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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외전

김진미

차    례

역시 인간은 배은망덕해.

화과산 돌원숭이

일미호의 하루

삼미호의 고민

여우유치원

구미호의 회상

거울의 방

팔미호의 일기

구미호의 명상

칠미호의 팔미호 승급시험

구 팔미호의 고민

신 팔미호 수련기

구 팔미호의 반격

여우병동

구미호의 방문

지하세계 전쟁

전투 시작

야간 기습

두 번째 전투

금의환향

팔미호 재대결

최고산 파괴

백여우족 회의

종결

역시 인간은 배은망덕해.


김진미



나는 구미호다.

50,000년 묵은, 꼬리 아홉 달린 백여우다.

인간들은 백여우를 매우 나쁜 의미로 사용하던데, 이 백여우님 기분이 몹시 나쁘다.

나는 정말 은빛의 새하얗고 빛나는 털을 가졌다. 그리고 나의 자랑스럽고, 탐스러운 꼬리는 또 어떤가? 이토록 멋진 꼬리가 아홉이나 있는데, 세상 만물이 다 날 존경해마지 않는다. 인간들만 빼고, 나는 영험과 능력이 뛰어나고, 수명 또한 마음만 먹으면 영생불멸이다. 내 주변 친구들은 다 부처요, 보살이요, 사람들이 기도처에서 찾는 그런 존재들이다. 그런데, 친구들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숭을 한 몸에 받는 데 반해, 나에겐 그 어떤 인간조차도 나를 존경하거나, 나에게 도움이나 구원의 손길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도 모자라서 나를 나쁘고, 돼먹지 못한 잡스런 여자에 비유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남자의 혼과 기를 다 빼먹는 요물이나, 소위 꽃뱀이라 불리는 악녀에 해당하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하더라. 그렇게 취급하는 인간들에게 관심을 끄고 살아야 하는데, 나는 내 친구들, 즉 부처들과 보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인간사에 관심을 완전히 끊을 수가 없어서, 간여하게 된다. 부처들과 보살들이 인간들의 기도, 요청이 너무 많아서 다 듣기 힘들다고 내게 하소연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한테 부탁하는 일도 아닌데, 왜 내가 그런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냐고 항변했지만, 부처들과 보살들이 격무에 시달리는 모습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보는 것도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기에, 또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오늘도 극락의 아름다운 뜰을 거닐고 있는데, 한 부처가 날 찾는다.

“무슨 일이야?”

“구미호님, 아, 글쎄, 지금 아미타부처님의 호출이 있어서, 급히 가봐야 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천계의 시간은 인간계 시간과 다르잖아요. 거기 갔다 오면 인간계는 적어도 100년이 지날 테고, 그럼 내가 돌보는 인간은 죽고 말 거예요. 이 인간 좀 저 대신 봐주시면 안 될까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아이, 구미호님, 말씀만 그럴 거면서. 항상 잘 도와주시잖아요. 불쌍한 중생을 위해 아니, 절위해 좀 도와줘요. 거울의 방, 38번 거울이에요. 바로 가서 봐주세요.”

나는 할 수 없이 또 거울의 방, 즉 인간계를 내려다보는 거울 중 38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니, 가난한 집에서 여자가 난산 중이었다. 보아하니 시골 농부의 아낙 같은데, 남편은 일하러 갔나 보네, 처가 혼자 애를 낳으려고 애를 쓰고 있군, 부처의 부탁은 저 아낙을 순산시켜 달라는 건가? 어디 보자. 아낙의 기가 약해, 저 상태로는 아기도 어미도 죽고 말겠군. 이런 너무 늦었어. 출혈이 심해. 좀 빨리 불렀어야지. 이미 저 아낙은 살길이 없어. 그럼 애라도 구해야 하는데, 누가 좀 와줘야 하는데. 어디 보자. 사람들을 부를 방도가 없나? 애를 많이 낳아본 여자가 필요한데...

나는 급히 인간 여자의 모습으로 둔갑을 하고 바로 내려갔다. 산속 농막이라 주변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바람과 비가 새는 농막 안에서 어미는 마지막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아! 누구신지? 저 좀 도와주세요.... 아기가 나오려 하는데, 제가 힘이 다 빠져서, 이대로는....”

“조용히 하시게.” 나는 여자의 배에다 기를 불어넣고, 마지막 힘을 쓰게 해 주었다.

“응애!” 

우렁찬 소리와 함께 사내아이가 나왔다. 하지만 아기를 어미에게 안겨주는 순간 어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바로 숨을 거뒀다. 나는 고뇌에 빠졌다. 이 일을 어쩌누? 아기는 구했지만, 어미는 구하지 못했어. 곧 아기 아버지가 들어 올 테고, 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여보! 나 왔소.”


한 남자가 의원을 데리고 달려 들어왔다. 나는 아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남편인 남자와 의원은 쓰러진 아낙을 먼저 보았다. 아낙의 맥을 잡은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울부짖었다. 나는 아기를 안은 채 머쓱해져서 어쩔 줄 몰라서 그냥 서 있었다. 의원이 날 보고, 아기는 무사한가 물었다. 나는 사내아기고 건강하다고 대답해주었다. 의원은 울부짖는 남자를 보고 그만 가겠다고 하고 농막을 나갔다. 바람이 들이치는 농막에서 나는 아기를 안고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 이보게. 자네 처는 구하지 못했네만, 자네 아들은 내가 살렸네. 아들을 봐서라도 정신을 차리시게.”

“아, 할머니. 감사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군요. 제 아내는 구할 수 없었던 건가요?” 눈물범벅이 된 남자는 계속 흐느끼면서 꾸벅 절을 했다.

“내가 왔을 때, 자네 처는 이미 출혈이 너무 심한 데다가 기운이 다 빠져서 아기까지 위험한 상태였어. 내가 아들은 겨우 살렸네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건지요? 제 처와 친분이 있으신 분이신가요?”

“응?” 

아차차,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는데, 나도 너무 급한 상황이라 내가 직접 내려오고 말았어. 뭐라 둘러대지? 주변에 민가가 하나도 없어서 그만 이런 사단이......

“아, 자네 처와 먼 친척 할미 되는 사람일세. 어찌 소식을 듣고 보러 찾아왔네만. 이리될 것까지는 몰랐네.”

“아예, 그러셨군요. 친척 할머니 되시는군요.”

“그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아기가 먹을 젖을 구해야 하네. 그리고 어디 보자. 기저귀감은 준비가 되어있나?”

“제 처가 준비해뒀을 겁니다.”

“그래? 그럼 아기를 씻겨야 하니 물을 좀 데워 오게.”

아기 아비가 물을 데우러 간 사이 나는 겨우 숨을 추스르며 아기에게 입힐 옷과 기저귀감을 찾았다. 과연 어미가 준비를 해뒀다. 그런데, 당장 뭘 먹여야 하나. 내가 젖을 물릴 수도 없고, 쌀로 미음이라도 끓여서 먹여야겠군.

“이보게. 자네, 아기는 어떻게 키울 생각인가? 이 산속에서 애를 키울 순 있나? 젖어미도 구해야 하고, 안되면 쌀로 미음이라도 먹여야 하는데, 그것도 계속 먹일 순 없어. 영양실조로 애가 제대로 크지를 못해. 마을로 내려가는 게 어떤가?”

그런데 아기 아비가 갑자기 눈을 번뜩이더니 칼을 내 목에 겨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아무래도, 수상해, 내 처는 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해서 일가친척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는데, 나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대역죄를 뒤집어쓰고, 산속으로 숨어 살고 있는데, 도대체 할망구는 누구야? 어디서 우릴 잡으려고 보낸 첩자가 분명해.”


이런.... 망할.....

그 부처의 말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역시 인간은 배은망덕해. 이 구미호님이 간여할 것이 아니었어. 나는 빙그르르 돌아서 다시 구미호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외쳤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네 처가 다 죽어가서 내가 직접 구해주러 왔건만, 은혜를 이리 갚아? 천벌 받을 놈아. 네 아들을 키울 형편도 안 되는 것 같으니 내가 데려가겠다.”

나는 애를 안고 극락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 부처를 찾아가서 꾸짖었다.


“아기는 네가 책임져!”


화과산 돌원숭이


김진미



나 아름다운 백여우, 구미호. 오늘도 극락의 아름다운 정원에 물을 주면서 꽃들을 가꾸고 있다. 역시. 우리 정원이 최고야. 물론 내가 정성을 들이고 있긴 하지만,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멋지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뭐. 나는 흐뭇해하면서 꽃과 나무들을 둘러본다. 그리고 9,000년마다 열리는 반도복숭아, 즉 예전에 손오공이 다 훔쳐 먹었던 그 복숭아나무를 특별히 관리하고 있다. 그 망할 원숭이 놈, 다시는 여기 근처도 못 오게 하겠어. 오기만 해봐라. 내 꼬리 아홉 개의 신력을 다 사용해서라도 원숭이 놈을 없애버리겠어. 관세음보살님이 아무리 사정해도 절대 용서치 않을 거야. 가만있자. 이제 그놈이 훔쳐 먹은 지 곧 9,000년이 되어 가는군. 이제 곧 복숭아가 열리겠군. 흐뭇...

“구미호님! 부르셨어요?”

“그래, 팔미호, 칠미호, 육미호, 오미호, 사미호, 삼미호, 이미호, 일미호 그래, 다 모였군.”

“무슨 일로 저희를 부르셨나요?”

“이제 곧 반도 복숭아가 열린다. 9,000년 만이지. 이런 경사스러운 날 액이 끼지 않도록 우리 여우들이 힘을 합쳐서 복숭아를 지켜야 한다. 신장들이 지킨다 해도 영 미덥지가 못해. 알겠니? 우리 아홉 종의 여우가 동서남북 사방팔방 눈을 부릅뜨고 지켰다가 그 망할 화과산 원숭이가 숨어들면 바로 잡아다가 내 앞에 대령해라.”

“예, 구미할머니, 그런데 그 화과산 원숭이는 둔갑술이 능한데, 혹시라도 못 알아보면 어쩌죠?”

“일미호야. 너는 아직 어리고, 꼬리가 하나뿐이라 신력도 부족해서 못 알아볼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우리도 다 둔갑을 하지 않니? 너라면 그 망할 원숭이가 어떤 모습으로 둔갑을 할지 생각을 해 보렴.”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구미할머니”

“얘들아, 잘 생각을 해 보자. 그 망할 원숭이가 제 털을 잔뜩 뽑아다가 제 분신을 수없이 만들어서 우리를 현혹시킬 수도 있다. 진짜 원숭이를 가려낼 방도를 찾아야 한다.”

“구미할머니, 그럼 우리도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복숭아나무 주변을 지키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이 정원에 들어오는 것은 신장들이 막겠지요? 못 막더라도 우리는 복숭아만 지키면 되잖아요?”

“좋은 수가 있다. 이 할미가 관세음보살 모습으로 둔갑을 해서 복숭아나무 앞에 서 있으마. 너희들은 불경을 들고 주변에 숨어 있다가 원숭이가 나타나면 불경을 외워서 금고아를 조여라. 제아무리 날뛰는 놈이라도 금고아가 죄면 꼼짝 못 할 거다. 그 후에 관세음보살님께 사정을 말씀드리면 되지 않겠니?”

“그런데 분신들도 꼼짝을 못 할까요? 진짜만 꼼짝 못 할까요? 혹시라도 움직일 수 있는 놈이 복숭아를 따 가면 어떡하죠? 구미할머니, 우리는 손오공처럼 수십, 수백 마리로 분신술을 쓸 순 없나요? 원숭이 마릿수만큼 우리도 숫자를 늘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일대일로 붙으면 대결할 만할 텐데...”

“글쎄다. 이 할미는 아홉 마리까지 분신술을 쓸 순 있지만, 꼬리개수 만큼만 분신을 쓸 수 있으니, 너희들은 각자 최대로 한다고 해도.... 일미호 넌 분신을 쓸 수도 없구나. 어쩐다....”

이리저리 방도만 구상하다가 시간이 흘러 결국 복숭아가 열리고 말았다. 모든 극락계에서 기쁨의 잔치를 열고 다들 복숭아나무를 보러 모였다. 하지만 우리 여우들은 모습을 숨긴 채 복숭아나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관음보살모습을 하고 서 있었는데, 저기서 초파리 떼가 몰려오고 있다. 이런, 원숭이 놈들이 초파리 떼로 둔갑을 했군. 정말로 온 거야? 혹시나가 역시나네. 결국 훔쳐 먹으려고 왔구나.

욍욍욍욍.... 초파리 떼들이 복숭아 주변에 모였다. 그때 여우들이 불경을 들고 금고아를 조이는 주문을 외웠다. 그런데 이럴 수가! 여전히 초파리 떼들은 각각의 복숭아에 붙어서 복숭아를 갉아 먹고 있었다. 낭패다. 주문이 듣질 않아.

“얘들아 어서 저 버러지들을 잡아라.”

“하지만 할머니, 복숭아에 붙어있어서 약을 뿌릴 수도, 불을 지를 수도 없어요.”

나는 급해서 진짜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러 날다시피 달렸다.

“관세음보살님! 화과산 원숭이들이 죄다 복숭아를 먹고 있어요. 금고아가 작동을 안 해서 주문도 먹히지 않아요.”

“이런 구미호야. 1,000년 전에 내가 그만 금고아를 빼주었구나. 이런 일이 생길 줄 미처 몰랐다. 금고아가 없는 손오공은 막을 방도가 없어.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금고아를 빼주시면 어떡해요? 이번에도 복숭아는 그 원숭이 놈들이 다 먹는 거예요?”

이때 석가모니부처님이 손바닥으로 장풍을 보내시어 복숭아나무에 붙은 초파리 떼를 날려 보내셨다. 그리고 거대한 방충망으로 초파리 떼들을 다 잡으셨다. 극락계의 복숭아는 벌레에 먹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제대로 성한 복숭아가 없었다. 복숭아 잔치를 벌이려고 귀빈들을 다 초대했건만, 벌레 먹은 복숭아를 어떻게 대접한단 말인가? 우리는 복숭아나무 아래서 분통이 터져서 씩씩대며 말했다.

“이번엔 저 원숭이 놈을 절대 용서하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화과산 원숭이 놈이 제 분신들까지 이용해서 복숭아를 전부 망쳤어요. 그리고 저 초파리 중 진짜는 어떤 놈이에요?”

석가모니부처님이 방충망 속에 벌레들을 자세히 살피시더니

“이런, 분신은 없구나. 전부 진짜 화과산 원숭이들이야. 얘들 이번에 화과산에서 새로 태어난 놈들이구나. 이럴 수가 이제 손오공이 수천, 수만 마리란 말인가? 화과산에서 이렇게 많이 원숭이가 태어날 줄 누가 알았겠니? 안 되겠다. 화과산을 없애고, 더 이상 돌원숭이가 태어나지 못하게 해야겠구나. 그리고 금고아를 빼준 관세음보살님은 책임지고 금고아를 모두 채우시게, 나는 화과산을 없앨 테니.”

우리 여우들은 화과산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방충망 속의 벌레들에게 각각 금고아가 새로 채워지는 모습도 보았다. 이 버러지들, 한 마리도 지긋지긋한데, 대체 몇 마리나 되는 거야? 이건 정말 감당이 안 돼. 나는 반도 복숭아를 한 번도 못 먹었는데, 이 버러지들은 이번에도 복숭아를 독차지하고, 정말 용서가 안 돼.

“관세음보살님, 금고아 단속 잘 해주세요. 그리고 저 많은 버러지들은 다 어떡하실 거예요?”

“구미호야, 이번의 금고아는 고통만 주는 것이 아니야. 분신술을 쓸 수 없게 하는 거야. 이놈들은 이제 원숭이가 아냐. 영원히 초파리야. 그리고 이 방충망은 절대 찢어지지 않아. 영생불멸의 복숭아를 먹었으니 이 방충망 속에서 영생하게 될 것이다. 나도 더 이상은 봐줄 수가 없구나.”


일미호의 하루


김진미



나는 백여우계의 막내에 해당하는 일미호다. 요전에 화과산 원숭이들이 또 복숭아를 망쳐서 지금 결계가 쳐진 방충망 속에 갇혀서 벌을 받고 있다. 영생불멸 초파리의 벌을.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손오공들은 능력도 출중하고 굳이 복숭아를 먹지 않아도 오래오래 살 텐데, 굳이 그 많은 복숭아를 다 망쳐야 할 이유가 뭐냔 말이다. 구미할머니는 정말 노발대발하셔서 이를 부득부득 가셨다. 이번엔 관세음보살님도 용서 안 하신다고 하신다. 자업자득, 이제 화과산도 없으니, 더 이상 돌원숭이는 태어나지 않겠지? 이런.. 이럴 때가 아냐. 오늘은 승급시험이 있는 날이다. 수련의 성과가 제대로 나와야 할 텐데, 1,000년마다 승급시험이 있다. 승급시험에서 탈락하는 여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내가 이번에 승급이 되면 이미호가 된다. 그러면 일미호는 없어지는 건가? 그건 잘 모른다. 백여우 계에서 꼬리개수는 중요하다. 그게 등급이고 신력의 크기를 알려주는 거니까. 하여튼 시험장에 가야지. 아! 구미할머니 이하 모든 여우 선배들이 다 오셨네. 다들 시험 감독이신 건가.

“일미호야.”

“네, 구미할머니.”

“오늘은 너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구나. 드디어 이미호가 될 수 있겠어. 그동안 수련하느라 수고 많았다. 그래. 기분은 어떠냐?”

“글쎄요. 요전에 초파리 떼들에게 당한 후로는 정신이 나가서, 수련에 집중... 못했어요.”

“저런. 그러면 안 되지. 너에게 있어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 처음으로 꼬리가 새로 생기는 날 아니냐? 첫 이미호가 되는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 거야. 그 이후로 삼, 사, 오, 륙, 칠, 팔, 구미호가 되는 것은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된단다. 그런데, 꼬리가 새로 생길 때, 힘이 곱으로 능력이 두 곱으로 커진단다. 그건 알고 있니?”

“아직 꼬리가 더 늘어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럼, 삼미호 선배님은 세배로 능력이 커지는 건가요?”

“아냐. 이미호는 두 곱으로 커지지만 삼미호는 여덟 배로 커진단다. 제곱수로 커지는 거야.”

“와우, 그러면 할머니는 2의 9의 제곱으로 신력이 커진 거예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2의 9승이니까 512배인 건가? 그 신력은 막 구미호가 되었을 때 얘기고, 그 이후로도 계속 신력이 커지고 있지. 9,000살 이후로 지금까지 신력이 커지는 거지. 줄지는 않았으니까. 숫자로 계산하기 어렵구나.”

그렇다. 나는 오늘 2,000살, 즉 이미호가 되어야 하는 날이다. 그럼 갓 태어난 백여우들은 꼬리가 없냐고? 그건 아니다. 꼬리 모양만 있고, 신력이 깃들지 않아서 능력이 없을 뿐이다. 그냥 백여우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계에서는 단순한 백여우도 요물로 취급한다. 적어도 인간들보다는 능력이 있으니까. 나도 1,000년 전에 신력을 처음 받았다. 그때 비로소 일미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일미호는 둔갑술 정도는 한다. 분신술은 쓰지 못하지만 이제 이미호가 되면 내 분신 하나를 만들 수 있다. 내 후배 여우들, 즉 무능력자들은 제법 있지만 일미호를 부여받으려면 1,000년의 수련과 함께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물론 나도 오늘 시험에 통과해야 이미호가 된다. 지금까지 승급시험에서 탈락한 여우는 없었다. 부디 나도 합격하기를......


우선 지필고사.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첫 번째, 어문학인가? 천상계의 모든 언어와 문학은 필수과목이고, 그뿐 아니라, 인간계의 언어 중 2가지를 골라서 시험을 본다. 나는 한국어와 중국어를 선택했다. 과연 필수과목인 천상어문학은 수준이 너무 높다. 다들 부처와 보살님, 신들이니 수준이 다들 너무 높다. 그리고 이 많은 문장과 서정시, 서사시, 소설, 수필, 희곡들까지, 하여튼 인간들보다 훨씬 수준이 높고, 분량도 많고 함의된 뜻도 다 파악해야 하고, 정말 어렵다. 으음, 역시나, 어렵네. 80점 이상 받지 못하면 다른 과목을 만점 받아도 과락이다. 이미호가 되는 길은 무척 어렵구나. 최초로 탈락한 여우가 될 순 없어. 어떻게 해서라도 합격해야 해.

휴우, 이제 선택과목인 한국어와 중국어, 역시 80점 이상을 받아야 해. 한국어는 글자는 쉬운데, 어휘가 다양하고, 어순이 독특해서 지구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에 속하는 말이지. 다들 글자 쉽다고 쉽게 선택하고는 그 뒤로 머리를 쥐어뜯게 되지.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어휘와 지방 사투리들까지, 땅은 좁은데 사투리는 어찌 이리 다양한 거야? 특히 제주도 방언은 완전 외국어야, 외국어. 그리고 중국어는 또 어떤가? 인간계 중에서 가장 많이 쓰는 언어라고 해서 선택했는데, 중국에 한정된 언어인 데다가, 젠장, 한국어와 반대로 글자 수가 셀 수가 없이 많아. 우리 백여우들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이렇게 글자 많은 언어는 인간계에서도 최고수준이다. 게다가 땅이 넓어서 지역 방언 역시 다 다르고, 억양 또한 4성 억양 발음도 주의해야 하고, 북경어만 한다고 의사소통이 되는 건 아니야. 광동어 정도는 기본으로 숙지해야 해. 광동지역, 즉 홍콩 주변이 잘 나가는 곳이니까. 으아! 이제 한 과목 시험 봤는데, 아직 몇 개나 남은 거지?

2교시 수학시험. 왜 백여우가 수학시험을 봐야 하는가? 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 백여우 족들은 인간들보다 모든 부분에서 더 뛰어나야 한다. 어떤 인간으로 둔갑해도 능히 처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즈 수학상을 받을 수준까지는 되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이미호에게 그 정도 수준까진 요구하진 않겠지만, 구미할머니는 모든 수학의 극한 수준까지 통달했다 한다. 그래도 신인데, 신의 수준과 인간의 수준은 감히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여튼 이미호의 수준은 인간계 최고 수학자와 수학 교수보다는 뛰어나야 한다. 음, 대수, 기하 다 어렵네. 내가 수학 머리가 없는 건가? 아냐. 시간 내에 다 풀 수 있어. 이까짓 것!!!

3교시, 과학시험. 수학 문제 푸느라 머리가 지끈지끈한데, 과학도 생물, 화학, 천문학, 물리 4개를 본다. 인간들은 아직 과학의 수준이 뒤떨어져 있어서, 우주여행도 못 하고, 우주의 신비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차라리 인간계의 역사로 볼 때, 고대 수메르 시대와 그 이전, 음, 지구의 구약성경 시대 이전이 오히려 더 발달했던 것 같아. 그때는 물론 지구인이 아니지만, 우주인들이 지구에 개인 우주선을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지구인들은 노예로 부리던 시대, 차라리 그 우주인들이 계속 지구를 다스렸다면 지금 지구는 우주선을 타고 옆집 마실 다니듯이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을 텐데, 그 우주인들, 왜 갑자기 지구에서 철수를 해버렸는지, 결국 그 바람에 지구는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가서 발전하는데 꽤 오랜 세월을 낭비하게 되었지.

4교시, 천상사와 인간사 즉, 역사시험. 천상계는 필수이고, 인간 역사 또한 필수이다. 지구인들의 역사, 즉 지구의 탄생 이후로 지금까지, 전부 다 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사는 지구의 역사 중에서는 매우 작은 부분에 해당하지만, 그래도 인간이 지구의 중심이니까, 인간사 중심으로 역사시험을 본다. 하지만 늘 인간사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인간들은 정말 너무너무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무지하고, 사악해서, 지구에 두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그리고 자기네들이 만든 종교들, 우리가 보면 하나같이 하찮은 종교들에 목숨을 걸고, 그 하찮은 것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누명을 씌우고, 역사를 조작하고 문화재와 자연계를 파괴한다. 지구가 아깝다. 인간들에게 지구는 너무 과분하다.

5교시, 지구지리, 인간사회, 인간법 즉, 사회과학 시험이다. 이것들은 그냥 달달 외우면 되는 거니까. 우리 백여우님은 두뇌가 뛰어나고 용량도 무제한이니까, 그냥 한번 읽으면 다 외워지고 잊어먹지도 않으니까. 쉽게 패스.

6교시, 음악, 미술, 건축 예술시험. 천상계에서는 늘 음악이 흐르고 있고, 이 음악은 단 한 번도 같은 곡을 연주하지 않으니까, 매번 예술의 신들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연주한다. 우리 백여우들도 그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하니까, 매일매일 작곡을 한다. 단 수준은 다른 신들보다 낫다고 하기 어렵지만, 이제 일미호 수준이 이미호의 수준의 음악은 만들고,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미술, 천상계에는 인간의 말로 인테리어가 호화찬란하고, 이 넓은 지역에 같은 인테리어는 단 한 군데도 없다. 그리고 매일 원하는 대로 바꾼다. 자기 스타일로,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건축과 인테리어, 함께 미적 감각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림, 도자기, 공예품 역시 모든 미술의 기본은 알아야 한다. 물론 여기서 기본은 인간계에서의 최고수준의 예술가보다 뛰어나다. 나도 음악적 감각은 있는 편이다. 미술 감각보다는.

7교시, 둔갑술, 달리기, 날기, 수영, 숨 참기, 높이뛰기, 넓이뛰기, 즉 인간들이 하는 체육을 기본으로 무술, 기공, 호흡법, 격투기, 창술, 검술, 궁술, 봉술, 사격 등을 한다. 나는 지력이 체력보다 나은 편인데, 항상 체육 시간이 힘들다. 역시나, 격투기에서 조금 걱정된다. 둔갑은 잘하는데, 격투기에서 80점이 안 될까 봐 걱정이다. 요즘 인간들도 격투보다는 총을 더 잘 쓰더니만, 동체 시력만 빠르면 총구만 잘 봐도 총알은 피할 수 있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시험을 봐야 하나? 시험관들이 옛날 분들이시라 신세대의 유행을 잘 모르시나 봐. 어휴, 힘들어 죽겠네.....


“이미호!”

아.... 합격했구나. 눈물 난다.

“이미호야. 승급을 축하한다. 그리고 성적도 아주 좋아. 지필고사는 평균 90점이 다 넘었고, 과락은 물론 없고, 7교시 체력시험은 둔갑술은 100점, 기타 무술과 창, 검, 궁술은 85점, 사격은 95점이구나. 넌 고전 무술보다는 신세대 총이 더 잘 맞는 것 같구나. 하긴 요즘은 총, 대포, 폭탄, 원자탄을 다루는 시대이긴 하니까, 네가 더 잘하는 걸지도 모르겠구나. 축하한다. 이미호, 이제 곧 아기 여우도 일미호 승급시험을 봐야 하니까, 그때 너도 시험관으로 들어오너라.”

“네, 할머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꼬리는 언제 새로 생기나요?”

이 말이 끝나자마자 엉덩이가 근질근질 열이 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폭발하듯이 꼬리가 생겼다. 앗! 뜨거....엉덩이가 화끈화끈... 그리고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땀이 비 오듯 한다. 그리고 온몸에 기운이 뻗치고, 눈이 더 밝아지고, 귀가 더 열리고, 점프력도 속도도, 그리고 머리도 더 맑아지고, 이럴 수가. 이미호가 이 정도라니. 그렇다면 구미할머니의 신력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상상할 수가 없겠구나.

“감사합니다.”

나는 온몸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크게 외치고는 하늘로 점프를 하면서 마구 달렸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삼미호의 고민


김진미



나, 삼미호, 어제 일미호가 이미호가 되었듯이 나도 승급해서 삼미호가 되었다. 물론 기쁘다. 신력이 8배나 증가했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단지 나에게는 고민이 있다. 사실 나는 구미할머니의 심부름을 하다가 어찌 거울의 방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만 할머니가 38번 거울을 보시다가 인간계로 급히 하강하시는 바람에 나는 나가지도 못하고 할머니가 다시 돌아오시길 기다리면서 심심한 나머지 다른 거울을 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 같은 하급 여우들은 거울의 방에 들어가면 안 된다. 나는 밖에서 기다려야 마땅했지만 그만 옆 39번 거울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거울의 방에는 거울이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그 거울은 각기 지구의 나라별, 시대별로 즉 4차원의 세계가 다 존재한다. 인간계의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배치가 마구 뒤섞여있다. 그래서 웬만한 고급 신들이 아니면 거울의 방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나는 그때 구미할머니가 급하게 거울의 방으로 들어가신 덕분에 할머니가 내게 맡기신 일을 해결하고 그 일을 고하려고 따라 들어갔다가 그만 할머니를 놓치고 마냥 거울의 방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사설이 긴데, 맞다. 이것도 다 핑계이다. 무조건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나는 호기심에 그만 39번 거울을 보게 되었는데, 30번대 거울은 한국의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38번 거울로 사라지시고, 나는 39번 거울을 보는데, 거기서 가녀린 소녀가 정안수를 떠놓고 칠성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기도인가 싶어 목을 빼고 들여다보았다. 그 소녀는 가난한 초가집 앞마당에 소반을 놓고 그 소반 위에 정안수를 떠놓고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마음껏 소리 내어 외쳤다.


“칠성님, 삼신할머니, 부처님, 보살님, 단군할아버님.......”

음, 아는 신은 다 등장하는군, 그래도 우리 여우를 찾는 인간은 역시 없구나. 구미할머니를 찾으면 더 잘 들어주실 수도 있는데, 말은 차갑게 해도 부처나 보살들보다 우리 할머니가 훨씬 인간들을 잘 보살피시거든.....

“부디, 저를 구해주십시오. 저는 최참판댁 소실로 들어가기는 죽어도 싫어요. 아버지가 빚을 얼마나 지셨는지는 몰라도 이자가 원금의 10배가 된다는 건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 빚을 탕감하는 조건으로 날 달라고 하셨대요.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는 거절은커녕 오히려 잘되었다고 기뻐하셨어요. 날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는 그 늙은 영감태기에게 팔려가는 건 죽어도 싫어요. 제가 혀 깨물고 죽는 걸 바라시는 게 아니라면 제발 날 좀 구해주세요. 그래도 우리 집은 몰락하긴 해도 양반 가문인데, 제가 이대로 도망이라도 가면 아버지 어머니는 빚 때문에 노비로 팔려 가시겠지요? 그래서 도망도 못가요. 하지만 저 역시 그 집에 팔려가는 건, 저도 못해요......아으흐흐흑흑”


아, 저럴 수가.... 너무 안 되었다. 보아하니 저 소녀의 아비가 무능력하여 딸자식을 팔아넘기려는 모양인데, 양반이면 뭘 해. 기본 자존심도 없고, 능력도 없고, 자기 자식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다니 그게 아비로서 할 짓이냐? 어떻게 저 소녀를 도와줄 방도가 없을까? 구미할머니께 의논하고 싶지만, 거울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는 기본 규칙을 어긴 것을 고해야 하고, 그러면 처벌을 받아야 하고, 그 새 그 소녀는 팔려가겠지? 나는 거울을 통해 인간 세상으로 가는 법도 아직 배우지 못했는데,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그 소녀를 여기로 데려오고 싶다. 그러고 보니 구미할머니께서도 저번에 38번 거울로 가셔서 웬 사내아기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지 않았나? 덕분에 한 부처는 그 아기를 키우느라 고생하고 있다지? 아, 참. 그 부처에게 의논해볼까? 그래도 사람 아기를 키우고 있으니, 소녀 하나쯤 더 돌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이대로 두면 저 소녀는 늙고 탐욕스럽고, 색만 밝히는 영감에게 잡아 먹히거나 아니면 정말 혀 깨물고 자진하겠지?


“삼미호?”

“네? 칠미호님, 부르셨어요?”

“아니, 무슨 생각이 그리 깊기에 내가 계속 불러도 모르는 거냐?”

“아, 그러셨어요? 못 들었어요. 제가 고민이 좀 있어서....”

“고민? 뭔데? 뭔데?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칠미호님께서 아시면 다치실 거예요. 그래서 고하지 못해요.”

“뭐야? 내게 고하면 내가 다친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도 나름 나도 고급 여우신인데, 내가 다칠 정도인 거야?”

“......”

“삼미호, 너 왜 그래? 내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미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너 말 안 하면 내가 너에게 벌을 내리겠다. 대선배를 무시한 죄로. 알겠어?”

“실은.....”

“뭔 뜸이 이리 길어? 당장 고하지 못할까?”


칠미호님이 소리를 버럭 지르셨다. 나는 움찔하며,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다 고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 소녀가 곧 팔려가게 되었다고? 그래서 그 소녀를 구하고 싶다고?”

“네, 칠미호님....하여튼 제가 거울의 방에 들어간 것부터가 잘못인데 또 거울을 들여다본 것 또한 잘못이고, 그리고 해결도 못 할 일을 짊어진 것도 잘못이에요. 저는 자수하고 벌 받으러 갈 테니, 칠미호님께서 39번 거울 속의 소녀를 구해주세요. 저는 여우 감옥으로 자수하러 갑니다.”

“야! 감옥 갈 때 가더라도 일은 해결해 놓고 가야 할 것 아냐? 나한테 덤터기 씌우고 너 혼자 도망가는 거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요. 거울 속으로 들어갈 수도, 도움을 줄 방법도 모르겠고, 시간은 없고, 적어도 칠미호님은 거울의 방에 가실 수는 있지 않나요? 혹시 거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시는 건가요?”

“그래. 나는 거울의 방에는 들어가도 거울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해.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건 구미호급 백여우만 가능한 일이야. 그래서 인간들은 구미호만 알지. 팔미호 이하의 여우는 모르는 거야. 젠장. 이 칠미호님이 무지렁이 여우 취급을 받다니. 그것도 참을 수 없어. 역시 구미호님께 고해야겠어. 우리가 어쩔 수가 없어. 어서 가자. 앞장서. 네가 시작한 일이니까.”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구미할머니께 갔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다 조아리고 석고대죄를 했다.


“구미할머니, 제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그러니 벌은 저에게만 내리시고 부디 39번 거울 속 소녀를 구해주세요.”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칠미호. 너는 이 일에 대해 뭔가 아는 거냐?”

“네, 구미호님. 실은 저도 삼미호에게 들어서 알게 된 겁니다. 그렇지만, 일각이 급하고, 그 소녀가 곧 팔려가거나 자진할 것 같아요. 저 역시 거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구미호님께서 어서 구하러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인간사에 함부로 간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구미할머니, 저번에도 한 아기를 살려서 여기까지 데려오셨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는 그 망할 말단 부처가 내게 급하게 떠맡긴 일이라 어쩔 수 없었던 거고. 그런데 삼미호, 너 그건 또 어떻게 알았니?”


으윽! 할머니가 눈을 부릅뜨시니 무서워 죽겠네. 덜덜덜덜.....


“저기 실은 그때 저도 거울의 방에 들어가서 할머니를 찾다 그만 39번 거울을 들여야 보게 된 거예요.”

“뭐야? 그걸 말이라고 해? 너 같은 말단 여우가 왜 거울의 방에 들어갔어?”


움찔....덜덜덜덜.....


“저기 구미호님. 그건 나중에 벌을 주시고, 우선은 급하니 소녀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칠미호, 넌 또 왜 그러냐? 인간사에 간여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너도 알만 한 나이 아니냐? 그리고 인간은 구해줘도 고마운 줄을 몰라. 그리고 은혜를 원수로 갚지. 나도 늘 도와주고 뒤통수를 맞아서 인간이라면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 이번에 그 소녀를 구해준다고 치자. 다음엔 또 어떡할 거냐? 계속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게, 저 이대로라면, 그 소녀가 죽을지도 몰라서...”

“할머니, 제가 다 책임지고 벌 받을 테니, 그 소녀만 좀 살려주고 나서 벌주시죠. 네?”

“시끄럿! 닥치지 못해? 안 되겠다. 칠미호, 너는 삼미호를 여우감옥으로 이송해라. 그리고 너도 한 달 동안 금식하면서 반성하도록 해라.”


으흐흐흑. 나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칠미호님께 끌려서 여우 감옥으로 갔다. 그리고 모든 신력을 봉인된 채 여우 감옥에서 벌을 받고 있다. 그 소녀는 어찌 되었을까? 정말 늙은 영감태기에게 잡아 먹혔나? 아니면 자진했을까? 그리고 그 소녀의 부모는 빚은 탕감 받았나? 울다가 지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정말 내가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지? 며칠이나 잔 거야? 대체?


“삼미호?”

“아? 칠미호님. 여긴 웬일이세요? 칠미호님이 오실만한 곳이 못 되는데, 어서 가세요. 걱정해서 와주신 것만큼은 정말 감사합니다.”

“아냐. 너 궁금해할까 봐 알려주려고 간수를 매수했어. 잘 들어. 삼미호. 실은 너 여기 들어오고, 나는 금식하러 들어간 새, 구미호님이 39번 거울을 보러 가셨대. 역시, 구미호님. 말씀만 그러신다니까. 그런데, 그때 이미 소녀가 최참판댁으로 들어갔대. 안 갔으면 부모가 잘못되었겠지. 그런데 말이야. 최참판이 그 소녀를 보고는 세상에 이렇게 못생긴 딸인 줄 알았으면, 빚 탕감하지 말고, 그냥 악착같이 돈을 받을 걸 하고 후회했다는 거야. 소녀 부모가 좋아라고 했다고 했지? 그 소녀 어려서 마마를 앓았는데, 얼굴뿐 아니라 전신에 마마자국이어서 어디라도 시집을 보낼 수 있는 상태가, 즉 몰골이 말이 아니었대. 아니 넌 대체 소녀의 얼굴도 자세히 안 봤니? 얼굴도 엉망진창이었다는데?”


아!!! 그럴 수가. 나는 신력이 약해서 시력도 좋지 못하고, 게다가 달밤에 기도하는 소녀의 뒷모습만 보고 소녀의 기도 소리만 들었다. 소녀의 부모가 기뻐한 이유가 다 있었구나. 부모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어. 젠장...... 역시 난 애송이야.......흑.


여우유치원


김진미



여기는 여우유치원, 나는 아기 여우들을 돌보고 있는 오미호이다. 아기여우들은 1,000살 미만의 여우들로 꼬리는 있지만 신력이 전혀 없는 한마디로 그냥 백여우들이다. 0살부터 999살까지 있다. 우리 오미호는 아기 여우들의 양육과 수련을 도맡아 하고 있다. 사실 아기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1,000년에 걸친 과정 동안 오미호들이 그걸 다 한다. 그래서 오미호를 거쳐야 제대로 어머니의 모성애와 스승의 사랑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이 오미호의 수련과정이다. 아기여우들은 100년마다 한 마리씩 태어나서 지금 10마리가 있다. 각각 오미호 한 마리가 한 마리씩 맡는다. 즉 오미호가 10마리다. 일미호에서 사미호까지는 그런대로 승급이 잘 되지만 오미호부터는 모성애와 스승의 자애를 테스트하는 것이기에 육미호의 숫자부터는 확 줄어서 상급여우인 육, 칠, 팔미호로 갈수록 숫자가 줄고 구미호는 현재 왕 할머니 한 분뿐이시다. 구미할머니는 언제까지 계실지는 모르겠으나 대를 이을 팔미호가 마지막 수련의 대결, 즉 현재 구미호와 목숨을 건 대결 끝에 현재 구미호를 이겨 승리하면 새로 구미호가 등극하고 전 구미호는 대결 중에 사망한다. 즉 구미호는 수명은 무한정이 아니다. 후배 구미호에게 지위를 물려준다는 의미는 생의 종말을 의미한다. 현재 팔미호님은 성격이 느긋하셔서 목숨을 걸고 구미호에 등극하려는 욕심은 없어 보인다. 팔미호님도 한 분뿐이시다. 다음 칠미호님이 팔미호가 된 뒤 구미호님께 도전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우리 오미호에게는 까마득한 이야기라서 대결은 생각지도 않는다. 하지만 지금 구미호님은 정말 역대 최강의 구미호라고 명성이 자자하다. 그러니까 팔미호님도 아예 대결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우리 오미호는 아기 여우들을 각각 한 마리를 맡는데, 내가 맡은 아기는 500살이다. 다들 제 자식 키우듯 한다. 그리고 수업은 오미호 10마리가 각자 잘하는 전공과목 한 과목씩 가르친다. 즉 10과목, 학문뿐 아니라 신체단련, 무술 및 예술 과목을 가르친다. 여우의 가장 중요한 둔갑술은 일미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할 수 있다. 그 전에는 신체와 정신 수련에 집중한다. 그리고 아기 여우들은 아직 성별이 없는데, 일미호가 되면서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 한번 선택한 성별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데, 물론 둔갑술을 사용할 때는 마음대로 둔갑할 수 있지만, 기본 여우의 성별은 평생 간다. 나는 이점도 놀라운 것이 구미호님은 왜 여자 여우를 택해서 지금도 할머니 소리를 들으시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더 낫지 않나? 인간계에서는 할아버지가 권위가 더 있던데, 하긴 팔미호님은 남자시다.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다. 혹 나중에 구미할머니와 팔미할아버지의 세기의 대결, 하아. 누가 승리할 것인가? 그런데 지금으로 봐서는 구미할머니의 신력이 너무 최고정점에 있고, 또 늘 수련과 명상을 하시니까, 당분간 세대교체는 없을 것 같다. 쓸데없는 사설이 너무 길었다. 그런데 내 성별은 뭐냐고? 하하하. 사실은 나도 여자다. 아니, 호호호 라고 해야 하나? 왜냐고? 나는 미모가 너무 특별나게 아름다워서 여자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여자를 선택했다. 하긴 요즘 인간 세상은 남자도 아름다운 세상이라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예쁜 사람들도 많다고 하더라. 우리 천계에서는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다운 경향이 두드러져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미모에 어울리는 여자 여우가 되었다. 그리고 내 미모는 천계에서도 이름이 나서 다들 부러워한다. 물론 여우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남녀성별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들이나 동, 식물처럼 수태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과산 원숭이들처럼 우리도 천계의 최고산에서 100년마다 한 마리씩 태어난다. 여우가 출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지구의 생물들처럼 암수의 역할이 분명하지 않다. 그냥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오늘은 내가 수업을 하는 날이다. 나는 음악 과목을 맡았다. 아기 여우들은 음악을 좋아한다. 아니 여기 천계에서 음악 싫어하는 존재는 없다. 다들 자기 스스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한다. 그리고 어디서나 음악이 흐르고 있다. 나는 특별히 음악 교사이기 때문에 더 많은 곡을 만들고 연주한다. 그리고 지휘한다. 오케스트라라 부르기 어렵지만, 아기가 10마리, 스승 오미호가 10마리이니까. 그래도 20마리가 힘을 합쳐, 연주하고, 20마리가 합창을 한다. 그리고 각자 개인별로 독주 악기를 선택해서 매주 수업시간마다 시험을 친다. 나는 아주 엄격한 스승이라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가차 없이 혼내고, 다시 하게 한다. 밤을 새서라도 새로 완벽할 때까지 시킨다. 아기들은 죽을 둥 살 둥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고, 합주하고, 합창한다. 나도 어떨 때는 마음이 아프다. 아직 아기들인데, 내가 너무 혹독하게 시키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도 아기 수련 시절에 이보다 더 혹독하게 배웠다. 그리고 음악 과목에서 수석 했다. 졸업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혹독하게 하나라도 더 배운 것이 도움이 되더라. 나중에 승급시험에도 유리하고, 대충대충 배운 여우들은 나중에 승급시험에서 과락으로 탈락하는 고배를 마시기 일쑤이다. 나는 우리 아기들이 그렇게 되는 꼴은 못 본다. 그래서 더 지독하게 시킨다. 적어도 내가 가르친 놈들은 다 합격하고 승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지금까지 대위법 수업 중, 4성 푸가를 만들라고 할 작정이다. 분량은 각자 능력껏 하면 된다. 저번 주에 3성 푸가1)를 만들었으니, 기초는 되었으니, 오늘 4성 푸가를 만들고, 다음 주는 5성 푸가를 시킬 예정이다. 그리고 그다음 주는 5성부 이상의 무반주 합창곡을 만들라고 할 작정이다. 천계에서는 동양계 음악만 연주하냐고 착각을 할 수 있다. 적어도 인간들은, 하지만, 천계에서는 적어도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음악은 다 할 수 있고, 더 잘 한다. 인간들의 우매한 수준에 맞춰줄 수가 없다. 이곳에는 고대 원시인 음악부터, 그레고리안 챈트와 같은 단선율 음악, 중세 이후,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다성음악, 그다음 화성음악은 물론, 교향곡, 교향시, 실내악, 독주곡과 같은 기악곡뿐 아니라 가곡, 오페라, 오페레타, 악극, 합창곡과 같은 성악곡도 만들고 연주한다.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의 독일계 음악뿐 아니라, 쇼팽, 생상스, 드뷔시, 라모와 같은 프랑스계 음악, 그리고 엘가와 같은 영국음악, 그리고 러시아 민속음악, 동유럽의 민속음악, 아랍음악, 아프리카 음악, 인도음악, 중국음악, 한국음악(국악이라 불리는 전통 음악), 미국의 재즈, 남미의 원주민 음악 등 지구상의 모든 음악사에 등장하는 음악은 다 한다. 그리고 현대의 팝음악과 같은 대중음악들은 음악사 시간에만 다룬다. 왜냐하면 대중음악은 스승인 내가 가르치지 않아도 이놈들이 자기들끼리 듣고 연주하고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성학 시간에 재즈화성과 현대화성을 가르치고 있다. 현대 팝음악도 제대로 만들라고, 이런 종류는 이론수업으로만 가르치고, 연주와 작곡 시험은 고전음악만 한다.


“여러분, 저번 주에 3성 푸가 제출한 것들을 전부 채점했으니 돌려주겠어요. 대체로 다 잘했어요. 오늘은 4성 푸가를 만들어 봐요. 성부가 하나 늘었으니 분량도 조금 더 늘겠죠? 그리고 각각의 성부 간에 4도 5도 8도 병행이나 은복이 되는 것은 절대 금지인 것은 잘 알죠? 3도나 6도 진행을 많이 쓰도록 하세요. 가능한 반진행이나 사진행이 되도록 해야 은복에 걸리지 않아요. 선율이 조화로운지, 확인해보고 싶으면 피아노를 사용해도 좋아요. 직접 연주해보면 알기 쉬우니까. 인간의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18세기 푸가를 기준으로 만드세요. 바흐의 푸가를 모범답안으로 여겨도 좋아요. 더 잘 만들 수 있으면 더 좋고. 오늘은 3시간 주겠어요. 시간은 충분하죠? 3시간 이내에 바흐 풍 4성 푸가를 만들어서 제출하세요. 다 한 사람은 제출하고 나가도 좋아요.”


나는 아기들이 제대로 곡을 쓰는지 걸어 다니면서 슬쩍 훑어보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내 담당 여우, 아기 여우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물론 성인들도 꼬리 수로 불린다. 500살이 내 담당 학생이다. 500살 여우는 4성 푸가를 만들라고 했는데, 다음 주에 할 5성 푸가를 만들고 있다. 물론 내심 기쁘긴 하지만, 다른 학생들보다 혼자 진도를 더 나가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공평한 스승이란 어떤 것인가? 모두 수준을 똑같이 하는 것이 공평한 것인가? 아니면 잘하는 놈은 더 잘하게 하는 것이 공평한 것인가? 나도 아기 수련기를 생각해 보면 다른 여우들이 한 곡 만들 때, 나는 24곡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의 오미호 음악 선생님은 나를 다른 여우들 앞에서 망신을 주고, 친구들은 한 곡 만드느라 고생하는데 너는 혼자 잘났다고 24곡을 만들었다면서 점수를 최하점을 주셨다. 그 오미호 음악 교사가 가르친 200년 동안은 나는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내 아름다운 은빛 털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오미호 음악 교사로 바뀌고 나서 나는 날개를 달아서 음악 과목에 최고 점수를 받고 수석 졸업을 했다. 이놈도 내 전철을 따르는 건가? 나는 500살 여우를 살짝 불러서 오늘은 5성 푸가를 쓰고, 다음 주엔 6성부 이상의 복합창곡을 쓰라고 했다. 반주도 복오르간곡으로 쓰라고 했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잘하는 놈은 더 잘하게 하는 것이 공평한 것이다. 어떤 스승과 교사들은 자기보다 더 훌륭한 제자를 만드는 게 싫어서 일부러 더 구박하고, 앞길을 막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청출어람은커녕, 자기보다 더 바보 제자들을 양성해서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어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자신이 돋보이니까. 저보다 잘난 제자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바보 평준화를 만드는 것은 평등이 아니다. 수월성 교육이 더 공평한 것이다. 성적은 어쩔 수 없이 등수가 나오게 되어있다. 이 당연한 것을 지구의 한 지역에서는 성적표도 없애고 등수도 없애고 등급만 나타낸다. 이것이 공평한 것인가? 전부 바보로 만드는 우매한 교육정책일 뿐이다. 나는 내 애제자를 나보다 더 훌륭한 음악가로 만들 생각이다. 청출어람이 내 교육의 모토다.


구미호의 회상


김진미



내 나이 벌써 50,000이 넘었는데, 자세한 나이도 모르겠군. 팔미호 녀석은 너무 느긋해. 나랑 정반대야. 내가 팔미호 시절엔 당시의 구미호님을 따라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건만. 도대체 지금의 팔미호는 너무 낙천적이야. 욕심이 없는 건지. 능력이 안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내 팔미호 시절이 생각나는군. 나는 당시 구미할아버지를 제압하기 위해 혹독한 수련을 하면서 전략을 늘 구상하고 순간순간의 전투를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늘 고민을 하고, 분석하고, 구미호님의 수련과정을 훔쳐보기도 하고,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 일일이 다 체크를 했었는데, 이놈의 팔미호는 한 번도 주변에서 얼쩡거리지도 않고, 질문하는 법도 없고, 따라다니지도 않고, 그렇다고 개인 수련을 또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이 없는 여우인지, 걱정이다. 그래도 내 후계자인데, 마냥 내버려 둬도 될까? 남들은 내가 오래 살고 싶어서 팔미호를 방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내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후계자를 양성하는 것은 내 책임이기도 하니까. 후계자가 미덥지를 못해. 에휴....내가 팔미호 시절 때를 생각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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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호야. 너는 왜 늘 나를 따라다니느냐?”

“구미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를 능가하고 싶으니까요. 어서 수련해서 할아버지와 대결 신청을 하겠어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무공을 늘 살펴봐야 다음 전투에 도움이 되겠죠?”

“이런, 너처럼 적극적인 팔미호는 처음 본다. 나도 너 정도는 아니었다. 내 윗대 구미호님도 여자였는데, 너와는 달랐어. 너는 정말 희귀종이다. 나도 피곤하다. 그만 좀 따라다녀라.”

“아뇨. 구미할아버지. 제가 따라다니면서 수발을 다 들어드리잖아요? 심부름도 하고, 덕분에 편하시지 않나요? 할아버지 잡무를 제가 다 해드리는데, 그런데 구미할아버지. 뭔가 숨겨놓은 비장의 무공이 있으신 건 아니겠죠? 제가 팔미호가 되자마자부터 1,000년 넘게 따라다녔지만, 할아버지의 무공을 다 본 것 같지가 않아서 그래요.”

“으윽, 정말 독종이다. 그래. 숨겨놓은 비급이 있다. 그걸 다 알려달라는 게냐? 너 이 녀석, 아직 나이도 이제 9,000살인데, 그리 빨리 구미호가 되고 싶으냐? 넌 내가 죽는 게 좋으냐? 이 망할 계집애야!”

“아니, 구미할아버지, 말씀이 지나치세요. 인간세계에서는 성차별적 발언이라고 책임질 수도 있어요. 제가 남자였대도 그렇게 말씀하시겠어요? 아니 내 미모가 워낙 찬란해서 여자가 된 건데, 그게 못마땅하세요? 그리고 9,000살이면 구미호가 되어야 할 나이 아닌가요? 할아버지는 몇 살에 구미호가 되셨어요?”

“한 마디도 안 지는구나.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 스토커 같은 녀석. 에잉. 퉤퉤...”


나는 당시에 팔미호가 되자마자 구미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모든 것을 다 섭렵했다. 물론 구미할아버지는 많은 비급을 숨기셨다. 그것도 못마땅했다.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비급 전수를 해줘야 구미호가 점점 발전하는 게 아닌가? 혼자 꼭꼭 숨겨놓고 오래오래 ‘장수 만세’를 할 생각을 하다니. 구미호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오래 살고 싶은 꼰대 영감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하도 스토커처럼 따라다닌다고 구박을 하셔서 하루는 집에서 쉬고 있었다. 나도 휴식을 할 필요도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집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쉬고 있는데, 구미할아버지로부터 전갈이 왔다. 앞으로 한 달 후, 후계자 대결을 할 테니, 준비하라는 전갈이었다. 1,000년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이렇게 들이닥치니 제아무리 간이 큰 나지만 매우 놀랐다. 아니, 이럴 수가. 비급 전수도 안 해주고 대결이라니. 내가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워야 하는 거 아냐? 이 영감태기가 정말 끝까지 꼰대 짓을 하는구나. 나는 바로 구미할아버지께 달려갔다.


“1,000년 만에 쉬는데 하루도 쉬는 꼴을 못 보시는군요. 그리고 갑자기 대결이라니. 비급 전수도 안 하시고,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나는 거품을 물고 대들었다.


“너, 정말 못 말리겠구나. 내가 숨겨놓은 비급이 어디 있냐? 네가 지난 1,000년 동안 다 보고 배웠잖니? 잘 때조차도 옆에서 훔쳐보곤 꿈까지 분석하려 들었으면서. 숨길 수가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나도 이제 지쳤다. 너 같은 팔미호에게 시달리며 계속 사느니 얼른 물려주고 영원한 안식을 얻는 게 낫겠다. 너도 꼭 너 같은 팔미호 만나서 한번 당해봐라.”


아니, 이 영감태기가 끝까지 저주를 퍼부어?


“네네, 저도 그러고 싶어요. 저 같은 여우가 계속 나와야 우리 백여우족이 발전하는 거예요. 저 다음의 구미호는 저보다 더 나은 구미호가 될 거고, 그다음은 더 훌륭한 구미호가 되고 계속 그래야 구미호도 발전이 있죠. 구미할아버지의 말씀을 믿겠어요. 그럼 저에게 숨기신 비급이나 뭐 그런 건 없는 거 확실하죠?”

“지독한 년 같으니라고. 한 달 후에 천계 대운동장에서 진시(辰時)에 보자. 그전까진 나도 1,000년 만에 휴식을 좀 취하고, 정리도 해야 하니, 제발 한 달 동안은 내 주변에 얼씬도 말거라.”

“네, 구미할아버지. 한 달 후, 천계 대운동장, 진시(辰時)에 갈게요. 늦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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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빰빠라빰빰. 뿌우우우우우.....뎅.”


“구미호 승계 대결이 시작됩니다. 귀빈 여러분 이하 백여우들은 모두 착석하십시오.”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팔미호가 대결을 신청해서 이기면 새로운 구미호로 등극하고, 전 구미호는 죽는다. 만약, 팔미호가 패하면 구미호도 팔미호도 죽지 않는다. 한 번에 구미호로 등극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팔미호가 여러 번 도전해서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사실 도전은 팔미호에게는 아무런 손해가 없다. 많이 할수록 좋은 것이다. 나도 단번에 될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될 때까지 해 본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영감님이 정말 비급을 다 노출했을 것 같지도 않다. 오늘 대결을 해 보면 알겠지? 숨겨놓은 비급이 있는지 없는지.


“대결, 시작!”


심판이 종을 울렸다. 천계에서 가장 큰 범종이다. 이 종소리는 하늘 곳곳을 울려 퍼져서 그때까지 잠을 자던 모든 신조차도 잠을 다 깼을 것이다. 나는 긴장했다. 과연 구미할아버지는 어떻게 공격을 하실까? 으잉? 가만히 서 계시는데? 어쩌시려는 거지? 내가 먼저 공격을 해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우선 발차기...나는 날아차기를 했다. 구미할아버지는 가볍게 얼굴만 피해서 내 공격을 무효로 만들었다. 음. 역시 그냥 꼰대가 아냐. 움직임이 허실이 없어. 최소한의 동선으로 공격을 피하시는군. 그럼 다시 장풍 발사! 어라. 이번에도 살짝 옆으로 피하시기만 하네. 아니, 영감님, 계속 피하기만 하면 어떡해요? 나는 수차례 주먹과 발차기, 장풍 등의 공격을 퍼부었지만, 이 영감님, 약 올리듯이 피하기만 하고,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않는다. 나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서 모든 기술을 다 선보였다. 진시에 시작된 대결은 어느덧 미시가 지나고 곧 신시가 되려 했다. 이제 심판과 관객들이 지쳐서 간식을 먹거나 두런두런 잡담을 시작했다. 이 모든 모습에 나는 더 짜증이 났다. 공격도 안 먹히고, 관객의 태도까지 산만하니 집중이 더 안 되었다. 마침내 신시가 지나자 심판이 종을 쳤다.


“그만, 대결은 끝입니다. 팔미호의 패배. 구미호님의 첫 방어전 축하드립니다.”


나는 너무 분하고 속상해서 대운동장 가운데 주저앉아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구미할아버지는 힘든 내색조차도 안 하면서 내게 와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팔미호야. 너의 패인이 뭔지 아니? 넌 욕심이 넘치는데 그걸 상대에게 그대로 노출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네 마음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뚫어 볼 수 있다. 네가 무슨 공격을 할지, 다음엔 무슨 자세를 취할 것인 지까지 네 얼굴에 다 씌어 있으니까. 그리고 지난 1,000년 동안 너만 나를 관찰한 것이 아니야. 나도 1,000년 동안 너의 모든 것을 다 관찰했다. 이제 네 숨소리만 들어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동작을 취할지가 다 읽히는데, 어찌 너에게 질 수가 있겠느냐? 너는 아직 수련이 필요하다. 너는 우선 네 마음을 숨기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구미호는 결코 남에게 속을 들켜선 안 돼.”


아! 번개가 뇌리를 때렸다. 나만 영감태기를 관찰한 것이 아니었다. 영감님 역시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신 거야. 내가 생각이 짧았다. 과연....... 역시 구미호는 그냥 구미호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패배를 인정한다.


“구미할아버지.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어요. 저는 당분간 동굴 속에서 면벽 수행을 하겠어요. 물론 금식하면서요. 제가 동굴에서 나오면 그때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오늘 대결을 받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면벽 수행이 끝난 후 재대결에서 나는 구미호가 되었다. 그때 구미할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띠시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눈을 감으셨다.



거울의 방


김진미



천상계에서 가장 내밀한 곳 중의 하나인 거울의 방은 셀 수 없는 많은 거울로 가득 차 있다. 그 거울은 깨어지는 거울은 아니다. 지구의 한 지역과 그 시대를 비춰주는 장치이다. 이 거울은 시대별로, 지역별로 구별되어 있다. 30번대 거울은 한국의 조선 후기에 해당한다. 전 지구를 다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이나 미국의 과거, 현재, 미래도 볼 수 있다. 사차원의 공간으로 시간과 공간을 다 지배한다. 거울의 방은 최상급 즉, 6미호급 이상의 백여우족과 부처와 보살들이 관리, 감독한다. 단 감독만 한다. 직접 거울 속으로 왕래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부처와 보살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주변 인물을 이용하거나 도와주는 방식을 채택하거나, 인간들의 꿈이나 영매, 즉 무당과 같은 무속인을 통해 뜻을 전달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접적으로 간여하는 존재는 나 구미호님뿐이리라. 그것을 아는 부처와 보살들이 나를 이용하곤 한다. 급할 때는 바로 내려가서 처리해야 하니까. 긴급한 경우, 언제 인간들의 꿈속과 무속인들에게 예언을 전해주겠는가? 성질 급한 나니까 바로바로 처리하는 것이지. 그리고 인간들이 도움을 간절히 요청해서 그 의지가 거울을 뚫고 나가서 부처나 보살이나 나에게 전달이 되어야 돕든가 말든가 한다.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는데, 우리가 뭐 하러 힘들게 도와주겠는가? 하급 여우들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는 봐봤자, 속만 태우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어지지는 않지만, 자칫 흔들리거나 자리를 이탈해서 시공간이 틀어지거나 뒤집히는 불상사가 있을 수 있어서 극도로 조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번에 삼미호가 거울의 방에 입실한 일과 39번 거울을 들여다본 일은 중죄에 해당한다. 삼미호는 신력을 봉인 당한 채 100일을 여우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 녀석, 그 일로 충격을 받았는지, 거울의 방 근처도 얼씬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칠미호 녀석이 고새 다 일러서 마마 자국의 처녀 이야기를 삼미호가 다 알고 있더라. 하긴, 나도 오지랖이 너무 넓어서 탈이다. 결국,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 일이 잘 해결되지 않았나? 그 일로 삼미호는 오미호급 이하의 여우들에게 질문 공세를 받으며 유명인사가 되었다. 녀석도 참, 덕분에 거울의 방은 호기심 천국이 되어 다들 백여우들이 눈을 반짝이며 들어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곤란하다. 거울의 방은 관광지가 아니다. 이곳은 매우 중요하고 내밀한 곳이다. 절대 금지구역으로 지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내가 거울의 방을 관리하리라. 어디 보자. 지난번엔 30번대 거울을 봤으니, 오늘은 40번대 거울을 볼까 보다. 음, 40번대는 일제강점기인가? 젠장, 이 시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아. 도와줄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나도 역부족이야. 한번 보면 돕지 않을 수가 없게 되지. 그러면 이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게 돼. 할 일이 너무 많거든. 50번대 거울을 볼 걸 그랬다. 하지만 이미 거울 속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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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피난민이다. 초췌하군. 간도참변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을 당한 그 와중에 나는 북간도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조선인들이 왜놈들을 피해 간도로 피난 갔는데, 도리어 간도에서 학살을 당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때만 해도 좋았는데, 왜놈들이 그리 잔학하게 보복을 할 줄이야. 마침 나는 그때 마을에서 멀리 떠나 있어서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부모님의 고향으로 갈 수밖에. 경남 산청군이라는데, 정말 갈 길이 멀다. 나는 조선에서 자란 기억이 별로 없다. 어릴 적에 간도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간도가 더 고향 같다. 그래도 같은 조선말을 쓰는 곳이니 적응할 수 있으리라.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함경도까지 왔구나. 그래도 조선 땅이라서 그런지 다들 가난해도 길손에게 비바람을 피할 거처와 끼니는 챙겨주셔서 다행이다. 나는 재워주고 먹여주는 집에서 장작도 패주고, 소 대신 밭일도 해 주고, 물도 길어주고 하여튼 밥값을 하려고 한다. 지금 있는 집은 주인이 매우 친절하시고 일꾼이 없어서 그런지 날 머슴 삼고 싶은 모양인데, 그래도 아버지 고향까지 가려고 한다. 죄송스럽지만.


강원도다. 이곳은 산촌이라는 느낌이 든다.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는데, 논이 적어서 벼를 수확할 때이지만 집집마다 벼 베는 일을 할 곳이 마땅찮다. 고기잡이를 도와주면서 이집 저집 돌고 있다. 내가 거친 마을은 그나마 풍어라고 그래 봤자 일제가 다 수탈하겠지만, 여비에 보태라고 돈을 좀 주셨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내가 그래도 인복이 있나 보다.


해안을 따라 계속 내려오다 보니 드디어 경상도에 진입했다.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긴 해도 계절이 이제 가을이 깊어서 제법 쌀쌀하다. 해도 짧아져서 많이 걷지도 못한다. 오늘도 어디 쉴 곳을 찾아야겠다.

경북 어디쯤일까, 이제 모든 논과 밭은 대부분 수확이 끝나서 내가 딱히 할 일도 없구나. 장작이나 구해다가 패는 일을 할 수밖에.


휴, 경남 산청에 드디어 도착했다. 정말 멀었다. 그동안 떨어진 짚신이 대체 몇 켤레인가? 아니지, 아버지를 기억하시는 어르신부터 찾아야 한다. 이 동네 가장 어르신이 어디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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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잘 도착한 걸 보니 내가 별로 도울 일은 없는 것 같군. 저녁 먹으러 나가야겠어. 그런데 별일도 없는데 저 청년이 왜 거울에 나타난 거지? 아무런 도움도 요청하지 않는데. 이상하군. 그만 나가야지.

저녁을 먹고 여우유치원 담당 오미호들의 육아와 교육일지를 훑어본 후, 일찍 잠들었다.

다음날, 어제 그 거울을 다시 들여다봤다. 아, 그 청년 마을 어르신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군. 머슴방이지만 방도 구했고, 저 집에서 살 생각인가? 제 아버지 고향 마을에서 뿌리를 내릴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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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장작을 다 패어 놓겠습니다. 그리고 방마다 뜨끈뜨끈 불을 때 드립지요. 물도 긷겠습니다.”

“아니, 누가 자네보고 나무하고 물 길으라 했나? 물은 아낙들이 긷는 거지. 자네는 그보다 다른 일을 좀 도와주게. 자네를 우리 집 머슴 하라고 둔 것이 아닐세.”

“네? 어르신. 뭔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래도 자네, 간도에서 중학교도 졸업하고 글도 깨나 읽었는데, 애들을 가르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학교에서 조선어나 조선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말일세. 그나마 1920년 이후로 조선어는 조금 가르치긴 하지만, 그것으로는 어림없어. 우리 집은 그래도 빈방이 있으니까 거기다 애들을 모아서 조선어와 조선사를 가르쳐보게.”

“어르신,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그냥 먹고 놀기가 송구해서......”

“아닐세. 나도 서당에서 한학만 배워서 조선어와 조선사는 부족해. 내가 애들을 가르칠 수는 없어. 자네라면 잘할 수 있을 걸세.”

어르신 덕분에 나는 애들에게 조선어와 조선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 나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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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별일이 없군. 잘 지내는 모양이네. 그럼 나도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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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순사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방을 급습했다. 누가 소문을 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친목 모임이라고 둘러댔지만, 순사는 나를 연행했다.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 이후로 조금 정책이 완화되었다던데, 별로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 동네 순사는 정말 악질인가? 아니면 순사에게 일러바친 조선인 일제 앞잡이가 더 나쁜 놈인 건가? 밤새 심문하고 고문하더니, 별 소득이 없자 풀어주었다. 내가 만든 조선어 교재와 조선사 교재는 다 빼앗겼다. 조선어보다 조선사에 더 신경을 쓰는 눈치다. 저들이 만든 조작된 조선사를 가르칠 순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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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생이 다시 시작되었네. 쯧쯧. 그래도 아직은 잘 버티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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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를 만들 수가 없어서 그냥 말로 애들에게 전해준다. 구전심수로 전달할 수밖에. 애들은 총명해서 눈을 반짝이며 집중해서 듣고 외운다. 유태인들이 족보를 구전으로 외우게 한다더니 나도 그 방법을 쓴다. 그리고 조선사는 구전으로 전하고 조선어수업은 전래동화와 동시들을 읽어주고, 애들은 동화와 시를 외운다. 그리고 감상문을 발표하게 하고, 직접 시를 쓰게 한다. 애들은 저마다 귀여운 시를 써온다. 그리고 재능이 있는 녀석은 전래동화 뺨치는 이야기도 써온다. 정말 기특하다. 이놈들은 경남 사투리를 그대로 써오는데, 간도에서는 조선 전체에서 이주민들이 다 모여 있어서 전국 말을 다 썼다. 조선어수업은 경성, 경기도 말로 했다. 그래서 나는 말은 경상도 말을 해도 글은 경성말로 쓰라고 가르친다. 아직 우리말 사전도 없고, 정확히 표준어도 제정되지 않았기에 이 문제는 조선 전체에서 의논해서 정리되어야 할 것 같다. 나는 간도에서 조선 전 지역 방언을 다 듣고 자랐다. 그래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곳 아이들은 다른 지방 방언을 하면 알아듣지 못한다. 그 점에선 내가 유리하구나. 조선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해.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 선생들이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나도 거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구나. 조선어연구회에 편지를 보내 봐야겠다. 통일된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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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겠어. 나는 이 이후의 결말을 이미 알거든. 1929년 조선어사전을 만들려 하지만 일제가 방해해서 실패하지. 결국, 해방 후에 ‘조선어 큰 사전’을 만들게 돼. 이 청년이 어쨌든 조선어사전에 조그마한 불씨를 지핀 모양이군. 훌륭한 청년이야. 그런데 왜 거울에 비친 거지? 알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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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께서 내가 경성 가고 싶은 걸 눈치채신 것 같다. 내가 조선어연구회에 계속 편지를 보내고, <한글> 잡지에 투고하는 걸 이미 아신다. 어떡하지? 어르신은 내가 계속 이곳에 남았으면 하시는데, 하긴 경성에 간다고 해도, 아는 분도 없고, 있을 만한 거처도 없는데, 무작정 갈 수도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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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왜 거울에 비친 건지 이제야 알겠네. 저 청년이 아니라 저 청년을 붙잡는 저 영감 때문이야. 저 영감 아들 둘 다 어려서 죽고, 딸 하나 남았는데, 아직 시집을 못 갔어. 사위 삼고 싶은 눈치야. 과년한 딸이 저 청년을 많이 사모하고 있는데, 문제는 딸이 청년보다 나이가 많군. 게다가 저 청년은 조선어에 너무 큰 뜻이 있어 아예 그런 계통으로는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는 것뿐이지. 저 집 딸이 기도하는 거였어. 내가 그걸 왜 이제 알았지? 거울 속 다른 인물들도 자세히 봤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로고. 쯧쯧, 저 청년은 영영 경성에 가지 못할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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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부처님, 보살님, 삼신할머니, 단군할아버지....... 제발 저 청년이 경성에 가지 못하게 해주세요. 저랑 백년가약을 맺게 해주세요. 오늘이 벌써 1,000일째 드리는 기도예요. 이 기도 안 들어 주시면 저는 처녀 귀신이 되고 말 거에요. 그 꼴 보기 싫으면 들어주세요. 제발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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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40번대 거울은 건너뛰고 50번 거울을 봐야겠어. 예전에 40번대 거울을 보다가 한 달 넘게 방에 갇혀 있었던 것을 고새 잊고 있었네. 50번 거울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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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목소리도 지긋지긋한 히로히토 소위 천황이라는 자가 무조건 항복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우리나라는 독립을 했다. 우리의 손으로 쟁취하고 싶었는데, 외세의 힘으로 독립을 하게 되다 보니, 외국 열강들이 자기들끼리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한다. 통일 조국을 만들고 싶었는데, 남북이 미국과 소련의 지역으로 분리되고 선거도 남한만 하게 되었다. 게다가 우리의 백범 김구 선생은 피살당하시고,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이 되었다. 나는 백범 선생님 밑에서 독립운동을 돕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라는 이승만이 차지했다. 나는 아직도 백범 선생님이 왜 피살당하셨는지 솔직히 이승만 쪽이 의심스럽다. 선생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백범 선생님이 초대대통령이 되었을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과 가깝다. 남한은 미국이 점령했다. 미국 입장에서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길 것이다. 독립 전에는 독립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독립하고 나서도 우리나라는 외세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은 여전하다. 일본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바뀐 것뿐 아닌가? 일제 군사 주둔지 그 자리에 그대로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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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이 청년은 백범의 제자인가? 아니면 동지인가 보군. 백범이 그리 허망하게 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 맞아, 용산기지,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21세기 되어서야 겨우 용산기지를 비웠는데 독극물로 오염이 심해서 출입금지구역이 되었어. 정화도 하지 않고 물론 정화비용도 내지 않았어. 게다가 100퍼센트 대한민국의 세금으로 훨씬 더 넓으면서 최신식의 평택 미군기지로 다시 이전하고는 다시 방위비를 올려받았지. 남한 곳곳에 미군기지가 있어. 정작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 대한민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면서 독극물로 오염시키고 정화도 하지 않고 새로운 기지에다가 주둔비용까지 계속 올려달라고 요구한다면, 미국국민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역지사지라고 자기들도 당해봐야 그 심정을 알게 될 것이다. 요즘은 미국이 주둔 방위비도 엄청나게 올려 받았는데, 또 어처구니없는 액수를 초과 요구한 것 같다. 그게 다 미국의 협상기술인데, 한국인들은 미국인의 실체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상상할 수 없는 무리한 액수를 요구하면서 협상하는 척하면서 조금씩 깎아주는 척하는 거지. 원래 예상 액수의 10배 이상 부르고는 5배만 되어도 엄청 많이 깎아준 척하면서 큰 이득을 보는 것이지.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수단에 놀아나는 협상일 뿐이야. 한국은 미국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 같이 우리도 이제 방위비 한 푼도 못 내겠다는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그걸 모르고 미국협상 수단에 놀아날 것 같아 걱정이야. 0.1배도 못 올려준다고 해야 해. 오히려 절반 이하로 깎거나, 못 내겠다고 해. 미군 나가도 상관없다고 해. 어차피 미국은 일본과 한국을 서로 간을 보면서 둘 다 자기 나라에 이익이 될 것만 계산하고 있어. 한국 협상단에는 인지 심리학자가 없는 건가? 없으면 심리학자들과 의논이라도 해서 대응방안을 준비해서 나가야 할 텐데, 그 정도 머리도 안 돌아가는 건가? 내가 쓸데없는 미래 이야기까지 하고 있군. 지금은 막 해방되고 대한민국 건국 시대인데, 미군이 마음대로 주무르는 시대. 어디 보자. 저 청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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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어. 하지만 중국은 공산화가 되어서 소련과 더 가깝지. 나도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북한으로 가는 것이 낫겠어. 지금의 남한은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어. 뜻이 있는 동지들과 유명 예술인들 모두 북한으로 많이 떠났어. 난 많이 늦은 것 같아. 더 늦기 전에 올라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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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긴 저 당시 지식인, 예술인, 전문기술인들 대부분 북한을 선호했어. 많이 올라갔지. 하지만 나중에 후회하게 될 텐데. 어쩔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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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과 합류하여 북한에 왔다. 함께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 동지를 만나기로 했다. 부모님과 나는 남쪽이 본적인데, 나는 거의 평생을 중국을 전전하면서 살다가 해방 이후 남한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고국이라는 느낌보다는 낯선 미국식민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럴 수가. 소련 역시 이리 같은 족속이었어. 스탈린이 김일성을 꼬드겨서 6.25를 일으켰어. 나와 같은 동지, 즉 본적이 남한인 사람들은 거의 숙청이 되고 있어. 잘못했어. 그냥 남한에 있어야 했어. 내가 우리 남쪽 주민들에게 총칼을 겨누고 싸워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게 돼. 이 무슨 경우란 말인가? 하늘이시여. 대한독립만 시켜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고 그리 외쳤건만. 적어도 일제강점기 때는 남북이 분리되지는 않았었는데, 힘을 합쳐서 독립운동을 했었는데, 지금은 남북이 우리의 뜻도 아니고 미국, 소련, 중국, 영국과 같은 외세의 힘으로 독립하고 분리되고, 다시 한 민족끼리 전쟁을 하고, 이 전쟁에서 이득을 보는 쪽은 또 일본이군. 어처구니없어.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는데, 왜 미국은 독일의 경우와 다르게 일왕과 전범들을 다 그냥 풀어주었던 거지? 일본에게 뇌물이라도 받았나? 덕분에 6.25 한국전쟁을 통해서 미국은 모든 군사 물자와 식량 조달을 일본에서 하는 바람에 일본이 경제특수를 누리고 있어. 2차 대전에서 망한 비용을 한국전쟁을 통해 다 충당하고도 남아. 이래저래 우리나라는 일제에게 피를 빨리고 수탈을 당하는 게야. 이런 통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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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인가? 이 역시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인데, 내가 또, 실수했구먼, 나도 늙은 게 분명해. 예전에 분명히 다신 안 보겠다고 해놓고, 그새 잊고 다시 보고 있네. 허.. 참.. 저 청년,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으면 다시 북한으로 가야 하는 건가? 그러지 않으면 탈영병이라 총살당하나? 뭘 해줘야 하나? 탈영하지 않고, 북한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남쪽 출신이라 숙청당할 텐데, 김일성 그 작자 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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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한군으로 남쪽 백성과 싸우고 있어. 경상도 대구를 지났어. 이대로는 대한민국이 조선인민공화국이 되고 말겠어. 나는 자유민주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같은 민족에게 총칼을 겨눠서 통일하려는 북한이 더 싫어. 목숨을 걸고 남쪽에 포로로 투신해야겠어. 좋은 기회가 없을까? 신이시여. 부디 무사히 남쪽으로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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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도움을 요청하는구먼. 암, 도와줘야지. 저 청년에게 그 어떤 총탄도 칼도 다 피해가도록 결계를 쳐주지. 어서 탈출하게. 곧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해서 북한군들은 다시 북쪽으로 밀려가게 돼. 그러면 탈출은 더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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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미군들이 상륙했다고 한다. 우리보고 북으로 퇴각하라고 한다. 더 늦기 전에 탈출해야겠다. 오늘 밤이 아니면 죽는다고 봐야 해. 신이여. 도와주소서.


저기 백인은 분명 미군이겠지? 경상도에 소련인은 없겠지? 이봐요. Help me. Please....털썩.


아... 여기가 어디지? 내가 침대에 누워있네. 미군 부대 내, 병동인가? 나는 살았어. 만세! 탈출했어.


네, 제가 영어가 좀 짧아서, 중국어는 좀 하는데, 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해서. 영어는 별로....


아... 네, 한국인이시군요. 네, 통역관이시라고요? 네, 저는 본래 남한 쪽 주민인데, 해방 후, 북쪽으로 동지들과 가는 바람에 북한군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고향 주민들에게 총칼을 겨누고 싶지 않아서 목숨을 걸고 탈영했습니다. 저와 저의 부모님은 경상도가 본적이 맞습니다. 그 때문에 북한에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어요. 도와주세요. 원래 고향에서 살고 싶어요. 물론 지금은 전쟁 중이라 마음대로 가지 못하겠지만, 포로로 잡아두든지, 아니면 남쪽 군대에서 싸우든지 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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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저 청년은 무사할 거야. 이제 53번 거울은 그만 보자. 6.25가 끝나고, 자유당 정권 지나고, 어라 박정희 정권이네. 세월 빨라. 군사독재가 시작되었지. 그래도 경제발전은 했어. 속전속결로 잘하긴 했는데, 일본과 국교수립과정에서 문제가 많아. 배상 문제도 제대로 하지 않고,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굴욕 국교를 맺었지. 박정희는 나름, 강단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미국 눈치를 보지? 돈이 몹시 급했다곤 해도, 저렇게 수교하는 건 아니야. 미래까지 대한민국에 얼마나 굴욕을 주는데, 푼돈 받고 협상을 마쳤어. 저런 돈을 받느니, 북한처럼 버티는 것이 나은데, 하지만 박정희는 그 돈으로 개인 욕심을 채우진 않았어. 전부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 사용했어. 자신과 자기 가족들에게는 단돈 10원도 챙기지 않았어. 그 점은 인정해. 그것은 아마도 평생 제왕처럼 독재자로 군림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1979년 10월 26일에 김재규에게 총 맞고 죽어. 제 아내인 육영수는 북한 괴뢰군에게 1974년 8. 15일 광복절에 먼저 총 맞고 죽고, 부부가 함께 총 맞아 죽는 경우가 대체 얼마의 확률이지? 자식들도 잘 안 풀려. 큰딸은 나중에 대통령이 되지만, 임기도 못 채우고, 작은딸은 추문에 휩싸이고, 애지중지하던 외아들은 아버지 재임 시절에도 마약 사건을 일으키더니, 평생을 마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가 겨우 늦게 결혼하고 자식 낳고 정신을 차리게 되지. 불행한 부모의 죽음과 불행한 자녀들의 삶.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야. 역시 대한민국 역사는 안 보는 게 나아. 차라리 고대나 중세를 보는 게 더 낫겠어.


어휴. 거울을 너무 오래 보니 피곤하네. 나도 이제 늙었어. 지구력이 떨어지고, 기억력이 쇠퇴하고 있어. 정말이지. 팔미호 녀석, 내가 늙어 기운 빠지고, 정신이 흐려지길 기다리는 게 틀림없어. 음흉한 놈 같으니라고. 나랑은 정반대의 성격이군. 그래. 시간이 약이다, 이거지? 다 늙고 꼬부라지면 그때 대결을 신청할 모양이야. 당분간은 거울의 방에 오지 말아야겠어. 정신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어. 가서 잠 좀 푹 자자.


팔미호의 일기



김진미



“나는 팔미호, 백여우족에서 유일한 팔미호다. 나이도 꽤 많다. 역대 팔미호중 가장 나이가 많을 것이다. 왜냐고? 내가 승급 대결을 하지 않으니까. 지금 구미호님은 역대 최강 중의 최강, 물론 나이도 제일 많고, 능력도 수치조차 잴 수가 없다. 그 기운이 얼마나 센지 옆에 가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칠미호 이하 여우들은 아직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아예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구미호님 옆에 잘만 가더라. 나는 여우들에게 팔미호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데, 나도 40,000살이 넘었으니까, 영감태기가 맞긴 하다. 칠미호 중 한 녀석은 나에게 언제까지 팔미호로 남아있을 거냐고 묻더라. 저도 팔미호로 승급하고 싶겠지. 윗대가 막혀있으니, 저도 승급을 못하는 거고.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네가 한번 팔미호가 되어 봐라. 지금의 구미호님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강한지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은 구미호님에게서 승급 시합 신청하라고 여러 차례 언질이 왔지만,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전부 거절하였다. 어르신이 계속 하급여우에게 먼저 언질하시는 것조차도 사실 결례인데, 내가 도전장을 내지 못한다. 구미호님은 답답하신지 옆에서 시중도 들고, 수련도 함께 하자고 계속 말씀하시는데, 내가 계속 피한다. 나는 간이 작은지 구미호님이 무섭다. 이런 속마음을 다 들킨 건지. 적어도 무섭지는 않아야 대결을 하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나도 나름 수련을 하긴 한다. 하지만 나는 음악을 감상하거나 글을 쓰는 걸 더 좋아한다. 나는 오미호 시절이 참 좋았다. 아기 여우들 키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 오미호를 수석으로 졸업했더니 육미호, 칠미호, 금새 팔미호가 되었다. 팔미호가 되니까 다들 언제 구미호가 바뀌나 궁금한 것 같던데, 내가 30,000년 넘게 시간을 끌고 있으려니, 이제는 겁쟁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나는 겁쟁이인가? 나는 구미호를 할 그릇이 못 된다고 생각할 뿐이다. 지금 구미호님이 잘못하시는 것도 없고, 일도 잘하시고, 다른 부처와 보살, 신들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받으시고, 능력과 신력 면, 모든 면에서 역대 최강인데, 오래오래 군림하시는 것이 맞다. 나는 지금 구미호님을 어려서부터 계속 존경해왔다. 오히려 두려울 정도로 내게 우뚝 서 계신 분이시다. 다른 여우들과 신들이 날 하찮게 여기더라도, 내 충심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구미호님의 투시력이라면 이 일기도 아마 읽으실 수 있을 거야. 설마 속마음도 읽지는 않겠지? 능력을 가늠조차 할 수 없으니, 정말 두려운 존재로고, 대체 언제쯤이면 그 할망구가 신력이 쇠퇴하고, 정신력이 좀 흐려질까? 이러다가 나까지 늙어 신력이 다 빠지는 거 아니야? 나는 남이 보는 데서는 절대 수련을 하지 않는다. 이 캄캄한 지하실에서만 비밀 수련을 한다. 다들 내가 속 편하게 놀기만 한다고 여긴다. 사실 그러라고 행동해왔다. 연기하는 게 그리 쉬운가? 아니면 내가 타고난 연기자인 건가? 하하하. 그 할망구는 아무 데서나 수련뿐 아니라 모든 무공을 다 선보이는 것 같던데, 속이 없나? 아니면 그렇게 자신만만한 건가? 정말이지. 나는 태어날 순번을 잘못 잡았어. 지금 칠미호들이 부러워. 하여튼 할망구가 늙어서 기운이 빠지길 기다리는데, 여태 빠지기는커녕 더 신력이 세지는 것 같아 정말 무서워. 적어도 무서운 것만큼은 사실이야. 존경은 개뿔. 언제 늙어 기운 빠지는지 그것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구미호의 명상


김진미


오랜만에 동굴 면벽 수련에 들어갔다. 거울의 방에서 정신력을 너무 소모했더니 머리를 좀 비워야 할 것 같아서다. 마음이 답답할 때, 나는 동굴을 찾는다. 이번엔 100일 정도만 금식 면벽 수행을 하고 나갈 것이다. 내가 동굴에 들어오면 아무도 여길 방해하지 못한다. 설사 천계에 불이 나더라도 날 데리러 오지 못한다. 유일하게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다. 요즘 내 최대의 고민은 역시 후계자 문제이다. 팔미호 녀석, 대체 언제까지 내 속을 태울 것인가? 다들 날 욕할 것이다. 내가 오래 살고 싶어서 일부러 대결을 피한다는 루머까지 도는 걸 나도 알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팔미호에게 여러 차례 전갈을 보냈다. 이놈이 날 거역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 고민, 팔미호 문제를 집중적으로 명상하고자 한다.


음. 팔미호의 방이군. 아니, 방이 아닌가? 지하수련장인가? 저 녀석 자기 집 지하실에 비밀 수련장을 만들었네. 하긴 수련하다 보면 벽이나 창이 깨져서 주변에 튀기라도 하면 다른 신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시끄럽기도 하니, 좋은 생각이야. 나는 왜 여태 저런 생각을 못 했지? 생각보다 영리한 놈인데? 하긴 저 녀석도 40,000살이나 먹었어. 옛날로 치면 구미호가 되었어도 한참 전에 되었을 나이지. 어디 보자. 하하하. 아니, 호호호. 왜 저곳까지 들어가서 일기를 쓰는 거야? 이상한 놈일세. 어디 보자. 날 존경한다고? 무섭다고? 그래서 대결신청을 못 한다고? 그래서야 쓰나. 팔미호는 아무리 지더라도 별문제도 없는데, 오히려 자꾸 대결도 해야 상대방의 능력도 가늠하고 하는 거지. 정말로 소심한 놈일세. 정말 걱정이야. 휴우. 눈을 감고 다시 명상이 집중하자. 저런 일기를 보자니 혈압이 더 오른다.


앗! 잠깐 졸았는데, 꿈을 꾸었어. 아니 꿈이 아니고, 계시야. 팔미호의 속마음을 들었어. 이 자식이 일기도 그렇고 그 모든 행동이 다 연기였어. 이런 고얀 놈 같으니, 저렇게 속이 시커먼 놈인 것을 이토록 오랫동안 몰랐단 말이야? 나도 내공이 부족했구나. 마음을 놓으면 안 되겠어. 나도 정신이 빠져 있었던 것이 분명해. 아무리 연기를 한다 해도 그것조차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 구미호의 역할이지. 정말 대책을 세워야겠어. 저런 놈이 구미호를 승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돼. 이것은 단순히 신력과 능력의 문제가 아니야. 마음 씀씀이의 문제야. 정말 구미호의 그릇이 못 돼. 내가 더 오래 살아야겠구나. 구미호의 법을 바꿔야겠어. 팔미호를 한 마리만 둘 것이 아니야. 지금 밀려 있는 칠미호들끼리 수련과 승급시험을 쳐서 팔미호를 다시 뽑아야겠어. 팔미호도 여러 마리를 둘 수 있도록 백여우법을 바꿔야겠다. 이번 동굴 면벽 수련은 이 일을 해결해야 해서 들어온 것이구나. 중요한 순간에 적절한 조치였어.


“아. 아. 아, 백여우들은 모두 들어라. 오늘부터 백여우법을 바꾼다. 구미호 외에 모든 백여우는 승급시험을 통해서 승급할 수 있다. 육미호, 칠미호, 팔미호까지 순서대로 바로 승급할 수 있다. 그리고 팔미호가 된 여우는 1,000년 이상 수련을 하면 구미호에 도전장을 낼 수 있다. 이 법은 내가 죽고 나서도 영원히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한 달 후에 현재 칠미호들의 팔미호 승급시험이 있을 예정이다. 다들 준비하도록 해라.”


칠미호의 팔미호 승급시험


김진미



“이게 웬일이야? 대체 백여우법이 바뀐 것이 얼마 만이지? 처음 아니야?”

“그래도 마냥 세월만 보내는 것보다야 승급할 수 있으니, 잘된 일 아냐?”

“맞아. 천지개벽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긴 하지만 진즉 이렇게 했었어야 했어. 왜 우리는 이런 생각조차도 못한 거지? 하긴 오미호가 10마리, 육미호가 5마리, 우리 칠미호가 3마리인데, 팔미호님이 계속 미루고 있으니, 다들 승급도 못 하고 오미호부터 계속 밀려 있어.”

“역시 구미호님. 팔미호님이 대결신청을 하지 않으니까, 최후의 수단을 쓰신 것 같아. 덕분에 우리 중에 누가 팔미호가 되면 지금 팔미호님보다 우리 중 한 여우가 먼저 구미호 대결을 신청할 수도 있겠네. 와우. 신난다. 다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얼른 수련하러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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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호 승급시험을 신청한 칠미호님들은 다들 착석하십시오. 네, 다 오셨군요. 세 분 다 승급시험에 도전하시는 건가요? 알겠습니다. 이번의 심사위원은 구미호님과 석가모니부처님, 미륵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 다섯 분이 주심이십니다. 그 외 인드라님, 브라흐만님, 비슈누님, 시바님께서 부심으로 친히 오셨습니다. 총 9분께서 심사하실 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 시작합니다.”


첫 시험은 정신력 시험이다. 머릿속을 비우고 아무것도 채우지 않고, 그 어떤 잡념도 허용하지 않는 공(空)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셋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사위원들은 우리의 머릿속을 다 꿰뚫고 계시니까. 어서 다른 두 마리의 칠미호가 먼저 탈락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아니 아니야. 이런 생각조차도 없어야 해. 정신 집중하자.


“첫 시험 끝입니다. 두 칠미호가 이탈했습니다. 바로 두 번째 시험 들어갑니다.”


두 번째 시험은 지력 테스트, 예전부터 계속 봤던 모든 학문과 과학, 기술시험을 망라한다. 지필고사인 셈이다. 단, 시간이 매우 부족하다. 지구인의 모든 언어와 문학, 수학, 과학기술을 다 통달해야 한다.


“세 번째 시험, 예술시험입니다.”


우리 셋 모두 작곡, 연주, 노래, 회화, 공예, 디자인, 건축, 연기, 춤, 모든 장르의 예술을 실제로 구현해야 한다. 시간도 부족하다.


“네 번째 무공시험입니다. 시작!”


우리 셋이 동시에 대결을 한다. 심사위원들은 모든 과정을 다 보고 채점을 하신다. 총술, 검술, 창술, 봉술, 포격술, 궁술, 기타 첨단 무기들을 다루는 기계 관리술, 레이다 조작술, 항공모함조종술, 기타 모든 운송수단, 제트기, 비행기, 헬리콥터, 탱크, 자동차 운전기술, 원자탄, 수소탄 제조술까지. 전부 한다. 하여튼 인간들이 가진 모든 직업의 기술을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어렵다.


“다섯 번째, 변신술입니다.”


변신술은 일미호가 되자마자 시작해서 해왔지만, 우리 백여우족의 가장 큰 특징이자 기술이다. 이 변신술은 외모뿐 아니라, 목소리, 언어구사력, 개별 버릇까지 완벽하게 복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총 100일 걸려서 시험이 드디어 끝났다. 우리도 우리지만, 심사위원들의 체력과 집중력이 더 대단하시다. 과연, 괜히 신이 아니야.


“시험 결과 발표를 하겠습니다. 세 분 칠미호님 중에서 한 분이 팔미호님이 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팔미호님”


우리는 서로서로 누가 팔미호가 되었는지 쳐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 엉덩이가 뜨거워지면서, 그렇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동. 내가 팔미호가 되었다. 바로 내가 말이다. 와하하하하하. 나는 이제 팔미호다.


“감사합니다. 신 팔미호, 인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팔미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최대한 노력해서 구미호님께 도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구 팔미호의 고민


김진미



시험장에는 심사위원 아홉 분과 수험자인 칠미호 셋밖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시험이 어떻게 치러지는지, 결과는 나왔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궁금하다. 과락으로 팔미호가 아무도 당선되지 않으면 좋겠다. 나 40,000년이나 먹은 팔미호님이 이렇게 초조해하다니. 칠미호놈들 다 변변찮은 놈들이니까 아무도 승급하지 못할 거야. 암, 그렇고말고. 으음, 아냐. 설마 새 팔미호가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새 팔미호랑 먼저 대결해서 구미호님께 대결신청을 해야 하나? 아니면 둘 중 누구라도 구미호님께 대결을 신청할 수 있는 것인가? 아, 머리 터지겠다. 구미호님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었던 거지? 정말 내 생각까지 꿰뚫어 보신 것은 아닐까? 아냐. 설마 마음속까지 읽으신다고? 설마가 아니야. 정말 읽으신 것 같아. 정말 무서워. 나는 당분간 지하수련장에서 나가지 말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새 팔미호랑 계속 함께 수련하면서 눈치를 봐야 할까?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천지개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야. 팔미호가 두 마리라니? 아니 세 마리도 될 수 있는 것 아냐? 이러다가 새로 올라온 팔미호들에게 져서 구미호는커녕, 팔미호로 시들어 버리는 것 아냐?


“안녕하세요. 팔미호선배님. 저 오늘부터 팔미호가 된 신 팔미홉니다.”


이런, 신 팔미호가 납셨군. 과연, 신 팔미호가 되었구나.


“그래, 자네 승급을 축하하네, 이제 같은 팔미호이니 그리 깍듯이 예를 갖출 건 없네.”

“아니죠. 팔미호님은 40,000살이 넘으셨는데요. 저는 이제 20,000살이고, 사실 30,000살 칠미호가 승급될 줄 알았는데, 시험을 제가 더 잘 봤나 보더라고요. 하하하.”


이 자식이. 잘난 척은....


“그래. 나이순으로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니까. 자네도 곧 나를 따라잡겠구먼.”

“에이, 설마요. 최소한 1,000년 이상 수련을 해야 구미호도전장 자격을 받게 되니까요. 그 전까진 선배팔미호님과는 대등할 수 없죠. 그때 제 도전을 먼저 받아주세요. 팔미호끼리 먼저 대결한 후, 승자가 승급도전을 할 수 있겠죠?”

“글쎄. 아직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이번에 갑자기 법이 바뀌었으니까. 또 모르지. 자네가 1,000년 뒤 바로 구미호승급시험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야. 모든 게 다 구미호님의 뜻이니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래. 자네는 앞으로 수련을 어떻게 할 작정인가? 혼자 하겠나? 아니면 나랑 같이 하겠는가? 아니면 구미호님의 시중을 들면서 구미호님께 직접 사사할 생각인가?”

“저야말로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구미호님을 따라 다니면서 직접 사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선배 팔미호님은 지금까지 혼자 수련하셨고, 아무도 선배님의 수련 과정을 본 여우가 없으니까요. 선배님은 누구와 같이 있는 걸 불편해하실 것 같아요.”

“그래?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뜻대로 하게. 나는 혼자 수련할 터이니. 그럼 1,000년 뒤에 보세나. 일부로 인사하러 와줘서 고맙네. 건투를 비네. 잘 가게.”

“네, 안녕히 계시고, 1,000년 뒤에 뵙죠. 결투장일지, 승급장일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젠장. 배알이 꼴려서 죽겠군. 이제 20,000살짜리가 팔미호라니. 아니지. 나도 그 전에 팔미호가 되었어. 팔미호가 된 지 거의 20,000년이 넘었군. 다들 날 욕할 만도 해. 내가 너무 안이했어. 이런 일이 생길 줄 꿈에도 몰랐어. 과연 구미호님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신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늑장을 부려서 화가 나셔서 법을 바꾸셨는지 알 순 없지만, 하긴 그 할망구 속셈을 과연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구미호님은 여간해서는 속을 보이시지 않아. 이제는 목표가 그 할망구가 아니라 저 새파란 팔미호야. 저놈을 먼저 제압해야 구미할망구를 대적하든 말든가 하지. 저 녀석의 무공이나 신력은 잘 모르는데, 사실 후배들은 신경도 쓰지 않아서 말이지. 저 녀석도 다른 칠미호보다 나으니까, 승급했겠지? 나야말로 궁금하다. 저 녀석 수련과정을 훔쳐보고 싶다. 하지만 나도 공개하지 않는 실력을 저 녀석인들 할까? 아니지, 구미할망구를 따라 다닌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저 녀석이 구미할망구를 따라다니며 수련한다면 볼 기회가 많을 거야. 그 틈을 노려야겠어. 그럼 나는 내 지하수련장에서 몰래 수련하고, 저 녀석이 구미할망구를 따라 다니며 수련하는 것은 감시하고 그렇게 1,000년을 하면 1,000 뒤에 결투에서는 내가 이길 수 있겠지? 그러고 나서 다시 저 놈이 내게 대결 신청하기 전에 바로 구미할망구에게 도전장을 내야겠다. 그리고 놈이 다시 대결을 요청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내가 구미할망구에게 도전하는 거야. 그러면 두 번 다시 내게 도전하지 못할 거야. 아니지. 혼자 고민할 것이 아니라 구미할망구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어. 팔미호끼리 대결 후에 구미호대결이 있는 건지, 아니면 각자 구미할망구에게 대결신청을 할 수 있는 건지. 미리 알고 대처해야 시간 낭비가 없지.


“구미호님. 저 구 팔미호입니다.”

“아니,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생전에 날 찾아오지 않더니만,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그려.”

“예,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자네도 새 팔미호가 나타나서 좀 놀랐지? 어떻던가? 자네에게 인사하러 간다고 하던데, 왔던가?”

“네, 저의 집에 와서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여쭤볼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뭔데 그러나?”

“1,000년 뒤에 새 팔미호가 구미호 승급대결을 신청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새 팔미호가 1,000년만 지나면 구미호님께 대결신청을 바로 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저랑 먼저 대결을 해서 이긴 자가 구미호님께 대결을 할 수 있는 건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저도 준비를 해야 해서요.”

“아, 그게 궁금했나?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네만, 신 팔미호 녀석이 어찌나 의욕이 넘치는지 1,000년 후에 바로 내게 도전장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갔네. 기특하지 않나?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네. 그래서 그러라고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자네의 의견을 먼저 물어볼 것을 그랬나 보군.”

“아니, 구미호님. 그런 것은 저랑 미리 의논하셨으면, 좋았잖습니까? 그러면 저와는 아무 상관 없이 신 팔미호가 바로 구미호 승급대결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 저는요?”

“자네는 1,000년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내게 대결신청을 하면 되는데 뭐가 문제지?”


움찔.. 그렇구나. 나는 바로 신청하면 되는 거였어. 차라리 1,000년이 지나기 전에 내가 얼른 구미호가 되어서 그놈이 구미호가 되는 길을 막아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당장 대결신청을 해야 했는데, 저 할망구 앞에만 서면 움찔거려서 정말 죽겠어. 이래서는 대결은커녕 제대로 말도 못 하겠어. 할망구 표정은 온화한데, 왜 이리 온몸이 오싹하지? 나만 그런가? 다른 여우들은 대체 저 할망구랑 어떻게 그리 쉽게 다가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우선 지하수련장으로 가야겠어. 거기서 자신감이라도 회복해서 나와야지.


신 팔미호 수련기


김진미



나, 신 팔미호, 오늘부터 구미호님의 수발을 들기로 했다. 다행히 구미호님께서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다행이다. 귀찮아하실까 걱정했는데, 아니지 그런 건 구 팔미호나 하는 짓이지. 이제야 하는 말인데, 구 팔미호는 너무 음흉해. 결코, 구미호의 그릇이 못 돼. 내가 나중에 대결해서 구 팔미호를 꺾어 버려야겠어. 하지만 1,000년 기본 수련이 끝나야 구미호님께 도전할 수 있다는데, 팔미호끼리의 대결도 1,000년을 기다려야 하나? 오늘 여쭤봐야겠다.


“그래, 신 팔미호, 오늘부터 날 수발들겠다고? 내 수발드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니?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도록 해라. 나는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시킨다.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건 용서 못 해.”

“걱정마세요. 구미할머니, 아니, 아니 구미호님. 저도 이제 팔미호니까 어린애 같은 말은 삼가야 하겠죠. 하나 궁금한 것이 있어요. 저더러 기본으로 1,000년은 수련하고 대결 신청하라고 하셨죠? 그러면 같은 팔미호끼리의 대결도 그때가 되어야 하는 건가요? 팔미호끼리 대결한 후 승자가 구미호님께 도전하는 거겠죠?”

“이런, 이런 궁금한 것도 많구나. 그래 넌 어떻게 하면 좋겠니? 팔미호끼리 먼저 대결을 하고 싶으냐? 아니면 바로 내게 신청하고 싶으냐?”

“저는 스승님과 오래오래 공부하고 싶으니까요. 구 팔미호를 먼저 이기고 싶어요. 하지만 1,000년이 지나야 한다면 기다릴 수밖에 없겠죠?”

“그게 무슨 소리야. 나한테 도전하는 건 기본으로 1,000년이 지나야 하지만 같은 팔미호끼리는 언제든지 서로 대결을 할 수 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하지만 너는 이제 막 팔미호가 되었어. 혹시 대결하다가 지면 상심하지 않겠니?”

“아뇨. 저는 그런 것으로 상심하지 않아요. 전 다만 구 팔미호님이 너무 오랫동안 무공을 숨기고 혼자 수련하셔서 그 실체를 먼저 알고 싶어요. 구 팔미호님은 너무 베일에 싸여 있어요.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구미호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구나.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나는 내가 오래 살고 싶어서 일부로 대결을 안 한다고 여길 줄 알았는데.”

“처음엔 그랬죠. 하지만 이제는 구 팔미호님이 승급대결을 계속 거절하신 걸 온 천계가 다 알고 있어요. 저희가 내색을 안 했을 뿐이지. 어르신들 일이라서.”

“그랬니? 나야말로 너희들의 생각을 잘 몰라서 미안하구나. 그럼 네가 하고 싶을 때, 구 팔미호에게 도전하렴. 하지만 오늘부터 넌 내 밑에서 수련하기로 했으니, 우선 기본 수련부터 끝내고 도전하도록 해라. 넌 아직 풋내기야. 아침에 내가 명상할 때, 너도 같이 하려무나. 그리고 아침 운동할 때, 나랑 대련하고. 좀 힘들겠지만, 이겨내도록 해. 그리고 오후엔 인간사에 관한 공부를 하고, 저녁때 다시 무공수련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도록 해라. 이 일과를 하루도 거르지 말고 지켜야 한다. 알겠느냐?”

“네, 구미호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가능한 구 팔미호에게 빨리 도전하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저는 구 팔미호님이 음흉해서 마음에 들지 않아요. 구미호님은 누가 후계자가 되길 바라세요?”

“이런, 이런, 이 녀석 좀 보게. 그런 건 내색하지 않는 거야. 네가 더 성실히 수련해서 구 팔미호보다 나으면 네가 승계할 것이고, 구 팔미호가 그동안 숨겨왔던 무공과 신력이 있다면 구 팔미호가 되겠지. 심사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야. 너도 알잖니? 팔미호 승급시험 때, 아홉 분의 심사위원이 있었잖니? 팔미호끼리 심사도 아홉 분이 하게 될 거야. 각오 단단히 해.”

“네, 구미호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거예요.”


첫날인데도 하루가 이리 길 줄이야. 정말 구미호님의 신력은 상상을 초월해. 괜히 구미호가 아니야. 하루 만에 이리 초주검이 되면 구 팔미호님과의 대결도 물 건너갔어. 내가 너무 호기 부렸어. 신 팔미호가 된 것에 의욕이 너무 넘쳤어. 적어도 하루일과 정도라도 무난히 넘길 수준은 되어야 구 팔미호한테 도전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에고. 삭신이야. 내일 아침에 제대로 눈을 떠야 할 텐데.....


구미호님의 수발을 든지, 아니 개인 교습을 받은 지 100일이 지났다. 처음엔 죽을 것 같더니, 이제 조금 몸도 적응이 되었는지 삭신이 쑤시거나 하지 않는다. 웬만큼 견딘다. 다행이다.

오늘은 구 팔미호에게 도전해도 될지 여쭤봐야겠다.


“저, 구미호님, 구팔미호님은 아직까지도 지하수련장에서 나오실 생각을 안 하시는데, 제가 도전장을 내어 볼까요?”

“그러냐? 하긴, 구 팔미호 녀석이 그간 얼마나 수련을 쌓았는지 나도 궁금하긴 하구나. 그래 도전장을 보내 봐라. 어떻게 나올지 같은 등급의 여우들은 도전을 거부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아야겠구나. 이제는 칠미호끼리도 서로 도전할 수 있고, 육미호끼리도 오미호끼리도 도전하고 대결할 수 있게 해야겠어. 그래야 서로서로 실력이 오르지. 그동안 내가 너무 너희들을 안이하게 관리했어.”

“구미호님, 제가 직접 도전장을 구 팔미호님 댁에 갖다 드릴까요?”

“아냐. 공식 도전장이니까, 여우협회에 공증문서로 제출해야 해. 협회에서 네 도전장을 직접 구 팔미호에게 전달할 것이다. 너는 협회에 도전장을 제출하고 오려무나.”

“네,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


“네, 구 팔미호님께 도전장을 신청하시겠다고요? 네, 여기 직접 서명하시고, 네네, 공증절차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저희가 구 팔미호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답장이 오면 대결 날짜를 잡아서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저 여보세요. 네, 구 팔미호님, 여기 여우협회인데요. 방금 신 팔미호가 구 팔미호님께 도전장을 제출하고 갔습니다. 이 도전은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 대결 날짜는 구 팔미호님께서 원하시는 날짜로 잡아드릴 수는 있습니다. 단 100일 이내로 잡으셔야 합니다. 그럼 날짜 잡히는 대로 연락 주시면 그날로 대결 장소를 잡고, 신 팔미호에게 먼저 공지한 후, 전 천계에 공고하겠습니다. 날짜가 잡히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전화를 받으셨지만, 공증문서를 보낼 테니 직접 받으십시오.”

구 팔미호의 반격


김진미


여기 지하수련장에 들어온 지, 100일이 넘어서 잠시 쉬러 간 사이 여우협회에서 전화가 왔다. 여우협회도 귀신같이 내가 수련장에서 나오자마자 전화를 하다니, 정말 어떻게 그 순간을 알았을까? 협회 여우들도 무서운 놈들이야. 허 참. 신 팔미호 녀석 감히 내게 도전장을 제출해? 건방진 자식 같으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20,000살 주제에. 팔미호면 다 동급인 줄 아는 모양이지? 이 건방진 녀석, 어디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겠다. 나 구 팔미호님이 40,000살을 괜히 먹은 줄 아나? 이래 봬도 역대 최고령 팔미호야. 내가 납작 엎드려 있다고 물로 보이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혼쭐을 내주지.


“네, 여우협회님, 전화 분명히 받았고, 문서도 직접 수령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결 날짜도 바로 정해드리죠. 100일 이내라고 하셨는데, 100일 후 천계 대운동장에서 진시에 하는 것으로 하죠.”


“네, 구 팔미호님. 날짜 접수 완료했습니다. 이제 신 팔미호에게 공지한 후 천계 전체에 안내방송을 하겠습니다. 100일 후, 천계 대운동장 진시 꼭 지키십시오.”


다시 지하수련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결 당일까지 나가지 않을 것이다.


....................................


“이제 곧 구 팔미호님과 신 팔미호님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심사위원님들 이하 관객 여러분들 모두 제자리에 착석해 주십시오.”


뎅----천계 범종이 또 울렸다. 시합 시작을 알리는 소리다. 거의 30,000년 만에 듣는 소리군. 그동안 내가 너무 쉬었나? 어디 오늘 몸 좀 풀어보자. 그동안 숨겨온 내 비기와 신통력을 어쩔 수 없이 공개해야겠군. 구미할망구와 대적하려고 여태 아껴왔는데, 할 수 없지.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나? 어라? 저기 구미할망구와 여러 부처, 보살, 힌두신들까지 죄다 모였군. 저번에 팔미호 승급시험 때도 심사위원이었다고 듣긴 했지만, 정말 심사위원이 9명이구나.


“선배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시합 날짜를 딱 100일 채워서 잡으시다니, 정말 하기 싫으셨던 모양이에요. 저는 하루라도 빨리 대결하고 싶었는데 날짜는 도전자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기다렸어요.”

“그래. 후배님, 그동안 수련 많이 했지? 구미호님께 직접 사사한다더니 실력이 많이 늘었겠군. 겁나는걸. 이러다가 후배에게 당한 최초의 팔미호가 등장하는 건 아니겠지?”

“아이, 설마요. 선배님이 그동안 수련하신 기간이 얼만데? 물론 아무도 본 여우들은 없지만, 궁금해서라도 도전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자네 뜻이 그러하다면 오늘 내 최대한 노력해봄세. 어디 자네 그동안 수련의 성과를 보여 보게나. 먼저 공격할 기회를 주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 녀석이 날아차기를 해왔다. 당연히 나는 가볍게 피했다.


“이런, 내가 너무 쉽게 피했나? 좀 맞아주는 시늉이라도 할 것을 나도 모르게 반사 신경이 너무 뛰어나서 그만 본능적으로 피하고 말았네. 그려.”


또 말이 끝나자마자 정권 찌르기, 장풍, 발차기, 박치기, 뭐 제가 할 수 있는 격투기술은 다 보인 것 같은데, 내가 너무 가볍게 피했다.


“후배님, 맨몸으로는 무리야. 무기를 사용하도록 하게. 내가 허용할 테니. 심판님들, 각자 편한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맨몸으로 대결하자면 종일 해도 서로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심판, 심사위원들이 의논한다. 잠시 후, 원하는 무기를 소지하고 대결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단 즉사할 수 있는 무기, 즉 총, 포, 독은 안 되고, 창과 검, 봉, 활 4가지 무기를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우선 칼을 들었다. 후배 놈은 활을 들었다. 칼보다 활이 시위를 당기는 시간이 필요한데, 뭘 모르는 모양이네. 그럼 시간이 나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지. 바로 칼로 몸통을 공격했다. 녀석은 활시위를 당기려던 순간이어서 미처 피하지 못했다. 치명상은 피했지만 큰 상처가 나고 출혈이 심해서 심판이 시합을 종료했다.


“그만, 전투 불가능. 신 팔미호님의 패배. 구 팔미호님, 첫 방어전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 아홉 분의 만장일치 평가로 팔미호끼리의 대결은 진시가 끝나기도 전에 끝났다.

그리고 신 팔미호는 여우병동으로 이송되었다.


이런, 내가 시합을 너무 빨리 종료시켰군. 관객들이 실망했겠어. 심사위원들 표정도 일그러졌군. 하지만 시합을 빨리 끝내야 내 기술이 유출이 안 되지. 속전속결로 끝낼 수밖에 없었어.


일그러진 심사위원과 관객들을 뒤로하고 나는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다.


여우병동


김진미



여기가 어디지? 아, 맞다. 나는 구 팔미호와 대결 중에 그만 칼을 맞고 정신을 잃었었지. 윽, 정말 수치스러워. 구미호님을 뵐 낯이 없어. 몸통 한가운데를 바로 베다니, 척추가 절단될 뻔했어. 너무 급작스러워서 제대로 피하질 못했어. 다행히 척추는 무사하지만, 내장이 손상되었군.


“신 팔미호야. 정신이 좀 드느냐?”

“아! 구미호님, 여기까지 직접 오시다니,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주셨는데, 제가 구미호님의 얼굴에 먹칠을 했어요. 제자라고 할 수도 없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니다.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 설마 너 첫 대결부터 이길 생각을 한 게냐?”

“아니, 뭐, 그렇다기... 보다는.... 네.... 사실.. 이기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처참하게 패할 줄은 몰랐어요. 한 시진도 못 싸우고 패하다니, 그것도 전투 불능 상태로. 정말 수치스러워요.”

“이런, 이런. 이러니 풋내기 소리를 듣는 게야. 그동안 전투를 피하기만 했어도 그래도 40,000살이나 먹은 팔미호다. 무공이 약하다고 생각한 네가 어리석은 거야. 나는 네가 이기리라 생각지 않았다. 다만 구 팔미호가 어느 정도의 실력이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야. 우리 심사위원들도 구 팔미호의 무공을 정말 오랜만에 본 것이거든. 역시 구 팔미호는 전투에 뛰어나고 머리도 좋아. 순간 판단력도 뛰어나. 그 점에 있어서는 넌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수준이야. 구 팔미호는 실전형 전투 여우야. 너는 이론형에 불과해. 구 팔미호는 용병으로 지하세계 전쟁에 참가한 적이 많아. 주로 지하세계에서 전투를 많이 했어. 천계에서 그의 활약은 미미하지만, 지하세계에서는 알아주는 용장이지.”

“그럴 수가? 전혀 몰랐어요. 지하세계 전투 때마다 가서 용병으로 싸우신 거예요?”

“매번은 아니더라도 실제 살육전에 참가한 횟수는 구 팔미호가 가장 많을 것이다. 팔미호가 된 지 몇만 년이 아니냐? 최장수 팔미호란다. 그러니 실전 전투경력은 역대 최다야. 천계에서는 싸울 일이 거의 없잖니? 승급시험에서 무예 시험은 그야말로 신사적으로 하는 것이고, 실전 전투와는 많이, 다르단다. 너조차도 실제 전쟁이나 실전 전투는 직접 하기는커녕, 본 적도 없잖니? 나는 구미호니까 팔미호 때, 실전 참여도 한 적이 있고, 구미호가 된 이후는 팔미호 녀석이 활약하는 전투를 거울로 계속 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력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하세계 이야기는 여우 세계에 발설하지 않아. 그것은 천계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도 팔미호가 되었으니, 이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구나. 실제로 너도 앞으로는 용병으로 요청을 받을 것이다. 팔미호 이상의 여우는 실전 참가할 일이 많아. 구미호가 되면 거울의 방을 관리하느라 실전에 나갈 시간이 별로 없단다. 즉 어둠의 세계에 관련된 일은 팔미호가 처리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나 보살들도 잘 알지 못한다. 최상급 신들만 아는 일이야. 너도 이제 현실을 직시할 때가 되었어. 팔미호는 전투 용병으로 살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어둠의 세계를 배우는 것이다. 그러니 구 팔미호가 비겁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너도 앞으로 그렇게 싸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다친다. 적어도 우리 백여우족은 어지간해서는 싸우다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또 모르지, 온몸이 다 부서지는 경우는 살리려고 해도 살릴 수조차 없지 않겠니? 그러니 실전 전투가 뭔지 오늘 잘 배웠다고 생각하도록 해라.”


“........”


“그럼, 팔미호야. 몸조리 잘하고, 퇴원하면 우리 집에 다시 오너라. 다른 데로 새지 말고. 알겠느냐?”

“네, 구미호님. 살펴 가십시오.”


구미호님께서 나가시고 나는 고요한 독방에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나는 구 팔미호님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제대로 실력을 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구미호님과의 대결을 몇만 년째 피하기만 하고 해서 실력이 없는 줄 알았다. 게다가 우리 백여우들은 어둠의 세계니 뭐니 그런 건 잘 모른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사실 천계에서는 전쟁, 전투는커녕 말다툼조차 하지 않는다. 평화 그 자체이다. 그러니 극락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아닌가? 나는 구 팔미호가 매일 지하 감방과 같은 곳에서 칩거 생활을 하는 은둔 외톨이,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여우가 다 그렇게 수군댔다. 구미호님께서는 혼자만 이 일을 알고 계셨다. 나도 이제 팔미호다. 앞으로 실전 전쟁과 전투에 나가게 될 거라 하셨다. 사실 오늘 나는 너무 무서웠다. 지금까지 승급시험에서 모든 무기사용을 다 거쳤지만, 내가 직접 당하고 보니 실전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뼈저리게 알겠다. 한낱 칼 공격 한 번에 이리 무너지다니. 그래서 팔미호구나...... 그래서 구미호구나....... 우리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구나. 정신 바짝 차려야지. 나는 그래도 구미호님의 직속 제자가 아닌가? 은둔형 외톨이 팔미호의 수준과 같거나 더 못할 순 없어. 그래도 구미호님의 제잔데, 이름이 아까워서라도 이대로 무너질 순 없어. 얼른 나아서 확실히 수련해야겠어. 구미호님께도 실전형으로 가르쳐달라고 해야겠어. 내 목숨이 달린 문제니까. 아니, 목숨보다 더 중요한 내 자존심과 체면이 달린 문제니까......


구미호의 방문


김진미



“구 팔미호 집에 있는가?”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구미호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직접 왕림하시고, 필요하시면 절 부르시지 않고요?”

“아니야. 바쁜 자네를 오라 가라 할 순 없어. 내가 일이 있으면, 내가 오는 게 맞지.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네, 들어오십시오. 제가 지하에 주로 있어서 집안이 엉망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런 건 상관없네. 아, 차도 필요 없어. 이미 마시고 왔어. 우선 좀 앉게.”

“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이리 직접 찾아오시고.”

“단도직입으로 말하겠네. 자네 대체 언제 내게 도전할 생각인가?”

“......!!”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린 게야?”

“네, 아직 수련이 부족하여.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준비만 할 텐가? 나도 이제 늙었어. 어서 후계가 안정되어야지. 이러다가 늙어 꼬부라지겠어. 그러면 대결이고 뭐고 하지도 못해요. 이제 막 팔미호가 된 녀석은 병동에 누워있고. 다 나으려면 몇 달은 걸릴 텐데. 자네, 아무리 그래도 막 풋내기 팔미호에게 그리 갑자기 공격하면 어떻게 하나? 좀 봐줘 가면서 시간도 좀 채우고 간도 보면서 실전훈련이라도 좀 시킨다는 생각으로 대결할 순 없었나? 이제 막 팔미호가 된 것 아닌가? 한 시진도 못 채우고 대결을 그리 끝내다니.”

“네, 저도 그리하려 했는데, 그만 욱하는 성질이 올라서 그만, 지하세계 전투로 착각했지 뭡니까? 저도 대운동장에서 승급시험 친 기억이 너무 오래되어, 몸에 익은 지하전투가 그대로 나와 버렸군요”

“알아. 이해해. 자네가 팔미호를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용병 전투술이 몸에 밴 탓이긴 해. 천계에서는 대결을 오랫동안 못 하였으니..... 그럴 만도 해. 그런데, 풋내기 녀석이 상심해서 누워있으니, 병원에 한번 가서 얼굴이라도 좀 보고 오는 게 어떤가? 기가 죽어서 퇴원도 못 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하하. 설마요. 얼마나 잘난 척 뻐기고 간 녀석인데, 이 정도 일에 기가 죽어서 못 일어날 녀석이면 팔미호의 자격도 없어요. 스스로 일어나라고 하세요. 내가 위문하지 않아야 독을 품고 더 빨리 퇴원하죠. 그 녀석도 이제 팔미호니까, 실전 전투형 여우가 되어야 해요. 곧 지하세계에서 부르겠죠? 아니 우리 둘 다 불릴지도 모르겠군요. 지하세계 양쪽 적국에서 우리 둘이 대결을 할 수도 있겠네요. 볼만하겠네요. 늘 전쟁 중인 지하세계들이 이제 팔미호가 둘인 걸 알았으니, 서로 초빙하려 할 테고, 그중에서 더 대우가 좋은 쪽을 내가 가면, 나머지 적국에서 풋내기 팔미호를 데려가겠군요. 그러면 지하세계의 전투는 우리 팔미호끼리의 전투가 되는 셈이네요. 저도 기대가 됩니다. 온몸이 떨리는군요. 이런 전율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저도 피가 뜨거운 놈이라서요. 저는 피를 부르는 실전이 좋아요. 다른 존재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겠지만, 구미호님은 이미 알고 계셨지요? 저도 아닌 척하느라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대결을 통해 다른 신들도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습니다만. 나도 이제 지하수련장에서 나와서 수련해도 될 것 같군요. 이미 연기라는 게 다 들통났으니까요. 저는 지하수련장에서 늘 지하세계와 교신을 하고 있거든요. 지금도 심상치 않아요. 곧 전쟁이 또 벌어질 거예요. 그러면 저는 또 내려갈 거고, 풋내기 녀석도 불릴 것 같으니, 빨리 퇴원하라고 하세요. 제가 더 기대가 큽니다. 하루빨리 재대결을 지하에서 실전으로 하고 싶군요. 이제 내숭 떨 것 없으니까. 이번 대결은 지하세계 전투니까 누가 죽어도 아무 말 못 하겠지요? 구미호님도 각오해두시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풋내기 녀석이 어찌 되든 말든 전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저는 이만, 할 말을 다 했으니까, 이제 돌아가시죠. 구미호님.”


이놈이 감히, 내게 협박을 해? 이제 본성을 다 드러내는구나. 신 팔미호를 없애버릴 작정이군. 그러고 나서 바로 내게 도전할 거야.


“알. 겠. 네. 자네 뜻은 충분히 알아들었어.”


.....................



“신 팔미호야.”

“네, 구미호님, 매일 병원에 오실 필요 없다는데, 또 오셨어요? 하실 일도 많으신데, 이러시면 제가 불편해서 더 낫지 않아요.”

“아니다. 몸은 좀 어떠냐? 아직 퇴원하려면 멀었니?”

“퇴원이요?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데요. 훈련은 무리라고.”

“그래? 실은 지하세계에서 곧 전쟁이 다시 벌어질 것 같아서 알려주러 왔다.”

“네? 지하세계에서 곧 전쟁이 날 것 같다고요? 아니, 그곳은 왜 맨날 전쟁인가요?”

“그러니까, 지옥이지. 지옥에서 전쟁 안 하면 그게 지옥이냐? 그곳은 맨날 서로 싸우는 게 그들의 본업인 것을. 다만 문제가 있는데, 지옥에서 전쟁, 전투가 벌어지면 더 힘이 세고 돈이 많은 곳에서 우리 팔미호를 용병으로 초빙을 한다. 당연히 구 팔미호는 전쟁에 선봉장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널 부를 거야.”

“아니? 뭐라고요? 저를 부른다고요?”

“그래, 맞아. 팔미호는 지하세계에 용병으로 가는 것이 수련 과정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퇴원해서 실전 연습을 해야 한다. 구 팔미호는 이번 지하전투에서 널 제대로 상대해 줄 작정이다. 아마 다음번엔 입원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구나. 그 녀석은 너의 피를 원하고 있어. 아직 아픈 너에게 이런 일로 부담을 주고 싶진 않지만, 시간이 별로 없구나. 너를 먼저 없애고 난 후, 바로 나에게 도전할 모양이다. 알겠니? 시간이 없다.”


이제 막 풋내기 팔미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지만, 구 팔미호는 너무 음흉하고, 잔인해서, 정말로 신 팔미호를 없애버리고 날 이길 작정이야. 그놈이 구미호가 되면, 우리 백여우족 전체를 지하세계로 끌고 내려가서, 후배 여우를 전부 전쟁터에서 자신의 영생을 위한 제물로 삼을 거야. 그리고 그놈은 영원토록 혼자 살아남을 작정인 거야. 끔찍하군.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놈이 그렇게 연기를 잘할 줄 몰랐어. 그리고 지하세계와 계속 통신하면서 수련하는 것도 다 그런 흑심이 있었던 거였어. 내 불찰이로고. 어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건가?


지하세계 전쟁


김진미



“여기는 지옥. 여기는 지옥, 팔미호님 수신하고 계십니까?”

“여기는 팔미호, 아니 구 팔미호. 당연히 수신하고 있지. 왜? 전쟁 났어?”

“네, 이제 전쟁을 하려고 해서요. 그래서 팔미호님을 선봉장으로 모시려고 연락드렸습니다.”

“그래? 기다리던 참이야. 몸이 근질근질해서 말이지. 이번엔 삼 개월 만이군. 내가 이 지하수련장에서 바로 지옥으로 내려가니까, 천계에서는 내가 만날 지하실에서 칩거하는 바퀴벌레인 줄 알더라고. 하하하. 내가 지하수련장에서 바로 지옥으로 늘 왔다 갔다 하는 건 아무도 모르더라고. 아예 관심이 없는 거겠지? 그래 지금 바로 내려가면 되나? 그런데, 자네들 신 팔미호가 나타난 것은 알고 있나?”

“네, 우리도 귀가 있으니까요. 그 녀석 팔미호님께서 본때를 보이셔서 아직 입원 중이라면서요? 그래서 지금 전쟁을 벌인 것 아닙니까? 상대편에서 불러도 제대로 싸우지 못하게 말이죠. 하하하.”

“그래, 알았네, 내 지금 바로 내려감세.”


..............


“신 팔미호님. 신 팔미호님. 들리십니까?”

“네, 신 팔미호입니다. 누구십니까?”

“여기는 지옥인데요.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집니다. 상대편에서 구 팔미호님을 벌써 선봉장에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불편하시더라도, 신 팔미호님께서 저희 쪽 선봉을 맡아 주셔야 합니다.”

“아니, 뭐라고요? 전쟁이 났다고요? 벌써요?”

“벌써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곳 지옥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늘 전쟁과 전투입니다. 구 팔미호님께서는 거의 지옥에서 사셨습니다. 구 팔미호님께선 천계에 계신 날이 며칠 안 됩니다. 아, 신 팔미호님과 대결하러 천계에 가시고, 그때 외엔 거의 몇만 년을 지옥에서 전투하시면서 사셨습니다. 모르셨습니까?”


몰랐다. 우리 천계에서는 구 팔미호가 지하수련장에서 칩거하는 은둔 외톨이라고 생각했지, 몇만 년 동안 지하세계에서 전쟁, 전투를 했을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구미호님도 그것은 모르셨던 것 같은데. 낭패다. 나는 아직 몸도 제대로 낫지 않았다.


“저기요. 제가 아직 퇴원도 못 해서요. 며칠만 시간을 주세요. 구미호님께 먼저 고해야 내려가든지 말든지 하죠? 최대한 빨리 갈 테니 시간을 좀 끌어 주세요.”

“하, 이거 참. 네, 뭐, 어찌 되었든 신 팔미호님이 없는 것보다는 계신 것이 낫겠다 싶어 연락 드린 겁니다. 지금까지는 팔미호님이 한 분뿐이셔서 우리 측에서는 항상 일방적으로 구 팔미호님께 당하기만 했거든요. 부디 빨리 쾌차하시고 내려오셔서 이번엔 우리가 좀 이길 수 있도록 힘써 주십시오. 기다릴 터이니 일각이라도 빨리 내려오십시오. 내려오시는 방법은 구미호님께서 아십니다. 우리 쪽 주소는 지옥 세계 3구역입니다. 구 팔미호님은 지옥 세계 1구역 선봉장이십니다. 우리는 3구역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


“구미호님, 저 신 팔미홉니다. 급한 일입니다.”

“응? 신 팔미호. 너 어제는 퇴원 못 한다고 하지 않았니?”

“그게 아니라 방금 지옥에서 연락이 왔어요. 전쟁 났다고, 3구역 선봉장이 되라고요.”

“이런, 생각보다 더 빨리 전쟁이 났구나. 그래. 구 팔미호는 벌써 내려갔느냐?”

“네, 지옥 1구역으로 벌써 가서 선봉장이라고 하네요. 저는 내려오라는데 구미호님께 고하고 가야 하고, 또 지옥으로 가는 방법도 모르고 해서 왔어요.”

“그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니까. 지옥으로 가려면 천계에서 가장 아래쪽으로 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구 팔미호의 지하수련장이 제일 지하 깊은 곳에 있구나. 거기는 워낙 깊어서 투시도 잘되지 않는 곳인데, 우리가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갈 순 없어. 천계에서 최고 지하 깊은 곳까지 가는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너 제대로 싸울 순 있느냐? 몸도 아직 다 낫지 않았다면서.”

“어쩔 수 없죠. 팔미호의 숙명이니까요. 거절할 수 없다면서요?”

“이런, 어쩌다가, 네가 이리 빨리 실전에 나가게 되었을까? 그것도 다친 상태에서. 정말이지, 널 이렇게 하려고 팔미호로 승급시킨 것은 아니었는데, 정말이지. 미안하구나.”

“아녜요. 구미호님 잘못이 아니에요. 저는 팔미호가 된 것이 정말이지 기뻤고, 자랑스러웠고, 그리고 구미호님 최측근에서 수제자가 된 것도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어요. 좀 더 곁에서 모시고 싶었는데, 그 시간이 너무 짧아서 아쉽네요. 어쨌든 천계 승강기로 가서 최고 지하까지 가서 3구역으로 가면 되는 거죠? 최대한 몸조심하고 싸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혹시 구미호님, 지하세계를 보실 수 있으시면 절 지켜봐 주세요. 제가 얼마나 용감하게 싸우는지 잘 보고 계세요.”

“지하세계를 보는 것은 인간세계보다 잘 보이지 않는단다. 그리고 전쟁, 전투 중에는 너무 개체가 많아서 널 찾기 힘들 거야. 내 눈에 잘 뜨이도록 네가 투구를 표시 나게 쓰는 것이 좋겠다. 내가 금방 찾을 수 있도록.”

“아? 그렇군요. 우리 백여우는 몸통이 희니까. 투구를 은빛 찬란한 걸 쓸까요?”

“그래. 은빛 투구 끝에는 피가 물들지 않는 여우 꼬리털로 장식을 해라. 그리고 잘 들어라. 지옥, 지하세계는 어두침침하고, 넌 처음이라 모르겠지만, 어둡고, 습하고, 시끄럽고, 불쾌한 냄새가 나고, 그리고 지하세계의 존재들은 외모도 흉측하단다. 너는 지금까지 아름답고 깨끗하고 상쾌한 것만 보다가 처음 가면 우선 세상이 너무 달라서 그것 적응하기도 쉽지 않을 거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바로 나가서 싸울 생각부터 하지 말고, 머리를 써라. 장군은 전략을 짜고, 지휘하는 것이지. 일개 장수처럼 직접 전투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설사 구 팔미호가 선봉에 서서 널 도발해서 싸우는 작전을 구사하더라도 절대 그 수법에 넘어가면 안 돼. 알겠느냐? 장군은 선봉에서 전투하는 것이 아니다. 장군 진영에서 작전을 짜고 부하 장수들에게 전투를 시키는 것이다. 그 정도는 너도 알 수 있겠지?”

“구 팔미호님은 선봉장으로 전투를 하신다는데요?”

“그놈은 살육을 즐기기 때문이다. 너는 그놈과는 달라. 너는 머리를 써야 한다. 알겠니? 네가 지금까지 승급시험을 치면서 배웠던 그 모든 과정을 잘 생각해 봐라. 몸을 쓰기 전에 먼저 머리를 쓰고, 그리고 이번에 팔미호 승급 때, 1교시, 시험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봐라. 마음을 텅 비우는 것 아니었니? 진정하고 마음을 비우다 보면 좋은 계책이 떠오를 것이니, 부디 대장군 진영에서 나갈 생각 말고 작전만 짜서 부하 장수들에게 전투를 맡겨라. 알겠느냐?”


전투 시작


김진미



여기는 지옥 3구역. 나는 신팔미호 지하전쟁 첫 참가. 신출내기 풋내기. 하긴 여기서도 날 그다지 기대하지는 않겠지? 병원에서 막 퇴원해서 나왔으니...... 지옥행 승강기를 타고 최저지역까지 와서 3구역 방향 출구로 나왔더니, 무장을 한 자들이 날 마중 나왔다. 과연, 외모가 흉측하구나. 지옥인 걸 바로 알겠네. 저 정도의 외모들이라면 내가 굳이 은빛 투구를 쓰지 않아도 눈에 띄겠어. 아니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니, 머리 꼭대기 정수리만 보이는 거니까. 여우 꼬리털 장식의 은 투구를 꼭 쓰고 다녀야겠다.


“신 팔미호님. 지옥 3구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네, 신 팔미호, 처음 뵙습니다. 지금 전투가 한창인가요? 절 군영 막사로 안내하시죠.”

“네, 지금 전투가 한창입니다. 과연 구 팔미호님, 그분이 대도를 한번 휘두르면 우리 군사 다섯은 바로 동강이 납니다. 무시무시한 괴력입니다. 천계에서는 한 번도 보이신 적이 없는 무공이시죠. 우리 지옥에서는 펄펄 나십니다. 천계에서는 꼼짝 않고 칩거하시는 줄 알겠지만, 이쪽 지옥에서는 구 팔미호님이 진짜 지옥의 사자로 보입니다. 그 어떤 지옥의 존재보다 더 잔인무도하십니다. 우선 높은 곳에서 망원경으로 구 팔미호님이 싸우시는 걸 한번 보시죠. 천계 쪽분들께서는 굉장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망원경을 들고 전투장면을 보았다. 과연. 붉은 갑옷에 붉은 투구. 그리고 투구 끝에는 붉은 여우털을 달았어. 우리는 백여우족인데, 염색까지 했구나. 대단해.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저 무시무시한 괴력. 나도 마음만 먹었으면 바로 죽일 수 있었겠구나. 그나마 심사위원들 눈치가 보여서 봐준 거였어. 소름 끼쳐. 구 팔미호는 이 지옥의 괴물이야. 정말이지. 이곳이 자기 집 같아. 천계에서는 의기소침해 보이더니 다 연기였어. 정말 무서운 자다. 이 사실을 아는 존재가 천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더 무섭다.


“네, 잘 봤습니다. 한칼에 다섯. 정말 무시무시한 괴력이군요. 저는 저렇게 못 합니다. 전 막사에서 작전을 구사할 테니 이곳 지형, 군대 진영, 군량미, 병력구성과 숫자 등을 알려주세요.”


나는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현재 군 상황을 전달받고 상황을 점검했다.


“그렇군요. 가장 북쪽에 있는 1구역은 배산임수 지형이고, 가장 남쪽에 있는 3구역은 북쪽을 제외한 세 방향이 높군요. 이 상태라면 북쪽만 막히면 갇혀서 몰살당하겠어요. 1구역은 북쪽만 산이고 동서로는 뚫려 있고, 남쪽으로는 3구역을 마주하고 있네요. 나가서 싸워야지. 갇히면 끝장입니다. 지형적으로도 유리하진 않군요.”

“하지만 동쪽의 2구역, 서쪽의 4구역에서 쳐들어오긴 어렵습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까요. 방어 면에서는 유리합니다. 단, 1구역에서 공격하면 몰살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늘 1구역이 우리를 먼저 공격합니다. 2구역과 4구역이 전투를 하면 바로 우리 지역을 공격하거든요.”

“아니, 그럼 지금 2구역과 4구역이 전투 중인 겁니까?”

“그렇죠. 2구역과 4구역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고, 그 틈을 타서 1구역이 바로 우리 3구역을 공격한 거죠. 지옥 세계의 존재들은 전쟁밖에 모릅니다. 순간 틈을 놓치지 않아요.”


아니, 뭐 이런 작자들이 있지? 여차하면 2구역, 4구역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려 했는데, 그것도 어렵겠어. 정말 지옥은 지옥이구나. 하루가 멀다하고 전쟁, 전투라니. 정말 끔찍하다. 이곳에 오래 있다가는 트라우마가 생기겠어. 나라도 이곳에 몇만 년씩 있다가는 살육기계가 될지도 모를 일이야. 제정신을 놓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 정도로 공격을 받았으면, 이 3구역, 전멸했을 텐데, 어째서 아직 군사들이 남아있는 건가요?”

“팔미호님은 천계에만 계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이곳 지옥은 해마다 죽은 인간들이 점점 더 많이 몰려 들어오기 때문에 항상 병력은 채워집니다. 제일 부족한 곳부터 숫자를 채워주니까, 이 지옥은 결코 전멸하거나 멸망하지 않아요. 지옥도 인구가 너무 늘면 안 되기 때문에 늘 전쟁으로 숫자를 조절하지요. 전쟁이 없으면, 이 지옥은 인구폭발로 서로를 잡아먹겠죠. 하긴, 그쪽이 더 지옥다운 건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3구역은 늘 전쟁, 전투에 져서 단 1구역처럼 오래오래 살지 못하니까, 수명이 짧고 전투경력이 부족한 편이죠. 그래서 더 빨리 죽고, 또 새로 계속 보충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죠. 반면에 구 팔미호가 이끄는 1구역은 최고 정예병만 있는 셈이죠.”


“네, 알겠습니다. 구 팔미호의 군대는 기마병이 대도를 휘두르는 선봉장과 함께 전진배치, 뒤로 창을 든 보병부대, 그리고 양쪽에는 전차부대를 배치했군요. 그리고 이쪽에서는 전진배치부대는 거대한 방패를 들고 뭉쳐서 방어만 하고 있네요. 이 상태로는 전멸당해요. 우선 4미터가 넘는 창을 방패부대 사이사이로 배치하세요. 즉 고슴도치 부대를 전면에 두고 방패부대들이 공격을 막아줘야 합니다. 그리고 전차부대에 대응할 궁수부대를 양측으로 배치하세요. 저쪽의 창수들은 이곳에서 사정거리를 계산해서 대포로 대응하기로 하죠. 아니, 뭐라고요? 대포가 없다고요? 이런, 그렇다면, 할 수 없죠. 기마병의 칼을 막을 것이 아니라, 말을 공격하세요. 말에서 떨어진 군사는 보병보다 못합니다. 궁수들도 전부 말을 노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뭐지? 저 반응은? 놀랍다는 얼굴인데? 이런 작전 처음 듣나? 아니면 지옥의 개체들은 머리가 나쁜 건가? 지금까지 아무런 전략도 없이 그냥 맨몸으로 나가서 도살장 쇠고기처럼 저며진 거야? 정말이지. 그게 더 놀랍다. 그리고 지옥에 오는 인간 영혼들이 이리 많을 줄 몰랐다. 지구인구가 늘수록 지옥 세계의 인구도 늘어나는 거구나.


일몰 경에 우리 측이 첫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첫 승리. 나도 기쁘고, 우리 진영은 난리가 났다. 매번 전투 때마다 살육을 당해서 경력 있는 군사가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늘 초병만 채워지니 당연한 결과다. 나는 소수 정예부대를 잘 꾸려나가야 한다. 나는 아직 이곳 막사에 들어온 뒤로 한순간도 못 쉬고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지금은 밤인데, 내일 아침이면 다시 공격을 개시하겠지? 이럴 것이 아니라, 야간 기습을 해야겠어. 저쪽은 지금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거야. 여기선 일몰 후에는 전투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하지만 소수가 다수를 이기려면 기습을 해야 해. 이곳 지옥은 낮에도 어두침침한데, 밤이 되니 완전 깜깜하구나. 적외선 렌즈 망원경으로 살펴봐야겠어. 아, 저쪽이 대장군 막사구나. 아예 눈에 띄게 휘황찬란하게 막사를 쳤네. 그 정도로 자신만만한 거야. 여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하니까. 그 틈을 노려야지.


“장군들, 다 모이시오. 긴급회의가 있소.”

“아니, 오늘 첫 승리를 거두어서 다들 신나게 마시고 취해 있는데요.”

“지금 그럴 때가 아니오. 어서 모이시오.”


야간 기습


김진미



“우리 쪽에서 특별 기습 궁수부대는 지금부터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야습할 거요. 화약과 불화살을 저쪽 진영에다 날릴 것이요. 지금까지 야습을 해 본 적이 없소?”

“그런 법이 있습니까? 지옥에서는 밤에는 전투하지 않습니다. 낮도 어두운데, 캄캄한 밤에 어떻게 공격을 합니까? 방어 역시 힘듭니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습 부대에게 이 안경을 쓰라고 하시오.”

“이게 뭡니까?”

“적외선 안경이오. 캄캄한 곳도 잘 볼 수 있소.”


젠장,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나. 여기는 정말 과학은커녕 아예, 공부하질 않는구나. 전투도 인간들 고대 전투 수준이야. 지능도 낮고, 그래서 우리 백여우 승급시험 때, 고대 무기로 시험을 보는 것이었구나.


“신기합니다. 확실히 잘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안경이 몇 개나 있습니까?”

“혹시나 몰라서 10개만 갖고 왔는데, 그래서 오늘은 정예 10명만 차출할까 하오. 최고로 발이 빠른 10명을 선발해 이곳으로 보내시오. 그리고 검은 옷을 입고 잠입할 거요.”

“그러면 팔미호님은 어디 계시고요?”

“나는 이곳에서 적외선 안경으로 지켜봐야지. 뭐요? 그 표정은? 내가 비겁하다는 건가? 이보시오. 나는 아직 구 팔미호에게 맞은 칼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자네들이 급히 불러서 왔지 않소?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그게 무슨 표정이란 말이오? 병사들을 여기로 집합시키시오. 지시할 것이 있으니.”


..........................



“아, 10명 다 모였군. 모두 다 이 안경을 써라. 그리고 밖을 한번 봐라. 어때? 잘 보이지?”

“네, 신기하게도 잘 보입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적군들이 모두 잠든 지금 몰래 가서 진영의 가장 휘황찬란한 막사에 이 폭탄을 던지고, 군량미 창고에 불을 지르고 오너라. 다른 건 안 해도 된다. 구 팔미호의 막사와 군량 창고 둘만 기억해. 알겠느냐? 그 두 가지만 하고 나면 저쪽은 정신이 나가서 불 끄기 바쁠 것이다. 너희들은 그때 잽싸게 돌아오는 거다. 알겠냐? 저들은 적외선 안경이 없어서 너희들은 잘 볼 수 없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침착하게 빠져나오면 된다.”


이놈들은 머리가 나빠서 더 시켜도 하지도 못해. 제발 그 두 가지라도 제대로 하길 바란다. 폭탄도 처음 보는 눈치야. 혹시나 해서 10개만 가져왔는데, 더 가져올 걸 그랬어.


“내가 여기서 보고 있을 테니까, 저쪽 대장군 막사는 상대진영의 가장 북쪽 산 아래에 있다. 거대한 막사에 금색으로 문양이 있으니까, 가면 더 잘 보일 것이다. 그리고 군량 창고는 돌로 지어져 있어. 불화살과 폭탄을 들고 갈 수 있을 만큼만 가져가라. 너무 무거워도 야습에 불리해. 주의사항은 물에 닿으면 안 되고, 심지에 불을 붙여서 심지가 다 타기 전에 목표지점에 던져야 한다. 알겠니? 너무 늦게 던져서 너희가 자폭하지 않도록 주의해라. 알았지? 욕심내지 말고 그 두 곳만 공격하면 된다. 군량 창고는 붉은 막사 바로 옆에 있다. 가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자, 출발.”


보낸 녀석들이 일을 제대로 처리했는지 계속 적외선 망원경으로 보고 있다. 아, 저기에 화염이 일었다. 폭탄이 터졌구나. 엉뚱한 곳을 노린 것은 아니겠지? 설마.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아. 불이 나서 난리구나. 자다가 봉창이라고, 불이 났으니, 불 끄기 바쁘겠지. 어디 부디 무사히 탈출해야 할 텐데.... 발은 빠르다고 하니, 설마 잘 도망치겠지?


..............



“신 팔미호님. 저희 임무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러냐? 어디 보자. 10명 다 왔구나.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폭탄은 제대로 투하했겠지?”

“네, 붉은 막사와 식량창고 두 곳에 폭탄을 각각 5개 다 던졌습니다. 그리고 불화살을 도망치면서 막사 전체에 날리고 왔어요. 그놈들 불 끄느라 정신없는 통에 우리는 유유히 도망 왔지요. 이렇게 신나는 모험은 처음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작전이 있다니. 정말 즐겁습니다.”

“전쟁이 즐겁다니, 너희들이 이상한 거다. 하지만 하루빨리 종결을 지어야 나도 다시 천계로 돌아갈 것이 아니냐? 그래. 혹시 구 팔미호님은 못 봤느냐?”

“불화살 날리고 도망치기 바빠서 뵙지 못했는데요. 아마 그분도 불 끄시느라 바쁘시겠죠?”


“그래, 날이 밝으면 동태가 파악되겠지. 그래, 너희들은 이제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아침 전투엔 참가하지 않아도 좋다.”


이곳은 정말이지,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고, 지구 고대시절보다도 더 미개한 곳이구나. 불편해서 적응하기 힘들어. 구 팔미호님은 이런 곳에서 몇만 년이나 있었단 말인가? 대단한 양반일세. 난 불편하고, 어둡고, 냄새나고, 하여튼 적응하기 힘들어. 빨리 천계로 가고 싶어.


두 번째 전투


김진미



날이 밝았다. 1구역을 보니 밤새 이놈들이 정말 불화살을 얼마나 날렸는지 알겠다. 거의 모든 막사가 다 탔구나. 화상 입은 놈들도 많아. 정말이지. 처음 당한 일이라 타격이 크겠군. 그런데, 구 팔미호님은 어디 계시지? 뭐 하시는 거야 대체?


“야,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신 팔미호 자식아!!!”


아. 저기 계시네, 멀쩡하신데, 하긴 우리 백여우족들이 그리 쉽게 화상을 입진 않지. 보호 결계가 작동할 테니까.


“네, 선배님, 저 여기 있어요. 그렇게 크게 고함치지 않아도 잘 들려요. 무슨 일이세요?”

“이 능지처참을 해도 분이 안 풀릴 자식 같으니라고. 너 내 막사에 폭탄을 던져? 너 미친 거 아니냐?”

“선배님, 그 정도로 부상당하지 않으시잖아요? 단지 이 전투를 좀 빨리 끝내고 싶어서요. 제가 하루도 여기 더 있기 싫어서.”

“그래도 저놈이 끝까지......너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 당장 튀어나오지 못해?”

“싫은데요. 저번에 선배님께 당한 상처가 아직도 낫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전투에 참가 안. 할. 거. 예. 요. 메롱.”

“저. 저. 저. 미친놈이. 감히 내게 혀를 내밀어? 너 죽고 싶냐?”

“아니요. 저는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구미호님을 모시고 수련하고 나중에 차기 구미호가 될 거라서 선배님께 당할 순 없어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요.”


보아하니 선배님은 이 지옥에서 너무 오래 계셔서 머리가 나빠지셨어, 이 지옥 수준으로 떨어지신 것 같다. 살육 전투는 능하실지 몰라도 머리는 일미호보다도 더 나쁜 거 같아. 하긴 이런 곳에서 계속 오래 있다가는 나도 바보가 될 것 같아. 아니면 살육 기계가 되거나. 빨리 끝내고 천계로 돌아가야지. 아. 구미호님이 보고 싶다.


“자자. 장군들, 잘 들으시오. 오늘은 확실히 이번 전투를 끝낼까 하오. 1구역 군사들 대부분은 밤새 화상을 입고, 불을 끄느라 지금 기진맥진하오. 이참에 바로 공격을 해서 숨통을 끊어야 하오. 단, 구 팔미호님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시오.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서 오늘은 한칼에 다섯이 아니라 열도 벨 거요. 궁수들은 전부 기마병의 말을 노리시오. 전차부대엔 돌팔매로 바퀴를 노리시오. 그러면 전차속도에 병사들이 다 땅바닥으로 쓰러질 거요. 그러면 그때 보병들이 마음껏 저며주면 되는 거요. 말을 잃은 기마병들도 마찬가지고. 보아하니 딱히 진법을 쓸 필요도 없을 것 같소. 제갈량 수준도 필요치가 않구려. 자. 시간 끌지 말고 바로 진격하시오.”


내 말을 잘 들은 병사들은 오늘 확실히 전투를 아니, 전쟁을 끝내버렸다. 대승, 1구역은 거의 전멸이다. 보아하니 팔미호 선배는 보이지도 않는다. 천계로 먼저 올라가셨나 보다.

단 이틀 만에, 별로 어렵지도 않게 전투, 아니 전쟁을 끝내버렸다. 지금 1구역에는 병사가 거의 남지 않아서 새로 지옥에 병사들이 채워질 때까지는 아마도 전쟁을 시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나는 좀 쉴 수 있겠네.


“3구역 장군들, 이하 병사들 여러분, 여러분은 처음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1구역이 생초보 군사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베테랑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생각을 하고, 전략이라는 것을 짜는 훈련을 하십시오. 당분간은 전쟁이 날 것 같지 않으니, 이만 나는 올라가겠습니다. 천계에서 계속 수련하고 몸도 추스르고 해야죠. 다행히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니, 나도 이제 천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네요. 그리고 구미호님께 어서 이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여러분 한동안 절 찾지 말아 주세요. 알아서 해결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절 찾으세요. 그럼, 이만.”


금의환향


김진미



“구미호님, 저 돌아왔어요.”

“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귀여운 팔미호 왔구나.”

“구미호님, 이틀 만에 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왔어요. 대승이에요. 당분간은 저 내려갈 일 없어요. 1구역이 거의 전멸이라 새로 지옥에 인간들이 몰려들기 전에는 전쟁 못 하거든요.”

“그래. 구 팔미호가 올라온 걸 봤어. 침통한 표정이던데, 그 녀석.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쟁에 져서 상심이 큰 것 같아. 아닌 게 아니라, 여우협회로 바로 달려갔어. 너에게 결투 신청을 했다. 이제 너에게 협회에서 전화 및 공증문서가 갈 것이다. 지옥에서 한판 붙고 싶었는데 네가 대결을 피해서 이를 갈고 있다고 하더구나. 여기 대운동장에서 재대결을 하려고 벼르고 있다. 이 대결은 너도 거절하지 못하니까, 그런데 넌 100일 이내에 날짜를 잡아서 통고해야지. 언제 할 거니? 역시 100일 뒤에?”

“그럼요.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죠. 저도 수련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아직 상처도 다 낫지 않았고요.”

“그래라. 내가 협회에 전달해 주마. 너는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부터 함께 수련하자꾸나.”


“따르릉”


“네, 신 팔미호, 대결접수 전달받았고, 100일 후, 대 운동장 진시에 재대결 수락합니다.”


겨우 구미호님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리고 오늘 하루 겨우 휴가받았는데, 쉴 틈이 없다. 협회에 답변하고 나니, 칠미호 이하 여우들이 죄다 몰려들어서 전쟁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음. 지옥 세계 이야기는 발설금지인데, 할 수 없지.


“그냥 나는 막사에서만 있었고, 장군들 이하 군사들에게 명령만 내렸어. 그곳 이야기는 할 수 없어. 그게 규칙이야. 궁금하면 너희들이 팔미호가 되어서 직접 내려가서 확인해라. 알겠지? 너희들이 팔미호가 되면 다 알게 돼. 하지만 천계보다 좋은 곳은 없어. 안 가는 게 더 좋아. 나는 이곳에 돌아와서 정말 기뻐. 구미호님과 다시 수련하게 되어 더 기뻐.”

“하지만 신 팔미호님. 구 팔미호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셔서 신 팔미호님께 재대결 신청을 했어요. 이번에는 도망가실 수 없잖아요? 저번처럼 또 그냥 당하실까 걱정돼요. 이번엔 무기를 안 쓰고 하던가, 아니면 보호 갑옷이라도 착용하고 대결해야 한다고 말씀드리세요. 동급대결에서 사상자가 나오면 안 되잖아요?”

“글쎄. 그것도 심사위원들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구 팔미호님은 실전 전투는 강하시지만.......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얘들아, 나 오늘 좀 쉬고, 대결 준비해야 하니까 이만 다들 돌아가.”



팔미호 재대결


김진미



“이 망할 놈의 새파란 풋내기 팔미호야. 비겁하게 도망 다니지 말고 이번에 제대로 승부를 가르자. 여기서는 도망칠 수 없다.”

“신 팔미호, 질문 있습니다. 심사위원님 이하, 심판님. 이번에도 무기를 사용하나요?”


심사위원 신들과 심판이 또, 회의한다.


“구식 무기사용을 허가한다. 단 보호 갑옷을 입고 하라. 그리고 술법사용을 허가한다. 둔갑술 및 기타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단순 격투 대결이 아니다. 각자 가진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하도록 하라. 진정한 실력자에게 승리를 내릴 것이다.”


“대결 시작!”


나, 신 팔미호, 안개를 불렀다. 그리고 투명 둔갑술을 썼다. 그리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구 팔미호를 지켜본다. 적외선 안경을 썼다. 나는 구 팔미호가 잘 보인다.


“아니, 갑자기 안개를 부르다니, 역시 비겁한 놈이야. 이런 이 자식 어디에 숨었지?”


나는 전에 선택했다가 제대로 쏴보지도 못했던 큰 활을 들고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숨도 쉬지 않고, 활을 쐈다.


“퍽.”


이마 한가운데 명중이다. 아무리 큰 칼을 들고 있으면 뭘 해. 앞이 보이지 않으면 휘두르지도 못하는데, 역시 구 팔미호는 지옥에 오래 있어서 바보가 되었어.


“그만, 대결 끝. 구 팔미호 전투 불능. 이번엔 신 팔미호님이 방어에 성공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구 팔미호는 전에 내가 있던 여우병동으로 실려 갔다. 아홉 분의 심사위원들은 이번엔 한 시진은커녕 한 각도 되지 않은 시간에 끝나버린 대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시더니, 다들 웃으면서 일어나셨다. 거기서 구미호님께서 말씀하신다.


“팔미호야. 승리를 축하한다. 이제 다시 수련하러 가자꾸나. 오늘 너 힘을 하나도 쓰지 않았으니 오늘 수련은 평소의 두 배로 한다. 알았지?”

최고산 파괴


김진미



천계가 한동안 조용하다 했는데, 구 팔미호가 미쳐 날뛰어서 천계에 큰일이 났다. 구 팔미호는 이마 상처가 낫자마자 여우병동에서 지옥으로 내려가서 지옥의 모든 군대를 다 불러와서 천계 최고산을 파괴했다. 큰일이다. 우리 백여우는 최고산에서 백 년에 한 마리씩 태어난다. 저번에 화과산 원숭이들을 더 이상 태어나지 않도록 화과산을 파괴했는데, 그걸 유심히 봤었던 모양이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우리 백여우족은 이제 후세가 끊겼다. 모두가 잠든 사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에 모두 혼비백산이 되어 소음의 근원지를 찾았을 때는 이미 최고산이 다 무너져 내린 뒤였다. 그래놓고선 구 팔미호와 그의 지옥 군대는 바람처럼 지옥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다들 넋이 나가서 무너진 산더미를 바라보았다. 구미호님은 정말 얼이 빠지셨다. 후계를 이어야 하는 사명, 백여우족을 계속 발전, 유지해야 하는 사명,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다 무너지고 만 것이다. 나, 신 팔미호도 정신이 없는데, 칠미호 이하의 백여우들은 모두 슬피 울고 있었다. 아기 여우들은 너무 놀라서 경기를 일으키고 울부짖었다. 이제 더 이상의 백여우는 태어나지 못한다. 지금 있는 여우들이 전부이다. 구미호님은 침통하게 입을 여셨다.


“이제 우리 백여우족은 절손이 되었다. 더 이상 태어나지 못한다. 이 모든 책임은 최고산과 백여우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나에게 있다. 하지만 구 팔미호는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지옥의 군대를 천계로 끌고 온 것조차도 대역죄이다. 구 팔미호는 벌을 받아야 한다. 백여우족을 후손을 끊은 죄값을 치러야 한다. 구 팔미호는 이제 이곳에 다시는 올라올 수 없다. 구 팔미호를 백여우족에서 파문한다. 팔미호의 칭호도 부를 수 없다. 그놈은 팔미호가 아닌 이상 신력도 가지질 못한다. 그놈도 그 정도는 예상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부터 대역 죄인의 거처를 수색하고 파괴한다.”


우리 백여우들은 구 팔미호, 아니 대역 죄인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지상의 집은 단출한데, 지하로 내려가니 엄청난 공간의 지하구역이 있고, 거기서 바로 지옥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었다. 천계 승강기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천계 승강기는 천계의 신들과 구미호, 팔미호만 이용할 수 있는 천계 전용 승강기이다. 구미호님은 이 집 지하 출입구를 파괴하셨다. 다시는 이곳에서 지옥 군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옥 군대는 이 통로를 통해 왔다 간 것이다. 대역 죄인은 이런 일을 마치 예상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엄청난 지하통로를 만들어두었다. 우리는 경악했다. 우리는 대역 죄인의 지하실과 통로를 모두 파괴하고, 지상의 집도 없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역 죄인의 터’라는 푯말을 붙였다. 그놈은 지옥에서 아무런 신력도 없는 무능한 여우로 남아있을 것이다. 구미호님은 우리보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여우협회로 혼자 가셨다.


“여우협회 여러분, 지옥으로 내 전언을 보내 주시오. 나 구미호가 지옥 전 지역에 할 말이 있소.”

“알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지옥 전 구역에 실시간으로 생방송 하겠습니다.”


“나는 구미호다. 지옥은 내 말을 들어라.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너희들은 천계에 쳐들어와서 최고산을 파괴하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다.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 너희들이 보호하고 있는 대역 죄인을 너희가 직접 심판하여 없애든지 그렇지 못하면 내가 내려가서 처단하겠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 바로 대답해주기 바란다. 지금의 그 대역 죄인은 신력을 전부 봉인 당해 아무런 능력도 없다. 그냥 무능한 늙은 여우일 뿐이다. 너희 힘으로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쯤 꼬리도 다 사라지고 하나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백여우족의 상징인 은빛 털도 변색 되었을 것이다. 하찮은 붉은 여우일 뿐이다. 너희가 처단하지 않으면 내가 내려가서 그 대역죄인 뿐 아니라 지옥도 전부 파괴할 것이다.”


“구미호님, 지옥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구미호님, 늙고 힘없는 붉은 여우 한 마리를 처단하러 번거롭게 내려오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이미 대역 죄인의 목을 베었습니다. 목은 상자에 담아서 천계 승강기 입구에 두었으니, 찾아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 지옥에서는 다시는 백여우족에게 용병요청을 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천계에는 절대 피해가 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천계와 지옥은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 왕래를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구미호님께서 이곳에 오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마음대로 하소서. 저희 모두는 절대 천계 일에 일절 간여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대역 죄인의 목으로 노여움을 푸시고 저희를 용서하소서.”


“그것으로 용서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만,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너희들이 그놈의 잔꾀에 넘어갔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나도 그놈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책임도 있으니 더 이상은 책임을 묻지 않겠다. 앞으로는 천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여라. 나도 지하세계엔 간섭하지 않겠다.”


백여우족 회의


김진미



우리 백여우족 전체가 회의장에 모였다. 아기 여우들까지 전부 소집된 것은 천계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회의장에는 천계의 고급신들도 참석하셨다. 사태가 심각하니 그럴 만도 하다. 구미호님께서 먼저 말씀하셨다.


“여러분, 우리 백여우족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백여우족의 절손문제를 의논하고 앞으로 백여우족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해 계급에 상관없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누구라도 먼저 발언해도 좋습니다. 백여우족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신 팔미호, 아니 팔미호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팔미호,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느냐?”

“구미호님, 이제 우리 백여우족은 더 이상의 후손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미호 승급 대결에서 전 구미호가 사망하는 법을 파기하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팔미호군?”

“그러니까, 저는 구미호님께 승급 대결신청을 영원히 하지 않을 겁니다. 구미호님은 영원불멸로 살아남으시고, 팔미호 이하 모든 여우도 계속 살아남는 것이죠. 팔미호까지는 승급해도 구미호는 더 이상 뽑을 필요가 없습니다. 구미호님은 영원무궁 구미호님으로 남으시면 됩니다. 여러분, 내 의견이 어떻습니까?”

“옳소. 찬성합니다. 구미호님께서 계속 우리를 지키고 다스리시면 됩니다. 역대 그 어떤 구미호님도 구미호님만큼 경력과 신력이 출중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그 또한 다 이렇게 되라고 구미호님께서 지금까지 구미호님으로 오래오래 남으신 겁니다.”

“나 혼자 구미호로 영생하라고? 그러면 너희들은 구미호가 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단 말이냐? 그래서 무슨 발전이 있겠느냐?”

“발전이고 뭐고 구미호가 되면 전 구미호가 사망하는데, 순서대로 하나씩 백여우족이 사망해도 좋단 말씀이십니까? 그게 무슨 백여우족의 발전입니까? 백여우족의 멸망이지. 앞으로 계속 승급시험을 봐서 모든 여우가 팔미호가 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백여우족의 능력은 발전하고 숫자도 줄지 않겠죠.”

“그렇게 되면 나 구미호 하나에 전체 여우들이 다 팔미호가 되는 날이 오겠구나. 그것이 너희들이 바라는 일이냐?”

“네, 저희도 죽고 싶지 않으니까요. 영원히 팔미호로 남으면 됩니다. 구미호님은 저희를 그냥 지키시면 되고요. 물론 거울의 방은 당신 혼자 영원히 관리하게 되시겠죠. 그것이 가장 번거로운 일이 될 수 있겠네요. 저희가 그 문제만큼은 도와드릴 수 없으니까요. 그게 싫으시면 실력 있는 팔미호도 거울 속으로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던가요? 어떠세요? 구미호님, 좋은 생각이죠?”


종결


김진미



최고산이 무너진 지 어느새 50,000년이 지났다. 그동안 구미호님은 100,000살이 넘으셨다. 우리의 의견대로 구미호님은 불로불사로 영생하는 유일한 구미호님으로 남으셨다. 그리고 우리 백여우족 전체는 전부 팔미호가 되었다. 우리 백여우족은 그 어떤 군대가 쳐들어와도 일당백이 아닌 일당백만의 능력을 갖춘 신수(神獸)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우리 팔미호 전체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거울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그 일을 축하하는 잔칫날이다.


“와하하하하. 구미호님, 드디어 우리 팔미호 전부가 다 거울 속으로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네요. 이제 구미호님도 혼자서 고생하지 않으셔도 되니 얼마나 좋으세요? 우리가 구미호님께 가장 부러웠던 일이 바로 거울 속 여행이었는데요. 그 때문에 다 구미호가 되고 싶었던 것이죠. 근데 이제 우리가 다 거울 속 여행을 자유자재로 하게 되었으니, 딱히 구미호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어요. 다들 소원 성취한 거죠. 구미호님도 혼자 고생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에요. 우리 전 백여우의 거울 속 여행을 기념하여 오늘을 특별히 기념일로 삼으시죠. 어때요? 구미호님.”


“그렇구나. 오늘 참 좋은 날이구나. 오늘을 모든 백여우의 시공간 이동 여행을 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삼도록 하자. 그리고 해마다 오늘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도록 하자. 너희들 모두가 자랑스럽구나. 그리고 날 죽지 않도록 배려해 준 것도 정말 고맙다.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영생불멸의 신수로 남자꾸나. 그리고 거울 속 여행을 하게 된 것은 허가하지만, 너무 인간사에 자주 간여하는 것은 조심해야 해. 알겠니?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인간들이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동물이거든.”


“알겠습니다. 말씀은 항상 그렇게 하시면서 저희보다도 더 인간을 애지중지하시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제 씨알도 먹히지 않아요. 자꾸 그러시면 노망난 할망구라고 놀릴 거예요. 아시겠어요? 할머니!!!”

“할머니? 그 말 참 오랜만에 듣는구나. 아주 오래전에 들은 후로 처음이야. 그래. 그 말이 더 듣기 좋구나. 이제 구미호님이라 부르지 말고 나를 할머니라고 부르렴. 팔미호들아.”

“네, 할머니, 오래오래 영원무궁토록 우리 할머니가 되어주세요.”

“그럼, 오늘은 특별히 우리 팔미호들이 전부 거울 속으로 들어갈 테니 거울의 방에서 잘 지켜보고 계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저희가 할머니를 찾을 테니까요. 아셨죠? 할머니? 잘 보고 계세요.”

“한꺼번에 육십 개도 넘는 거울을 다 쳐다보라고? 이놈들이 정말, 날 얼마나 더 고생시킬 작정이냐? 이제 그 정도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나는 좀 쉬련다. 알겠니? 너희들끼리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의논해가면서 하도록 해. 이제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 자 모두 출발!!!”

(終)



1) 대위법 악곡 양식의 하나. 푸가는 하나의 주제(때로는 2개 혹은 3개의 주제. 이 경우에는 2중푸가 혹은 3중푸가라고 한다)가 각 성부 혹은 각 악기에 장기적이며 규율적인 모방반복을 행하면서 특정된 조적(調的) 법칙을 지켜서 이루어지는 악곡이다. 3성 푸가는 선율이 3개, 4성 푸가는 선율이 4개. 5성푸가는 선율이 5개이다.