼하든가.” 전화를 끊었다.
지금 부산역에 가야 한다. 아니면 내일 식에 늦을 것이다. 도망갈 데가 없구나. 이 지경이 되도록 난 뭘 한 거지? 다들 나보고 능력 있다는데 이게 능력인가? 정작 나는 전혀 기쁘지가 않은데, 나 빼고는 다들 행복해 보이는군. 나 혼자 희생하면 온 가족이 다 만족할까? 아니 정작 내가 불행한데 가족들만 행복하면 되는 거야? 나는 혜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아니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것도 혜진이가 먼저 나한테 접근했다. 늘 졸졸 따라다니다 보니 4년을 같이 다닌 거였다. 그리고 딱히 다른 여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스킨십도 거의 한 적이 없다. 항상 혜진이가 치근댔다. 정말 이제 안 되겠다 싶어 헤어졌는데 이렇게 되다니. 지금 내가 외국으로라도 도망을 가면 부모님께서 쓰러지시겠지. 그렇게 할 순 없어. 그리고 내가 해외로 도망간다 해도 혜진이 그 계집애는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올 애야. 이런 벌써 부산역이군. 정말 나는 너무 무능해.
호텔이 엄청 크다. 하객들도 정말 많구나. 대부분이 혜진이 쪽 하객이지만, 역시 정, 재계에서 총출동한 건가. 입장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군.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아! 저기 혜진이가 장인어른 손을 잡고 오고 있군. 드레스도 저 혼자 알아서 입겠다더니 꼭 저 같은 걸 골랐네. 너무 파졌어. 저게 예쁘다는 거야? 사회도 주례도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다. 어서 끝나라.
아, 폐백이라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구나. 이런, 아직 끝난 게 아니네. 근데 아버지, 엄마는 정말 행복해 보이시는데. 휴,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건가. 뭐야, 아버지! 밤, 대추는 왜 이리 많이 던지시는 거야? 몇 명이나 손주를 보시려고?
저 비싼 리무진에 온갖 장식 딸랑이들, 차에 흠집 나도 상관없나?
“자기, 내 말 듣고 있어? 좀 빨리 몰아. 비행기 시간 늦겠어. 자기 직장 휴가가 겨우 일주일이라 오늘 바로 비행기 타야 한다고, 정말 한 달쯤 줘야 편히 갔다 오든가 하지, 자기 다른 직장 알아보는 건 어때? 휴가 많이, 길게 쓰는 데로. 아니면 아버지가 아버지 회사로 와도 된다고 하시는데. 자기 생각은 어때?”
뭐든지 제 마음대로다.
“아냐. 난 내 직장이 맘에 들어. 장인어른 회사에 가고 싶지 않아.”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아. 적어도 우리 둘이 사니까, 서울에서 분가해서 살기는 쉽지 않지. 내가 자기 부모님을 슬쩍 떠봤는데 분가하실 생각이 없으시더라고. 어쩜 그렇게 자기랑 똑같으신지. 내가 배워야 할 게 많다고 하시던데, 요리며 살림이며 기타 등등.”
“맞아. 난 우리 부모님과 함께 살 거야. 그리고 우리 엄마 요리 정말 잘해. 외증조할머니께서 조선 수라간 상궁이셨어. 조선이 망하고 궁에서 나와 계시다 혼인하셨대. 이후로 수라간 비법을 대대로 이어받았어.”
아니 내가 뭐 하러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지?
“그래? 나는 요리 안 할 건데, 사 먹거나 시켜먹을 예정인데 내가 밥이며 빨래며 다 하는 걸 바라는 거야? 요리 잘하는 도우미 아줌마를 쓰면 되지.”
“내 월급으로는 아줌마 쓸 수 없어. 너도 이젠 살림을 배워. 연습해.”
“무슨 소리야. 내가 집에서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나도 바빠. 피트니스 센터도 가야하고 요가학원, 그리고 쇼핑센터도 다녀야 하고,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피부 마사지며 네일숍이며 할 일이 많아. 그리고 자기보고 아줌마 월급 주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신경 꺼.”
또 제멋대로다. 공항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어느 나라로 간다고 했더라? 제가 알아서 한다고 했는데, 뭐 장소가 중요한가? 누구랑 가는 것이 중요하지.’
VI. <신혼여행>
아, 열대 섬이구나. 내 눈엔 열대 섬 배경이 다 똑같아 보이는데, 이게 어느 나라 섬이지?
관심 없다. 여기가 어디든, 어느 나라든, 빨리 회사 가고 싶다.
“자기야, 날씨 정말 좋다. 나는 여름이 좋아. 작열하는 태양, 그리고 이 바다 내음도.”
나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데, 바다 냄새가 난다는 건 바다가 오염되어 나는 거라던데, 물이 맑으면 별 냄새도 안 난다고, 이 멍청아.
“그래? 바다 내음이 좋은가 보지?”
“자기야, 얼른 짐 풀고 수영하러 가자.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
“나는 비행기 멀미를 해선지 피곤해, 좀 쉬어야겠어. 너 혼자 수영하고 와.”
“그래? 하긴 자기도 쉬어야 밤에 좋은 시간 보내지. 나는 너무 힘이 넘쳐서 좀 놀고 올게.”
“자기야, 일어나. 저녁 먹으러 가야지.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호텔 뷔페도 너무 늦게 가면 맛있는 게 다 빠진다고. 서둘러.” 전 세계 호텔 음식이 다 거기서 거기지. 어차피 난 우리 엄마 음식이 제일 맛있으니까. 아참, 외할머니 음식도 맛있고.
“자기야, 내가 먼저 씻을까?”
“그러던지”
나는 준비한 수면제를 포도주에 타서 단번에 들이켜고 바로 잠들었다.
그리고 여행 내내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몸살약이라고 말하면서 수면제를 먹고 먼저 잠들었다. 후환이 두렵기는 하다.
VII. <신혼생활>
나는 아침 일찍 밥도 안 먹고 일등으로 출근한다. 그리고 온갖 일을 다 도맡아 밤늦도록 야근을 한다. 집에선 씻고 잠만 잔다.
“자기야, 우리 이야기 좀 해.” 아니 이 시간에 얘가 안자고 날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어, 안 잤어? 난 자기가 자는 줄 알고 조심조심 들어왔는데, 깼나 보네.”
“그게 아니라, 자기 나한테 너무 한 거 아냐? 신혼여행 내내 잠만 자고 여기서도 잠만 자고 나갔다 들어 와서 또 잠만 자니? 이렇게 하려고 결혼했어?”
“응, 나는 본래 이런 놈이야, 일 중독, 워커홀릭, 그리고 체력도 부실해. 너도 알잖아? 너 나한테 뭘 바라고 결혼한 거야? 아,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더니 피곤하다. 자야겠어. 다음에 얘기하자.”
오늘도 열심히 근무한다. 너무 열심히 해서 초고속 승진은 ‘따논 당상’일 것이다.
전화가 왔다. 누구지?
“자네, 나랑 얘기 좀 하세.” 장인어른이다. 역시, 근데 생각보다 늦게 하셨네.
“자네, 무슨 문제가 있는가? 혜진이와 싸운 게야?”
“아닙니다. 저희가 무슨 싸울 일이 있겠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당분간 일에 전념하고 싶다고 결혼은 천천히 하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요즘 일이 많습니다.”
“내가 알아보니 자네가 일을 자청 도맡아 한다던데, 그럴 것까지야 있나? 그렇게까지 안해도 승진한다니까. 자네, 생각보다 출세욕이 있는 것 같군. 그런 거라면 우리 회사에 오는 것이 더 나을 텐데, 바로 승진될 테니까.”
“아닙니다. 저는 이 일이 좋습니다. 만족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해서 지원한 곳이니까요.”
“일은 그렇다 치고 혜진이 좀 챙겨주게, 애가 혼자 객지에서 얼마나 외로운지 아는가?”
“혜진이 때문에 저도 서울에서 나와 떨어져 지내고 있는데요? 저도 서울서 근무하고 싶었습니다.”
“자네, 그것 때문에 삐친 게야? 알았네, 내가 바로 서울 본사로 발령 내라고 동생한테 부탁해 봄세.”
“아닙니다. 장인어른, 지금 제가 여기서 빠지면 우리 회사 엉망이 됩니다.”
“아냐, 바로 서울로 발령 내라고 하지. 그렇게 알고 있어.” 바로 끊었다.
역시 부전여전이라고 혜진이와 똑같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끊는다.
VIII. <서울귀환>
“어떻게 된 거야? 생각보다 빨리 본사 발령이 났구나, 이사를 또 해야겠네. 너희들 짐이 많아서 네가 쓰던 방에 다 들어갈지 걱정이구나.”
“엄마, 걱정 마요. 짐은 다 정리하면 돼요.”
“그래? 그래도 너희네 살림이 다 비싼 거라 버리기도 뭣하고, 아깝잖아?”
“엄마, 혜진이가 아무리 분가하고 싶다고 해도 허락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물론이다. 나도 며느리 교육을 받았고 받은 만큼 가르칠 생각이다. 어느 정도 가르치면 그때 분가시킬 생각이야. 우리 집 대대로 내려온 비법은 반드시 전수한다.”
“자기야, 얘기 좀 해. 이사 문제야.”
“뭔데? 나는 우리 집으로 갈 거야. 정해졌어. 그건 양보 못 해. 지금껏 네 마음대로 했잖아? 나는 우리 집에서 우리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살 거야. 반. 드. 시. 그게 싫으면 너 혼자 친정 가서 살든가.”
응? 얘가 왜 이리 조용하지? 바로 난리 칠 줄 알았는데, 조용하니 더 무섭다. 아니 쟤가 말없이 제 방으로 가네. 웬일이지? 무슨 꿍꿍이야, 대체.
“아버님, 어머님, 저희 왔어요. 잘 부탁드려요.”
“그래, 아가, 멀리서 오느라 수고 많았다. 너희 방 도배도 새로 했고, 이삿짐은 어제 들어와서 대충 넣어놨는데, 정리는 너희가 해라. 그리고 손 씻고 와, 어서 밥부터 먹자.”
아, 우리 엄마 전매특허 궁중 임금님 밥상, 수라상! 아니 12첩보다 더 많이 차리셨네. 수라상보다 더 찬이 많아. 음, 실력발휘 좀 하셨네. 며느리에게 어깨 좀 펴시겠네.
“어머님, 어떻게 이렇게 많이 차리셨어요? 누가 이리 많이 먹는다고, 음식도 너무 많으면 음식 쓰레기 돼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음식물 쓰레기 제일 많다고 하던데”
윽, 엄마 눈초리가!!
“걱정 마라, 우리 식구들은 본래 이렇게 많이 먹는다. 우리 애도 그동안 통 못 먹은 거 같던데, 어휴, 얼굴 축 난 것 좀 봐, 어서 먹어, 그동안 굶었니?”
그래, 혜진이 너도 음식이 뭔지, 요리가 뭔지 좀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엄마 다른 건 몰라도 음식에 대해서는 엄청 까다로우시거든, 너도 좀 당해봐라.
“어머니,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에도 안 좋아요. 그리고 너무 기름진 음식도 그렇고, 다들 다이어트 한다고 난리인데, 꼭 이렇게 차리고 먹어야 하는 거예요?”
“물론이다. 우리 아들 얼굴이 엉망이야. 살이 많이도 빠졌네, 당분간은 이렇게 계속 먹여야겠구나. 너도 같이 거들어라. 이번 기회에 쟤가 뭘 먹고 컸는지 잘 배워야 앞으로도 나 없이도 쟤 밥을 먹이지.”
“어머니, 저는 이렇게 못해욧.” 혜진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기가 막히신다는 듯 “그게 무슨 말이니? 이렇게 못하니까 차근차근 배우라는 거잖니? 처음엔 다 못하지, 배워서 하는 거지, 우리 집 수라간 비법은 당연히 며느리가 물려받아야 하는 거야. 처음엔 어려워도 하다 보면 잘 배웠다고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게다.”
“아가, 이 채소들 다 다듬어라.”
“어머니, 어떻게 다듬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래? 시금치는 이렇게, 나물류는 이렇게, 그리고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기타 등등 일일이 시범을 보이셨다. 나는 모른 척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각 채소별로 칼질은 이렇게 하고”
“그리고 솥과 냄비는 이걸 사용하고”
“불 조절은 이렇게 한다.”
“양념은 이렇게 저렇게 넣어서 무치고......”
엄마 목소리만 들린다. 하긴 제가 할 말이 뭐가 있겠어? 까무룩 잠들었다.
“자기야, 일어나봐. 자기 정말 너무 자는 거 같아.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어디 병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얘가 정말 눈치가 없는 건지 순진한 건지 내가 너랑 대화하기 싫어서 자는 걸 여태 모른단 말이야?
“응, 음식 다 했어?”
“아, 전부 처음 해 보는 것들이라 어려웠어. 어머니는 평생 저렇게 하신 거지? 대단해, 나는 우리 엄마가 밥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아줌마가 다 했거든.”
그래, 너희 집 잘 났다.
“그래도 내가 엉망으로 못하는데 어머님이 화를 내시지 않아서 다행이었어. 난 속이 터져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는데, 그리고 자기야, 이제 자기 소원대로 집에 왔으니까 이제 우리 좋은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겠어? 손주를 보게 해 드려야지.”
이런, 단도직입으로 들어오는군.
“나도 많이 양보한 거야. 자기도 이제는 피할 핑계를 댈 수 없을 거야.”
IX. <가족계획>
하긴, 그렇다. 이젠 확실히 마무리를 지어야겠어.
“혜진아, 너한테 미처 말 못 한 게 있는데, 내가 병원에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아. 가족계획을 세우려면 우리 둘 다 검사를 해봐야 하지 않겠어?”
“뭐? 검사? 나는 건강해, 자기도 알잖아? 자긴 그렇지 못한 거야?”
“글쎄, 내가 너무 과로했나? 컨디션이 썩 좋지 못하네. 그럼, 나 혼자 병원 다녀올게.”
혜진이가 병원까지 쫓아왔지만, 여자가 올 곳이 아니라는 핑계로 겨우 막았다.
의사에게 진단서를 허위로 작성해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줄까? 물증이 없으면 혜진이가 안 믿을 텐데......어떻게 의사를 설득시키지?....
“정성원씨, 들어오세요.” 안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들어갔다.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뭔가 짐작 가시는 게 있어서 오신 거겠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아직 젊은데, 이제 신혼이시라면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정자 기형입니다. 머리가 없거나, 또는 꼬리가 둘이거나, 그리고 양도 부족합니다. 정상임신이 어렵습니다. 부인하고 상의는 해보셨습니까? 같이 오시지 그러셨어요? 아니, 부인은 모르시는 건가요?”
청천벽력! 이란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저기요,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불임이란 말입니까?”
“그럼, 아무것도 모르고 왜 오신 겁니까? 뭔가 짐작 가시는 게 있어서 오신 거 아닙니까? 자, 이 화면을 보세요. 움직임도 거의 없죠? 운동성도 미약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난자까지 달려갈 수 없겠죠? 그리고 이것들은 머리가 여럿이고, 저것들은 꼬리가 없고......”
나는 경악했다.
“선생님, 왜 이런 건가요? 과로하고 영양실조면 이렇게 되는 건가요?”
“글쎄요. 과로에 영양부족이면 증상이 더 나빠질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
“치료는 할 수 없는 건가요?”
“부인과 상의해 보십시오. 단순히 치료로 될 일이 아닙니다.”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르짖었다. “혜진아, 오늘 우리 전망 좋은 호텔에 갈까?”
혜진이는 크게 안도하며 “뭐야, 진단결과가 잘 나왔나 보네. 자기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구는데? 이럴 거면 진작 병원에 가보지 그랬어? 그동안 내심 걱정했단 말이야. 당신이.......
으음, 아냐. 입에 담을 소리가 못 돼.”
혜진이가 기분이 좋은 듯 예쁜 옷을 꺼내 입고 화장을 한다.
“어머님, 저희 오늘 밖에서 자고 올게요.”
시집오고 처음으로 웃는 얼굴이다.
혜진이를 끌고 호텔에 갔다.
혜진이가 아니라 내가 나쁜 놈이었다.
내가 스토커다.
김진미
나는 배수영, 프리랜서.
얼마 전 고시원에서 원룸을 얻어 이사했다.
수입이 들쭉날쭉해서 돈이 도통 모이지 않았다.
비빌 언덕이라고는 부모님뿐, 고시원 탈출을 도와주셨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내 인생 알아서 살라셨다.
30대 중반, 내 앞가림은 알아서 할 때도 됐건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이 원룸은 6층짜리 빌라 건물인데 한 층에 2가구가 마주 보고 있다. 엘리베이터는 없다. 계단 집을 얻은 이유는 근처에 공원과 도서관이 있어서다. 나는 3층에 산다. 계단이 싫지만 할 수 없다. 꼭대기 아닌 게 어디냐 하고 스스로 만족하기로 했다. 옆집은 물론이거니와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요즘은 이사해도 떡도 돌리지 않는다. 나도 혼자 사는 걸 굳이 광고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음식배달도 잘 안 한다. 편의점에서 사 오거나 밖에서 먹고 온다. 요리는 귀찮다. 주로 집에서 작업한다. 작업은 집에서 컴퓨터로 보내니까 거래처에 갈 일도 거의 없다. 사실 밖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날씨가 정말 화창하고 시원하면 가끔 공원을 산책하기도 한다. 노트북을 들고 공원 벤치에서 작업할 때도 있다. 오늘도 날씨가 좋아서 공원 벤치에서 노트북을 켜고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데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얼굴을 들고 보니 웬 개가 날 보고 짖는 게 아닌가? 얘가 왜 이래? 근데 주인은 어디 있지?
저기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남자 숨을 헐떡이며 개 줄을 잡는다.
“죄송합니다. 운동시켜주러 나왔다가 얘를 놓쳐서... 헉...얼마나 빠른지, 헉 ... 겨우 따라잡았네.”
“아, 그러시군요. 별로 놀라지 않았으니 됐어요.”
“근데 예전부터 지켜봤는데 이 벤치에서 가끔 작업하시는군요.”
응? 날 예전부터 봤다고? 눈을 치켜떴다.
“아니, 놀라실 건 아니고, 전 공원에 자주 나오거든요. 이 녀석 운동을 시켜줘야 해서.”
“네, 그러셨군요. 전 날씨가 좋을 때 한 번씩 나와서 작업해요.”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웹디자인 해요.”
“그러시군요. 이런, 제 소개를 먼저 해야 하는 것을, 저는 김동현이라고 합니다. ○○물산에 다니고 있습니다. 집도 근처고, 저는 공원을 좋아해서요. 이 녀석 운동도 시켜줘야 하고......”
아, 묻지도 않았는데, 너무 자세한 정보를...... 나는 건성으로 듣고
“저기, 오늘 작업할 분량이 있는데요. 빨리 끝내야 해서요.”
“아! 죄송합니다. 방해가 됐군요. 이만 실례합니다.”
김동현이라고 밝힌 남자가 개를 끌고 저만치 사라져갔다.
뒷모습을 보니 크고 날씬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훈남이네, 그렇지만 오늘 마감이야. 빨리 작업해야 해.
자정 직전에 겨우 업무를 마치고 전송 완료했다.
아! 사흘을 꼬박 새웠더니 파김치가 따로 없네, 앞으로 사흘은 꼬박 잠만 자야겠어.
사흘을 내리자고 싶었지만 24시간으로 만족하고 일어났다.
이사 온 후, 여태 짐 정리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자각하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
내 짐이 이렇게 많았나? 고시원은 좁아서 짐도 별로 둘 데도 없었는데, 웬일이야? 아니 여긴 고시원보다 더 넓은데, 왜 이리 비좁지? 역시 투 룸 정도는 얻었어야 했나? 아냐, 부모님께 손 벌린 주제에 그건 아니지. 당분간은 할 일도 없는데, 새로 들어올 일 없나? 하루 종일 정리를 끝내고 저녁 무렵 공원에 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개 주인 김 누구더라. 아, 나는 이름을 잘 못 외워서 탈이야. 정말 다음에 마주치면 어쩌지? 개 주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또 개 짖는 소리. 근데 그 개가 아냐. 하긴 이 공원에 개 산책시키는 사람이 그 사람뿐이겠어? 어쩐지 속이 허해진 것 같아 조금 걷다가 근처 우동 집에 들어갔다. 혼자 앉아서 튀김우동 한 그릇을 시켰다. 후루룩 막 들이키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웹디자이너 님, 여기서 뵙다니!”
우동 면발이 아직 다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놀라서 그만 사레 걸렸다.
“켁, 아, 안녕하세요.”
“천천히 드세요. 놀라게 해드릴 생각은 아니었어요. 근데 그쪽 이름을 난 모르는데.”
“배수영이에요.”
“배수영 씨, 전, 말씀드렸죠? 아네요. 표정을 보니 기억 못 하시네. 그날 정신없이 바쁘셨잖아요? 김동현입니다.”
정곡을 찔린 느낌. 이 사람 내 속을 읽고 있나? 멋쩍어하며 “우동 드시러 오신 거예요?”
“네, 저녁 먹고 들어가려고요. 혼자 사는 데 밥하기 귀찮아서 주로 외식해요.”
“네” 굳이 나도 혼자 산다는 걸 말할 필요는 없다. 김동현은 앉으라고도 안 했는데 굳이 내 옆자리에 앉아서 우동과 초밥을 시키더니,
“초밥 좀 드세요. 저녁인데 우동 한 그릇으로 되겠어요?”
“아니, 그럴 필요까진,”
“뭐, 이 정도를 부담스러워하세요?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정말, 사교적인 사람이구나. 나는 이렇게 못하겠어. 저녁을 다 먹고 계산까지 김동현이 하고 같이 나왔다.
“이런, 해가 졌군요. 벌써 캄캄해요. 댁이 어디 신지, 바래다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근처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오늘 잘 먹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너무 적극적으로 나와서 당황했다. “그럼, 이만” 하고 뛰어서 집에 왔다.
이럴 때 엘리베이터가 없다니 정말 숨차 죽겠어.
컴퓨터에 새 메일이 왔다. 앗싸! 새 일이 들어왔어. 이번 거는 좀 대형 프로젝트인데 한 달은 작업해야 할 것 같군. 이젠 날씨도 제법 쌀쌀해져서 공원작업은 못하겠어.
한 달을 꼬박 작업하고 전송 완료를 하고 나서 비로소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 날씨가 심상치 않네. 곧 눈이 내리겠어. 벌써 겨울인가!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르네. 또 나이를 먹어야 하는 거야? 나는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 때부터 올라와서 혼자 사는 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좀 쓸쓸하다. 친구들 대부분 결혼했다. 처음엔 주기적으로 만났지만 얼마 전부터 결혼한 친구들끼리만 연락하고 만나는 것 같아 소외감을 느끼던 터이다. 하긴 친구들은 주로 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는데 나한테 그런 소리 하는 게 부담스럽겠지. 나는 투명인간처럼 앉아 있다가 밥만 먹고 또는 조용히 술만 마시고 오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밖에 눈이 펄펄 내렸다. 첫눈인데 추워도 나가봐야지. 오리털 패딩을 꺼내 입고 모자와 목도리를 두르고 가죽장갑을 꼈다. 그리고 공원에 갔다. 혼자서 눈싸움을 할 수도 없고, 내 전용 벤치에 앉아 셀카나 찍어야지 하고 벤치로 갔다. 그런데 내 벤치에 김동현이 앉아 있었다. 나는 속으로 ‘내 벤치라고.’하고 벤치 쪽으로 가는데,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한 달 내내 공원에 나왔었는데 이제야 나오시는군요.”
“아, 네. 한 달 분량 일인데다 날씨가 추워져서 집에서 작업했거든요.”
“그러셨군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어디 다른 곳으로 이사 가신 줄 알았어요.”
“아녜요. 작업량에 따라 시간이 달라져요. 그리고 오늘은 개 안 데리고 왔네요. 눈 내리는 날, 개가 사람보다 더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 녀석 감기에 걸려서 집에 두고 왔어요. 이런 날 산책을 하면 참 좋아했겠지만 제 복이죠.”
아쉬워하는 게 보였다. 개를 무척 사랑하는 듯했다. 나는 벤치에 앉을까 말까 하고 있는데
“뭘 그리 섰어요? 앉든지, 산책하든지 하세요.”
“네?” 놀라서 쳐다보니 “농담이에요. 자, 앉아요. 그동안 어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요.”
나는 별로 안 궁금한데, 저 미친 오지랖! 엉거주춤 옆 공간을 띄우고 앉았다.
“글쎄요. 한 달 내내 작업한 것 말고는 별로 한 일이 없어서 말씀드릴 게 없네요.”
“그래요? 나는 주중엔 퇴근하고 우리 장군이랑 공원 산책하고 주말엔 오전부터 장군이랑 산책했어요. 덕분에 장군이가 감기에 걸렸어요. 정작 오늘 같은 날 못 나왔죠.”
“매일 나오셨다고요?”
“네, 수영 씨가 언제 올지 몰라서요. 연락처도 안 알려주고 그날 쌩하니 사라지셨잖아요. 오늘은 수영 씨가 밥 사요.”하고 볼멘소리를 한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왠지 미안해져서 “네, 오늘은 제가 살게요. 전에 얻어먹기도 했고 또 개까지 감기 걸리게 만들었으니까,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나요?”
“장군이가 있었으면 근처밖에 못 갔겠지만, 오늘은 홀가분하니 어디 좋은 데 먼데 가도 되겠네요.” “먼데요?” “남산타워 근처 전망 좋은 레스토랑이 있는데 거기 가고 싶네요.”
아니, 이 작자가 그렇게 비싼 데를, 게다가 눈 내리는 데 차까지 타고 가야 하는 거야?
“저기 오늘 눈 내리는 데 차가 많이 막힐 텐데, 괜찮겠어요? 가다가 밥도 못 먹고 걸어올 수도 있을 텐데, 지금 폭설주의보 떴다고요.”
“폭설주의보라. 오늘 금요일이고 내일 출근할 것도 아닌데, 뭐 밤새 걸어오죠 뭐.”
아니 뭐 이런 작자가 있담. 오늘 아예 뿌리를 뽑겠다는 심사네. 하긴 대금 받은 것도 있고, 나는 당분간 일도 없긴 해. 오랜만에 나도 근사한 식당에 한번 가볼까?
“금요일 저녁인데다 눈까지 내려서 예약을 안 하면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요.”
“지금 바로 할게요. 여보세요. 거기 ‘전망 좋은’ 레스토랑이죠? 두 명 예약되나요? 아, 잠깐 기다리라고요....... 네,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한 테이블 났다고요. 네, 예약 부탁합니다. 저기요, 지금 바로 출발해야겠어요. 7시부터면 지금 빨리 출발해야죠. 넉넉잡고 걸어갈 걸 예상하고 두 시간 전에는 출발해야 하니까.”
“지금 4시인데요?” 내가 반문하다가 “아네요. 일찍 출발하는 게 낫겠어요. 그래요. 지금 바로 가죠.”
아니나 다를까 길이 미끄러워서 차가 걸어가는지 기어가는지 하고 있다.
“미안해요. 수영 씨, 내가 차가 없어서 대중교통밖에 이용할 수 없어요. 그리고 버스가 택시보다 나아요. 길이 험할 땐 작은 차보다 큰 차가 안전해요.”
누가 뭐래? 그래도 정말 막히는군.
드디어 남산타워가 보였다. 이젠 걸어야 한다. 나는 오리털 패딩에 눈사람 패션인데 이런 차림으로 고급 레스토랑 입장이 될까 걱정이 되었다. 김동현은 눈 내리는 날 동네 공원 패션도 참 신경 써서 나왔다. 패션 감각이 있구나. 말쑥해.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입구에서 “예약하셨습니까?” 하고 묻는다. 우리는 안내하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아니, 창가 자리네, 이런 행운이...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오는 길이 험난해서 밥도 먹기 전에 벌써 지쳐있었던 터라 전망이 좋은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앉아 밖을 보니 눈이 정말 펄펄 내렸다. 이런 정말 걸어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하고 있는데
“메뉴 좀 봐요. 나는 정했어요.”
아, 참 내가 사는 거였지. 그새 잊고 있었네. 메뉴를 보니 엄청 비싸다. 다시 기분이 상하려고 한다.
“나는 오늘의 특선 추천요리를 골랐는데...”
“나도 그걸로 하죠.”
오른손을 들었다. 직원이 왔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오늘 특선 추천 요리, 2인분이요.”
셰프가 추천한 요리라 그런지 맛은 있었다. 비싸서 그렇지. 다 먹고 나니 직원이 치워주면서
“후식은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아이스크림”하고 김동현이 말했다.
이 추운 날 아이스크림이라니..
“나는 “따뜻한 홍차 라떼 주세요.”
차를 마시면서 “저기 날씨가 점점 험악해지는데 갈 길이 걱정이네요.”
그러자 김동현이 크게 웃으며 “뭐가 그리 걱정이에요? 정 안되면 걸어가면 된다니까요. 큰길 아래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거나 또 막히면 또 걸어가면 되잖아요?”
이렇게 낙천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은 여태 본 적이 없다. 나는 소심하고 조심성이 많다. 그리고 비사교적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출퇴근하는 일 대신 혼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 사는 것이 정신 및 육신 건강에 더 좋을 것 같긴 해. 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거야?
“수영 씨, 너무 걱정하는 거 같아서 더 있자고도 못하겠어요. 이제 그만 나가죠.”
나는 영수증을 들고 계산대로 갔다. 혹시나 했지만 김동현은 먼저 밖에 나갔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니 눈보라가 들이쳤다. 나는 중무장 패션이라 그나마 덜 춥지만 김동현은 말쑥한 패셔니스타의 차림이라 나보다 훨씬 추울 듯 보였다. 아무리 남자라도 추운 건 추운 거야. 그렇다고 내가 옷을 벗어줄 순 없잖아. 나는 미끄럼 방지 방한 부츠를 신어 걷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김동현이 바닥이 매끈한 가죽부츠를 신어서 미끄러지려고 해서 내가 붙잡았다.
“어, 정말 고마워요. 수영 씨, 내가 붙잡아줘야 하는데 거꾸로 되었네요. 이런 꼴사나운 꼴을 보이다니” 나는 헛웃음이 났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끄러지는 데 남녀가 따로 있나요?”
우리 둘은 손을 잡고 걸었다. 나는 가죽장갑을 꼈는데 이 사람 손이 시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추운 눈보라가 치는 밤에 우리는 거의 5시간을 걸어서 집에 왔다. 악착같이 바래다주겠다고 해서 그 사람이 우리 집까지 왔다. 나는 차마 들어와서 몸 좀 녹이라는 말 않고 잘 가시라 하고 혼자 집에 들어왔다. 그날 밤 밤새 눈보라가 쳤다.
다음날 정오 무렵 겨우 눈이 그쳤다. 늦잠을 자서 아침 겸 점심을 대충 먹고 또 중무장하고 공원에 갔다. 눈 내린 후가 더 추운 법이지. 길도 얼어서 어젯밤보다 더 미끄러웠다. 그래도 나는 눈사람 패션으로 내 전용 벤치로 갔다.
“어라, 김동현 씨, 벌써 나와 있었어요? 이젠 그 벤치가 김동현 씨 전용이네요. 나는 내 벤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같이 쓰면 되잖아요.”하는데 왠지 뿌루퉁하다.
“왜 그래요? 화났어요?”
“어젯밤 그 추운데 집까지 갔는데, 그냥 가라하고 문 닫고...... 섭섭했어요.”
“아, 그랬군요. 나도 몸 좀 녹여 보내고 싶었지만 나도 혼자 사는 데다 밤이 너무 늦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이해하시죠?”
“그러리라고 짐작했어요. 그래도 어젯밤 동태가 되어서 겨우 집에 들어갔다고요. 장군이와 함께 밤새 열이 나서 고생했어요.”
“그럼 병원에라도 가야지, 여기 추운 데 벤치에 앉아 있으면 어떻게 해요?”
“수영 씨가 이렇게 나왔잖아요. 그래서 기다렸어요.”
“내가 나올지 안 나올지 어떻게 알고” 나는 혀를 차며 토요일이라 1시에 병원 문 닫아요. 어서 가요. 나는 김동현을 끌고 근처 내과로 갔다.
“감기몸살이래요.” 병원 벤치에 앉아 있으려니 나오며 말한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갔다.
약을 받아서 그 자리서 한 첩 먹고는 호주머니에 챙긴다.
“장군이와 함께 감기에 걸리다니, 우리 집에 오시라고도 못하겠군요. 옮으면 안 되니까요.”
“네, 물론이죠. 주말 동안 잘 추슬러서 다음 주 건강하게 출근하세요. 그럼 나는 이만 갈게요.”
“잠깐만, 수영 씨, 언제까지고 내가 공원 벤치에서 기다릴 순 없어요. 이제, 그만 연락처를 좀 알려줘요.”
아, 그렇구나, 우린 아직 서로 연락처를 모른다. 내 집 위치까지만 알려줬구나... 잠깐 망설이고 있는데,
“그만 빼고요.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여기 내 명함, 어제 준다는 게 그만 날씨 때문에 정신이 빠져서” 하면서 명함을 준다.
“나는 명함이 없는데, 그냥 번호를 알려드리죠.” 하면서 내 휴대폰으로 그 사람 명함에 적힌 번호를 찍었다. 벨소리가 청명하다.
상쾌한 벨소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김동현이 웃으면서
“알았어요. 드디어 얻었다. 연. 락. 처! 이젠 혼자 공원에서 죽치고 앉아 있지 않아도 되겠네.”
나는 그동안 고생시킨 게 좀 미안해졌다.
“네네, 이제 혼자 나와서 떨지 말고 연락하고 만나요. 우선은 몸부터 추스르고 장군이와 좋은 주말 보내요.”
일주일이 지나고 산책하러 공원에 갔다. 토요일이지만 날이 추워선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오랜만에 내 벤치에 앉아서 음악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기서 김동현이 장군이를 끌고 오고 있다. 음 역시나, 토요일이지 참
“수영 씨, 전화 안 해도 만날 수 있군요. 우리는 정말 인연인가 보죠?”
“그렇군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 장군이 운동 다 시켰는데 밥 먹으러 갈까요? 점심 안 먹었죠?”
“음 그렇긴 한데, 장군이가 갈 수 있는 식당이 있나요?”
“아, 얘는 밖에 묶어놓으면 돼요. 아니다. 수영 씨 집에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까요? 나 수영 씨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데, 장군이도 데려가고요.”
“별거 없는데, 실망할 텐데요. 장군이는 남의 집에서 실례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죠?”
“아녜요. 훈련이 잘 되어서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리고 편의점에 들러서 라면과 간식 좀 사가요. 내가 살게요. 부엌만 빌려줘요.”
편의점에서 잘 팔리는 여러 종류의 간식들과 라면을 사서 우리 집에 들어왔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에게 라면을 끓이게 할 순 없어. 그리고 남이 내 세간살이를 만지는 것도 싫어.
“동현 씨, 부탁인데 그냥 내가 끓일게요. 부엌이 좀 지저분해서 보이기 싫거든요. 그동안 TV라도 보세요.”
나는 부엌에 갔다. 그 사이 김동현은 좁은 우리 집을 서성이며 구경을 하고 있다. 라면을 다 끓이고 작은 상에 받쳐서 들어왔다. 그런데 김동현이 얼굴이 경직되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수영 씨, 미안해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어요. 장군아 어서 가자.”
쌩하니 사라진 뒤로 나는 라면 2인분을 혼자 먹었다.
이게 웬 상스런 매너야? 우리 집에 오고 싶어 난리 칠 땐 언제고?
상을 치우고 TV를 켜려고 리모콘을 찾는데 리모콘 옆에 펼쳐진 종이쪽지.
아, 그렇군, 들켰네!!!
종이는 예비군훈련 통지서였다.
김진미
나는 신이다.
세상과 만물을 창조한 그런 신(神) 말이다.
오늘도 나는 내가 창조한 만물과 인간들의 삶을 보면서 내가 왜 만들었는지 후회한다.
역시 인간은 만드는 게 아니었다. 이 지구엔 그냥 광물, 식물, 동물까지만 창조해야 했다. 그 이상은 창조물끼리 진화를 하든 말든 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인간은 지구에 불필요하다.
인간들은 마치 자기들이 주인인 양 마구 지구를 함부로 사용한다.
심지어는 핵전쟁까지 불사한다.
독극물에 가까운 미세먼지로 대기가 뿌옇다. 잘 보이지도 않는다.
오존층도 구멍이 여러 군데 났다.
이것들이 전부 피부암이라도 걸려야 정신을 차릴 건가?
내 동료 신은 다른 개체와 창조물을 만들었다. 그런데 인간과 같은 종류는 없다고 한다. 너무나 평화스럽다고 했다. 그 친구는 식물계로 둘러싸인 행성을 만들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스럽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공룡시대와 같은 백악기, 쥐라기 행성을 만들었다. 행성 전체에 공룡들이 산다고 한다. 우리는 공룡 행성을 만든 친구의 미학에 혀를 찼다.
“저 친구는 너무 미적 감각이 떨어져. 미술 수업을 좀 하는 게 좋겠어.”
물론 그 친구는 우리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눈에는 괴상한 거대 파충류들이 제 눈에는 귀여운 애완동물이니 말이다. 우리는 총 6명인데, 각자의 행성에다가, 수성, 금성, 화성, 지구, 목성, 토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는 서로 자신의 행성 이름을 ‘지구’로 하겠다고 싸웠다. 그런데 내가 이겨서 내 행성을 ‘지구’로 부르게 되었다.
또 다른 친구는 문어 모양의 외계인이 점령하는 행성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의 행성을 ‘화성(火星)’이라고 불렀다. 우리 신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각자의 행성을 어떻게 관리하고 꾸려나갈지 의논한다. 그리고 서로의 작업을 칭찬하거나 충고하거나 한탄하거나 자랑하곤 한다. 나는 나의 ‘지구’의 인간들 때문에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 친구들이 지적한다.
“그러게, 인간들은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했잖아. 내 행성을 봐. 얼마나 평화롭니?” 그 친구의 행성 명은 ‘금성’이다.
“우리 비너스(金星)은 얼마나 아름답니? 온통 아름다운 꽃들과 꽃나무로 가득해, 물론 벌과 나비도 최고로 예쁘게 만들었지. 수분(受粉)활동이 잘 이뤄지도록.”
그러게, 나도 친구들보다 월등히 잘난 척하고 싶어서 인간계까지 만들었는데, 그래, 이름도 ‘지구(地球)’ 아닌가? 적어도 제일 진화된 생물인 ‘인간(人間)’을 만들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이 이렇게까지 내 지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을 줄이야.
이번 주 모임은 나의 ‘지구’ 때문에 좀 늦게 끝났다. 다들 서둘러 갈 채비를 하였다. 나는 휴식을 취하려고 침대에 누웠다.
따르릉... 따르릉...
“네, 여보세요.......아, 아직도 집에 안 왔다고요? 네, 철수 어머님, 이제 막 애들이 나가네요. 제가 진즉에 돌려보내야 했는데, 다들 모여서 무슨 얘기가 그리 많은지, 매주 모여서 대체 뭘 하는 거지? 문까지 잠그고, 들어가지도 못하게 해요. 아하, 철수 어머니, ‘행성 만들기 게임’을 한다고요? 나는 전혀 몰랐어요. 아니 얘들이 게임을 한다고 매주 모이는 거였어요?”
김진미
나는 최필순.
구순을 지나 백(百)을 바라보고 있다.
영감은 진즉 무지개 나라로 떠났다.
미안해요. 영감. 바로 갈 것처럼 굴었는데 이래서야 다음 생에 내가 너무 어려서 당신이 날 알아보지 못하겠구려. 비슷하게라도 갔어야 다음에 만나기 쉬울 텐데, 내가 이렇게 명이 길지 정말 몰랐소. 자살할 수도 없고, 굶어 죽는 것도 자살이라 하니, 자연사하도록 기다려야 한다는데, 이래서야 정말 다음 생에 우리 영감을 만날 수나 있을까 걱정이 되우. 나는 당신이 다음 생에 나보다 훨씬 먼저 태어나서 다른 여자랑 만나 살 것을 생각하면 피가 솟구쳐 정수리를 뚫을 것 같소. 당신이 나 태어나도록 아무 여자도 안 만나고 나를 기다리고 찾을 것 같지가 않네요. 에휴~. 이런 상황을 자식들은 모르니 몸에 좋다는 건 다 사다 주고, 내 친구들은 효자, 효부 뒀다고 부럽다고 난리인데. 정작 나는 그것들을 다 내 친구들 준다오, 물론 우리 자식, 며느리 자랑을 하면서, 나도 빨리 당신 곁으로 가고 싶소. 그런데 이렇게 오래 살다니, 당신 간지가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금 죽어도 당신보다 20살 어려서 당신이 다른 여자랑 결혼하게 될까 봐 조바심 나서 죽겠소. 아니 다음 생까지 갈 것도 없이 지금 당신 저승에서 다른 할망구 만난 건 아니우? 가만 안 두겠어. 그 할망구 머리털을 다 뽑을 테야. 당신 주변에 다른 여자들은 죄 씨를 말리겠어. 아, 미안해요. 영감, 흥분했소. 이런 내가 싫어서 당신 빨리 간 건 아닌지 모르겠소. 내 친구 할망구들은 손자 보는 게 힘들어서 수명이 팍팍 줄었다고 하는데, 나는 손자, 손녀 둘을 돌봤음에도 수명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소. 이상한 일 아니겠소. 영감, 무지개 나라 어떤 곳이우? 죽은 그 나이와 그 몸뚱이로 사는 거요? 아니면 한창 젊고 잘생긴 시절로 사는 거요? 여하튼 다른 할망구 만나면 가만 안 두겠으니 각오하고 있으쇼.
“할머님, 진지 드세요.”
“오냐.”
이런, 며느리가 부르네, 손주 며느리라우. 우리 며늘아기는 아파서 병원에 누웠소. 아니 젊은 게 몸이 그리 신통찮아서 어디다 써. 그래서 얼마 전부터 손주 며느리가 내 밥을 차리고 있수. 그래도 며느리가 차려주는 밥은 편하게 먹었는데 손주 며느리는 영 불편하네. 손주 며느리는 집에서 내 밥 차리고 또 틈틈이 병원 가서 제 시어미 챙기고 바쁜 모양이우. 그러니 내가 얼마나 불편하겠소? 내가 손주를 키워주기도 했고, 손주를 예뻐했더니 이런 우리 손자도 여간 효손이 아니오. 덕분에 효손부한테 이런 대접을 받는 거지. 당신도 그런 호강 받아봐야 했는데, 나 혼자 다 누리려니 영, 맘이 편치가 않아요. 증손자들도 잘 크고 있소. 얼마 전 아르바이트 한다던데, 첫 월급 타면 “우리 증조할머니 빨간 속옷 사 온다”고 큰소리치고 갔소. 영감, 부럽지요? 밥 먹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시오.
오늘은 손부가 도미를 구워줬소. 크고 싱싱한 놈입디다. 영감도 좋아하던 참돔이유. 무지개 나라에선 뭘 먹소? 밥은 누가 차려준답니까? 영감은 손가락 하나도 꼼짝 안 하는 양반인데, 밥은 제대로 챙겨 먹소? 아니, 진짜 요상한 할망구가 당신 밥 차리는 건 아니오? 하여간 영감태기 가만 안 둘 테야. 당신은 너무 잘 생긴데다 자상하고 또 자상해서 내 살아생전에도 그리 속을 썩이더니만, 젊어서나 늙어서나 당신 좋다는 년들이 하도 많아서 내가 따라다니면서 그것들 치우느라 좀 고생했어야 말이지. 기생들까지 죄다 당신 구경하러 일부러 우리 집까지 얼쩡거리고, 내가 그 꼴 보기 싫어서 이사를 얼마나 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왜 이리 자주 이사해야 하나고 투덜댔지요. 지금이라서 하는 말인데, 한 기생이 당신한테 목을 매서 찾아 왔습디다. 첩이라도 좋으니 함께 살게 해달라고, 나는 바로 그년 귀싸대기를 날리고 한 번만 더 우리 집에 찾아오면 죽이겠다고 소리치고 내쫓았소. 그날 밤 바로 짐을 쌌소. 영감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기생은 인륜은 있는 년이었소. 조강지처인 나한테 먼저 허락을 받으려고 했으니까. 하여튼 잘난 영감 데리고 사느라 나는 정말 고생 많았소. 이 정도로 고생했으면 가도 내가 먼저 가야 하는 건데 왜 영감이 먼저 간 건지 영문을 모르겠소. 하여튼 당신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는 내가 일본에 화장품 주문해서 쓰고 매일 양단, 공단, 명주, 숙고사, 안동포, 한산 모시옷 지어 입고, 나름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내 딴에는 사치도 많이 했잖소. 당신 봉급을 탕진했지만 그래도 영감 당신이 한 번도 뭐라 하지 않고 다 받아 주고 했지요. 감사하고 있수. 나도 우리 마을에선 제일 예쁘다 소리 듣고 자랐는데, 당신한테 시집오고 나니, 영감 당신이 너무 잘생긴 덕분에 시집와서 한 번도 예쁘다 소리를 못 들어서 그게 한이오. 영감 당신도 나보고 예쁘다고 한 적 없잖소. 어머님은, 물론 영감 당신 엄마 말이우. 나보고 복 많은 년이라고, 세상에 우리 아들같이 잘생긴 남편을 얻다니 하면서 만날 나보고 못생겼다고 구박했었소.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 어머니 정말 나 구박 많이 했다오. 잘난 아들 빼앗은 년이라고, 얼마나 구박하든지. 덕분에 나도 오기가 나서 더 사치에 목을 맸다오. 어머님 보라는 듯이 명주옷 입고 화장하고 시내를 활보하곤 했었소. 그나마 당신이 9남매 중 막내라서 부모님 모시고 살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소. 막내며느리라 별로 음식을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나무를 하러 다니거나 밭일을 하거나 하지 않았소. 당신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와서 우리 부부는 본가에서 따로 나와 시내에서 살았으니까. 그것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나는 자상한 당신 덕분에 매일같이 예쁘게 차려입고 종로를 쏘다닐 수 있었소. 오늘은 뭐 새로운 예쁜 가방이 없나? 오늘은 또 새로운 고급 옷감들이 나왔나, 웃기긴 해도 양단, 공단, 명주 한복에 서양 핸드백은 어울리지도 않은데, 그래도 나는 한복을 입었지, 양장은 안 했어요. 신여성은 아니었다고요. 근데 내가 한복을 입든, 양장을 하건, 봉급을 탕진하건, 당신은 별로 반응이 없었잖소. 그것도 섭섭했다오. 당신은 항상 말없이 날 바라보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었소.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소. 아 이제 자야겠소. 내일 또 봅시다.
영감, 오늘은 광복 이후 이야기를 하려고 하오. 광복하고 당신은 직장에서 나왔잖소. 어쨌든 당신, 총독부에서 근무했으니, 우린 매국노 취급을 받았고. 당장 밥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고생했잖소. 딱히 당신이 친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공무원이었으니... 그간 모아뒀던 내 비싼 한복들과 패물들을 팔아서 우리 새끼들 먹이는 데 쓰고, 당신이 공사장 같은 데 기웃거리는 게 싫어서 내가 작은 애 업고 식당서 설거지를 했었지요. 당신은 미안해하면서 큰애 돌보면서 집에서 글을 쓰고, 그래도 나는 당신이 막노동하는 게 싫었소. 그래도 내가 솜씨가 좋아서 식당 설거지에서 음식을 하는 쪽으로 가면서 월급도 늘고 우리 형편도 좀 나아졌잖소. 여전히 당신은 집에서 글 쓰고, 나는 그래도 행복했다오. 그것도 잠시...... 곧 6. 25가 터져서 우리는 중요한 세간만 챙겨서 애 둘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요. 에휴, 옛날 생각하니 한숨이 나오는구려. 부산에는 전국에서 모인 피난민들에 발 디딜 틈도 없었소. 우리는 달동네에 종이 집 한 칸을 겨우 얻어서 우리 넷이 살았는데, 당신은 피난 올 때 원고를 다 못 챙겨 와서 슬퍼했지요. 나도 슬펐소. 동네 우물이 하나뿐인데, 그나마도 저 아랫동네에 있어서 나는 매일 같이 들통을 이고 우물에서 우리 집까지 물을 이고 지고 날랐지요. 그리고 시장에 가서 식당에서 일했었소. 당신은 애들을 가르치고 우리 애들 학교에 보냈소. 그러고 보니 애 교육을 다 영감이 맡았었구려. 당신 닮아서 우리 애들 공부 잘해서 부산중학교, 부산고등학교 가더니 둘 다 서울대 가고, 알아서 고시 보더니 큰놈은 판사 되고 작은놈은 검사 되고 그때부터 나는 식당일 관뒀어요. 그놈들이 이제 할아버지 소리를 들어요. 오늘은 빨리 피곤하구려. 내일 또 봅시다.
영감, 오늘은 손부가 밥을 차려주면서 내일 증손자가 나를 보러 온다고 합디다. 첫 월급을 탔대요. 그놈이 정말로 빨간 속옷을 사 올 모양입니다그려. 그러고 보니 당신도 옛날에 첫 원고가 출판되던 날 빨간 스웨터를 사왔었지요. 나는 이렇게 빨간 것을 어떻게 입나 투덜댔지만, 무척 기뻤다오. 그 옷 아직 갖고 있수. 다 해져서 너덜너덜하지만, 나중에 관에 들어갈 때 입고 갈 작정이우.
영감, 증손주가 사 온 속옷, 얼마나 웃긴지, 이걸 입으라고 주는 게야? 그놈은 할미 사이즈도 모르는 건지. 쯧쯧. 장난친건지. 하여튼 지금 입고 있소, 손바닥만 한 걸 세상에 입으라고 줍디다. 오래 사니 별 호사를 다 누리고 있소. 이것도 관에 들어갈 때 입어야겠소. 당신 보여주고 싶어서 말이오. 당신도 요즘 속옷이 어떤지 구경해야 하잖소. 날이 꽤 추워졌소. 영감. 눈이 내리는구려......
...............
“어머니, 언제부터 저러신 거야? 민석이가 어머니께 속옷 드리려고 방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여태 몰랐다는 거 아냐?”
“여보, 나도 아파서 계속 병원에 있었잖아요. 며늘아기가 계속 어머님 돌봤다고요. 그러는 당신은 왜 문안 여쭈러 들어가 보지 않으셨어요?”
“나도 당신 병원에 같이 있었고 집에 와서도 어머니께서 먼저 버선발로 나와서 날 맞으셨으니 몰랐지, 집에서 씻고 옷만 챙겨서 나갔잖아. 허참.. 아가, 할머니 언제부터 저러셨니?”
“글쎄요. 방에 계시고 전 거실에 있어서 뭐 하시는지는 잘 몰랐어요. 진지 드실 때는 나와서 드셨고. 별다른 모습 보이시지 않았는데요.”
“방을 한 번도 안 들여다본 게야?”
“네, 죄송해요. 아버님.”
“요양병원에 모셔야겠어요. 나도 어머님 모실 형편이 안 돼요. 나도 환자라고요.”
“그럴 순 없어. 특별히 사고를 치시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모실 거야. 병원에 모시는 건 남 보기도 내 체면에도 손상 가는 일이야. 당신한테는 미안하지만 내가 집에서 어머니를 봐 드려야겠어. 병원엔 당신 혼자 있어.”
“알았어요. 당신은 어머니 봐 드려요. 근데, 방바닥에 엉망으로 낙서해 놓은 건 어떻게 하죠? 다 닦아야 하지 않나? 대체 무슨 글을 그리 많이 적으셨는지 알아보지도 못할 글을 겹쳐서 쓰고 또 쓰고... 바닥 장판을 갈아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어머니 좋은 옷도 많은데 왜 다 떨어진 빨간 스웨터를 그리 고집하시는지, 옷을 갈아입으려 하질 않으세요, 민석이가 선물한 속옷은 입으셨더라고요. 어머님, 빨간색을 좋아하시는 건가......
김진미
나는 최필순 할멈의 남편 이석준이오.
내가 이곳에 온 지가 20년쯤 되었소. 하긴 이곳은 그다지 시간 개념이 없어서 어떻게 지나가는지 별 관심은 없다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있을 뿐이지. 이승이나 저승이나 환경이 다른 것도 없소. 나는 여기서도 매일 글을 쓰고, 정해진 시간에 산책하오. 그리고 이승을 내려다보는 방에서 우리 할멈을 보고 있지. 우리 할멈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씩씩하오. 세상 어딜 갖다 놔도 잘 지낼 사람이지. 잡초 같아. 아, 이런 말 하면 우리 할멈이 또 토라지겠군. 예전에도 매일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고 나를 깨우곤 했었지.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도 안 빼먹고 화장을 하는군. 할멈이 나에게 쓰는 편지도 다 보았지. 할멈은 모르는 모양인데, 할멈한테 찾아갔던 그 기생, 나도 알고 있었소. 하도 쫓아다니기에 우리 마누라한테 가서 허락받으라고 내가 시켰던 거요. 난 당신이 알아서 잘 처리해줄 줄 알았다오. 나도 여자들이 매일 들러붙는 게 좋지 않았소. 내 친구들은 부러워했지만, 나는 여자들이 그리 좋지 않거든, 당신 하나 챙기는 것도 힘에 부쳤소. 아, 아니오. 미안하오. 당신이 드세다는 것이 아니요. 나도 아오. 나 때문에 당신이 드셀 수밖에 없었고 또 생계도 당신이 꾸렸으니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당신이 나가서 고생하는데 나는 아무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했소. 애들이야 저들이 알아서 공부하고 큰 거지 나는 제대로 밥도 챙겨 준 적 없소. 당신이 다 차려 놓고 나갔지 않소. 그러고 보니 부산 피난처 종이 집 시절, 내가 물이라도 좀 길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실은 한번 우물가에 갔었는데,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별별 소리를 다 해대기에 그만 무서워서 물 긷는 것 포기하고 줄행랑을 쳤소. 여자들이 무슨 호기심이 그리 많은지, 또 여자들이랑 엮여 당신이 또 신경 쓰게 할까 봐 그냥, 방에서 조용히 있었소. 방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소? 글밖에 더 쓰겠소? 총독부 출신이 학교나 공직에 이력서를 내기도 양심에 걸려서, 이런저런 알량한 내 양심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것 때문에 당신이 고생을 많이 했지. 할멈은 내가 어떤 모습으로 지내는지 궁금한 것 같은데 죽을 때 모습 그대로 있소. 하하하. 이제는 내가 할멈보다 더 젊군. 아, 안 되는데, 예전에도 내가 더 잘생겼다고 늘 뿌루퉁하여 입을 내밀곤 했었는데, 당신이 여기 오면 내가 더 젊고 잘생겼다고 또 토라지겠군. 큰일인데, 어쩌누. 그리고 할멈이 염려하는 일 없소. 여기도 수많은 할망구들이 있지만 다들 자기 영감 찾아갔고, 대부분 영감들이 먼저 와 있으니, 할멈들이 이곳에 오면 영감들이 기다렸다가 자기 할멈 찾아 손잡고 데려가곤 하오. 나도 할멈이 오길 기다리고 있으니 걱정 말고 어서 오기나 하시오. 나도 혼자 심심하오. 글 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읽어봐 줄 사람도 없으니까, 할멈 오면 보여줄 테니 어서 와요. 참, 애들도 많이 늙었던데, 며느리도 아프고, 애들 고생 그만 시키고 어여 오시오. 그리고 증손주놈이 사다 준 속옷, 나도 보고 웃었소. 여기선 그런 속옷 구할 수 없소. 꼭 입고 오시오. 하하하.
무지개 나라에서 최필순 남편 이석준
김진미
증조할아버지께
저 증손주 이민석이에요.
음, 무슨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전 할아버지를 뵌 기억은 없어요. 제가 아주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거든요.
다만 아버지께서 증조할아버지는 정말 멋진 분이셨다고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증조할머니를 뵐 때면 증조할아버지께서 멋진 분이신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증조할머니를 좋아해요. 이가 다 빠지셔서 발음이 불분명해서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를 귀여워하신다는 것은 잘 알거든요.
실은 얼마 전에 증조할머니께 제 첫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속옷을 사다 드렸는데, 제가 가져다드리려고 들어갔다가 놀라고 말았어요. 하지만 증조할머니께서 놀라실까 봐 내색은 안 했어요. 할머니께서 방바닥에 낙서를 아주 많이 하셨더라고요. 그것도 지워지지도 않는 유성 펜으로 쓰고 또 쓰고, 처음에 한글 배우는 아이가 글쓰기 연습하듯이 써 놓으셨어요. 나는 모르는 척 선물을 풀어서 빨간 속옷을 드리고 입으시라고 했어요. 제가 입혀드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엄마를 불렀죠. 물론 나가서 방안 사정을 말씀드렸어요. 엄마는 조용히 끄덕이시더니 할머니께서 놀라게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셨어요. 엄마가 방에 들어가셔서 할머니께 속옷을 입히셨대요. 할머니께서 무척 기뻐하셨대요. 그리고 속옷을 입자마자 또 방에다 마구 낙서를 하셨대요. 엄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전화를 하셨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병원에 계셨는데 바로 달려오셨어요.
그리고는 증조할머니께서 낙서해 놓은 방바닥을 다 뜯고 새로 장판을 까셨어요. 나는 왠지 증조할머니께서 슬퍼하시는 것 같았어요. 저 방바닥을 그대로 두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증조할머니께서는 옷 갈아입는 걸 무척 싫어하셨어요. 특히 다 낡아 해어진 빨간 스웨터를 절대 벗으려 하지 않으셨어요. 그 와중에 제가 사다 드린 속옷은 입으신 게 신기했어요.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방바닥 공사를 한 그날부터 증조할머니께서 열이 오르시고 헛소리를 하시는데, 자꾸 증조할아버지를 찾으셨어요.
그리고........
바로 다음날 증조할머니께서 무지개 나라로 떠나셨어요.
증조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를 잘 모르지만, 우리 증조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너무너무 사랑하셨다는 것은 잘 알아요. 부디 무지개 나라에서 증조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증손자 이민석 올림
김진미
나는 정민경, 50대 주부, 아들 하나 딸 하나, 남편은 회사원, 서울 한강변 50평대 아파트 소유, SUV 자동차와 세단 소유, 제주도에 땅도 있음. 나중에 남편이 퇴직하면 거기다 전원주택을 짓고 살려고 장만해 둔 것임. 그야말로 평범한 중산층 아줌마. 동창회에도 꼭 참석함. 이번 고교동창회에도 다들 많이 모였다.
“야, 민경아, 오랜만이다. 부동산 재테크의 달인, 뭐 좀 물어보려고, 근데 너 제주도 땅 있지?”
“다짜고짜 이게 무슨 소리야? 그래. 바닷가 보이는 전망 좋은 땅이지. 왜? 너도 제주도 땅 사게?”
“아니, 무슨, 한동안 중국인 관광객들 몰려들 때 땅값이 폭등해서 너도나도 제주도 땅 투기를 했잖아. 너도 그중 한 사람이고, 근데 지금은 폭락했대. 전국에서 부산, 울산, 경남, 제주도가 제일 많이 폭락했다지, 아마. 서울, 경기는 그래도 안 내렸어. 그리고 대구, 광주는 오히려 올랐고, 대구, 광주에 정치인들 부동산이 많은가 봐. 거기는 내리지를 않네. 네 말 대로 나는 대구에 아파트를 한 채 장만했지. 그게 많이 올라서 재미 좀 봤어. 고마워.”
“그래? 근데 있지. 나는 투기하려고 제주도 땅을 산 게 아니거든.”
사실 오를 거라 생각하고 샀는데 중국특수가 그렇게 거품 꺼지듯 사라질 줄 몰랐다.
“그게 아니면 뭐야. 정말 제주도에 들어가서 살기라도 할 셈이야?”
“그래, 남편 퇴직하면 거기다 별장 짓고 들어가서 서울과 제주 왔다 갔다 하려고.”
“그렇구나. 그것도 괜찮네. 네가 샀다면야, 나도 그럼 요즘 제주도 땅 내린 김에, 한번 장만할까? 나중에 늙어서 같은 동네서 별장 생활하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니? 그리고 지금 사면 너보다는 훨씬 싸게 살 수 있고, 네 땅 옆에 살까?”
“뭐, 그러든지. 우리 남편 퇴직하려면 10년은 걸릴 텐데, 그래도 중역이라 금방 퇴직하진 않을걸.”
“알아. 네 남편 능력 있는 거. 10년쯤 뒤에 제주도 한 동네에 별장 짓고 이웃으로 살자. 그런 의미로 네네 제주도 땅 주소 좀 알려주라. 근처에 알아보게.”
나는 제주도 땅 주소를 알려주고 집에 왔다.
따르릉... 따르릉...
나는 전화 착신음에 음악을 깔지 않는다. 음악을 깔아 놓으니 전화가 와도 전화가 온 줄 몰라서 그냥 예전 아날로그 착신음을 사용한다.
“여보세요. 응, 경희구나. 그래 웬일이야? 이 시간에”
“아, 민경아, 나 제주도 땅 알아봤어. 네 땅 근처에 빈 땅이 있어서 알아보려고 내일 제주도 가려고, 직접 확인해 보고 바로 계약하려고 하는데, 혹시 너 시간 되면 나랑 같이 제주도 갈래? 아무래도 달인이 봐주면 안심될 것 같은데, 너도 네 땅이 잘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너도 시세도 좀 알아보고 하지 그러니?”
“야. 요즘 누가 제주도 시세를 제주도 가서 알아보냐? 인터넷과 전화로 다 확인하지. 나는 계약할 때도 서울에서 했어. 제주도도 위성사진으로 다 볼 수 있어.”
“그래? 그럼 바람 쐬러 놀러 가는 셈 치고 가면 되지? 왜 남편, 애들 밥 차려야 해?”
“아냐. 내일은 주말이라 애들 집에 있어. 남편도 있고, 알아서 밥 챙겨 먹으라 하면 돼. 꼭 제주도까지 가서 확인해야 하는 거야?”
“그럼, 남편과 애들보고 주말 알아서 지내라 하고 너는 친구랑 제주도 여행 간다 하고 와. 휴가를 달라고 해. 우리도 휴가가 필요할 나이야.”
“그럼, 그럴까? 남편한테 물어보고 전화해줄게.”
다음날 경희와 나는 김포공항에서 만났다. 비행기에서 우리는 둘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우리 둘이 여행 온 건 처음 아니냐? 대학 때도 단체로 여행 다녔지. 여자 둘이서 비행기 타고 놀러 간 적은 없잖아.”
“맞아. 정말 우리도 휴가가 필요해. 주부휴가. 가족들은 나한테 요구하기만 하지. 정작 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는 관심이 없어. 다들 너무 이기적이야.”
“우리 남편도 마찬가지야. 돈만 벌어다 주면 남편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고. 우리 남편은 너무 구식이야. 재테크도 당연히 무지해. 집 장만도 다 내가 한 거지. 남편은 집을 어떻게 사는지도 몰라. 집안일이며 애들 양육에 공부문제, 시댁 식구 관리까지. 자기 엄마 생일도 모르는 주제에 나보고는 시댁 식구 생일 다 챙기는 건 당연하다고 여기지. 요즘은 효도도 셀프라는데”
“야. 그건 당연한 거라고 우리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정작 친정 생일은 나도 못 챙기고 있어.”
“휴,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늙어가는 걸까... 네 말대로 나오길 잘했어. 정말 오랜만에 바람 쐰다.”
공항에 내려서 바로 택시를 타고 주소지 가까운 부동산으로 갔다.
“네, 사모님, 어제 연락 주신 분이시죠? 서울서 오신다던”
“네, 이 친구 땅 근처 보러 오기로 했죠. 거기 가보려고요. 근데, 이 친구 땅 시세는 지금 얼마나 해요?”
“지번을 주시면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이 지번은 어디 보자..... 주인이 정민경씨로 되어 있는 땅 맞나요?”
“네, 맞아요. 제가 산 땅이에요. 요즘 시세가 어느 정도 되나요?”
“등기일을 보니 제법 비쌀 때 사셨네. 지금은 많이 하락했어요. 친구 분이 기회가 더 좋은 것 같네요. 그럼 나가 볼까요.”
우선 경희가 보고자 하는 땅부터 갔다. 우리 땅과 가까우면서 역시 바다가 잘 보이고 평평한 데다 도로도 잘 물었다. 둘이 나중에 별장 짓고 근처에 살면 좋을 것 같다.
“네, 마음에 들어요. 주변에 편의시설도 가깝고, 이 근처에 병원도 들어선다고 하고, 그런데 요즘 왜 하락세인거죠?”
“부동산 억제 정책이 서울, 수도권을 잡으려고 만든 건데, 반대로 가장 외각 지방만 치명타를 입어서 부산, 울산, 경남, 제주만 하락했어요. 우리도 요즘 거래가 거의 없어서 문을 닫을까 생각 중이에요. 그냥 인터넷 광고만 하는 게 나을 것도 같고. 그래도 이렇게 직접 보러 오시는 분이 있어서 저도 놀랐습니다.”
“온 김에 민경이 땅도 가보죠.”
“네, 사모님, 타시죠.”
내 땅 사고 처음 와 본다. 나도 참으로 무심한 주인이긴 하다. 외지인은 제주 농지를 가질 수 없다. 비워 둘 수 없어서 현지 소작인에게 농사를 부치고 있다. 뭘 심었나 보니 콩을 심었다. 하긴 콩 농사가 제일 쉽다고는 들었어. 소작료로 1년에 한 번 부쳐온다. 나는 지주인 셈이다. 10년쯤 뒤에 소작농은 다른 땅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내가 집을 지을 것이니까. 농지라 건폐율은 얼마 안 나오겠지만, 뭐 크게 지을 필요 있나. 조그맣게 짓고 감귤나무와 꽃들로 정원을 장식하고 둘레엔 장미 넝쿨로 감싸야겠어. 마당엔 큰 개를 여러 마리 기르고, 서울 집에선 큰 개를 키우기 어려우니까... 아니다. 소작인에게 대부분 땅은 계속 농사를 지으라 하고 별장 주변만 사용해야겠어. 여기서만 살 것이 아니니까, 차라리 소작인이 별장을 관리해주는 게 낫겠어. 집을 오래 비워 두면 집이 상하니까.
“민경아, 너 땅이 제법 넓은데, 이 땅 다 별장 짓게?”
“아냐. 생각해보니 내가 관리하기에 벅차. 역시 계속 소작농을 쓰고 별장만 사용하는 게 낫겠어. 우리가 비워 둘 때는 별장도 관리해달라고 하고. 너는 그 땅 몇 평이나 되니?”
“나는 딱 집을 지을 만큼만 살 거야. 너무 커도 부담스럽고 별장은 세금도 많잖아.”
“하긴 그렇다. 지금은 농지라 세금이 거의 없지만, 별장이 되면 세금이 폭탄인가?”
“저기, 사모님, 듣자 하니 이곳에 집을 지으시겠다고요?”
“네, 문제가 되나요?”
“여기는 절대농지인데, 집을 지을 수 없는 데요. 농막 설치도 안 됩니다. 집 지으시려고 사신 거예요?”
“네, 뭐가 잘못 된가요? 그때 집 지을 거라 하고 샀는데...”
“저런, 사모님, 속으셨네요. 여기는 절대농지라 농사만 지어야 합니다. 저도 이렇게 넓은 농지를 왜 서울분이 사셨는지 의아했어요.”
“아니, 뭐라고요? 집을 못 짓는다고요? 집 짓는다고 비싸게 샀는데”
“계약할 때 확인하고 사시지 않으셨나요? 여기 집 지으려면 직장이 없어야 하고, 즉 근무 경력이 없어야 하고 무주택자에다 농사 경력이 많이 있어야 하고, 또 현지인이어야 하고, 절차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하여튼 별장을 지으실 거라면 잘 못 사신 겁니다.”
나는 갑자기 하늘이 노래졌다. 이 땅 남편 몰래 샀다. 그리고 남편 퇴직선물로 ‘짜잔’ 하고 별장 지어 선물하려고 했다. 평생 알뜰살뜰 모은 내 쌈짓돈을 제주도 봉이 김선달에게 날렸단 말인가?
“저기, 민경아..”
나는 넋이 나가서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멍하니 부동산 주인만 보고 있었다.
“민경아, 이런 말 하기는 뭣 하지만 나는 별장지를 찾는다 하고 사는 거야. 너도 그때 현지에 와서 보고 샀어야 했어.”
“너, 지금 나한테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 나는 울컥했다.
“너 화나라고 하는 말이... 아냐. 어쨌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너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신중한 앤데 왜 이런 일이.... 에휴...”
경희가 잠시 주저하다가 부동산 중개업자를 보며 단호하게 말한다.
“저기요. 사장님, 저도 그냥 안 살래요. 미안합니다.”
김진미
나는 박가연, 예술고등학교 2학년, 피아노 전공이다.
나는 5살부터 피아노를 쳤다. 좋아서 친 것은 물론 아니다. 엄마가 시켜서 쳤다. 그런데 지금까지 치고 있다. 13년 되었나? 학교 마치고 와서도 여전히 집에서 연습한다. 엄마는 당신이 예전에 피아노를 치고 싶었는데, 못 배운 게 한이 된다며 무남독녀인 나를 당신 한풀이 대상으로 삼으신 것 같다. 나도 뭐 다른 친구들처럼 자정까지 영어, 수학, 논술 학원 다니는 것보다는 피아노를 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지금껏 하고 있다. 초등, 중학교 동창생들은 나보다 훨씬 더 비참하다. 체력이 달린다고 해구신까지 먹어가며 학원에 다닌다고 했다. 나는 엄마보고 해구신이 뭐냐고 물었는데, 원기보충제로는 효과가 좋다고 나보고도 필요하냐고 물었다. 되게 비싼가 보다. 웬만하면 엄마가 나한테도 사주셨을 텐데 슬쩍 눈치를 보는 것이 틀림없이 비쌀 것이다. 나는 그냥 홍삼이면 된다고 했다. 사실 공부하는 것도 체력이 중요하지만, 피아노 치는 것은 정말 체력적으로 소모가 많다. 우리 전공들은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다. 사실 하루에 피아노 3시간만 치면 마라톤 3시간 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물론 내 생각이다. 나는 3시간에서 5시간은 쉬지 않고 계속 칠 수 있다. 그 이상은 화장실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수업도 있고, 잠도 자야 되고, 밥도 먹어야 하니, 5시간 이상은 무리다. 단 방학 때는 하루에 12시간씩 연습한다. 왜냐고?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하니까. 피아노 전공은 아무래도 경쟁이 치열해서 서울대에 들어가기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차라리 나도 하프나 팀파니처럼 경쟁률이 낮은 전공을 택할 걸 싶다. 하지만 엄마는 하프는 너무 고가라서 사줄 수 없다고 했다. 사실 하프는 악기만 있으면 서울대도 그냥 들어간다고 한다. 소문이지만 맞을 것 같다. 지금 우리 집에 내 연습실은 완전 방음장치가 되어 있고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 가정용치고는 꽤 고급모델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전공생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엄마, 아빠는 자식이 나 하나뿐이라 정말 애지중지하신다. 해달라는 건 다 해주신다. 그러나 난 고집쟁이, 철부지는 아니다. 경우 없는 건 우리 부모님도 용서 안 하신다. 어떨 땐 너무 피아노가 치기 싫지만, 엄마가 실망할까 봐 억지로 치곤 한다. 물론 입시도 얼마 안 남았다. 나도 서울대나 한예종에 들어가고 싶다. 우리 학교에서 그 두 학교를 못가면 동문 모임에 가도 그렇고 앞으로도 창피할 것이다. 미래까지 갈 것도 없다. 지금 우리 과에 경쟁자가 있다. 이름은 밝히기 싫다. 그 애는 벌써 국제 콩쿠르를 준비하고 있다. 나이도 어린데, 보통은 대학 간 이후에나 준비하는 것을, 입시 전에 실적을 쌓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왜 우리 선생님은 나한테 그런 언급을 안 하실까? 나는 자격이 안 된다는 건가? 물론 나도 안다. 자존심 상해. 물론 그 애가 피아노를 못 치는 건 아니다. 잘 친다. 사실 그 애 별명이 ‘피아노 귀신’이다. 우리는 그 애를 ‘귀신’이라 부른다. 물론 그 본인한테는 아예 말을 걸지 않아서 그 애는 자기가 ‘귀신’으로 불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실 그런 것에 아무도 관심 없다. 내 입으로 인정하기 싫지만, 그 애는 정말 너무 잘 친다. 우리 전공 애들이 다 걔 앞에선 기가 죽는다. 더 속상한 것은 그 애는 우리나 다른 친구들처럼 부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애는 가난하고 심지어 자기 집에 피아노도 없다. 그리고 입학 때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와서 공짜로 공부한다. 학비뿐 아니라 기타 회비도 다 면제받는다. 후원자가 있다고 했다. 사실 그 애는 학교에서밖에 연습을 못 한다. 우리는 연습실을 슬쩍 지나가면서 그 애가 연습하는 걸 훔쳐보곤 한다. 그럴수록 더욱더 비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차라리 수업 마치고 바로 집으로 달려와서 집에서 연습하는 것이 나은 데도 꼭 한 번씩 보고 온다. 사실 그 애는 왕따다. 우리 중 아무도 그 애와 말하려 들지 않는다. 속이 좁은 건 물론 우리다. 우리는 그 애를 공기 취급한다. 누가 귀신과 대화를 하고 싶겠는가. 우리는 사람인데, 본래 사람은 귀신과 멀리해야 하는 법, 사람들은 사람끼리, 귀신은 귀신끼리 지내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심지어 그 애는 학과성적까지 우수하다. 항상 1등 한다. 그것도 피아노 전공뿐이 아니라 학교 전체에서 1등 한다. 그렇게까지 안해도 장학생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1등을 해야 하나?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그 애를 멀리한다. 그 애도 잘 안다. 우리가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서 자신을 따돌린다는 것을, 그래서 더더욱 성적에 목을 매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름방학이다. 날이 더워서 학교 가기 귀찮아서 집에서 주구장창 연습한다. 우리 집 내 연습실은 방음장치, 냉, 난방장치가 완비되어 있다. 이런 시설이 없는 집은 ‘피아노 귀신’뿐일 것이다. 오늘도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엄마가 주스를 들고 연습실에 들어오셨다.
“열심히 하네, 뭐 먹고 싶은 건 없니? 엄마가 저녁때 해줄게.”
“글쎄요. 기력 보충에 도움 되는 고단백, 저칼로리 음식?”
“그래, 알았다. 유황오리백숙을 해줄 테니 기대해.”
엄마, 이렇게나 나에게 기대가 크신데, 그 피아노 귀신은 유황오리 먹어나 봤을까? 무지하게 가난하다던데, 동생들도 많고, 점심은 거의 라면으로 때운다지, 아마.
에어콘을 강하게 틀었는데도 연습을 하다 보면 온몸이 땀에 젖는다. 그리고 기운이 빠져서 정말 매일매일 보신 음식을 먹어야 겨우 회복이 된다. 결코, 라면만 먹어서는 콩쿠르에 가지도 못하고 쓰러질걸, 흠. 국제콩쿠르에 가려면 비행기 표에, 호텔숙식비에, 현지교통비에, 참가신청 관련 비용까지 만만치 않을 텐데, 그것까지 후원자가 다 도와주는 건가? 이런 또 ‘귀신’ 생각을 하고 있네. 내가 왜 이러지? 아, 자존심 상해.......정말, 귀신한테 홀린 거야, 뭐야?
개학하고 학교에 갔는데, ‘귀신’이 안 왔다. 뭐야? 귀신 왜 안 온 거야? 알고 보니 콩쿠르 때문에 외국에 나갔다고 한다. 우리는 혹시나 안 좋은 일로 못 온 건 아닌가 하고 내심 잔인한 기대를 했다. 역시나 콩쿠르 하러 해외에 나갔구나. 아, 배 아파. 이번 학기는 ‘귀신’이 없어서 수석은 다른 애가 하겠네. 누굴까? 경쟁이 볼 만 하겠군. 그런데 피아노 전공자들 모두가 ‘귀신’이 없다는 걸 깨닫자 다들 눈에 빛을 뿜으며 서로 1등을 해보려는 듯 자못 비장미가 넘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엄마, 이번 학기는 기대해도 좋아. 나도 사람 중에서는 잘하거든.
가을도 깊어가는 10월 신문, 인터넷, 뉴스 온통 난리가 났다. ○○국제콩쿠르, 최연소 입상자, 설마 ‘귀신’이? 맞았다. ‘피아노 귀신’이 우승했다. 우리 학교에도 현수막이 붙고 학교에 기자들이 들이닥쳐서 선생님들 인터뷰를 하고 우리까지도 인터뷰했다.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귀신’을 칭찬했다.
“네,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요. 심지어 밤새워 연습실에서 연습하기도 했어요. 온 학교에 귀신들이 돈다고 우리는 밤에는 연습실에 가지 않거든요. 아마도 피아노 귀신이 내렸나 봐요. 신내림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사람이 그렇게 칠 수 있겠어요? 농담이에요. 그런데, 우리 인터뷰와 사진도 나가는 거 맞죠? 사랑해!!! 넌 우리 학교, 우리 모두의 자랑이야!”
김진미
나는 민서연, 서울대 농대 석사과정생이다. 학부는 부산대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했다. 전공이 왜 다르냐고? 글쎄, 공부하러 갔다기보다는 그냥 서울대에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농대가 제일 낮아서 입학하기 쉬운 과로 들어갔다. 들어갈 때는 원예에 관련한 공부를 할 생각으로 나중에 화원이라도 차릴까 했는데, 웬걸, 인문학도가 갈 곳이 아니었다. 입학을 시켜주신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농대는 알고 보니 자연계열 학과였다. 관악사 생활을 하는데, 룸메이트 언니는 사범대 박사과정 연구생이었다. 이 언니는 관악사 전체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40대 중반이었다. 관악사는 미혼만 산다. 기혼자는 아파트형 기숙사가 따로 있다. 나는 이제 20대 후반인데 거의 이모뻘이었다. 이 언니는 박사수료 한 지가 벌써 꽤 되었는데, 2년째 논문심사를 계속 받고 있다. 그동안 논문이 통과가 안 되는 건 거의 안 된다고 보는데 참 끈질기다. 나는 농대수업이 너무 체질에 안 맞아서 중간에 포기할까 하고 이 룸메이트 언니에게 의견을 물었다.
“안 돼, 네가 들어올 때 마음하고 나갈 때 마음 다른 게 옳다고 생각하니? 정 못하겠거든, 수료라도 해. 그래야 이력서에 기재라도 하지. 중퇴할 걸 왜 들어왔니?”
음, 그 말이 맞긴 맞다. 이번 학기만 마치면 수료라서 부산 집에 내려갈 생각이다. 근데 이 언니는 어쩔 셈인지...
“언니, 이번 학기에도 논문이 통과가 안 되면 어떡할 거야? 계속 관악사에 있을 거야?”
“응, 다음 학기까지는 있으려고, 청강을 할 수 있는 건, 들을 수 있는 건 다 들으려고, 여기 있으면, 학술회나 논문 발표 같은 것은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아. 생활비가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다음 학기까지는 어떻게든 심사에 통과해 봐야지. 너는 이제 내려가겠네. 먼저 가 있어. 다음 학기 마치고 나도 내려갈 테니까. 그때 부산서 보자.”
언니와 나는 둘 다 집이 부산이다.
나는 부산 집에서 엄마가 하시는 일을 돕고 있다. 엄마는 고시원 두 건물을 운영하시는데 혼자 힘에 부치셔서 내가 돕고 있다. 물론 월급 받고. 친구들은 오히려 나를 부러워한다. 따로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데 나는 취업이 안 되어서 집안일을 하는 것뿐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인데 오히려 학교에 있을 때보다 시간이 더 잘 간다. 나는 룸메이트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사 잘 되어 가냐고. 근데 잘 안 됐단다. 그래서 이제 내려온다고 했다. 우리는 서면 커피숍에서 만나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언니는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언니는 오로지 혼자 힘으로 고학을 하는데 집에서 이만저만 눈치를 주는 게 아니다.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돈 쓸 생각만 한다고 구박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언니가 취업을 안 하려고 했느냐, 그것도 아니다. 거의 20년 동안 이력서를 넣을 수 있는 곳엔 다 넣었다. 그런데 한 군데도 안 되었던 것뿐이다. 이 언니 나이도 있는데, 경력은 없으니 어느 직장에서 뽑겠는가. 부담스러워서 안 뽑을 것 같다. 나는 언니에게 그만 포기하라고 했다. “박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언니 그렇게 오래 심사를 받는 사람도 없어.” 나는 이런 생각을 진즉에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는 백절불굴의 의지로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앞으로도 안 될 거라 생각하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한동안 연락이 안 되었는데, 언니가 박사논문 심사에 통과했다고 했다. 집에서 심사받으러 서울대에 왔다 갔다 했는데, 겨우 되었다고 했다. 나는 언니보고 학위논문을 한 부 달라고 했다. 언니가 주면서 “음, 뭐라고 써야 하지?” 고민하더니 흔한 인사말을 써 주었다. 그런데 그 논문 나는 안 읽었다. 너무 길고 어려워서 맨 뒤에 부록 세 개 중에 한 부분만 읽었다.
언니는 박사학위는 받았지만, 여전히 취업은커녕 흔하디흔한 강사 자리 하나도 얻지 못하고 집에서 주구장창 구박만 받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우리는 만나서 회포를 푼다. 나는 여전히 고시원 일을 돕고 있고, 똑같은 일상인데 언니는 계속 이력서만 넣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연줄도 없고 뒷배도 없고 이 언니는 오지랖도 좁고 교수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그런 행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눈치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너무 둔한 건지 순진한 건지, 하여튼 출세와는 거리가 먼 유형이었다. ‘나는 공부하니까 공부만 한다. 논문을 쓰니까 논문만 쓴다.’ 이런 식이다. 아무래도 교수들에게 싹싹하게 잘 보인 학생들이 강사 자리라도 얻을 텐데, 이 언니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은 듯 보였다. 아니, 아예 그런 계통은 머릿속에 없었다. 나는 석사 공부를 할 때도 성적이 엉망이고 제대로 못 해도 교수님들에게 이쁨받아서 학점을 받고 석사수료도 억지로 요령껏 했는데, 언니 교수님들은 아마도 일부러 생트집을 잡아서 심사를 7번이나 탈락시켜서 고생시킨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졸업을 한 것을 보니 논문은 훌륭했나 보다. 이 언니는 박사 공부를 하면서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체중이 20킬로그램이나 늘고 대사증후군까지 생겨서 건강이 엉망이었다. 머리도 백발이 되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머리가 백발이 되는구나. 전설로만 들었는데, 이 언니도 참 대단하다. 이 언니는 오랫동안 취업이 안 되고 학업도 너무 오랜 기간 힘들게 해서 인생무상을 깨달아 도인이 되었다. 원래 철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사주명리, 주역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제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 그러고는 왜 이리 인생이 꼬이고 안 풀리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상하다고 사주대로라면 이렇게 인생이 안 풀릴 수가 없는데, 귀격인데, 대운도 좋은데, 왜 하나도 안 맞는 거냐고 분개하였다. 그러면서 나보고도 사주 공부를 하라고 하였다. 처음엔 기초과정은 가르치는 곳이 많으니까 거기서 클래스 수업을 받고 기초과정이 끝나면 개인 레슨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듣는 둥 마는 둥, 안 하고 있으니까 어느 날은 언니가 직접 내 휴대폰에 만세력을 깔아주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10간 12지지와 음양오행을 설명해주고 연월일시와 대운 보는 법과 십성, 십이운성, 십이신살, 충파형해 등등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내 주변 인물들을 대상으로 사주를 언니한테 배웠다. 물론 공짜로. 언니는 없는 돈에 나한테 밥까지 사 먹여 가면서 사주를 가르쳤다. 처음엔 시큰둥했는데, 언제부턴가 언니가 보내주는 동영상 강좌들을 하나, 둘씩 보게 되고, 점점 관심이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젠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왜 이리 인생이 안 풀리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나는 부모 형제의 결사반대로 첫사랑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이후로는 그 어떤 남자도 못 만나고 있다. 언니는 내 팔자가 남자 만나기 어려운 사주임을 직접 알려주기가 뭐해서 그토록 열심히 공짜로 내게 사주를 가르친 것이었다. 나도 사주 공부를 스스로 하면서 내 팔자가 이렇게 나쁜 사주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인간들의 80퍼센트는 팔자 그대로 살고, 10퍼센트는 사주보다 더 잘 살고, 10퍼센트는 사주보다 더 못 산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팔자대로 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극복하는 10퍼센트가 될지 그보다 못한 10퍼센트가 되는지는 자신의 노력에 달린 것이다. 룸메이트 언니는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더 나은 10퍼센트의 인생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보고도 극복하는 10퍼센트의 인생을 살라고 나에게 매번 채찍질했던 것이었다.
나는 교수님께 찾아가서 다시 복학해서 졸업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김진미
나는 강미선, 40대 주부, 남편, 회사원 딸과 아들이 있다. 경남 읍 소재지에서 살고 있다. 남편 벌이는 월 200 만원 대, 우리 네 식구 먹고살기 빠듯하다. 토요일은 물론이거니와 공휴일도 근무를 해야 겨우 250만원 받아 온다. 딸은 중학생이라 학원비도 부담이다. 아들은 늦둥이로 이제 초등학교 입학했다. 그나마 유치원을 졸업해서 돈이 덜 들어간다. 유치원은 학교보다 돈이 더 들었다. 유치원비 준 만큼 딸아이 영어, 수학학원에 넣고 있다. 보통 이런 경우, 주부들도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직장을 다녀야 한다는데, 나는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손톱여물 썰 듯이 살림을 빠듯하게 하는 형편이다. 나는 매주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다 보는데, 주로 애들 읽어줄 동화책을 빌렸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읽을 책을 찾는다. 지금까지는 큰 애와 둘째를 재우느라 밤마다 책을 읽어주었다. 근 14년을 읽어준 셈이다. 이제는 알아서 자기들끼리 자게 된 덕분에 내가 읽을 책을 빌려 올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간단한 소설류로 시작했다. 어느덧 웬만한 것은 다 읽다 보니 이제는 뭔가 생산적인 것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서 만드는 한방약차』와 같은 건강 관련 책들을 보다가 심심풀이로 사주명리 책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강좌를 하는 데 그 중 사주명리 강좌도 있었다. 그 수업을 듣고 관련 책도 빌려보게 되었다. 수업하는데 대부분 중년 이상의 주부나 할머니들이었다. 다들 나보다는 형편이 낫고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강사 선생님은 할아버지로 꼬장꼬장하신 분이었다. 다들 그렇지만 자신들과 가족들 사주를 강의 샘플로 수업을 한다. 순서가 되자 나와 우리 가족 사주도 내놓게 되었다. 수업시간에는 별로 나쁜 말은 하지 않는다. 다 기본적인 말만 한다. 그리고 기초강의와 심화강의가 점차 진행되면 학생들 스스로가 좋은지 나쁜지 알게 된다. 하긴 강사가 굳이 학생들에게 욕을 얻어먹어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나? 수강생 떨어지면 수업이 폐강되는데, 자기 밥줄 끊어지는 일 아닌가? 나는 동기들 내 친구들보다 가난하다. 다들 남편들이 우리 남편보다 훨씬 좋은 직장에 다니고 월급도 많이 받는다. 우리 수준으로 받는 사람은 우리 아파트에서도 찾기 어려울 듯싶다. 심지어 공장에 다니는 집도 월 400, 500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깜짝 놀랐다. 대졸자보다 월급을 2배 이상 받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대학은 왜 가나? 사실 나는 대학원 출신이다. 남편은 대졸이다. 우리 부부는 국립대를 다녔고 학교 캠퍼스 커플이다. 그런데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하니까 월급이 그 모양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들이 훨씬 많이 받는다. 남편은 공장에서 근무한다. 공장이 시골이다 보니 읍 소재지에서 사는 것이다. 내 친구들은 광역시 또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스스로 자괴감이 들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내 팔자가 왜 이런가 싶어 사주명리에 몰두하게 된다. 이제 뭐든 안 좋은 일만 생기면 팔자가 나빠서 그런가 하고 연구한다. 우리 부부는 평생 싸움을 하지 않았다. 대학 가서 만나서 9년 연애하다 결혼해서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싸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돈 때문에 싸움을 한다. 결혼하고 15년이 되다 보니 시집올 때 사 온 살림살이가 하나둘씩 고장 나서 바꾸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가전제품뿐 아니라 침대와 같은 가구들까지 다 바꾸게 되니 아무리 12개월 할부를 해도 품목이 늘어나서 카드 결재액도 장난이 아니게 커졌다. 착하고 성실하다고 예쁘게만 보이던 남편이 점점 무능해 보이기 시작했다. 애들도 커 가는데 왜 당신 월급은 늘지를 않는 거야? 그 성격에 장사도 못 하겠고? 하긴 장사는 아무나 하나, 그리고 장사 밑천도 없는데, 빚부터 낼 수도 없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장사할 그릇도 아니다. 이제는 우리 집도 좁아 보이고, 낡아 보인다. 매사가 다 짜증스럽다. 그래서 또 사주명리를 연구한다. 우리 부부의 궁합은 어떤지 본다. 내가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형국이라, 결국은 남편만 좋은 궁합이다. 신랑이 예쁠 땐 그것도 좋은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나만 손해인가 싶다. 시댁에선 애들도 다 컸는데 내가 나가서 돈이라도 벌어 왔으면 하는 것 같다. 당신 아들만 고생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아니, 아니 이 모든 게 다 내 억측일 수도 있다. 세상만사 다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내가 지옥을 부른다. 내가 천국을 부른다. 모든 것이 다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굳게 마음먹는다. 심호흡한다. 후우...후우... 그래, 그래. 다 팔자려니 해야지. 다른 친구들은 전생에 복을 많이 쌓았나 보지. 나는 이번에 복을 쌓아야 내생에 편하게 살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심호흡을 한다.
따르릉...따르릉... 집 전화가 울린다. 아니 휴대폰 놔두고 왜 집 전화지?
“여보세요. 아, 경신 언니. 웬일이야? 응? 점심을 사겠다고? 그것도 비싼 레스토랑에서, 아니 애들도 다 데리고 나오라고? 무슨 일이야? 복권에라도 당첨되었어?”
“응, 너 어떻게 알았니?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났나? 언니 이번에 5억짜리 복권에 당첨되었어. 그래서 가족들 외식시키고 너도 생각나서 전화했다. 오랜만에 부산 나와라. 애들하고 지하철 타고 나와. 아니다. 내가 택시비 줄 테니까 택시 타고 와. 시간과 장소는 문자로 보내줄게.”
아아!!! 모든 게 다 팔자려니 한다.
김진미
나는 정은희, 낼 모래 50. 남편은 선장이라 일 년 중 며칠만 집에 온다.
그리고 개 두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가 우리 식구다. 애는 없냐고? 없다. 없다고.
그래, 불임이라 애가 없다. 처음엔 남편이 늘 배를 타니까 애가 못 생긴다고 생각했다. 다 남편 탓이려니 했다. 그런데 결혼 후 10년이 지나자 이건 아니다 싶어 둘 다 병원에 갔다. 정자와 난자를 다 채취하여 냉동 보관하여 남편은 또 배를 타고 나가면 나 혼자 병원 가서 시술을 받았다. 분명히 수정란 여러 개를 심었는데 하나같이 흘러버려서 수정란이 자라지를 못한다. 그 짓을 또 10년 넘게 했다.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시술할수록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나는 거동하기도 불편해졌다. 의사도 말한다. 다른 부부들은 이렇게 하고 싶어도 돈 때문에 못한다고, 그나마 남편분이 경제력이 되니까 이렇게 여러 차례 시술을 시도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사실 우리 남편은 억대 연봉이라 우리 부부는 돈 걱정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러면 뭐하나? 돈 쓸데가 없는데, 놀고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시간만 나면 우리 부부는 해외여행을 다니고 또 남편 배 탈 때 따라 타고 나갈 때도 많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다 애들이 있다. 우리 언니는 심지어 씨 다른 자식까지 낳았다. 너무 애가 잘생겨 스트레스라고 한다. 누구 앞에서 염장질인지. 새언니도 임신이 너무 잘 되어 불임 수술까지 받았다. 다들 너무 하는 거 아냐? 똑같은 부모 아래서 형제자매가 이렇게 차이 나도 되는 거야? 왜 나만 못 낳는 거냐고, 대체? 전국에 유명하다는 기도처는 다 다녔다. 시주도 많이 했다. 돌가루도 마셔보고, 다둥이 집 속옷부터 전래비방을 안 해 본 것이 없다. 그래도 현대 지성인인데 조선 시대 여인들도 안 할 짓까지 다 해보았다. 한약부터 양약, 민간요법까지 안 먹어본 약이 없다. 심지어 수천만 원을 들여 굿까지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애를 못 가졌다. 이제 나이도 너무 들어서 체력도 달리고 포기를 해야 하나 기로에 섰다. 냉동 수정란은 아직 몇 개 있다. 돈도 아직 있다. 그런데 내가 컨디션이 너무 나쁘다. 이 상태라면 또 수정란이 흘러버릴 것이다. 미쳐버리겠다. 남편은 배 타러 나갔다. 남편은 이제 돈이라도 열심히 벌어야겠다며 더 열심히 배를 탄다. 시술 때문에 육지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그동안 돈도 못 벌고 쓰기만 했다면서 일하러 나갔다. 나는 혼자 심심하다 못해 사람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골프를 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 운동이라도 해서 체력관리를 해야지. 열심히 필드를 뛰었더니 살이 점차 빠지기 시작했다. 체중이 정상으로 돌아오니까 거동하기가 수월해졌다. 몸매가 돌아오니 다시 예전의 예쁜 모습으로 기분도 점차 나아진다. 오랜만에 친정엄마한테 갔다. 놀라게 할 요량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엄마가 언니와 통화 중이라 내가 들어오는 기척을 못 느끼신 것 같았다. 그래서 뒤에서 본의 아니게 통화내용을 듣게 되었다.
“그러게 말이다. 은희랑 김서방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은희 저 계집애 갓난둥이 시절, 한겨울이었는데, 우리 집 연탄가스를 식구대로 다 마셔서 우리는 기어서 밖으로 나왔는데 저 핏덩이를 데리고 나오지 못했어. 옆집에서 나중에 보니 애가 죽은 것 같아서 그냥 수돗가에 던져 놓았대. 우리는 병원 가서 정신이 들자 막둥이 생각이 나서 집으로 왔는데 그때까지도 수돗가 바닥에 팽개쳐져 있었어. 죽은 줄 알았는데 보니 살아있었어. 애가 얼음장인데도 숨을 쉬더라고. 처음엔 안 쉬었기에 죽은 줄 알고 버렸다는 거야. 그때는 어쨌든 살아있었어. 아무래도 그때 얻은 냉병이 불임이 된 것 같아. 여자는 몸이 차면 안 되잖아.”
김진미
나는 김도형, 13살, 초등학교 6학년. 남자.
남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반에 김도형이라는 여자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이름이 참 좋았는데, 엄마가 그러시는데 나 태어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아주 비싼 작명소에서 지으신 이름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좋은 이름을 왜 우리 반 여자애가 똑같이 사용하는 것인가? 여자한테도 좋은 이름인가? 나는 내가 똑똑하고 잘생겼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도 아파트 중에서는 유명 메이커 아파트에 대형 평수에 살고 있다. 요즘은 평수대로 친구끼리 모여서 노는 게 유행이다. 나도 당연히 추세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여자 김도형은 아랫마을 빈촌에 산다. 여자애가 별로 예쁘지도 않고, 옷도 낡은 것이 자기 언니 옷을 물려 입는 것 같다. 나는 눈썰미가 좋아서 쓱 보면 무슨 옷을 입었는지 머리 모양이 바뀌었는지 신은 뭘 신었는지 저절로 눈에 보인다. 참 피곤하다. 쓸데없는 정보들이 넘쳐나니까. 여자 김도형은 공부도 잘하는 것 같지 않다. 나는 우리 반에서 최상위권이다. 반장 후보에 나가서 선거 유세도 했다. 반장은 되었는데, 학생회장에서는 탈락했다. 나보다 더 돈 많이 쓴 기철이 녀석이 당선되었다. 분하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져서 “부회장이라도 할래?” 하는 것을 자존심 상해서 거절했다. 그냥 반장만 한다고 했다. 오늘도 숙제를 걷으려고 반을 돌고 있는데, 여자 김도형이 숙제를 해 오지 않았다. “야, 김도형, 숙제 제출하라고.” “미안, 김도형, 오늘 못 해왔어. 어제 언니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따라가느라 못 했어. 선생님께는 내가 말씀드릴게.”
그다음 날도 여자 김도형은 숙제를 안 해왔다. 이번은 핑계가 또 뭘까?
“미안, 김도형, 오늘도 못 해 왔어. 내가 선생님께 말씀드릴게.”
이런 날이 계속 반복되었다. 나는 이제 여자 김도형에게 숙제를 걷으러 가지도 않는다.
어느 날이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부르셨다.
“도형아. 너 왜 여자 김도형 숙제를 걷지 않는 거니?”
“네? 선생님, 걘 숙제를 매일 해오지 않아요. 그래서 아예 요즘은 제가 걷으러 가지 않았어요.”
“그래? 여자 김도형은 항상 나한테 직접 숙제를 제출했어. 매일매일. 반장이 걷으러 오지 않는다고 자기가 직접 제출한다면서 교무실에 와서 제출하고 가. 너 여자 김도형과 싸웠니?”
나는 기가 막혔다. 아니, 이 계집애가 나를 물 먹이려고 작정했나?
나는 교실로 뛰어들어갔다.
“야! 김도형, 이 계집애야. 너 나하고 무슨 불구대천 원수가 져서 나를 골탕 먹이냐?”
“무슨 소리야?”
“너, 나한테는 숙제 안 해왔다고 하고 선생님께 직접 제출했다며? 그러면서 반장이 ‘내 숙제는 걷지 않아요.’라고 했다면서?”
“아니, 기가 막혀서. 언니가 아파서 못 해온 날은 다음날 내가 선생님께 제출했고, 그다음 날 도 뒷날 제출했고, 그 이후로는 네가 안 와서 내가 직접 제출했다. 왜? 뭐가 잘 못 되었니?”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으이구, 계집애라 때릴 수도 없고, 정말 난감하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여자 김도형은 사사건건 나를 괴롭혔다. 아주 고단수로. 선생님뿐 아니라 반 친구들도 전부 내가 나쁜 놈인 줄로 안다. 속이 터져서 “너 나한테 왜 그러냐?”고 따지면 “내가 언제?”하고 비아냥거린다. ‘저걸 죽일 수도 없고. 정말 미쳐버리겠네.’ 나는 차츰차츰 화병이 깊어져서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학교에 가기가 싫다. 여자는 정말 무섭다. 아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단 말인가? 이렇게 훌륭한 나. 이렇게 멋진 나. 인격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집안으로 보나, 내가 여자 김도형보다 못한 것이 없는데, 저런 김도형한테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할 이유가 뭐냔 말이야???????
너무 괴로워서 결국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엄마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짐작만 하고 계셨는데 내가 이야기를 하니까, 기뻐하셨다. 아니, 기뻐하셨다? 기뻐하시면 안 되는 거 아냐? “엄마. 나는 그 계집애 때문에 죽겠어. 학교도 가기 싫어. 엄마가 왜 기뻐하는 거야?”
나는 엄마한테 말 한 것을 후회했다. 엄마의 말인즉, 여자애들은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기면 일부러 그렇게 괴롭히는 거라고. 본래 여자애가 남자애보다 성숙이 빨라서 남자인 네가 눈치를 못 채서 괴롭히는 거라고. 김유정의 <동백꽃>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김유정의 <동백꽃>을 읽고 책을 집어 던졌다.
나는 나날이 초췌해져서 학기 말 성적조차 떨어졌다.
이런 괴로운 상태를 거쳐 마침내 우리는 졸업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졸업한다. 만세!!!
졸업 사진을 찍느라고 분주한데 철천지원수 김도형이 우리 엄마에게 다가와 인사를 한다.
“도형 어머니, 안녕하세요? 제가 김도형이에요. 반장에게 신세를 많이 졌었죠. 중학교는 다른 곳으로 가네요. 아쉽네요. 같은 학교에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소름이 쫙 끼쳤다. 저 원수랑 드디어 헤어져서 이제야 살 것 같은데 말이야.
“아? 네가 김도형이구나. 궁금했는데. 다른 중학교에 간다고? 그래 너도 중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하렴.”
“네, 어머니. 그래야죠. 이제 우리 언니도 드디어 퇴원했어요. 이제 간호하러 다니지 않아도 돼요.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신세? 그게 무슨 소리니?”
“네, 도형 어머니. 당신 아들 도형이가 찬 축구공을 우리 언니가 잡아 주려고 달려갔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6개월 동안 병원에 있었거든요. 그동안 나는 매일 집안일에 언니 간호하러 병원에 다녔고요. 그런데 당신 아드님께서는 뺑소니차에 당한 사람이 저 앞에 쓰러져 있는데, 119조차 부르지 않고 축구공만 들고 사라졌었죠. 아무렇지 않게 축구 하러 갔대요. 쓰러진 언니가 도와달라고 했는데 말이에요.”
김진미
나는 황미선, 나이 밝히기 싫음. 골드미스도 아니고, 실버미스도 아니고 브론즈미스도 아닌 아이언미스쯤 되려나. 아이언맨은 영웅인데, 아이언미스는 나이만 찬, 직장도 없는, 부모님께 기생 중인 식충이인 것이다. 우리 동네에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라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 한 달에 한 번씩 간다. 혼자 가는 건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다. 처음엔 시내에서 만났는데, 이제는 차 타러 나가는 것도 귀찮아서, 우리 동네로 부른다. 동네로 부르고 나니, 우리 동네에도 이런 카페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친구는 브론즈미스 정도 된다. 그나마 브론즈인 것은 집안일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집이 큰 식당을 하는데 아르바이트생 한 명분 역할은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넌 밥값은 하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아냐.”
우리는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카페 창가에 나란히 앉아서 밖을 보면서 이야기한다. 카페가 그리 크지 않아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카페 주인은 다 들을 수 있다.
“근데 말이야. 이 카페 간판명, 지은이가 조용필 팬인 것 같지 않아?”
“그래? 조용필이 이런 노래 불렀어?”
“야. 우리 나이에 조용필 노래를 모르는 게 말이 되니?”
“그런가?”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조용필 노래 가사를 검색했다. 퍽 옛날 노래인데, 요즘 애들은 잘 모르리라.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조용필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
그대 긴 밤을 지샌 별처럼
사랑의 그림자 되어 그 곁에 살리라.
아아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정녕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오.
그리고 사랑의 그림자 되어
끝없이 머물게 하여 주오.
한순간 스쳐 가는 그 세월을
내 곁에 머물도록 하여 주오.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을
사랑은 영원히 남아 언제나 내 곁에 <반복>
우리는 카페 주인이 틀림없이 조용필 팬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하나보다고 추정했다. 둘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카페 주인은 묵묵부답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사실 손님들 대화에 끼어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말이다. 그럼 누가 편히 앉아 대화하겠는가? 우리는 늘 그렇듯이 주인이 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우리 할 말을 하고 나온다. 한 삼 년 넘게 이 카페를 드나들다 보니 카페쿠폰에 도장이 꽉 차서 보너스 쿠폰도 여러 장 받았고, 나는 VIP 고객이 되었다. 그래서 어느 날 카페 주인에게 물어봤다.
“사장님, 조용필 팬이셔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카페명을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라고 지으셔서요.”
사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아닌데요.” 딱 잘라 말한다.
“전 조용필 씨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팬도 아니고, 노래도 저는 팝송 들어요. 카페에도 늘 팝송을 들려 드리고 있잖아요?”
“아, 네, 그러셨구나. 쓸데없는 참견해서 미안합니다. 그동안 제 친구와 이런 쓸데없는 대화 나누는 걸 용케 가만히 듣고 계셨구나.”
“손님들 말씀하시는 데 끼어들 순 없죠.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VIP 황미선 고객님. 근데 고객님이야말로 조용필 팬이신 건가요?”
“아, 딱히 팬이라기보다는 조용필 씨 노래는 언제 들어도 유행 타지 않고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가사도 좋고. 그래서 가끔 들어요.”
“그러시군요.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선 지 외국 팝송은 좀 어울리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K-Pop을 틀어야 하나 생각 중이에요.”
“우리 동네 카페에 애들이 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K-Pop이에요? 애들은 도심에 있는 외국계 프랜차이즈 카페를 이용하죠.” 나는 카페 주인과 한바탕 이야기를 나누다가 왔다.
조용필 이야기를 해선지 집에 와서 조용필 노래 모음 음원을 찾아서 몇 시간 째 듣고 있다. 이런, 조용필 팬들이 나한테 상을 줘야 할 것 같군. 오늘 한 사람에게 조용필 노래 광고를 하고 왔으니 말이야.
친구가 동네에 놀러 온대서 또 그 카페로 갔다. 그런데 영업중지, 내부 수리 중 푯말이 붙어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지? 나는 VIP 쿠폰도 다 못 썼는데.” 우리는 동네 다른 카페를 찾아갔다. 얼마 후 그 카페가 있던 자리엔 다른 식당이 들어섰다. 엄마와 난 머리를 하러 동네 미용실에 갔다. 엄마는 파마하고 나는 염색을 하면서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옆자리 아줌마들이 하는 대화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기가 나와서 귀를 쫑긋 세웠다.
“아, 글쎄, 저 길 아래 카페 있었잖아. 지금은 식당 하는 자리 말이야. 거기 주인이 얼마 전 자살했대. 자살 이유가 너무 황당하지 뭐야. 자기 마누라가 조용필 골수팬이어서 또 조용필 콘서트 보러 집을 나갔다지 뭐야. 그래서 그 사장이 ‘지금 나가면 앞으로 나 볼 생각 말라’고 했대. 그런데도 그 여편네가 그냥 나갔다는 거야. 그리고 그 사장 독을 마셨대.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김진미
나는 전영자, 칠순은 지났고, 팔순은 아직 멀었다. 50년째 친구들과 계 모임을 하고 있다.
칠순이 지나니 벌써 우리 모임에서 하나둘씩 회원이 빠지고 있다. 친구들이 저 세상으로 이사하는 것이다. 요즘 수명이 길어져서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우리 동기들은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다. 어릴 적 6. 25를 겪은 우리는 못 먹고 가난하게 살아서 수명이 짧은 건가 생각해본다. 제일 먼저 간 친구는 간암이었다. 남자라면 술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는데 얘는 술도 안 먹는데 왜 간암인지 모르겠다. 그다음 간 친구는 폐암이라고 했다. 역시 이 친구도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폐암이었다. 아마 남편이 골초였던 모양이다. 간접흡연이 훨씬 나쁘다고 하니까. 또 한 친구는 췌장암이었다. 병원 갔을 때 이미 말기라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다 해도 암은 고치기 어려운 모양이다. 더더욱 놀란 것은 이 친구들이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나 매우 건강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골골해서 늘 약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몸에 나쁜 건 절대 안 먹고, 안 마시고, 가능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끼니도 안 거르고, 일상생활에 무리가 가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영양제도 종류별로 다 챙겨 먹는다. 영양제도 너무 종류가 많아 아침, 점심, 저녁 후 세 번에 걸쳐서 나눠 먹는다. 식탁 옆 선반은 약장이다. 누가 보면 약국이다. 남편은 그런 데 무심할 만큼 건강해서 내가 먹어보고 효능이 좋은 영양제를 그냥 내가 먹인다. 식후마다. 남편은 절대 알아서 혼자 챙겨 먹지 않는다. 그리고 나보고 약 너무 많이 먹는다고 타박을 한다.
“밥이 보약이지. 밥 세 끼 챙기면 되지 뭘 그렇게까지 먹냐고? 그렇게 오래 살고 싶어?”
“나는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안 아프게 살아야 할 것 아니요? 병실에 누워 사는 게 사는 거요? 연명이지. 그렇게 안 되려고 이렇게 챙기는 것 아녀요? 그래도 나는 비싼 한약은 안 먹었소. 다 양약이지. 내 친구 누구는 자식이 300만 원짜리 보약을 지어 줬답디다. 그게 한 달 분이요. 나는 한 달에 약값 30만 원도 안 돼요. 6개월에 30만 원이요. 얼마나 싸게 치이는데, 이 정도로 건강 유지하는 게 싸게 치이는 거요.” 이런 대화를 약을 사는 6개월마다 한다. 맞다. 우리 영감은 너무 짠돌이다. 6개월에 30만 원 약값이 아까운 거다. 그렇게 아까운데 밥은 왜 먹나? 하루에 한 끼만 먹지. 나는 건강 염려증인 것인가? 내 나이면 실버 종합영양제는 기본으로 칼슘, 마그네슘, 아연, 콜라겐, 오메가3. 셀레늄, 코엔자임 큐텐,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유산균 제재까지 먹고 있다. 그리고 감기 기운이 있으면, 프로폴리스와 비타민 C도 먹는다. 먹는 약으로도 이렇게 눈치를 주는데 화장품은 원하는 걸 살 수가 없다. 우리나라 화장품이 얼마나 비싼지. 요즘 진피까지 기능 활성화를 시켜주는 국내 화장품이 개발되어 절찬리에 시판 중인데 로션, 크림 두 개에 100만 원이 넘는다고 해서 차마 사지를 못한다. 내가 돈을 버는 게 아니니까. 영감한테 타서 쓰니까. 왜 우리 부모님은 오빠들만 공부를 시키고 딸들은 그냥 부엌일만 가르치셨는지 원망스럽다. 그렇다고 오빠들이 우리 용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화장품은커녕 영양제 한 병을 사다 준 적도 없다. 다 자기 처자식 먹여 살리는 데 쓰느라 여동생들은 뒷전이다. 이런 걸 친정 부모님은 모르고 돌아가셨다. 나는 언니들이 시집가는 걸 보다가 내 차례가 되어서 그냥 가라는 데로, 갔다. 그렇게 50년 넘게 살았다. 자식들도 다 출가했고, 영감, 할멈 둘이 사는데, 평생 나 옷 한 벌 사 입으라고 돈을 준 적도 없다. 물론 나도 사치를 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옷은 낡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약은 챙겨 먹어야겠다. 다른 건 양보해도 약은 먹어야겠다. 내가 평생 시집와 살면서 이 정도도 못 먹으면 한이 되어 못 살 것이다. 먼저 간 친구들도 이런 영양제라도 챙겨 먹었으면 10년은 더 살았을 것을 그걸 못 먹어서 죽은 것 같다. 오늘도 식후 약을 한 움큼 집어삼켰다. 요즘은 영감이 미워서 영감은 안 줬다. 나만 먹었다. 저렇게 건강을 자신하는데 내가 더 이상 신경 써서 뭘 하겠어? 다 자기 몸 자기가 챙기는 거지. 하지만 나는 따로 운동은 안 한다. 집안일도 힘에 겨운데 뭘 따로 운동까지 하나? 그렇지만 우리 영감은 매일 한 시간씩 등산한다. 그건 좋은 습관이다. 처음엔 나도 따라 다녔는데, 영감이 다리가 길고 보폭이 커서 따라잡질 못했다. 항상 뒤처져서 따라 다니다가 요즘은 안 간다. 날도 차고, 무릎도 아프고, 등산이 무리인 것 같아 안 간다. 확실히 남자들이 골다공증은 없는 모양이다. 무릎이 아프면 산에 못 다닐 텐데, 칼슘 챙겨 먹는 나보다 뼈와 관절이 더 튼튼하단 말인가? 아니면 정말 건강은 타고 나는 것인가? 건강염려증인 나는 건강보험도 예전에 들어두었다. 물론 영감 것까지. 그것도 몰래 든 것이다. 영감이 그런데 돈 쓰는 걸 싫어해서. 보험사는 다 사기꾼이라고 하는데 보험 들었다고 할 순 없었다. 생활비 쪼개서 30년을 넣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 아직은 건강해서 보험 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넣을 때는 큰돈을 힘들여 넣었는데 다 넣고 보니 세월이 지나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서 지금은 돈 가치가 하나도 없다. 그때는 1000만 원이면 웬만한 수술을 다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1억은 되어야 한다. 즉 가치가 10분의 1로 떨어졌다. 이래서 영감이 보험이 다 사기라고 하는 거였구나. 일리는 있어. 나는 괜히 들었나 하면서 보험증서를 몰래 꺼내 보았다. 그런데 영감이 등산 갔다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 왜 안 오지? 창밖을 내다보았다. 해가 다 졌는데도 영감이 안 오다니. 웬일이지? 이 시간이면 저녁상 차리라고 난리 칠 시간인데, 정말 귀찮아 죽겠네. 우리 영감은 절대 휴대폰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전화 받는 것조차도 귀찮아한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서 영감이 등산 갔다 오는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 벌써 어둑어둑하다. 그런데 산 아랫자락에 도착하니 우리 영감이 쓰러져 있었다.
“영감!!! 정신 차려요. 나는 영감을 흔들어 깨우려다가 퍼뜩 정신이 났다. 뇌졸중 같은 경우는 흔들면 안 되는 거지. 참. 바로 119에 전화를 했다. 몇 분 지나자 소방차와 대원들이 왔다. 그대로 우리는 근처 응급실로 갔다. 영감은 나무토막처럼 꼼짝을 안 했다. 그리고 전신사진을 찍으러 방사선실로 들어갔다. 한참 뒤에 의사가 불렀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뇌졸중으로 뇌혈관이 터져서 뇌출혈이 심하십니다. 뇌혈관이 터진 지는 적어도 한 달이 넘은 것 같은데요. 이 사진 좀 보세요. 피가 가득 고여 있죠? 그동안 증세가 있으셨을 텐데, 짐작 못 하셨나요? 말씀이 어눌하셨거나, 걸음걸이가 불편하셨거나, 수족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셨거나 뭐 기타 등등. 어쨌든 일각이 급합니다. 바로 수술해야 합니다. 보호자 서명이 필요합니다.”
나는 아들에게 전화할 겨를도 없이, 서명하고 바로 영감을 수술실로 보냈다. 수술실에 보내고 애들에게 전화했다. 애들이 달려왔다.
“엄마, 괜찮을 거예요. 잘 될 거예요.”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자책했다. 나만 약을 챙겨 먹는 게 아니었어. 먹기 싫다고 해도 억지로 챙겨 먹여야 했어. 애들 앞에서 울 수도 없고, 나 혼자 간병 하면 되니까 다 집에 가라고 했다. 수술이 끝나고 영감은 1달 꼬박 입원 생활을 했다. 그것도 1인실을 썼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못쓴다고 난리를 쳐서 방을 바꿨다.
“할멈, 보험 들어 둔 것 있지? 할멈 성격에 안 들었을 리가 없어. 뇌졸중, 뇌출혈 수술 보험금 얼마 나왔어?”
“1000만 원 나왔소.”
“아니, 그것밖에 안 나왔어? 1억은 나와야 하는 거 아냐? 보험금 많이 나왔을 거라 생각하고 특실 사용하고 있는데.”
“당신, 언제 나보고 보험 들라고 돈 준 적 있소?”
“아니, 없지. 달라고 해도 안 줬지. 보험사는 사기꾼이니까.”
“그런데, 1000만 원이라도 나왔으면 잘 된 거 아니우?”
“그건 또 아니지. 이 사기꾼들 돈은 실컷 미리 받아 다 돈놀이하고는, 줄 때는 돈 가치 다 떨어진 푼돈으로 갚는 거지.”
영감태기가 이런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 끝나서 경과가 좋다는 것을 확신했다.
“알았소. 영감. 다음엔 더 큰 보험금 나오는 보험을 새로 들 테니 보험료를 좀 내어 주구려.”
“뭐?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어?”
할 말이 없다. 이런 영감을 평생 수발하고 사는 내가 한심스럽다. 나도 할망구인데, 이런 영감태기를 한 달 넘게 혼자 병수발을 들자니, 내가 몸살이 나서 쓰러질 판이다. 드디어 영감이 퇴원하고 우리는 집에 왔다. 2주에 한 번 병원 가서 사진을 찍고 약을 타 오고, 몇 달 뒤는 1달에 한 번 병원 가서 사진 찍고 약을 타 오고, 근 1년을 그렇게 하니 의사가 이제 안 와도 된다고 했다. 그동안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그날 밤 내가 실족을 해서 발목을 삐끗해서 넘어졌다. 넘어지는데 뼈가 ‘우드득’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참고로 난 귀가 어두워서 보청기를 한다. 잘 때라 보청기를 뺀 상태인데도 뼈 부러지는 소리가 잘 들렸다. 나는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 기어 나와서 영감을 불렀다. 칠순이 지나고 우리는 각방을 쓴다.
“영감, 영감, 좀 와 보시오.”
그런데 이때 영감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몇 번이나 불렀더니 그제야 어슬렁거리며 나온다. “왜? 불렀어?”
“영감, 나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요. 병원 좀 데려다주시오.”
“넘어진 거야?”
“예. 방금 화장실 가려고 일어나다가 이불에 미끄러졌소.”
“그런 거라면, 기다려 봐.” 하고 나가더니 한참 만에 손에 파스를 사서 들어온다.
“파스가 아니라, 뼈가 부러졌다니까........”
“그 정도 미끄러진다고 뼈가 부러지지 않아. 한잠 푹 자면 가라앉을 거야.” 그러고는 다시 술 마시러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분노와 고통과 오한으로 온몸을 떨면서 기어서 119에 전화를 했다. 119 대원이 들 것을 갖고 왔다.
“보호자가 필요한데 지금 상태로 보아 술 취한 영감님이 보호자를 하시지는 못하겠고, 자녀분 없습니까?”
나는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고 한기는 들고,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되어 그 고통 중에 아들에게 전화했다. 나와 아들은 병원에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아들은 입원 수속 사인을 하고 병실을 잡았다. 그리고 응급의사는 지금 너무 다리가 부어서 바로 수술을 할 수 없다면서 부기 빠지는 약과 진통제를 링거에 꽂아서 놓고 수술날짜를 아들과 의논하여 잡았다.
그 시간에도 영감태기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김진미
나 70대 이순남, 오늘은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내 이야기를 하려 한다. 우리 친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독립운동가 가문으로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 하시느라 집안을 제대로 돌보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힘들게 고학하시고 어머니를 만나셨다. 즉 집안이 가난하여 부모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 할머니 역시 나라에 남편을 바치셨는데, 아들 며느리까지 잃으셨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꼬. 그런데다가 나라는 혹까지 남았으니, 송구할 따름이다. 나 역시 할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힘들게 고학을 하였다. 당시 가난하면서 공부 잘하는 학생은 사범학교에 진학하는 게 유일한 살길이어서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사범학교에 갔다. 지금으로 치자면 교육대학인 셈이다. 그때는 고등학교 과정으로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국민학교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이다. 나는 할머니의 은혜도 잊지 않고,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할아버지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어이없게 일찍 가신 부모님도 기억하려 한다. 가난해도 국민학교 교사를 하면서 할머니와 나는 오순도순 둘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께서 부르셨다.
“이순남 선생님,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지? 25살쯤 되었나?”
“네, 교장 선생님, 25살입니다.”
교장 선생님은 명함을 한 장 주면서 이번 주 일요일 1시 모 호텔커피숍으로 나가 보라고 한다.
이게 뭐지? 그래도 교장 선생님 소개인데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일요일 나갔다. 특별히 꾸밀 것도 없이 그냥 학교 출근하는 차림새로 약간 화장을 하고 나갔다. 앉아 있으려니 키 크고 늘씬하며 왠지 비싸 보이는 양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이순남 선생님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명함 주인이었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가족 호구조사를 하였다.
“저는 가족이 할머니와 저, 둘 뿐인데, 미스터 김은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우리 집은 대가족입니다. 부모님 외에 형제가 5, 막내 여동생이 하나 있죠. 아버지는 7남매 중 막내시고, 위로 큰댁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생존해 계십니다. 지금 형님이 혼인하시고 형수님과 조카 둘 있습니다. 나는 6남매 중 둘째입니다. 이번이 제 차례인 거죠. 제가 가야 셋째도 장가를 들 테고, 셋째는 사귀는 여자가 있는데, 내가 못 가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대단한 대가족이구나. 집안이 시끌벅적하겠어. 나는 외롭게 자라서인지 가족이 많은 집을 동경해 왔다. 그리고 이런 집에 가서 자식을 많이 낳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보고 따지지도 않고 우리는 곧 날짜를 잡았다. 결혼식은 회관을 빌려서 하고 주례는 교장 선생님께서 봐주셨다. 상견례나 기타 절차는 대충 생략하였다. 당시 우리는 조그만 방 하나를 월세를 내어 살았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남편은 월급봉투를 주지 않았다. 3개월이 지나서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 회사에서 월급을 안 주는 건가요? 왜 월급을 안 가져오나요?”
그런데 남편 대답이 가관이었다.
“아니, 나 혼자 버는 것도 아닌데 내가 월급을 갖다 줘야 해?”
말문이 막혔다. 그럼 나 혼자 벌어서 생활비를 쓰라는 건가? 아닌 게 아니라 남편은 직장에서 월급이 나보다도 훨씬 많은데 한 번도 가져다준 적이 없고, 매달 비싼 양복을 사 입거나 친구를 만난다며 양주값으로 탕진하고 있었다. 6개월이 지나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시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저기, 어머니, 당신 아드님께서 월급을 죄다 혼자 다 쓰고 생활비를 주지 않아요.”
그런데 모전자전이라더니, 아들과 똑같은 반응이다.
“아니? 우리 아들이 생활비를 꼭 내야 하니? 너도 벌잖니? 돈 버는 며느리를 왜 구했겠어? 집안도 한미한 가난한 집 처자를 그거 하나 보고 데려온 거 아냐. 그리고 남편 돈 안 가져다준다고 타박하고 시어미에게 일러바치는 건 대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참, 너 부모도 없는 고아였지. 하여튼 꼭 고아 표시를 내는구나.”
나는 피가 거꾸로 치솟아서 대들려다가 한마디만 더 했다간 돌아가신 부모님 외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욕되게 할 것 같아 참았다. 남편이 사치스러운 건 시댁 내력이었다. 시어머니는 지금도 매일같이 내가 세상에서 본 적도 없는 수많은 호화찬란한 비단 한복들과 패물들 외에 밍크코트도 색깔별로 다 갖고 있었다. 시동생들도 값비싼 양복을 입고 다녔다. 나는 옷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도 한눈에 봐도 비싼 것이 보였다. 근데 집은 단칸방 산다. 단칸방에서 8식구가 살다가 아주버님 분가하시고 이번에 내가 둘째를 분가시켜줘서 이제 이 단칸방에 6식구 산다. 막내 시누이는 아직 국민학생이었다. 나는 결심을 하였다. 요즘 같으면 이혼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리 세대는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나는 학교에 사직서를 넣었다. 교장 선생님이 놀라셨지만, 나는 교장 선생님과 말 섞기도 싫어서 그냥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임신을 하였다. 태교도 엉망일 텐데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가능한 마음을 다스리면서 출산준비를 하였다. 남편은 내가 사직서를 냈다는 사실에 꽤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하는 소리가 “이젠, 내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거야?” 하며 짜증을 냈다.
“나 아기도 가졌어. 출산준비도 해야 하고, 출산용품도 준비해야 해.”
남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월급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다 갖다 주진 않았다. 절반만 주었다. 나머지는 자기 용돈, 품위 유지비라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알뜰살뜰 생활이 몸에 배어서 그 생활비로 우리 아들 둘을 키우고 작지만 작은 아파트도 마련하였다. 시댁에는 명절 외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 시어머니께서는 돈 많은 부자 며느리를 보려고 그렇게 시동생들을 선을 보게 하시더니 하나같이 가난한 집 며느리를 얻어서 머리 아파하셨다. 당신 막내딸은 선을 200번도 넘게 보면서 가난하기 짝이 없고 동생들 많은 장남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 걸 인과응보라 하나? 아니면 욕심이 많으면 더 못 받는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시어머니의 소원과는 다르게 죄다 가난한 며느리와 사위를 얻으셨다. 우리 집도 그리 넉넉지가 못해서 아들 둘 겨우 공부시키고 작은 아파트를 벗어나지를 못한다. 나도 이제 아들들이 크니까 이왕이면 부자 며느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시어미인 건가? 요즘 애들은 선봐서 결혼하지도 않잖아? 다행히 큰 놈은 대학 가서 참한 색시를 사귀더니 졸업하고 결혼을 하였다. 며느리는 우리보다는 넉넉하고 사돈은 공무원이다. 나는 참한 색시를 데려온 것이 고마워서 아들이 더 예뻤다. 물론 며느리도 예쁘고, 우리 아들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들었을꼬?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사실 우리 아들은 직장이 변변치가 못해서 월급도 쥐꼬리고 내가 집도 전세 아파트밖에 구해주지 못했다. 그래도 며느리는 꼬박꼬박 문안 인사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우리 집 냉장고를 채워주었다. 이런 며느리가 고맙게도 첫 손자와 둘째 손녀까지 안겨다 주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큰아들 내외에게 집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남편 몰래 집을 잡혀서 대출을 내어 아들 전세를 탈출시켜 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그것을 알았다. 물론 집안이 시끄러웠다. 결국은 내가 다 갚기로 하고 나는 임시직 교사 자리를 구했다. 출산휴가를 받은 초등교사들 휴가 기간을 채워주는 교사 자리로 1년에 한 번씩 학교를 옮겨 다녔다. 그래도 20살 때 받은 교사자격증이 50대, 60대인 지금도 유효하여 내 생활에 보탬이 되어 주었다. 다시금 65세 정년 나이가 될 때까지 임시교사를 하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파트 평수도 넓히고 큰아들 아파트 빚도 다 갚았다. 물론 내가 다시 근무하자마자 남편은 사직서를 내고 반평생을 백수로 살았다. 이때까지는 다 살만했다면 했다. 그런데 둘째 놈이 걱정이다. 어려서는 큰 애보다 더 예쁘고 착하고 싹싹하여 기대가 컸건만. 둘째는 공부도 잘해서 없는 형편에 서울로 대학을 보냈는데, 졸업하자마자 큰 은행 서울 본점에 바로 취업도 했고, 앞날이 창창해 보였다. 그런데 그 은행 본사 근무라는 것이 그렇게 힘든 곳인 줄 미처 몰랐다. 둘째 놈은 격무에 시달려서 살이 빠져 해골처럼 직장을 다녔다. 대학 입학 때부터 서울에서 혼자 생활을 해서 내가 밥을 챙겨주지도 못했다. 아들은 점점 건강이 나빠지더니 어느 날 “엄마, 나 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 다니겠어요. 은행 그만두고 친구랑 사업할래요.”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둘째는 직장을 그만두고 친구랑 의류 사업을 했는데 자세히는 모르겠고, 외국에다 옷을 주문해서 국내에 파는 사업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게 여의치가 못해서 수익이 별로 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생활을 10년 넘게 하여 지금 이놈이 40이 넘었다. 물론 장가도 못 갔다. 이놈은 연애도 못 하고 사업도 시원찮고 하긴 직장이 없어 선도 볼 수가 없다. 나도 직장 없는 아들을 어디다 내놓기도 마뜩잖다. 어릴 때는 큰놈이 공부도 변변찮고 해서 걱정되더니만 큰놈은 알아서 색시도 구해오고 직장도 잘 다니는데, 둘째가 이렇게 속을 썩일 줄이야. 만 65세 이후로 학교도 못 나가고 해서 공인중개사 자격을 따려고 죽을 둥 살 둥 공부를 했다. 늙어서 공부하는 것이 건강에 얼마나 나쁜 것인지 내가 해보니 알겠다. 공인중개사 자격은 따기는 땄는데, 그만 한쪽 귀가 가고 구안와사가 와서 얼굴이 비뚤어졌다. 구안와사는 한의원에 다니면서 고쳤는데 귀는 영 고칠 수가 없다. 한쪽 귀만 들리는 형편이다. 나는 공인중개사 일을 하면서 부동산 재테크를 시작했다. 큰애는 집을 마련해줬는데, 둘째도 집은 장만해주고 싶다. 장가는 제가 알아서 가야 하는 거지. 내가 색시를 물어다 주지는 못한다. 둘째는 제 친구들이 기껏 여자를 소개해 줘도 한번 만나면 그걸로 끝이라고 한다. 도대체 이놈은 어떤 여자라야 마음에 드는 걸까? 눈이 높은 건지. 아니면 정말 여자에 관심 없는 그런 종류의 인간인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런 걸 물어볼 수도 없고. 제 인생 제가 사는 거지. 뭐. 내가 둘째도 아파트를 사주고 싶다고 하자 역시나 남편이 펄쩍 뛰었다.
“그걸 왜 우리가 사줘?”
“우리는 무슨.. 내가 벌어서 사주겠다는데, 당신이 언제 애들 뭐라도 해 준 거 있어요? 큰 애 아파트도 결국 내가 벌어서 사준 것이고. 지금 이 집도 내가 벌어서 샀잖아요? 당신은 30년 넘게 백수로 살면서 어쩜 그런 식으로 말을 해요?”
남편은 기분이 상했는지 휙 하고 나가 버린다. 자존심을 건드린 건가? 나도 모르겠다. 아니 어떻게 우리 시어머니는 아들 교육을 저딴 식으로 했는지 그게 더 궁금하다. 저렇게 오냐오냐해서 키워서 처자식 고생만 시키고.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속이 상해서 집안 대청소를 했다. 창고에 오래된 문서 상자가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그걸 좀 정리해야겠다. 남편은 그게 뭔지 이사 때마다 챙겨 다녔다. 오늘 남편 없을 때 내가 정리해서 다 없애버리리라. 먼지가 풀풀 나고 오래된 사진들과 일기 같은 것이 보였다. 그중에 한 장이 특이했는데, 무슨 무당이 굿을 하면서 써준 부적인 것 같은 종이에 시어머니 글씨로 개발새발 적혀 있었다.
둘째야, 어미가 곧 세상을 떠날 것 같구나. 그동안 네게 해 줄 말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비밀로 함구했구나. 실은 네가 8살 때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열이 펄펄 끓고, 헛소리까지 했다. 용한 병원, 한의원에서 진찰했지만, 아무 데서도 널 고치지 못하였다. 네 아버지는 애들도 6명이나 되는데, 하나쯤은 갈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하였다. 보통 반타작이면 평작이고 우리처럼 6명 다 살아있는 집이 어디 있냐고 하셨다. 나는 이를 악물고 너를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전국에서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갔다. 그 무당은 바로 아들이 아프다는 것을 알더라. 그러고는 “아들을 살리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상태여서 “당연하지요. 보살님. 살려만 주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무당이 “지금 너는 제법 너희 마을에서 유지 소리를 들으며 유복하게 살고 있구나. 하지만 네 아들을 살리면 너희 집 숟가락 몽둥이 하나도 남지 않고 거지가 될 터인데, 그래도 살리고 싶으냐?” 라고 물었다. 네 아버지를 데려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자식은 또 낳으면 된다고 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네, 보살님, 아들만 살려 주시면 전 재산도 아깝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뭐 이런저런 비방들을 일러주고, 술과 고기 세 가지를 차리고 정안수를 떠놓고 100일 동안 칠성기도를 드리라고 했다. 그리고 네 주변으로 고춧가루, 마늘을 뿌리고, 칼끝을 문밖 방향으로 내다 놓고, 하여튼 비방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큰 굿을 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네 열이 내리고 헛소리를 그치고 눈을 뜨더니 나보고 밥을 달라고 하더구나. 우리는 살았다 싶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정말로 네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고, 채권자들이 들이닥치고, 온 집안 살림에 차압 딱지가 붙었다. 유일하게 남은 건 내 다이아몬드 결혼반지 외에 패물들과 시집올 때 받은 밍크코트와 한복 여러 벌, 네 아버지 양복 몇 벌만 남았다. 그 이후로도 네 아버지는 돈을 거의 벌지 못하셨고, 나는 내 다이아몬드 반지를 팔아서 단칸방을 얻어 우리 8식구 살았다. 너도 장가갈 때까지 살던 그 집이다. 네가 무사히 커서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나는 걱정이 되어서 내가 차려입을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옷에 밍크코트를 입고 사단장, 여단장을 직접 만나러 갔다. 그리고 널 빼달라고 했다. 빼주기만 하면 사례를 크게 할 것처럼 굴었다. 그랬더니 이등병인 너를 바로 빼주더구나. 그 이후로는 갈 필요가 없어서 안 갔다. 보복하지는 않더구나. 자기들이 부정을 저질렀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어쨌든 너는 군필엔 문제가 없다. 취직도 잘했고, 그리고 그 용한 무당이 내게 해준 말이 하나 더 있는데, 전 재산으로 네 수명은 연장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연장하려면 색시를 잘 얻어야 한다고 했다. 혈통 좋은 가문의 처녀로 사주에 물이 많은 여자를 찾으라고 했다. 네가 불구덩이에 다 타 죽어가는 나무라서 물이 태평양처럼 많은 처녀를 찾아야 연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식도 많이 낳으면 또 기가 빠진다고 가능하면 자식도 많이 낳지 말고, 돈 버는 일도 가능한,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네가 어릴 때부터 주변의 딸 있는 집, 조카 있는 집 온 동네를 수소문하다가 20여 년 만에 네 색싯감을 찾았다. 네 아버지 친구의 형님이 교장 선생님인데 그 교장 선생님이 근무하는 학교에 독립운동가 후손인 처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그 처녀 사주를 보니 사주 전체가 물이더구나. 드디어 네 색싯감을 찾았다 싶어 나는 그 교장에게 직접 찾아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례를 다 했다. 몇 번 찾아가니 그 교장 선생님이 너랑 약속을 잡아 주셨더구나. 나는 결혼이 성사되고 나서 또 사례했다. 나는 역시 20년을 찾아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만족했다. 아니나 다를까 네 색시는 돈도 잘 벌고, 살림도 잘 살고, 손자를 둘이나 낳아 주었다. 그래도 나는 손자보다도 네가 더 중요해서 손자도 둘이나 낳을 필요가 없었는데... 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네 수명이 줄까 봐 네 자식들을 별로 예뻐하지도 않았다. 앞으로도 가능한 돈 벌러 나가지 말고, 몸 아끼고, 자식들에게 돈 쓰지 말고, 돈 아끼고 조심조심 살아라. 그리고 내가 평생 어떤 심정으로 널 지켰는지를 부디 알아다오.
나는 머리가 아뜩해졌다. 남편 수명연장 대가로 내가 선택되었고, 당대인 나도 모자라 우리 둘째까지 업보를 물려받았단 말인가? 그런 나를 왜 시어머니와 남편은 대접은커녕 그렇게 박대를 한 거지? 업고 다녀도 시원찮을 판에, 자격지심인가? 그렇다면 남편이 죽어야 우리 둘째가 운이 열리는 건가? 이 남편이 온 가족의 운을 다 빼앗아 자기 수명으로 쓰는 거 아냐? 내 인생은 이렇게 피 빨렸어도 내 자식은 그렇게 되도록 할 순 없지. 어머니 당신이 당신 아들 살리려고 날 이용했다면 나도 내 자식을 위해서 당신 아들을 제물로 바치겠어요.
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서 둘째 아들 삶이 평탄해지는 굿을 의뢰했다. 그리고 자식들 수명을 연장하는 대가로 남편 수명을 걸었다.
김진미
나는 송다은, 20대 중반, 얼마 전 학원에 취업 하여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기업체에 이력서는 여러 차례 넣었지만 꽃다운 나이인데도 오라는 곳이 없어서 우선 학원에서 애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영문과 출신이 아니라서 급여도 적다. 초등부니까 1시부터 6시까지 근무한다. 주 5일 일일 5시간 근무에 80만 원이라. 그것도 엄마 친구가 학원장이라서 들어간 것이다. 요즘은 이런 곳도 연줄이 없으면 구하기도 쉽지 않다. 사범대 출신도 아니고 학부만 졸업하여서 교직자격증도 없어서 남들 다 한다는 임용고시도 볼 수 없다. 교직자격증이 있다고 다 교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임용고시도 너무 붙기 어려워서 4수, 5수는 기본이고 그것도 국어, 영어, 수학과 같은 주요과목이나 뽑지 그 외, 기타 과목은 아예 뽑질 않아서 고시생들도 몇만대 일, 몇십 만대 일의 확률로 시험을 보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아예 해당 사항이 없어서 그냥 엄마의 연줄로 팔자 좋게 학원으로 들어갔다. 하루에 5시간 일하고 이 정도라도 버는 게 어디냐 싶어서 감사하고 다니고 있다. 1시 수업은 7세, 8세 반, 2시 수업은 9-10세 반, 3시 수업은 11세 즉 4학년 반, 4시 수업은 5학년 반, 5시 수업은 6학년 반이다.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분리되어 있다. 저학년은 주로 영어 노래를 많이 부르는데, 음원을 들을래? 아니면 선생님이 라이브로 부를까? 나는 음원을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애들은 내 생목소리를 원했다. 음, 거의 음치 수준인데, 괜히 말했나 싶었다. 할 수 없이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어린아이들이라서 그런지 개의치 않고 그런 노래를 좋아라고 했다. 그래서 신이 나서 더 크게 불렀는데, 애들이 줄곧 잘 따라와 줘서 매일 노래 하나씩 배워갔다. 나는 꼭 엄마, 아빠 앞에서 부르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마 저학년 애들은 말을 잘 듣는다. 문제는 5학년인데.... 여기만 그런 건지, 다른 학원도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큰 애들은 특히 남자애들은 싸움박질을 한다. 학원에서. 수업 중이건 말건 상관하지를 않는다. 학교보다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심지어 뺨까지 때리는 일이 생겼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원장님께 달려갔다.
“폭력사건이 생겼어요. 원장님,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하나요?”
원장님은 이런 일을 많이 겪었는지 아무렇지 않게 그 학생들을 부르더니 뭐라고 하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왜냐면 나는 나머지 애들과 수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이 슈퍼마켓에 가서 아이스바를 하나씩 사서 물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수업에 들어왔다. 나는 기가 막혔으나 수업을 마치고 그 애들에게 다짐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 얼굴을 때리는 것은 나쁜 짓이야. 좋게 말로 해결을 하던가, 선생님이나 어른에게 중재를 요청해야지.”
애들은 듣는 시늉을 하더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집에 갔다. 나는 다음 수업 때문에 더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6학년 수업이라 예비중학교 영어를 한다. 학부모들은 당연히 학원에서 미리 가르칠 것을 요구한다. 학원에서 미리 다 배우면 학교에서는 뭘 배우나? 학교에선 수업시간에 애들이 집중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학원에서도 신참인데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고참들과 학교 교사들은 애들을 어떻게 가르치지? 학교와 학원은 동시에 존재해도 되는 것인가? 그러고 보면 외국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는 학원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학교수업만으로도 학업 성취율이 매우 높다고 하던데, 우리나라는 애들을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에서 살게 하고 심지어는 자정까지도 학원에서 애들이 공부한다. 고교생의 경우,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수업한다. 휴일도 없이. 휴일은 논술이다 뭐다 할 과목이 많다. 나는 강남 8학군 출신도 아니고, 여기도 강남이 아니다. 지방은 어떨까? 과연 서울 명문대학에는 강남애들이 대부분인 건가? 그렇다면 저렇게 학원 산업이 번창하는 것도 막을 수도 없겠다. 고생한 만큼 효과를 보는 것이니까. 그런데 지방 학생들은 서울 명문대를 갈 수 없는 것인가? 이런 일을 대비해서 지방의 농, 어촌 특별 전형이라는 게 생겼다고 한다. 그러면 아예 면 소재지와 같은 깡촌 아이들은 그렇다 치면, 광역시와 소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러면 명문대를 못 가는 건가? 호구조사를 안 해봐서 그것도 잘 모르겠지만 찾아보면 그런 조사 자료가 있을 수는 있겠지. 그리고 요즘 집안 좋고, 힘 있고, 재력 있는 집 애들은 다, 수시로 그냥 입학시킨다는 게 뜬소문이 아니라는 게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부모 잘 만난 집이 아닌 지방 학생들은 죽도록 고생만 하고 중하위권 대학만 가야 하는 시절이 되었다. 차라리 20세기 때는 가난한 집에서도 명문대를 가고, 고시라는 제도를 통해서 법관도 되고, 공부를 잘해서 의대를 들어가서 의사도 되고 했는데, 이제는 돈과 권력이 있는 집 애들만 명문대를 가고, 의사도, 법관도 의전원이니 로스쿨이니 뭐니 해서 능력자 집안 출신만 그런 직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정말 대물림되는 세상으로 변모하여,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옛말이 되었다. 대체 수시전형, 의전원, 치전원, 로스쿨과 같은 제도는 왜 들어 온 것인가? 권력가, 재력가들이 자기 자식들 편하게 명문대 보내려고 수시전형과 의전원, 치전원, 로스쿨과 같은 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입학사정관 역시 그런 자녀들을 선발하기 위해 만든 제도처럼 보인다. 우리나라처럼 평가를 부정직하게 하는 나라에서는 이런 제도들이 적합하지 않다.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해서 가뜩이나 학교수업이 파행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수시전형을 하니 줄어든 과목에서 더 줄어들어 수시전형에 필요한 과목만 골라 배운다. 그러니 국어, 영어, 수학 외의 소위 기타 과목은 더더욱 소외되고 시험을 치지 않는 과목은 거의 제외되는 형편이다. 그러니 임용고시를 보고 싶어도 그 과목 교사를 점점 더 뽑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 부모 세대들은 인문계도 물리, 화학, 지구과학을 다 배웠다. 자연계도 지리, 세계사, 일반사회를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세대들은 거의 배운 게 없고, 그것도 수시에 필요한 과목만 골라서 배우니 기본 교양이 너무 부족하고, 대학에 가서도 다시 기초 수학, 과학, 인문학 과목들을 기초교양으로 다시 배워야 하는 형편이다. 우리와 우리 후배들은 많이 무식하다. 부모님 세대 이상 되시는 분들은 학원수업도 과외도 받지 않았음에도 우리보다 훨씬 유식하시다. 요즘 세대들이 어른 세대보다 그나마 낫다고 주장할 수 있는 과목은 영어와 컴퓨터뿐이다. 영어는 외국 나가서 영어 연수를 받아 와서 그런 것이고, 컴퓨터와 IT와 같은 기계제품은 젊은이들이 금방 숙지를 하는 편이다. 해마다 스마트폰을 바꾸고, 컴퓨터를 바꾼다. 잘하는 게 그것뿐이니까. 게임을 해야 하니까. 게임 중독, 스마트폰 중독 현상도 심각하다. 학교에서는 아예 스마트폰을 압수한다. 수업 마치고 돌려준다. 그래도 그게 무슨 소용인가. 애들은 헌 스마트폰을 제출하고 새 스마트폰을 수업시간 내내 사용한다. 끼리끼리 뭔가를 주고받고 한다. 교사들도 알고도 모른 척할 때가 많다고 한다. 어차피 수업내용은 다 학원에서 배운다. 학교는 친구들과 스마트폰으로 교제하는 곳으로 전락하였다. 대학은 집안 좋은 애들이 명문대를 간다. 평범한 학생들은 적당한 곳으로 간다. 어차피 대학 정원이 학생 수보다 더 많은 세상이니 돈만 있으면 후진 학교라도 갈 수는 있다. 아무 곳이라도 가기만 할 거면 그렇게 돈 들여 학원 따위 가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오늘도 근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엄마, 배고파, 밥 줘.”
엄마는 왠지 비웃는 표정으로 “네가 차려 먹어라.”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언니가 나와서 빈정거렸다. “너 되게 잘난 척 많이 해놨던데, 네 일기 말이야. 내가 아까 다 훔쳐봤거든.”
“뭐라고? 너 미쳤냐?”
“내가 엄마한테도 다 보여줬지롱.”
“거기 안 서.” 나는 언니 머리채를 잡고 흔들고 싶었다.
“꼴값 좀 그만 떨어. 잘난 척도 그만하시지. 너는 네 실력으로 대학 갔냐? 엄마 아버지 힘으로 그나마 서울에 4년제도 겨우 간 거야. 네가 수시전형, 입학사정관제도의 대표적인 수혜자야, 이것아.”
김진미
나는 50대, 한미선, 친정은 잘 살고, 시댁은 그냥 산다. 나는 대학 들어가자마자 선을 봤다. 당연히 집에서 원하는 사윗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졸업할 때까지 계속 선을 봤다. 결국 20대 중반 꽃다운 나이에 졸업하자마자 선본 남자 중 한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그 사람은 의사였고, 우리 집에서 아파트와 병원을 차려주는 조건이었다. 나는 평범한 지방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 남편은 서울 유명 의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런 사람들은 다 돈 많은 여자들과 선을 본다고 했다. 남편도 그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우리 둘 다 부산 사람이라 부산 동래구에 50평대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집 근처에 병원을 열었다. 남편은 소아과 원장이면서 병원장이 되었다. 친정 부모님은 종합병원을 차려주셨다. 남편은 병원 경영과 진료를 도맡아 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신혼여행 가서 허니문 베이비를 얻었다. 결혼하자마자 애가 생겨서 컨디션도 나쁘고 신혼 재미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입덧과 함께 출산준비를 하는 몸이 되었다. 내 대학 동기동창들은 저마다 연애를 하였는데, 졸업하고 바로 다 결혼을 하였다. 우리 세대는 결혼을 20대 중반, 늦어도 28살 이내에 해야 하는 줄 알았다. 29살은 아홉수라 안 되고 30이 넘으면 노처녀라 여자 취급을 못 받았다. 물론 요즘 애들이 들으면 분개하겠지만, 그땐 다 그랬다. 우리 동기 중 20대에 시집을 못 간 애는 한 명뿐이다. 그 애는 지금도 부모님과 함께 산다. 시집 못 간 친구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연애결혼을 한 친구들은 대학교 캠퍼스 커플이다. 즉 남편들도 다 지방대 출신이란 거다. 다 고만고만 사는데, 나는 그래도 우리 남편이 제일 자랑스러워서 동창 모임에 갈 때마다 좀 우쭐했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남편 그릇이 내 그릇을 만들어주는 거니깐. 나는 품위 유지를 위해 옷과 가방, 신발을 다 해외명품으로 세팅해서 나간다. 그래도 몇천만 원짜리를 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몇백만 원대 수준으로 하고 다닌다. 남편의 체면도 있고, 지위도 있는데, 후줄근하게 다닐 순 없잖은가? 여자애들끼리 모이면 당연히 남편, 시댁 이야기를 한다. 시어머니 때문에 못 살겠다는 둥, 시누이 꼴 보기 싫어 죽겠다는 둥 결혼 후 5년 이내는 주로 시댁 흉을 보다가, 그 이후부터는 애들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유치원 가고 나서부터는 애들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는 또 자랑스럽게도 아들을 연달아 2년 터울로 낳고 막내딸을 낳았다. 친구들은 각자 아들만 둘, 아니면 딸만 둘을 낳았다. 아들, 딸 다 있는 집은 역시 우리 집뿐이다. 그것도 우쭐했다. 나는 아들, 딸 다 있거든, 그리고 우리 남편이 너희네 남편보다 훨씬 잘났거든. 이런 심정으로 동창회에 다녔다. 친구들은 명품은 고사하고 몇십만 원짜리 옷, 가방도 들고 오지 않았다. 다 몇만 원짜리를 입고, 신고, 메고 다녔다. 이런, 수준이 안 맞아서 모임에 나가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 모임만 나갈까? 의사회 모임, 의사부인회 모임에도 나가는데, 확실히 그쪽과는 격이 많이 차이가 난다. 나는 이 동창 모임이 일 년에 한 번이라 생각 끝에 계속 나가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 애들이 자라고, 성적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아들도 공부를 잘한다. 딸도 잘한다. 그런데 친구 애들도 공부를 잘하는 모양이다. 전교 회장을 한 대나 뭐래나. 드디어 큰 애들이 고3이 되었다. 다들 비슷하게 결혼을 해서 애들도 나이가 얼추 같다. 다들 고3 수험생을 둔 터라 비장미가 넘친다. 친구 아들들과 우리 아들은 모두 다 의대에 원서를 넣었다. 전국에 수시로 최대로 지원하고 정시로 가, 나, 다군 다 넣었다. 날짜가 지나자 합격 발표가 나기 시작했다. 내 친구 아들들은 모두 수시로 의대에 다 붙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소식이 없다. 후에 정시 발표까지 났는데도 우리 아들은 합격한 곳이 없었다. 모두 의대 합격생 엄마들이 되어 기쁜 마음으로 동창 모임에 가는 모양이다. 나는 동창 모임 한 지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불참하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가지 않는다. 우리 아들이 3수를 했는데도 계속 불합격이다. 아버지가 의사고 병원장인데 그냥 물려받으면 되는데, 의대만 들어가면 되는데, 도무지 붙지를 못한다. 이제 친구들에게 둘째 아들들이 의대를 또 지원해서 다 붙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아들 둘 있는 집이 또 형제가 나란히 의대를 다닌다고? 학비가 만만찮을 텐데, 집 형편에 애 둘을 의대에 그것도 부산도 아니고, 타 지역인데 생활비까지 들 텐데, 보낼 능력은 되는 거야? 알고 보니 아들들이 효자라서 부모님께 폐 끼치지 않으려고 서울에 있는 의대를 안 가고 지방의대를 전액 장학생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기숙사까지 무료로. 심장이 더 상했다. 하긴 의사는 자격증만 있으면 의사니까 꼭 서울 명문대 출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겠지. 아니, 차라리 집안 배경이 출중하지 못하면 장학생으로 눈에 띄게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출세에는 더 도움이 되는 것이 맞다.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처세까지 뛰어난 아들들이다. 항상 내가 제일 잘 났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자식 문제만큼은 기가 죽는구나. 남편도 여간 속상해하는 게 아니다. 남편은 이제 내 머리가 나빠서 아들이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냐고 타박을 한다. 아들은 엄마 머리를 닮는다며, 나보고 공부 잘하지 못했다고 따진다. 나는 서러웠다. 그래, 나 공부 못 해서 지방 4년제밖에 못 나왔다. 당신은 잘 나서 서울 명문 의대 갔다. 그래도 당신이 아무리 똑똑해도 나 안 만났으면 병원장 하고 있을 수 있냐고 대들었다. 그랬더니, 나 아니라도 다른 부잣집 여자랑 선봐서 결혼했을 테니 병원장 할 수 있다고 항변했다. 그러고는 그때 이왕이면 학벌도 좋은 부잣집 여자를 만났어야 했는데... 라며 내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았다. 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하필 삼수생 아들이 들어왔다. 우리는 싸움을 멈추고 눈치를 보았다. 아들은 문을 ‘쾅’하고 닫고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만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는다. 둘째도 올해 대학 지원을 했는데, 이놈도 수시건 정시건 오라는 데가 없다. 물론 의대에 지원했다. 둘 중에 한 놈이라도 붙어서 제 아버지 병원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한 놈도 붙지를 못하니, 그렇다고 아예 공부를 못 했으면 의대에 지원을 안 하고 포기를 했을 테지만 공부를 잘했는데, 왜 합격을 못 하는지 우리 부부는 심장이 상하다 못해 병이 났다. 나도 화병이 깊어서 의사회 모임이건 의사부인회 모임이건 일절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이제 막내딸이 대학입시생이 되었다. 오빠들은 하나같이 삼수, 오수를 하고 있다. 될 때까지 한다. 무조건 의사가 되어야 한다. 아들들은 좀비처럼 재수, 아니 삼수, 오수학원을 다닌다. 군대는 어떻게 손을 써서 빼주었다. 공부를 시켜야 하니까. 그것도 능력이다. 딸은 아들 때문에 제대로 신경 써 주지도 못했다. 얘도 오빠들에 치여서 그러려니 한다. 딸은 오빠처럼 공부를 못해서 아예 의대에 지원하지도 않았다. 그냥 가고 싶은데 가라고 했다. 남편도 딸은 신경 쓰지 않았다. 딸에게 굳이 의사 시키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험한 꼴을 너무 많이 보고, 의대 생활이 만만찮다고 고운 딸이 겪기에는 힘든 생활이라고 딸은 공주처럼 키워서 왕자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했다. 딸은 운이 좋은 건지 서울 중위권 대학에 붙었다. 셋 중에 제일 먼저 대학에 들어간 셈이다. 우리는 딸 학교 근처에 방범이 잘되는지, 교통은 편리한지, 주변 환경, 시설을 고려해서 오피스텔을 얻어 주었다. 그리고 살림살이로 방을 채워주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남편과 둘이 내려오면서 아무리 그래도 어린 딸아이를 혼자 객지에 두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편과 의논해서 친정엄마를 딸 오피스텔로 보내기로 했다. 물론 생활비를 드리고, 그러자 친정아버지께서는 “나는 어쩌라고?” 라며 불평을 하셨지만, 내가 설득했다.
“아버지, 한 일 년만 봐주세요. 일 년쯤 지나면 적응이 되어서 괜찮을 거예요. 그때까지만 엄마 좀 보내줘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러면 나도 같이 가련다. 나도 네 엄마 없으면 못살아, 이것아.”
“그럼, 아버지 집은 어쩌고요? 비워 두시게요? 집도 큰데, 큰 집을 오래 비우면 집이 상하고 도둑들 손 탈 수도 있어요.”
결국, 실랑이 끝에 엄마가 못 가시게 되었다. 나도 내 생각만 한 것이다. 나는 아들 둘 신경 쓰느라 딸은 뒷전인데,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집에 온다고 한다.
“왜? 아직 학기 중인데, 지금 내려와도 되는 거야?” 내심 무슨 일 있나 걱정이 되었다. 남편도 신경 쓰이는 눈치다. 나는 아들 둘 때문에 심장이 상하고 화병이 깊어져서 이제 조그마한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남편 눈치를 보게 된다. 혹시 딸아이가 사고라도 쳐서 정말 나를 잡는 것은 아니겠지? 딸까지 일 저지르면 나는 남편에게 쫓겨날 거야. 온갖 해괴망측한 상상을 하면서 딸아이를 맞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웬 남자를 데리고 왔다. 설마? 정말 사고 친 거 아냐? 나는 온몸이 굳었다. 남편도 얼굴이 뻣뻣해졌다.
“아버지, 엄마, 이쪽은 서울의대 내과 레지던트 윤혁필 씨예요.”
“안녕하십니까? 장인 어르신. 윤혁필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감히 당신 따님을 좀 빨리 데려가야 할 짓을 저질러서 송구스럽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나는 아직도 긴장해서 목소리가 떨렸다.
“예. 따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따님이 아직 학생인데, 이렇게 되어 정말 면목 없습니다만, 제가 나이도 있고, 그만 다른 놈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요. 서둘렀습니다. 아, 물론, 공부는 계속 시키겠습니다. 졸업은 꼭 시키겠습니다.”
남편과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는 와중에 아들 둘이 학원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이놈들도 제 여동생을 곧 내줘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게다가 서울대 레지던트라 하니 기가 죽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 병원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친 모양인지, 딸과 사위 후보가 나가자마자 막 퍼붓기 시작했다.
“아버지, 설마 저 자식에게 우리 병원을 내주진 않으시겠죠?”
“그게 무슨 말이냐? 아직 결혼도 안 했다.”
“아니, 결혼할 거잖아요? 아버지 병원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 자식에게 넘기실 거예요?”
“우물가에서 숭늉 찾지 마라. 의대부터 들어가고 말해라. 나도 이제 지쳤다. 아들이 안되면 사위라도 물려줘야지. 그럼 생판 남에게 넘겨주랴? 이제 나도 한시름 놨다. 생각지도 않은 딸이 효도하네. 제 오라비들보다 훨씬 나아. 당신, 수고했소. 당신 닮은 능력 있는 딸 낳아 줘서 고맙소. 역시 딸은 의사 남편을 얻는 것이 맞는거구만. 우하하하. 암, 사위는 의사 사위가 최고지. 그럼, 그렇고말고. 하하하.”
김진미
‘가고파’ 이은상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하여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어울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웃고 지내고자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내 고향은 남쪽 바닷가이다. 고향 떠난 지가 30년이 지났다. 저 시처럼, 노래처럼 눈을 감으면 고향 바다가 보이고 들린다. 그러면 고향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묻겠지? 하하하. 이곳에 온 지 30년, 올 때는 20살이었는데, 지금 50살이 되었다. 처음엔 적응도 못 하고 선임에게 매일 구박이나 받고, 기합은 물론이거니와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다. 기계공장도 처음이라 기초 기술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래도 꼼꼼한 편이라 차근차근 배워서 곧잘 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도 능숙해지고 점차 내가 선임이 되고, 후배들도 점점 나를 많이 따르게 되었다. 나는 굳이 내가 당했던 것처럼 후배들을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에 후배들이 날 잘 따랐던 것 같다. 누구나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생활하려면 불편함이 따르는 법이다. 3년 전에 나랑 꼭 닮은 녀석이 새로 들어왔는데, 어리숙한 것이 적응을 못 해서 구박을 받다 못해 왕따를 당하는 녀석이 있다. 나는 30년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그 녀석을 챙겼다. 최고참이 감싸니까 그 이상의 괴롭힘을 받지 않는 것 같더라. 나도 예전에 이렇게 챙겨주는 선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혼자 구박을 다 감수했다. 참 혹독한 시절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악질 선임들이 점점 나가고 이제 내가 제일 어른으로 대접받는다. 나는 매일 일찍 일어나서 근무하고 정확한 시간에 식사하고, 심지어 화장실 가는 시간도 정해서 간다. 동료들과 정해진 시간에 운동도 한다. 시계처럼 일상이 흐른다. 나는 공장에서 기계를 제작하는 일을 한다. 단순노동으로 일이 지겹기는 하다. 그런 세월이 벌써 30년, 이제 곧 나갈 때가 되었다. 곧 일이 끝나는데, 나갈 일이 오히려 더 걱정이다. 나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일할 곳이 있을까? 기계조립 기술을 써먹을 수나 있을까? 젊은이도 아니고 다 늙어서 들어갈 곳을 찾을 수나 있을지. 여기서는 대접받고 있는데, 밖에서 이렇게 해 줄 곳이 있을까? 그리고 내가 나가면 나 닮은 저 불쌍한 녀석은 누가 챙겨주나? 다시 구박받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하지만 이제 그래도 여기서 나가면 고향에 갈 수 있다. 그런데 고향은 얼마나 변했을까? 내가 어릴 적 그 시절 그 동무들이 그대로 고향에 있을까? 매일같이 고향을 그리면서 잠을 잔다. 그리고 꿈에서 고향 바다를 보고, 파도 소리를 듣고 그 시절 동무들과 뛰어논다. 그리고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날 부르신다. 잠에서 깬다. 꿈이다. 어머니도 파도도 동무들도 다 사라졌다. 나는 매일같이 고향과 어머니와 동무들을 꿈에서 본다. 그리도 드디어 내일이면 고향 바다에 갈 수 있다.
고향에 돌아왔다. 30년 만에 드디어 왔구나. 바다는 그대로고, 우리 집도 예전 그대로이구나. 그런데,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물론 알고 있었지만, 우리 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동무들도 거의 남지 않았구나. 다 타 지역으로 다 자기 자식들과 함께 떠났구나. 그대로 남아서 날 기다려 주는 건 변치 않은 고향 바다뿐이구나. 그래, 바다야. 너 또한 그리웠다. 이 바다 내음도 이 시원한 파도 소리도 매일 꿈에서 보던 그대로구나. 너도 내가 보고 싶었느냐? 바다 외에는 내가 알던 모습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알던 사람들도 거의 없고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고향인데, 이렇게 생경스러울 수가.
“게 누구시오?”
나는 놀라서 뒤돌아본다. 웬 노인이 날 보고 누구냐고 한다.
“네, 저는 30년 전에 이 마을에 살던 최부석이라고 합니다. 어르신은 뉘신지요?”
“최부석이? 아니, 자네가 부석이란 말인가? 왜 모르겠어? 자네 이제야 돌아왔군. 자네 집에 그런 일 있고, 30년을 살다 온 겐가? 고생 많았네. 하긴 온 마을이 흉흉하였지. 그때 마을 사람들도 많이 떠났네. 자네 일은 지금도 마음이 아프네. 자네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자네 어머니를 폭행해서. 그걸 자네가 참다가 아버지를 밀친 것이 뇌진탕으로 그만 가셨었지. 그리고 자네가 자수하려던 걸 자네 모친이 사고사로 위장시켜 어떻게든 자넬 구하려다 들키는 바람에 괘씸죄로 형량이 많이 늘었지. 그래도 30년은 너무 했어. 형량도 사람 배경 따지면서 내리는 모양이야. 그때 자네 교도소 들어간 걸 본 뒤로 자네 어머니도 화병으로 곧 돌아가셨지. 임종도 못 하고 자네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군.”
김진미
나는 정경신, 40대 중반, 앞서 팔자 타령하던 강미선이와 걔 자식들에게 밥 사준 장본인이다.
알아보니 복권 당첨자들은 다들 입 꼭 닫고 직장 관두고 해외 이민을 하거나, 아니면 어쨌든 다들 입 닫고, 집 장만을 하고, 재테크를 하고, 당첨 사실을 가족들에게도 비밀에 부친다고 한다. 그런 부류 외에는 그야말로 온 가족이 방탕 생활로 돈은 탕진하고, 이혼하고, 자식들과도 원수로 지내는 그런 부류, 이 둘로 나뉜다고 한다. 나는 아직 직장을 다니고 있고, 집은 큰 평수, 유명한 메이커 새 아파트로 바꿨다. 그것 말고는 딸과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부모님과 형제자매에게 밥 사고, 미선이는 예전부터 내가 예뻐해서 따로 불러서 밥을 먹였다. 미선이는 시집을 잘 못 갔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럴 말을 할 형편은 아니다. 미선이는 단지 신랑이 좀 무능하다는 것 외에는 착한 신랑인 것을 주변 모든 사람이 알지만, 그래도 미선이가 아까운 것이 미선이는 대학교 캠퍼스 여왕으로 대학교 교지 표지 모델이었다. 그만큼 예쁘고, 따르는 남학생들도 많았는데, 입학하자마자 제 신랑에게 거의 스토킹을 당하다시피 하여 8년인가 9년 따라다닌 그 남자와 결혼해서 지금까지 아등바등 산다. 다른 여자애들처럼 조금만 머리를 굴렸더라면 더 좋은 조건의 남자랑 결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 스토킹은 무서운 것이다. 소름 쫙!!! 남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미선이의 경우와 반대의 경우이긴 하지만, 나 역시 대학 입학하자마자 어린이대공원에 놀러 갔다가 거기서 아르바이트하던 남학생에게 한눈에 반해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서로 마음에 끌렸는지, 그때부터 사귀기 시작하여 내가 졸업하고, 그 남자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서 내가 서둘러 결혼을 했다. 즉 내가 프로포즈하고 결혼한 것이다. 이런 옛말이 있다. 여자는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는 쪽이 행복하다고, 여자는 사랑을 받아야 하는 생물이라 사랑을 못 받으면 시들어 죽는다고.... 나는 자아와 고집이 강해서 다른 사람의 말은 절대 듣지 않는다. 그 말도 무시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 그렇게 결혼한 남편은 신혼 첫 달부터 생활비를 70만 원을 주었다. 입사 초에는 이 정도밖에 주지 않는다면서. 그 말을 믿었다. 남편은 삼성전자 근무했다. 아무리 20년 전이라지만 대 삼성전자의 대졸 신입 월급이 70만 원이라는 걸 믿은 사람은 나와 우리 친정 부모님뿐일 것이다. 즉 미선이보다 더 가난하게 손톱여물을 썰면서 살았다. 나도 건강해선지, 운이 좋은 건지, 허니문베이비로 딸을 낳았는데, 남편은 임신했다는 말에 눈곱만큼도 기뻐하지 않았다. 나는 섭섭했다. 그리고 10달 후 거대한 4.2 킬로그램의 딸아이를 난산 끝에 제왕절개로 낳았다. 애까지 있는데도 여전히 월급은 70만 원만 주었다. 그 생활비를 쪼개서 애도 키우고 살림을 잘 살았다. 외식도 한 번 못 하고, 옷도 한 번도 못 사 입고, 화장도 못 하고, 하긴 애 키우는 여편네가 화장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8년을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중국으로 파견 근무를 한다고 했다. 나는 중국 가면 월급이 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좀 는다고 하길래 내가 중국 가라고 했다. 애가 이제 학교도 들어갔는데 살기 너무 어려웠다. 남편은 신이 나서 “그래?” 하더니 바로 짐을 싸서 중국으로 날아갔다. 중국 갈 때 삼성전자를 관두고 삼성 하청 회사로 승진해서 갔다. 나는 그것도 잘했다고 생각했다. 70만 원 주는 삼성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중국 간 이후로 나와 딸 둘이 사는데, 월급은 여전히 100만 원밖에 보내지 않았다. 회사를 옮겨도 그 정도밖에 안 주는 건가? 그런데,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친정 부모님께 돈을 융통해서 딸과 북경행 비행기 편도를 사서 남편을 찾아갔다.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날 보고
“아! 사모님 직접 오셨군요. 이런 멋진 사모님을 두고 왜 과장님은......”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바로 연락해서 모셔 오겠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서 남편이란 작자가 왔다. 나는 거의 1년 만에 보는 얼굴이다. 딸도 아빠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다. 하긴 집에 있을 때도 늘 밤늦게 와서 애 자는 얼굴밖에 보지 않은 사람이다. 일 년 만에 만났는데, 한다는 첫마디가
“왜 왔어?”
“당신이 안 오니까 내가 왔지. 애도 당신 얼굴을 잊어먹을까 봐 데려왔다.”
그러더니 북경에 유명한 북경 오리집에 데려가더니 북경 오리를 통으로 시켰다. 나는 북경 오리를 처음 먹어봤다. 그것도 북경에서. 저녁을 다 먹고 나니 나보고 비행기 표는 있냐고 물었다. 나는 편도로 오는 것만 끊어서 가는 것은 없다고 했더니 바로 비행기 표를 끊어주었다. 집에 가라고. 여기 있을 데가 없다고. 아니 오자마자 가라니 그게 무슨 경우냐고 했더니 남편 일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나는 오리만 먹고 다시 딸과 비행기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왠지 바보가 된 느낌? 친정 부모님께서 놀라셨다.
“아니, 기껏 북경에 갔는데, 관광도 안 하고 그냥 왔단 말이니? 비행기 티켓 값이 아깝다.”
나는 부모님께 면목이 없어서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사실 친정에서도 결혼을 딱히 반기지 않으셨다. 특히 엄마는 첫인상도 마음에 안 들고 사람이 음흉하고 겉과 속이 달라 보인다고 썩 내켜 하지 않으셨다. 언니도 사주, 관상이 나쁘다며, 구시렁댔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무조건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여자 아닌가? 난 결혼을 했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정말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나도 자존심이 상하니까. 얼마 후, 남편이 한국에 왔다. 그리고 친정 부모님께 갔다.
“장인 어르신, 장모님,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경신이와 이혼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엄마, 나는 기절할 듯 놀랐다.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 빚도 내가 얼마나 많이 갚아 줬는데...”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경악했다.
“아니, 중국 가는데, 빚이 너무 많아서 신용불량자라 직장을 새로 갈 수 없다고 해서 내가 네 언니에게 융통해서 언니 쌈짓돈하고 내 돈, 네 엄마 돈 다 끌어모아서 네 신랑 신용불량 풀어줘서 중국 간 거잖니? 신용불량이라 삼성에서 쫓겨나고, 새 직장 들어가야 한다고 우리 집에서 빚 갚아줘서 중국에 재취업했잖아? 넌 몰랐냐?”
나는 피가 솟구쳐서 정수리가 뚫릴 것 같았다.
“아버님, 절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경신이와 살까 생각도 해 봤지만, 중국에 다른 여자가 생겼습니다. 벌써 임신도 했습니다. 아들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뻔뻔한 작자가 또 있을까 싶다.
“자네, 어쩜, 그럴 수가? 아니지? 중국 여자랑 헤어질 거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빚은 못 갚으니 잊어버리십시오.”
이혼 수속도 안 해주고 중국으로 날아간 놈 때문에 나와 친정아버지는 법원을 들락거리며 혼자 이혼 수속을 했다. 남편이 바람나서 중국으로 도망간 것을 사유로 해서.
그리고 나는 살길이 없어서, 정리하고 친정으로 들어와서 딸이 대학 갈 때까지 빌붙어 살았다. 그동안 직장을 다니며 딸아이 공부를 시켰다. 따로 생활비는 드리지 못했다. 우리 둘 쓰는 돈 벌기도 빠듯했다. 애가 대학에 들어가더니 공부하기 싫다고 휴학했다. 제 아비 닮았으면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해야 할 텐데, 영 공부에는 소질이 없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공부 잘한다고 돈 잘 버는 건 아니더라. 네 아비는 공부 잘해서 삼성전자 들어갔어도 월급 70만 원 밖에 못 벌어 오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도 다 사기였다.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 우리나라 삼성전자 대졸 사원이 70만 원 받는 걸 믿은 네가 이상하다고 다 날 비웃었다. 그래. 그것도 속았다. 아니 우리 친정 식구들은 다 멍청이라 다 같이 속았다. 돈까지 뜯겼다. 부모님께서는 나 때문에 속이 상하셔도 내색을 안 하셨다. 그래도 나는 많이는 못 벌어도 월 200만 원 이상은 번다. 그래서 드디어 분가했다. 부모님께서는 또 빚을 내셔서 분가하는 데 보태라고 돈을 주셨다. 나는 24평 아파트 전세로 들어갔다. 그리고 딸은 학교 가는 대신 집안에서 고양이와 놀았다. 그것도 내버려 뒀다. 제 팔자 제가 알아서 하는 거지.
어느 날, 나는 딸과 함께 복권방에 갔다. 왜냐하면, 어젯밤 둘 다 동시에 좋은 꿈을 꿨기 때문이다. 내가 로또를 사니까 딸이 “엄마 즉석복권도 사요.” 하면서 1000원짜리 복권을 샀다. 거기서 바로 긁었는데, 세상에, 5억 당첨이었다. 1등이었다. 우리 둘은 입을 꼭 다물고, 조용히 집으로 갔다. 그리고 회사에 내일 하루 휴직한다고 전화했다. 그러고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서울로 갔다. 서울 농협 본점에서 복권당첨을 관리한다. 서초 농협지점에서 통장을 다시 개설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세금 떼고 나니 3억이 좀 넘는다. 아. 세금이 너무 많다. 세금이 33퍼센트나 되었다. 5억부터 33퍼센트란다. 4억 99999999원이면 22퍼센트 세금인데....... 아깝다.......
통장에 돈이 입금되고 바로 집으로 내려왔다. 아니 친정집으로 갔다. 부모님께 통장을 보여드렸다. 부모님께서 기뻐하셨다.
“네가 분가를 하더니 그 집이 재수가 있나보구나. 이제 너희 걱정을 안 해도 되겠다. 이 돈을 잘 굴려서 날리지 말고 잘 쓰도록 해라.”
나는 바로 새 아파트 큰 평수로 이사를 했다. 지금 집이 재수는 있지만 40년이 넘은지라 바퀴벌레가 나오고 주변이 시끄러워서 조용한 새 아파트로 갔다. 그리고 가족 외식 후에 미선이 생각이 나서 전화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런 줄 모를 것이다. 그냥 팔자가 좋아서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할 것이다.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과 내 인생을 날려버린 놈의 위자료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 위자료가 3억 좀 넘는 수준인 것이다. 물론 거기 친정 부모님의 돈도 포함되었지만, 갚아 드리지는 않았다. 나도 내 살길 찾느라. 그리고 놀고 있는 딸아이 걱정에... 난 항상 내 생각대로 살았다. 그리고 후회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른 사람 말을 듣고 사는 성격이었으면, 이런 삶을 못 살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잘나고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김진미
나, 장미진은 20세기에 태어나서 31살에 밀레니엄을 맞았다. 그 당시 첫 2000년 새해를 가장 빨리 맞이하는 행사가 유행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독도이고, 날짜변경선 최고 동쪽에 있는 나라, 즉 피지와 같은 나라로 1999년 연말에 여행 가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었다. 피지는 그다지 큰돈 들여서 가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선택한 곳이 뉴질랜드였다. 아무래도 여자 혼자 먼 타국을 여행한다는 것이 걱정돼서 놀고 있는 막내 여동생을 꼬드겼다. 당시 동생은 여행 갈 돈이 한 푼도 없었는데, 내가 제 비용까지 대주겠다고 해서 같이 갔다. 그런데 양심적인 동생은 언젠가 갚는다며 차용증을 써서 주었다. 나는 받을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써주니 받아두었다. 나는 33일 정도를 예상하고 뉴질랜드 여행계획을 짰다. 부모님께서도 놀라는 눈치였다. 평생 집에서 책만 파던 애가 여행을 가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도 국내 여행도 아닌 해외여행을 가이드도 없이 한 달 넘게 배낭여행을 간다고 하니 웬일인가 싶으셨던 것 같다. 그래도 혼자는 아니고 동생이랑 같이 간다고 해서 걱정은 되지만 보내주셨다. 나는 여행 한 달 전부터 여행루트를 짜고, 지역마다 갈 곳, 먹을 곳, 잘 곳, 교통편 등등을 조사하고, 비행기 왕복 티켓과 국제학생증을 준비했다. 동생은 아무 생각도 없이 나 믿고 그냥 따라 오는 것이어서 내가 다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고 결혼한 동생은 같이 갈 수가 없으니 침대 이불 세트를 선물해 주고 막내랑 같이 다녀오겠다고 하고 우리 둘은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에어 뉴질랜드를 이용했다. 국적기를 이용하면 좋겠지만 가격이 너무 차이가 나서 여행사에서도 뉴질랜드 가는 비행기는 에어 뉴질랜드가 제일 적당하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우리 자매는 둘 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갔는데, 공항에서 다른 여행객 중에서 한국인이 우리보고 뉴질랜드에 골프 치러 가는 체대학생이냐고 물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트레이닝복을 입으면 다 체육선수냐고 반문했다. 우리 자매는 여행 내내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녔는데 사람들은 우리를 트레이닝 자매라고 불렀다. 이 옷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여행 도중 영국계 여행객이 나에게 lady라고 불러준 일이 있다. 대부분은 다 소녀라고 불렀는데, 왜 숙녀라고 부르냐고 물으니 내 옷, 즉 내가 입고 있는 이 트레이닝복에 Hardy Amies London이라고 큰 글씨로 자수가 수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메이커가 왜요? 라고 물으니 왕실 메이커라고 왕족, 귀족들이 입는 옷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고, 어쨌든 좋아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뉴질랜드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우리는 남섬으로 들어가서 북섬에서 나오는 루트를 짰기 때문에 도착지는 남섬 ‘크라이스트처치’로 잡고 출발지는 북섬 ‘오클랜드’로 티켓을 끊었다. 뉴질랜드는 기차 노선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아서 유럽여행 가는 것처럼 유레일패스 같은 것은 사지 않았다. 거의 버스를 이용했다. 도착하려는데 비행기 창밖을 내려다보니 온통 녹색에 흰점들이 빽빽하게 보였다. 그것은 풀밭에 양떼였다. 아! 뉴질랜드에 왔구나. 사람보다 양, 소가 더 많은 나라. 우리는 밀레니엄을 한국에서보다 4시간 더 빨리 맞으려고 1999년 12월 23일에 출발했다. 여행 중에 2000년 새해를 맞을 기대에 부풀었다.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이 다가오자 우리는 배낭을 꺼내어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승객들은 대부분이 ‘오클랜드’가 종착지였다. 나와 동생은 내려 나오는데 갑자기 승무원이 나오더니 어떤 일본인 할아버지를 찾는 것이었다. 적어도 80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였는데, 그분이 ‘오클랜드’가 종착지인데 크라이스트처치가 도착지인 줄 알고 내리신 거였다. 나는 그 승무원이 너무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순전히 할아버지 잘못인데, 그것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신기하고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 내려서 그 할아버지를 끝까지 찾아서 다시 비행기에 탑승시킨 에어 뉴질랜드 여승무원의 프로정신에 감탄했다. 우리나라 항공사들도 그러길 바란다. 더 놀란 것은 승무원들이 하나같이 건장한 아줌마들로서 화장기 없는 얼굴에 바지를 입고 편안한 단화를 신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승무원이 우리나라 여승무원들, 예를 들면 꽉 끼는 타이트스커트 제복, 뾰족하고 굽이 높은 구두, 짙은 화장, 깡마른 모델급 몸매의 미혼여성으로 구성된 한국 여승무원과 많이 비교되었다. 나는 이 건장하고 편안한 복장의 아줌마 승무원이 훨씬 더 신뢰가 갔다. 실제로 일도 잘하고. 비상사태 시, 누가 더 승객구조에 유리하겠는가? 아무튼, 우리는 그 얼빠진 일본 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연말인데, 뉴질랜드는 우리와 계절이 반대라서 한여름 땡볕이 작열하였다. 도착한 그 날도 너무 화창하고 자외선이 강해서 우리는 선글라스를 쓰고 선크림을 바르고 다녔다. 그런데 화창한 날은 그날뿐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우중충하고 흐리고 춥고 나는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데, 갖고 온 옷은 얇은 옷뿐이라 몇 개를 겹쳐 입고 다녔다. 우리나라 여름과는 많이 달랐다. 나 같은 사람은 그냥 겨울 파카를 입고 다녀야 할 날씨였다. 그게 뉴질랜드 남섬의 여름이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정말 아름답고 깨끗하고 정비가 잘 된 도시였다. 호주와 달리 뉴질랜드는 죄수들이 와서 만든 나라가 아니라 영국계 귀족들이 와서 만든 도시라고 들어서인지 몰라도 ‘크라이스트처치’는 19세기 잉글랜드 신도시 느낌이었다. ‘크라이스트’ 교회도 성공회 교회였다. 예배를 보러 들어갔는데 담당 성공회 목사는 생각보다 젊었고, 목사 부부 옆에 목사의 어머니로 보이는 할머니가 흰색 수녀복장으로 앉아 있었다. 성공회 목사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면 수녀 옷을 입는 모양이었다. 오르가니스트는 예배 후주로 멋진 곡을 연주했다. 도심에는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의 후광인지 빅토리아 광장이 있었다. 우리는 ‘크라이스트처치’를 가로지르는 강에서 남자가 노를 땅으로 미는 길쭉한 배를 타고 강가를 감상했다. 강이라기보다는 시냇물에 가까웠다. 그리고 시내에서 무료로 운행하는 시내버스에 탑승했는데, 이 버스는 계속 같은 구간을 순환하는 버스였다. 그래서 크라이스트처치 시내에 머무는 동안은 이 버스를 이용하면서 슈퍼마켓에서 장을 봤다. 슈퍼마켓은 오전 10시-11시 문 열고 오후 4-5시면 문을 닫는다. 이 지역은 4, 5시면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다 집에 가기 때문에 해가 지면 길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24시간 불이 켜져 있고, 24시간 영업하는 시설은 한국에서나 있는 것이다. 숙소는 여행자 전용 back packers를 이용했다. 유럽엔 유스호스텔이 많지만, 이곳은 유스호스텔이 지역마다 하나씩뿐이라 유스호스텔 증을 끊어가지 않았다. 하루에 8시간 이상을 걸어 다니다가 문 닫기 전에 장을 봐서 숙소에서 밥을 했다. 피곤해 죽겠는데도 밥을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동생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밥과 국을 다 끓인 다음에 동생을 깨워 같이 밥 먹고 나간다. 저녁에는 숙소에 들어와서 또 내가 밥을 한다. 동생은 방에서 쉰다. 그래도 부엌에서 전 세계 다양한 여행객들을 만날 수 있어서 그것은 좋았다. 하루는 밥하기 너무 피곤해서 한국에서 가져간 짜장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그때 옆 가스레인지에서 이탈리아 청년이 파스타를 만들고 있었다. 이탈리아 청년이 전채 요리로 검은 파스타를 해 먹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 이게 메인디시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이탈리아 청년은 깜짝 놀라면서 파스타가 어떻게 메인디시가 될 수 있냐고 자기는 파스타는 전채로 먹고 메인은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을 거라고 그리고 후식은 과일을 먹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가난한 여행객이라도 기본으로 전채, 본식, 후식 세 코스는 갖추고 먹는다고 했다. 나와 내 동생은 짜장 라면 하나를 저녁으로 먹었다. 그리고 씻고 잤다. 부엌 이야기를 또 하나 하자면 전 세계 어디서나 목소리 제일 크고 제일 지저분한 사람들은 다 중국인이었다. 온 숙소가 떠나가라고 중국어로 떠들고 기본요리가 전부 기름으로 튀기는 요리를 하다 보니 온 가스레인지 주변과 부엌 벽에 기름이 튀고, 요리를 하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하여튼 중국 애들이 부엌을 한번 쓸고 가면 부엌이 시장바닥이 된다. 숙소주인도 중국인을 썩 반기지 않았다. 이불뿐 아니라 드라이기와 같은 전자 기구까지 훔쳐가서 우리가 숙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여권을 보고 중국인인지 아닌지 확인을 하였다. 중국인 안 받는 곳도 있었다. ‘크라이스트’ 도심에 한식집은 한 군데밖에 없었는데, 너무나 한식이 먹고 싶을 때 가서 딱, 한 번 먹었다. 아주 매운 제육볶음. 이 집도 뉴질랜드 주민처럼 4시에 문 닫고 집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보고 포장해 가라고 하고 문을 닫고 갔다. 그 이후로는 우리는 슈퍼에서 쌀과 달걀, 감자, 양파를 사서 숙소에서 밥과 국을 해 먹었다. 가져간 라면을 끓여서 국 대신 먹기도 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영국식 정원이 아름다웠는데, 전형적인 ‘English Garden’이었다. 이 도시는 잉글랜드 도시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사실 잉글리시 가든은 세계적으로도 그 스타일이 알려져 있지만, 스코티시 가든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관광이 끝나고 유일하게 뉴질랜드에서 기차여행코스인 ‘그레이마우스’로 기차여행을 했다. 이 코스는 기찻길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서 기차를 타고 가는 게 정석이다. 역시 경관이 수려했다. 청년기 지형인 협곡에 감탄했다. ‘그레이마우스’ 자체는 볼 게 없어서 그다음은 빙하를 보러 갔다. 남섬은 빙하 섬이라 ‘피요르드’와 빙하가 유명하다. 빙하 중에서도 ‘프렌치 조셉’ 빙하를 역시 가이드 투어로 갔다. 우리 자매와 영국 4인 가족이 한 팀이었는데, 가이드 1명에 손님이 6명이었다. 당연히 가이드는 영어로 이야기하고 영국 가족은 대화가 자연스러웠는데, 나는 듣고 이해는 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동생에게 통역해주기 바빴다. 영국 아이들은 우리보다 체력이 더 약해서 빙하코스를 걷는데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 애들은 집에서 공부만 했었나보다. 그래도 그 가족은 귀족가문처럼 보였다. 귀티가 나는 것이, 복장도 그렇고 평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빙하 트레킹을 마치고 숙소에서 저녁을 해 먹자마자 다시 숙면했다. 다음 ‘쿡’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쿡’산의 정기를 받으면서 새천년을 맞이했다. 2000년 밀레니엄!!! 하하하... ‘쿡’산은 백두산보다 1000미터나 높은 산인데 산이 높아서인지 꼭대기는 눈으로 덮여 있고, 산 아래는 풀밖에 없었다. 즉 산은 볼 것이 하나 없는 못생긴 민둥산이었다. 산은 우리나라 산이 아름답다. 높이도 적당하고, 등산갈 마음이 들고, 산세와 경치가 수려하고 숲과 계곡도 아름답고.....하지만 우리는 새천년을 맞이한 신성한 산으로 마음에 묻었다. 우리는 ‘쿡’산 아랫자락 근처만 다니는 트레킹 코스를 신청해서 뉴질랜드 가이드 아저씨와 함께 걸었다. 그리고 휴식시간에 아저씨가 전통 영국식 밀크티를 타 주었다. 나는 본래 밀크티를 좋아한다. 추웠는데, 물론 여름이다. 따뜻해서 좋았다. 숙소에 오자마자 또 밥을 했다. 어차피 이 동네는 상가나 식당이 해가 지면 다 문을 닫아서 밥을 사 먹고 싶어도 사 먹을 데도 없다. 해 먹어야 한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리고 미리미리 장을 봐야 한다. 동생은 해주는 밥을 먹고는 미안한지 설거지는 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단체 숙소에서 기절한 듯 잠을 잤다. 그다음 날은 ‘밀포드사운드’ 빙하호 유람선 타기. 숙소에서는 빙하호 유람선 티켓을 팔았는데, 2종류로 싼 표는 배는 크지만 사람이 많고, 비싼 표는 배는 작지만 승객이 적어서 피요르드를 구경하기 좋다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비싼 표를 샀다. 다음날 다행히 날씨가 화창해서 호수가 맑은 청록색으로 빛나고 바람은 시원하고 정말 피요르드 빙하호는 아름다웠다. 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역시 집에 와서 현상하니 제대로 나온 것이 없었다. 사진에 목숨 걸 것이 아니라 눈으로 찍어 대뇌에 저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름이라도 춥다고 느낀 것이 맞는 게 빙하 섬이라 섬 자체가 얼음 섬이니 어찌 춥지 않을 수가 있겠나? 당연히 춥지. 우리는 매일매일 오들오들 떨면서 열심히 걸어 다녔다. 빙하 트레킹, ‘밀포드사운드’ 빙하 유람선 관광까지 마치고 더 동쪽으로 갔다. 호수가 아름다운 ‘테카포’라는 곳이었다. 호숫가에 보라색 꽃들이 가득 피었었는데, 우리는 거기서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지금 같았으면 휴대폰으로 멋진 화질로 찍었을 텐데, 당시 우리는 아주 후진 필름 카메라여서 필름을 몇 통을 쓰고도 제대로 나온 사진이 한 장도 없다. 그리고 서로를 찍어주었기에 같이 찍은 사진도 별로 없었다. 그곳에 세계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하는 ‘착한 양치기 교회’를 보았다. 관광객들 사진 찍는 곳일 뿐 나는 별 감흥은 없었다. 그리고 ‘와나카’라는 곳을 들렀다가 ‘퀸즈타운’이라는 도시로 갔다. 음, 그곳에서 우리 자매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전 세계 아드레날린이 넘치는 젊은이들이 산 위에서 뛰어내리는 곳이었다. 우리는 산 아래에서 그들을 구경했는데 어떤 스카이다이버가 비행 장비가 펴지지 않아서 수직으로 추락하는 것을 생눈으로 목격했다. 끔찍한 순간이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스카이다이버들이 계속해서 하늘에서 뛰어내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서 바로 뉴질랜드 최남단에 가까운 ‘인버카길’에 갔는데 현지인은 ‘인버카길’을 ‘인버카고’라고 발음했다. 스코틀랜드식 발음인 듯했다. 여기서 박물관과 아트 갤러리를 구경하고 바로 숙소에서 일박만 하고 ‘스튜어트’섬에 가지 않고 ‘더니든’이라는 도시로 갔다. 대부분 ‘인버카고’에 가는 사람들은 ‘스튜어트’섬에 가기 위해 지나치는 곳이다. ‘더니든’은 19세기 스코틀랜드풍 신도시였다. ‘크라이스트처치’와 비교될 만했다. 그곳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만났는데, 오랜만에 한국인을 타국에서 만나니 반가웠다. ‘런던’과 ‘에든버러’는 구도시인데 ‘크라이스트처치’와 ‘더니든’은 신도시라 깨끗하고 정말 19세기에 온 듯해서 좋았다. 여기서도 사흘을 묵으면서 온 도시를 걸어 다녔다. 그리고는 북쪽으로 ‘아카로아’에 갔다. ‘아카로아’는 프랑스풍의 작고 예쁜 소도시였다. 옛 프랑스인들이 정착했다고 한다. 확실히 잉글랜드풍, 스코트랜드풍, 프랑스풍 다 지역색이 잘 드러나 보였다. 그게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뉴질랜드는 지역이 그리 크지 않아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를 금방금방 보러 다니는 맛이 있었다. 이제 북섬으로 가기 위한 관문인 ‘픽턴’에 갔다. 우리는 33일 중에서 21일을 남섬에서 보내고 12일을 북섬 여행으로 계획했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넬슨’이라는 곳도 꽤 아름다운 국립공원이 있는데 거기를 보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그래서 그냥 ‘픽턴’에서 일박하고 북섬 ‘웰링턴’으로 가기로 했다. ‘픽턴’에서는 운 좋게도 마음씨 고운 성공회 목사를 만나서 집 없는 부랑자들을 위한 무료숙소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우리는 갖고 있던 쌀을 내어 밥을 지었다. 그 성공회 교회에 2단짜리 파이프오르간이 있었는데, 나는 마음씨 고운 목사님에게 감사의 표시로 거기 있는 악보를 다 연주해 주었다. 성공회 목사는 꽤 놀라는 눈치였는데, 검은 머리의 노란 동양인 소녀(외국인 눈에는 내가 청소년으로 보였던 것 같다.)가 능숙한 솜씨로 오르간을 연주하니까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오르가니스트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 메인 오르가니스트라고 대답했다. 나는 학부에서 오르간을 전공하고 피아노를 부전공했다. 이 성공회 목사는 아마도 최초로 보는 동양인 오르가니스트였던 같다. 교회에서 오르간을 쳐주고 숙소로 들어왔는데 아까 지은 밥이 다 되어서 우리 셋은 밥을 먹고 새로 깔아준 시트에서 푹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픽턴’에서 배를 타고 ‘웰링턴’으로 갔다. 북섬에 도착하자마자 계절이 바뀌었다. 북섬은 화산섬이다. 바로 따뜻함이 느껴졌다. 신기했다. 이렇게 가까운 섬이 남쪽은 얼음 섬이고 북쪽은 불의 섬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많던 양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은 ‘웰링턴’에 도착했다. 여기는 뉴질랜드의 수도이다. 그런데 그냥 행정수도인 것이다. 나는 ‘웰링턴’의 모습에 너무 실망해서 지금까지의 남섬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순식간에 와장창 깨버린 ‘웰링턴’에 정이 뚝 떨어져서 바로 다음 지역으로 출발했다. 그야말로 전 세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그냥 21세기 현대 대도시 그 자체였다. 나는 그런 곳을 보려고 비싼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에 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럴 줄 알았으면 ‘넬슨’ 국립공원을 한 이틀 보다가 북섬에 오는 거였는데.... 라며 후회했다. 다시 북쪽으로 ‘타우랑가’로 갔다. 이곳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해외여행 한 것을 후회했다. 평생 첫 해외여행지였는데... 무서웠다. 하지만 동생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걔도 무서워할까 봐....그때 이미 해가 져서 움직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숙박을 해야 했다. ‘타우랑가’의 숙소는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음침하고 지저분하고 기괴한 곳으로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곳인데, 숙소주인 역시 무슨 술집포주 같았다. 날 보더니 “동양인 꼬마가 여기는 웬일이지? 여기서 잘 거냐?”고 물었다. 나는 속으로 ‘31살이거든? 그리고 키도 168센티미터거든.’ 했다. 그리고 나는 부엌을 쓸 수 있냐고 물었는데, 해는 졌고 밥을 해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포주 아줌마는 “부엌?” 하고 놀라더니 “요리를 하게?” 하고 눈을 치켜뜨면서 물었다. 나는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부엌으로 갔는데, 엉망진창이란 이런 곳에 쓰는 말이었다. 조리도구는커녕 청소도 안 되어 있고, 거의 사용한 지 한 달은 족히 넘어 보였다. 한숨이 나왔다. 거기서 대충 냄비를 찾아서 쌀을 씻고 밥을 안치고 있는데, 요상하게 생긴 작고 마른 남자, 한눈에 봐도 게이처럼 보였다. 내 동생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게이처럼 생긴 남자가 나보고 요리를 하다니 기특한 소녀라면서 고기를 주려고 왔다고 했다. 외모뿐 아니라 목소리도 가늘고 교태스러운 것이 서양인 환관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쇠고기 덩어리를 맨손으로 잡고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서 나는 원래 고기는 없어서 못 먹지만 채식주의자라고 대답하고 공손히 거절하였다. 그랬더니 그 게이 청년은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 파트너인 건장한 남자에게 투덜거리며 아양을 떨었다. ‘정말 게이가 맞았다!!!’ 나는 이 무서운 밤을 어떻게 동생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길까? 그 생각을 하면서 자려고 침대에 들었는데, 밤새도록 어찌나 시끄러운지 도통 잘 수가 없어서 복도로 나왔다. 마침 다행히 나 같은 독일인 여행자가 시끄럽다고 포주 아줌마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런 곳에서 잘 수 없다며 아줌마보고 돈을 내달라고 했다. 나는 기회다 싶어서 나도 가겠다고 돈을 달라고 했다. 아줌마는 다는 줄 수 없고 반만 준다고 했는데 그것도 좋다고 했다. 나는 동생을 깨워서 우리는 그 독일 청년을 따라 다른 숙소를 찾아갔다. 그 청년은 나보다 영어가 능통하여 그 지역 안전하고 조용한 숙소를 알아내서 거기로 자정 넘은 시간에 갔다. 그곳은 전형적인 뉴질랜드 숙소로 조용하고 편안하고 깨끗했다. 아줌마도 푸근했고, 나는 살았다 싶었다. 우리는 늦게 잔 이유로 아침에 늦게 일어났는데, 다른 여행객들은 벌써 아침을 먹고 다 떠난 후였다. 이 숙소는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B & B(Bed and Breakfast)였다. B & B는 밥을 해 먹는 숙소보다는 비싼 곳이라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는데, 이때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이 온 독일 청년 역시 나가고 없었다. 남은 아침 식사는 빵과 커피뿐이었다. 그래도 마른 빵을 씹으면서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주인아줌마와 진한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아줌마가 고마워서 우리는 함께 사진도 찍었다. 드디어 뉴질랜드 최대 도시 ‘오클랜드’로 가게 되었다. 북섬에 오고는 계획대로 움직인 적이 없어서 예매도 못 했다. 우리는 간이 크게도 스케치북에 ‘오클랜드’라고 적은 피켓을 들고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지금 같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때는 2000년 1월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무식, 용감해서 한 무지한 행각일 뿐이다. 한 시간쯤 지나자 어떤 남자가 차를 세우더니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무슨 말이지?’ 의아해하면서 기다렸는데 정말 다른 남자가 차를 타고 와서 내리더니 이상한 수첩을 보여주면서 여기 한국인들도 많다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하아. 알고 보니 이놈들은 동양인 여행객들에게 대마초를 파는 잡놈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마약은 불법이고, 나는 본래 담배도 피우지 않기 때문에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다른 한국인 여행객들은 다 피웠다며 수첩에 적힌 한국인 명단을 눈앞에 계속 들이밀었다. 나는 정말로 역겨워져서 그 자리를 피해서 ‘오클랜드’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다시 들고 도로에 섰다. 내 동생은 정말 눈물 나게도 아무것도 몰라서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동생은 아직도 ‘타우랑가’ 부엌에 나타났던 쇠고기맨이 게이인 줄 모르고 이 수염 난 수첩맨이 대마초 장삿꾼이란 사실을 모른다. 다행히 도로에 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쁜 젊은 여자가 운전하는 차가 우리 앞에 섰다. “오클랜드?” 하길래 나는 그 대마초맨이 들리도록 큰 소리로 “Yes!!!” 라 대답하고 우리는 바로 그 천사 같은 아가씨 차에 탑승했다. 정말로 우리를 구해주러 나타난 천사였다. 대마초맨은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그 끔찍한 순간을 난 잊을 수 없다. 그 천사는 친절하게도 “어젯밤 ‘타우랑가’에서 잤냐?”고 물었는데, 나는 “불행히도 그랬다고 그래서 바로 떠난다.”고 대답했다. 천사는 여행객들이 갈 곳은 못 되는 곳이라며 ‘오클랜드’는 나을 것이라고 했다. 즉 ‘타우랑가’는 천국 같은 뉴질랜드의 쓰레기통에 해당하는 장소였던 것이었다. 오클랜드 도심에 이르자 천사는 우리를 내려주면서 여행 잘하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오클랜드 숙소에 도착하니 한국인들도 많고 뉴질랜드 최대 도시답게 언어연수를 하러 온 한국인 유학생들도 많았다. 한국어로 대화를 하면서 정보를 얻었다. 우리는 ‘로토루아’ 라는 곳으로 갔다. 바로 유황냄새가 진동을 해서 정말로 화산섬에 왔구나하고 온 몸의 감각, 즉 눈, 코, 입, 피부로 바로 인지를 했다. 그곳엔 정말 화산섬의 상징인 화산지형공원이 있었는데, 영국소녀 둘과 함께 그곳에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여자에는 잉글랜드 소녀고 한 여자애는 웨일즈 소녀였다. 영국 4대 지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끼리는 지역색이 심해서 사이가 나쁘다고 하던데, 이 두 소녀는 사이좋게 함께 여행 중이었다. 우리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 호수 같은 곳을 유황 냄새가 진동하는 공원을 구경하고 온천욕을 하러 갔다. 그 소녀들은 여기 온천은 농도가 진해서 금, 은과 같은 패물은 다 빼고 들어가라고 했다. 우리는 금목걸이를 빼고 들어갔다. 정말 진한 유황 효과가 피부와 관절에 바로 느껴졌다. 관절염, 피부병 환자들은 로토루아 유황온천에서 요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진한 유황온천은 처음 보았다. 더 있고 싶어도 유황 냄새가 너무 독해서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온천욕을 하고 우리는 영국계열 소녀들과 작별하고 ‘타우포’라는 지역으로 갔다. 거기 호수가 정말로 예쁜 에메랄드색이었는데, 거기 번지점프대가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남들 뛰어내리는 것 구경만 하고 우리는 하지 않았다. 뛰어내린 사람들보고 재미있었냐고 물었더니 재미있다고(very exciting!!!) 우리보고도 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돈을 줘가면서 저런 무서운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그냥 바로 후카폭포를 보러 갔다. 뭐 생각보다 크지도 않고 아담한 폭포인데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싶었다. 그리고 ‘카이코라’로 이동했는데 거기서 현지 개척교회를 하는 한국인 목사 부부를 만났다. 그리고 목사 부부의 말인즉 북섬은 남섬에 비해서 볼 게 없다는 것, 기후가 온화해서 온천 요양하기는 좋다고 그게 아닌 젊은이들은 차라리 남섬에 일주일을 더 있다가 여기는 잠깐 스치다 나가야 할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 목사 부부가 한국인 애들을 데리고 북섬 최북단 ‘케이프레잉가’로 소풍을 갈 예정인데 합류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일정도 아직 남았고 할 일도 없었는데 잘 됐다 싶어서 바로 승낙했다. 그 목사는 15인승 버스를 운전했는데, 우리는 왕복 버스 주유비를 부담하기로 하고 소풍에 합류했다. 생각보다 꽤 거리가 있었지만, 한국어가 통하는 사람들이라 편했다. 그 학생들은 우리 자매가 대화하는 걸 보고 일본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내가 “왜?” 하고 물으니 부산 사투리가 일본어처럼 들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부산 사투리가 일본어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하여튼 우리는 드디어 ‘케이프레잉가’에 도착했다. 안타깝게도 날씨가 우중충하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사진은 더더욱 안 나왔다. 뉴질랜드 땅끝마을인 셈인데 거기 이정표 푯말에 전 세계 주요도시명과 남극표지가 있었다. 거기서 사진을 찍었는데, 역시 나중에 현상해 보니 흐릿한 것이 안개 속에 귀신같이 눈만 번뜩이게 나왔다. 어쨌든 우리는 땅끝마을에서 북쪽 우리나라 방향을 보면서 거센 파도와 바람을 맞았다. 그래도 여기 온 것은 잘한 일이야. 북섬 여행은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지만,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다. 무서운 상황들도 있었지만, 동생도 눈치 못 채게 무사히 잘 넘어갔고, 만족한다. 우리는 뉴질랜드 땅끝에서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줄 기념품을 사려고 오클랜드 쇼핑센터를 돌았다. 뉴질랜드의 특산품은 양털제품, 그리고 녹용, 양 태반 크림이 유명하다. 녹용을 보러 다녔는데, 처음 간 곳이 중국계 상인이 운영하는 점포였다. 그 중국인이 녹용 제품을 보여주면서 아마 이 일대에서 자기 집이 제일 쌀 거라고 했다. “그래요? 다른 곳도 둘러 보고 올게요.” 하고 나왔다. 오클랜드 숙소에 한국계 뉴질랜드인이 있었는데, 우리보고 “아니, 중국인 가게에 가면 어떻게 하냐? 한국계 가게에 가야죠.” 라길래 한국계 녹용 가게로 다시 갔다. 그랬는데 세상에 이럴 수가! 나는 어릴 때부터 녹용을 먹어서 녹용이 어떤 것이 상등품인지 안다. 어제 본 중국계 가게에서 본 것보다 훨씬 못한 하등품 녹용을 더 비싼 가격에 제시했다. 나는 여길 소개한 사람과 이걸 판매하는 상인 모두 고국 동포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악덕상인임을 바로 깨달았다. 입이 써서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냥 뉴질랜드 양 태반 크림만 사서 귀국행 비행기를 타러 오클랜드 공항에 갔다. 거기 공항직원 중에 한국계 직원이 있어서 우리보고 반갑다고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우리가 티켓을 제출하니 세상에, 이 티켓 왜 이리 비싸게 구매했냐고 배낭여행객 티켓 가격이 아니라면서 이코노미 좌석 중에서 최고가격으로 샀다고 했다. 나는 분통이 터졌다. 이 티켓 한국 여행사에서 샀는데, 바가지를 썼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한국계 공항직원이 우리보고 “거의 비즈니스 티켓 가격으로 구매를 했으니 조금이라도 편안히 가야죠”라고 하면서 우리 두 좌석 주변을 전부 블록처리를 해주었다. 즉 우리 두 사람 좌석 양쪽으로는 아무도 탈 수 없도록 블로킹을 해주셨다. 어쨌든 바가지는 이미 쓴 거고 조금이라도 편안히 가라고 배려해 주신 공항직원에게 감사하면서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는 마지막 기내식을 즐겼다. 33일 여행 중 가장 맛있는 식사는 기내식이었으니까. 내 첫 해외여행, 무사히 마친 것을 자축하면서 우리는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나는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김진미
나는 백수 박남준. 날짜 관념 없다. 계절 감각만 있다. 그러나 어차피 트레이닝복으로 365일 버틴다. 겨울엔 그 위에 오리털 파카를 입고 여름엔 러닝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는다. 오리털 파카는 거의 6개월을 입고 빤질빤질해져서 봄이 완연해지면 빨아 넣는다. 이곳 고시원은 다 나 같은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남자들만 살고 있다. 하긴 여긴 백수중에서도 상 백수, 가난뱅이들 집합소라 여자들은 살기 힘들다. 냄새도 나고 바퀴벌레에 쥐까지 출몰한다. 소방시설 없고. 방음, 방풍시설 없다. 불이라도 나면 단체로 통구이가 될 것이다. 그래도 이곳이 우리 같은 거지 백수들에게는 유일한 보금자리다. 고시원도 등급이 다르다. 아파트 같은 데도 있고, 공주 같은 여자들 전용 기숙사 같은 건물도 있다고 들었다. 나완 거리가 먼 곳들이라 가본 적 없다. 다달이 월세 내기 빠듯하다. 여기서 나가면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짬짬이 일일 막노동을 하러 다닌다. 그래도 30대인데 노동도 못 하면 죽어야지 별수 있겠나? 내 앞방은 40대 백수가 사는데 월세를 못 내서 곧 쫓겨날 것만 같다. 내가 다니는 건축노동판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대답이 없다. 아직 버틸 만한 모양이다. 한동안 막노동 시장이 호황이었는데 최근 들어 부동산 대책 이후 건설 경기가 바닥이라 일할 곳이 마땅찮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아파트 건설 중이었던 곳을 전전하며 다녔는데, 신규로 건설하는 회사가 없다. 지방은 더 엉망진창이라 들었다. 미분양이 넘쳐서 새로 지을 계획이 다 무산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부동산 경기가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데, 나 같은 일용직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이 문을 닫으면 굶어 죽어야 한다. 그리고 날도 찬데 겨울에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다. 나는 부모 형제도 없는 고아다. 보육원에서 나와서 십여 년을 건설 일용노동자로 살았다. 이 고시원은 주로 나처럼 오갈 데 없는 백수들이 기거하는 최후의 보루 같은 곳이다. 이제는 고시원 주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고시원 청소와 쓰레기 정리를 내가 한다고 했다. 고시원 주인이 요즘은 일하러 안 나가냐고 묻는데, 대답을 못 했다. 그래도 눈치 빠른 놈은 절간에서도 새우젓 먹는다고 주인에게 잘 보여야 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 같은 보육원 출신들은 눈치 하나로 연명한다. 나는 고시원 전체를 쓸고 닦고 쥐덫을 놓아서 쥐도 잡고 냄새나는 쓰레기도 나오는 족족 치우고 해서 바퀴벌레도 많이 줄었다. 고시원 주인이 흡족해하신다. 그래서 하루는 큰마음 먹고 월세를 좀 깎아 달라고 부탁을 해보았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도는 했다. 그랬는데, 이 주인 양반이 곤란한데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완전 실망.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 이런 일에 금방 포기를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청소하고 쥐덫 관리와 쓰레기 정리를 매일 했다. 그러기를 2달여 어느 날 주인이 불렀다. 아싸! 드디어 입질이 오는군.
“네.. 부르셨습니까?”
“별거는 아니고 집에서 마누라랑 딸이 매일 시켜 먹더니 10번 시켜 먹어서 1장 받았다는군. 자네 주려고 갖고 왔어.”
나는 월세를 깎아준다는 기대를 했건만 그게 아니었다. 그 대신 치킨 한 마리 쿠폰을 받아서 멀거니 보고 있었다. 요즘은 배달료도 받는다는데, 직접 가서 먹어야 하나? 고민 끝에 그 치킨집으로 찾아갔다.
“닭 한 마리 쿠폰이요.”
그런데 치킨집 주인은 쿠폰은 받더니만 자기 고객이 아닌 것 같다며 어디서 났냐고 물었다.
“우리 고시원 주인아저씨가 주신 건데요. 열 마리 사 먹어서 받은 거라고 나보고 대신 가서 먹으라고 했어요.”
그러자 어느 집이냐고 또 꼬치꼬치 캐묻는다. 나는 기분이 상해서
“닭을 줄 거면 주고 아니면 말지 뭔 말이 그리 많아요? 10마리 시켜 먹어서 받은 건 맞잖아요? 꼭 10마리를 다 먹은 본인이 와서 먹어야 하는 거예요?”
“아니, 뭐 그렇다기 보다는... 아니, 네, 맞아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서비스 차원으로 드리는 거니까. 돈 내고 사 먹은 분이 서비스를 받아야죠. 그쪽에서 우리 닭 시켜 먹은 적은 없잖아요?”
나는 정말로 빈정이 상할 대로 상해서 그만 치킨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쿠폰을 고시원 주인아저씨에게 돌려주었다.
“아저씨. 돈 주고 사 먹은 사람만 닭을 준대요. 아저씨가 가서 드시든지, 사모님보고 사용하라고 하세요.”
“그랬어? 아이고 세상에... 그럴수가... 이런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아저씨가 미안할 건 아니죠. 돈 주고 사 먹지 않은 내가 먹으려던 게 잘못이죠.”
나는 입이 튀어나와서 내 방으로 올라갔다. 조금 있으려니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누구지? 여기 올 사람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방문 앞에 치킨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채로 놓여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직접 닭집에 가셔서 받아 오신 것이었다. 나는 고맙기도 하고 배고 고프고 해서 그 닭을 울면서 혼자 다 먹었다. 맛있는데 왜 눈물이 나지?
다음날도 나는 여전히 고시원 전체를 청소하고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고 쥐덫을 점검하고, 바퀴벌레약을 뿌렸다. 나는 청소의 달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일하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청소하면서 어디 일할 곳이 없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하루는 주인아저씨가 또 날 불렀다. 혹시? 월세를? 역시나 아니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나보고 청소를 참 잘한다고 하시면서 청소대행업체 같은 곳에 이력서를 넣어 보라고 하셨다. 응? 그런 곳이 있었나? 나는 세상을 좁게 살아서 잘 몰랐다. 아저씨 말로는 청소대행업체가 큰 회사도 있고, 작은 곳도 있다고 하면서 여러 군데 다 넣어 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못하는 컴퓨터 실력으로 이력서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는데 아저씨가 도와주셨다. 아저씨는 내 이름을 이날 처음 알게 되셨다.
“남준이라... 우리 아들도 남준인데, 성이 다르네.. 자네는 박가로군. 나는 김가일세. 허허”
저렇게 늙은 영감이 컴퓨터 타자도 치는 거야? 하고 내심 놀랐다. 그러고는 직접 인터넷으로 여러 군데 넣어 주셨다. 연락처로 연락이 오면 가보라고 하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나는 실망을 했다. 사실 고아는 취업이 안 된다. 하지만 고아라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았다. 이러다가 이 집에서도 곧 나가야 하나 생각한다. 앞방 아저씨는 벌써 길거리로 나갔다. 거기 새로운 백수가 입주하였다. 하긴 주인아저씨도 힘들게 번 돈으로 집 장만해서 월세 받는 건데 그걸 뭐라고 할 순 없다. 여기보다 싼 곳은 전국에서도 찾기 힘들다.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원망하지 않는다. 이곳 누구도 아저씨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 오늘 같은 하루가 지나고 내일 같은 하루가 또 지났다. 아저씨가 날 부르셨다. 그러고는 명함을 한 장 주시면서 여기 가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명함에 적힌 곳으로 갔다. 거기 사장님은 작은 김치공장을 운영 중이었는데 공장청소부를 구한다고 했다. 식품공장이라 위생이 중요하다며 깔끔하고 성실한 청년을 찾는 중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날로 취업이 되었다. 심지어 4대 보험까지 되는 직장이었다. 김치공장엔 주로 아주머니들이 일하셨는데 어머니들이라 그런지 나에게도 자식처럼 잘 대해 주셨다. 나는 처음으로 사람들의 정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일을 하게 되었다. 아주머니들은 대부분 50, 60대이셨고 애들도 다 커서 출가했다고 집에서 누워 있는 게 더 늙는 것 같다고 나와서 돈 번다고 하셨다. 그리고 영감탱이 수발드는 것도 지겹다고 하셨다. 나는 아주머니들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갑자기 어머니가 10명이나 되었다. 나는 생활도 안정되고 조금 나은 거처를 구할까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은혜를 저버릴 수 없어서 그 고시원에 계속 있기로 했다. 그리고 고시원 청소도 계속했다.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고, 은혜도 모르는 놈이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고아 콤플렉스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고아 소리를 듣는 게 제일 싫다. 이렇게 안정된 생활을 하다 보니 나도 이제 욕심이 생겨서 장가도 가고 싶어졌다. 40 되기 전, 결혼해야 할 텐데, 집 한 칸 없는 천애 고아에게 시집올 색시가 있을까 싶다. 직장이 없을 땐 꿈도 꾸지 않았는데,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오늘도 김치공장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점심시간엔 어머니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어머니들은 도시락을 싸 오시는데 항상 내 것도 번갈아 가며 싸 오신다. 나는 태어나서 제일 밥다운 밥을 김치공장에서 먹고 있다. 행복했다. 그런데 이 행복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인아저씨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너무 슬펐다. 정말 아버지처럼 생각했었다. 그리고 진짜 아버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장례식에 갔다. 김치공장 사장님도 오셨다.
“자네, 이 친구가 잘 부탁한다고 하더니만 역시 왔군.”
“고시원 주인아저씨께서 저에게 잘 대해 주셨거든요.”
“그래. 삼십여 년 전에 아들 잃어버려서 평생 찾아다니더니만 자넬 아들처럼 생각했나 보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들 잃어버리셨대요?”
“그랬지. 아들 잃고 20여 년을 전국에 다 찾아다니느라 폐인이 되었고 폭삭 늙고 병들었어.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늙어버렸지. 그러더니 마누라랑 딸도 잃겠다면서 고시원을 차렸지. 이 친구, 직장도 좋았었는데 아들 찾느라고 직장도 관두고 가족이 고생했지 아마. 그런데 말이야. 이 친구 부인이 그러니까 딸 엄마는 새로 얻은 부인일세. 다른 사람에겐 비밀이야. 본처가 아들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어. 그래서 새 부인과 결혼해서 지금 딸 낳고 사는 거야. 잃어버린 아들은 엄마 없이 자라다가 잃어버린 것이고. 새 부인이 뭐 하러 열심히 아들을 찾겠나? 이 친구 혼자 찾아다녔던 거지.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만 부인이 좀 의심스러워.”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처음 보육원에 간 게 언제더라? 어떻게 갔더라?’
저만치 사모님이 보인다. 딸도 보인다. 나는 사모님께 다가갔다. 과연.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세월이 아무리 지났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코 옆에 큰 사마귀. 뱀처럼 얇은 입술. 서늘한 눈매. 33년 전 어린이대공원에 날 버리고 간 여자.
나는 2G폰을 꺼내서 112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영정으로 다가가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젊은 시절 사진이라 그런지 날 닮았다. 아버지도 못 알아보는 불효자식입니다.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띵똥.. 문자가 도착했다.
‘영안실 시신 확보 완료. 국과수에 부검 의뢰 중. 유전자 검사결과 나오는 데로 연락드리겠음.’
나는 영정 앞에서 소리쳤다.
“아버지!!!”
김진미
나는 꿈쟁이다. 무슨 소리냐고? 나는 매일 꿈을 꾸는데 그게 주로 예지몽이라서 하는 말이다. 성서에 꿈쟁이 요셉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나는 한국인이고, 기독교 신자도 아니다. 차라리 교회를 다녔다면 교회 신도들은 내 말을 믿어주었을까? 주로 오늘 꾼 꿈은 오늘 일을 예지한다. 한 달 뒤를 예지할 때도 있다. 그리고 남이 나올 경우, 그 사람에게 닥칠 일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내 일이다. 그리고 과거의 꿈도 꾼다. 며칠, 몇 달, 몇 년 전 내용이 아니다. 몇백 년, 몇천 년 전과 같은 내용도 있다. 이런 경우는 많지 않지만, 가끔 꾸곤 한다. 나는 전생과 윤회를 믿는다. 이런 옛날 꿈은 내 전생 기억의 일부분처럼 생각한다. 어떨 때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낯설지 않고 아는 사람처럼, 심지어 그 사람의 과거나 현재, 그리고 남들이 모르는 성격까지 한눈에 보일 때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사람과 내가 전생에 알던 사람이었다고 추측한다.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잘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우는 주로 연예인이다. 남들은 내가 연예인에 미쳐서 헛꿈을 꾼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나는 TV도 잘 보지 않고, 인터넷도 거의 하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도 보통 사람들처럼 열심히 보지 않는다. 아마도 연예인들처럼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경우는 과거 전생에서도 꽤 유명하거나 눈에 띄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다 알 수 있을 만한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역사책에서도 나올 법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왕이나 왕비나, 장군, 예술가, 문인, 대학자, 반대로 악명을 떨쳤던 악인이거나, 그 외 광대, 기생들일 수도 있다. 연예인 대부분이 광대, 기생이 아닌가? 우리가 열심히 역사 공부를 하면 알만한 그런 사람들, 그게 아니면 내가 겪었던 전생의 가족, 친척, 친구, 이웃 사람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가족, 친척, 친구들은 현생에도 계속 엮여서 같이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삶, 그다지 차이 나지도 않는다. 이번 생에 덕을 많이 닦으면 내생에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악업을 쌓으면 내생에 고생하거나, 심지어 동물계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다. 반대로 동물들은 선업(善業)을 많이 쌓아 내생에 사람으로 환생하고자 하는 것이다. 차원을 구분하자면 광물계에서 식물계로 다음 동물계, 동물계도 어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순으로 진화한다. 그다음이 영장류일 것이고, 마침내 인간이 되는데, 인간도 처음엔 매우 가난하고 힘겨운 원시인 수준으로 태어나서 죽을 고생을 한다. 그것도 여자가 먼저이다. 여자의 삶은 남자의 삶 절반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듯하다. 남자로 태어나려면 선업 점수를 더 많이 쌓아야 한다. 그래서 웬만하면 팔자 나쁜 남자보다 팔자 좋은 여자의 삶을 선택해서 호강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아니 점수가 더 모자라면 개나 고양이의 삶 중 최상의 삶을 선택하는 수도 있다. 요즘 사람보다 더 팔자 좋은 개, 고양이들도 많이 있지 않은가? 사람도 못 먹는 걸 먹고, 마시고, 미용에, 호텔수준의 주거환경, 주인이 안고 다녀서 걸어 다닐 일도 없는 팔자 좋은 개, 고양이들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람으로 고생하고 살다 죽은 사람들이나 선택하는 것이지, 정말 동물 출신들은 아무리 고생하는 삶을 살고, 요절하고, 고통을 받아도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 게 동물계 이하의 생물들의 숙원이다.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지 않나? 1000년 먹은 구미호가 사람이 되기 하루 전에 들켜서 사람이 못 되는 이야기. 우리 사람들이 보면 구미호의 삶이 더 능력 있고, 멋져 보이는데도 말이다. 대부분 사람이 되고 싶은 요괴나 동물들은 주로 다 사람이 되는 데 실패를 해서 시청자들의 눈물을 자아내곤 했다. 어떤 구미호 드라마는 사람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인간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그 엄청난 능력을 다 포기하고, 꼬리 9개를 다 없애는 고통을 선택했다. 하지만 결론은 사람이 되는 동시에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죽는 슬픈 결말을 내포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전래 된 이야기이고, 현대판으로 각색하면 요즘은 시청자들이 스토리를 결말짓는 세상이니까, 구미호도 사람이 되고, 남자도 안 죽는 결말로 드라마는 끝난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이 조상들이 심심풀이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가 모르는 많은 요괴나 심지어 우주인들이 우리의 삶 속에 같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주 어디선가 인간들을 실험해서 다시 지구에 심어 둘 가능성도 있다. 전 세계에 우주인의 흔적도 많은데, 세계적으로 숨기기 급급한 것 같다. 이런 이야기는 보통 사람들에게 하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기 때문에 서로 통하는 마니아들끼리 모임을 한다. 나는 그 모임의 주최자이다. 그리고 우리 서로는 서로의 신분과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다. 얼굴을 보지만 가명을 쓰고, 개인사는 서로 묻지 않는다. 다만 만나서 어떤 꿈을 꾸고, 현실에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특별한 사람이나 체험을 한 일 등을 공유한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모인다. 그리고 회원이 점차 늘고 있다. 오컬트 족이라 불리는 것 같더라. 우리 모임 회원, 전국에서 다 온다. 서울, 경기에 회원이 제일 많아서 주로 서울에서 모이는데, 지방회원이 오기 힘들다고 불평을 해서 몇 달에 한 번은 지방에서 모임을 하기로 했다. 이런 모임을 몇 년째 하다 보니 서로를 공개하지 않아도 대충은 수준이 보인다. 꿈의 내용이나, 현실 이야기를 하는 걸 계속 듣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나이도 다양해서 나와 같은 중년도 있고, 심지어 청소년들도 있다. 이 녀석들은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로 오는 경우들도 있다. 어르신들은 별로 없는 것이 거동하시기도 불편하고 전국에서 오시기도 힘드실 것이다. 내가 제일 연장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모임의 모든 대화를 녹음해서 기록하는 것도 나다. 그래서 대화록을 엮어서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 출판용은 아니고, 나의 연구 자료로 삼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의 대화를 유출하는 것은 불법이고, 일일이 허가도 받아야 한다. 정기모임에 오는 모든 동료의 대화록이 점차 두꺼워져서 나는 동료들에게 물었다.
“정기모임 대화록을 책으로 엮었는데, 공개해도 될까요?”
다들 결사반대했다. 그러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러면 우리 모두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거라고 했다. 실제로 병원에 다니는 사람도 있다. 물론 담당 의사는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듣는 시늉만 하는 것이지 진심으로 듣는 사람은 없다면서 이상한 약만 처방해 주더라면서 기분이 상해서 안 간다고 차라리 이 모임에 와서 더 속이 편하고, 마음과 말이 통해서 좋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책으로 내지 않겠다. 다만 익명으로 내 연구 자료로 삼는 것도 안 되냐고 물었다. 동료들은 연구 자료라니? 우리가 무슨 실험실 마루타냐면서 더욱 분개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더 많을 테지만 대부분 숨어서 조용히 지내고 있을 것이라고 우리를 알게 되면 그들도 더 위로를 받거나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요? 라고 설득했다. 그래서 모두 자신의 신분과 사생활을 노출하지 않는 선에서 허락을 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의 사생활과 이름, 주소, 연락처도 모른다. 이 메일로 정기모임 연락만 한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나는 결국 이 내용을 엮어서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출판했다. 그리고 인세도 내가 받는다. 논문과 책 제목은 <망상증 환자의 꿈의 대화>이다.
나는 정신과 교수이다.
김진미
나 한가인, 예쁜 탤런트와 동명이인, 얼굴, 전혀 닮지 않았다. 몸매도 관계없다. 사실, 비만이다. 고도비만, 초고도비만이 되기 전에 결심했다. 의사의 처방도 있고, 나도 외모를 떠나서 우선 건강하게 살아야 하니까. 의사는 우선 20킬로그램은 빼라고 했다. 내가 많이 먹느냐? 사실 많이 먹는다. 우리 같은 뚱보들은 몸에 있는 지방세포들이 계속 칼로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지방세포들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영양분과 열량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지럽고, 심지어 쓰러진다. 배가 고프면 의욕도 없고, 아니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동안 유행했던 비움 관련 서적들이 궁금해져서 읽어보기로 한다. 그런데 내용인즉, 위만 비우는 것이 아니라, 의식주 전반을 다 비우는 것이었다. 심지어 생활패턴까지.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부모님 집이니까. 집을 줄일 순 없다. 그럼 내 방은? 내 방에는 옷장, 이불장, 책장, 책상, 화장대, 컴퓨터, 그리고 예전부터 사용하였으나 요즘은 안 쓰는 CD 플레이어, 그리고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오래된 책들이 있다. 그리고 이불장에는 사계절용 이불과 요, 깔개, 베개도 여러 개, 방석, 쿠션, 발 베개까지 있다. 옷장에는 지난 30년간 입었던 모든 옷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내 가방은 30년 묵은 것부터 최근에 구입한 신상 가방까지 가방만 10개. 신장에 신은 또 정리해 보니, 역시 20년 이상 된 신부터 최근 폭탄세일 때 구매한 비 장화까지. 신장의 절반은 내 신발이었다. 엄마, 아버지 것 합친 것보다 내 신이 더 많다. 나는 내가 이렇게 살림이 많은 줄 지금에야 알았다. 그리고 정말 몸뚱이 다이어트보다 내 살림 다이어트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늘 쇼핑하는 쇼핑중독자는 아니다. 다만 지금껏 버리지 못해서 계속 갖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 책장에는 7살 때부터 읽던 동화책까지 그대로 있다. 이 책은 내 평생을 자기 전에 읽고 자던 책들이라 책이 낡다 못해 꼬질꼬질할 뿐 아니라 책에 벌레까지 기생하고 있었다. 나는 눈이 나빠서 몰랐는데, 엄마가 내 방에 들어와 보시곤 햇빛이 비치는 책에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아서 자세히 보니 책벌레들이 꼬물꼬물 기어 다니고 있다고 경악하셨다. 그 책들은 시리즈로 50권짜리 책인데, 내가 최고로 아끼는 책이다. 엄마는 벌레가 살 정도로 오래된 물건은 집에 두는 것이 아니라고 당장 버리라고 하셨다. 나는 그 책을 버리기 싫었지만,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려던 참이라 군말 없이 책들을 버렸다. 그리고 그 책뿐 아니라, 초중고 시절에 읽던 소설, 시, 희곡과 교과서들까지 다 버렸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열심히 보던 나의 애장품인 만화책 수백 권까지 모조리 버렸다. 그리고 CD 수백 장과 함께 CD 플레이어도 버렸다. 요즘은 음악도 휴대폰으로 들으니까. 나는 책장이 5개 있었는데, 책장 3개에 해당하는 책을 모조리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장도 낡아서 같이 버렸다. 심지어 책상도 버렸다. 책상 위에 있던 데스크톱 컴퓨터까지 쓰레기장으로 직행했다. 이 컴퓨터는 10년 전에 아버지께서 쓰시다가 새 걸 구입하시면서 나에게 주신 건데, 부팅하는데 5분 이상 걸리고, 화면 바뀌는데 1분 씩 걸리고 인터넷 뱅킹 하는데 1시간이 걸리는 그야말로 인내심의 끝판왕을 양성하는 기계였기 때문에 정리하는 김에 다 버렸다. 방이 좀 넓어졌다. 책상, 책장 3개, 거기 있던 책들과 CD까지 죄다 사라졌다. 나는 왠지 내 팔다리가 잘린 것과 같은 슬픔을 느끼며 그날 40 여년 만에 처음으로 동화책을 읽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사실 잠이 잘 안 왔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다음날은 예전에 입었으나 지금은 안 입는, 아니 못 입는 옷들을 정리했다. 엄마는 네 몸매로는 옛날 옷은 절대 입을 수 없으니 다 버리라고 하셨다. 절대 날씬해지지 않는다면서. 내 옷들은 사이즈가 44 사이즈부터 55, 66, 77, 88, 99 사이즈까지 있다. 즉 44에서 66까지는 다 버렸다. 44-66까지의 옷은 다 비싼 옷들로서, 그 당시에도 몇십만 원 이상씩 주고 산 옷들이다. 대부분 정장으로 수트가 많고, 콤비도 있고, 재질도 순모제품, 실크제품, 순면, 리넨 제품들과 같이 천연섬유로 된 고급 천이고 메이커도 유명 고가 메이커의 옷들이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뚱뚱해져서도 차마 버리지 못했던 옷들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 옷들을 다 버렸다. 아, 옛날이여, 이런 예쁘고 비싼 옷을 입던 시절이 있었는데, 내가 왜 이리 된 거지? 몸매뿐 아니라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온갖 성인병은 다 갖게 되었다. 몸이 무거우니 더 움직이기 싫고 집에서 뒹굴뒹굴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종일 TV만 보고 있었다. 엄마는 그 꼴도 보기 싫으니 제발 좀 나가달라고 하신다. 나는 그 말이 맞다 싶어 우선 뒷산에 가기로 했다. 평지 걷는 것도 힘들어서 안 나갔는데, 산에 오르려니 숨도 차고, 너무 힘들어서 곧 포기했다. 작심 3일도 못 지켰다. 그냥 아파트 주변을 몇 바퀴 돌기로 했다. 그것도 매일 하려니 쉽지 않더라. 하루는 밖에 나가기 싫어서 휴대폰으로 유투브 채널을 보다가 집에서 혼자 하는 트레이닝이라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거기 ‘플랭크’라고 하는 체조? 요가? 뭐 하여튼 그런 동작이 있었는데, 우리말로 널빤지의 뜻이다. 즉 몸을 널빤지처럼 죽 펴고 팔꿈치와 발가락 끝만 땅에 대고 나머지 몸통은 널빤지 자세로 공중에서 버티는 것이다. 트레이너의 말에 따르면 자기는 5분씩 하루에 3, 4번 한다고 한다. 나는 처음 시도한 날, 5초도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힘든 체조가 있단 말인가? 그 짧은 5초 동안 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온몸의 혈관 속의 피가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관통하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며 부들부들 떨다가 바닥으로 털썩 엎어졌다. 세상에 이걸 5분씩 한다고? 저 사람, 정말 사람이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등산하는데도 한 시간은 걸리고, 아파트 주변 걷는 것도 30분은 걸리는데, 플랭크는 전문가도 5분을 한다고 하니 이렇게 간편하고 시간 절약되고 밖에 안 나가도 되고, 이런 운동이 없겠구나 싶었다. 나는 너무나 게을러서 걸을 때도 거리를 계산해서 최소 동선으로 이동한다. 적어도 이 체조는 작심삼일로 끝나지는 않겠다 싶었다. 나는 매일 5초씩 플랭크 운동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10초를 버텼다. 한 달 후 30초, 3개월 후, 1분, 1년 후, 2분, 2년 후, 3분, 3년 후, 대망의 5분을 통과했다. 그 3년 동안 나는 99 사이즈에서 77 사이즈가 되었다. 드디어 비움의 미학이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나는 매일 5분 운동한다. 그런데, 77 사이즈에서 더 줄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내가 플랭크 시간을 더 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6분에서 7분은 해야 하는데, 매일 5분 하는 것도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 속에서 부들부들 떨다가 쓰러지기 때문이었다. 이 상태에서 시간을 억지로 늘리려다가는 살은 빠지겠지만 허리가 어긋나거나 관절이라도 잘못될까 봐 겁이 나서 시간을 늘리지 못했다. 그리고 완전하지 않은 자세에서 억지로 버티기만 한다고 살이 빠질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77 사이즈가 되니까 대사증후군도 사라지고, 우선 사람들이 뚱보라고 놀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66 사이즈 이하의 옷은 다 버려서 더 날씬해지면 옷도 새로 사야 하는데, 옷값도 부담스럽다. 운동은 플랭크와 스트레칭만 한다. 이제는 먹는 걸 비울 차례이다. 하루에 세 끼 그리고 세 번의 간식을 먹었었는데, 이제는 하루에 두 끼만 먹는다. 공복 시간이 길어야 효과가 있다고 해서 아침을 굶는다. 저녁을 굶기는 너무 어렵다. 엄마가 저녁에 주로 맛있는 반찬을 만드시니까. 아침을 건너뛰고, 점심과 저녁은 가능한 시간을 당겨서 먹는다. 즉 먹는 시간은 가깝게 하고 공복 시간을 길게 늘이는 것이 포인트이다. 그 대신 먹을 때는 양껏 많이 먹는다. 나는 배고픔은 못 참는다. 하루 6번 먹다가 2번 먹는데, 먹을 때만이라도 배부르게 먹어야지. 그것도 못 먹고 사는 게 사는 것인가? 게다가 지방과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 위주로 섭취한다. 그 좋아하던 빵, 과자, 케이크, 초콜릿, 아이스크림, 캐러멜, 사탕들을 다 끊고 카페인 음료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술, 담배는 원래 안 한다. 결국, 의식주 중에서 주거환경, 옷, 음식을 좀 비웠다. 비운 만큼 살이 빠졌다. 살 빠진 만큼 건강해졌다. 그런데 의식주는 비웠는데, 마음을 아직 못 비웠다. 몸과 환경을 비웠으니, 이제는 머릿속과 마음을 비울 차례이다. 나는 하루 종일 뭔가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것 같아서 뭐라도 해야 한다. 책을 읽든지, 음악을 듣든지, 하다못해 TV라도 봐야지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게 있지 못한다. 항상 잡다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운다. 어제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인지심리학 교수의 강연을 들으러 갔는데, 거기서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전 세계에서 한국인이 머리가 제일 좋고, 제일 독특, 독창적이고, 제일 부지런하고, 제일 잠을 적게 자고, 전 세계인 중에서 가장 반 낙천적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잠을 자는 것을 죄악시하는 민족이라고 했다. 그리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발생하는 어처구니없고, 치명적인 예시를 들어주셨다. 무서웠다. 잠을 못 자서 국가 횡령범이 될 수도 있고,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입시와 입사면접에서 탈락할 수가 있구나. 나는 놀고먹고 자는 것이 늘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 자신을 더 사랑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머릿속을 너무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이제 좀 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TV도 끊었다. 드라마 완전히 끊었다. 드라마는 정말 중독이다. 그리고 잠을 좀 더 자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은 저녁 8시경 주무셔서 새벽 3시경 기상하셔서 새벽 운동을 하시고 여름엔 6시에 봄, 가을엔 7시, 겨울엔 조금 더 늦게 아침 식사를 하신다. 나도 같이 8시에 자야겠다. 새벽부터는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같이 자려고 했는데, 잠이 오지 않아 말똥말똥하다가 밤새, 새벽 내내 잠을 설쳤다. 머릿속을 비우는 것도, 쉽지 않구나. 그리고 마음은 또 어떻게 비우지? 욕심을 버려야 하나? 나는 별로 가진 것이 없는데, 여기서 더 어떻게 비우나? 욕심을 버린다는 것이 꼭 좋기만 한 것일까? 머리도 비우고, 뱃속도 비우고, 집도 비우고, 옷장, 창고도 비우고, 마음도 다 비우면 그게 사람인가? 산속에 들어가서 면벽 수행이라도 해야 하나? 정말로 모든 걸 다 비우고 속세에서 떠나 살 수 있는 것인가?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야 하는 거냐고? 나는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를 실천할 그릇이 못 되는 것이다. 먹는 즐거움도 포기하면서까지 살아도 사는 게 재미가 있나?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도인이 아니다. 달마 스님처럼 자신의 몸까지 남에게 내어 주는 비움을 실천할 수 없다. 여기까지가 최선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역시 <월든> 호숫가에서 비움을 실천하고 살았어도, 살아생전엔 책도 안 팔리고, 폐결핵으로 45세에 쓸쓸하게 사망하지 않았나? 비움의 미학도 사람마다 적정수준이 다 다른 것이다.
나는 다시 예전처럼 고기와 초콜릿을 마음껏 먹고, 옷도 사고, 가방도 사고 다시 책도 많이 읽고, 소파 위에서 뒹굴뒹굴하고, TV 예능 채널을 보면서 깔깔대고 웃는다. 그동안 비움을 실천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사지도, 읽지도, 웃지도 못하고 살았다.
김진미
드디어 임신했다. 결혼하고 5년 만이다. 나도 전엔 불임클리닉에 열심히 다니던 부부 중 한 명이었다. 남편은 덤덤했다. 나 혼자 애태웠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임신이 되었다. 열심히 태교했다. 출산했다. 내가 참을성이 부족해서 제왕절개를 했다. 딸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예쁜 아가라고 하셨다. 우리 부부는 행복했다. 최고급 유아용품으로 방을 채워주고, 옷도 유모차도 젖병부터 장난감까지 최고급으로 준비했다. 남편은 요즘 일찍 퇴근해서 온다. 전에는 늦게 오더니만... 우리 부부는 서로 애 기저귀를 갈아 주겠다고 소동을 피웠다. 딸은 피부가 하얗고, 입술은 붉고, 머리카락은 숱이 많고 새카만 것이 그야말로 백설 공주다. 우리는 우리 공주아기씨를 애지중지 키웠다. 우리 딸은 공주님이라 그런지 움직임이 느리고, 말 수도 없고, 너무 점잖다. 내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인가? 또래 아기들보다 성장이 느리고, 다른 아기들이 걸어 다니는데, 우리 공주님은 아직 배밀이를 한다. 다른 아기들이 엄마, 아빠를 부르는데, 우리 공주는 묵묵부답 묵언 수행 중이시다. 다른 아기들은 기저귀를 뗐는데, 우리 공주님은 여전히 기저귀를 채워줘야 한다. 아.... 언제쯤 공주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이라서 공주님의 발달이 좀 느리더라도 기다릴 수 있다. 태어나 준 것이 어딘가? 요즘은 불임부부도 많은데, 우리는 그래도 낳았잖아? 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친구들은 둘째, 셋째까지 낳았다. 우리는 공주 아기씨 한 분 모시기도 벅차서 둘째는 꿈도 꾸지 못한다. 이제는 친구들은 모임에 제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집에 두고 오기 힘들다면서. 나는 공주님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외출한다. 공주님이 혼자 계실 순 없지 않은가? 시종이나 시녀가 항상 수발드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공주님이 신경 쓰여서 친구 모임에도 1차만 가고 바로 집으로 달려간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친구들도 애들을 데려오지 않는다. 학교에 보내고 학원에 보내고, 수험생이니까. 나는 우리 공주님을 최측근에서 수발을 든다. 고양이 있는 친구는 자기가 집사라고, 고양이가 상전이라고 떠받든다고 한다. 나는 우리 공주님이 그렇다. 내가 유모인지, 집사인지. 공주님이 화라도 내실까, 울고불고하실까, 혹시라도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실까, 늘 노심초사한다. 이제 친구들도 너무 딸한테 잡혀 사는 거 아니냐고 구박을 한다. 그 정도 컸으면 알아서 밥도 챙겨 먹고, 학교도 가고 하는 거라면서. 나는 그냥 조용히 웃고 대답을 피한다. 이제 친구들은 애들이 대학에 들어갔다. 우리 공주님은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한다. 남편은 이제 직장에서 중역이 되었다는 핑계로 집에 늘 늦게 들어온다. 나도 혼자서 공주님 수발드는 것이 힘들다. 예전에 서로 기저귀를 갈아주겠다고 다투던 일이 생각난다. 오늘도 나는 공주님을 목욕시키고,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려주고, 옷을 입히고, 기저귀를 새로 채워주었다. 우리 공주님 이제 17살, 꽃답고 아름다운 나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백설 공주를 닮은 딸.
딸은 정신지체장애 1급이다.
김진미
나는 타로마스터 후보자. 타로마스터가 뭐냐고 묻는다면, 흠. 요즘 타로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라고 반문하고 싶다. 쉽게 말하자면 점치는 사람이다. 옛날에는 점을 주역점을 치거나 동전점, 화투점. 기타등등 많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타로가 들어와서 그런 점들을 전부 몰아내고 말았다. 실은 나도 주역점을 쳤었는데, 주역은 내용도 까다롭고 해석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내공과 실력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이라 내담자에게 제대로 상담이 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어느 날 고모가 나보고 아직 주역을 하냐고 물었다. 고모는 사주명리가인데 본래 사주명리하는 사람은 사주명리만 하지 않는다. 기본으로 주역의 육효나 자미두수, 귀문둔갑, 매화역수와 같은 것을 부가적으로 하기 마련이다. 물론 나도 사주명리, 작명 등을 한다. 그리고 주역을 추가로 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런데 고모가 요즘 신세대 고객들은 주역으로 점보는 사람이 없다면서 그리고 주역 제대로 해석은 되냐고 하셨다. 나는 수련하는 중이라고 언젠가는 명확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라 대답했는데, 고모가 타로를 하라고 하셨다. 타로? 그게 뭔데?
타로의 기원은 이집트, 중국, 인도 기원설과 모로코, 수피(Sufi-이슬람의 신비주의자들), 카타르(Cathar-그리스도교에서 파생된 12~13세기 서유럽에서 번창했던 이단교), 유태 밀교 신자들에게서 나왔다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타로는 옛날 집시들뿐 아니라 기타 중세 시대 때부터 유행했었던 것 같은데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로 퍼져나간 것 같다. 타로의 그림문양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유니버설 타로인데, 가장 기본적인 카드라 할 수 있다. 그림문양은 타로마스터가 자기식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려서 만든 버전들도 있고 셀 수없이 많다. 타로마스터는 타로카드 메이저 카드 22장, 마이너 카드 56장, 총 78장을 가지고 상황에 따라 여러 장을 추출하여 내담자의 상담내용에 대답해준다. 주역은 팔괘와 64괘를 가지고 운영한다. 주역은 기호만 가지고 해석을 하는데 반해 타로카드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직관적으로 해석이 용이하다. 그림에 나온 그대로 읽어주면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그 그림만 보면 적어도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를 알 수 있다. 주역은 양과 음의 기호를 6개 쌓은 것이 팔괘. 팔괘를 중첩하여 만든 것이 64괘가 된다. 64괘의 변효를 뽑아서 결과값을 구하기도 한다. 주역은 고대 주나라 기원설을 가지고 있으며 공자가 주역의 완성자로 불린다. 그리고 한자문화권에서는 역경이라고 해서 사서오경에 포함되었다. 퇴계 이황선생도 주역의 대가시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전쟁에 앞서 늘 주역점을 치셨다. 나는 그분들처럼 대가가 되지 못하고 손쉽게 타로의 길로 들어섰다. 그날부터 더 이상 주역점은 지 않게 되었다.
사주명리건 점이건 간에 모든 운명학, 점은 여자들이 주로 본다. 남자들은 거의 보지 않는다. 99퍼센트가 여자 내담자라 할 수 있다. 남자들이 상담을 요청하러 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최악으로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을 때 그때 찾아온다. 그래서 별로 해줄 말도 없다. 반면 여자들은 온갖 것을 다 물으러 오기 때문에 한번 시작하면 끝도 없이 질문한다. 그래서 시간을 정해서 요금을 책정하거나 질문 하나당 얼마라고 하지 않으면 시간과 에너지 소비가 극에 달하고 손에 남는 것은 없게 된다. 그것도 하나의 요령인데 고모는 사주명리를 하건 타로를 하건 무조건 20분 이내로 상담을 마친다고 한다. 그것도 재주인데 나는 한번 상담을 시작하면 기본이 2시간이고 그것도 내가 목과 입에서 단내가 나고 기력이 빠져서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상담을 하게 된다. 즉 내담자의 수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내담자는 푼돈을 던져주고 가버린다. 나는 상담을 하면 할수록 기력이 쇠잔해지고 돈은 돈대로 못 받는 불상사가 생겨서 상담가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고모는 딱 20분 만에 상담이 끝난다는데, 그래서 돈도 잘 벌던데, 왜 나는 한번 하면 중간에 끝내지를 못하는 것일까? 실력이 있는 자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말이 길어질수록 정확도가 떨어지게 되고 고객의 신뢰를 잃게 되는 것이다. 소위 잘나간다는 무속인들의 점사는 심지어 1, 2분 만에 끝나기도 한다. 그것도 반말로 윽박지르기도 한다. 그래도 고객들은 용한 보살님이라고 줄을 서가면서 돈을 갖다 바친다. 즉 나는 수십 년을 공부하고 연구를 했지만 고객관리를 못 해서 영업이 안된다. 즉 돈이 안 된다. 고모는 나보다도 훨씬 늦게 시작했건만 사주명리와 타로로 생활비를 다 충당하고도 남는다. 나는? 목에서 피가 나도록 열심히 상담하는데도 돈도 안 되고 진만 빠진다. 돈 안 되는 고객만 온다. 그런 고객들은 형편도 어렵거니와 상담내용도 좋은 내용이 별로 없어서 상담료를 더 달라고도 할 수 없다.
타로마스터는 신세대 고객들이 많아서 주로 자기광고를 유투브에 타로 점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올린다. 유투브라는 신문물이 있어서 공짜로 자기 광고를 할 수 있으며 구독자가 늘면 또 수입원이 된다. 잘나가는 유투버 타로마스터는 손에 꼽히는 몇 명이 있는데 그들은 유투브에서 수입도 들어오고 광고도 되고 구독자가 다른 손님들도 직접 내방하여 점사를 보고 가기도 한다. 유명한 유투버 타로마스터는 TV에 출연하기도 하고 해서 더 유명해지기도 한다. 물론 나는 아직 유투브에 올리지도 못하고 광고도 못 하고 내방객도 거의 없다. 그냥 혼자 수련하면서 유명 타로마스터가 어떻게 하는지를 유투브를 보면서 연구하고 있다.
어느 날 드디어 내방객이 방문했다. 나는 따로 사무실을 낼 형편도 안되고 해서 그냥 집에서 지인만 상담한다. 낯선 사람의 경우는 집 앞 카페에서 상담한다. 오늘은 이종사촌이 소개한 사람으로 집 앞 카페에서 만났다. 두 명인데, 한 명은 아들 하나 있는 과부. 한 명은 아들, 딸 있는 주부였다. 고객이 한꺼번에 둘이 오면 한 명 씩 상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 명은 저편에서 차를 마시면서 기다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주부이건 아니건 간에 상담내용은 비공개와 비밀 엄수가 원칙이다. 그래서 고객들은 정말 자세히 상담을 하고 싶으면 친구들과 함께 내방을 하면 안 된다. 혼자 오는 것이 고객에게도 상담자에게도 더 편하고 진지한 상담이 된다. 보통 젊은 여성 고객들의 경우는 친구들과 함께 오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것은 제대로 상담을 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재미로 잠깐 놀다 간다는 심정으로 오는 것이다. 절실하고 진지한 상담을 원한다면 혼자 가는 것이 맞다.
카페에서 주문을 하라고 했더니, 자기들 것만 주문한다. 나는 그냥 물만 마시면 된다고 하였다. 먼저 과부의 상담이 시작되었다. 딱 봐도 관상부터가 벌써 심상치 않다. 과부가 괜히 과부이겠는가?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면 안 되니까, 먼저 질문한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대답이 가관이다.
“그런 것을 물어야 아나요? 이런. 소개받고 왔는데 영 시원찮네.”
속으로 생각한다. 이러니 과부지. 그래도 오랜만에 온 고객인데 친절하게 대해야지.
“네, 고객님. 저는 무속인이 아니라서요. 그냥 얼굴 보고 점사를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먼저 생년월일시를 말씀해주시고, 또 어떤 것이 가장 궁금하신지를 말씀해주셔야 그에 따른 대답을 해드리죠.”
“197@년 @월 @@일. 새벽 4시 경이요. 돈 벌고 싶은데 재물복이 있나 봐주세요.”
사주를 보니 부모복도 없고 남편복도 없다. 아들 하나 있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주로 한다.
“아드님이 착하고 효자네요.”
“우리 아들이야 뭐 너무 착해서 탈이죠.”
“네. 잘 키우셔요. 꼭 어머니를 잘 모실 겁니다.”
“우리 아들 착한 거는 다 아니까. 돈 벌 수 있나 봐달라니까요.”
사주에 재산은 없어도 재물이 아예 없는 사주는 아니었다.
“고객님. 돈 없다고 하시는데 돈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닌데요. 정말 하나도 없으신 거예요?”
“없어요. 당장 취업해야 해요. 실은 술집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들이 반대를 해서.”
“저런. 고객님. 고객님의 사주는 아들이 유일한 희망이고 용신인데 아들이 싫어하는 일을 굳이 하시고 싶으신가요?”
“제가 뭐라고. 엄마 하는 일에 이래라저래라 간섭인지. 돈이 없으면 학비도 못 낼 판인데.”
“아드님이 몇 살인데요?”
“이제 공고 졸업하고 취업 준비 중인데요. 전문대라도 보내려면 돈이 있어야죠.”
“아드님이 어머니가 술집에서 번 돈으로 공부하겠대요?”
이런. 눈에 쌍심지가 돋는다. 기분이 나쁜 모양이네. 역시 나는 상담가로서 실격이야. 고객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듣기 좋은 말을 해야 하는데, 또 입바른 소리를 하고 말았어.
“돈이 돈이지. 뭐 깨끗한 돈. 더러운 돈이 따로 있나? 제가 학비 낼 형편도 안 되는 주제에 엄마가 대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무슨 엄마 일에 간섭이야?”
속으로 생각한다. 이런. 오늘도 상담은 텄구나. 아니나 다를까. 온갖 잡소리를 해대며 짜증을 낸다. 나는 한 시간 넘게 과부의 욕지거리를 듣다가 지쳐서 비방을 알려 준다.
“고객님. 아드님이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돈이 필요하시면 간절하게 100일 기도라도 해보세요. 다른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나는 과부의 생년월일시에 맞는 북동쪽으로 정안수를 떠놓고 매일 자정에 간절히 기도하라고 했다. 정성이 닿으면 하늘이 대답을 해줄 거라고 하면서. 그랬더니
“아니, 매일 자정에 술집에서 일해야 한다니까 기도할 시간이 어디 있어?”
이런. 끝까지 술집에 가겠다는 거야? 그러면 상담은 왜 하려고 왔어? 마음대로 하면 되지.
“고객님. 꼭 술집에서 일하셔야겠어요?”
“아니, 그렇다니까.”
눈에서 핏발이 선다. 나는 소름이 끼쳤지만 끝까지 질문한다.
“그러면 백일기도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우리 아들보고 하라고 하지 뭐. 그 애는 착하니까 내 말을 들을 거야.”
이제는 아예 반말을 한다. 나이도 나랑 같은데, 뭐 친구 하자는 건가? 그리고 그 방향은 과부 너에게 맞는 방향이지. 네 아들에게 맞는 방향이 아니거든이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나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어서 기본적인 사주풀이를 해주고 아들 사주를 다시 봐주면서 아들 잘 키우라고 하고 상담을 마쳤다. 벌써 2시간이 지났다. 저편에서 차를 마시면서 기다리는 주부가 지쳤을 것이다. 나는 이미 진이 다 빠졌다. 더 웃긴 것은 이 과부가 2시간을 진을 빼더니 달랑 2만 원을 투척하고 가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했다.
“고객님. 상담료를 얼마라고 소개받으셨나요?”
“일 인당 만 원 아니야? 그렇게 알고 왔는데.”
아차. 이종사촌이 저는 내가 매일 공짜로 봐주니까 제 친구도 공짠 줄 알았나 보네. 내 잘못이야. 상담료를 제대로 말을 해야 했는데. 나는 친척 간에 돈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다. 이제 더 이상 말할 기운도 없다.
“네, 그렇게 알고 오셨으면 할 수 없죠. 다음 고객님. 오세요.”
“아유. 저 언니는 무슨 말이 저리 많은지. 기다리다 지쳤네.”
“네. 고객님. 생년월일시를 말씀해주세요.”
“19@@년 @월 @@일 10시. 그리고 우리 남편은 19@@년 @월 @@일 11시. 우리 딸은 19@@년 @월 @@일 오후 4시. 아들은 19@@년 @월 @@일 9시.”
“가족 네 명을 다 보시려고요?”
“네. 우선 우리 남편이 이번에 공장을 차렸는데 장사 잘될지 봐주시고, 딸은 이번에 취업했는데 잘 간 건지. 그리고 아들은 뭘 해야 하는지.”
가족 사주를 다 뽑았다.
“네. 우선 남편분은 사업보다는 직장생활이 더 맞는 분이세요.”
“이런. 퇴직하고 퇴직금 받아서 공장 시작했어요.”
“이미 사표 내셨으면 할 수 없죠. 내기 전에 상담하셨어야죠.”
아차. 또 잔소리를 하고 말았네. 역시 나는 상담가로서 실격이야.
“그래서 공장은 김해에서 장유로 옮겼는데 그건 또 어때요?”
보니 방향도 틀렸다.
“고객님. 이사하기 전에 상담을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공장도 원래 있던 곳이 더 나은데요.”
아. 오늘 고객들도 하나 같이 다 일 저지르고 나서 해결해달라는 식인가?
“그러면 어쩌죠?”
그래도 남편은 기가 약해서 공장 운영할 그릇은 아니고 이 아주머니가 오히려 사장감이다.
“고객님. 남편분을 도와서 같이 운영을 하시는 것이 좋겠네요. 이름은 남편분이 사장으로 있되 사모님이 주로 일을 하셔야겠어요.”
“실은 내가 일을 다 해요. 경리 일도 내가 다 하고. 요즘 애들 일하는 것이 마음에도 안 들고 월급만 축내고.”
“네. 사모님은 주축으로 일을 하시는 것이 낫겠어요. 남편분은 혼자서 일하시기 버거우실 거예요. 원래 직장생활만 하시던 양반인데, 또 그것이 맞는 일이고.”
“그래요. 그리고 딸은 이번에 들어간 회사가 잘 맞나요?”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나요?”
“디자이너예요.”
“아. 디자이너라면 잘 되었네요. 딸은 보니까 예쁘게 꾸미고 장식하는 일이 잘 맞아요. 직장을 잘 구했네요. 회사도 위치도 다 좋아요. 지금 딸이 운이 제일 좋네요.”
“아들은요?”
“아드님은 아직 학생인 것 같은데 어디 취업준비하나요?”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고 있긴 한데.”
“올해나 내년은 좀 힘들고요. 더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몰라도 굳이 공무원 시험을 추천하고 싶진 않네요.”
“그러면 뭘 시키죠? 제 아버지 공장에서 일하라 할까요?”
“아버님은 혼자 운영하실 분이 못되시니까 사모님과 아드님이 도와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가족이 운영하시면 되겠네요.”
“아? 그래요? 그러면 공장에 나와서 일하면서 일 배우라고 해야겠네.”
“그것이 더 좋겠어요. 시험운이 그다지 좋지 못하네요. 몇 년 동안은.”
“딸이 직장에 들어가서 다행이네. 일도 잘 맞고.”
“네. 그렇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가족 전부 상담하는데 1시간 걸렸다. 이 아주머니는 4만 원을 투척한다. 나는 이 아주머니는 사는 것도 괜찮고 가족관계도 양호해서 한마디 하였다.
“고객님. 다른 곳에서는 상담료를 얼마 내시나요?”
“얼마 전에 무당한테 남편 사주 보고 5만 원을 내긴 했는데.”
“한 분 사주 보는데 시간은 얼마나 봐주던가요?”
“10분?”
“그래요. 10분 동안 한 명 보는데 5만 원을 주셨는데. 오늘 저에게 한 시간 동안 가족 4명 다 보시고 4만 원 내시는 거예요?”
이제는 이 사람들을 보내준 이종사촌에게 짜증이 난다. 소개해 준 것이 고맙지도 않다.
“아? 그래요? 그러면 5만 원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3시간 동안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떠들었는데 7만 원을 벌었구나. 나는 차도 한 잔 안 사주고 자기들만 마시고 가다니. 기본 매너가 안되어있어. 아냐. 그래도 7만 원이라도 벌었잖아. 원망하면 안 되는 거지. 정말 돈 벌기 어렵다. 고모는 3시간이면 45만 원은 벌었을 텐데. 역시 나는 상담가로서 실격이야. 고모에게 전화한다.
“고모. 고모는 어떻게 해서 상담을 20분 안에 끝내? 나는 끝낼 수가 없어.”
“글쎄다. 딱 질문하는 것 대답만 하고. 바로 다음 손님? 하고 부르거든.”
“그래? 그럼. 다른 고객이 없으면. 어떻게 해? 다음 손님을 부를 수 없잖아? 나는 내담자가 계속 질문을 하니까. 대답하게 되고. 그리고 질문이 끝이 없거든. 그런 사람에게 그만 말하라고 할 수가 없어.”
“나는 잘하는데. 역시 넌 연구가 스타일이지. 상담가 스타일은 아냐.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있어.”
“나는 상담을 하면 할수록 힘이 빠지고 지쳐서 말하기도 힘들어.”
“공부는 네가 먼저 시작하고 나는 네가 나보고 사주명리 공부하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돈은 내가 먼저 벌었잖아. 너는 돈 버는 재주가 없는 모양이지.”
“그런가 봐. 그리고 나는 자꾸 내 입장에서 잔소리하게 돼.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고객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 상식인데 말이지.”
“너무 심각하게 보지 마. 단순하게 돈벌이 대상이라고 생각해.”
“그게 안 된다니까. 나는.”
“그러니까 타로를 하라고. 타로는 한 질문당 돈을 받아. 너처럼 계속 말할 필요가 없지. 질문당 돈이 오르니까, 시간이 가도 참, 아니다. 넌 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대답할 테니까. 소용없나?”
“타로는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너 주역점 치듯이 하면 되지. 너 주역을 그리 오래 했는데 어떻게 하는지 몰라? 타로가 훨씬 쉬워. 그림에 나온 그대로 읽어주면 되는데. 나도 하는데, 네가 왜 못하니? 신세대면서?”
“내가 신세대면 아니다. 고모보다는 신세대지. 알았어. 한번 볼게.”
그길로 도서관에 가서 타로 관련 책들을 빌렸다. 그리고 며칠 동안 내도록 읽었다. 읽고 나니 내용이 어려운 것은 없었다. 단 나처럼 역학을 오래 하던 사람들은 금방 배울 수 있지만, 아예 처음 하는 사람은 즉 역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하면 어려울 수도 있다. 나는 사주명리 상담한 지가 20년이 넘었다. 주역을 한 지는 10년이 넘었고. 연구는 오래 하였으나 상담가로서 실격인지라 영업이 안 되는 것이 문제이다.
인터넷으로 카드를 구입했다. 벨벳 주머니에 담겨서 왔는데, 작은 책자도 함께 동봉되었다. 그 책자만 봐도 대충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관련 인터넷 상담사례와 유투브에 올린 상담사례를 전부 보기 시작했다. 음. 다들 이렇게 해석하고 설명을 하는구나. 나는 이걸 연구해야 해. 다른 상담가들은 어떻게 진행하고 말을 하고 해석하고 대화하는지를 알아야 해. 점사를 보는 고객은 99퍼센트 이상이 여자들인데 타로마스터는 남자와 여자가 반반이었다. 사실 사주명리하는 선생들도 남자가 더 많긴 하다. 점사를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여자들인데 가르치거나 영업을 하는 사람은 남자가 더 많다니 그것도 참 아이러니하다. 본래 사주명리가 주업이라서 지금도 사주명리관련 유투브를 더 많이 보는데 거의 대부분 남자 선생이다. 타로는 사주명리나 주역보다 훨씬 빨리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쉽게 접근해서 빨리 돈을 벌 수도 있다. 사실 타로 자체의 내용은 별다른 것이 없다. 해석하는 사람의 인격과 기본적인 학력과 지식, 그리고 공감 능력과 판단력과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이 더 필요한 것이다. 즉 몇십 년 배우고 익힐 만한 것이 아니다. 인격과 지식을 수행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오늘도 타로 유투브 영상을 본다. 거의 매일 한 편씩은 올라오는데 구독신청한 타로마스터가 몇 명 있다. 타로마스터도 여자보다는 남자 선생이 훨씬 쉽고 객관적으로 설명을 잘해주는지라 주로 남자 타로마스터의 동영상을 본다. 조회수가 높은 여자 타로마스터의 영상을 보기는 하는데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과 기본지식의 수준이 남자 선생들보다 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주명리건 타로건 간에 강의하는 사람이 비속어를 남발하는 것은 정말 듣기가 싫다. 기본적인 인격수준이 떨어져 보인다. 유명한 강사의 영상이라서 계속 보기는 하는데 왜 수업시간에 비속어를 사용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너무 선정적인 제목을 달아서 올리는 영상도 마음에 안 든다. 나는 연구를 위해서 그 영상도 보긴 보는데 내용에 비해 제목이 너무 선정적이었다. 즉 낚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유투브 영상 조회수에 너무 목을 매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렇게 해야 조회수가 올라가는 것인가? 어차피 공부할 사람은 제목에 상관없이 다 볼 텐데. 일반인은 봐도 이해도 못 할 내용인데. 꼭 그렇게 올려야 하나? 물론 나는 그 어떤 영상도 올리지 않는다. 올릴 만한 능력도 안 되고, 따로 내 사무실이나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고객이 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 학문적으로 연구만 한다. 고객 상담사와는 거리가 멀다.
유투브에 올라오는 타로 영상은 주로 “귀인이 언제 오나?” “그 사람의 속마음은?” “우리는 인연인 것인가?” “3개월 후의 내 모습?” 이런 제목의 영상이 주로 올라온다. 제목만 봐도 고객은 전부 여자들인 것이다. 남자들은 저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남자들의 주요 상담내용은
“돈 어떻게 버나?” “여자를 어떻게 꼬일까?” 이 두 가지 외에는 관심이 없다. 당연히 대답할 말도 단답형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여자고객들보다 훨씬 대하기 쉬울 수도 있다. 상담이 10분도 안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들은 자기가 이미 답을 다 정한 후에 확답만 받으러 오는 것이기에 자기 생각과 다르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즉 상담하러 올 필요가 없다.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상담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남자들은 사업이 망해서 부도가 나서 신용불량자가 되어 자살하기 직전에 찾아오던가. 마누라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이후에 오던가. 자식이 사고나 나서 죽고 난 뒤에 오던가. 아니면 마누라 몰래 만들어 둔 자식이 갑자기 찾아왔다던가. 이런 경우에만 오지. 대부분 오지 않는다고 한다. 원래 상담이라는 것은 큰일을 앞두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찾아와서 도움을 받는 것이지 이미 엎질러진 물인 상태에 와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자들은 결정하기 전에 상담받으라고 하면 “그딴 것을 왜 믿냐? 내 주먹을 믿으면 믿었지.” 이런 식이다가 막상 일을 그르친 후에 그때 상담가에게 가서 이야기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면 뭐하냐고?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다 우리 집 남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말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주식을 하면 안 된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집을 날리고 재산을 탕진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말 안 맞네라면서 한탄한다. 하지만 반성도 그때뿐.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된다. 속이 터진다. 내가 우리 집 식구도 제대로 상담을 못 하고 있는데 무슨 낯으로 남을 상담하겠는가?
고객이 없어서 내 타로점을 본다. 이달의 운세. 매월 이달의 운세가 뜬다. 물론 여러 타로마스터가 올린다. 몇 군데서 이달의 운세를 다 보았다. 결론은 희한하게도 대부분 비슷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 맞는 것이지. 다 틀리면 타로가 하나도 안 맞는 것 아닌가? 누가 봐도 내 이달의 운세는 비슷하게 나와야 정상인 것이다. 그래야 타로에 대한 믿음도 생기는 거고. 나 자신이 타로를 믿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타로점도 봐줄 수 없는 것이다. 몇 달 동안 나 자신의 타로점을 보면서 정확도를 측정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내 점을 보면서 타로가 얼마나 정확한지 맞는지. 그리고 어떤 타로마스터가 나와 제일 자 맞는지를 찾는 중이다.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타로마스터가 있다. 조회수가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조회수가 높다고 다 나와 잘 맞는 것은 아니다. 조회수가 높은 여자 타로마스터의 영상 중에서 타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보면 사기다 싶은 내용도 있다. 심지어 엉터리, 정반대의 해석을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 영상을 보는 사람 중에서 타로의 내용을 아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도 대부분 타로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점사만 보고 끝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즉 엉터리, 반대로 해석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다. 한숨이 났다. 이런 사람이 조회수가 이렇게 높게 나오는구나. 역시 실력과 영업능력은 다른 것이다. 사주명리와도 마찬가지다. 사실 내가 고모보다 실력이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 하지만 영업은? 고모의 수입의 100의 1도 못 된다. 나는 상담가로서 실격이고 영업은 전혀 안 된다. 저 조회수 높은 타로마스터는 엉터리로 해석을 해도 조회수가 높아서 돈을 버는구나 싶었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은 사주명리를 보러 오지 않는다. 연세든 어르신들은 가끔 오신다. 자식, 손주 작명하러 오신다. 그 외에 10대부터 30대까지는 타로를 본다. 나도 신세대에 적응해야 한다. 타로마스터들도 대부분 젊은이들이다. 중년 타로마스터도 있긴 한데 내 기준에서는 젊은이이다. 고모는? 70이 다 되어가는데 타로를 보는 신세대 명리학자이다.
이달의 운세. 지난 삼 개월간 계속 이달의 운세를 보았는데, 큰돈이 들어온다. 큰 귀인이 온다. 큰 기회가 있다. 이사, 승진운이 있다. 이 괘사를 석 달째 뽑고 있는데, 큰돈은 안 들어오고 푼돈은 들어왔다. 큰 귀인? 귀인 비슷한 사람도 못 봤다. 참 귀인과 사기꾼은 종이 한 장 차이라던데, 사기꾼을 조심하자. 이사, 승진운? 전혀 가망이 보이지 않는데. 여러 군데서 지난 3개월 동안 뽑은 괘사들이다. 이달 말까지 아무런 조짐이 없으면 타로를 믿지 않기로 하자. 좋은 괘를 계속 뽑아서 기대가 컸건만. 푼돈 외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두 달이 지나니까 슬슬 회의가 오고 믿음이 안 가기 시작한다. 그래. 이번 한 달만 더 기다려 보자. 이번 달도 아무런 일이 없으면 그때 포기하자. 지금 2월 6일이니까. 이번 달까지만 기다려 보지 뭐. 나 스스로가 맞다고 믿을 수 있어야 진정한 타로마스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궁금하다. 과연 타로마스터가 될 수 있을지. 아닐지.
나는 오늘도 귀인을 기다리고 있다.
김진미
집안이 금은방을 하는데, 정작 나는 금붙이를 가진 것이 없다.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금붙이는 파는 물건이지 지니는 액세서리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여자들은 대부분 금은보석을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거의 관심이 없었다. 하나라도 더 팔아야지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결혼할 때 예물로 받는 것이 기본인데, 결혼을 안 하니까 정작 그 흔한 금반지 하나가 없다. 엄마는 있어도 안 끼신다. 집안일 할 때 불편하다고 하신다. 하긴 하루종일 손에 물 뭍이고 사는데 금은보석이 웬 말이란 말인가? 혼수예물을 받으면 된다고 하시더니 아직도 시집 못 가고 집에 붙어 있으니 암말 안 하신다. 요즘은 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서 구매하기도 망설여진다. 금이 비싸니 은을 검색한다. 우리 집에서는 은제품은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을 저렇게나 비싸게 판매하다니. 우리는 금과 은 시세를 매일 보고 있는데, 저렇게 폭리를 취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비싸게 판매하고 있었다. 정말 너무하네. 할 수 없이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그냥 은반지 하나 만들어줘요. 칠보도 예쁘던데.”
“안돼. 이제는 집에서 수제로 만들지 않아. 전부 공장에다 맡기는 거야. 그리고 은은 껴서 뭐하게?”
“예쁘니까 액세서리로 끼려고요.”
“돈 가치도 없는 걸 뭐하러 끼냐? 순금, 다이아몬드 외에는 다 필요 없어.”
“꼭 돈 가치로만 끼는 건가요? 물론 요즘은 금 테크니 뭐니 해서 재테크의 수단으로 삼은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그냥 평생 반지 하나 없이 산 인생이 아까워서 그래요. 그냥 액세서리라도 하나 끼고 싶다고요.”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필요하면 알아서 인터넷 쇼핑을 하든지. 액세서리 숍에 가서 구매하든지 마음대로 하라셨다. 그래서 열심히 폭풍검색을 했는데 내가 봐도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이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도매가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해서 결국 구매를 포기했다. 반지 외에 팔찌, 목걸이도 예쁜 것이 많다. 단 너무 비싸다. 나는 오랫동안 실업자였기 때문에 수중에 돈도 별로 없다. 지금까지 눈앞에 패물들이 널려 있어도 관심도 없더니 갑자기 왜 이리 변한 것인가. 심경의 변화가 놀랍다. 나는 엄마처럼 평생 패물에 관심도 없을 줄 알았는데. 사람이 이리 변할 수도 있구나 싶다. 그러고 보면 20년 전 금값이 약 5만 원 안팎이었는데, 그때 달러는 원 달러 환율이 800원 선이었다. 그러고 보니 금은 500퍼센트 이상 올랐는데 달러는 50퍼센트 올랐다. 그때 금붙이를 많이 사둘 걸 후회가 되었다. 왜 그때 관심이 없다가 지금 오를 대로 올라서 내 능력으로 사지도 못할 형편이 되어서야 비로소 관심이 생기는 것인가? 20년 동안 소매가로 금이 한 돈(3.75그램)에 5만원에서 28만원이 넘게 되었다. 그동안 달러는 800원에서 1200원 정도로 올랐다. 금은방 집 자녀가 금반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 금 한 돈 5만 원 할 때 목걸이, 팔찌. 반지 등등 많이 만들어 둘걸. 그때는 용돈도 받고 해서 수중에 돈이 좀 있었는데, 관심이 하나도 없어서 전혀 구매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온갖 패물을 다 갖고 있다. 물론 결혼해서 혼수예물로 여러 세트를 받기도 했지만, 결혼 후에도 돈이 생기면 금 테크를 할 요량으로 금붙이를 사서 모으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말한다.
“너는 금방 집 딸인데 왜 금붙이가 하나도 없니? 나 같으면 도매가로 살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 많이 샀을 텐데. 아니다. 아버지께서 반지니 목걸이니 팔찌니 해주시지 않았냐?”
“우리 아버지는 계산이 철저하셔서 단 1그램이라도 돈을 받지 않으면 주지 않으셔. 내가 반지를 끼고 싶으면 정확하게 돈을 지불해야 해. 그래서 지금까지 단 한 개도 사지 않았지. 아버지한테까지도 돈 주고 사는 게 왠지 속상해서 말이야. 그런데 지금까지 사지 않은 게 이제 후회가 돼. 너희들 결혼할 그 나이 때 패물을 많이 사두었다면 지금 5배 이상 올라서 금 테크가 쏠쏠했을 텐데 말이야. 너희들도 20년 전에 받은 패물들이 지금 다 올라서 가만히 앉아서 돈 벌었잖아? 결혼할 때 뭐 받았니?”
“다이아몬드 반지와 목걸이 세트. 순금 반지, 목걸이. 팔찌 세트. 루비 반지 목걸이 귀걸이 팔찌 세트. 사파이어 반지, 목걸이 세트. 그리고 진주 반지, 목걸이와 귀걸이를 받았지.”
“많이도 받았네. 그중에 돈 되는 건 다이아몬드 세트와 순금 세트야. 그건 그대로 가격이 올랐으니까. 나머지 유색 보석은 그다지 오르지 않았어. 그래도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은행이자보다는 올랐으니까. 제대로 패물 재테크는 한 셈이야.”
“그래? 하나도 안 팔아서 시세도 모르는데. 금이 오르긴 올랐구나.”
“오른 정도가 아니야. 형편이 어려워서 중간에 팔지 않았다면 5배 이상 고수익을 냈어. 이만한 재테크도 없어. 결혼 안 한 내 입장에서 말하는데, 열심히 끼고 다니라고. 보관만 하지 말고. 나는 끼고 싶어도 없어서 못 낀다.”
“그렇구나. 너는 없어서 못 끼는구나. 아차. 미안. 비웃는 게 아니야.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아가씨니까 반지를 함부로 낄 수 없는 거지. 아줌마로 보일 테니까.”
“그래. 나도 그래서 더욱 반지를 끼지 않았어. 가뜩이나 주변 사람들이 다 아줌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데. 반지까지 끼면 더 그렇게 보이잖아. 하지만 액세서리 차원에서 끼고 싶긴 해. 왼손 약지에는 끼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검지나 새끼손가락 정도는 껴도 되잖아?”
“그렇긴 하지. 하지만 크고 두꺼운 반지는 좀 부담스럽지 않니? 특히 보석이 있는 건 더 그렇지.”
“금은 비싸서 요즘 은반지를 검색하고는 있는데, 은칠보도 예쁘거든.”
“왜 아버지한테 사지 않고?”
“우리 집은 은은 취급하지 않아. 그리고 은은 끼지 말라고 하시고.”
“왜?”
“돈도 안 되는 걸 왜 끼냐고 하시지.”
“꼭 돈으로 따져야 하나? 그냥 액세서리지.”
“그렇게 안 되는 양반이셔. 모든 패물은 다 돈 가치로 따지시거든.”
“그래도 너희 집은 오랫동안 금방을 해서 금이 많을 테니 역시 엄청나게 돈 벌었던 거 아냐?”
“다들 그렇게 오해하는데, 정작 금방 주인은 금을 가진 게 없어요. 금방에서 금을 소유하고 있는 게 아냐. 손님이 오면 주문량만큼만 금 도매시장에서 금을 사다가 공장에 제작을 의뢰하는 것 뿐이야. 직접 만들지도 않아. 직접 만들 던 때는 1960년대, 1970년대 이야기야. 아니, 1980년대만 해도 단순한 디자인은 직접 만드시기도 했는데, 손으로 만든 것은 예쁘지가 않아서 다 디자인 카탈로그를 보고 주문해. 공장에다 맡겨. 그러니 금은방의 역할은 고객과 금공장의 중개자일 뿐이야. 디자인도 다 보석디자이너의 카탈로그를 보고 선택하는 것이고.”
“그렇군. 나는 금방에는 금은보석이 한가득 있는 곳인 줄 알았는데.”
“물론 유명 대형 금은방은 그렇기도 해. 하지만 동네 금은방은 전시용 샘플은 금도금상품이 많아. 단순히 진열된 모양을 보고 선택하는 것이지. 도둑들도 다 알걸? 그래서 동네 금은방은 털지도 않잖아? 서울 종로 금은방 거리나 되면 또 모를까? 거기는 다 진품이라는 말이 있어. 그곳엔 진짜 금이랑 보석을 전시하겠지.”
“그렇구나. 나는 너희 집이 금방이라고 해서 엄청나게 부잣집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나도 반지 하나도 없고. 우리 엄마도 결혼반지 외에는 없어. 그것조차도 불편하다고 안 끼셔.”
“나도 마찬가지야. 혼수예물로 받은 패물. 장롱 속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지. 결혼하고 애 키우고 하는데 패물이 웬말이니? 애 얼굴에 반지로 흠집이라도 잡으면 안 되잖아? 애 키우는 주부는 패물과는 거리가 멀어. 그냥 고이 모셔두고 있다가 나중에 며느리 생기면 물려주든가 하겠지 뭐. 그리고 며느리도 고이 모셔뒀다가 다음 며느리나 딸 주겠지.”
“나는 물려줄 며느리나 딸도 없고, 얼굴에 흠 잡힐 아기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는 게 좀 속상하다.”
“네가 없어서 그렇지. 막상 끼면 불편할 거야. 큐빅 액세서리 반지라도 껴보든지. 그러면 얼마나 불편한지 직접 체험해보면 안 끼게 될 테니까.”
그 길로 나는 아버지에게 큰마음 먹고 순금 2돈 반지를 왼손 검지손가락용으로 주문했다. 두 돈이라 제법 두껍고 모양도 울퉁불퉁한 디자인이었다. 반지 금값만 52만원이고 주문제작비가 따로 들었다. 물론 안 깎아 주셨다. 이렇게 비싼 반지를 사다니. 나도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네가 웬일이냐 놀라시며 주문해 주셨다.
드디어 금반지를 꼈다. 신났다. 나는 매주 3회 수영을 다니는데, 물론 수영할 때는 반지를 끼지 않는다. 그 넓은 풀장에 빠뜨리기라도 하면 그날로 반지는 영원히 안녕이다. 그래서 매일매일 소중히 여기고 조심조심했다. 어느 날 우리 수영그룹에서 스키장에 놀러 간다고 함께 가겠냐고 물었다. 나는 단체로 안 가면 가기 힘들어서 좋다고 했다. 이 나이 되도록 스키장에 가본 적이 없어서 가기로 했다. 그룹에서는 여비를 똑같이 나눠서 내고 간식도 준비했다. 스키장이라니. 나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데 같이 간 사람들은 다 프로급이었다. 나는 괜히 왔구나 싶어서 혼자서 초급자용 슬로프에서 낑낑대면서 걸음마 연습을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몇 번이나 넘어지다가 지쳐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갑을 벗고 모자를 벗었다. 그랬는데 세상에 반지가 사라졌다. 이럴 수가. 내가 내 돈 주고 산 최초의 반지. 그것도 거금을 들였는데. 사라졌다. 저 넓은 스키장 눈밭 속 어딘가 떨어진 모양이다. 아까 몇 번씩 넘어지고 할 때 얼굴 땀 닦느라 장갑을 몇 번 벗었는데 그때 분실한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속상하고 분통이 터져서 나는 금은보석과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구나 하고 한탄했다. 속속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이제 집에 간다고 했다. 나는 근처 눈밭을 서성이다가 그만 포기하고 집에 돌아왔다. 봄이 되어 눈이 다 녹으면 스키장 직원이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하고는 횡재했다고 좋아하겠지. 나는 부모님 볼 면목이 없어서 풀이 죽어서 조용히 집으로 들어갔다. 반지 맞춘 지 얼마나 되었다고 고새 분실했냐고 하시겠지. 나는 나중에 들켜서 혼나느니 바로 이실직고하고 빨리 혼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아버지. 오늘 스키장 가서 반지 잃어버렸어요.”
“!?”
“죄송해요. 스키수업을 엄청나게 비싸게 치르고 왔네요. 이젠 다시는 스키장 가지 않겠어요. 어차피 탈 줄도 모르는데 괜히 가서는, 반지만 잃어버리고 저도 속상해 죽겠으니까 이 이상 아무 말 마세요. 이제 다시는 스키장도 안 갈 거고. 그리고 반지도 이제는 안 낄게요.”
내가 오히려 더 당당하게 나오니까 아버지, 엄마도 어처구니가 없으신지 아무 말씀 안 하셨다. 아니 못 하신 건가?
하지만 나는 너무 속이 상해서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펑펑 울었다.
“나는 금반지 하나 낄 자격도 없는 거야? 그런 거야? 그냥 은반지 액세서리나 할걸.”
이 와중에도 금값은 나날이 가격이 치솟고 있다.
김진미
오늘은 밸런타인 데이.
한숨만 나온다. 나는 4년 동안 한 남자에게 고백을 했다. 말 한마디 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딱 세 마디 하였다.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사랑합니다. 결혼해주세요.”
나도 안다. 미친 소리라는 것을.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은 참담함을 느끼며 매번 혼자 돌아왔다. 그런데 또 밸런타인 데이가 돌아왔구나. 어떡하지. 또 그런 수모를 겪어야 하나? 지난 4년간 고백만 한 것이 아니다. 무수하게 많이 메일과 손편지를 보내고 노래를 보내고 심지어 장문의 글이 담긴 책을 써서 보냈다. 한 3년 지나니까 이제는 보낸 글, 편지, 책들이 수취 거부로 반송되어 돌아왔다. 나는 그동안 아무 답신이 없는 것까지는 참았으나 내 편지와 책이 고스란히 반송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그 사람의 사진과 인스타. 페이스북. 메일 계정 등등 관련된 모든 것을 삭제하고 버렸다. 그리고는 몇 달 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였다. 독하게 마음먹어야지. 이 이상 더 비참해질 수는 없어. 그러기를 몇 달 했더니 손등에 혹이 생기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져서 고지혈증이 되었다. 손등의 혹은 보기가 싫어서 알아보았더니 수술하는 방법이 있는데 보기보다 위험한 수술이라고 불편하지 않으면 그냥 지내라고 한다. 음. 불편하진 않지만 보기가 싫다. 하지만 혹이 얼굴이나 뇌에 생긴 것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다. 뇌에 생기면 뇌종양이 아닌가? 어휴. 끔찍하다. 차인 것도 억울한데 혹까지 생기고 고지혈증까지 겹치다니. 그렇게 살다 보니 건강만 나빠진 것이 아니라 외모까지 못생겨 보였다. 사실 행복해야 예뻐지는 것이지. 맞는 일이야. 하도 살 맛이 안 나서 타로마스터에게 의뢰를 해보았다. 요즘 타로 안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가봤다.
“삶이 너무 허무해서요. 살 맛도 안 나고.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그래요? 한번 보죠.”
타로마스터는 유명한 사람인데, 텔레비전에도 출연한 사람이다. 타로마스터 중에서는 학력도 제일 높을 것이다. 서울의 유명한 사립대학교 경영학 박사이다. 점사를 보는데 학벌이 뭐가 중요하나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저학력보다는 적어도 말을 조리 있게 이해하기 쉽게 해주겠지? 라고 기대했다. 타로마스터는 카드를 셔플하더니 죽 펴서 몇 장을 골랐다. 그리고는 펼쳐서 해석을 한다.
“지금 현재의 상태를 보니 악마카드군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화병이 났네요.”
속으로 귀신이군. 역시 유명한 타로카스터가 맞군. 잘 맞네.
“그것을 얻지 못하면 병이 낫지 않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죠? 포기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포기하시면 무기력한 삶을 계속 살아야 할 것 같은데요. 다음을 보죠.”
새로 카드를 뽑는다.
“펜타클 9번이군요. 포기하고 혼자 골드미스로 우아하고 멋지게 사시고 싶으신가요?”
“글쎄요. 별로 능력이 없어서 우아하고 멋진 골드미스는 아닌데요.”
다시 뽑는다.
“스타 카드군요. 밤하늘의 북극성을 바라보듯이 계속 보시겠어요. 만인의 별이죠. 아마도 그 별을 보는 사람이 많겠네요. 인기가 많은 사람이네.”
“맞아요. 나 같은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지겨운 모양이죠. 나는 계속 별을 보고 살지만, 그 별은 정작 날 보지 않거든요.”
“결론은 그 별, 그 스타를 얻지 못하면 화병이 낫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은데 그 별이 같이 바라봐주지 않는다고 포기하실 건가요? 그래도 대답이 없었어도 계속 바라볼 때가 더 행복하지 않았나요?”
생각해보니 일방적으로 계속 주고, 보내기만 했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지금보다는 더 행복했던 것 같다. 지금은 지옥이다. 그러니 악마카드가 나왔겠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나도 사람이고 자존심이 있는데 언제까지나 일방적으로 반응조차도 없는데 혼자 정신 나간 여자처럼 살 순 없잖아요?”
“그래도 포기하시면 더 화병이 깊어지고 살 맛이 안 날 텐데요.”
“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봐주세요.”
다시 카드 셔플을 하더니 뽑았다.
“페이지 오브 소드. 아무 생각이 없네요. 스쳐 지나가는 바람 정도? 좋지도 싫지도 않은 상태. 아! 너무 바빠도 이런 카드가 나오기도 해요. 너무 바빠서 생각조차 할 시간이 없을 때도 나온답니다. 그 사람이 당신의 어떤 점을 불편하게 생각하는지 볼게요.
다시 카드를 뽑는다.
”컵 9번 카드. 별로 불편하거나 싫어하는 점은 없는데요. 아주 편안한 상태로군요.“
당연한 것 아닌가?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마음이 편안한 거지. 차라리 죽도록 좋거나 죽도록 싫은 것이 더 낫겠다. 무관심이 최악 아닌가? 무관심하니까 편안한 거지.
”결과로 조언 카드를 마지막으로 뽑을게요.“
다시 카드를 뽑는다.
”어라? 러브카드가 나왔네요. 보세요. 서로 잔을 주고받으며 주변에서 사랑의 기운이 뿜뿜 나오고 있죠? 이 카드는 내가 디자인한 건데요. 이러면 사랑하라고 조언하고 싶은데요. 아무래도 본인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달라질 것 같아요. 결과 조언이 사랑카드라면. 사랑하는 것이 더 좋겠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결론은 나 혼자 이 미친 짓을 계속 더 하라는 거 아닌가? 내 행복과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러는 와중에 결국 또 밸런타인 데이가 돌아왔다. 당연히 이번에도 보낼 것인가? 아니. 이번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전에 반송되고 다시 마지막으로 보냈을 때 말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니 제발 버리지 말고 읽어달라고. 앞으로는 다시는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니 나도 내가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약속을 지키느라 자제를 하고 있다. 오늘은 밸런타인 데이. 아마도 나 같은 수많은 여자들이 초콜릿과 편지와 다른 선물들과 꽃다발을 한가득 그 사람 집, 회사로 보냈을 것이다. 직접도 보내고. 우편이나 소포로도. 내 생각에 2천 명은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스타 아닌가? 타로에서 뽑았듯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속이 쓰리다.
“안 받고 반송하거나 면전에서 되돌려주는 것은 내가 당해보니 참을 수 없는 모욕이더라고요. 받긴 하되 마음은 받지 말고, 받은 초콜릿은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단 한 개도 먹지 말아요. 먹기만 해봐요. 죽여버리겠어!!!”
김진미
인정하고 싶진 않았는데 갱년기가 왔다. 슬프다. 왜 벌써 왔단 말인가? 처음엔 몰랐는데 언젠가부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꿀잠을 잔 게 언제더라? 밤새도록 한 시간마다 깨곤 한다. 정말 죽겠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니까 당연히 종일 피곤하고. 전신 관절이 다 쑤신다. 처음엔 관절이 약해서인 줄 알았는데 그게 갱년기 증세라는 것이다. 그리고 밤새 식은땀을 흘린다. 오뉴월 염천에만 흘리던 땀인데 밤새 잠자는 동안 흠뻑 젖다니 이런 일이 다 있구나. 알고 보니 이것도 갱년기 증후군이란다. 한겨울에 밤새 땀에 젖어서 매일 씻어야 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당연히 피부도 노화가 진행이 되어서 잡티가 짙어지고 피부의 탄력이 떨어지고 외모도 가고 건강도 가고 기분도 저기압이다. 우울증? 짜증? 염세 비관적이 되어가는 것도 다 갱년기 증후군이라고 한다. 하긴 나 같은 초긍정주의자도 이렇게 변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어떻겠어? 친구에게 전화했다.
“미자야. 너는 갱년기 안 왔냐?”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뭐 이제 올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서.”
“그런 너는 갱년기 왔니?”
“뭐, 좀 그런 것 같아서. 아직은 확실친 않아.”
“왔네. 확실친 않긴. 나는 오기 전부터 미리 준비를 잘해서 괜찮아.”
“그게 무슨 소리야? 준비를 하다니?”
“당연하지 40대 중반부터는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한의원에서 약도 계속 먹고 있고, 양약으로도 먹는 게 많아. 종류도 다양해. 너도 이제 먹어야지. 아니. 많이 늦었다. 빨리 먹고 노년을 준비해야지. 우리는 백세시대 사람이잖아. 예전처럼 7, 80에 가는 게 아니라고. 앞으로 5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건강하게 삽시다. 아차. 나 지금 나가야 해서 이만 끊는다.”
약을 검색한다. 음. 콩 추출물인 이소플라본 알약.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레시틴 제제. 기타 칡즙. 석류즙. 백수오즙. 홍삼 액기스. 그리고 콜라겐 알약. 갱년기라 골다공증이 심해져서 칼슘제제. 그리고 아마씨 오일 캡슐. 아. 또 있다. 상어간유. 참 아연제제도 있었네. 종류가 이렇게나 많다니? 전부 가격이 얼마지? 카드로 할부로 끊어야겠네. 한꺼번에 너무 나가면 눈치가 보이니까. 사실 이런 것은 알아서 남편이 먼저 챙겨줘야 하는 것 아닌가? 요즘 피곤하다고 하면 오히려 더 짜증을 낸다.
“당신만 피곤해? 밖에서 일하는 내가 더 피곤하다. 집에서 돈 쓰고 있는 게 피곤하면 나는 어쩌라고?”
할 말이 없다. 저런 남편을 남편이라고 평생 받들어 모시고 있다. 시어머니는 이런 적이 없었나? 아버님은 어떻게 하셨지? 아버님 닮아서 저런 건가?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또 휩싸인다. 아니지. 이것도 갱년기 증후군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해. 우선 이 약값을 메울만한 일이 없을까? 돈 많이 빠져나갔다고 엄청나게 잔소리할 텐데. 우리 집 양반은 늘 통장을 검사한다. 얼마나 쓸데없는 데 돈이 나갔는지 일일이 확인한다. 내 참 더럽고 치사해서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은데, 평생 솥뚜껑 운전밖에 해본 일이 없다. 무경력자가 일할 곳이 마땅치가 않다. 미자는 사모님 소리를 듣는다. 기사 딸린 차를 갖고 있다. 남편이 엄청나게 돈 잘 번다. 하긴 그렇게나 돈이 많은데 갱년기가 왔겠어? 오기 전에 진즉 준비를 해서 아주 쌩쌩한 모양이야. 그러고 보니 전에 동창회 모임 때도 날씬하고 예뻤던 것 같아. 다들 성형 시술빨이라고 수군대긴 했지만,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예쁜 건 예쁜 거지. 적어도 성형이니 시술이니 이런 것은 하지 못하더라도, 예쁜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우선 밤에 안 깨고 삭신이 좀 안 쑤시고 식은땀 안 흘리고 울컥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이것도 부자들은 안 겪는단 말인가? 정말이지. 내 몸이 불편하니까 남편도 자식도 다 꼴 보기가 싫어진다. 다들 제 일만 중요하지. 오히려 나보고 요즘 왜 이리 짜증이 많냐면서 화를 낸다. 남편이고 딸이고 하여간 다 보기 싫다. 이 와중에 딸이 잔소리를 한다.
“엄마. 요즘 반찬이 왜 이래? 너무 성의가 없어. 그리고 간은 또 왜 이리 짜? 엄마 간도 안 봤어? 미맹이야? 딸이 수험생인데 신경 좀 써줘.”
“네가 해 먹어라!”
“왜 이래? 엄마. 나 고3이야. 다른 집은 얼마나 잘 해주는데. 엄마는 다른 엄마들이 어떻게 하는지 좀 물어봐라.”
이것이 정말 제 아비 닮아서 저밖에 모르고 하여간에 욕이 입밖에 튀어나오려는데
“엄마. 됐어. 그냥 편의점에서 김밥이나 사 먹을게. 오늘 저녁은 신경 좀 써줘. 나 학교 간다.”
정말이지. 너무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났다. 남편은 아침도 안 먹고 헐레벌떡 일어나더니 왜 깨우지 않았냐고 난리 치면서 갔다. 딸은 반찬 투정하더니 편의점에서 사 먹는다고 하고는 나갔다. 빈집에서 혼자 종일 소리 내어 울었다.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아. 나야. 미자. 아까 바빠서 전화하다 끊었잖아. 그래. 내가 먹어보니 효과가 있는 게 뭐냐 하면.”
“됐어. 나도 검색할 줄 알아.”
“누가 뭐라니? 시중에 갱년기에 좋다는 약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말이야. 그게 다 좋은 것이 아냐. 홍삼만 해도 그래. 나는 홍삼 안 맞거든. 몸에 열이 많아서.”
“그러냐? 나는 홍삼 먹어 본 적도 없다.”
“내 말은 네 체질을 잘 알아보고 약을 먹든 음식을 먹든지 하란 말이야. 너는 어때? 몸이 찬 편이니?”
“글쎄다. 오뉴월 염천 외에는 늘 춥지. 아마. 요즘은 한겨울에도 땀을 흘리지만 말이야.”
“저런. 증상이 심각하구나. 밤에 잠은 잘 자니?”
“밤새도록 뒤척이고 깨서 신랑 눈치 보여서 각방을 써야 하나 고민 중이다.”
“하긴. 관절도 쑤실 테고.”
“너는 갱년기 안 왔다면서 증상은 또 어떻게 그리 잘 아냐?”
“왜 모르겠어? 우리 엄마도 봤고, 언니도 봤는데. 나는 그렇게 안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거고.”
“그래. 너는 좋겠다. 돈 많은 신랑 만나서 알아서 약도 사 먹고 건강관리도 잘하고. 애들도 공부 잘하지?”
“뭐 그렇지. 공부도 제가 알아서 하는 거지. 내가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도 없는데. 나는 내 몸 챙기고 애들은 제 공부 제가 하는 거지.”
“나는 애가 안 생겨서 애도 늦게 낳아서 이제 고3인데 너는 애들도 다 대학 가고 참 팔자가 늘어졌구나.”
“형편 탓하지 말고 네 몸부터 챙겨. 고3 딸 눈치 볼 것 없어. 공부는 제가 하는 거지. 네가 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네 몸이 불편하면 남편도 딸도 다 소용없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내 말 명심해라.”
“알았어.”
남편, 딸보다 미자가 날 더 걱정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긴 미자는 유치원부터 친구였다. 미자는 예뻐서 어릴 때부터 인기가 많았는데 보통 예쁜 애들은 밉상이라면서 따돌림을 당한다는데, 나는 미자랑 잘 지냈다. 그리고 물론 미자는 시집도 잘 갔다. 미자는 내가 어렵게 산다고 따돌리지 않고 언제나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래서 언제나 미자에게 내가 먼저 전화한다. 바쁠 텐데 전화도 잘 받아 준다. 그래 미자 말이 맞아. 내가 갱년기 증후군에 시달린다고 남편도 딸도 전혀 알아주지 않아. 약값 눈치 보여서 약도 못 사고 있는데 말이지. 통장 내역 보고 잔소리를 하건 말건 내 약부터 사야겠어. 내가 아파서 입원하거나 집에 드러누우면 자기들이 더 불편할 텐데 말이지. 바로 검색하고 약을 주문했다. 콩 이소플라본 제제. 레시틴. 아연. 콜라겐. 그리고 실버 종합영양제. 칼슘. 그리고 아마씨 오일 캡슐. 흠. 이 정도면 됐어. 한약 종류는 가격이 너무 비싸고 나도 내 체질을 정확히 모르니까 먹기가 그래. 남편이 돈을 얼마나 썼냐고 잔소리를 하건 말건 나도 이판사판이야. 약을 주문해 놓고 나니 기분이 조금 좋아져서 저녁 반찬을 만든다. 하긴 내가 기분이 좋아야 반찬을 만들든가 말든가 하지. 늙어서 낳은 딸이 이리 속을 썩이다니 정말 너무한데. 간이 또 짜질까 조심조심 간장을 넣었다. 그래도 오늘은 제대로 먹여야지. 남편도 아침도 못 먹고 갔는데. 그러는 와중에 남편이랑 딸이 왔다. 오늘은 일찍 왔네. 웬일이지? 반찬 새로 만든 거 알았나?
“여보. 오늘 일찍 왔어. 저녁 하고 있어? 잘됐네.”
“엄마. 나도 일찍 왔어. 편의점 김밥 먹고 학교 급식 먹고 저녁은 집밥을 먹어야지 싶어서.”
“다 되어 가니까 얼른 손 씻고 와요. 요즘 바이러스가 창궐한다는데 손 제대로 씻고 마스크도 꼭 끼고 다니고.”
“여보. 요즘 잠을 못 이루는 것 같아서 숙면에 좋다는 약을 사 왔어. 먹어.”
“네? 당신이 웬일이에요?”
“엄마. 저녁 설거지는 내가 할게. 이제 저녁 설거지는 내가 해줄게. 아침은 바쁘니까.”
“뭐? 네가 웬일이니?”
이게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오랜만에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하고 편하게 설거지까지 딸이 했다. 그래도 고3인데 설거지를 매일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어떻게 하나 보고 있었다.
“엄마. 안 봐도 잘해. 설거지도 제대로 못 할까 봐? 내가 바보야?”
“아니. 나는 그냥... 다 하고 싱크대 물기도 닦아야 한다.”
“안다고. 엄마 하는 것 평생 봤다.”
“그리고 여보. 당신 이 약은 어떻게 알고 사 왔어요?”
“음. 그냥 당신이 요즘 잠을 통 못 자는 것 같아서 약사에게 물어보고 사 왔어.”
“그래요? 하여튼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이런. 오늘 주문을 한 것 중 하나는 취소해야겠네.
간만에 기분 좋은 밤이었다. 잠도 잘 잔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남편도 딸도 군말 않고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는 각자 출근. 등교했다.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모닝티를 마셨다. 그리고 어제 주문한 약 중 하나는 취소했다. 내가 너무 많이 샀나? 아냐. 이 정도는 먹어야 해. 그동안 내가 너무 나를 못 챙겼어. 그런데 남편과 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알 순 없지만, 하여튼 내 생각을 해주다니 좀 고마운데. 음음. 정말이지.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어라. 전화가 왔네. 미자다.
“응. 미자야. 무슨 일이야? 참. 나 약 검색해 보고 주문했어. 네 말대로 내 몸이 우선이지.”
“그래? 잘했다. 그리고 네 신랑도 좀 챙겨줘. 네 신랑도 갱년기 미리 준비해야지.”
“그게 또 무슨 말이야?”
“음. 내가 네 신랑한테 전화했어. 너 좀 챙기라고. 남자들은 여자가 갱년기인 줄 잘 모르니까. 말을 해야 알거든.”
“이게 무슨 소리야? 네가 우리 신랑한테 말했다고? 네가 왜?”
“방금 말했잖아. 남자들은 말을 안 하면 모른다고. 하긴 우리 남편도 그랬으니까.”
“네가 우리 신랑한테 나 갱년기이니까 좀 챙기라고 했냐?”
“그래. 화났어? 내가 너무 주제넘었나?”
사실 좀 화가 났다. 왜 남의 부부 일에 참견이지? 아무리 오랜 친구지만 친구 남편에게 그런 사사로운 전화를 하다니 그리고 우리 신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안 거지? 찝찝한데.
“미자야. 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네 신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안 거냐 하면.”
“됐어. 안 궁금하다. 그리고 앞으로는 우리 신랑한테 전화 안 하면 좋겠다. 끊는다.”
기분이 상했다. 아무리 오랜 친구지만 입장 바꿔서 내가 제 신랑한테 사사로운 전화를 하면 제 기분은 어떨까? 아니. 나는 친구 남편 전화번호 하나도 모른다. 남편에게 전화했다.
“여보. 오늘 퇴근하고 바로 집에 들어오세요. 할 말이 있어요.”
“어? 그래? 알았어. 바로 갈게.”
남편이 왔다. 딸이 오기 전에 끝내야지.
“여보. 미자가 당신한테 전화했다면서요?”
“응? 어떻게 알았지? 그랬어.”
“미자가 나 갱년기라고 잘 챙기라고 했나요?”
“응. 그랬지. 남편이 몰라주면 서럽다고. 나보고 당신 신경 좀 쓰라고 하더군. 나도 몰랐어. 여자들은 갱년기가 일찍 오는 모양이지?”
울컥했다. 이 남편이란 작자는 갱년기가 뭔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그런데 미자는 당신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대요?”
“어라? 그러고 보니까 나도 모르는 번호가 떠서 안 받을까 하다가 거래처 새로운 고객인가 싶어서 받았어. 여자길래 누구신가 했지.”
“그래요? 그래서 미자 번호 저장했어요?”
“당신 친구라고 저장했어. 다음에 오면 받으려고.”
“왜 당신이 미자 번호를 저장해요? 그리고 할 말이 뭐가 있다고?”
또 울컥했다. 나는 한 번도 미자를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미자가 너무 잘나간다고 멀리해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여보. 나는 당신이 내 친구와 사사로운 통화를 하는 것이 싫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남편은 놀란 눈치다.
“당신. 당신 친구가 나한테 전화하는 게 싫은 거야?”
이제 울컥하다 못해 눈물이 난다. 이것도 갱년기 증후군인가?
“네. 싫어요. 그 애는 제 남편도 있는데. 왜 내 남편한테 전화하는 거예요?”
이제는 펑펑 운다. 남편은 깜짝 놀라더니 날 안고 달랜다.
“이런. 정말 갱년기가 맞네. 나는 설마. 우리 마누라가 정말 갱년기라고요? 하고 되물었는데 말이지. 우리 마누라가 울보가 됐네. 알았어. 번호 지울 테니까 그만 울고. 뚝. 그쳐요. 자자.” 등을 토닥인다. 아. 이것도 갱년기 증후군인가? 평생 거의 운 적이 없었는데.
“알았어. 여보. 자. 보는 데서 지울게. 자자. 봤지? 당신 친구 번호? 지운다. 삭제. 클리어.”
“다시 오면 어떡할 거예요?”
“음. 그때는 정중하게 이제는 알아서 잘할 테니까 다시는 전화하지 마세요. 라고 하지. 됐어?”
“정말이에요?”
“그럼. 울보 마누라님. 내가 당신 친구랑 통화해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런데 미자는 당신 번호는 어떻게 안 거예요?”
“나도 모르지. 당신이 가르쳐준 것 아냐?”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요? 정말 이상하네. 그 애는 어떻게 당신 전화번호를 안 거지? 물어봐야 하나?”
“됐어. 다시 올 것 같지도 않지만, 다시 온다고 해도 내가 하지 말라고 할 테니까 신경 꺼요.”
남편은 안심시킨다고 하는데도 나는 영 기분이 개운치가 않았다. 정말 우리 남편 번호는 어떻게 안 거지? 찝찝해. 물어봐야 하나? 아니 통화하는 걸 보니 이미 대답도 다 정해놓은 것 같던데. 이런 내가 뭐 하는 거지? 친구를 의심하고. 정말 몹쓸 짓이군. 설마 이것도 갱년기 증후군인가? 아니면 여자의 촉? 육감?
밤새 이런 생각 하느라 또 잠을 설쳤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어. 기분이 좋아야 숙면하든가 말든가 하지. 눈이 퀭해서 일어났다. 아침 차려야지. 애랑 남편 밥 줘야지.
“엄마. 안색이 나빠. 이런. 고3인 내가 엄마를 먼저 챙겨야 하는 건가?”
“그게 또 무슨 소리야?”
“아니. 아빠가 엄마 좀 챙기래. 엄마 요즘 힘들다고. 엄마 그렇게 힘든 거야?”
이런. 남편이 딸한테 얘기했구나.
“그래. 엄마가 요즘 좀 힘들어.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나는 좀 유별나게 지나가는 모양이야.”
“엄마. 미자 아줌마가 나한테 전화했어. 엄마 요즘 힘든 시기니까 잘 좀 하라고.”
“뭐라고? 미자가 너한테도 전화했단 말이야?”
“응? 엄마 몰랐어? 미자 아줌마가 미자 이모야. 하면서 나한테 전화했어. 보충 수업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전화 받았지.”
“아니. 미자는 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대?”
“엄마가 가르쳐준 거 아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런. 정말 기분이 확 상한다. 미자 얘 우리 집 감시하나? 스토커? 아니지. 미자 제가 뭐가 부족해서 우리 집을 염탐하나? 모든 게 나보다 나은데. 정말 안 되겠다.
“알았어. 얼른 학교 가.”
“엄마는? 밥은 먹어야지. 먹고 갈 테니까 걱정 마셔.”
“여보. 당신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죠? 미자가 왜 당신과 우리 애한테까지 전화를 할까요? 그리고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여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요. 나도 밤새 궁리했지만 내가 이상한 건가 싶어서. 하지만 애 전화번호까지 알고 전화한 거는 도가 지나친 거예요.”
“음.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너 미자 이모가 전화 또 하면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아셨나요? 하고 물어보렴. 네 엄마는 못 물어볼 것 같으니까.”
“아빠. 미자 아줌마가 이상한 건가요? 엄마 걱정해주는 것 아닌가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번호를 알고 아빠와 너한테까지 전화한 거는 좀 도가 넘친다고 봐.”
“알았어요. 엄마. 엄마가 좀 예민한 것 같지만 그래도 엄마가 싫다는 일은 하지 않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여보. 당신도 퇴근하고 바로 집에 오세요. 딴 데 새지 말고.”
“알았어. 당신 너무 신경 쓰지 마. 건강에 나빠. 마음 편하게 가지고 스트레칭이라도 하고, 음악도 좀 듣고. 맛있는 간식이라도 좀 사 먹어. 다녀올게.”
남편 말대로 음악을 틀어놓고 스트레칭을 한다. 음. 그리고 모닝 밀크티와 스콘을 먹는다. 이런. 단맛도 못 느끼겠어. 정말 기분이 좋아야 맛도 느끼지. 이러다 정말 큰 병 나겠어. 온 집 대청소를 하고 샤워를 하고 저녁 준비를 했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왔다.
“여보. 당신 걱정할까 봐 말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역시 부부는 비밀이 없어야겠지? 당신 친구한테 오늘 또 전화가 왔어. 그래서 앞으로는 알아서 잘할 테니까 전화하지 마세요. 라고 했지. 그런데. 오늘은 당신 갱년기 이야기 아니라고 계속 말을 거는 거야. 정말 난감했어. 어떻게 끊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계속 듣고 있었어. 나중에 우리 딸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라고 했더니 또 한참을 떠들더라고. 그 양반 좀 이상해. 그래서 수신거부 걸어놨어. 나도 기분이 개운치가 않아. 그 여자 대체 뭐 하는 여자야?”
나는 너무 놀라서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았다. 남편이 놀라서 일으켜 세웠다.
“여보. 그 애. 이상해요. 제 남편은 잘나가는 사업가예요. 무슨 사업하는지는 잘 몰라요. 그 애는 그냥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운전기사가 모는 외제차 타고 다녀요. 나도 정확히 그 애가 뭐 하는지 몰라요. 다만 동창회 나가면 다른 친구들은 미자가 너무 혼자 잘나간다고 멀리했지만 나는 안 그랬어요. 지금까지 친구로 잘 대해줬어요. 그래도 당신과 애 전화번호는 알려준 적이 없었어요. 다른 친구들이 멀리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어리석었나 봐요.”
“음. 요즘은 하도 이상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지희한테도 수신거부하라고 해야겠어.”
“그래요. 역시 그렇죠?”
다음날 남편과 지희가 출근, 등교를 하자마자 나는 다른 친구에게 전화했다.
“영미야. 오랜만이야. 통화 괜찮아?”
“어라? 숙희야. 오랜만이야. 동창회 때 보고 처음이네. 그래. 무슨 일이야?”
“다름이 아니라 너 미자랑 잘 지내니?”
“미자? 잘나가는 사모님이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겠니?”
“하긴, 너나 다른 애들은 미자랑 잘 지내는 것 같진 않더라.”
“당연. 숙희 너만 미자랑 잘 지내지. 우리 아무도 미자랑 친하지 않아.”
“그랬나? 나만 미자랑 잘 지낸 거야?”
“그래. 그 사모님. 자기와 같은 레벨이 아닌 사람과는 친분을 쌓지 않는데, 숙희 너는 유독 잘 지내더라. 이상하긴 했어. 숙희 네가 뭐 대단한 사모님도 아닌데.”
“그렇지. 나는 평범한 주부지. 남편도 평범한 직장인이고. 그러고 보니 미자가 나 외에는 딱히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없구나.”
“그래. 숙희 네가 미자를 매우 아끼는 것 같아서 우리는 잠자코 있었지. 미자 그 애. 소문이 안 좋아.”
“소문이라니? 뜬 소문 같은 거 아냐? 남 이야기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네가 그렇게 미자를 늘 감싸니까 우리도 너에게 아무 말 못 했던 거야. 너 미자 이야기하는 걸 보니 뭔가 느낀 게 있구나?”
“아니. 뭐. 좀. 그래. 미자의 뜬소문이 뭔데?”
“나도 들은 말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그 애 남편이랑 사이가 나쁘대. 남편이 지방과 해외 곳곳에 여자들이 있다고 하더라.”
“그건 미자의 잘못이 아니잖아. 그게 왜? 남편이 나쁜 거지.”
“그건 맞는데, 미자의 대처가 문제라는 거지.”
“미자가 어떻게 대처했는데?”
“네가 바람피우면 나는 못 필 줄 아냐고 대들면서 남자 사냥을 다닌대. 글쎄. 뭐 나도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쌍방이 잘못해서 위자료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니까 이혼도 안 하고 버틴다고 하더라. 그래도 미자 신랑이 돈은 잘 벌잖아. 미자도 이혼해봤자 무일푼이니까. 제가 돈 벌어 본 적은 없는 사모님 아니냐?”
“대체 미자 신랑은 무슨 사업 하니?”
“글쎄. 해외 무역업? 그래서 해외 출장이 잦아. 집에 거의 안 들어온대. 미자 아들들은 그나마 공부 잘해서 대학 잘 갔지만. 아들들도 집에 잘 붙어 있지 않나 봐. 아들들이 무뚝뚝해서 엄마 챙기고 하지는 않는 것 같더라. 심지어 아들 중 한 놈은 남편에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라는 말도 있어. 그러니 친엄마 만나느라고 집에 거의 있지도 않나 봐.”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내 아들이 미자 아들과 같은 고교 동창이야. 대충 들어서 알아.”
“그렇구나. 미자 남편이 여자들이 많구나.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그래. 미자는 그 큰 저택에서 혼자 있는 일이 많대. 비싼 남자 접대부 술집을 다닌다지. 아마?”
“윽. 속이 매스껍다. 정말 몰랐어.”
“그런데, 그렇게 잘 지내던 네가 웬일이야? 미자가 너한테 무슨 일 저질렀지?”
“음. 다른 건 아니고, 미자가 우리 남편과 우리 딸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하는 거야. 처음엔 내 핑계로. 그 다음엔 그냥 자기 수다를 떤다고 해. 그래서 남편은 수신 거부를 해놨대.”
“너? 설마? 남편은 괜찮은 거야? 수신 거부한 건 확실해?”
“그럼. 남편이 전부 다 이야기 해줬어. 전화 와서 수신 거부했다고.”
“미자 그 애. 불여우야.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 직접 찾아가서 만나면 어떡할래?”
“응?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 애는 이판사판이야. 오늘만 사는 애야. 내일은 없다고. 이런. 너 조심해라. 그러게 우리가 미자를 멀리할 때 너도 좀 생각해보지 그랬니? 하여튼 남편 단속 잘해라.”
정말이지. 이제는 미칠 것 같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정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다. 내가 24시간 남편을 감시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미자 그 애는 우리 남편을 좋아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남편이랑 잘사는 게 부러워서 망치고 싶은 건가? 정말 돌아버리겠다. 나는 우리 남편이 좀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자는 이런 남편이 탐이 나는 모양이네. 하긴 우리 남편은 좀스럽지만 성실하고 가정적이고 한눈을 판 적이 없지. 암. 그렇고말고.
“여보? 여보? 나 왔대도.”
“아? 당신 왔어요?”
“대체 무슨 생각이 그리 깊어서 남편이 퇴근하고 들어와서 불러도 못 알아채는 거요?”
“여보!”
나는 남편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런. 무슨 일이야? 당신 생전에 안 하던 행동을 다 하고.”
“아녜요. 여보. 별일 없었어요?”
나는 남편 눈치를 살핀다.
“별일이라면 있었지. 당신에게는 비밀이 없어야지. 미자라는 그 여자 우리 회사에 찾아왔었소. 왜 전화를 안 받냐면서. 기가 차더군.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내가 저런 년을 평생 친구라고 믿고 거의 매일 전화를 해댔단 말인가?
“걱정 말아요. 나는 그런 정신 나간 여자. 상대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일 경찰에 신고하겠어.”
“여보. 그 애. 남편이랑 불화해서 남자 사냥을 다닌대요. 남편은 여자가 수도 없이 많고 집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그 애는 밤마다 남자 접대부 술집을 전전한다고 해요. 여보. 조심해요. 내가 친구 잘 못 만나서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미자가 그런 앤 줄 나도 오늘에야 알았어요. 정말 속상해 죽겠네. 어흑흑.”
“이런. 울지 말아요. 이게 무슨 일이야. 잘 사는 집에 고춧가루를 뿌려도 유분수지. 그 여자 정말 미친 것 같아. 날 보더니 다짜고짜 왜 전화를 수신거부했냐고 달려드는 거야. 거의 정신이 나간 것 같아. 그 정도면 정신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냐? 나도 소름 끼쳤다고. 정말이지. 아직도 손이 다 떨리네. 대체 우리 회사는 또 어떻게 안 거야? 대체. 정말 스토커야. 스토커.”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하고 내일부터 출퇴근도 조심해요. 회사에도 못 들어가게 경비에게도 말하고.”
“오늘 다 해 놓고 왔어. 다시는 그 여자 출입시키지 말라고. 정말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지? 그 여자 자식들은 정상이야?”
“대학에 잘 다니는 것 같던데. 엄마랑 거의 말도 안 한대요.”
“하긴 그런 여자가 엄마면 나라도 대화하고 싶지 않겠다.”
이날 밤 나는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남편을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김진미
내 평생 컴퓨터를 사 본 적이 없어서 컴퓨터를 한 달 넘게 검색을 했다. 학교 졸업한 지가 5년인데 학교 다닐 적에도 아버지나 동생들 쓰던 컴퓨터를 받아서 썼다. 부팅하는데 30분, 화면 하나 바뀌는데 1분 인터넷 뱅킹 한번 하는데 1시간 걸렸었다. 그래도 문서 작업해서 메일로 보내는 일 외에는 별로 한 게 없어서 그나마 졸업할 때까지 버텼다. 졸업과 동시에 그 고물 컴퓨터는 쓰레기장으로 직행했다. 방도 비좁았는데 휑하니 빈자리가 넓게 느껴졌다. 학교도 졸업한 마당에 컴퓨터 쓸 일이 뭐 있겠냐 싶었는데 쓸 일이 있더라. 그래서 매일 구립 도서관에 가서 문서작업도 하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왔었다. 그러기를 몇 년 했는데 그동안 잘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중국 우한이라는 도시에서 괴질이 전 세계로 퍼진 것이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고 도서관에 다녔다. 문서작업을 하는데 맞은 편에 앉은 아주머니, 아저씨, 그리고 초등학생이 단체로 기침하는 게 아닌가? 무지하게 찝찝하여 그날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렇게 기침하는 사람은 공공장소에 안 오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 그래도 계속 다녔는데 하루는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 있던데.”
“응. 두 시간 반 글 쓰고 두 시간 반 영화 보고 나머지 두, 세 시간 정도 책 읽다가 오지.”
“그래. 알아. 저녁밥 먹을 때 들어오잖아? 근데 요즘 시국이 어수선한데 도서관 안 가면 안돼? 꼭 거기서 책 읽어야 해?”
“아니 내가 컴퓨터가 없어서 도서관에서 문서 작업하잖아. 그래서 그렇지. 영화야 안 봐도 되고. 책도 집에서 읽으면 되는데.”
“아버지, 엄마도 연로하신데 언니가 공공장소에서 감염이라도 되면 끝나는 거잖아?”
“음. 그러면 어쩌지?”
“그냥 컴퓨터 싼 거 하나 사라. 중고 사면 되잖아?”
“역시, 그래야겠지? 지금까지 컴퓨터 없이 버텼는데 역시 이젠 한곈가?”
“그래. 언니야. 도서관 가지 마라.”
“알았다. 이제 드디어 컴퓨터를 사야 하는구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폭풍검색을 했다. 실은 몇 달 전부터 검색은 했지만 그래도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버티고 있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러는 와중에 도서관에서 문자가 왔다.
“도서관 폐쇄하니 이용 불가합니다.”
어라? 내가 안 가니까 문을 닫는 건가? 실은 우리 지역에서 감염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한 수순이다. 공공시설은 폐쇄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중고 컴퓨터를 매일 검색하다가 구매평을 읽어보니 약 10퍼센트는 불량품이 와서 교환, 환불하는데 애를 먹는다는 내용이 보였다. 고민이 되었다. 운이 좋으면 다행이지만 운이 나쁘면 저런 것이 걸려서 골치 아프겠네. 어차피 나는 문서작업 외에는 별로 하는 일도 없으니까 그냥 저사양 새 컴퓨터를 사는 게 낫겠어. 그래서 중고가격과 비슷한 수준의 저사양 컴퓨터를 검색했다. 게다가 지금 신학기를 맞이하여 절찬 폭탄세일 중이라고 해서 세일 마지막 날 14인치 노트북을 드디어 구매했다! 내 평생 처음 산 컴퓨터. 데스크톱이건 노트북이건 하여튼 처음 샀다. 학교 다닐 적에도 산 적이 없었는데 지금 사다니. 참 나도 버틸 만큼은 버텼지만, 괴질에는 장사 없다고 결국 구매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노트북 아버지 것은 15인치인데 1인치 차이면 얼마 안 되겠지 싶었는데 받고 보니 매우 작았다. 1 사이즈 차이가 꽤 컸다. 이래서 다 15인치 모델을 사는구나. 내가 잘못 샀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사이즈가 작으니 내 가방에도 쏙 들어가고 휴대용으로는 적당했다. 문제는 윈도우 10과 마이크로 소프트 프로그램이 깔린 제품과 안 깔린 제품 가격이 6만 원 차이나서 안 깔린 것으로 산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컴퓨터 수리점에 전화했더니 한 집은 5만 원을 부르고 출장비까지 요구했다. 다른 집에 전화하니 처음에 3만 원이라고 하더니 한글 2020도 깔아야 한다고 하니 4만 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부모님이 노발대발하셨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 마당에 외부인을 들이다니 미쳤나는 것이었다. ‘어라. 정말. 내가 미친 짓을 했구나.’ 당장 전화해서 취소하라고 하시는데 나는 소위 깡통 노트북을 샀기에 이 상태로는 전혀 구동할 수 없었다. 집에 외부인은 절대 들일 수 없으니 밖에 나가서 깔고 2주 동안 집에 오지 말라고 하셨다.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컴퓨터 기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소 가르쳐 주세요.”
“저기 기사님. 죄송한데요. 어디 어디 다니셨나요?”
“다니기야 여기저기 다 다니죠.”
“아. 저기 부모님께서 집안에 외부인을 들이지 말라고 하셔서 집 앞 커피숍에서 작업하셔야겠어요. 그쪽으로 오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거기로 오세요.”
그 사이에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서 한 30분 정도 관리실을 사용해도 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안된다고 했다. 그 와중에 기사가 도착했다. 나는 내 깡통 노트북을 들고 내려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과연! 커피숍은 입장 금지였고 근처 편의점에서도 다 안 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경비실에 가서 아저씨에게 전기 코드를 한 30분 정도 사용해도 되냐고 여쭈었다. 경비 아저씨는 그러라고 하셨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나는 기사에게 뛰어가서 이리로 오시라고 했다. 경비실은 좁았지만 셋이 쪼그리고 앉아서 작업했다. 문제가 또 생겼다. 내가 산 컴퓨터가 너무 저사양이라 프로그램이 깔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구매한 쇼핑센터와 제품을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보여주느라 다시 검색했는데 이럴 수가! 대 폭탄 세일 마지막 날 구입했건만. 세일이 끝난 지금 더 할인하여 가격이 더 내려간 상태였다. 혈압이 솟구쳤다. 폭탄세일이라고 하더니. 세일이 끝난 지금이 더 싸단 말이야? 기사는 제품 내역을 읽더니 너무 싼 제품을 샀다면서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전문 용어를 마구 사용하면서 하여튼 결론이 너무 싼 것을 사서 작업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출장비는 만 원 달라고 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럼 반품해야 하나요? 제품 포장에 스티커 제거하면 반품 불가라고 했는데 새 상품이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중고 살걸. 중고는 다 깔려 있는데. 속상해.”
“한 번만 더 해보고 안 되면 반품하세요.”
기사는 노트북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갑자기 된다고 했다.
“살았다. 다행이네요.”
그러는 와중에 기사는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하는데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싸우는 내용인 것 같은데 문제는 마스크를 내리고 폭풍수다를 떠는 것이었다. 이번 바이러스는 비말 감염이라는데 침 많이 튀기겠지? 그러기를 30여 분. 나는 초조해져서
“저기요. 작업에 집중해 주시면 안 되나요?”
그랬더니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한다.
“하루에 100번씩 하는 일이라 통화하면서 해도 다 해요.”
그러면서 아직 프로그램 설치가 덜 되었는데 설치 USB를 뽑는 게 아닌가?
“저기요. 지금 설치 중인데 뽑으면 안되잖아요?”
“내가 하루이틀 하는 일도 아니고 다 알아서 한다니까요?”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나는 별수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드디어 작업이 끝났다. 기사는 5만 원을 요구했다.
“저기요. 댁 사장님과는 4만 원이라고 이야기 끝났는데요. 그리고 2년 전 아버지 노트북 윈도우 깔 때는 2만 원 줬어요.”
“우리 회사에서는 10년 동안 3만 원 받았어요. 2만 원은 아는 사람이나 가능하지. 알았으니까 4만 원 주세요.”
나는 4만 원을 주고 집에 들어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프로그램 USB는 단 한 개. 나는 윈도우 10 따로. MS SOFT. 따로. 한글 따로인 줄 알고 5만 원에서 깎아서 4만 원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윈도우 10. 까는데 3만 원이라는 것이 다 포함된 것이었다. 이래저래 바가지를 쓴 것이었다. 작업하는 내내 노트북이 저사양이라 되니 안 되니 하고, 싼 것 사셨네 하면서 염장을 지르고. 나도 속상해 죽겠는데 결국은 바가지까지 썼단 말인가? 기분이 상하니까 기관지도 이상한 것 같고, 폐도 이상한 것 같고 찝찝함을 금할 수가 없어서 노트북과 내 손, 얼굴을 손소독제로 소독했다. 그리고 옷과 장갑, 마스크를 밖에다 널었다. 그래도 이 시국에 몇만 원 벌자고 기사도 목숨 걸고 다니고 나도 목숨 걸고 OS 깔고. 서로 고생했으니 수고비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젊은 사람이 목숨 걸고 돈 버느라 고생하는데 차비 보태줬다고 생각하자. 이왕 이렇게 된 것. 기사도 나도 아무런 감염 없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문서작업을 하고 저장을 하는데 PDF 저장이 불가능하였다. 프로그램이 덜 깔렸다고 떴다. 나는 다시 컴퓨터 수리기사에게 전화했다. 한글 프로그램이 덜 깔려서 저장이 안된다고 귀찮으시겠지만 다시 깔아주시라고 부탁했다. 물론 공손하게. 그랬는데 자기는 절대로 잘못한 거 없다고 내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래서 사장에게 전화했다. 사장은 기사에게 전화하라고 한다. 내가 기사에게 말했는데 안 온다고 했다. 그러더니 사장도 전화를 끊고 다시는 받지 않았다. 혈압이 올라서 기사에게 다시 전화했다. 안 받았다. 그래서 문자를 쳤다. 프로그램이 덜 깔렸다는 화면사진을 캡쳐해서 첨부로 보냈다.
“프로그램이 덜 깔린 것이 확실하다. 프로그램 깔 때 덜 깔린 상태에서 USB 뽑지 않았냐? 내가 아직 뽑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그쪽에서 괜찮다고 무작정 뽑았지 않았냐? 그쪽에서 내 노트북이 저사양이라고 속도 느리다고 말해놓고 설치 중에 뽑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었냐?”
이렇게 보냈다. 역시 답장이 없었다. 한참 뒤에 전화가 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다시 한번만 더 전화나 문자로 항의하면 영업방해로 고소한다고 반말로 지껄이는 것이 아닌가? 너무 기가 막혀서 어따대고 반말이야? 하는데 전화로 한글 정품회사에서 받아쓰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더니 끊었다. 나는 너무 기가 막히고 울화통이 터져서 깡통 노트북을 산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리고 진짜로 한글과 컴퓨터 정품 사이트에 접속해서 한글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았다. 이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 돈, 시간, 노력 낭비에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모욕까지 당하고 부모님에게 꾸중 듣고. 정품 한글을 다운받은 후 노트북을 구매한 쇼핑센터에다 문의했다.
“댁 쇼핑몰에서 폭탄세일 마지막 날 저녁에 구매한 노트북이 내가 구입하고 배달받은 그 시점에 다시 들어가 보니 가격이 인하되었던데 어떻게 세일기간보다 세일 끝난 기간이 더 쌀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세일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고객님, 말씀은 알겠지만 구매하고 하루나 이틀 후라면 구매취소하시고 다시 재구매하면 되는데 지금은 벌써 날짜가 많이 지났기 때문에 취소 후 재구매는 불가능하시고요.”
“아니, 세일 끝나자마자 가격인하한 것이 확실한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컴퓨터 회사에 인하금액을 돌려줄 수 있는지 알아는 보겠지만 날짜가 지나서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알아본다는 말에 며칠을 더 기다렸다. 그러나 연락은 오지않았다. 다시 전화했다.
“알아본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컴퓨터 회사에서 보상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면 컴퓨터를 판 그쪽 쇼핑몰에서 차액을 돌려주셔야죠. 거기서 폭탄세일을 했고 또 세일 끝난 후에 가격 인하하셨으니까요.”
“그건 좀 곤란합니다만.”
“이보세요. 이 쇼핑몰 말고 다른 쇼핑몰에서는 가격 인하한 만큼 현금으로 바로 되돌려줍디다. 그런데 댁 쇼핑몰은 구매 취소해도 현금으로 환불도 안 해주고 쇼핑몰 캐시로 넣어주던데, 그것도 바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일이 출금신청해서 환불받는데 일주일도 더 걸리게 하고 정말 너무 하시네요. 다른 쇼핑몰에서는 어떻게 환불하고 차액 돌려주는지 좀 비교해 보세요.”
몇 날 며칠을 실랑이했더니 자기네 쇼핑몰 포인트로 입금해주겠단다. 그것도 출금 불가. 자기 쇼핑몰에서만 사용하라고 한다. 그 정도만 해도 다행이다 싶어서 그러라고 했다. 이번 일로 깨달았다.
1. 폭탄세일에 현혹되지 말자. 물건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구매할 수 있다.
2. 정품 프로그램을 구매하자.
김진미
길고 긴 백수인생. 재테크와는 거리가 멀지만, 나름 포인트 재테크를 하고 있다. 휴대폰 통신사에서 매일 출석 포인트와 광고를 시청한 포인트를 적립해주는데, 열심히 1포인트씩 모아서 하루 30-50포인트를 모은다. 이 포인트를 모으면 제휴회사의 물품을 구매할 수 있는데, 식당, 빵집. 아이스크림. 영화. 피자, 햄버거 등등. 많은 곳에서 구매할 수 있다. 이 사이트를 알게 된 것은 한 3년 넘는데 열심히 잠도 제대로 안 자면서 매시간 포인트를 적립하고 있다. 매시간 정각에 광고 포인트를 적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포인트를 모아서 편의점 상품권을 구매했는데 사실 편의점에서 파는 물품이라는게 대부분 상백수인 내 입장에서는 매우 사치스러운 간식들을 파는 곳이라서 구매를 해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똑같은 물건을 마트나 수퍼마켓에서는 훨씬 더 싸게 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거의 말고는 쓸 데가 없거니라고 생각해서 몇 년을 편의점 상품권을 구매하는데 포인트를 다 사용했다. 하지만, 작년 우연찮게 엄마 손맛 버거집 구매쿠폰을 알게 되었다. 나는 거의 군것질을 하지 않아서 이런 버거집이 있는 줄도 모르고.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 손맛 버거집 치킨버거를 쿠폰으로 구매해서 먹어보았다. 물론 세트 메뉴로. 나름 거금이 들었지만 내가 먹은 버거 중에 최고로 맛있었다. 이럴 수가. 왜 여태 이런 버거를 모르고 살았던가? 그래서 그때부터는 열심히 포인트를 모아서 매번 엄마 손맛 버거집에 가서 버거를 사 먹었다. 처음엔 세트 메뉴를 먹었지만 나는 감자튀김과 콜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또 2,000원이나 더 비싸고 게다가 2,000포인트를 모으려면 몇 달을 모아야 하는데,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버거 단품으로 사먹었다. 처음 몇 번 버거 단품 쿠폰을 내밀었더니 어느 날부터는 버거의 속 재료가 점점 부실해지기 시작했다. 사진에 나온 버거는 엄청나게 푸짐해보였는데, 내가 주문한 버거는 속 내용물이 절반밖에 들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구색은 갖췄는데, 닭고기 패티가 1/3 사이즈로 줄어있는게 아닌가? 속이 상해서 다음엔 그 점포 말고 1시간 더 먼 엄마 손맛 버거집에 가서 먹었더니 이 집은 정상 사이즈의 닭고기 패티가 나왔다. 아! 집집마다 속 내용물의 양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버거 하나 먹자고 1시간 넘는 곳에 차를 타고 가서 먹 사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 그래서 포인트를 열심히 모아 모아서 다시 집 근처의 엄마 손맛 버거집에 가서 그 집에서 파는 버거 중에서 가장 비싼 ‘믿을 수 없는 버거’를 주문했다. 자그마치 5,100원짜리 버거이다. 내가 모은 포인트 5,000점 짜리 쿠폰에다 현금 100원을 보태서 주문했다. 이렇게 비싼 버거는 제대로 해주겠지 싶어서. 그래도 혹시나싶어서 주문할 때 전에 닭고기 패티가 엄지손가락만하던데 오늘은 제대로 된 패티를 넣어달라고 했다. 잠시 기다리자 ‘믿은 수 없는 버거’가 나왔는데 생각보다 사이즈가 작았다. 시식 후기 블로그나 평을 볼 때는 사이즈가 너무 커서 턱이 빠지고 입이 찢어졌다는 평이 많았다. 1년을 벼르다가 겨우 먹게 되어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웬걸? 평소에 먹던 닭고기 버거와 별다른 차이를 못 느낄 사이즈였다. 내용물을 보니 원래 통새우가 3마리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새우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올린 후기에 나온 사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대실망이었다.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버거’를 먹으려고 아침도 굶고 점심으로 사 먹었는데 배도 안 차고, 속이 이만저만 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머지 포인트는 ‘믿을 수 없는 버거’ 다음으로 비싼 ‘믿기 어려운 버거’를 먹으려고 또 모아둔 것이 있지만 ‘믿기 어려운 버거’는 안 사 먹기로 했다. 또 거금 포인트를 사용해서 실망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1시간 더 먼 곳에 가서 먹든가 해야겠다. 아니. 이번 기회에 다른 구매처를 찾기로 한다. 유명한 커피숍에서 파는 망고주스라던가. 빵집에 파는 파운드 케이크나 뭐 기타 등등. 그동안 엄마 손 버거에 너무 많이 매상을 올려준 것 같아서 골고루 팔아주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런데 말이다. 어쩌면 이럴 수가. 하루 만에 다시 엄마 손맛 버거가 먹고 싶은 게 아닌가? 내 배는 어떻게 생긴 것인가? 어제 그렇게 실망하고 다시 엄마 손맛 버거를 생각하다니, 내 위는 자존심도 없는 것인가? 정말이지 속상하다.
나도 다른 사람들이 먹고 올린 후기에 나온 그 버거를 먹게 해 달라고!!
바로 3일 후에 나는 엄마 손맛 버거집에서 ‘믿기 어려운 버거’를 사 먹었다.
맛있었다.
김진미
몇 달 전 중국 우한에서 발발한 괴질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하여 지구촌이 들썩들썩. 아니 지구촌이 거의 칩거 생활로 들어가게 된 이 시국에 우리나라에서 긴급재난지원금을 국민에게 지원하였다. 각 세대별로 세대주에게 40만 원, 그 외 가족 구성원 한 사람당 20만 원. 단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으로 4인 이상은 무조건 100만 원이다. 우리 집은 3인 가족으로 80만 원이 나왔다. 내가 세대주이고 부모님이 계셔서 그렇다. 신청 절차 또한 동사무소와 이용하는 은행에서 신청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IT 선진국으로 인터넷으로 단 1분 이내에 신청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입금이 된다. 나도 그렇게 했다. 내가 이용하는 카드사 은행에 신청했더니 바로 다음 날 아침 9시에 입금 문자가 왔다. 바로 옆 나라는 손으로 종이에 써서 신청하는 구시대적 행정 시스템으로 아직도 신청 문서도 각 가정에 배달이 덜 되었다고 한다. 즉 우리나라보다 30년은 뒤처진 나라인 셈인데, 이번 괴질로 인해 가짜 선진국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결과가 되었다. 우한 괴질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피해와 상실감을 주었지만 위기를 겪어봐야 진짜 강자가 드러난다고. 이 사태를 겪게 되니까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진짜 선진국임을 드디어 전 세계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양쪽 옆 나라들이 얼마나 후진국인지도 알려지게 되었고 말이다. 잠시 말이 샜는데 어쨌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물론 집에 갇혀서 4개월이나 옴짝달싹 못 하고 지내는 것은 정말 괴롭다. 내가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더욱 괴로울 것이다. 이 와중에 긴급재난지원금은 참으로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하루 만에 입금되어서 기대가 크고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나? 내가 세대주라 40만 원, 부모님 40만 원 어떻게 나눠 쓰지? 카드는 한 장인데, 이 카드 한 장으로 세 명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거지? 차라리 일주일 기다렸다가 동사무소에서 직불카드를 받을 걸 그랬나? 동사무소는 한명 한명 개별로 카드를 지원해 준다는 것을 내가 신용카드로 입금받은 이후에 알게 되었다. 이런! 몰랐어. 알았더라면 나도 동사무소에서 신청할 걸 그랬다. 그런데 사람들이 동사무소에 현금직불카드를 너무 많이 지원해서 카드가 모자라 다음 달이 되어야 카드가 나온다고 한다. 그래. 불편해도 나는 바로 받았으니 다 장단점이 있는 거지. 빨리 받아서 빨리 쓰면 되지. 그리고 카드 한 장으로 필요할 때마다 갖고 가서 쓰시라 하면 되니까. 그렇게 해서 입금되자마자 엄마가 제일 먼저 사용한다고 하셨다. 카드를 갖고 가시더니 30만 원 이불집에 가서 쓰셨다. 아니 무슨 이불이 30만 원이나 하지? 얇은 차렵이불 3개가 30만 원이나 해? 속으로 놀랐지만 워낙 이불 욕심이 있으신 분이라 가만 있었다. 잠깐. 그렇다면 부모님은 이제 10만 원 남았는데. 아버지는 아직 쓰지도 않으셨는데.....
다음날 엄마께서 슈퍼마켓에서 장 보신다고 카드를 달라셨다. 거기서 15만 원 넘게 쓰셨다. 어라? 이러면 초과하셨는데. 아버지는 아직 쓰지도 않으셨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약국에서 마스크 6장 구매하셨다. 9천 원. 음. 이제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 카드를 드리면서 “아버지. 어차피 카드 현금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시한도 정해졌고 하니 아버지께서 마음대로 쓰시고 차액만큼 돌려주세요.” 하고 드렸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래라.” 하셨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긴 카드 한 장으로 세 식구가 돌려 쓰는 것도 불편했는데 차라리 잘됐어.
다음날 아버지께서 고기가 드시고 싶다고 하시면서 고깃집으로 동생 식구들까지 다 부르셨다. 나는 계산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했는데 “네가 계산할 것도 아니면서 가만히 있어라.” 하시길래 그런가 했다. 음. 대체 얼마나 남았지?
바로 며칠 후 아버지께서 다른 고깃집에 가신다면서 또 동생 가족을 부르셨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카드로 결재하신다. 나는 속으로 아하! 어차피 날짜 지나면 없어질 돈이니까 이걸로 미리 쓰고 나중에 현금으로 주실 모양이지? 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긴급재난지원금이 11만 원이 남았다. 그날 엄마께서 아버지에게 카드를 뺐으시더니
“영감. 설마 이 카드 그냥 쓰라고 준 건지 알아요? 다 제가 현금으로 받아쓰려고 영감한테 카드 줬던 거예요. 돌려줘요.”
“아니? 내가 쓰라고 받은 거니까. 나는 한 푼도 줄 돈 없어.”
“영감. 그래요? 그럼 됐고요. 잘됐네.”
아니? 이게 무슨 말씀이시지?
“아버지. 아버지께서 쓰시고 현금으로 주신댔잖아요?”
“내가 언제?”
아니 왜 딴소리를 하시지?
“그럼. 아버지 이 돈 그냥 다 쓰려고 하셨어요?”
“그래. 다 쓸려고 했다. 나라에서 쓰라고 준 돈 좀 썼기로 서니.”
순간 정수리로 피가 확 솟구쳤다. 화장실 갈 때 하고 나올 때 하고 마음이 다르다더니. 돈 몇십만 원에 이럴 수가 있나. 더 이상 말해봐야 나만 불효자식 되고. 그리고 아버지는 그 돈을 내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몇 날 며칠이나 속이 상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안 주신다는데 억지로 받을 수가 있나?
우리 집의 가족 분란을 가져온 그 재난지원금. 그 남은 돈으로 지금까지 먹고 싶어도 못 먹었던 순대국밥, 팥 시루떡. 치킨버거. 산딸기. 초콜릿 케이크. 통밀 비스켓. 허니버터 아몬드를 사 먹었더니 여름이 오기도 전에 바닥이 나고 말았다.
김진미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창생 친구들과 ‘나의 소녀시대’라는 영화를 봤다. 외국영화인데 내 또래의 여자가 청소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전개되는 내용이다. 덕분에 나도 나의 소녀시대를 회상해 보기로 한다. 영화 주인공처럼 나도 그다지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사실 학창 시절에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애들을 불량 청소년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요즘 아이들처럼 교복을 꽉 맞게 제작하지도, 치마를 허벅지까지 자르지도 않았다. 3년 내내 입을 교복이라고 해서 아주 큰 교복을 맞춰 입고 1학년 때는 헐렁하게. 2학년 때는 맞게, 3학년 때는 좀 작은 듯 입고 다녔고 치마 길이는 당연히 무릎을 가려야 했다. 두발 상태 또한 귀밑 2센티미터를 넘으면 안 되었다. 담당 교사들은 매일 머리 길이를 체크하고 긴 학생은 당연하다는 듯 가위질을 당했다. 나 역시 가위질의 희생양이었는데 뒷머리 한가운데를 잘려서 짧게 자를 수밖에 없었다. 치마도 풍성하니 지금 생각해보면 촌스럽기 짝이 없는 차림새였다. 그래도 우리 모두 그런 촌스러웠기에 누구도 복장이나 두발모양에 대해서는 감히 대들 수 없었다. 너무나 순한 양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와는 달리 나의 소녀시대. 즉 우리 고등학교에서는 전교생 중 남자친구를 사귀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 800여 명을 다 속속들이 다 알 순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소녀시대 적엔 이성교제라는 것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관심을 가진 애들도 없었다. 아침 7시 등교, 밤 10시에 하교했다. 학원에는 안 갔냐고 묻는 모양인데 우리 소녀 시절에는 사교육이 금지여서 과외는 물론 학원 수업도 받을 수 없었다. 적발되면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래서 모두 평등하게 학교에서만 공부를 했다. 물론 급식도 없었다. 도시락을 2개씩 싸서 다녔다. 점심시간, 저녁시간에는 각자가 싸 온 도시락을 먹었는데 도시락 반찬에서 빈부의 격차가 매우 크게 나타났다. 우리 집은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이어서 도시락 반찬은 다양한 편이었다. 동급생들끼리 함께 밥을 먹으면서 각자가 싸 온 반찬을 같이 나눠 먹는데 내 반찬이 너무 인기가 있어 내가 먹을 것이 부족하였다. 나의 반찬통은 엄청나게 커서 다른 학생들은 저렇게 많으니 우리가 먹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였다. 실은 점심 도시락과 저녁 도시락 두 번 먹을 반찬을 커다란 반찬통 하나에 담아 주셨기 때문인데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때 먹을 반찬이 없었다. 동급생들은 그럼 자기들 반찬을 먹으라고 하는데 사실 그 애들 것은 내가 먹을 게 없었기 때문에 이래저래 속상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3년 내내 반찬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요즘 애들은 학교에서 급식을 하니까 엄마들이 힘들게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는 불편함도 없고 학생들도 도시락의 빈부의 격차를 느끼지도 않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식단도 영양사가 제대로 짠 식단으로 영양소의 배분도 정확하고 참 복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다. 그런데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소녀시대 때는 사교육이 없어서 사교육의 빈부의 격차는 없었다. 학교 수업에 집중하였고 교사들도 열심히 가르쳤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그대로 시험에 나오고 전국 모의고사도 우리 학교가 순위에 뒤처지지도 않았다. 특히 우리 학교가 국어성적이 전국 최상위권이었는데 그런 우리 학교에서 나는 국어를 1등급 받았었다. 그러고 보니 국어성적이 제일 좋았었구나. 국어, 현대문학, 고전문학 다 1등급이었네. 시험공부도 국어 공부는 따로 한 적도 없었는데, 결론은 우리 학교 국어 선생님이 잘 가르치신 거네. 학교에서도 국어가 전국 1위를 해서 국어 선생님들 단체로 포상을 받으신 것 같았다. 지금 학생들에게 사교육 필요 없다고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한다면 과연 몇 명이나 그 말을 들을까 싶다. 내 친구들도 자기 자식들은 다 사교육 시장에 내몰기 일쑤였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친구에게 물었다.
“우리는 사교육 안 받았었잖아?”
“그래서 지방대밖에 못 갔잖아?”
“하긴 그건 그래. 그래서 네 아들은 서울 유명대학 갔니?”
“아니. 하지만 지방 국립 의대는 보냈다.”
“어. 그래. 의대에 갔지. 장학생이라면서? 하긴 할 말이 없구나. 열심히 사교육 시켜서 의대에 장학생으로 아들 둘을 다 보냈으니 자식 교육 잘한 거 맞고.”
다른 친구 아들도 의대, 한의대. 수의대를 갔다. 내 동창들은 다 아들이 의대생이다. 다른 친구는 딸만 둘인데 평범한 지방대를 가더니 1년 다니다가 고시원에 들어박혀 공무원 공부를 해서 1년 만에 9급 공무원이 되었다.
“22살에 공무원이라니? 정년보장에 정년도 긴데 수당 및 보너스, 공무원연금도 엄청나게 많이 받겠네. 공무원은 호봉이 최고 아냐?”
“당연하지. 공무원 정년 연장되니까 한 50년 근무하니까 연금이 엄청나겠지. 호봉도 세서 그 정도면 웬만한 대기업보다 많을 테고.”
“우리 딸이랑 같이 붙은 공무원 중에 50대 아줌마가 있는데 요즘 나이 들어 공무원 시험 붙어도 공무원 월급 초봉은 쥐꼬리인데 그거 벌자고 그리 죽도록 건강 다 상하도록 공부해서 겨우 9급인데, 우리 딸이랑 호봉이 같으니 말 다 했지. 우리 딸은 그 나이 되면 엄청 많이 받을 텐데, 그 양반은 50대에 공무원 되었으니 한 10여 년 다니다 퇴직하면 연금도 쥐꼬리일 것이고. 그 나이에 공무원은 왜 하는지 몰라.”
“그래도 그 나이에 취업할 곳이 더 없으니까 공무원 시험을 봤겠지?”
“나의 소녀시대 때는 공무원 하라고 해도 아무도 안 가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 그렇게 공무원 시험 치라고 닦달하셨는데 그때도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었거든.”
“하긴 그 시절에는 대기업에서 졸업생들 바로바로 다 데려갔었으니까. 아무도 공무원 하려고 안 했지.”
“그때 공무원 시험 하나 마나 한 시험 쳐서 들어간 애들. 지금 호봉 엄청나게 높아서 잘 살겠다. 대기업 다니던 애들은 다 40대에 퇴직했잖아. 중역이 된 애들 빼고.”
“그래. 장기간을 생각하면 대기업보다 공무원이 더 나았어. 하지만 20대 때는 5, 60대를 생각하지 않거든.”
“당연하지. 선을 봐도 공무원보다 대기업 출신을 더 선호했는데. 네 신랑도 삼성전자 다니잖아?”
“그래. 우리 신랑. 삼성전자 근무해. 그런데 60이 다 되어도 아직 출근해. 중역이거든.”
“그래. 너 잘났다.”
“아니 우리 신랑이 잘난 거지.”
“너네 신랑. 소년 시절 때 공부 잘했나 보네.”
“당연하지. 전교 1등이었는데 집이 가난해서 서울에 못 갔다고 하더라고.”
“하긴 웬만하면 공부 잘하는 아들은 다 서울 보냈었는데 얼마나 가난했기에?”
“우리 시댁이 촌에서 농사지으시는데 땅이 지주 것이고 소작농으로 농사지으셔서. 진짜 입에 풀칠만 했단다.”
“저런. 그 땅이 지금 엄청나게 올랐는데. 그 땅만 갖고 있었으면 농사만 짓더라도 재산은 챙길 수 있었는데. 역시. 옛날에 가난한 사람은 지금도 가난하구나.”
“당연하지. 우리 신랑이 대기업 다니면서 월급을 많이 받아도 시댁에 생활비. 시동생. 시누이 결혼자금. 주택자금. 다 대느라 내 손에 남은 게 없어. 나도 따로 돈 벌어야 했다고.”
“그래. 그래도 우리 소녀시대 적엔 우리가 지금 이리 살 줄 누가 알았겠니?”
“당연하지.”
나의 소녀시대 때는 내가 지금 이리 살 줄 꿈도 꾸지 않았다. 나는 그저 책을 좀 많이 읽고 시도 가끔 쓰면서 열심히 학교 다니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순한 어린양이었을 뿐이다. 동창생들은 자식들 다 학교와 직장에 보내놓고 편하게 여가 생활을 즐긴다. 하긴 자식 키우느라 애썼는데 이제 여가 생활 즐길 때도 되었어. 키울 때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래. 잘 가라. 정말 몇 년 만에 만나서 회포 푼다. 또 몇 년 후에 보자.”
“그래. 안녕.”
짧은 휴가를 마치고 다시 나의 현재시대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집 주소는 영축산 아래 통도사 산 내 보타암이다.
김진미
오늘은 내 생일. 나이는 정말 세기도 싫다. 내 생일인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자축(自祝)하기로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미역국은커녕 밥솥에 밥 한 톨이 없다. 라면 먹기 싫어서 참, 그렇지. 전에 사둔 찰 시루떡이 있었지. 생일에 떡이라도 먹어야지. 냉동실에 얼음처럼 굳은 떡을 가방에 싸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몇 시간 지나서 녹으면 먹어야지. 하필이면 내 생일에 도서관 전자 예약 시스템까지 고장이 나서 직접 와서 종이에 수기로 작성하고 컴퓨터를 사용한다. 오히려 다행이다. 지금까지 전자예약 시스템을 도서관에 오지도 않는 사람들이 예약을 걸어서 나처럼 매일 오는 사람이 사용도 못 하도록 블록처리 해놓는 바람에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오자마자 딱 비어 있는 컴퓨터에 앉아서 오늘의 문서작업을 하였다. 그래도 생일인데 평소에 집에서 입던 복장 그대로 출석하는 건 좀 그렇지. 그동안 열심히 사 모은 예쁜 원피스를 입고 왔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다. 그럼. 여름은 원피스의 계절. 초여름의 햇빛이 따사롭고 바람은 상쾌하다. 조금만 지나면 햇빛은 따사로움에서 따가움. 일광화상의 주범이 되겠지만 선크림은 안 바르고 다닌다. 왜냐고? 마스크를 쓰는데 선크림이건 선쿠션이건 마스크와 피부와 상극이라 피부질환이 생기고 또 3중 세안의 번거로움이 맨 얼굴로 다니게 만들었다. 덕분에 얼굴은 원치 않았지만, 구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재작년 오늘. 즉 재작년 내 생일에 마음에 둔 사람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서 생일 선물이라고 직접 전해주러 KTX를 타고 물어물어 길찾기 앱까지 동원해서 겨우 찾아가서 전해주려 했건만. 직원에게 단칼에 거절당하고 쫓기다시피 하여 다시 쓸쓸하게 밤 기차를 타고 내려왔던 아픈 기억이 있다. 그렇구나. 벌써 2년이 지났구나. 그리고 작년 생일? 뭐 했더라? 열심히 도서관 다니면서 인문학 강의 듣고 책 읽고 글쓰기 강좌를 들어야지라고 마음먹었었구나. 그리고 가을에 내 첫 번째 글. 다시 그 사람에게 첫 번째로 등기우편으로 보냈었구나. 그랬는데 고스란히 반송되어 돌아왔었지. 윽. 또 아픈 기억이..... 그 때 반송되어 돌아온 글. 계속 써서 1편이 2편, 3편, 4편이 되어도 읽어줄 사람이 없어서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에 고스란히 잠자고 해를 넘겨서 올봄이 지나서 여름에 이르러 드디어 인터넷에 올리게 되었네. 인터넷에 글 올리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터라. 음. 작년 가을, 겨울에 써 둔 것을 올여름에 비로소 올리는구나. 그동안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기에 의욕이 없어서 더 쓰지 않고 있었는데. 요즘 세상이 바뀌어서 무명인의 무명글도 올릴 곳이 다 있네. 감사한 일이지. 어떻게 올리는 건지 잘 몰라서 몇 번 시행착오를 거치다가 드디어 5번 만에 올렸는데. 주 2회 올리기. 주중 매일 올리기 두 편을 올리고 있다. 다른 두 편은 다른 사이트에 지난달에 올렸다. 지난달에 올린 사이트는 하루에 전편을 다 예약제로 올릴 수 있어서 그날로 다 올리고는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는데 이번 달에 올리는 곳은 매번 일일이 그날그날 올려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래서 원치 않지만 몇 명이 읽었는지를 고스란히 다 보게 된다. 관심 0. 독자. 0. 음. 그래도 하나는 계속 월요일과 목요일. 다른 하나는 주중 매일 올리기를 하고 있다. 인터넷 독자마저 없으면 내 글재주가 영 시원찮은 것 같으니 그만 쓸까 싶다. 오늘도 도서관에 와서 글을 올리고 돌아간다.
참. 생일 찰 시루떡은 먹고 가야지!
..................
그 다음 달 음력 생일이 되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신 부모님. 벌떡 일어나서 말씀드렸다.
“오늘 내 생일이에요.”
아버지 말씀 “그래?”
엄마는 아무 말씀 안 하셨다. 두 분이 일찍 아침을 다 드시고
내 음력 생일 아침에도 밥솥에 밥 한 톨, 냄비에 국 한 방울 남겨놓지 않으셨다.
양력 생일 때는 몰라서 그런가 했는데 오늘은 직접 말씀까지 드렸었는데.....
폭우주의보가 떠서 옷이 쫄딱 젖은 채 식당에 혼자 가서 밥 먹었다.
‘띵똥’ 동생에게 온 문자.
“네가 부모님 밥을 해드려라.”
김진미
올여름은 장마가 빨리 왔다. 이불장과 옷장에 곰팡이 냄새가 난다. 심지어 3일 연속으로 비가 온단다. 이런. 이불을 빨아야 하는데.... 차렵이불에서 여름 이불로 바꾸려면 빨아 넣어야지. 그런데 날씨가 이러면 세탁을 하고 널어도 제대로 마르지도 않을뿐더러 꿉꿉하게 말려서 이불장에 넣으면 또 이불장에서 곰팡내가 날 텐데.... 물론 건조기가 있는 집은 건조기가 쨍하게 말려주니까 걱정이 없겠지만. 그래도 건조기를 사용하면 천이 금방 상해서 떨어진다던데... 여름 이불. 여름옷들은 건조기에 들어갔다 하면 바로 헌 옷. 헌 이불이 된다던데. 이불은 고가라서 한 장에 10만 원씩 한다. 그것도 바가지를 쓴 것 같긴 하다. 그 얇은 이불이 무슨 10만 원씩이나 하는지. 오늘 잠깐 해가 나긴 했지만 계속 비 오다가 잠깐 해 났다고 옷장. 이불장을 열어 통풍시킬 수는 없다. 여전히 습도가 높기 때문이다. 연속으로 맑은 날이 계속되어야 통풍을 시킬 수 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장롱을 닫은 채로 나왔다. 열고 나올까 하다가 혹시 모르니까. 다시 소나기라도 내리면 내 장롱 속은 곰팡이 천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도 이상하다. 날씨가 좋을 때마다 장롱문을 열어서 환기를 시키고 하는데 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걸까? 특히 겨울 옷장은 냄새가 더욱 심하다. 하루는 마음 먹고 겨울 옷장을 열어 일일이 확인을 해봤다. 어떤 옷에서 곰팡이가 서식하는지 발본색원하리라......겨울 옷은 대부분 모직이 많고 순모 제품이 많아서 곰팡이가 좋아하긴 하겠지. 응? 드디어 곰팡이 냄새의 주범을 찾았다. 그것은 15년 전에 샀던 양털양가죽 무스탕이었다. 이 무스탕. 분명히 드라이클리닝을 해서 넣어둔 것인데 유행이 뒤떨어져서 한 10여 년을 옷장 속에서 잠자고 있던 것이다. 세탁소에서 씌어둔 커버 그대로 있어서 몰랐었는데 감색 무스탕이 하얗게 곰팡이가 슬어있었다. 세상에. 드라이클리닝을 한 옷에 곰팡이가 서식할 줄이야. 경악했다. 아깝다고 둘 것이 아니다. 소독한다고 해도 다시 곰팡이가 재생,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최고가로 산 옷이라 오래오래 장 속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끼다가 대변(大便)이 되고 말았다. 바로 버렸다. 그 무스탕 때문에 옷장 속에서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던 거였구나. 그런데 그 곰팡이 다른 옷에 퍼지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된다. 겨울옷들은 하나같이 다 수십만 원대 고가의 옷들이고 다 평생 입으려고 장만한 것들이다. 그리고 또다시 경악했다. 핸드백, 토트백, 하여튼 가죽으로 된 크고 작은 가방들도 모두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가방들도 가방 주머니와 케이스 속에 감싸져 있어서 역시 몰랐다. 전부 버렸다. 비싸고 좋은 것일수록 곰팡이가 잘 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아끼다가 변 만들지 말고 적당한 가격대에 쓰기 편하고 유행 타지 않은 가방, 옷들을 사서 열심히 입고 쓰다가 낡으면 버려야지. 비싼 것 사다가 애지중지 모셔놓을 것이라면 구매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렇게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비싼 옷과 가방들을 어떻게 관리하는 걸까? 몇십 년씩 대를 물려 사용한다던데. 왜 우리 집 장롱만 그런 건가? 하여튼 몇백만 원짜리들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참담함을 남자들은 모르리라.
“왜 그런데 돈을 써? 그것도 다 수입품이던데 외화 아까운 줄 알아야지?”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나도 할 말 있다.
“네가 허구헌날 마셔대는 양주는 국산이냐? 양주에 몇백만 원씩 외화 낭비하는 건 어떻고?”
“뭐야? 말 다 했어?”
“아니. 내 가방, 옷값보다 네 똥, 오줌으로 나가 버리는 양주값이 훨씬 아깝다. 곰팡이가 슬어도 옷과 가방은 그대로 남아있기라도 하지.”
“곰팡이 슨 옷과 가방이 남아있기라도 한다고? 그 곰팡이가 우리 호흡기 질환의 주범이라는 건 모르는 모양이지? 술은 깨끗하게 분해되어 사라지기라도 하지. 그 곰팡이 우리 민식이 아토피 질환 더 심하게 만든 거 아냐?”
“네가 양주 먹고 술주정하는 것에 스트레스받아서 애 더 아토피가 도지는 거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밖에 나가서 죽도록 일해서 번 돈으로 너는 그딴 곰팡이나 키워서 애 아토피나 유발시키냐?”
“네가 번 돈이라서 너는 비싼 수입 양주 사 마셨니?”
“내가 열심히 번 돈으로 술도 못 사마시냐? 그래도 나는 술만 사서 조용히 집에서 마시잖아? 다른 사람들은 술집에서 여자들이 따라 주는 양주 마신다. 아휴. 나도 그랬어야 했는데. 돈이 아까워서. 아끼다가 마누라 곰팡이 양식하는데 보태주고 말았네.”
“내가 곰팡이를 양식했다고?”
“그럼. 네가 양식했지. 내가 양식했니?”
“............”
으으. 장마철에 습기가 집안 분란을 일으켰다. 사실 우리 아들 민식이 아토피가 심하다. 그래서 매일 피부에 좋다는 것,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바르고 했는데 아무래도 집안에 곰팡이가 돌면 안 좋겠지. 살짝 양심에 찔려서 잠자코 있었다. 지금도 비가 주룩주룩 계속 내리고 있는데 민식이가 피부가 가려운지 깊은 잠을 못 자고 찡찡거리다가 뒤척인다.
며칠 뒤. 날이 화창하게 개어서 민식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확실히 장롱 및 집안 대청소를 하다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했다.
“이게 뭐야?”
그것은 개미집과 올챙이 수족관이었다.
김진미
요즘 유투브라는 인터넷 채널이 매우 유행하고 있고 나도 열혈 시청자이다. 그 유투브에는 온작 다양한 장르의 영상을 각 개개인이 원하는 대로 올려서 구독자가 늘어나고 시청 시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금전적 보상을 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유투버가 될 수 있는데 시청률과 구독률을 올리기 위해서 사람들이 많이 시청할 만한 컨텐츠를 올리는 것이 유리하다. 심지어 초등학생 유투버도 억대 연봉을 버는 세상이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유투버에게 금전 보상을 해주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창 공부하고 일해야 하는 젊은이, 청소년, 아동들이 유투브 영상제작에 몰두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싶다. 공부 안해도 돼. 유투브 구독률만 높이면 돼. 뭐 이런 식이다. 그래서 자극적이고 퇴폐적이고 잔인한 영상물까지 늘어나는 부작용이 분명 있다. 유투브의 유행과 함께 애완동물 즉 반려동물을 키우는 세대가 늘어남에 따라 동물 영상을 유투브에 많이 올리고 있고 또 구독률과 시청률이 꽤 높다. 가장 인기있는 개와 고양이는 물론이거니와 고슴도치. 햄스터, 파충류인 도마뱀, 뱀. 악어. 어류인 물고기 외 독거미와 같은 곤충까지 유투브 동물농장 시리즈는 점점 인기가 늘고 있다. 나 역시 구독 신청하고 보는 고양이 채널이 있었는데 그 고양이들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매일매일 그 시간에 보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힐 지경이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그 고양이 채널이 새로 올라왔는지 찾아보고 일어날 정도였다. 하루는 그 고양이들의 영상에 ‘안녕, 크림 히어로즈.’라는 문구가 떴는데 그게 뭔가 알아보니 해외 유명한 고양이 채널이었다. 그 크림 히어로즈라는 영상을 올리는 유투버는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억만장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그 유투버가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운영하던 ‘크림 히어로즈’ 채널을 폐지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애석하게 여긴 이 고양이 채널에서 올린 문구였다. 음. 그렇군. 돈맛을 알더니 초심을 잃고 동물을 돈으로 여긴 모양이네. 그러고 얼마 지나서 곧 잊어버렸다. 여전히 나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고양이 채널을 열혈 시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영상에 사과문이 뜨고 내가 매일 보던 고양이들은 화면에 제대로 잡히지도 않고 분위기가 이상했다. 나는 이 채널이 너무 인기가 많아서 다른 고양이 유투버들이 시기, 질투해서 운영자가 기분이 상했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텔레비전 뉴스에 이 유투버 관련 기사가 뜨고 유투브 구독자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둥. 유투버가 유기동물이라고 해놓고 키우는 고양이들이 실은 돈 주고 산 고양이라는 둥. 고양이들을 굶기고 학대하여 영상을 찍었다는 등등의 기사와 인터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엔 설마 그런 짓을 했겠냐 싶었지만, 증인들이 꽤 많고 내용이 상세하여서 나도 마음을 바꿔 먹었다. 구독취소. 다시는 그 채널을 보지 않았다. 한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던 고양이들을 볼 수 없어서 몹시 서운하고 기분이 울적했다. 불과 얼마 전 ‘크림 히어로즈’ 사건에 이어 똑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난 것을 보니 참. 이 유투브라는 채널. 과연 좋은 채널인가 싶기도 하다. 금전적인 보상이 없다면 과연 유투버들이 그렇게까지 억지 영상을 제작할까? 돈이 따르지 않는다면 학대, 잔혹, 유기, 살해. 등등의 영상들도 없어질 테고, 공부 해야하는 초, 중, 고, 대학생들은 영상 제작 시간에 열심히 공부를 할 테고, 일해야 하는 직장인들은 열심히 일을 하겠지? 정말 순수하게 영상 제작해서 올릴 사람들만 올리겠지? 돈을 안 주면 영상제작물 분량이 엄청나게 줄어들까 봐 그런 것인가? 영상물 수량이 줄면 광고도 줄어들테고 유투브 운영자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수입원이 줄까 봐 영상 제작 활성화를 위해서 금전보상을 하는 것이긴 한데. 입맛이 썼다. 하지만 나 역시 유투브 채널의 애청자로서 동물 영상 외에 다른 영상들도 많이 보기 때문에 유투브 정책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덕분에 나도 무료로 영상을 시청할 수 있으니까 군말하지 않고 보고 있다. 하긴 내가 보는 무료 영상들도 영상을 올리는 사람들이 돈벌이가 되니까 공짜로 올려주지. 돈도 못 버는데 저렇게 공짜로 시청을 할 수 있게 하지는 않겠지?
“뭐해?”
“아? 깜짝이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댓글 달고 있었어.”
“야? 너 그 고양이 어디서 났어?”
“어디서 났긴? 애완동물 샵에서 제일 예쁘고 비싼 놈으로 샀지.”
“처음부터 훈련을 잘 시켜야 해. 카메라를 들이대면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야 하니까. 역시 밥을 많이 주면 안 돼. 훈련을 시켜야 해. 촬영을 잘해야 밥을 준다는 식으로 보상을 해야 하지.”
“그러게. 그 바보는 어지간하게 하지.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그렇게 들통나게 하면 안 됐지.”
“물론. 우리도 그 바보처럼 하면 안 되니까 처음부터 훈련을 잘 시키자. 그놈 구독자 전부 우리가 다 빼앗아 오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그 자식 폭로 인터뷰도 얼마나 잘했는데. 그 자식 너무 벌었어. 대학생이 외제차나 몰고 다니고 대형 동물병원 오픈한다고 큰소리치고 다닐 때부터 배알이 꼴렸었어.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수위를 잘 조절해서 촬영하자. 그래서 그 구독자 다 빼앗아 오자.”
“당연하지. 그 자식이 어떻게 요령껏 촬영하는지 비법을 다 알았으니까... 히힛. 우리도 백만장자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야. 하하하.”
김진미
우리나라는 드라마 왕국이다. 물론 지금은 K-POP. K-FOOD. K-영화. 등등이 많지만, 한류 1세대 콘텐츠는 드라마였다. 당시 ‘겨울연가’라는 드라마가 일본에서 크게 대유행하고 배우들은 한류스타가 되었다. 그 이후로 드라마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수출되고 큰 인기를 누렸다. 한동안 K-드라마가 절찬리에 방영되면서 ‘한류’라는 어휘가 심심찮게 돌았다. 드라마가 약간 시들해졌을 무렵 한류는 끝났다는 둥. 말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드라마가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것이었다. 기억상실. 숨겨둔 자식. 막장 전개. 신데렐라 콤플렉스. 등등이 반복되는 시작만 보면 끝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우한 여주인공이 왕자님을 만나서 인생 역전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정작 나는 그 시절에는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 물론 지금도 잘 보지 않는다. 드라마를 한번 보면 첫 화부터 최종화까지 다 챙겨봐야 하고 본방 사수는 물론이거니와 재방, 삼방까지 챙겨봐야 하는 내 성격 때문에 가족들과 분란을 일으켜서 그냥 드라마를 보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드라마가 해외에서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넷플릭스’라는 곳에서 한국 드라마를 송출하는데 그것이 인기가 많다고 한다. 나는 드라마건 예능이건 TV를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드라마가 경쟁력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위에 언급했던 그런 내용 들을 벗어나서 다양하고 흥미로운 내용의 드라마가 많이 제작된 모양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비싼 제작비를 충당하고도 남는 장사를 하고 있단다. 정작 국내 드라마 시청률은 예전에 비해 많이 저조한 편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다양한 드라마를 제작한다고 해도 그 많은 작품들이 어딘가는 비슷하거나 예전의 여러 작품에서 짜깁기를 한 것 같은 느낌 아닌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기에 시청자들도 이제는 조금 식상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본다. 예전에 대히트했던 드라마의 주인공 배우와 대히트했던 대본 작가가 다시 만나서 드라마를 만들었지만 거기서 거기라는 식상함과 함께 시청률을 보장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 드라마도 연기자도 별로 관심이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시청률이 보장되지 않으면 해외로 수출한다고 해도 그 나라 시청자 역시 식상하다고 느낄 것이 분명하기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방송사들은 시청률에 목숨을 걸었기에 유명 연기자와 유명 작가들의 대본을 선호한다. 하지만 드라마 대본작가도 고충이 있다. 원하는 대로 쓰기 어렵다. 왜냐하면 1. 2화 정도의 대본으로 제작자들이 간택을 하고 거기서 간택되어 드라마로 제작이 되면 시청자들의 의견에 따라 내용이 전개되어야하기 때문에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요즘은 정도가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예전에는 매번 쪽대본으로 작업해서 그야말로 시청자와 연출자가 원하는 대로 대본을 집필해야 하는 어려움이 컸다. 최근에는 완성대본으로 드라마를 사전제작해서 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사전제작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완성작을 만들어서 방영하는 것이니까 온전히 작가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시청률은 보장하지 못한다. 몇 년 전 ‘태양의 후예’라는 사전제작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쳐서 사전제작의 붐이 살짝 일기도 했는데 이후의 성공한 사전제작 드라마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쪽대본의 드라마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드라마는 제작 수량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이고 제작되는 작품이 많으니까 그중에 히트하는 작품들도 나오기는 하는데 예전만큼의 영화를 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
“사장님. 이번에는 어떤 드라마에 PPL 넣으실 건가요? 전에 그 드라마 크게 기대하고 넣었는데 별로 시청률이 나오지 않았잖아요?”
“그러게. 나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으니까. 게다가 드라마를 주로 시청하는 여자들의 성향도 잘 몰라서 말이지. 이번에 어떤 드라마가 대박날 것 같은가?”
“글쎄요. 우리 마누라나 딸이 좋아하는 드라마는 주로 자기가 좋아하는 연기자의 작품을 위주로 보던데요.”
“그렇다면 사람들마다 선호하는 연기자가 다 다를 것 아냐?”
“그러니까 최고 인기스타의 작품을 선호하는 거죠. 아무래도 팬들이 많은 쪽이 시청률도 높겠죠? 시청률이 높아야 광고효과도 극대화될 것이고.”
“당연하지. 시청률이 높을 것 같은 드라마를 찾아. 이번에는 반드시 히트작을 골라서 광고효과 좀 제대로 내어 봄세.”
“네. 사장님. 전 직원들에게 인기투표라도 해서 작품을 선정해야겠어요. 하여튼 저번 작품은 시청률이 엉망이어서. 그런데 사장님. 그 드라마 연기자도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대본 작가도 그렇고 예전 같은 시청률이 안 나왔잖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아아. 아닙니다. 그래도 안전한 것이 낫죠. 우리가 도박하는 것도 아니고.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유명 작가와 유명 연기자의 작품으로 고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이번에는 반드시 전 세계를 강타할 히트작을 고르도록 하게. 해외 팬들까지도 의식해야 해. 이번에 미주대륙에도 수출물량 좀 늘려보자.”
“넷. 사장님.”
김진미
화창한 봄날에 코끼리 아저씨가 나뭇잎 타고서 태평양 건너갈 적에
고래 아가씨 코끼리 아저씨보고 한눈에 반해 스리슬쩍 윙크했대요.
당신은 육지 멋쟁이 나는 바다 예쁜이 천생연분 결혼합시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예식장은 용궁예식장 주례는 문어 박사 피아노는 오징어 예물은 조개껍데기.
이 노래 아주 예전에 내가 남편에게 청혼하면서 불러준 노래이다. 그때 율동까지 곁들여서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정말 미쳤었나 보다. 그때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봤어야 했는데 내가 부끄러워서 제대로 못 봤었다. 노래와 율동이 다 끝나고 남편 아니 당시의 남자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참다 못해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땠어?”
“응? 아. 어땠냐고? 네가 부르기에는 좀 늦은 것 같지 않니? 게다가 그 율동은 뭐야? 혹시 회사에서 장기자랑 발표 준비라도 하는 거야? 그 실력이면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자신감도 없고. 얼굴도 제대로 못 들던데. 그 실력에 노래도 율동도 썩.... 점수로 따지자면 C+ 후하게 준 거야. 요즘 애들도 그렇고 얼마나 다들 노래니 춤이니 다 잘하는데. 넌 다른 걸 찾아봐.”
순간 피가 정수리를 뚫고 하늘로 치솟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남편 아니 그때는 아직 남편이 되기 전이었다. 귀싸대기를 날려버리고 뒤돌아 왔다.
집에 도착하고도 계속 전화가 왔다. 당연히 안 받았다. 전화가 울리다 울리다 이제 문자가 왔다.
“왜 때리는데? 나는 우리 부모님한테도 맞아본 적이 없어. 너 깡패냐?”
이런! 상종 못 할 자식 같으니라고.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전화도 안 받고 안 하고 문자도 오는 족족 다 삭제했다. 그러기를 일주일. 퇴근하려는데 회사 앞에서 떡하니 서 있었다.
“우리 대화 좀 하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알았어. 그냥 들어. 아니 나 좀 봐봐.”
“화창한 봄날에 코끼리 아저씨가 나뭇잎 타고서 태평양 건너갈 적에
고래 아가씨 코끼리 아저씨보고 한눈에 반해 스리슬쩍 윙크했대요.
당신은 육지 멋쟁이 나는 바다 예쁜이 천생연분 결혼합시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예식장은 용궁예식장 주례는 문어 박사 피아노는 오징어 예물은 조개껍데기.”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퇴근 시간이지만 이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 대로변에서 이게 할 짓이야? 남편 아니 남자친구는 이 노래를 내가 했던 그 율동 그대로 나에게 공연하는 게 아닌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그 큰 덩치에 팔다리가 길어서 율동도 엄청 더 씩씩해 보였다.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서 주변 사람들 보기 창피했다.
“알았어. 그만 좀 해. 내가 그랬단 말이지. 그래. 너 그때 무척 창피했겠네. 아니 그때는 다른 사람들은 없었잖아. 왜 이러는 거야?”
끝까지 노래와 율동을 다 마친 후에야 비로소 내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너 나보다 훨씬 못했었거든. 적어도 이 정도가 아니면 하지 말아!”
나는 다시 울화가 터져서 다시 노려보면서 손이 올라가려는데 그가 내 손을 확 낚아챘다.
“아니 아니지. 여자가 이리 손이 가벼워서야. 그래서 남편 제대로 공양하겠니?”
그러면서 낚아챈 내 손을 붙잡더니 반지를 끼워주었다.
“고래 아가씨. 코끼리 아저씨와 용궁서 살래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박수를 하고 환호했다.
“응.”
..........................
오늘은 결혼 20주년. 오늘 이 공연을 다시 해 줄까 한다.
김진미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소위 말하는 클래식 음악 말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아버지께서는 전축을 갖고 계셨는데 그게 엄청 비싼 제품이다. 스피커만 몇백만 원이었다. 거기에 턴테이블이 있었는데 즉 레코드판 즉 LP판을 걸어서 바늘을 올려 소리를 내는 장치이다. 요즘 애들은 턴테이블이 뭔지? 레코드판이 뭔지 잘 모를 것이다. 하긴 요즘은 CD 디스크도 잘 사용하지 않더라. 음원을 그냥 다운로드 받아서 재생한다고 하니 참 세상이 많이 변했다. 나는 사람이 옛날 사람이라서 아직도 돌아가신 아버지께 물려받은 그 고가의 전축을 즐겨 사용한다. 당연히 우리 아들, 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귀에다 보청기처럼 생긴 이어폰을 꽂고 하루종일 음악감상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내 귀가 상할까 싶어 이어폰은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곧 보청기를 껴야 할 나이이다. 우리 집에는 그 고가의 전축이 내 음악감상실에 설치되어있다. 방음 장치도 완비되어 있고. 오래된 LP판이 사방 벽면을 가득 채웠다. 그 많은 LP판들도 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것이다. 요즘은 구하기도 쉽지 않다. 간혹 예전 물품을 파는 곳에서 종종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 집에 다 있는 것들 뿐이다. 아마도 우리 집 LP판이 제일 많으리라 확신한다. 내가 죽으면 우리 아들, 딸들이 박물관처럼 잘 관리해주면 좋으련만. 젊은 놈들은 오래된 물품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아니 그놈들도 나이 들면 좀 가치를 알아주려나?
음악을 듣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연주회장에 가서 실제로 연주하는 그 순간을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두 번째 좋은 방법은 아날로그로 녹음해서 아날로그 제품으로 감상하는 것이다. 나처럼. 그래도 좀 젊은 시절에는 매주 음악회장에 가서 음악 감상을 하고 밤늦게 충만한 감정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었는데 음악회는 꼭 저녁에 했었으니까. 요즘은 브런치 콘서트 같은 것도 있어서 주부들이 애들 학교나 유치원 보내놓고 가서 음악 감상하고 오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한다. 마누라가 요즘 다리가 불편하니까 같이 음악공연을 보지도 못하고 게다가 최근에는 우한 괴질이 돌아서 대형 공연장이 폐쇄되어 음악공연을 보러 가지도 못한다. 나는 음악회원이라 음악당에서 문자가 온다. 정기공연을 하는데 인터넷으로 보라고 말이다. 직접 가서 듣지 못하는 대신 빈 공연장에서 공연한 것을 동영상으로 감상하라고 하는데 나는 IT 제품 다루는 데 익숙하지도 않고 또 겨우 자식놈들에게 부탁해서 켜달라고 해서 보면 음질이 거의 소음 수준이라 귀가 상할 지경이다. 그래서 동영상이니 음원이니 하는 것들은 듣지 않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내 음악실에 들어가서 오래된 소중한 LP판들을 꺼내서 턴테이블에 올려서 바늘을 올려 조용히 감상한다. 내가 음악실에 있을 때는 마누라도 방해를 못 한다. 하긴 다리가 아프니 방해하러 오지도 못한다. 오늘도 음악실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 이 아까운 전축과 LP판들 나 죽고 나면 아까워서 어떡하누? 정말 박물관에 기증이라도 해야 하나? 유언장에다 남겨야겠어. 이 전축과 LP판들. 제대로 사용하고 아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물려줘야 할 텐데. 할망구도 별로 음악에 관심이 없고. 다리가 아프기 전까지는 내가 억지로라도 데리고 다녔는데 다리 아프고 나서는 나 혼자 다녔고 지금은 공연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고......
“여보세요. 그래 애미다. 네 아버지? 음악실에 들어가 계시지. 그럴 때는 문도 열지 못하잖니? 그래. 엄마는 괜찮다. 다리 아픈 거는 뭐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니고 그러려니 해야지. 그래. 너희들도 저녁 잘 챙겨 먹고.... 애들 학교는 제대로 다니냐? 아? 이제 등교는 한다고? 그래 알았다. 음음. 뭐라고?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전화했다고? 네 아버지도 나도 별일 없는데 무슨.... 네 자식들이나 잘 챙겨라. 요즘 마스크 잘하고 다니니? 손도 잘 씻고. 사람 많은 곳은 피하고 엘리베이터에서도 벽을 보고 타거라. 그래. 끊자. 어서 저녁 챙겨 먹어라. 나도 네 아버지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는데 이 양반이 오늘은 좀 오래 있네. 저녁 안 드실 생각인가?”
....................
“어머니. 아버지께서 음악실에 혼자 계실 때 좀 신경 써서 챙기셨어야죠.”
“나도 저녁이 늦어도 안 나오시길래 들어가 봤더니 글쎄 앉아서 졸고 있는 줄 알았지.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냐?”
“아니에요. 인명은 재천인데 어머니 탓이 아니죠. 죄송해요.”
“아니 글쎄. 무슨 부처도 아니고 앉아서 열반하다니. 역시 네 아버지는 공력이 높으신 양반인가 보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혹시 뭐 유언장 같은 건 남기시지 않으셨나요?”
“그런 게 어디 있니? 평소 심장이 안 좋아서 심장약은 드셨지만 요즘 100세 시대에 이리 빨리 갈 줄 누가 알았겠냐? 평소에 건강해 보였고. 밥도 잘 드셨고. 나도 충격이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 음악실에 있는 전축하고 그 많은 LP판들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쎄. 나는 별로 듣지 않는데. 왜? 너 갖고 싶어?”
“그게 아니라 요즘 누가 그런 걸 들어요? 혹시 아버지 같으신 분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다 팔아야죠. 그 전축도 꽤 고가이고 분명 특정 마니아들이 있을 거예요. 어머니. 제가 알아서 팔아도 되죠?”
“그러렴. 나는 별로 상관없으니까. 근데 네 동생은 어쩌고? 서로 팔겠다고 하면 어쩌니?”
“그 계집애는 아버지에게 관심도 없다가 돌아가시고 유품만 차지하겠다고요? 아버지 장례에도 아직 오지도 않았잖아요?”
“미국서 오려니 그렇지. 곧 도착할 거야. 그래도 다 팔면 둘이 나눠야 하지 않니? 내 몫은 안 줘도 되지만 하나뿐인 여동생은 챙겨라.”
“알겠어요. 어머니. 하지만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요즘은 저런 구닥다리 물건 찾는 사람들도 많지 않아요. 고생은 내가 하고 지희 계집애는 공으로 먹겠네요.”
김진미
불면증이 와서 밤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한번 깨면 2, 3시간 그냥 말똥말똥. 날이 샐 즈음에 겨우 잠들면 늦잠을 자고 하루종일 피곤하고 스마트폰을 오래 보다 보니 자세가 나빠져서 버티다가 한의원에 갔다.
“불면증이 심해서 밤에 잠을 잘 못 자고요. 삭신이 다 쑤시는데요. 피곤하고 특히 다리가 많이 부어요. 다리가 아파서 다리 베개를 하고 자요. 그래도 아파서 못 자요. 기분도 안 좋고.”
“나이 들어 생기는 증상은 너무 신경 쓰실 것 없고요. 다들 겪는 일이니까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우선 목이랑 어깨가 뻣뻣해서 그러신 거니 목과 어깨를 집중적으로 치료하시고 그 다음에 다른 것을 보는 게 좋겠습니다.”
“다리가 붓고 아파서 못 자는 것 같은데요. 선생님.”
“우선 목부터 치료하고 그 다음에 보시죠. 목과 어깨만 고쳐도 잠을 잘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네.”
사실 한의원에 침 맞으러 온 것도 처음인데 무섭고 괜히 왔나 싶기도 하고 환자들이 많아서 대기 시간도 한참 걸렸다.
“으악! 어이구 아파. 아아악.”
무슨 진동 마사지기를 견갑골에 살짝 데기만 했는데 비명이 절로 나왔다.
“으악. 선생님. 너무 아파요. 음음...아아악.”
“많이 뭉쳤군요. 이러니 잠을 못 자지. 첫날이라 많이 아플 겁니다. 풀리면 점점 덜 아프겠죠.”
그러기를 몇 분이나 했을까? 일분일초가 어찌나 천천히 가는지. 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하지? 주변에 다른 환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창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저절로 비명이 나왔으니까. 나는 꽤 참을성이 많은 편인데 이토록 아파서 고함을 지르다니. 창피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통의 시간이 겨우 끝나자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전기 진동침을 꽂아서 또 비명이 절로 나오는 시간이 흐르고 사혈침으로 죽은 피를 뽑아서 겨우 끝났다 싶었는데 이제 침 맞아야 한단다. 침은 따끔하긴 해도 아까보다는 비명이 덜 나왔고 참았다. 그런데 침도 왼손바닥과 오른쪽 새끼발가락. 오른손 검지손가락과 왼쪽 관자놀이 부분은 무척 아팠다. 나중에 침을 빼고 나서도 그 부분에 시커멓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오른쪽 검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피가 계속 흘렀다. 알콜 솜으로 지혈을 했다. 다 끝났나 싶었는데 추나치료를 해야 한단다. 추나 침대에 엎어져서 목을 왼쪽으로 돌려서 그 지옥의 마사지 방망이로 또 사정없이 눌러대니 또다시 비명이 나왔다. 목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또 지옥 방망이 마사지. 비명이 난무했다. 기운이 다 빠지고 혼이 나가서 내려오려는데 팔다리가 후들거려서 겨우 일어났다. 나왔더니 뒷목과 귀 뒤에 스티커형 침을 붙이더니 내일까지 떼지 말고 오라고 했다. 그대로 샤워도 가능하고 취침도 가능하단다. 어질어질 겨우 나왔다. 첫날이라 초진료 해서 13,000원. 내일부터는 9,000원이란다. 하. 이걸 얼마나 더 해야 하나. 오늘 밤에 잠을 잘 잘 수 있으면 효과가 있는 거니까 내일 가고 여전히 못 자면 그 지옥 방망이를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으니까 안 가는 걸로.
아버지, 엄마. 여동생도 이 한의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는 심장병. 혈압, 당뇨, 엄마는 진짜로 어깨가 아파서 여동생은 편두통이 심해서 그 한의원에 갔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엄마. 동생이 전부 똑같은 처방으로 똑같은 부위에 시술을 하고 체조까지 똑같은 것을 하라고 했단다. 으잉? 이게 뭐지. 모두 다른 증상으로 갔는데 시술, 처방을 다 똑같다니 그럴 수가 있나? 특히 동생은 위가 나빠서 생긴 두통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나와 같이 목과 어깨, 손발에 침 맞고 체조하라고 했다니 4명이 다 다른 증상으로 갔는데 넷 다 처방이 다 똑같았다.
심장병. 고혈압, 당뇨. 불면증. 하지 부종. 오십견. 편두통이 다 목과 어깨가 뻣뻣해서 생긴 병이라니!!!
김진미
본격적인 장마철이다. 저번 주부터 장마라고 했지만, 비가 올 듯 말 듯 하다가 개이고 한 것이어서 장마라기보다는, 그냥 구름 끼고 습한 날씨가 계속되어 찝찝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엊저녁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비는 이렇게 내려야지. 창문을 닫은 상태로도 빗소리가 ‘쏴아아’ 하고 들렸다. 나는 빗소리가 좋다. 아니 물소리는 다 좋아하는 것 같다. 파도 소리도 폭포 소리. 시냇물 소리 등등. 빗소리가 그 어떤 자장가보다 더 숙면에 도움이 된다. 아침에 눈을 뜨니 거의 폭포수처럼 퍼붓고 있었다. 음. 밖에 다니는 것은 좀 불편하겠는데. 방수 점퍼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를 먼저 착용한 후에 치마를 입는다. 그리고는 이럴 때 신으려고 준비해둔 구멍 숭숭난 슬리퍼 샌들을 신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가장 큰 우산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얼마나 퍼부었던지 등에 맨 배낭이 다 젖고 발은 말할 것도 없고 팔다리가 다 젖어서 겨우 커피숍에 들어갔는데 자리에 앉으니 치마, 속치마, 속바지까지 홀랑 다 젖어 있었다. 이런. 아무리 비가 좋아도 이건 좀 아니야. 맑은 날에도 외출을 잘 하지 않는데 이런 빗속에서 산책이라니. 정신이 나간 거 아냐? 유명한 커피숍. 평소에는 자리가 없어서 줄을 서서 대기하거나 아니면 테이크 아웃으로 커피만 사서 나가는 그런 곳인데 손님이 한 명도 없다. 뭘 먹을까? 진열장 속을 들여다 보았다. 케이크. 쿠키. 빵. 그리고 많은 종류의 커피와 차. 주스. 등등. 치즈케이크를 고르고 앉았는데 밖에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다. 길에는 시냇물처럼 물이 흐른다. 이런 날도 출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새벽부터 출근했을 텐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장은 가야하고 애들은 학교에 가야 되는구나. 나는 참 팔자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한가롭게 앉아서 차 마시고 케이크 먹네. 실내에서 비 구경하는 것은 좋다. 단 다시 나가서 집에 들어가는 것이 문제다. 겨우 말려 놓았는데 집에 가는 도중에 다시 쫄딱 젖겠지. 아. 참. 역시 비 오는 날은 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일부러 비 맞으러 나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시간은 혼자 커피숍에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리 손님이 없기로 서니 더 앉아 있기는 눈치가 보인다. 사장이 아닌 직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 비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앞으로 보름은 더 비가 온다고 한다. 기가 막힌다. 빨래는 언제 어떻게 말려야 하지? 멍하니 창밖 보행자들을 구경한다. 뭐. 별로 사람들도 다니지 않네. 그리고 이 시간에 다니는 것이 더 이상한가? 다들 직장이나 학교에 있을 시간이고. 2시간 채우고 나가서 영화나 보러 가야지. 옛날 영화. 영화관에도 당연히 사람이 없다. 폐쇄공간이고 시국이 시국이라 바이러스가 창궐해서. 하지만 사람 없을 때 다녀야지. 혼잡한 곳은 피해야 하니까. 또 쫄딱 젖어서 영화관에 갔다. 두 시간 영화를 봤다. 이제는 더 시간 보낼 곳도 마땅치가 않다. 집에 들어가야지. 휴, 이렇게 갈 곳이 없다니....나도 헛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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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편네가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애들도 데리러 가지도 않고. 그 나이에 가출이라니 너 정말 미친 거 아냐?”
김진미
나는 온갖 비전, 비술을 신봉하는 할머니의 영향으로 비전, 비술, 방책들을 실천하는 집 가족의 일원이다. 할머니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신 할아버지보다도 더 가장으로서 집안을 다스리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집사처럼 보였다. 오로지 할머니의 건강과 안위만 신경 쓰신 분이셨고 자녀들 즉 우리 아버지, 큰아버지, 삼촌 고모들에게는 무심하셨다. 할머니는 유명하다는 철학관의 사주명리가를 직접 우리 집에 초빙하셔서 하루종일 가족의 사주를 다 보셨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전원을 다 보셨다. 그리고 그것을 공책에 기록하여 늘 보고 계셨다. 할머니는 유명 명리가들을 초빙하는데 너무 돈이 많이 들자 당신이 사주명리를 직접 공부하셨다. 할머니는 그 가족 사주 공책을 내게 보여주시곤 했는데 어린 나로서는 한자로만 적혀 있는 글이 무슨 외계어처럼 보였다. 나중에 자라서 내가 한자를 읽게 되면서 그게 무슨 글인지 알 수 있었지만 당시엔 신기했다. 결국 나도 할머니에게 사주명리를 배우고 커서는 전문가 선생님께 사사했다. 할머니는 연말연시에 항상 온 가족의 평안부적을 써서 집집마다 나눠주셨다. 우리 집도 해마다 새로 부적을 붙였다. 새 부적을 붙이면 헌 부적은 모아서 태워 없앴다. 그런데 할머니의 6자녀 모두에게 보낸 그 귀한 부적들이 다 붙여지진 않았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기독교로 개종을 해서 즉 기독교인 며느리들을 보시는 바람에 그냥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기 일쑤였다. 나는 할머니께서 얼마나 비싼 재료들을 어렵게 구매하셔서 길일 길시 목욕 재개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쓰신 부적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소중하게 관리하고 사용했다. 그러기를 몇십 년. 할머니께서 90이 넘으시고 치매가 오더니 결국 돌아가셨다. 이제는 이사택일, 이사방향, 부정퇴치 등등 그 어떤 비방을 해주고 도와주실 분이 안 계시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우리 집을 지켜야 한다. 큰집, 작은집, 기타 가족들은 전부 기독교인이라 신경도 안 쓰겠지만 나는 우리 부모 형제 조카들의 사주에 따라 삼재풀이, 이사택일, 이사택방, 그리고 지인들의 작명, 궁합들을 봐주고 있다. 할머니의 손주들이 총 12명인데 그 일을 대물림하는 손주는 나 하나뿐이다. 할머니께서는 직접 부적을 쓰셨지만 나는 부적을 쓰진 않는다. 부적을 정통적으로 쓰려면 부적용 한지, 경명주사, 사향, 침향, 붓, 기름, 촛대. 상이 필요한데 밥상이나 찻상처럼 일상에서 사용하는 상을 쓰면 안된다. 부적 전용의 깨끗하고 새 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붓도 섬세한 세필이 필요하다. 기름은 참기름이나 들기름 같은 식용유를 사용하지만 역시 부엌에서 쓰던 기름을 사용하면 안 된다. 부적 전용의 새 기름을 사용한다. 그리고 침향과 사향은 매우 고가이고 특히 사향은 전 세계적으로 포획이 금지된 불법 포획물이기 때문에 진짜 부적을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진짜 최고급 경명주사를 사서 부적 전용 작은 돌절구에 갈아서 사용하셨다. 그리고 문제의 사향 역시 어디서 어떻게 구입하셨는지 나는 모르는데 그 비싼 사향을 부적 쓰실 때 사용하셨다. 이렇게 재료 준비부터가 힘들고 비용이 엄청난 데다가 길일을 택해야 한다. 시간은 자정 무렵에 한다. 물론 목욕재개를 하고 마음을 정갈하게 몇 날 며칠을 준비한 후에 쓴다. 이렇게까지 준비가 다 된 이후에 깨끗한 상에 새 초를 켜고 길일 자정 무렵 부적을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몸과 마음과 재료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해도 결정적으로 부적의 문양을 그리는 솜씨가 있어야 한다. 부적 견본 책자는 있지만 그 모양 그대로 단숨에 깨끗하게 한 붓에 다 그릴 실력이 있어야 한다. 할머니는 그 솜씨가 일품이셨다. 일류 화가 수준이셨다. 그런 할머니의 부적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가족 중에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자식 손자 며느리들이 하나같이 그 가치를 모르고는 그냥 버린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부적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팔지 않으셨다. 시중에서 파는 부적들은 다들 그런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그런 재료를 구할 능력도 없거니와 그런 부적을 쓸 실력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중에 나도는 값싼 부적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파는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노란 종이에 잉크로 인쇄된 인쇄물인 것도 봤다. 그것이 효과가 있을까? 그냥 기분전환용이 아닐까? 진짜 부적을 제대로 써서 만들면 그것이 아까워서 남들에게는 절대 주지 못 한다고 한다. 본인이나 가족들만 준다. 부적을 쓰는 날짜와 시간은 매우 한정적이고 짧아서 그 시간 내에 다 쓸 수 있는 부적은 몇 장 되지 않는다. 즉 일 년에 몇 장 쓰기 어려운 것이다. 본인과 가족 전용 부적만 써도 일 년 분이 지나갈 지경이다. 남에게 주거나 팔 부적의 여분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시중에 나도는 부적들, 간혹 엄청나게 비싸게 주고 샀다고 하는 그 부적들 역시 진짜 부적이라고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 살아생전에 직접 써 주신 부적 외에는 부적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부적을 쓸 능력이 안 된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구한 것이 있다. 벽조목. 즉 벼락 맞은 대추나무 이것 역시 굉장히 귀한 고가의 물품인데 전 세계적으로 벼락을 맞은 대추나무가 몇 그루나 되겠는가? 물론 할머니라면 진품 벽조목을 구해다가 도장으로 파서 사용하셨겠지만 진품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다가 너무 비싸서 내가 도저히 살 수 있는 형편이 안 되고 또 있다고 해도 그것이 진품인지 믿기도 어렵기 때문에 요즘은 레이저를 맞은 대추나무가 시중에 돌고 있다. 즉 가짜 벼락을 맞은 대추나무인데 벽조목으로 팔린다. 레이저 맞은 대추나무들은 도장재료, 팔찌 재료들로 팔리고 있다. 그래서 레이저 벽조목 구슬에 일일이 ‘옴’자. 즉 산스크리트 어로 발음이 ‘옴’이다. 한글로 새긴 것이 아니다. 검색해보면 ‘옴’ 문양을 볼 수 있고 또 보면 ‘아? 많이 보던 문양인데’ 할 것이다. 구슬 하나하나 ‘옴’ 글씨를 새긴 팔찌를 구매했다. 그 벽조목 옴 팔찌 한가운데 하얀 상아로 조각된 흰 코끼리가 있다. 동양에서는 흰색 동물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흰호랑이, 즉 백호, 흰 코끼리, 백상, 흰뱀, 백사, 등등이 그러하다. 나는 불교신자도 아니고 특별한 종교는 없지만 흰 코끼리를 선택했다. 물론 상아와 플라스틱의 혼합품이라고 하지만 진짜 상아가 얼마나 귀한데 상아로 코끼리를 조각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코끼리 역시 포획이 금지된 동물이니까. 하여튼 그 레이저 벽조목에 상아 대체품인 물질로 조각된 흰 코끼리가 있는 ‘옴’ 팔찌를 구해다가 착용하고 있다. 내 부적인 셈이다. 흰 코끼리 조각과 ‘옴’ 구슬 수십 개 그리고 네모난 벽조목 조각에 소원성취 부적이 새겨져 있다. 벽조목은 강도가 매우 단단하기 때문에 조각이 어려운데 용케도 부적문양을 조각하였다. 그 와중에 반대편과 부적 문양 아래쪽이 금이 갔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도가 너무 단단하기 때문에 오히려 금이 더 잘 가는 것이다. 나는 매일 내 손목에 있는 흰 코끼리를 보면서 이 코끼리가 나를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옴’을 외운다. 소원성취, 악령퇴치 등등을 기원하면서.
.....................
“야? 오늘은 주문 몇 개 들어왔니?”
“글쎄요. 5개 정도?”
“그래서야 쓰나? 그리고 코끼리 조각 외 호랑이 조각도 만들어야 해. 백호 틀을 만들어서 백호도 만들어서 팔자.”
“백상, 백호는 팔리겠지만 그 외에 다른 동물은 할 게 없을까요?”
“그리고 플라스틱에 상아 가루 한 점만 섞어도 상아와 플라스틱 혼합물이라고 광고할 수 있으니까. 플라스틱이 강도가 더 세지. 진짜 상아를 착용하면 며칠 이내에 박살이 날 테지.”
“그리고 부적 조각하는 것도 금 안 가게 할 수 없나요? 손님들이 불평이 많아요. 금 안간 걸로 교환해 달라고 하는데.”
“그리고 레이저로 쏠 때 제대로 쏴. 대추나무 구슬이 레이저 맞은 데와 덜 맞은 데 안 맞은 데 색이 다 틀려. 강도도 다 틀리지. 그러니 구슬이 깨지거나 하는 거야. 제대로 좀 해.”
“네. 사장님.”
김진미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마이어 브릭스 성격유형 지표)는 성격을 외향형(E)-내향형(I). 감각형(S)-직관형(N). 사고형(T)-감정형(F). 인식형(P)-판단형(J). 이 4가지 지표를 적용하여 총 16유형으로 분류되는 성격유형 검사이다.
1. 외향성(extraversion)과 내향성(introversion)
외향-내향 지표는 심리적 에너지와 관심의 방향이 자신의 내부와 외부 중 주로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외향적인 사람은 주로 외부 세계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더 주의를 기울이며, 사교적이고 활동적이다. 말로 표현하기를 즐기고, 외부의 자극을 통해 배우는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에 경험한 후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을 숨기기보다는 드러낸다.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더 주의를 집중하며, 조용하고 내적 활동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생각이 많고, 말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며, 이해한 다음에 경험하는 방식을 선호하여 생각을 마친 후에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2. 감각형(sensing)과 직관형(intuition)
감각-직관 지표는 사람이나 사물 등의 대상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방식에서 감각과 직관 중 어느 쪽을 주로 더 사용하는지에 관한 지표이다. 감각형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오관에 의존하고, 현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일 처리가 철저한 편이고, 실제적인 것을 중시하며,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고, 세심한 관찰 능력이 뛰어나다. 반면, 직관형인 사람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조적이며, 보이는 것 그대로를 보기보다는 육감에 의존하려 한다. 나무보다는 숲을 보려는 경향이 있고, 가능성을 중요시하며, 비유적인 묘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3. 사고형(thinking)과 감정형(feeling)
사고-감정 지표는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때 사고와 감정 중 어떤 것을 더 선호하는지 알려 준다. 사고형인 사람들은 객관적인 사실에 주목하며, 분석적으로 판단하고자 한다. 공정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원칙과 규범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한다. 비판적이고, 맞다-틀리다 식의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감정형인 사람들은 판단을 내릴 때 원리 원칙에 얽매이기보다는 인간적인 관계나 상황적인 특성을 고려하여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 이들은 좋다-나쁘다 식의 사고를 하며 정서적 측면에 집중하고, 논리적인 판단이나 원칙보다는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등을 더 중시한다.
4. 판단형(judging)과 인식형(perceiving)
판단-인식 지표는 인식 기능과 판단 기능을 바탕으로 실생활에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 판단과 인식 중 어느 쪽을 주로 선호하는지에 관한 경향성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판단형의 사람들은 빠르고 합리적이며 옳은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 이들은 목적의식이 뚜렷하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인식형의 사람들은 판단형의 사람들보다 상황에 맞추어 활동하고, 모험이나 변화에 대한 열망이 높다. 매사에 호기심이 많으며, 사전에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조합하면 16가지 성격 유형이 나오는데 16가지의 대표적 특성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ISTJ: 책임감이 강하며, 현실적이다. 매사에 철저하고 보수적이다.
2. ISFJ: 차분하고 헌신적이며, 인내심이 강하다. 타인의 감정 변화에 주의를 기울인다.
3. INFJ: 높은 통찰력으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공동체의 이익을 중시한다.
4. INTJ: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이다. 분석력이 뛰어나다.
5. ISTP: 과묵하고 분석적이며, 적응력이 강하다.
6. ISFP: 온화하고 겸손하다. 삶의 여유를 만끽한다.
7. INFP: 성실하고 이해심 많으며, 개방적이다. 잘 표현하지 않으나, 내적 신념이 강하다.
8. INTP: 지적 호기심이 높으며, 잠재력과 가능성을 중요시한다.
9. ESTP: 느긋하고, 관용적이며, 타협을 잘한다. 현실적 문제 해결에 능숙하다.
10. ESFP: 호기심이 많으며, 개방적이다. 구체적인 사실을 중시한다. 호기심이 많으며, 개방적이다. 구체적인 사실을 중시한다.
11. ENFP: 상상력이 풍부하고, 순발력이 뛰어나다. 일상적인 활동에 지루함을 느낀다.
12. ENTP: 박학다식하고, 독창적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한다.
13. ESTJ: 체계적으로 일하고, 규칙을 준수한다. 사실적 목표 설정에 능하다. 체계적으로 일하고, 규칙을 준수한다. 사실적 목표 설정에 능하다.
14. ESFJ: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으며, 친절하다. 동정심이 많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으며, 친절하다. 동정심이 많다.
15. ENFJ: 사교적이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한다. 비판을 받으면 예민하게 반응한다.
16. ENTJ: 철저한 준비를 하며, 활동적이다. 통솔력이 있으며, 단호하다.
나는 20년 전에 이 검사를 했었다. 전문가에게 비용을 들여서 수백 문항에 일일이 답을 기입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결과를 통보받았다. 문항이 너무 많다고 느꼈는데 그 이유는 같은 문항, 비슷한 문항이 적어도 3번 이상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성의 없이 대충 답을 할까 봐 그런 장치를 해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똑같은 문항의 똑같은 대답을 같게 썼다. 지겨웠다. 그리고 통보받은 결과는 INTJ였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무지하게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독립? 그게 뭔데? 그리고 논리. 분석력 또한 거의 발바닥 수준인데. 쉽게 말하자면 INTJ는 과학자. 발명가와 같은 사람들에게 나오는 유형인 것이다. 나는 수학, 과학을 너무 못해서 문과에 다녔었고 수학, 과학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서 전문가에게 비싼 비용까지 들여서 했는데 내 성격을 그렇게 못 맞추다니. 전문가 맞나? 싶었다. 그 시절에는 다 그렇게 수백 문항을 일일이 손으로 기입해서 또 그 답안을 전문가가 일일이 채점해서 결과를 냈었다. 아니면 나만 그랬는지 그것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요즘은 그냥 인터넷에 공짜로 간편 검사하는 사이트가 많아서 그냥 개별로 측정해 볼 수 있다. 간편하고 문항도 적고 시간도 10분이면 된단다. 나는 1시간 넘게 걸렸던 것 같은데. 아니 2시간인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하다. 하여튼 요즘 다시 이 간편 인터넷 무료 검사를 해보니 정확하게 내가 어떤 유형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INFJ였다. 그리고 그 성격유형이 정확하게 나와 일치했다. 전문가가 간편 인터넷 검사보다 더 부정확하다니. 실망인데. 그때는 MBTI가 뭔지도 몰라서 그러려니 했지만 이제는 공부를 해보니 그때 그 전문가가 사이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 전문가는 자기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믿고 있기에 절대로 잘못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아니면 나보고 문항에 대답을 엉터리로 적었다고 우길 것이다. 사실 같은 문항이 계속 반복되어서 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당시의 내 심정 그대로 정확하게 기입했다. 이 간편 검사를 통해 가족, 친지, 친구들 모두를 조사해 봤다. 과연. 대부분 성격과 일치했다. 음. 이 정도의 신뢰도라면 굳이 돈 들여서 전문가에 의뢰할 필요도 없겠어. 성격심리학자들이 고객이 줄어서 돈 벌기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요즘은 사람들이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생활에 잘 적용, 이용하고 있으니까. 그때 왜 돈 들여서 시간 낭비, 돈 낭비를 했었는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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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호 환자. 아직 인터넷 사용 중이야?”
“응. 그러네. 20년 만에 컴퓨터 사용하게 됐다고 종일 매달려 있구만.”
“별 사고 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전산실에도 들락날락하게 둔 것 같긴 하지만.... 저렇게 오래 혼자 둬도 괜찮을까?”
“내버려 둬. 그동안 독실에서 혼자 갇혀있다시피 했는데 이제 기력이 다 빠져서 사고칠 수도 없어. 도망도 물론 못 할거고. 게다가 컴퓨터도 꽤 잘하는 것 같아.”
“그러게. 이 병원에 오기 전에는 그래도 명문대학 나온 엘리트였대. 그런데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됐을까? 거의 이 병원에서 청춘 다 날렸네. 어찌 보면 좀 안 됐다 싶어. 들어올 때는 꽤 미인이었는데. 지금은 늙어서 볼품없는 중년이지. 가족들도 거의 면회하러 오지도 않아. 거의 버린 자식인 건지. 아니면 부모님도 늙어서 거동이 불편하신 건지.”
“그래. 우리 정신병원이 그래도 좀 고급 병원이잖아? 환자용 전산실도 있고 말이야.”
“그래. 박 간호사. 오늘 퇴근하고 한 잔 할까?”
“좋지. 날씨도 더운데 시원한 생맥주 어때?”
“좋아.”
김진미
오랜 백수 생활에 익숙해져 갈 즈음 너무 무료한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여 ‘뛰는 놈’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백수라서 가족들에게 눈치가 보여 TV는 차마 보지 못한다. 거실에 있지만 내 방안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드라마, 영화, 뉴스, 다큐멘터리 등등 거의 보지 않았다. 방에서 스마트폰으로 유투브를 주로 시청했었는데 유투브에서 짤막하게 ‘뛰는 놈’ 영상이 올려져 있어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차에 노트북으로 그 방송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최초 1회부터 현재 방영분까지 다 볼 수 있었다. 단 최근 것은 유료 결재 시스템이었다. 나는 과거 초창기 방송 부분부터 보고 있다. 무료로 볼 수 있는 영상만 볼 작정이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거의 TV를 보지 않고 살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웃고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지금 내가 ‘뛰는 놈’ 프로그램을 몰아보면서 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이유가 다 있었어. 요즘 사람들은 웃을 일이 없어서 전부 무뚝뚝한 표정에 삭막하게 지내는데 적어도 이런 방송을 보는 순간만큼은 웃게 되는군. 이렇게라도 웃을 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정신건강 육신건강 할 것 없이 말이야. 백수라고 눈치 보느라 방 밖에 나가기도 힘든 상황에서 주눅 들어 지내는 것도 괴로운데 이렇게라도 웃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 그래서 다들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구나. 시청자들이 댓글도 달고 팬들도 많은 것 같아. 해외 팬들이 더 열광하는군. 촬영지가 주로 국내지만 가끔 해외 촬영분도 있었다. 생각보다 해외 팬들도 많았다. 화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 저렇게 많은 관중을 일부러 모은 것은 아닐 테고 말이야. 와하하. 얼마 만에 소리 내어 웃는 건지. 참. 소리 나도록 웃고 있으려니 엄마가 기웃기웃 들여다보신다.
“무슨 소리야? 왜 이리 시끄러워?”
“별일 아녜요. ‘뛰는 놈’ 보고 있어요.”
“하다하다 이제 그런 것도 보냐?”
“그런 거 라뇨? ‘뛰는 놈’이 어때서요?”
더 말하려다 참았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뉴스만 보신다. 아버지는 스포츠만 보신다. 그냥 부모님 눈에는 한심한 백수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 열혈 시청하기로 한다. 어디 보자. 오늘 몇 회 볼 차례더라?
“쯧쯧, 저 바보 기린. 또 호랑이에게 물렸네. 물릴 줄 알면서 왜 저렇게 들이대지? 꼭 맞을 짓을 해요.”
“어라? 배신자 클럽 멤버 세명 중 누가 가장 배신자인가?”
“홍일점이 여자 티 내지 않고 남자들보다 더 잘 하는 걸? 그러니 에이스라 불리지.”
“정말 계속 뛰어 다니네. 다들 저 프로그램 하고 건강해졌다더니 사실이겠어. 다들 건강해지고 돈도 벌고 인기도 얻고 일석삼조?”
아직 최근 방영분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최근 들어서 시청률이 많이 하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2명의 새 인물을 수혈했다고. 아직 거기까지는 못 봤지만 새 인물이 프로그램에 활력이 될지 아닐지는 다른 시청자들 마음이고. 나는 지금까지는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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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기린 그 애 절대 여자친구 못 만날 것 같더니만 몇 년 전에 ‘뛰는 놈’에 출연했던 여자 연예인이랑 진짜 사귄대. 그때 방송분에서
“시청자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 사귀기로 했습니다. 곧 결혼합니다.”
이랬었던 바로 그 아가씨야.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그 말대로 되었지.”
“정말 말이 씨가 된다고. 그때는 기린이 정말 바보처럼 보여서 평생 독거 노총각이 될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펭귄도 그 프로그램 하면서 결혼해서 벌써 애가 셋이야. 초창기 탈락 멤버는 결혼했다가 금방 이혼하고 중국 가서 활동한다지?”
“그리고 게스트로 출연했던 수많은 연예인들 중 죽은 사람들도 많아. 저기서는 그렇게 행복하고 재미있게 웃고 있는데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벌써 죽은 사람이 몇 명이야?”
“자살한 연예인이 많은 건지. 아니면 ‘뛰는 놈’ 게스트가 그렇게 많은 건지 알 순 없지만.”
“저기 나와서 시청자들은 웃게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우울증에 자살이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세상이로고.”
“자살뿐 아니라 암에 걸려서 연예계에서 사라져서 치료 중인 배우도 있어. 저렇게 젊고 잘생기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 암에 걸릴 줄 상상도 못 했다.”
“정말. 저 ‘뛰는 놈’ 방영분에서는 너무 건강하게 보이는데. 어떻게 20대가 암에 걸릴 수가 있지?”
“그리고 유명 가수 게스트. 유흥. 환락. 마약. 성매매. 성범죄 등등으로 추문에 휩싸인 사람들도 많아.”
요즘 본 방영분에서만도 벌써 자살자가 네 명. 젊은 암 환자 배우 한 명. 성범죄자들이 넷이나 나왔다.
김진미
사상 최장의 장마가 이제 끝났다 싶더니만 폭염이 왔다. 방과 옷장, 이불장, 신장에서 곰팡이냄새가 진동을 해서 정말 장마가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웬걸. 바로 폭염이 와서 밤새도록 열대야에 시달리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에어콘을 틀고 싶어도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찬 바람을 싫어하셔서 틀지 못한다. 물론 전기요금이 가장 큰 이유다. 20년 넘은 구형 에어콘이라 전기요금이 폭탄이다. 하긴 에어콘이 내 방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에어콘을 틀고 자려면 거실에서 가족이 함께 자야 하는데 그것도 곤란한 것이 부모님 다 코를 고시고 밤새 화장실에 들락날락하시기에 여전히 잠은 잘 수 없다. 그냥 하루종일 선풍기를 달고 산다. 식탁에도 선풍기가 놓여있다. 방마다 선풍기가 있다. 내 선풍기는 35년 된 것으로 테이프를 칭칭 감아 사용한다. 강풍은 틀지 못한다. 강풍을 틀면 감아놓은 테이프가 제 기능을 못 해서 선풍기가 분리된다.
사실 계속되는 장마통에 하루는 거실 창 방충망에 매미가 한 마리 붙어 있던 적이 있었는데 비가 계속 내려서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불쌍하게 붙어 있었다. 이제야 매미들이 운다. 매미의 부화까지의 기간은 털매미와 저녁매미는 약 45일, 그 밖의 다른 종류는 10개월, 혹은 그 이상 걸린다. 유지매미와 참매미는 부화해서 6년째에 성충이 되므로 산란해서 7년째에 성충이 된다. 털매미는 4년째에 성충이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최장 7년에 걸쳐 겨우 부화했는데 비가 계속 와서 제대로 울어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면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길어야 보름 살다 죽는다는데...... 올여름 매미소리 오늘 처음 들으니까 저 매미는 과연 언제 부화했을까? 이달 말까지라도 살까?
동생 가족들은 우리 동네 실외 수영장에 가서 놀고 있다. 7시간째 물놀이를 하고 있단다. 대단한 체력이다. 보내오는 사진들을 보니 그동안 비가 와서 제대로 방학도 즐기지를 못하더니 조카들이 신이 났다. 계속되는 장마통에 실외수영장이 개장하지 않아서 매번 허탕 치고 돌아왔던 조카들이다. 얼마나 놀았던지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리고 벌써 하얗게 각질이 일어났다. 내일도 수영하려고 했는데 얼굴에 일광화상이 심해서 결국 못하게 되었다고 울상이다.
“괜찮아. 다음에 다시 가면 되지. 아직 방학 남았잖아?”
“지금까지도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수영장 제대로 개장하지도 않았는데 겨우 가려고 하니 계속 장마로 문 안 열었고 겨우 문 열어서 가려고 하니 하루 놀았는데 화상입어 못가서 속상해요.”
“다음 주에 또 가면 되지.”
겨우 달래놓고 조카들 보냈는데 뉴스에서 떠든다.
“코로나 확산세가 심각하여 2단계 거리두기를 실시 합니다.”
이런. 조카들 올여름 물놀이는 이걸로 끝났군.
김진미
오늘은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일. 종이 쓰레기 배출하는 날이다. 우리는 종이 쓰레기의 대부분이 신문인데 40년째 받아보는 중이다. 요즘 세상에 종이신문 받아보는 집이 얼마나 되냐고 질문하지만 어르신들은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으로 뉴스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꼭 종이신문을 고집하신다. 우리집도 마찬가지다. 돋보기를 끼고 신문을 읽으신다. 나도 신문요금이 아까워서 그만 끊자고 말씀드려봤다. 여러 차례. 하지만 소용없었다. 40년 넘게 구독한다고 뭐 특별 대우를 받은 적도 없다. 다른 사람들은 사은품도 많이 받고 선물도 챙겨 받았다던데 우리 부모님께서는 그런 거 사양하셨다. 하나도 안 받으셨다. 그랬더니 몇 달 공짜로 신문을 넣어주기는 하던데 그 정도는 다른 집도 다 받는 혜택인 것이다. 나는 신문요금이 아까웠다. 사실 아버지는 경제면만 보시고, 어머니는 정치면만 보신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뉴스 검색한다. 그냥 종이 쓰레기인 것이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뉴스채널을 틀어놓고 보시는데 굳이 또 신문의 정치면을 읽으시는 것이다. 아버지는 하루종일 경제채널을 보시면서 신문의 경제면을 읽으신다. 그 외는 아무것도 안 읽으신다. 저렇게 편독하시면서 신문을 왜 구독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내가 설득해서 신문을 끊기로 했다. 우리 동네 지사에 먼저 전화해서 끊었다. 그리고 본사에 전화해서 또 확인차 끊었다. 이제 안심이지. 우리는 그 어떤 혜택도 안 받았으니 쉽게 끊어 주는데? 그런데 웬걸. 신문이 계속 들어오는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신문을 밖에 계속 쌓아두면 도둑 탄다고 계속 들고 들어오셨다. 물론 제대로 읽진 않으셨다. 눈이 침침해서 돋보기 끼고 읽는 것이 귀찮으시겠지. 그러기를 3달. 오늘 신문요금 고지서가 날아왔다. 45,000원. 3개월 동안 마음대로 신문을 넣더니 요금을 고스란히 청구하는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동네 지사에 전화했다. 안 받았다. 본사에 전화했다. 역시 안 받았다. 그 다음 날 다시 양쪽에 전화했다. 또 안 받았다. 할 수 없이 삐 소리가 난 후에 녹음기에다 음성을 남겼다.
“분명히 3달 전에 확실히 신문구독 취소했고 거기서도 알았다고 확답했고 본사에 2차로 확인까지 했는데 마음대로 신문 넣어놓고 이제 와서 3개월분 45,000원 청구하다니 그게 무슨 경우죠? 우리는 돈 낼 수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신문 넣지 마세요. 신문을 밖에다 쌓아둘 수 없어서 들고 들어온 것뿐이니까.”
오늘도 일 주일분의 신문지와 기타 전단지 등등을 모아서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갔다. 박스에 차곡차곡 담아서 버렸다. 그런데 옆 박스에 다른 사람들이 버린 종이 쓰레기 더미에서 수십 권의 책들이 놓여있었다. 보아하니 오래된 책들인데 요즘 아이들은 줘도 안 읽을 만한 활자. 글씨는 7포인트 새로쓰기로 인쇄된 대하소설 시리즈였다. 나도 눈이 침침해서 글씨가 저렇게 작으면 읽기 힘들다. 게다가 새로쓰기라니. 요즘 누가 새로쓰기로 출간하나? 새로쓰기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인데. 그놈들은 새로쓰기를 하니까. 사람 눈이 가로로 있고 가로로 움직이는 것이 편리한 것을. 하긴 내 책장에도 새로쓰기 출판 전집이 쌓여 있긴 하다. 그래도 글씨가 7포인트는 아니다. 9포인트는 된다. 그래도 무슨 책들인지 뒤적여 보았다. ‘태백산맥’ ‘토지’ ‘장길산’ 음. 한국 대하사극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다른 박스를 뒤져보니 여기는 외국 서적들이다. 출판년도를 보니 40년은 넘은 책들이다. 집 정리를 하면서 다 버린 모양이다. 나는 권수가 들쭉날쭉 된 책들은 그냥 두고 유일하게 완결본으로 있는 ‘태백산맥’ 10권을 들고 올라왔다. 딴에는 신이 났다. 중고 서적으로 구매하려고 해도 10권 완질본. 5만 원은 한다.
“아니? 책 수백 권을 겨우 버렸는데 또 들고 왔니? 당장 갖다 버리지 못 해? 곰팡이. 책벌레 나와서 네 책들도 다 버렸잖아?”
“그래도 이건 완질본이고 상태도 좋아요. 도서관에서 빌려보려면 훨씬 상태가 나빠요. 이 책은 옛날 책이라서 다 상태가 안 좋다고요. 이 정도면 최상급이예요. 봐요. 벌레도 없잖아요?”
“누런 것이 오래된 것 맞고. 네 눈이 나빠 벌레가 안 보이는 거고. 곰팡이도 슬었을 거다.”
“그러면 한번만 읽고 다음 주에 버릴게요.”
또 시작이다. 책에서 벌레가 나오고 곰팡이 냄새 난다고 내 책장 5개 중 3개에 있던 책들을 죄다 버리신 양반이다. 참고로 나는 책을 좋아한다. 책 버릴 때 울면서 버렸다.
사람마다 종이 쓰레기의 정의가 다른 모양이다. 내 눈에는 우리 집에 매일 들어오는 신문이 종이 쓰레기인데 어머니의 눈에는 내 책들이 죄다 종이 쓰레기인 것이다.
오늘도 신문이 들어왔다.
김진미
‘먼나라 이웃나라’. 이게 무슨 소리냐고? 우리나라 오른쪽에 있는 섬나라를 말하는 거냐고? 하긴 그 나라 참으로 먼 나라이면서 이웃 나라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가깝고도 먼 우리 옆 섬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를 말하는 것이다. 작가인 이교수님이 젊은 유학시절에 겪었던 일. 그 나라의 특성. 문화. 역사 들을 재미있게 풀어서 글도 아닌 만화로 출간한 책이다.
1권 네덜란드. 2권. 프랑스. 3권. 독일. 4권. 영국. 5권. 스위스. 6권. 이탈리아. 7. 8권. 일본. 9권 우리나라. 10, 11. 12권. 미국. 13. 14권 중국. 15권에 스페인. 16권 발칸반도. 17권 동남아시아. 18권 중동. 19권 캐나다·호주·뉴질랜드. 20권 오스만제국과 터키. 21. 22권 러시아. 이렇게 출간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출간하실 모양이다. 내가 산 책은 6권짜리 유럽시리즈이다.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나오고 있다. 교수님께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내실 모양이다. 처음 읽었을 때와 지금. 읽던 애들이 다 커서 어른이 되었다. 어릴 적 이 책을 읽으면서 유럽 여행을 꿈꾸었다. 실제로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지금? 터키나 발칸반도에 가보고 싶긴 하다. 하지만..... 이미 중년의 뚱보 애 엄마가 되었다. 애들이 이 책을 읽는다. 우리 세대와 달리 요즘 애들은 해외여행에 대한 환상도 없고 우리처럼 신기한 나라들이고 가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 것 같다. 아니. 그냥 학교 안 가고 놀러 가기만 하면 다 좋은 건지. 그렇게 기대하고 갔던 해외 여러 나라들. 사실 막상 가보니까 그리 좋은 줄 모르겠었던 것도 사실이다. 치안이 불안하고. 물가가 비싸고. 관광객들에게 바가지에다 소매치기. 좀도둑. 게다가 물이 다르고 음식이 달라지니까 없던 피부병도 생기고 설사까지 와서 정말 괴로웠던 기억이 있다. 책에서 봤던 그대로. 작가님은 그 나라 사람들의 외모도 정확하게 그리신 것을 깨달았다. 메부리코로 그렸던 사람들의 나라는 과연 메부리코가 많았고. 국민성도 그러하고. 도움이 많이 되었다. 지금 내가 애들에게 꼭 가봐야 한다. 라고 말하지 못한다. 물론 코로나가 세계적으로 창궐해서 국내 여행도 삼가야 하는 이 시국에 해외여행이라니 언감생심.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안전한 곳이다. 물론 대만이나 뉴질랜드는 청정국이라고 하더니만 요즘 다시 재발한다고 한다. 결국은 우리나라가 가장 안전한 곳이고. 살기 좋은 곳이고. 인격과 품위 수준 역시 우리나라가 세계제일이라고 생각한다. 애들에게는 책은 읽으라고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다른 나라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가서 보면 볼수록. 더더욱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요즘 애들은 전부 이렇게 말한다.
“HELL. 조선.”
김진미
스마트폰이 고장났다. 이럴 수가. 구매한 지 3년 5개월밖에 안되었는데.....
배터리 충전이 안된다. 자꾸 정품을 사용하라고 한다. 정품 맞는데......
화가 났다. 이 스마트폰. 내 첫 번째 스마트폰이다. 그 전에 폰은 그냥 폴더폰이었다. 폴더폰 두 번 쓰고 세 번째 스마트폰으로 바꾼 것이다. 그것도 안 바꾸겠다고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3년 5개월 전에 스마트폰으로 갈아탔다. 그때 나는 스마트폰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기에 아주 저렴한 ‘쓰리스타’의 ‘은하계’ J 7 모델을 샀다. 현금으로 바로 구매했고 요금제를 6개월간 지정 요금 즉 3만원대 요금을 사용한 후에 요금제를 바꿀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6개월 동안 생돈을 날리다가 6개월이 끝나자마자 최저요금제라고 말하는 요금으로 바꿨다. 2만원대 요금으로. 하지만 그러기를 2년. 그래도 요금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집순이이기 때문에 데이터도 별로 안 쓰고 전화도 거의 걸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최저요금제를 알아보았다. 직원은 그 요금은 데이터도 통화도 하나도 없는 백지요금이라고 했다. 오직 전화 받기만 하고. 데이터는 와이파이만 사용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진작 말씀해주시지. 그 요금제로 바꿨다. 나는 통신사도 10년째 같은 곳이라서 특별쿠폰을 받아쓰기 때문에 가능한 요금제인 것이다. 한 달에 7350원 나온다. 응? 저렴이 통신사냐고? 그렇지 않다. 3대 통신사 중 하나이다. 집 전화. 인터넷. 어머니 휴대폰까지 묶어서 그리고 2년 약정요금제. 기타 등등 다 엮다 보니 나온 요금인 것이다. 그래도 7350원이라니? 놀라겠지? 하지만 가능하다. 즉 데이터도 통화도 하나도 없는 요금제인 것이다. 물론 내 요금제는 너무 싸기 때문에 포인트가 별로 없다. 하지만 어머니는 무제한 요금제를 사용하시니까 포인트가 많다. 그것을 가족으로 묶어서 그 포인트를 내가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1년분의 데이터는 충분히 커버가 된다. 데이터는 어머니의 무제한요금제에서 나온 포인트를 나에게 당겨서 데이터를 구매해서 사용한다. 전화통화는 1년에 6장 나오는 쿠폰으로 통화 100분을 구매해서 사용한다. 즉 그 이전에 비싸게 3만원대. 2만원대의 비싼 요금을 냈었던 것을 통탄하고 있다. 2년은 그렇게 비싸게 냈었는데. 조회해보니 나는 통화도 데이터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날리는 돈이었던 것이다. 통신사 직원도 그때는 2만원대 그것이 최저요금제라고 했는데. 아니었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요금제가 최저요금이다. 그래서 만족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화기가 먹통이 되다니. 이럴 수가. 안 돼!!! 스마트폰은 새로 살 수 없단 말이야. 특히 요즘은 지원비도 안나오고. 알아보니 엄청나게 비쌌다. 지금 사용하는 요금제를 그대로 사용하려면 스마트폰을 제값 다 주고 구매해서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랬더니 스마트폰 가격이 100만원이 넘었다. 싼 전화기를 사려면 요금제를 비싼 것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했다. 안 돼. 이 요금제 사용한 지 6개월밖에 안 됐단 말이야. 그전엔 이 요금제를 몰랐단 말이야. 이제 좀 제대로 사용할까 했는데 갑자기 스마트폰이 고장이라니. 말도 안 돼......
배터리가 마지막으로 방전되기 전에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스마트폰 충전장치 고장. 이제 곧 사망함. 전화기 사야 함.”
“고장 났어? 우리 엄마 쓰던 헌 스마트폰 있는데 그것 줄게. 작년에 나온 거야. 네 것보다는 나을 거야.”
“서비스센터에 수리 신청은 해놨는데.”
“수리 하지 마. 그냥 우리 엄마 거 써. 수리비도 몇만 원은 나올 것 아냐?”
하긴 그렇긴 하다. 지금 스마트폰도 1년 반 전에 배터리도 몇만 원 주고 새로 갈았는데. 수리하려면 또 새 배터리를 사라고 할 것 같고. 충전 입구가 손상되었다고 또 수리비 청구할 것 같고. 아니면 최악의 상황으로 전화기 자체가 고장일 수도 있고. 그럴 거면 새로 바꾸는 것이 낫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 그 최저요금제는 물 건너가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직접 찾아가서 친구 어머니폰을 받아왔다. 나는 예전의 폴더폰부터 지금까지 ‘쓰리스타’ 폰만 썼었는데 이 폰은 ‘골드스타’ 폰이었다. 한글자판이 달라 좀 불편한 것이다. 친구는 적응하면 금방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하긴 공짜로 얻는 주제에 ‘쓰리스타’ ‘골드스타’가 뭐가 중요해? 고맙다고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배터리가 내장형이라 폰이 분리가 안되었다. 내 것은 배터리가 분리형이라 뒷뚜껑을 열어서 유심칩도 배터리도 분리할 수 있는데. 이 폰은 ‘골드스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2019년 신형이라서 그런 것인지. 휴대폰이 분리가 안 되고. 배터리도 내장 배터리이고 도대체 유심칩은 어디로 바꾸는 것인지 한참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친구에게 물었다.
“도대체 유심칩은 어디로 빼고 넣는 거야?”
“옆에 구멍 누르면 톡 튀어나와.”
“옆에 구멍을 뭘로 누르는데?”
“스마트 폰 살 때 주는 건데. 충전기랑 핀이랑.”
“그런데 지금 없잖아? 그냥 폰만 줬잖아?”
“그렇지.”
“그럼 ‘골드스타’ 서비스센터에 가야 하나?”
“거기 가면 열어 줄 거야. 거기서 유심칩 바꿔 끼워 봐.”
이런. 지금 금요일 오후인데. 주말 지나고 월요일에나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내 배터리는 완전 방전이 될 것이고 나는 스마트폰 없이 주말을 보내야 한다. 배터리가 방전되려 해서 바로 전원을 껐다.
다음 날 아침. 전화기를 다시 켜서 혹시나 하고 충전기를 꽂아봤다. 그런데 역시 충전이 불가능하였다. 속이 상해서 뒷 판을 열고 배터리를 꺼내 보았다. 혹시 배터리가 작년처럼 부풀어 올라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가 싶어서였다. 작년에 배터리의 배가 폭발 일보 직전에 새 배터리를 구매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터리는 매끈했다. 이런. 배터리 문제가 아니야. 역시 스마트폰 기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야. 견적 꽤나 나오겠는데.....
다시 배터리를 끼우고 전원을 켰다. 그리고 다시 충전기를 꽂았다. 그랬더니 웬일? 충전이 되었다. 만세!!! 스마트폰은 사실 상태가 나쁜 것이 맞다. 점검이 필요하다. 그래도 우선은 충전이 되니까. 그냥 사용하기로 한다. 그럼 ‘골드스타’폰은 어떻게 하냐고? 그 폰은 충전하는데 10시간은 걸리고 사용하지 않아도 하루 만에 방전되고. 내건 2016년 모델이라도 금방 충전되고 며칠 쓸 수 있는데. 2019년형이 더 충전도 늦고 방전은 더 빠른 것인가? 그냥 내건 쓰다가 수리하다 쓰다가 정 안되면 다른 ‘쓰리스타’ 폰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덜컥.
“야!. 너 스마트폰 하나 살 여유도 안 되고. 요금제도 거지 요금제 쓰면서 화장품은 200만 원짜리 사 쓰냐? 게다가 보신용 약값은 또 어떻고? 약값이 한 달에 20만 원이니? 그 돈 아껴서 스마트폰 하나 새로 사. 친구한테 거지처럼 보이지 말고. 넌 자존심도 없니?”
김진미
3달 전 밤늦은 시간에 이제 막 자려는 순간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더니 자일리톨 검을 씹으라고 주셨다. 잘 밤에 껌은 무슨 껌이냐고. 안 씹는다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씹으라고 하신다. 할 수없이 씹었다. 으악! 씹자마자 오른쪽 윗어금니에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아팠다. 껌 씹다가 이가 깨지다니. 무슨 영화도 아니고.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단 말인가? 아니 왜 자려는 사람한테 껌 씹으라고 하신 건가? 아프고. 화나고. 속상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밤새 이가 아팠다. 하지만 나는 치과에 가지 않았다. 아침에 엄마에게 말했다.
“깨진 이가 나왔니?”
“아뇨. 안 나왔는데요.”
“그럼 깨진 거 아냐. 그냥 기분이겠지.”
그런가? 무지하게 아팠는데 깨진 것이 아니구나. 그냥 아팠던 건가? 하긴. 껌 씹다가 이가 깨졌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어. 요즘 컨디션이 나쁜 모양인가 보지. 아니면 칼슘이 부족한 건가? 그 상태로 몇 달 동안 오른쪽은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왼쪽으로만 씹었다. 불편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한여름이 되어서도 물만 마셔도 이가 시렸다. 이건 아닌데. 그러다가 유투브에 이에 금이 가면 이가 시리고 아프고 하다고 그대로 방치하면 이를 뽑아야 한다는 영상을 봤다. 놀랐다. 설마? 깨진 것이 아니라 금이 간 것이라면? 설마 뽑는 사태는 아니겠지? 나는 껌 씹다 이가 나간 지 벌써 3달이나 되었다. 참으로 미련곰탱이가 아닐 수 없다.
바로 다음 날 치과에 갔다.
“깨졌습니다. 거의 이뿌리까지 나갔네요.”
사진을 보니 어금니의 3분의 1이 금이 가 있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금이 갔다. 의사는 바로 이를 드르륵 갈더니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이를 다 갈아서 신경치료를 해버렸다. 그리고 나서 이를 갈아서 신경치료 했다고 사후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를 다 갈아서 이뿌리만 남아서 크라운을 씌워 보겠지만 발치 해서 임플란트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마취가 되어 정신도 몽롱하고 기분도 울적하고 해서 그냥 나왔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이를 갈기 전에 미리 말도 하지 않고 이를 다 갈아버리고 신경치료 했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었다. 이가 깨졌어도 3개월이나 사용했었다. 물론 제대로 씹진 못했지만. 멀쩡한 3분의 2의 이는 갈 필요가 없지 않나? 그리고 신경도 3개 중에서 한 개만 죽이고 나머지 2개는 살릴 수 있지 않았나? 처음 사진 찍었을 때도 신경이 건강하게 살아있다고 의사가 직접 말했으면서 왜 다 죽인 거지? 그런 속 상한 상태로 일주일 후에 다시 치과에 갔다.
“선생님. 3분의 2는 살릴 수 있지 않았나요? 신경도 다 안 죽일 수 있지 않았나요?”
“진료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죽인 게 아니라 치료했어요.”
“그럼 다시 살릴 수 있나요?”
“그건 아니죠.”
치과의사의 눈이 번쩍 빛났다.
“네. 알겠습니다.”
“이런 환자는 소송을 걸 수도 있어서 자. 서명하세요.”
크라운을 씌우겠지만 임플란트할 수도 있다는데 그 종이에 내 이름을 쓰라고 내밀었다. 환자가 무슨 힘이 있나? 괜히 의사심경만 건드리는 것이지. 이미 죽은 신경 살릴 수도 없는데. 의사 기분 나쁘면 더 엉망으로 치료할 수도 있다는데......
서명했다.
이날은 신경 뿌리까지 다 뽑아내고 다른 충전재를 채워 넣었다. 이 상태로 또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나는 이에 무슨 이물질이 낀 것 같은 불편한 상태로 고통스러웠다. 아픈 것도 아니고 우리한 것이 불편함 그 자체. 괴롭다. 내 이를 돌려줘.
다음 주. 신경치료를 3주에 걸쳐 끝났다. 그런데 본을 뜨지 않고 보냈다.
또 그 다음 주에 가서 본을 떴다. 또 그 다음 주 본을 뜬 금니 크라운을 씌웠다. 또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때는 제대로 붙인다고 지금은 임시로 붙였다고.
오른쪽으로 씹어보았다. 씹을 수 있긴 한데 내 이가 아니라 그냥 자리만 메운 것 같은 느낌이다. 하긴. 내 이를 다 갈아서 가짜 이를 만들어서 금으로 씌운 것이니 무슨 힘이 있겠어?
따르릉.
누구지?
“여보세요. 그래. 영숙아. 무슨 일이야?”
“너 이 뽑았어?”
“아니. 임플란트는 면했다. 금니 본 떠서 임시로 씌웠다.”
“하긴. 아랫니도 아니고 윗니인데. 사람이 윗니가 상하면 삶의 질이 절반으로 준다고 하더라.”
“불난 집에 부채질하냐? 가뜩이나 이 때문에 속상해 죽겠는데.”
“야. 그래도 임플란트는 안 했잖아? 임플란트는 120만원이라며?”
“그래. 딱 절반. 624,000원 나왔다. 치료비까지 포함해서.”
“나는 이 하나도 안 상했는데. 전부 내 이인데.”
“그만 염장 질러라.”
“뭘 그래? 다른 친구들도 다 임플란트 했어.”
“그래도 이 나이에 벌써 금니가 몇 개야?”
나는 지금 벌써 4번째 금 크라운이다.
“물론 나는 다 멀쩡하지만.”
“자랑 그만 하라고.”
“또 할 것 있는데. 나 서울 간다.”
“서울? 왜? 교수님께서 부르셔서. 취업할 것 같아.”
“그래? 잘됐네. 좋겠다.”
“저번 주에 언니랑 올라가서 그 날 바로 집도 구하고 왔어.”
“빠르기도 하다. 하룻만에 집을 구했어?”
“오피스텔. 지하철역 바로 앞. 좀 비싸긴 해도 안전하고 위치 좋은 곳으로 구했어.”
“그래. 가기 전에 한번 보고 가.”
치과 가기 전에 영숙이와 만나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다음 주 서울 올라간단다. 가면 오랫동안 못 보겠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내 치과를 알려주었다. 영숙이 집 근처에 있는 치과다.
“어? 저 치과였어?”
“응. 너희 동네에 있지. 우리집에서는 꽤 멀어. 다니는데 불편해. 왕복 3시간이야.”
“다른 곳인 줄 알았는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그래. 잘 가. 나는 다음 주에 서울 간다. 앞으로도 통화와 카톡은 계속 하자.”
“당연하지.”
돌아오는 길. 뭐지? 이 찝찝한 기분은?
이가 불편하다.
김진미
몇 년 전에 구청에서 실시하는 구민 정보화 교실에 다닌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완벽한 컴맹이었기 때문에 돈을 지불해서라도 수업을 받아야만 했었다. 다행히 나 같은 주민을 위해서 구청에서 정보화 수업을 진행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왜 이제 알았지? 그런데 1년 편성이 미리 진행, 고지되는 터라 내가 배우고 싶은 과목이 언제 개설되는지 미리 조사한 후에 등록 날짜에 정확하게 신청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정원이 초과 되면 등록이 안 된다. 구청뿐아니라 지역 동사무소에서 개설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잘 찾아보면 원하는 과목을 원하는 지역, 시간 날짜를 선택할 수 있다. 단 자기가 거주하는 동이나 구를 벗어나면 순위에서 밀려나기 때문에 정원이 모자랄 때만 신청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능한 자기 거주지에 속한 기관에서 수업을 신청하는 것이 좋다. 하여튼 이런 약간의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서 한글, 파워포인트, 엑셀 수업을 신청했다. 각 과목은 한꺼번에 개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끝나면 하나 하고 또 끝나면 하기 때문에 거의 1년을 다닌 셈이다. 각 과목은 약 2주 정도 했는데 한 과목이 끝나면 바로 수업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 하고 몇 달 쉬고 다시 하나 하고 몇 달 쉬고 하다 보니 컴퓨터 기초 과정을 배우다 보니 1년이 후딱 지나가고 말았다. 다시 처음 수업으로 돌아가면 수업을 듣는 학생들 대부분이 7, 80대 어르신들이었는데 나도 중년인데 수업시간엔 가장 막내뻘이었다. 그래서 강사는 어르신 위주로 수업을 하다 보니 설명을 차근차근해주는 것은 좋은데 학생 즉 어르신들이 잘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진도가 정말 천천히 나갔다. 내 옆자리 언니는 아들, 딸 다 키워놓고 자녀와 소통하기 위해서 배우러 왔다고 했다.
“언니. 휴대폰으로 전화하고 문자 하면 되지? 컴퓨터까지 배워서 자녀와 소통해야 하는 거예요?”
“당연하지. 애들이 게임을 해도 내가 전혀 모르면 소통이 안돼.”
“컴퓨터 배워서 게임 하시게요?”
“뭐 게임을 꼭 해서라기보다 같이 하면 좋겠지? 아들은 엄마랑 대화가 안 통한다고 입 닫고 게임만 하거든. 코드를 뽑으려다가 그랬다면 정말 인연 끊어졌겠지? 나도 그런 엄마 되고 싶지 않아. 기초는 배워두면 도움이 될 거야.”
“그 연세에 파워포인트나 엑셀은 배워 어디 쓰시게요? 언니가 그 나이에 취업하실 것도 아니고. 나야 이력서 제출하려니까 컴퓨터 자격 능력을 요구하더라고요. 그래서 배우러 왔죠.”
“그래. 자기도 나이가 있어서 취업이 어렵지?”
“당연하죠. 나이도 많은데 경력도 없고 게다가 컴맹이다 보니 어디서도 뽑질 않네요.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 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벌써 배워서 자격증 다 따고 남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몇 년 전에 이미 취업 되었을지도 모르죠.”
“파워포인트는 발표할 때 쓰는 거니까 해야 하고 한글은 문서작업을 해야 하니까 당연히 해야 하고 엑셀은 비서나 경리직이 쓰겠죠? 그런데 왜 3가지를 다 요구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이력서 난에 그 3가지 자격증 등급을 기입하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내가 젊었을 때는 수동 타자기로 문서작업을 했었지.”
“요즘 그런 타자기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오지. 누가 쓰나요? 한글 프로그램도 참 내용이 많네요. 이렇게 어려우니 안 배우고는 쓸 수 없는 프로그램이었네요. 그리고 한번 배워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몇 달 지나면 홀라당 다 까먹을 것 같아요.”
“나는 지금 3년 째 수업 듣고 있어. 1년에 3과목 한번 훑고 다시 해 바뀌고 다시 3과목 훑고 올해 3번째야. 이제 좀 익숙해지려고 해. 자기는 나보다 젊으니까 한 2년 하면 될려나?”
“글쎄말예요. 몇 번 반복해야 될 것 같아요. 지금은 강사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따라 하는 거지. 몇 달 지나서 나 혼자 하려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아요. 언니도 참 대단하세요. 3년째 배우러 오시다니.”
“늙어서 집에서 놀고 있으면 머리가 더 나빠지고 더 무능해 보여. 애들 보기도 부끄럽고. 자기도 아니다. 자긴 아직 아가씨니까. 자식 눈치보는 일은 없구나.”
“전 아직 취업도 결혼도 못 했는데요. 언니가 부러워요. 나도 눈치 볼 자식이라도 있었으면.....”
3과목 강사가 다 틀린데 각자 스타일이 다르다. 사람마다 자기가 원하는 강사 스타일이 다 있으니까. 그 중 한 강사는 너무 성의가 없어서 정말 시간만 때우다가 월급 받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당연히 내 옆자리 언니는 불평했다.
“뭐 저런 강사가 다 있어? 정말 학생들이 안 나와서 강의가 폐강되길 바라는 것 같아. 저렇게 일하기 싫으면 안 나와야지. 안 그래?”
“그래도 공짜로 배우는 주제에 강사 스타일까지 따질 순 없죠.”
“아니지. 다 우리 세금으로 월급 받아가는 주제에. 우리도 제대로 배울 권리가 있어. 공짜라고 생각하지마. 뭐 여기 아니면 배울 곳이 없나? 내가 이런 취급 받으면서 저런 강사한테 배워야 해? 다른 곳에서 하면 되지.”
“물론 구청 수업도 있긴 하지만 여기 동네에서 하는 이곳이 거리가 가깝고 걸어서 5분이니까요. 나는 그냥 계속 여기 다닐래요.”
“그래? 자기는 그럼 여기 계속 다녀. 나는 구청 수업 다시 등록하려고.”
“그럼 이곳엔 안 오실 거예요?”
“저 여자 꼴 보기 싫어서 그냥 차타고 다녀도 구청 가서 배울란다.”
“그럼. 전 혼자 여기 다녀야겠네요.”
“그래. 자기는 그렇게 해.”
그러고 그 언니는 동네 정보화교실에 오지 않았다. 나는 그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강사 밑에서 성의 없는 수업을 들으며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과목도 이 동네 정보화교실에 신청을 했다. 그런데 말이다. 수업 날짜가 되어서 수업을 하러 갔는데 강사가 신청자가 너무 적어서 수업이 폐강되었다고 했다.
“아니, 그러면 수업 폐강되었다고 연락을 주셔야죠. 제가 헛걸음을 안 하죠.”
“아? 먼 데서 오신 것도 아니고 동네 분이신데. 안 오실 수도 있는 거고.”
“그럼 다른 분들에게도 연락 하나도 안 하셨나요?”
“수강한 분이 2분밖에 없어서 안 했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나 같은 학생이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당연히 그 아주머니도 그냥 허탕치고 돌아갔다. 나는 옆자리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이곳에 안 오시길 잘했어요. 수업 폐강됐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구청 수업 신청하는 건데. 지금은 신청 마감이라서 할 수도 없는데. 속상해요.”
“그것 봐. 자기. 여기 강사는 너무너무 친절하고 잘 가르쳐. 진작 이곳에 올 걸 그랬다.”
“그러게요. 나는 이번 학기는 그냥 수업 못 하게 됐네요.”
“그래. 그 뚱한 강사. 수업 폐강되기를 바랐던 것처럼 하더니 정말 소원대로 됐네. 다들 다른 곳에서 수업 받을 거야. 그 정보화교실은 수업을 하건 말건 강사는 매일 빈 강의실에 출근하고 월급만 받는 거 아냐.”
“그렇죠. 나라에서 만들어 놓은 정보화교실인데 컴퓨터실 관리 책임자가 있어야 하니까요. 매일 빈 강의실에 와서 하루종일 컴퓨터로 게임. 쇼핑, 인터넷 하다가 퇴근시간 되면 집에 가는 팔자 좋은 양반이죠. 정말 어떻게 해야 저런 자리에 취업을 할 수 있죠? 언니. 나는 한글 타자 연습이라도 하려고요. 수업은 못 받아도 정보화교실은 동네 주민. 회원들은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매일 오후에 와서 2시간씩 타자 연습하다 갈 거예요.”
“그래? 그럼 그렇게라도 해. 아예 안 하면 정말 다 까먹을거야.”
나는 수업은 없어도 매일 오후에 동네 정보화교실에 가서 타자 연습을 했다. 거기서 이력서도 쓰고 자기소개서도 쓰고 했다. 그러기를 몇 주. 그 뚱한 강사가 물었다.
“언제까지 오실 거예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긴 주민이 다 이용할 수 있는 곳이잖아요? 수업은 폐강됐어도 연습은 할 수 있잖아요?”
뚱한 강사는 짜증난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자기 자리로 가서 인터넷 서핑을 했다. 그리고는 못 참겠다는 듯 휴대전화로 수다를 떨었다. 나는 그러건 말건 내 연습에 집중했다. 하루는 정보화교실에 들어가려는데 직원이 강사가 출근을 안 해서 관리인이 없으니 정보화교실을 이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라에서 운영하는 곳을 관리인 강사가 없다고 이용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직원이 짜증 난다는 듯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계속 정보화교실에 가서 매일 2시간씩 연습하다 왔다. 어느 날 옆자리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 아직 그 정보화교실 다니고 있어?”
“네. 빈 강의실에서 2시간씩 연습하다 오죠. 그런데 오늘부터 강사가 안 온다는데요.”
“그래. 그 강사. 내가 구청에 민원 넣었어. 너무 불친절하다고. 아마 앞으로도 안 나올거야.”
“어머? 언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앞으로 다음 수업은 다른 강사가 나올 거야.”
“그 강사는 좀 친절하면 좋겠는데. 나는 차 타고 다니면서 배우기는 좀 부담스러워서요.”
“나는 이곳 구청 정보화 강사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계속 여기서 다닐 거야.”
“그래요. 언니. 잘 배우세요. 나는 그럼 강사 없는 빈 강의실에서 매일 연습 할게요.”
그러기를 한 달? 정말 새로운 강사가 출근했다. 이 강사는 날 보더니 수업도 없는데 왜 매일 나오냐고 물었다.
“여기는 주민들에게 제공되는 무료 컴퓨터실이에요. 나는 여기 회원이고요. 수업도 들었고 수업도 신청했는데 강사님이 폐강되었다고 해서 혼자 연습하는 거고요. 다음 수업 개설되면 또 신청할 건데요.”
그러면서 매일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는데 새로 온 강사도 점점 투덜대기 시작하더니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아니? 왜요? 수십 대 컴퓨터 중에서 그럼 뭘 써야 하나요?”
“수업시간이 있을 때만 제공되는 거고 수업 없을 때는 저기 구석자리 컴퓨터 하나만 제공되는 거예요. 그것만 쓰세요.”
나는 그 컴퓨터에 가서 부팅을 해봤다. 그랬는데 이 컴퓨터의 모니터가 눈부심이 너무 심하고 밝아서 밝기 조절을 하려고 해도 되지 않았다.
“강사님. 여기 모니터 화면이 너무 눈이 부셔서 화면을 볼 수가 없는데요. 조절도 안 되고. 좀 봐주세요.”
“그건 그쪽 사정이죠. 나는 몰라요.”
“강사님이 이곳 관리인이신데 모르시면 어떡해요?”
기가 막혔다. 알고 보니 이 컴퓨터는 눈이 부셔서 10분 이상은 사용하래야 할 수 없는 모니터였다. 일부러 이렇게 해둔 것일지도. 분통이 터졌다. 아니 이번 강사는 저번 강사보다 더 하네. 저번 강사는 그래도 고장 난 모니터, 컴퓨터를 쓰라고 하진 않았는데. 속상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우리집에 컴퓨터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나라에서 무료로 아니 세금으로 쓰라고 만들어준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정보화교실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눈이 아파서 안과 다니면서까지 저 컴퓨터를 쓸 순 없잖은가? 대신 2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 컴퓨터실을 이용했다. 거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리다툼이 치열한 곳이라서 새벽 일찍 자리를 예약해야만 사용할 수 있다. 그래도 꼭두새벽에 깨자마자 자리 예약해서 도서관으로 다녔다. 도서관 컴퓨터는 2시간 사용할 수 있다.
.............
“응응. 그래. 그 여자 정말 끈질겨. 그렇게 눈치를 줘도 꾸역꾸역 나와서 말이지. 최후의 수단을 썼어. 고장 난 컴퓨터를 쓰라고 했지. 그랬더니 수십 대 컴퓨터를 왜 그냥 둬야 하냐고 묻더라. 그래서 다 손 봐야 한다고. 못 쓴다고 했더니 그 고장품 쓰다가 눈 아프다고 하더니 그냥 안 오더라. 정말 질긴 여자야. 그래. 감히 널 민원 넣어서 잘랐는데 내가 그 꼴을 어떻게 보냐? 너 못 나오게 했으니 나도 그 여자 못 나오게 만들었지. 이제 속이 시원하지? 그 여자 다시는 안 올 거야. 내가 컴퓨터 하나도 못 쓰게 만들었어.”
김진미
내 휴대폰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기타 서비스에 5가지 게임이 있는데 그중에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 주시팡팡이다. 뭐 이것과 비슷한 게임은 많이 있는 것 같더라.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고 어머니, 할머니들께서 선호하신다던 바로 그 게임이다. 나는 게임을 하나도 하지 않았기에 왜 어르신들께서 그런 게임을 좋아하시는지 이해가 잘 안됐었는데 하도 심심해서 그냥 한번 해 봤다.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무료로 메일 3회 제공한다. 게임 규칙을 몰라서 어떻게 그냥 매번 게임오버가 되었는데 그 상태로 1년이 넘도록 게임규칙을 몰랐던 것이었다. 당연히 순위는 하위권이고. 내가 어르신들보다 이해력이 부족한 것 같다. 어느 날 유치원 다니는 조카가 내가 주시팡팡을 하는 것을 봤다.
“이모도 이런 게임을 해?”
“당연히 이모도 이런 게임 해.”
유심히 바라보던 어린 조카.
“이모. 이건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겠어.”
“무슨 말이야?”
그런데 정말이지. 내가 1년 동안 몰랐던 규칙을 이 유치원 다니는 조카 놈은 바로 알아버리는 것이었다. 과연. 조카 말대로였다. 매번 그 스테이지에서 게임오버가 되었는데 그 이유를 몰랐던 것. 조카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통과가 되었다.
“정말이네. 나는 저게 이것과 뭐가 다른지조차도 모르고 있었어. 넌 어떻게 바로 알았니?”
“....?”
오히려 날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하긴 내가 정말 눈썰미가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맞았다. 내가 시각적 감각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다. 하여튼 조카의 훈수로 게임규칙을 제대로 알게 되니 점수가 나왔다. 이제 순위에도 오르고 있다. 매일 무료로 3회 제공되니까. 그것 3판 하면 약 1시간 정도 한다. 물론 운이 나쁜 날은 30분 정도 한다. 그래도 30분에서 1시간 약간 넘게 할 수 있다. 그것도 운이다. 매일매일 주시팡팡을 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시간도 금방 지나간다. 아. 이래서 할머니들께서 열심히 하시는 거로군. 하긴 어르신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해. 그래서 하루는 엄마보고도 해보시라고 했다. 엄마와 나는 통신사가 같으니까. 똑같은 게임이 제공된다. 그런데 엄마는 어렵다고 못 하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평생 게임의 게자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다 늙어서 게임이냐고 반문하셨다. 나는 설명을 계속하다가 그만 알겠다 하고 나왔다.
다른 어머니, 할머니들은 잘만 하시던데.... 하긴. 나도 조카가 설명해주기 전까지는 5스테이지도 못 넘었잖아. 스테이지가 어떻게 통과된 건지조차도 몰랐잖아. 내가 엄마를 닮았나?
그러기를 몇 달. 엄마가 엄마 친구분들과 열심히 카톡을 하시더니 친구분이 보내온 두더지잡기 게임을 열심히 하는 엄마를 봤다.
“엄마. 내가 주시팡팡 하라고 할 때는 안 한다고 하시곤 왠 두더지 게임이예요?”
“이건 쉬우니까. 그리고 내 친구가 보내준 게임이니까.”
그런데 그 두더지 게임. 소리가 얼마나 큰지. 온 집이 다 울린다. 게다가 나는 길어야 한 시간인데 엄마는 몇 시간째 두더지를 잡고 계신다.
어느 날 엄마가 눈이 아프시다면서 안과에 갔다가 오셨다.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봐서 눈에 염증이 생겼대.”
게임은 어른이나 애들이나 자중해야 한다.
김진미
폭염주의보가 계속되는 날. 숨이 막히고 어지러워서 도대체 몇 도인가 싶어서 집안 온도계를 봤다. 35도였다. 이럴 수가. 에어콘을 켜야 할 날씨이지만 집에 혼자 있을 때 켜기는 부담스럽다. 남편과 애들은 직장과 학원에서 시원하게 있을 테니까.... 나 혼자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에어콘을 어떻게 틀겠는가? 저녁에 식구 다 모이면 그때 켜야지. 24시간 켤 수 있는 집이 얼마나 될까 싶다. 정말이지. 직장이나 학교에 가지 않는 전업주부는 혼자 집에서 스스로 찜기 속의 고기가 되는 수밖에. 아니 뚱뚱하니까 삼겹살 수육? 너무 더우니까 밥맛도 없고 입맛도 없고 이런 기회에 살이라도 빠지면 좋겠다. 아무래도 적게 먹으면 좀 빠지지 않을까? 내가 제대로 먹질 못하는데 가족을 위한 요리? 반찬? 못하겠다. 나부터도 못 먹는데 무슨? 가족들은 밖에서 사 먹고 오잖아? 일기예보를 봤다. 이런 앞으로 이달 말까지는 계속 이 지경이라는 기상예보가 보인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장마가 지겨워서 쨍하니 해뜰 날만 기다렸었는데. 사람이 참 간사하다. 으윽. 아직 오전인데 벌써 32도야? 점심때면 35도 되겠네. 우리 집은 약간 서향을 낀 남향이니까 2, 3시가 절정이고 6시가 되어야 겨우 해가 기운다. 그러니 가장 더운 시간을 나 혼자 겪는다. 남편과 자식은 그 시간을 겪지 않아서 우리 집이 얼마나 찜통인지 잘 모른다. 안되겠다. 오늘도 내일도 날씨가 계속 이 지경이라면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피서지를 찾아야겠다. 돈 안 들고 시원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찾아야지.
후보 1. 영화관. 음. 2시간 정도는 시원하고 재미있게 보낼 수 있겠지만 관람료가 들고 왔다갔다 차비까지 든다. 게다가 밀폐공간에다 다중시설이니 코로나 감염이 신경 쓰인다. 패스.
후보 2. 동네 찻집. 차비는 들지 않는다. 시원한 음료 한 잔 정도 마실 비용이면 영화관 시간만큼은 버틸 수 있다. 책이라도 한 권 들고 가서 읽고 올까나? 아니면 친구 불러다가 수다 한 판? 으음. 엊저녁 뉴스에 별다방에서 코로나가 퍼졌다는데. 에어콘 바람이 더 확산시켰다고 해. 그것도 영 찝찝해. 패스.
후보 3. 이열치열로 가까운 산에나 오를까? 운동도 되고 땀도 빼고 샤워하면 살도 빠지고 기분도 상쾌할 듯? 아냐. 집안에서도 움직이기 싫어서 누워 뒹굴거리는데 등산은 무슨? 패스.
후보 4. 동내 도서관. 걸어서 20분이라 왔다갔다 하는 동안 땀에 젖겠지만 돈 안 들고 거기서 책 몇 시간을 읽거나 2시간 정도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단 새벽같이 좌석 예약을 해야 한다. 늦잠이라도 자면 자리가 없어서 컴퓨터나 영화는 볼 수 없다. 그냥 책만 읽어야 한다.
그래도 가장 저렴하면서 가장 긴 시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곳은 동네 도서관이었다.
양산을 꺼내 들고 선크림을 바르고 마스크를 하고 시원한 원피스를 입고 샌들을 신고 도서관에 갔다. 꼭두새벽에 좌석 예약을 해서 지정시간에 내 좌석을 찾아갔다. 아이고 시원해라. 지금 우리 집은 34도인데 이곳은 25도네. 온 동네 아줌마와 아이들이 다 모여 있었다. 이러니 좌석 다툼이 치열하지. 10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빌려다 볼 책들을 둘러보았다. 음. 뭘 읽을까? 더위를 날려 보낼 만한 그런 책 없나? 아냐. 집에선 읽지를 못해. 저녁땐 밥하고 치우고 아까 널어둔 빨래도 걷어야 되고. 청소기는 돌리고 왔는데. 걸레로 닦지를 않았네. 여기 5시까지 버티다가 집에 가야지. 더운데 국은 무슨 국? 그냥 맨밥 먹으라고 해. 아냐. 다들 더위에 입맛을 잃었는데 반찬이 시원찮으면 더 못 먹겠지? 나만 해도 찬물에 밥 한 술 말아먹고 나왔잖아. 집에서는 더워서 먹기도 귀찮은데. 여기 시원한 데 있으려니 슬슬 배가 고파오네. 다시 집에 가면 또 먹기 싫을 것 아냐? 여기 정수기는 냉수도 콸콸 잘 나오네. 우리 집 정수기는 저렴한 모델이라 냉온수 안 나오는데. 물론 물병에다 받아서 냉장고에 두면 되는데 그것 하나도 귀찮아서 냉장고에 넣어두질 않았어. 찬물 마시면 해롭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지. 슬슬 영화 한 편 볼 시간이군. DVD 좌석까지 미리 예약을 해둬서 영화도 볼 수 있지. 이 자리도 자리다툼이 치열해서 이렇게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볼 수가 없어. 음. 오늘은 뭐 보나? 7년 전 한국 영화를 한 편 골랐어. 최근 신작은 도서관에서 볼 수 없어. DVD 출시가 된 작품만 볼 수 있으니까. 우와. 저 배우가 저렇게 멋진 사람일 줄이야. 여태 몰랐네. 드라마를 잘 안 봐서. 친구들이 저 배우 멋지다고 생난리 칠 때도 나는 콧방귀를 꼈었는데 말이야. 친구 남편들이 싫어한다고 했지 아마? 액션 배우였구나. 몰랐네. 몸매 관리를 참 잘한 것 같아. 우리 집에 있는 누구와는 천양지차야. 몸 관리 좀 하라고 잔소리라도 하고 싶지만. 내 몸 관리도 못 하면서 닦달할 수는 없지. 나도 양심이 있는 여자야. 우리 애라도 잘 관리해서 날씬하게 예쁘게 자라면 좋겠어. 이런. 영화까지 다 보고 나니 5시가 되었네. 슬슬 돌아가야지 가서 씻고 밥해야지.
우와. 집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삼겹살 수육이 되는 것 같아. 그래도 시원한 곳에서 좀 있다 와서 덜 힘들어. 어서 씻고 저녁 하자. 오늘은 식구 다 모이면 에어콘을 틀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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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겨서 아파트 대단지에 정전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점점 더 전력수급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원전이 점차 폐기되고 재생전기인 태양열 패널은 홍수에 다 떠내려가고 이래저래 전력공급에는 부족함이 있죠. 각 가정에서만 절전을 하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죠. 산업용. 일반용 전기는 펑펑 사용하는데요. 원가보다 더 헐값으로 사용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이 3공 시대입니까? 가정용 전기요금과 산업용 전기요금. 요금제 정비부터 하세요. 전 세계에서 가정용 전기요금이 가장 비싸고 폭탄 누진제인 나라가 우리나라 아닙니까?
김진미
올 초 코로나가 막 유행되려고 할 즈음에 내 전재산의 반을 달러에 투자했다. 그때 코로나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막 퍼지려고 할 때였다. 달러가 하루하루 마구 치솟았다. 나는 은행 예금을 인출해서 달러를 샀다. 수수료는 4.5원이었다. 처음엔 4원으로 해준다고 했는데 집에 와서 내가 계산해보니 4.5원을 받았었다. 기분이 상했다. 이런 일에 사기를 치다니 꽤나 유명한 증권회사인데. 내가 그리 만만해 보였나? 큰마음 먹고 구매했는데 말이지. 그 달러가 봄, 여름까지는 계속 잘 올라주었다. 음. 역시 잘했어. 수수료는 사기당했지만. 그 매니저가 괘씸해서 만기 이후에는 회사를 바꿀까 생각했다. 그런데 저번 달부터 달러가 하락을 하고 있다. 본전은커녕 원금 손실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사람들은 달러를 팔아서 금을 사라고 한다. 금은 올초 대비 30퍼센트 정도 올랐다. 차라리 그때 달러 대신 금을 샀더라면 33퍼센트의 순익을 얻었을 텐데. 사람 일이란 아니 돈에 관해서는 귀신도 몰라요. 나는 은행 예금을 톡 털어서 달러를 샀지만 동생 친구는 빚까지 내서 달러에 투자했다. 그 애는 아마 밤잠을 못 잘 것이다. 매일매일 손실이 나는데 차라리 그냥 은행 예금에 묵혀두었다면 원금도 안전하고 비록 몇 푼 되진 않아도 이자도 차곡차곡 쌓였을 텐데. 요금 은행 금리가 너무 낮아서 실제로는 마이너스 금리라고 하길래 내 딴에는 큰맘 먹고 달러에 투자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몇십 년을 봐서도 달러가 지금 최고가이긴 하다. 몇 년 전 달러가 천원 대였을 때 그때 외환 매니저가 달러 투자하라고 권유했을 그때 투자했어야 했다. 그때는 천몇십 원 했었다. 왜 그때 투자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된다. 그때는 그냥 은행 예금을 했었고 올 초 달러가 폭등해갈 즈음에 죄다 찾아서 달러를 산 것이다. 하루하루 앉아서 돈을 날리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다. 지금이라도 팔아야 하나? 역시 손해를 좀 봤지만 팔아서 금을 사야 하나? 금은 또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며 너무 올랐다느니 앞으로도 더 오를 것이라느니 말이 많다. 달러랑 금은 서로 반대로 움직인다고 한다. 지금 달러가 내리고 있으니 금이 오르는 것이다. 아니. 우리나라 경제가 엉망진창으로 나간다면 달러와 금 둘 다 오르겠지. 하지만 나라가 망하는데 투자할 순 없지. 예전 IMF 때 달러가 2,000원까지 올랐었다. 그때 우리나라는 정말 비참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코로나가 전 세계를 잡아서 각국에서 마구 돈을 찍어서 뿌리고 있다. 우리나라도 돈을 풀었고 미국은 더 심하게 풀었다. 그러니 달러 가치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앞으로도 더 풀 것인가? 봄에 푼 돈 가치가 지금 여름 끝자락에 우리에게 피부에 와닿는데. 또 다시 달러를 찍어서 마구 뿌려댄다면 겨울에 또 폭락할 것 아닌가? 여러 경제 관련 뉴스와 영상을 보고 있지만 대부분 달러 약세. 금 강세 관련 기사와 영상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말만 믿고 달러를 확 팔아서 금을 사야 하나? 괴로워 죽겠다. 아는 동생은 달러를 팔아서 금을 샀다. 요즘 금이 너무 올라서 사기가 부담스러웠는데 큰 결심했다. 이러는 와중에도 달러는 계속 내리고 금은 계속 오른다. 달러도 최고가에 샀는데 금도 내가 사면 폭락하는 것은 아닐까?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전문가들은 지금 어디가 투자할 것인가? 말은 약 달러 강 금이라고 떠들면서 설마 자기들은 어디에 투자할까? 어떤 전문가는 솔직하게 말하더라. 앞으로 달러는 약세고 금은 강세이니 금에 투자하지만 달러도 약간은 보유하고 있다고. 항상 리스크를 대비한다고 한다. 음. 그렇다는 것은 금에 더 투자하고 달러는 약간 보유하라는 말인가? 9:1? 아니면 8:2 정도? 아. 정말 괴롭다. 대체 얼마를 언제 사고팔고 해야 하지? 돌아버리겠네. 미국 재 투자가가 금광에 투자했다고 한다. 금이 폭등했다. 그런데 콜롬비아가 국가 금을 3분의 2를 매각했다고 한다. 금이 폭락했다. 그래도 올해 내내 금이 하도 올라서 전체적으로는 금이 아직 최고가를 유지하고 있다. 금광에서 금 착굴과정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다시 금이 올랐다. 각 가정과 나라에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금을 판다고 한다. 다시 금이 내렸다. 지금 계속 금은 오르락내리락하지만 역시 강세임에는 틀림이 없다. 달러는 역시 소폭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지만 2달째 계속 하락하는 중이다. 어느 전문가는 말한다. 앞으로 달러가 900원까지 떨어질 수 있다. 금은 온스당 3,000달러까지 오를 것이다. 맙소사. 그렇게 되면 내 달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심지어 달러가 휴지가 된다고 예언하는 기사도 봤다. 소름 끼쳤다. 아. 머리 아프다. 대체 언제까지 고민해야 하나? 달러를 팔아? 지금도 손해가 막심인데. 금? 사야 해? 지금도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결국 금을 샀다. 그런데 내가 살 때 1그램당 8만원으로 샀는데 사고 나니 지금 73,366원 한다. 아. 속상해 죽겠다. 달러도 손해 봤는데 금도 손해 봤다. 돌겠다. 죽겠다. 끙끙.
“야. 작작 좀 해라. 너 대체 달러 얼마나 갖고 있다고 그 난리냐?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말도 못 하겠다. 뭐 그 돈 갖고 그 난리니? 너 달러 몇 달러나 샀냐? 5,000달러? 그게 돈이니? 금은 또 얼마나 샀게? 30그램 샀잖아? 누가 보면 너 전 재산이 엄청난 줄 알겠다. 고만 좀 해라.”
김진미
1) 초등학교 시절: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은 1학기 때와 2학기 때 선생님께서 바뀌셨는데 1학기 선생님은 너무 여성스럽고 얌전하시고 특히 글씨를 정말 잘 쓰셨던 것이 기억난다. 2학기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크고 글씨도 좀 활기차게 쓰셨기에 많이 1학기 선생님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2학년 담임선생님께서는 남자분이셨는데 하루는 엄마께서 아주 예쁜 분홍색 원피스를 입혀서 보내셨는데 내가 평소와 달리 치마를 입고 가서 그랬는지 긴장했는지 수업시간에 의자에 실례를 해서 선생님께서 그냥 집에 가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께서 밀대걸레로 바닥을 닦으셨다.
3학년 선생님은 할머니셨는데 아주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씩씩한 분이셔서 1, 2학년 때는 발표도 한번 제대로 못하는 숙맥이었는데 3학년 되고서는 발표도 잘하는 학생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4학년 선생님은 정말이지 절대로 잊지 못할 분이시다. 당시 담임 선생님의 딸이 바로 우리 학교 5학년이었는데 거의 매일 우리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 옆자리 앉아서 개인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거의 매일 엄마들이 교실에 들락거렸다. 교탁 화병에는 매일 새로운 꽃이 꽃혔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칠판을 제대로 못 닦았다고 칠판에다 내 머리를 처박았다. 눈이 빠질 것 같았다. 그리고는 엄마를 모셔오라고 했다. 나는 울면서 엄마보고 선생님께서 오라셔 라고 했다. 다음날 엄마는 학교에 다녀가셨는데 그다음부터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폭력이 시작되었는데 당시엔 나뿐만이 아니라 엄마가 학교에 오지 않는 애들은 매일같이 선생님께 맞았다. 1년이 지옥이었다.
5학년 선생님은 너무 조용하고 4학년에 비해서 너무 아무일이 없어서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
6학년 선생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인데 할아버지 선생님이셨는데 당시 유명 사립학교서 거의 정년이 다 되도록 근무하시다가 우리 학교로 전근 오신 분이셨다. 퇴직 얼마 안 남기고 왜 공립학교로 오셨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선생님께서는 당시에 우리나라 욕을 정말 많이 하셨는데 어린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었다. 6학년이라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애들은 할아버지라서 음악시간에 풍금도 못 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음악시간 마다 풍금을 잘 치시고 음악시간이 즐거웠다. 어느날 음악시간에 선생님께서 오늘은 음악 대신 학과공부를 하자고 하셔서 우리는 몹시 놀랐었다. 그러고 며칠 지나서 교장 선생님께서 오셔서는 담임선생님 큰딸이 죽었는데 초상에 안 가고 학교에 출근했다면서 정말 대단한 양반이라고 하셨다. 바로 그날 음악시간에 학과공부하던 그날이 바로 선생님 장녀의 장례일이었다.
2) 중학교 시절
중학교에 입학하니 담임 선생님은 조례. 종례와 담당 과목 시간 외에는 뵐 수 없어서 놀랐다.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수업하는 것이 신기했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셨는데 예전에는 부산여중에서 오래 근무하셨었다고 지금 애들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었다.
2학년 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대구분이신데 부산 사투리가 거칠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우리 반에 도벽이 있는 학우가 있었는데 아무도 그 학생이랑 말을 하지 않는 외톨이였다. 내가 그 애에게 말도 걸어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날 예쁘게 봐주셨는지 반장을 하라고 하셨다.
3학년 선생님도 영어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아들이 유치원생이었는데 하루는 학교에 놀러왔는데 선생님께서 이 누나들 중에 가장 예쁜 누나가 누구냐고 물었는데 그 아기가 나를 지목했다.
3) 고등학교 시절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야간 자율학습이란 것을 하게 되었는데 밤 10시까지 집에 가지 못했다. 도시락을 2개씩 싸서 아침 7시 등교. 밤 10시 하교. 나는 당시 ‘모래요정 바람돌이’라는 어린이 만화를 매일 저녁 보고 싶었는데 중학교 졸업 이후 전혀 보지 못했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그분도 다른 학교에서 우리 학교로 전근 오신 첫 해 우리 반을 맡으셨는데 자꾸 이전 학교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책을 읽다가 선생님께 책을 빼앗겨서 다음날 교무실로 찾으러 갔었다. 그 해 합창대회 때 나는 반주자였고 매일 매시간 틈만 나면 애들 노래 연습을 시켰었다. 우리는 장려상으로 연필을 받았는데 담임선생님께서 내게 수고하셨다고 연필 한 자루를 더 주셨었다.
2학년 때는 화학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셨는데 하루는 너무 아파서 병원 갔다가 학교 가느라 학교에 전화를 걸었는데 교무실에 계신 다른 선생님께서 받으셨는데 제가 병원 다녀오느라 아침 자율학습시간에 못 간다고 전해달라고 했는데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늦게 왔다고 몹시 혼내시고 나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벌을 받았었다.
당시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여고에 다녔는데 학교 가는 도중에 당시 대통령의 관사인지 별장인지가 있어서 툭하면 전경들이 보초를 서서 길을 막아서 빙 둘러서 통학하는라 지각이 잦았다. 억울했다. 길을 막아서 늦었는데 선생님들은 우리를 나무라셨다. 특히 이 해는 너무 자주 별장에 손님이 오셔서 우리는 매번 길을 돌아서 가다가 지각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리고 이 해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데모에 화염병, 최루탄이 터져서 나처럼 걸어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더더욱 고역이었다. 걷는 내내 최루탄을 마시면서 화염병과 최루탄을 피해서 집과 학교를 오갔다.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수학선생님이셨는데 할아버지로 우리에게는 별 관심이 없으셨고 수업만 하셨다. 진학지도도 별로 신경쓰지 않으셨다. 원서 쓸 때 엄마들이 학교에 오셨는데 우리 엄마는 빈손으로 왔다 가셨다. 학교 원서 쓸 때 나보다 공부 못 하던 학생이 나보다 더 좋은 학교에 지원하고 나는 내 성적보다 나쁜 학교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부모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3) 독어독문학과 시절
고3 담임이 써준 학교에 별로 정도 안 가고 마음에도 안 들고 이냥 저냥 딱 장학금 받는 수준으로 공부했다. 교수님들은 초중고 교사들과 달라서 연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별로 재미를 못 느끼고 교직자격증을 이수하고 교생실습을 마치고 졸업했다. 독일어 교사를 구하는 곳이 없어서 교직 임용도 못 봤다.
4) 입시 레슨 시절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음대 입시를 준비하느라 서울에 종교 음악원에서 오르간을 배웠다. 여기는 종교음악 시절로 교회음악을 가르치는 곳이었는데 1년이 지나서 대학입학을 준비하고 싶다고 했더니 왜 이제 말하냐고 처음부터 말했으면 1년 빨리했을 것 아니었냐고 하셨다. 꼬박 2년을 채워서 입시레슨을 받았다. 당시 오르간 연습을 위해 매일 갔는데 음악원 원장께서 연습실 사용료를 내라고 하셔서 레슨비 외에 매달 2만 원씩 연습실 사용료를 냈다.
5) 교회음악과 시절
원하던 Y 대학에 못 가고 S 신학대에 들어갔다. 그래도 원하던 공부를 하게 되어 정말 죽도록 공부했다. 단 내가 개신교 신자가 아니었기에 기숙사에서도 학과에서도 종교적인 박해는 좀 있었다. 그래도 실력으로 압살해버리니까 앞에서는 말 안 해도 뒤에서 구시렁댔었다. 그래도 최상위 성적이라서 교수님들과 강사님들이 눈여겨 보셨던 것 같다. 문제는 당신 제자들보다 내가 더 뛰어나서 그 학생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대놓고 이단이라고 하는 학생도 있었고, 나에게만 어려운 과제를 내주는 강사도 있었다. 그래도 예뻐해 주는 교수님과, 기숙사 사감 선생님과 나보다 나이 많은 아줌마 학생까지도 내게 혼처를 소개시켜 주셨었는데 셋 다 목사님이었다. 나는 개신교 신자도 아니고 굳이 목사 사모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다 거절했다. 문제는 그때부터 기숙사 언니들이 너는 개신교 신자도 아닌데 왜 목사님 선이 들어오냐고 구박했다. 잠도 안 재우고 밤새 괴롭힌 언니도 있었다. 학과에서도 따돌림 받는데 기숙사에서까지 따돌림을 받으니 정말이지 힘들었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고 예배보고 해서 수석졸업에 예배 개근상을 받았다.
6) 교회음악 연구소 시절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내려와서 다친 오른손을 치료받으면서 교회음악 연구소에 다녔다. 여기는 2년 과정으로 입학 때는 수십 명이었는데 2년 후 졸업 때는 4명만 졸업해서 1회 졸업생 배출과 함께 폐원되었다. 나는 졸업생 대표였다. 이곳 선생님들은 다 구교 신자들과 신부였다. 신부라는 사람이 술 마시고 담배를 피는 것이 낯설었다. 개신교 신학대학에서는 술 담배를 하면 퇴학이었다. 술 담배를 안 하지만 처자식을 거느리는 목사와 처자식은 없이 홀로 술, 담배에 찌들은 신부. 학문과 종교를 연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냥 열심히 공부했다.
7) 출가지인 시절
음악원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출가하였다. 그곳은 내가 지향하던 이상적인 유토피아라고 생각했었다. 속세와 분리된 곳이라서 명심하는 것이 있다. 학교, 종교. 지역. 이 3가지 이야기는 금지된 곳이다. 그래서 사투리도 쓰지 않는다. 나는 사투리를 제어하기 힘들어서 거의 벙어리처럼 지냈다. 사투리를 쓰면 저속하다고 숙덕거렸다. 하루는 학적사항을 적어서 내라고 하길래 적어 냈었는데 그것을 동기가 훔쳐본 모양이다. 그리고 결정적 사건. 단체로 차를 마셨는데 찻잔에 Bone China. made in England. 라고 적혀있었다. 내 학적을 훔쳐본 그 동기가 그걸 보더니 중국산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기에 내가 영국산 뼈 도자기라는 뜻이야 라고 정정했는데 주변에서 아무도 영국산이라고 두둔하지 않았다. 아차 싶었다. 학교나 학적 이야기뿐 아니라 그 어떤 내색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때 그 동기 눈에서 불꽃이 튀더니 그전까지는 잘 지냈었던 동기인데 그때부터 구박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성탄 카드를 만들 때도 영어로 적어서는 안 되었다. 무조건 한글로 적어야 했다. 폐쇄공간에서 따돌림을 받으면 얼마나 힘든지 군대 가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군대에서 한 명만 따돌림 당하면 어떻게 되는지. 하여튼 나는 그곳에서 나날이 적대자가 늘어나서 생활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처음에는 바로 윗 기수 선배들이 괴롭히더니 점차 그 윗 기수. 나중에는 할머니들까지 괴롭혔다. 어떻게 괴롭혔나 예를 들자면, 악보도 못 읽는 동기가 지휘자가 되고 나는 반주자인데 악보가 사라진다든지. 악보가 바뀌어 있다든지. 악기가 망가져 있다든지. 반주를 하는 중에 악보 뒷부분이 없어서 중간에 멈춰야 했다든지. 부엌에서 일할 때는 주전자들이 사라진다든지. 내 옷과 신이 찢어지고 망가진다든지. 샤워할 때 샤워실에 불이 꺼진다든지. 내 침구에 낙서가 되어있다든지. 빨래 당번이 되어서 전체 빨래를 해서 널어놓으면 전부 바닥에 팽개쳐져 있다든지. 빨래가 내팽개쳐지는 순간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이다. 다른 사람이 빨래 당번일 때는 내 빨래만 세탁이 안 되어 더럽다든지. 간식시간에 나만 연락 못 받아서 간식을 못 먹는다든지. 복숭아 알러지가 있다고 하니 간식으로 복숭아를 먹으라 한다든지. 간식을 먹을 때 나만 상한 것을 준다든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이 24개가 다 썩어서 제대로 씹지도 못하는데 매일 같이 바짝 마른 오징어를 간식으로 먹으라고 준다든지. 한여름 밭일할 때 나만 땡볕에서 일하라고 한다든지. 오른손을 다쳤다고 하니 무거운 짐을 들 때 나만 반대 방향으로 들어야 한다든지. 둘이 들고 가는데 갑자기 손을 놔버려서 나만 들고 가게 되었다든지. 손빨래 당번을 나만 2번 연달아 한다든지. 굳이 길 놔두고 숲으로 가라고 해서 다리가 다 찢어졌다든지. 단체로 이동했는데 나만 다시 돌아가서 뭘 갖고 오라든지. 벙어리처럼 지냈는데 매번 무슨 자랑을 했다든지 누구를 욕했다든지 잘난 척을 했다든지 하여튼 나 없는 데서 수군거리고 해서 아직도 무슨 누명을 썼는지조차도 모른다. 그러기를 10달. 아무리 힘들어도 한번 출가지인은 거기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박해를 받다가 화병으로 죽으면 천국 가겠거니 생각하고 버텼는데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 되니까 아버지를 불러서 나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즉 나는 내 발로 나온 것이 아니라 쫓겨 나온 것이다. 나는 거기서 나가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했기에 나와서도 몇 년 동안이나 집에서 종일 기도만 하고 지냈다.
8) 학원 강사 시절
몇 년 동안 칩거하면서 도를 닦다 보니 환속을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가 생지옥에서 죽을까 봐 구원하신 것임을 깨달았다. 그 후로부터는 종교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음을 잡아먹고 일자리를 찾았다. 할 줄 아는 것이 공부하고 배운 것뿐이라서 가르칠 곳을 찾았다. 음악학원, 할머니 한글 학원. 영어학원, 수학학원 등등 여러 곳에서 일했는데 학원강사라는 것이 하루에 10시간 주 6일 일해도 85만 원 이상 주는 곳이 없었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 가르쳐 봤다. 전공이 음악이라 음악을 가장 많이 했는데 학원강사라는 것이 4대 보험도 안 되고 3D업종이라 학생 가르치는 일 외에 청소, 잡일, 심지어 어린 학생들 화장실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했다.
8) 음악교육 대학원 시절
나이가 점점 들어서 원장이 나보다 어려지자 일할 곳이 점차 줄어들면서 다시 입시 준비를 했는데 대학원 입시에 이론시험과 실기 시험이 있어서 다시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그래서 꼬박 1년 넘게 준비해서 국립대학교에 원서를 넣으러 갔다. 그랬더니 그 학교에서 원서를 받아 주지 않았다. 나는 왜 원서를 받지 않느냐고 따졌는데 음악교육 담당 교수님이 나타나서 화를 내면서 나를 내쫓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다가 다른 사립대학교에 원서를 내고 합격했다. 거기는 실기 시험을 치르지 않는 곳이었는데 1년 동안 헛수고하고 돈만 날렸다. 사립대학이라 등록금도 더 비싸고 당시 우리집이 양산 통도사 근처라서 학교가 너무 멀어 환승도 안 되는 차를 3번씩 타고 다녔다. 5학기제인데 교수님들이 참 뭐랄까. 예전 신학대학교 교수님들은 전부 개신교 신자라서 종교적으로는 박해했어도 성적을 조작하거나 장학금을 안 주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이 대학원은 일반대학 교수님들인데도 성적의 기준이 제멋대로이고 이견을 제시하면 다른 학생들이 하나도 제대로 못 내는데 너는 왜 7개나 냈냐면서 오히려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꼬와서 점수를 깎았다는 교수님. 장학금을 신청하고 싶다고 하니 돈도 없는데 대학원은 왜 왔냐고 구박하는 교수님. 학술지에 논문을 내고 싶다고 하니까 건방지다며 다시는 내 얼굴 보지 말라고 하는 교수님. 논문지도 교수가 지도 못 하겠다고 다른 교수 찾아가라는 교수님. 스승의 날에 개인 연구실로 오라는 강사님. 등등. 2년 반 동안 매번 울면서 다녔다. 그렇게 음악교사 자격증을 따고 교육학 석사를 받았다.
9) 외국어고등학교 사감 시절
힘들게 교육학석사학위와 음악교사자격증을 취득하여서 학교 교사가 되었어야 했는데 임용에서 음악과목을 도통 뽑지를 않아서 허송세월을 할 수 없어 모 외국어고등학교 사감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학생신분으로 주변에 많은 교사, 교수, 강사들을 접했다면 드디어 내가 학생들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겪은 많은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남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예뻐해주고 차별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고3 담당이었는데 고3만 2개 동을 사용했다. 전교 1등부터 10등까지는 특별동을 사용했다. 나머지는 일반동. 성적으로 건물을 나누기는 했어도 딱히 시설이 더 좋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학생들은 어려서 부모를 떠나 살아서인지 생활지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었다. 아무리 공부하는 학생이라도 자기 기본 생활은 해야 하는 법인데 부모가 못 가르친 것인지 아니면 애들이 이상한 것인지 알 순 없지만 남자아이들보다 더 지저분하다고 생각한다. 욕실이나 복도에 벗어놓은 더러운 속옷들을 매일 주워서 버려야 했다. 이불에 달거리 흔적이 묻어서 치운 이불과 요만 백 채가 넘는다. 그 학부모들은 매주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면서 한 번도 내게 인사는커녕 아는 척도 않고 제 딸 방에 드나들더니 웬일로 말을 거냐 싶었더니만 피 묻은 이부자리를 나보고 치우라고 했다. 나는 본인이 직접 치우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학부모는 학교장에게 민원을 넣어서 나는 지도를 받았다. 교장은 식당에서 밥 먹는 나를 보더니 이곳은 일반교사들이 먹는 곳이라며 먹지 말라고 했다.
고 3 학생들이라 주말에도 기숙사에 있어서 나는 한 달에 딱 이틀만 쉬었는데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힘들어도 수능 마치면 쉬니까 1, 2학년보다 나을 거라고 위로를 해서 그런가 했더니 수능 마치자마자 1학년 기숙동으로 가서 같이 일하라고 했다. 1학년 기숙동에 같이 일을 하라고 하더니 나를 믿어서인지 원래 1학년 기숙사 사감은 자리를 지키지도 않고 어디를 갔는지 알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다른 사감은 자기 수영장 나가야 하니 나보고 일찍 나와서 혼자 기숙사 지키라고도 하였다. 세상에 제일 힘든 것이 돈 버는 일이라고 하더니 역시 그렇구나 싶었다.
그리고 틈틈이 향교와 서원에서 단소와 시조창, 논어와 주역을 배웠다. 구립문화원에서 민요와 장구를 배웠다. 역시 학생으로 사는 것이 더 편하고 적성에 맞았다. 단소 선생님 시조 선생님 논어 외 사서삼경 선생님은 친절하셨고, 특히 주역 선생님 수업이 좋았다. 민요 장구 선생님은 좀 깐깐하셨고 예술가만의 독특한 성격이 보였다. 아마 그 선생님이 그런 선생님에게 배웠던 모양이었다.
10) 음악교육박사 과정 시절
사감 시절 모은 돈으로 S 대학 음악교육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관악사라는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박사과정은 일인실이다. 대학원 기숙사가 새 건물이라 시설은 좋았지만 월세가 비쌌다. 하루라도 빨리 졸업하는 것이 살길이라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동기들은 한 학기에 2과목을 듣는데 나는 최고 수강 학점을 채워서 4과목을 신청하고 청강으로 3과목을 들었다. 나는 매일 1, 2과목 수업을 준비하고 공부하고 시험을 치느라 뼛골이 빠지도록 공부했다. 매일매일 과제와 발표. 시험을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곤 하였다. 정말 이래서 다 2과목만 신청하는구나 싶었다. 매 학기 7과목을 하다 보니 정말 체력적으로 힘에 부쳤다. 다른 젊은 학생들도 2과목을 하는데 나는 관악사 전체에서도 최고령 학생인데 최고로 많은 과목을 듣고 있구나 싶었다. 그래도 한 학기라도 빨리 마치고 싶어서 좀 무리하게 했다. 코스웍을 마치고 영어시험과 전공 졸업시험을 준비하는데 역시 지옥의 시험이라 어렵게 통과했다. 텝스 641점이고 전공시험은 아마도 만점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박사논문인데 지도교수를 맡아 주시는 분이 없어서 신청 마감일까지 음대와 사범대 전 교수님들을 다 찾아다니면서 사정을 했다. 마감일에 겨우 받아 주신 분이 교육학과 교수님이신데 이 해 첫 부임하신 분으로 내가 첫 제자였다. 그러나 논문심사마다 탈락을 해서 2년, 즉 4학기 동안 7번 심사 끝에 겨우 통과하여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이후 계속 여러 음악교육 학술지. 음악학술지. 국악학술지. 국악교육학술지에 논물을 제출하였는데 박사과정 재학 중에 한의학 학술지에 투고한 논문이 학술지에 첫 번째로 게재되었고 졸업 후에 딱 2번 음악교육 논문이 학술지에 게재되었을 뿐 이후로 계속 탈락해서 올해부터 논문을 투고하지 않고 있다. 논문 투고와 함께 전국의 대학에 교수, 강사자리에 지원서를 내었는데 전부 탈락해서 졸업한 지 5년이 지나도록 백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1) 도서관 강좌 시절
졸업 후에 계속 이력서와 논문을 투고하면서 재작년부터 동네 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좌를 몇 개씩 들었다. 집에서 놀고 있는 것도 부모님께 눈치가 보여서 그나마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보고 영화감상도 하고 인문학 강의들도 들었다. 국어, 영어, 음악, 국학, 기타 등등. 그중에서 작년 가을에 단편 글쓰기 강좌에 등록했다. 나는 그냥 등록했는데 다른 학생들은 다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놀랐다. 글 쓰고 싶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었다. 다들 글쓰기 강좌가 처음도 아니고 몇 번째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 5주 동안은 다른 사람들 글 발표하는 것만 구경했다. 이 상태로 계속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나는 발표도 안 하면서 남 발표만 듣는 것도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6주 차 드디어 첫 단편을 써서 발표했다.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다가 10쪽이 넘는 단편을 써서 나도 다른 사람들도 좀 놀랐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한두 편씩 단편을 썼다. 하루에 세 편을 쓴 적도 있다. 나는 손가락이 키보드에 닿자마자 저절로 글이 써지는 기적을 경험하면서 심지어는 하루에 7편도 썼다. 문제는 수업시간에 강사가 내 글을 다 읽어 주지도 않고 이딴 글을 누구 읽으라고 썼냐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다. 나는 모멸감과 수치심에 부르르 떨면서 끝까지 버티다가 수업이 마치자 집에 돌아왔다. 매일 단편들을 썼다. 매주 내 글은 제대로 발표도 되지 않았다. 강사는 수업시간 대부분을 다른 사람들 험담을 하면서 시간을 날렸다. 강의 마지막 주에는 학생들의 단편을 싣는 책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는데 나는 그때 25편을 완성한 상태였고 다른 학생들은 한 편이 대부분이고 못 쓴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1편보다는 더 싣고 싶다고 했는데 카톡으로 몇 개 싣고 싶냐고 연락이 왔다. 나는 몇 개 실을 수 있냐고 물었다. 나야 할 수 있으면 많이 싣고 싶다고 했는데 절대로 그렇게 못 하겠고 딱 한 편만 실을 거라면서 비웃음 문자로 답신을 날렸다. 나는 출판기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로도 매일 글을 써서 단편 52편을 엮은 『PEOPLE』, 중편 『술탄과 칼리프』, 『투란도트, 그 이후의 이야기』, 『구미호 외전』을 썼다. 그런데 글을 써도 읽어 줄 사람이 없고 고스란히 하드 드라이브에만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올봄부터 가을까지 ‘네이버 웹소설’과 ‘문피아’에다가 4편을 올렸다. 물론 독자는 별로 없다. 그래서 깨달았다. 글재주가 없구나. 이제는 글을 쓰지 않는다.
12) 결어(結語)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많은 스승들을 만났다. 좋은 분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분도 있었다. 사실 나만큼 많은 스승을 만난 사람도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다 스승이라고 칭할 수도 없다. 기억에 남는 스승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내 주변에는 항상 스승들이 있었다. 내가 스승으로 불렸던 적은 별로 없지만 그 아이들에게 있어 나는 과연 좋은 기억을 남겼을까 생각해 본다. 열심히만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항상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 무엇이 남았는지, 예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빈손, 흰손(白手)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